고구려의 건국         작성일자;2020.05.13.수요일,맑음

 

BC 37년,

부여의 왕자였던 주몽 이 부여를 탈출해 졸본(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환런)에서

고구려를 세웠다.

전설에 따르면 주몽은 ‘물의 신’ 하백의 딸 유화와 천제(하늘의 신) 해모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해모수가 유화를 떠나 돌아오지 않자 유화는 부모에게 쫓겨나

우발수에서 살았다.

그때 부여의 금와왕이 유화를 데려다 가뒀는데

유화는 그 곳에서 빛을 받고 임신해 알을 낳았다.

그 알을 깨고 태어난 주몽은 활을 잘 쏘고 영특해

대소를 비롯한 부여 일곱 왕자의 질투를 받았다.

주몽이 유화의 뜻에 따라 부여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가자 대소가 추격해 왔다.

비류수(지금의 훈허강)에 이르러

“나는 하늘 신과 물의 신의 자손 주몽이다!”라고 외치니

자라와 물고기 떼가 올라와 다리를 만들어 주어 추격을 따돌릴 수 있었다.

주몽은 고구려를 세운 뒤 비류국 송양왕의 항복을 받았다.

 

고구려 건국 설화

주몽의 아버지는 천제인 해모수였는데,

성북 청하에서 놀고 있는 하백의 딸 유화와 인연을 맺고 하늘로 돌아간다.

이 일로 하여 유화는 하백에게 쫓겨나 있다가 금와왕에게 구출되고,

후에 해에 잉태되어 1개의 알을 낳는데 이것이 주몽이다.

알은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마구간과 깊은 산에 버려지지만

짐승들의 보호를 받고 태어나 어머니에게서 양육 된다.

어려서부터 활을 잘 쏘아 주몽이라 불렸는데,

부여 왕의 태자들이 그의 능력을 시기하여 죽이려 하자,

유화는 주몽에게 남쪽으로 가 뜻있는 일을 하라고 한다.

주몽은 계략을 써서 왕실의 준마를 얻고,

세 현우가 함께 길을 떠나 엄체에 이르렀을 때,

그를 도우러 나타난 물고기와 자라들이 만든 다리를 밟고 강을 건너 추격병을 피한다.

주몽은 유화가 보낸 보리씨를 비둘기로부터 받고,

남쪽으로 내려와 경개가 좋은 곳에 왕도를 정하고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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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건국       작성일자; 2020.04.22.수요일,맑음

 

신라는 경주에서 성읍 국가로 시작하여

BC 57년 6개 씨족 집단의 정치 연합체로 건국되었으며,

전설에 의하면 박혁거세가 최초의 지배자로 추대되었다고 한다.

각 성읍 국가들은 독자적으로 운영되고

중국 군현 당국과의 정치적 교섭에 대한 권한을 행사하는데,

3세기말경까지는 지속되었으며,

4세기에 들어와 고구려가 낙랑·대방 2군을 멸망시키면서

한반도 중부 지역으로 세력을 

뻗치게 됨에 따라 이에 위협을 느낀 마한의 여러 나라가

백제를 중심으로 하여 활발하게 통합 운동을 벌이게 된다.

신라는 소백 산맥 너머의 이러한 정세 변화에 적극 대응하면서

선두에 서서 진한 사회를 통합해나갔다.

건국신화로 사로국에는 옛날에 여섯 개의 촌이 있었는데,

어느 해 3월 초하루에 6촌의 장들이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 언덕 위에 모여서 의논하였다.

“우리들이 위로 임금이 없어서 백성들을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제멋대로 하고 있으니,

덕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을 삼아서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이에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나정 우물가에 이상한 기운이 번갯불같이 땅을 비추고 있는데,

흰말 한 마리가 땅에 꿇어 앉아 절하는 모습이었다.

그 곳을 찾아가 살펴보니 자줏빛 알 한 개가 있는데 말은 사람을 보더니

큰 소리로 울고 하늘로 올라갔다.

알을 깨고 보니 한 남자 아이가 있었는데, 모양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놀랍고 이상하여 동천에 목욕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아주 밝았다.

이에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에서 이름을 혁거세라 하고,

알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박이라 하였다.

6촌의 장들이 아이를 데려다 길러 13세에 왕이 되니,

나라 이름을 ‘서라벌’ 또는 ‘사로’라 했다.

 

환단고기 삼성기에

고두막한이 부여의 옛 서울을 점령하고 동명이라 칭하고

신라의 옛땅이다 라고 나온다.

'신라의 왕의 이름을 칸,간,한이라 불려진것과 북부여의 유민들이

신라로 이동한 것이다'

'북부여의 나라이름은 해모수단군시절에

단군조선의 진한 조선으로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단군 이후에 오가의 공화정을

종결시키고 북부여로 나라이름을 바꾼데서 유래하다.'

위만왕조가 옛조선의 유민들에게 망하고 4군이 설치되고 한이 쳐들어오는데...

고두막한이 의병을 이르켜 나라를 세우면서 북부여를 계승하지만

해모수의 후손인 고우루 단군을 압박하여 죽게 만들고

아우인 해부루는 나라를 동쪽으로 옮기게 되는데 그것이 동부여이다.

고두막한 이후로 북부여는 쇠약하기 시작한다.

나라가 북부여,동부여 두개로 쪼개진 결과이다.

한반도로 많은 유민오게 된 이유는

고열가단군때와 해모수단군이후로 대거 이주를 하고

위만정권으로 대거 이주하고 고두막한이후로 이주한다.

신라가 세워진 시점을 북부여가 세력이 약해지고

마한 조선은 맹남 즉위 이후로 나라가 유명유실하게 되어 사라진다.

이때 상장군 탁이 한반도로 가서 삼한을 건설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삼한은 상장군 탁이 세운것이고

단군 조선을 3개의 조선으로 나누어 다스리는데

마한조선,번한조선,진한 조선이다.

삼한을 남삼한으로 보기 때문에

동양에서 기록된 고서를 잘못 해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라인의 역사책이나 만주족(여진족)이 쓴 역사책에는

'신라의 옛서울은 지금의 만주 길림(吉林)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에 '선시조선유민'이라

한대목과 단군조선의 전삼한 시대가 무너진후

진조선 지역의 만주에 살던 유민들이 후삼한의 진한땅,

경주지방으로 내려 왔다는 두가지 사실로 미루어 볼때,

사로국 신라의 원 거주지는 부여의 옛 서울인 길림지방이었음을 알수가 있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북부여 황실의 혈통이라는 사실이

태백일사 고구려 본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고려때 이승휴는 제왕운기에서

시라(신라),구례(고구려),남북옥저,동북부여,예,맥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다"라고 하였다

'사로의 시왕은 선도산의 성모의 아들이다.

북부여의 황의 딸 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아이를 뱄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눈수로부터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고

다시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에 와 닿았다.

그때에 소벌도리라는자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서 집에 데려다 길렀다.

진한6부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여 거세간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에 세우고

나라를 진한으로 하고 또한 사로라고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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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마지막 단계는

위만조선으로 보다 발달된 철기문화를 가지고 이주하여

토착 고조선인들과 연합하여 국가를 건설했다.

위만조선은 진번·임둔 등의 주변 세력들을 누르고

한반도 중부 이남의 여러 세력 집단들과 중국 한과의 사이에서

중계 무역으로  부를 취했다.


BC 109년 한무제는 수륙양면으로 대군을 파견하여 위만 조선을 공격했고

수개월간의 치열한 접전 끝에

BC108년, 위만 조선은 멸망하고 고조선 시대는 종지부를 찍었다.

멸망의 주된 이유는 지도층이 분열로

우거가 주화파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다.

전한 무제는 BC108년,

위만 조선을 멸망시킨 후 전한 무제는

위만  조선의 땅에 그 영토를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낙랑군,진번군,임둔군,현도군 등 한사군을 설치한다.

BC107년에 다시 예맥  지방에   현도군을 설치하였다.

BC82년에 이르러  진번,임둔  양군을 폐지하여

진번군을  낙랑군에 임군군을  임둔군을 현도군에  각각 병합 시켰으며,

BC75년에는 토착민의 반발로 현도군이 요동 방면으로 옮겨졌다.

이때 현도군에 통합되었던 임둔군의 현들은

낙랑군에 편입되어 최종적으로 구 위만조선의 영역에는 낙랑군이 남게 되었다.

낙랑군은 진번·임둔의 영역에 각각 남부도위와 동부도위를 설치하여 관리하였다.

신나라 왕망 시기에는 태수의 관직을 태윤으로 바꾸었는데,

평양 인근에서‘낙랑태윤장’이라 찍힌 봉니가 발굴되었다.

신나라 말기의 혼란기에 낙랑군에는 반란이 일어나

낙랑 사람 왕조가 스스로 대장군 낙랑 태수라고 칭하였다.

후한 광무제는는 서기 30년에 왕준(王遵)을 보내서 낙랑군을 다시 정복하고

패수 이남을 영토로 확정하였다.

한편 현도군은 후한 초기에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다시 무순 지방으로 이치되었다.

2세기 후반,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요동군을 중심으로 공손탁이 독립적인 세력을 갖추어

낙랑 및 현도까지 지배하였다.

이 시기 낙랑군은 고구려 및 한이 강성하여 주변 소국들을  제압하지 못하고

다수의 민호가 삼한으로 유망하기도 하였다.

공손강은 3세기 초 낙랑군의 남쪽 현을 분리하여 대방군을 설치하였으며

공손모·장창(張敞) 등을 파견하여 삼한으로 유망하는 유민을 막았다.

위가가 건국된 후 명제는 238년,

사마의를 파견하여 공손연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유흔과 선우사를 파견하여 낙랑·대방을 평정하였다.

서진이 건국된 이후 백제 및 고구려의 공격이 가속화 되어

낙랑 및 대방군은 점차 약화되었다.

276년에는 유주를 분할하여 평주를 신설하고 낙랑·대방을 속하게 하였다.

300년 이후 오호십육국시대의 혼란이 시작되면서

서진의 수도 낙양이 전조에 함락되자(311년) 낙랑군과 대방군은

더 버틸 힘을 상실하였다.

313년, 미천왕은 낙랑을 공격하여 2천의 남녀를 포로로 잡았으며

낙랑·대방의 군벌 장통이 모용씨에게 투항한 뒤,

314년에 대방군까지 축출되면서 소멸되었다.

이후에도 모용씨 및 북위 시기에 낙랑 및 대방군은

요동 및 요서 지역에서 계속 존속되거나

이름만 존재하는 군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토착 세력들을 통솔아려 하였으나  곧 치열한  항쟁에  부딪쳐

313년 한반도로  부터  축출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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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만 조선 건국           작성일자; 2020.04.14.화요일.맑음

 

BC195년,중

국의 연왕 노관이 한에 반기를 들고 흉노로 망명한 사건이 일어나자,

연지방은 큰 혼란에 휩싸이고

그 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고조선 지역으로 망명하였는데,

이들 가운데 위만도 무리 약 1천 명을 이끌고 고조선으로 들어왔다.

고조선의 준왕은

위만을 박사라는 관직을 주고 서쪽 1백리 땅을 통치하게 하는 한편,

변방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BC194년,

위만은 자신의 세력을 모아 중국 군대가 침입하여 온다는 구실을 허위로 내세워

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으니

이때부터 일반적으로 위만 조선이라고 부른다.

패배한 준왕은 뱃길로 한반도 남부로 가서 한왕이 되었다.

 

중국의 문헌들에는 성을 위(衛)라고 했으나 '삼국유사'에는 위(魏)로 되어 있다.

BC206년,

중국의 통일 제국 진(秦)이 멸망하고 한(漢)에 의해 다시 통일이 이루어졌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유이민이 파상적으로 요동과 한반도에 유입되었다.

한이 중국을 통일한 뒤

건국 과정에 적극 참여했던 노관은 이성(異姓) 제후 7명의 한 사람으로

연왕(燕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곧 이성 제후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가해지면서 노관은 흉노로 망명했고,

연나라 지역은 한군(漢軍)에 의해 점령되어 혼란이 초래되었다.

이때 위만은 자신이 거느리던 무리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에 망명했다.

그 시기는 BC3세기말에서 2세기초로 추정된다.

위만은 고조선의 준왕에게 번병이 되기를 청하여

고조선의 서쪽 변경을 수비하는 일을 맡았고,

준왕의 신임을 얻어서 박사에 임명되었으며 100리의 땅을 받는 한편,

규(圭)도 하사받았다.

그는 차츰 유이민을 모아 자신의 세력을 기른 다음,

준왕에게 사람을 보내 한군이 공격해오니 왕을 호위하겠다고 거짓 보고하고

준왕을 쳐서 정권을 빼앗았다.

이때 준왕은 근신과 궁인을 이끌고 뱃길로 한으로 가서 한왕(韓王)이라고 칭했다.

 

위만은 이종족들이 중국의 변방을 노략질하지 못하게 하고

만이(蠻夷)의 군장이 천자를 찾아가는 것을 막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한의 혜제(惠帝:BC 195~188)와 고후(高后:BC 188~180) 때

한의 외신(外臣)이 되었다.

이를 배경으로 군사력과 경제력을 강화한 위만은

진번·임둔을 포함한 주변 지역을 복속시켜 사방 수천 리를 세력권에 넣게 되었다.

위만의 출신에 대해 중국 문헌은 모두 '연나라 사람'(燕人)이라 기록했다.

그러나 그가 망명할 때 '상투를 틀고 오랑캐의 복장'을 한 점을 들어

연나라 지역에 살던 고조선 계통의 인물로 보기도 한다.

머리카락을 틀어올리는 풍습은 동이족 이외에 다른 이민족에게도 있었던 것이며,

'오랑캐의 옷'[蠻夷服]이라는 것도

막연히 중국인의 복장이 아니었음을 말할 뿐이므로 명확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가 고조선의 왕위를 차지한 뒤 나라 이름을 계속 '조선'이라 했고,

고조선이나 진번 주민의 지지를 받았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위만의 집권을 고조선 내에서의 단순한 정권 교체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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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 건국       작성일자; 2020.05.13.수요일,맑음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BC2333년으로 전하며

BC194년 위만이 단군 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 조선을 세운 뒤

연으로 부터 침략을 받기도 하였으나

연에 이어 진이 세워지고 연이 망하고

BC222년에 진()나라가 고

조선을 BC108년에 멸망한 요하,요동 유역에서 한반도 서북 지방에 걸쳐

비파형동검 문화를 공동 기반으로 지역 집단이 성장하면서

큰 세력으로 통합되고 존재한 한국 최초의 국가이다.

 

단군신화는 고조선을 세운 중심 집단의 시조 설화 형식으로 만들어졌다가,

뒤에 고조선 국가 전체의 건국 설화로 확대된 것으로 여겨진다.

중국 전국시대에 들어와 주()나라가 쇠퇴하자

각 지역의 제후들이 왕이라 칭하였는데,

이때 고조선도 인접국인 연()나라와 동시에 왕을 칭하였다고 한다.

 

 

                                                                고조선 지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하여 연을 공격하려다가

대부 예() 의 만류로 그만 두기한 고조선은

BC 4세기 무렵 ,

중국의 전국칠웅의 하나인 연과 대립하고

강력한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BC 3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연의 장수 진개가

요하 상류에 근거를 둔 동호족을 원정한 다음 요동 지방에 요동군을 설치하고

장새를 쌓고 고조선 영역내로 쳐들어오므로 고조선은 밀리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고조선은 서방 2,000여 리의 땅을 상실하고,고

조선은 그 중심지를 요하 유역쪽에서 평양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진다.

그 뒤 BC222년,

진()나라가 연을 멸망시키고 요동군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였다.

고조선의 부왕은 진의 공격이 두려워서 복속할 것을 청하였지만 거부하였다.

부왕이 죽고 아들 준왕()이 즉위할 무렵 진()이 내란으로 망하고,

대신 BC 202년 한()이 중국을 통일하였다.

한은 진과 같이 동방진출을 적극 꾀하지 않고

다만 과거 연이 쌓은 장새만을 수축하고 고조선과의 경계를 패수(浿)로

재조정하였다.


위만은 유이민 집단과 토착 고조선 세력을 함께 양측간의 갈등을 줄이고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였고

중국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이를 기반으로 주변의 진번 ·임둔 세력을 복속시켰다.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는

남쪽의 진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한()과 직접 통교하는 것을 가로 막고

중계무역의 이익을 독점하였다.

이에 불만을 느낀 예군() 남려() 세력은 한에 투항하였다.

이즈음 한은 동방 진출을 본격화하자 

양측은 긴장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 외교적 절충을 벌였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한은 BC109년 육군과 수군을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하였고,

 

고조선은 총력을 다하여 이에 저항하였다.

고조선이 한의 대군을 맞아 약 1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이를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 막강하였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조선 지배층 내부가 분열 ·이탈되었다.

조선상 역계경은 강화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자신의 무리 2000여 호를 이끌고 남쪽의 진국으로 갔다.

또 조선상 노인, 상, 한음, 이계상 삼, 장군 왕겹 등은 왕검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이러한 내분의 와중에서 우거왕이 살해되고 왕자 장()까지 한군에 투항하였다.

대신 성기가 성안의 사람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왕검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이때가 BC 108년이다.

 

한은 고조선의 영역에 낙랑 ·임둔 ·현도 ·진번 등 4군을 설치하였다.

이때 많은 고조선인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였고

삼한 사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고조선 후기에는 철기가 한층 더 보급되고,

이에 따라 농업과 수공업이 더욱 발전하였고,

대외교역도 확대되어 나갔다.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은 강력한 정치적 통합을 추진하였지만,

기본적으로 여러 세력의 연합적 성격을 극복하지는 못하였다.

각 지배집단은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보유하고 있었고,

고조선 정권의 구심력이 약화되면

언제든지 중앙정권으로부터 쉽게 이탈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고조선 말기 지배층의 분열도 그러한 성격에 말미암은 바가 컸다.

지배층 사이의 취약한 결속력은 고조선 멸망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고조선 사회에 대해서는 기록이 전하지 않아 자세하게 알 수 없으나,

지금 전하는 8조 법을 통해 볼 때

계급의 분화가 상당히 진전되었을 뿐만 아니라

사유재산제·신분제가 존재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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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시원   작성일자; 2020.04.14.화요일,맑음

 

우리 민족의 시원은 바이칼 호수에서 시작한다.

그 후 이들은 남하해 요하 문명과 알타어를 탄생시켰다.

오늘날의 세계 인류는 세가지 인종으로 나눈다.

백인종인 코카소이드,황인종을 총칭하는 몽골로이드,흑인종인 니그로드이다.

인간의 진화과정에서 이러한 분류는 호모사피엔스 단계로

우리 민족은 몽골로이드에 속한다. 

간빙기가 끝나고 빙하기가 다시오면서  몽골리언들은 바이칼 호수에서

오래동안 같혀 살았다.   

그 뒤 빙하기가 끝나면서 물이차

2500만년이라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호수인 지금의 바이칼 호수가 되었다.

세계에서 수심이 가장 깊은 호수이기도 하지만 가장 차거운 호수이기도하다.

궁둥이에 몽고 반점이 있는 몽골리언들의 형성지가 바로 

알타이,바이칼 호수 지역이다.

소나무,전나무 등 땔감이 많아 빙하기의 추위에도 견딜수 있어 살아 남았다.

강풍과 추위에 적응하면서 체열 손실을 줄이기 위해

다부지고 뭉툭한 체형으로 진화되었다.

찬바람을 피하기 위해 눈은 작고 찠어 지고,안구를 보호하기 위해

두툼한 쌍꺼풀과 두꺼운 피하 지방층,평평한 얼굴,낮은 코  등으로 진화했다.

바이칼호의 지금의 수면이 된 것은 기원전 1만2천년이다.

당시 거대한 홍수를 만나 이동하지 않을수 없었다.

기원전 1만4천경 ,

바이칼 호수에서 등장한 동북 아시아의 석핵이 불과 기원 전 1~2천 사이에

티벳,몽골,동북 시베리아,한반도,일본까지 급송히 퍼져 나갔다.

바이칼 호수주변에는 무수한 고고학적인 유물들이 산재해 있다.

 

구석기 시대 부터 이 곳에서 사람들이 살아다는 증거다.

중앙 아시아 지역에는 3만~5만전 유적이 전혀 발굴되지 않는다.

추워 살수 없는 이 지역에는 많은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이들의 문화는 다른 지역과도 다르다고 한다.

 

기원전 7189년에 세워진 세계 최초의 국가 환국 위치가 바이칼 호수 주변이다.

그 뒤 빙하기가 끝나면서 이들은 동서 남북으로 이동한다.

동북아시아에서 시베리아를 거처 아메리카 대륙으로

인디안들의 중심 그룹이 이동한 것이 1만4천년 전이다.

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신화와 습속은 우리 사먀니즘의 전통과 비슷하다.

그들의 언어도 우리말과 뿌리도 같다는게

그들의 기원과 계통의 맥락이 같다는 것이다.

그 뒤 몽골리안 계통은 서쪽으로

핀란드,항가리,터어키,카자흐스탄,우즈베키스탄,키르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

타자키스탄,아프가니스탄,부탄 등 '탄'자가 들어가는 나라가 많다.

'탄'자는 우말의 '땅'과 같다.

그 뒤 동이족이 남하하여 홍산 문화 지역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에 사람이 정착한 것이 약1만1천년 전이다.

이 곳의 홍산 문화은

중국의 황하 문명보다 약2천 내지1천년 앞선 것으로 보인다.

이 후 이들이 조선족과 흉노족으로 나눤다.

조선족이 건국한 나라가 고조선이다.

조선 시대 오랑캐라고 불리우던 만주 일대의 민족들이 모두 한 핏줄이다.

조선족과 흉노족은 3000천년 전에는 형제요 동족이라 하였다.

역사적으로 바이칼 호수는 유라시아 민족의 발원지로 

그들은 모두 몽골리언 후손들이다.

기원전 200년 전 ,

한나라를 압박하며 북쪽 초원 지대에 큰나라를 세운 흉노족은 물론,

중국의 북위,북주,수,당을 건설했던 선비족의 고향도 바이칼 호수 주변이다.

또 4세기 후반, 로마를 위협했던 훈족,

6세기 후반 20년만에 만주에서부터 비잔티제국의 북방 지역,

남쪽으로는 힌두크시에 이르는 세계 최초로 유라시아 동서 남북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트르크(돌궐)족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8세기 후반 투르크족을 멸망시킨 후

몽골고원을 100년 동안 차지한 지배한 위구르족,

9세기 투르크 계통 몽골족 키르기즈, 10세기 요나라를 건설하여 북송을 압박하며

11세기까지 동방의 실길적 지배가 거란족 역시 몽골리안이다.

12세기 초, 바이칼 호수 주변에서 일어나 대제국을 건설한 징기스칸의 몽골 등

유목민족 모두가 모두가 바이칼 호수 주변을 근거지로 두고있다.

바이칼 호수는 이들의 발원지이자 성지였다.

이들은 모두 유전자가 같은 사람들이다.

다만 지역과 시대에 따라 스스로 부르는 호칭이나 

중국인들이 이 민족을 가리킬때 사용한 한자어가 다를뿐이다.

바이칼은 몽골인들의 근원지다.

중국 동북3성과 원난성 일대 소수민족,장족도 몽골리언들이다.

몽골,중남미의 인디오들,베토남 또한 몽골리언들이다.

중국 남부로 내려간 몽골리언은

남방계 민족과 함게 중국문명을 만드은 주류 세력이 되었다.

유전적으로 보아 우리민족의 뿌리는 크게 두갈래로 나눈다.

약70%는 북방계,30%는 만방계고,그히 일부 유럽인과 다른 그룹이 섞여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미 두 계열의 사람들이 완전히 결합하여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나의 새로운 미족으로 거듭난 것으로 보고있다.

빙하기가 끝나고 요하 부근으로 남하한 몽골리언들이

이지역에 살고있던 남방계 사람들과 썩이면서 새로운 문명을 발달시켰다.

그 무렵 먹을게 풍부한 발해만과 바닷가와 강가애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 뒤 이르러 요화 문명과 알타이 언어를 탄생시켰다.

유전자가 동일한 한국인과,일본인,몽골인,티베트인.터키인은

에스키모인,아메리카 인디언과 유전적으로나 언어적으로 한 묶음이다.

이른바 알타이어족이다.

언어학적으로 볼때 이들은 약8000년전에 나누어 진것으로 보인다.

한편 우랄어(핀란드어,항가리어와 셈어(히브리어,아랍어,고대 아키드어) 역시

비슷한 연대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특이한점은 한반도와 인도 남부인의 유전자 지도가 비슷하다.

고대로 부터 두 곳간에 사람들의 이동이 많았던 것을 의미한다.

그 만큼 양 지역간에 왕ㅇ래가 많았다는 증거다.

가야 왕국으로 시집온 인도 공주 허 황후의 이야기가 신화만은 아닌것이다.

우리 한민족이 유전학적으로

몽골리언의 원형질을 가장 잘 계승,발전시켰다고 한다.

한국인과 바이칼 호수 주변에 사는 부리아트 인이

혈연적으로 매우 가깝다는 사실이 규명되었다.

 

인류의 조상으로 추측되는 고생 인류는

삼백수십만 년 전에 출현했을 것으로 보인다.

십수만 년 전에는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에서 출현하게 되었고,

이들의 후예가 사방으로 이주하여

오늘날 인류의 조상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현생인류의 출현 이후 각 지역의 주민들에게 개성적인 면모가 나타났다.

한반도와 만주 지방에는 50여만 년 전 구석기시대 유적이 나타났다.

빙하기 이후에 일부 구석기인들의 후예는 이 땅에 남았고

일부는 다른 곳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들어왔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씨족별로 20~30명씩 무리를 지어

사냥과 어로, 채집 등을 통해 공동체적인 삶을 영위했다.

뒤이어 공동체적 삶에 대한 근본적 변화가 일어났는데

농업혁명 또는 신석기 혁명이 그것이다.

신석기 후반에

,피 등 작물을 거쳐 기원전 8~7세기에는 쌀농사도 짓기 시작했다.

한반도에서는 이시기 빗살무늬 토기에 이어 민무늬 토기가 나타났다.

인간은 점점 큰 단위 집단을 형성해 나갔고

그것은 청동기 사용으로 촉진되었다.

한반도 중남부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10세기 무렵 발생했다.

만주 남부 요녕성 일대에서 생성되어 한반도와 중부 만주지역으로 전파되었다.

비파형 동검과 세형동검이 대표적 유물이다.

이 청동기 문화를 영위한 주된 족속이 예, , 한족이었고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상호 융합하여 나갔다.

삼국시대 말기에는 동질성을, 통일 신라기에는 동족의식이 표면화됐다.

고려시대 초에 발해 유민이 건너옴으로

하나의 족속 단위인 한국인이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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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4대 문명         작성일자; 2020.04.14.화요일,맑음

 

역사시대의 기원으로는

스메르인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시작한 최초 기원전 3000년경으로 시작한다.

인류 역사에서 일찍이 4개의 지역에서 발달한 문명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이집트 문명,인더스 문명,황허 문명을 말한다.

각각의 문명은

도구와 농업 기술의 발전에 따라 잉여 생산물과 사적 소유가 발생하면서,

여러 계급으로 분화되고 정치적 지배 계급이 생겨났다.

이를 바탕으로 원시 사회는 해체되고 고대 국가가 성립되었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유역인 메소포타미아 평원에서 일어난 문명으로

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 인이 이 지역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우르 등

많은 도시 국가를 건설하였다.

수메르 인들은 도시 한가운데 신을 모시는 신전을 세우고 활발한 상업 활동을

벌이면서 이들은 설형문자(쐐기 모양의 글자)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이 문자는 수메르 인에서부터 페르시아 인까지 3,000여 년 동안

서남 아시아의 여러 민족들 사이에 널리 쓰였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19세기에 이르러서야 탐험가와 여행가들이 이 지방에 대해 보고하면서

학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또한 문자의 해독과 유물 발굴이 진행되면서 고대 역사가 차츰 밝혀지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는 이집트와 달리 개방적인 주위 환경으로

다른 민족의 침입이 잦아 정치적으로 변화가 심하였다.

도시 국가들은 기원전 2400년경

북방으로부터 침입해 온 셈 족에게 차례로 정복당했다.

그 후 아카드 인이 처음으로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하고

아카드 왕국을 세웠으나 곧 쇠퇴하였다.

기원전 2000년경에는

아무르 인이 바빌론을 도읍으로 정하여 바빌로니아 왕국을 건설했다.

이 왕국은 기원전 1700년경에 함무라비 왕 때 전성기를 이루어

메소포타미아 전 지역을 통일하고, 시리아 지방까지 세력을 떨쳤다.

함무라비 왕은 왕국을 통치하기 위해 함무라비 법전을 만들었으며,

바빌론에 신전 · 왕궁 등을 세웠다.

또 각지에 운하를 파고 상업을 장려하였다.

그러나 바빌로니아 왕국의 번영도 오래 가지 못하고

카시트 인, 히타이트 인 등 주변 민족의 잇따른 침략을 받아 멸망했다.

그 후 아시리아의 지배를 받다가 새 왕국을 일으켰는데,

이 왕국을 신 바빌로니아, 전의 왕국을 고 바빌로니아라고 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달의 운동을 바탕으로 한 태음력을 비롯하여

천문학 · 수학 등이 발달하여 농사에 이용되었다.

태음력은 1년을 12개월, 1개월을 30일로 나누고,

3, 4년에 한 번씩 윤달을 두었다.

천문학도 발달하여 일식 · 월식이 있을 날을 미리 알았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60진법(12진법)에 따른 수학이 발달해

곱하기 · 나누기 · 분수 · 대분수까지 썼다.

시간이나 각도를 재는 데도 60진법을 응용하여

1시간을 60분, 1분을 60초, 원의 각도를 360˚로 나누었다.

7일을 1주일로 정하고, 1일을 24시간으로 나눈 것도 유래되었다.           

 ① 발생 : 기원전 3500년경 세계 최초로 문명 발생
 ② 지형적 특징 : 개방된 평야 지역,잦은 외부 침략으로 국가가 자주 바뀜,

                           종교관 발달
 ③ 수메르인 : 최초로 도시 국가 수립
      도시 주변에 성을 쌓고 도시 가운데에 지구라트라는 신전을 세움
     신권 정치 : 국왕이 신을 대신하는 존재로서 백성을 통치
     문화 : 태음력, 60진법, 쐐기 문자 사용

④ 바빌로니아
    기원전 18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최초로 통일
    전성기 : 함무라비 왕 → “함무라비 법전” 편찬

    귀족이 귀족의 눈을 멀게 하면 그의 눈도 멀게 한다.
    귀족이 평민의 눈을 멀게 하거나 뼈를 부러뜨리면

      은 1미나(약 80g)를 지불한다.
    귀족이 남의 노예 눈을 멀게 하거나 뼈를 부러뜨리면

     그 노예 가격의 반을 지불한다.
    보복주의(‘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표현으로 유명함)와

   신분(귀족, 평민, 노예)에 따라 처벌이 다르게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멸망 : 철제 무기를 사용하는 히타이트에게 멸망

 

이집트 문명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이집트의 나일 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고대 문명으로,

메소포타미아 · 인더스 · 황하 문명과 함께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이다.

고대 이집트는 40여 개의 부족 국가를 통합하여 통일 왕국을 이룩하였고

강력한 통일 왕조가 성립되어 훌륭한 문화가 발달하였다.

왕은 막강한 권력을 갖고 '태양의 아들'인 파라오라 하였다.

왕이 죽은 뒤에는 피라미드라는 거대한 무덤을 세우고,

왕의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그 속에 넣었다.

피라미드 근처에는 신성한 무덤을 지키기 위해 스핑크스라는 석상을 세웠다.

천문학과 수학이 발달하였고 상형 문자를 만들어 기록을 남겼다.
한편 관개 농업에 필요한 과학 기술도 발달하였다.

나일 강은 매년 정기적으로 홍수가 났는데,

그 시기를 예측하면서 천문학이 발달하고, 태양력도 만들어졌다.

오늘날 사용하는 태양력은 이 때에 비롯되었다.

또 홍수로 사라져 버린 밭의 경계선을 가려 내면서 측량술과 수학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과학적 지식과 기술은 피라미드나 신전을 짓는 데도 이용되었다.
이집트 인은 문자도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그림으로 뜻을 나타내는 그림 문자를 쓰다가

이를 간략하게 하여 상형 문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일 강 가에 자라는 파피루스를 원료로 종이를 만들어 글을 적었다.

그 밖에 무덤에 함께 넣을 인형이나 동물상을 비롯하여

많은 보석으로 장식한 금관 등이 만들어졌다.

이집트 문명은 기원전 3,000년경부터

이집트의 나일 강 유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고대 문명으로,

메소포타미아 · 인더스 · 황하 문명과 함께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이다.

고대 이집트는 40여 개의 부족 국가를 통합하여 통일 왕국을 이룩하였고

강력한 통일 왕조가 성립되어 훌륭한 문화가 발달하였다.

왕은 막강한 권력을 갖고 '태양의 아들'인 파라오라 하였다.

왕이 죽은 뒤에는 피라미드라는 거대한 무덤을 세우고,

왕의 시체를 미라로 만들어 그 속에 넣었다.

피라미드 근처에는 신성한 무덤을 지키기 위해 스핑크스라는 석상을 세웠다.

천문학과 수학이 발달하였고 상형 문자를 만들어 기록을 남겼다.
한편 관개 농업에 필요한 과학 기술도 발달하였다.

나일 강은 매년 정기적으로 홍수가 났는데,

그 시기를 예측하면서 천문학이 발달하고, 태양력도 만들어졌다.

오늘날 사용하는 태양력은 이 때에 비롯되었다.

또 홍수로 사라져 버린 밭의 경계선을 가려 내면서 측량술과 수학이 발달하였다.

이러한 과학적 지식과 기술은 피라미드나 신전을 짓는 데도 이용되었다.
이집트 인은 문자도 사용하였다.

처음에는 그림으로 뜻을 나타내는 그림 문자를 쓰다가

이를 간략하게 하여 상형 문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나일 강 가에 자라는 파피루스를 원료로 종이를 만들어 글을 적었다.

그 밖에 무덤에 함께 넣을 인형이나 동물상을 비롯하여

많은 보석으로 장식한 금관 등이 만들어졌다.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부터 약 1,000년 동안,

인도의 인더스 강 유역에 발달한 고대 문명으로,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이다.

인더스 문명의 특색은

인도양에서 히말라야 산기슭까지 1,000km 이상에이르는 넓은 지역에 걸쳐

놀랄 만큼 동일성을 보이고 있는 점과 질서 정연한 도시계획에 있다.

이것은 당시에 매우 강력한 행정 기구가 있었음을 나타낸다.

지금의 파키스탄 지역에서 발견된 모헨조다로와 하라파 도시 유적은

인더스 문명을 대표하는 유적이다.

약 600km나 떨어져 있는 모헨조다로와 하라파는

큰길과 하수도를 갖추고 도시 계획이 잘 되어 있다.

오늘날까지 알려져 있는 촌락 유적은 40개 가량인데,

여기에서 출토된 토기는 대량 생산되던 것으로 짐작된다. 집

을 짓는 벽돌의 규격도 같으며, 도장도 같은 모양에 동일한 문자가 새겨져 있다.

 

황허 문명

황허 문명은 기원전 2000년경에 중국 황허 강 유역에서 발생한 고대 문명이다.

이집트,메소포타미아,인더스 문명과 더불어 세계 4대 문명의 하나로 손꼽힌다.

황허 강 유역은 농사짓기에 알맞은 기름진 황토 지대를 이루고 있어

신석기 시대부터 농경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신석기 문화는 채색 토기를 주로 만들어 쓴 양사오 문화와 검

은색 토기를 주로 만들어 쓴 룽산 문화로 발달하였다.


신석기 시대가 끝날 무렵, 구리에 주석을 섞은 청동기의 사용이 시작되었다.

동으로 우수한 무기를 만든 은 왕조가

기원전 1500년경에 중국 최초의 왕조를 세우고, 나라의 체제를 정비하였다.

은나라는 수도에 장대한 궁전을 세우고, 많은 분묘를 지였으며,

거북의 등이나 짐승의 뼈에 문자를 새긴 갑골 문자까지 사용하였다.


은나라의 수도인 은허에서 발견된 왕묘에는

동기를 비롯한 많은 부장품이 있어 은나라 왕실의 강대한 권력을 말해주고 있다.

특히 황허 문명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은나라의 청동기는 정교한 것이 많으며,

무게가 1톤 가까이 되는 것도 있다.

청동은 상당히 귀한 것이었으므로 무기나 제기를 만드는 데 쓰이고,

농구 등의 생산 도구는 여전히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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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기 시대          작성일자; 2020.04.14.화요일,맑음

 

문자를 사용하여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기 시작한 시대의 이전 시대를 선사 시대라하며.

선사시대는 구석기시대,중석기시대,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초기 철기시대까지 포괄하는

시대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문자를 사용하여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기 시작한 시대를 역사시대라 하며,

선사시대와 역사시대 사이의 과도기를 원사시대라고 한다.

철로 만든 도구를 사용하게 된 시기이다.

 

철기 시대는 구리와 주석 등을 섞어 도구를 만들었던 청동기 시대의 뒤를 이은 시기이다.

처음에는 장신구나 단검 등을 철로 만들었지만,

철의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농기구는 물론이고 일상 용품과 무기도 철로 만들었다.

이후 철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금속이 되었다.

석기나 청동기에 비해 단단하고 날카로운 철로 농기구를 만들어 사용하자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땅을 일구거나 농작물을 베어 수확하는 등 여러 가지 농사일도 한결 편해졌다.

또한 철제 무기를 먼저 사용한 나라는 군사력도 커져 강한 나라를 세울 수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4세기경부터 철기를 사용했다.

고조선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의 연나라에서 전해진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고조선은 철제 무기를 사용하던 연과의 전쟁에서 패해 많은 영토를 잃어버렸다.

 

기원전 2세기 초에는 철제 무기로 무장한 위만이 고조선의 준왕을 몰아내고 임금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말에 고조선은 더욱 강력한 철제 무기를 사용하던 한나라에게 패해 멸망했고,

고조선 땅에는 낙랑군 등의 한군현이 설치되었다.

이후 낙랑군을 통해 중국의 철기 문화가 한반도 곳곳에 빠르게 전해졌다.

남쪽의 삼한에서는 철제 농기구 사용이 일반화되면서 농작물의 생산량이 크게 늘어났다.

특히 변한에서는 우수한 철이 생산되어 주변 지역은 물론이고 낙랑군과 대방군, 왜로 수출되었고,

철을 화폐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변한의 뒤를 이은 가야도 우수한 철기를 만들어 수출했다.

철기도 석기나 청동기처럼 세계 곳곳으로 퍼져갔다.

본격적으로 사용한 것은 기원전 3000~2000년 서아시아 지방에서였다.

기원전 1400년경에는 히타이트 족이 철을 독차지한 뒤 이 지역을 정복했고,

기원전 1200년경에 히타이트가 멸망하자 철기는 빠르게 퍼져나갔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5세기부터 철기를 본격적으로 사용했고,

기원전 4세기에는 한반도에 까지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4세기경부터 철기를 사용했으며,

변한이나 가야 등은 우수한 철기를 만들어 이름을 떨쳤다.

우리나라 철기 문화는 중국에서 전래되었으며

철기시대 사람들이 남긴 유적으로는 무덤·집터·생활쓰레기터 및 쇠를 녹여 만든 쇠부리터 등이 있다.

좁은 놋단검·꺽창·화살촉 등 청동기들과 쇠도끼 등의 철기들이 무덤의 껴묻거리로 발견되어

철기시대 생활상을 알 수 있다.

기원전 4세기경에는 도끼와 끌 정도의 간단한 철기문화였으나

그 후에 점차 발달하여 가야 연맹국 때 가장 두드러진 발전을 보였다.

금관가야는 해상활동에 유리한 지형으로 철의 생산과 교역을 중요시 하였으며

주로 한반도의 여러 지역과 왜(일본), 신라 등에 수출하였다.

고령의 대가야 역시 철과 농업 생산이 풍부하였는데

이 것은 철로 만든 농기구들을 이용해 농업생산력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백제, 신라 등 다른 집단의 침략이 잦았고

철제 갑옷, 칼, 창, 투구 등의 전쟁무기 또한 발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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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기 시대   작성일자; 2020.04.14.화요일,맑음

 

청동기 시대는

기원전 약 2000년경 구리를 불에 녹여 주석이나 아연을 섞어 만든 청동기를 사용한 시대를 말한다.


청동기는 만들기가 어렵고 귀해서

주로 거울, 방울, 검 등과 같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도구, 지배 계급의 무기나 장신구 등으로 쓰였다.

 무늬가 없는 토기인 민무늬 토기와 반달 돌칼 등이 사용되었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은 벼농사를 짓기 시작하였어요.

땅 위로 올라온 움집에서 살았고 여러 가족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지요.

다른 마을의 침입을 막기 위해 주위에 울타리를 두르기도 하였다.


농사짓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거두어들이는 곡식이 많아지자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과 적게 가진 사람이 생겨났고,

지배하는 사람과 지배를 받는 사람으로 나누어졌다.

 지배자를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 가면서 다른 세력과 다툼을 하였고

점점 더 큰 힘을 가진 지배자의 세력이 커지면서 마침내 나라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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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시대                   작성일자; 2020.04.14.화요일,맑음

 

인류 문명의 발전 단계의 하나이자 석기 시대의 새로운 부분으로서 구석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 사이에

해당한다.

석기 시대를 구석기 시대와 중석기 시대,신석기시대로 나눈다.

구석기 시대가 홍적세에 속하는데 반해 신석기 시대는 충적세에 속하며,

구석기 시대에는 타제 석기만을 사용했던 데 비해 신석기 시대는 마제석기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며,

타제석기도 사용했다.

장신구로서 자연금을 이용하는 일은 있었지만 구리·철 등의 금속을 가공하는 지식은 없었다.

또, 농경과 가축의사육,토기의 사용 등도 기준이 될 수 있다.

 

유럽, 아프리카 북부, 서아시아에서의 조사·연구의 진전은 홍적세에서 충적세로의 전환,

타제 석기만에서 마제석기의 출현으로의 전환,

그리고 수렵·어로·채집에서 가축 사육·농경으로의 전환이 모두 동시에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다.

또, 정교하게 만든 타제 석기가 신석기시대를 특징짓는 것만은 아니며, 칼·화살촉·낫으로서 청동기 시대에

들어와서도 중요하게 쓰였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구석기 시대·중석기 시대가 식량의 채집경제 단계였던 데 비해,

신석기시대는 식량의 지급자족을 위한 생산경제 단계에 속하며,

산업 혁명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이 큰 비약은 '신석기 혁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다.

식량 생산에 의해 생긴 여유는 마침내 전문 기술자를 낳았으며, 결국은 계급의 성립,도시·국가의 탄생을

촉진하게 되었다.

식량 채집에서 식량 생산으로의 비약적인 발전이 지방에 따라서는 반드시 석기 시대에 실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남시베리아의 알타이 지방에서는 청동기 시대에 연해주 등지에서는 철기시대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신석기 시대의 개념은 세계 각지에서 몇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곳도 있다.

서아시아에서는 농경·가축사육의 역사가 1만5,000년 전 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처음에는 토기를 쓰지 않았고(무토기·선토기 신석기시대) 8,000~9,000년 전에 토기가 등장했다.

서아시아가 청동기시대에 들어선 것은 6,000년 전의 일이다.

따라서 유목이라는 생활양식은 농경사회가 성립한 후 분기했다고 보아진다.

유럽에서는 5,000~7,000년 전에 농경과 소·돼지·염소·양 등의 가축사육이 시작되었으며 토기의 사용도

이루어졌다.

전형적인 신석기 시대인 4,000~5,000년 전에 와서야 청동기 시대로 이행한다.

그러나 핀란드에서 서시베리아에 걸친 삼림지대에서는

5,000년 전쯤에도 농경·가축사용을 알지 못한 채 토기와 마제석기를 사용하는 식량 채집 단계의 문화가

있었는데 이것이 신석기시대문화로 취급되고 있다.

시베리아에서 연해주에 걸친 지역에도 토기를 사용하는 식량채집단계의 문화가 있었으며,

초기에는 타제석기를 주로 썼으나 후에는 마제석기가 출현했다.

이 지역의 식량채집단계의 문화 역시 신석기시대문화로 취급된다.

또 시베리아의 미누신스크 분지에서는 3,000~4,000년 전에 청동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중국에서는 6,000년~7,000년 전에 곡물·가축·토기·마제석기가 함께 존재하는 문화가 있었고,

뒤늦게 3,500년 전에 청동기시대를 맞았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마제석기의 출현을 신석기 시대의 지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 농경이 행해졌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청동기 시대의 시작에 대해서는 5,500년 전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중국보다 앞선 것이다.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구석기 시대·신석기 시대 등의 명칭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석기·고기·형성기 등의 고유한 명칭을 사용해 분류한다.

마제석기는 6,000~7,000년 전인 고기에 출현했고,

토기와 농경문화는 5,000~6,000년 전인 형성기에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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