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성 공단 잠정 중단                2020.02.24.월요일,맑음

1998년10월,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소떼를 끌고 두번째로 방북하였을때 북한의 김정일 국방

위원장을 만나 개성 공단에 관하여 처음으로  논의되었다.

당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펼치고 있던 때라 김대중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현대그룹과 북한은 서해안 공단 건설에 관한 의향서 수준의 합의서를 체결했다.

2000년6월,

정주영 회장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은 공단 후보지로 개성 지역을 제시했고,

두달 뒤 방북한 정몽헌 현대 아산 회장에게 개성 특구 결정을 통보해 왔다.

이 지역은 북한의 군사 지역이었다.

2000년8월,

현대 아산과 북한의 아시아 태평양 평화위원회,민족 경제협력연합회와 함께 '공업지구 건설· 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해 개성 공단 개발을 공식화했다.

2002년8월,

정부 차원의 협의는 대통령 특사가 방북 후에야 본격화됐다.

 2002년11월,

북한은 개성을 경제 특구로 지정하는 '개성 공업 지구법'을 제정했다.

2003년6월,1단계 단지 개발이 시작되고

2004년6월,시범 단지가 분양되고,시범단지에 15개 입주기업이 준공식을 열었고,

2004년12월, 리빙아트가 '통일냄비' 1000세트를 생산해 개성공단 첫 시제품 반출이 있었다.

2005년3월16일, 남측 지역에서 개성 공단으로 전력 공급이 시작됐고,

2005년12월28일, 개성 공단과 남측 지역간 통신이 연결됐다. 

2007년6월, 도로,상하수도 등 단지내 시설 공사가 완료됨에 따라 1단계 2차 183개 업체의 분양이 이뤄졌다.

2005년8월, 본단지 1차 분양과

2007년6월, 본단지 2차 분양이 이루어졌다.


개성공단은 남북 간의 경제 협력 모델로서 적지 않은 성과를 냈다.

2004년10월, 근로자수는55명에서 시작해 2012년에는 5만 명을 넘어섰다.

2014년12월,10년이 지난 시점에는 북한 근로자 5만3947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입주업체의 업종별로 보면 섬유,기계 금속,전기전자,화학 등 이었다.


개성공단 사업은 2008년 말부터 남북 관계로 위기를 겪었다.

2008년3월, 이명박 정부 때 김하중 통일부 장관이 북핵 문제와 관련하여 개성 공단 확대는 어렵다고 하였다.

2008년7월11일, 금강산 관광객 민간인 박왕자 피살 사건과 북핵 문제와 관련해 

2008년12월1일, 북한은 개성공단 상주 체류 인원을 880명으로 제한하고,

남북 통행 시간대 및 통행 허용 인원을 축소하는 내용의 이른바 '12.1 조치'를 시행했다.

2009년3월에도

키 리졸브 한미 합동군사 연습에 북한이 반발하면서 훈련 기간(3월9~3월20일) 동안 남북간 통신을 차단하고, 3차례에 걸쳐 육로 통행을 차단했다.

3월 20일에는 개성공단에서 근무하던 현대 아산 직원 1명이 '탈북 책동 및 체제 비난' 혐의로 억류됐다.

2009년5월15일,

북한은 개성공단 관련 토지 임대료,토지 사용료,임금,세금 등 기존의 각종 법규정들과 계약 무효를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2009년6월17일,

개성공단 입주업체가 처음으로 의류업체 1곳이 폐업 신고서를 제출하고 철수했다.

억류된 현대아산 직원은 8월13일에야 풀려났고,

2009년9월1일에 가서야  북한이 제한한 공단 육로 통행 횟수가 정상화되었다. 

2010년3월26일,

천안함 사건 후 북한에 대한 신규 투자 불허 및 남북 교역 중단을 주요 골자로 하는

2010년,5월24일,' 5.24 대북 조치'를 취했다.

이 조치로 1000여 명 수준이던 개성 공단 체류 인원이 절반 가량 축소되었으나 폐쇄까지

가지는 않았다.이명박 정부 내내 '5.24 대북 조치'는 해제되지 않았다.



◑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안 채택              2020.02.24.월요일,맑음

2013년3월8일의 안보리의 대북 제재 결의안에 반대하여

1991년12월13일,노태우 정부 시절 합의한 '남북 기본합의서' 폐기와 판문점 남북 직통전화

단절을 선언했다.

또한,

남한은 북한이 핵무기로 남한을 공격한다면 김정은 정권은 지구상에서 소멸될것이다라고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이에 북한은 개성 공단에 관해서도 위협이 계속되었고,근로자의 신변 안전 문제가 벌어졌다. 정부는

2013년4월26일,

정부는 개성 공단내의 인원에 대한 철수를 결정하여,

2013년4월27일,체류 중인 126명이 철수했고,

2013년4월29일,나머지도 철수하기로 결정하여 잔류인원 50명 중 43명만 귀환하고

후일 나머지7명도 모두 귀환하였다.

2013년6월,

긴장이 계속되던 중,북한은 돌연 남북 고위급 회담을 제안하자 이에 응해 6월 중 서울에서 열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협상 대표 문제로 의견이 맞지 않자 일방적으로 무산을 통보하였다.


국무총리 정홍원    작성일자; 2020.02.16.월요일,맑음

 

 

2013년2월26일 부터 2015년2월16일까지

박근혜 정부 출범과 동시에 제42대 국무총리를 역임한 정홍원(생졸; 1944년10월9일~)은 

광주,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법무 연수원장,대한법률 구조공단 이사장등을

역임한 법조인 출신이며,

새누리당 공직자 후보 추천 위원회 위원장으로 써의 정치인이기도 하다.

 

정홍원은 1944년 경남 하동군 금남면에서 12남매(6남6녀) 중 열째로 태어났다.

부산의 친척이 데려가 부산 영도 초등학교(1957년)와 경남 중학교(1960년)를 졸업했다.

그러나 셋째형이 고시 공부를 포기하자 부친이 그를 고향으로 소환 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원하던 경남고에 진학하지 못한다.

그는 진주 사범학교(1963년)에 진학해 가사를 돌보는 것으로 부친과 타협을 했고,

사범 학교를 졸업한 그의 첫 발령지는 서울이었다.

낮에는 인왕 초등학교 교사로 돈을 벌고,밤에는 성균관대 법과대 야간 과정을 다녔다.

1972년, 사법 시험에 합격했다.

이명박 정부의 마지막 국무총리인 김황식 총리와 사법 연수원(4기) 동기며 그가 네 살 많다.

1975년,결혼 후 얼마 안 되어 화재로 아내를 잃고 재혼한 최옥자와의 사이에 외아들이 있다.

 

1982년, 검사 재직 시절

이철희·장영자 부부 사기 사건, '대도' 조세형 탈주 사건, 워커힐 카지노 외화 밀반출 사건 등과 같은

사건을 처리하여 '특별 수사통'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91년,대검찰청 중앙 수사부 3과장 시절 한국 최초의 컴퓨터 해커를 적발하기도 했다.

서울지방 검찰청 남부 지청장으로 재직하면서 '민원인 후견인'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

1999년,

대전지방검찰청·광주고등검찰청 차장검사를 지냈으며,

부산 지방 검찰청 울산 지청장을 거쳐 대검찰청 감찰 부장이 되었다.

대검찰청 감찰부장 재직 시 '검찰 낮술 금지'를 실시하는 등 검찰 개혁에 앞장섰다.       

이후 광주지방검찰청과 부산 지방 검찰청에서 검사장을 역임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 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새누리당의 공직 후보 추천 위원장을 맡으면서

정치권과 인연을 맺기도 했다.

2013년2월26일,

박근혜 정부의 첫 국무총리로 취임하여 공식 업무를 시작했다.

2014년4월27일,오전 10시

정홍원 국무총리는 정부 서울청사의 긴급 기자 회견에서

4월16일에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건과 관련 대국민 사과를 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퇴 하겠다고 밝혔으나,

2014년6월26일,

안대희,문창극 후보자가 낙마하면서 후임이 정해지지 않자

윤두현 청와대 홍보 수석은 기자 회견을 열어 정홍원 국무총리의 유임을 발표했다.

2015년2월17일,

사퇴를 선언한지 296일이 지나서야 이완구 후임 총리가 정해져 총리직을 내놓았다.

 

◑ 박근혜 정부 출범            2020.02.16.일요일,맑음

2013년2월25일,

2012년12월19일에 치러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2월25일부터2018년2월24일까지 임기로,

취임과 함께 제6공화국 6기 정부인 '박근혜 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다.


1987년10월29일,직선제 개헌을 통해 제6공화국이 탄생한 이후

1993년2월25일의 김영삼 정부는 '문민 정부',

1998년2월25일에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국민의 정부'

2003년2월25일에 출범한 노무현 정부의 명칭은 '참여정부'.

2008년2월25일에 출범한 이명박 정부의 명칭은 '이명박 정부'

2013년2월25일에 출범한 박근혜 정부의 명칭은 '박근혜 정부'란 명칭을 내세웠다.


박근혜 정부의 과제는

경제부흥(3대 전략 및 42개 과제)

국민행복(4대 전략 및 64개 과제)

문화융성(3대 전략 및 10개 과제)

평화통일 기반구축(3대 전략 및 17개 과제) 등을 과제로 삼았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전부터 비선 실세인 최순실이 개입하였고,

2016년,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비화되면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탄핵이

2017년3월10일,대통령직을 면직되는 대한민국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박근혜-최순실 공동 정부'라는 비판도 있다.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2013년에 집회,시위는 늘어났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형사처분한 건수가 늘어났다.





◑ 제18대 대통령 박근혜            2020.02.16.일요일,맑음

제18대 대통령 박근혜(생졸;1952년2월2일~ )는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며,최초로 탄핵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대통령이기도 하다.


박근혜는 제5·6·7·8·9대 대통령인 박정희와 육영수 여사 사이에서 1남2녀중 장녀로

대구에서 태어나 1963년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이래 청와대에서 자랐다.

1970년,서강대에 입학하여

1974년, 졸업 후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으로 유학길에 올랐다가

1974년8월15일,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문세광이 쏜 총탄에 맞아 모친인 육영수 여사가 사망 한 후 귀국하여

1979년,10.26 사건 이전까지 사실상 대통령 배우자 직무를 대행하였다.

1979년,10.26 사건으로 아버지가 서거한 후 청와대에서 나와 '육영재단'과 '정수장학회'의

이사장을 지냈다.

1998년,국회위원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되어 2012년 제19대까지 5선 국회 의원을 지냈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는,한나라당의 대표 최고위원을 역임하였으며,

2007년,한나라당의 제17대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지만 이명박에게 석패하였고,

이후  이명박 정부 기간 동안 한나라당 내 비주류계를 이끌었다.

2011년12월부터,

새누리당 비상대책 위원장을 지내며 당 혁신 작업을 지휘하였고

2012년4월11일,제19대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2012년12월19일,새누리당의 대통령 선거 후보로 제18대 대선에서 민주 통합당의 문재인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2013년2월25일,제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박근혜는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자 1987년의 대한민국 헌법 개정 이후 최초 과반 득표 대통령,최초 이공계 출신 대통령,최초 독신 대통령,최초 부녀 대통령으로 기록되었다.


2016년12월3일,박근혜 -최순실 게이트가 터져  국회에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발의되어

2016년12월9일,노무현 전 대통령에 이어 두 번째로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어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고

2017년3월10일,헌법 재판소에서 만장일치로 탄핵 소추로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었다.

헌정 사상 최초로 탄핵된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2017년3월21일,검찰에 소환되어 수사를 받았고,

2017년3월31일,구속영장이 발부되어 서울 구치소에 구속되었다.

2017년10월16일,구속된 상태에서 1심 구속기간이 만료되어 다시 구속영장이 발부되어

6개월 연장되었다.박 전 대통령 측은 반발하였고 모든 변호인단이 사임하였다.

2017년11월3일,자유 한국당은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제명했다.

2018년4월6일,1심 재판부는 징역 24년 및 벌금 180억 원을 선고했다.

2018년8월24일,2심에서 징역 25년 및 벌금 200억 원으로 형량이 늘어났다.

2018년7월20일,박근혜 전 대통령은 33년형을 받고 복역 중이다.

재임 직후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이라는 위기를 맞으며 국정을 본 박근혜는

임기 중 세월호 참사 사건,메르스 사태 등 국가적 재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국민의 불안감을 증폭시켰고, '창조 경제'를 위시한 추진한 정책 다수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을 뿐더러,미숙한 국정 운영과 불통 논란 등으로 숱한 비판을 받았다.

박근혜는 대기업 관련 범죄·문화 예술계 불랙 리스트 등 혐의 18개 와 국정원 특활비,

공천개입 등 혐의 3개에 대해 각각 재판을 받고 있다.




 



◑ 북한, 3차 핵실험 실시                2020.02.16.일요일,맑음

북한은 2013년2월12일 오전 11시 57분 51초,함경도 길주군에서 세번째 핵실험을 단행하였다.

이 곳은 핵 실험장이 있는 풍계리 부근이다.

북한은 2013년2월11일, 미국과 중국에게 사전 핵실험을 진행 중이라고 통보하였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이명박 대통령은 국가안전 보장회의를 소집하고, 군 당국은 군사대비태세를 3단계에서 2단계로 한 단계 격상했다.

한미연합군 사령부도 북한의의 추가 군사도발에 대비해 워치콘 3단계에서 2단계로 한 단계 높였다.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북한이 핵  시험을 수행했다고 발표하였다.



◑ 제18대 대통령 선거 실시      2016.02.16.일요일,맑음

2012년12월19일,

제18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 되었다.

선거 결과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51.6%의 득표율로 당선되어,

대한민국 제6공화국 출범 이래 최초로 유효 투표수의 과반을 득표한 대통령이자 역사상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되었다.

또한 전임 대통령이었던 이명박이 새누리당에서 탈당하지 않음에 따라 제6공화국 출범 이후 처음으로 같은 당적의 인물들이 대통령을 이어가게 되었다.

 

선거권은

선거일 기준으로 만 19세 이상인 한국 국민으로 결격사유에 없는 경우 선거권이 있다.

다만 해외에 거주하는 국민은 그동안 선거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재외국민 투표권 미부여에 헌법불합치 판결을 내린 덕에 재외국민들은

대통령 선거에는 1971년 이후 처음으로 투료권을 행사하였다.

역사상 처음으로 선상 투표가 치러졌다.


투표율은 .

총 선거인수 40,507,842명 중 30,721,459명이 투표권을 행사하여 75.8%로 집계되었다

출마자는

새누리당 박근혜,민주통합당 문재인,무소속 강지원,김순자,김소연,박종선이었다.

◑ 야구 선수 최동원 타계                     2020.01.16.월요일,맑음

최동원(생졸;1958년5월24일~2011년9월14일)은 

KBO 리그 전 롯데 자이언츠의 투수이자 전 한화 이글스의 2군 감독이다.

최동원 부친 최윤식은 남해읍 북변리 출신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부산으로 이사가 구덕초등학교,경남 중.고등학교,연세대 경영학과를

77번 학번으로 거처

1981년,

실업 롯데 자이언츠에 입단해서 실업리그 전기 리그 우승, 한국 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고, 신인왕,다승왕, MVP를 수상하였다.

캐나다네서 열린 인터콘티넨털컵 대회에서 최우수 투수상을 받고 메이저 리그 토론토 블루제이스팀과 계약을 체결하였으나,

새로 출범한 한국프로야구 롯데 자이언츠에 1983년 입단했다.

 

KBO 리그에 데뷔 후  

1983년부터 1988년까지 데뷔 후 6년 연속으로 선발 등판과 75.2%의 완투율을 기록했다.

KBO 리그 역사상 유일하게 한국 시리즈 4승을 올리며

1984년,한국 시리즈 에서는 40이닝 4선발 등판 4완투,

롯데 자이언츠가 창단 첫 우승을 하는 데 크게 기여하는 등KBO 리그에  초창기를 이끌었다. 

1984년부터 1987년까지,

4년 동안 1000.2이닝, 80승, 60완투, 2.16의 평균 자책점,

1988년,

투수 김대현의 사고사 이후 선수들의 복지 문제 해결을 위해 선수회 창립을 주도하다 소속 구단과 마찰을 빚었다.

1990년 현역에서 은퇴한 그는 1991년 지방의회 의원에 도전했다가 낙선했다.

한화 이글스 투수 코치 및 2군 감독, 한국야구위원회 경기감독위원 등을 역임했다.

2011년9월14일,

한화 이글스의 투수 코치 및 2군 감독,KBO 리그에 경기 감독위원 등을 역임했으나,

호전되었던 대장암이 악화되면서 54세로 사망했다.



◑ 야구 선수 장효조 타계                     2020.01.16.월요일,맑음

장효조(생졸;1956년7월6일~2011년9월7일)는

전 KBO 리구 삼성 라이온주,롯데 자이언츠의 외야수 이자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이었다.

2011년9월7일,

부산 동아대 병원에서 위암 투병 끝에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초년에는 불교를 믿었으나 말년에는 아들이 목사가 되며 개신교를 믿었다.


부산 영도에서 태어나 부산 영선초등학교 3학년 때였던 10세 때 대구로 이주했다.

야구를 시작한 때는  대구 삼덕 초등학교 4학년으로,

대구 중학교 2학년 때 서울에 살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키 174 cm, 체중 70kg에 지나지 않았던 장효조는

1972년에 대구 상고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능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73년,

2학년때 맹활약을 펼치며 대구상고를 대통령배,봉황대기,황금사자기 정상에 올려놓았다.

특히 황금사자기에서는 14타수 6안타를 몰아치며 우수 선수,타격 1위(0.428),최다 안타상을 받았고,봉황대기에서도 타격왕을 수상했다.

일본과의 고교 야구 친선 경기를 위해 대한민국 국가 대표에 선발된 장효조는 한국이 2승

1무로 일본을 누르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74년에도,

대구상고를 봉황기를 우승에 올려놓으며 또다시 타격왕과 최다안타 상을 수상했고,대통령배 고교야구대회에서는 5할을 기록하며 다시 타격상을 수상했다.

장효조는 그 해 출전한 네 개 고교 야구대회에서 0.383라는 타율을 기록했다.

1975년,한양 대학교에 진학한 장효조는 1학년 때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었고,

1976년,

백호기 대회에서 0.714라는 경이로운 타율을 기록하며 타격왕에 등극하였다.


실업 팀 포항제철에 입단하였다가 경리단에서 병역을 마친 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해

1군 92경기에서 타율 3할 6푼 9리(1위),18홈런(공위),22도루(4위),장타율6할1푼8리(1위), 출루율4할7푼5리(1위)로 천재성을 입증했다.

1983년5월,

8연타석 안타에 3연타석 홈런으로 타율이 0.414까지 치솟았다.

이는 KBO 리그 역사상 최초이다.

1985년에는,

시즌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기 통합 우승을 이끈 주역이기도 하다.

타격 면에서는 우리나라 유일의 4할 타자 백인천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유일한 선수이다.

1988년12월21일,

선수협 사태 인해 롯데 자이언츠에 트레이드 된 후 지명 타자로 뛰었으며,

홀수 해에만 3할대 타율을 기록하는 등 그야말로 '격년제 징크스'를 겪었다.

이는 최동원과 김시진 등이 트레이드된 후 한 달 후의 일이었다.


장효조의 삼성 라이온즈 시절 지녔던 등번호 10번은

후일 1993년에 상성 라이논즈에 입단한 양준혁이 달기도 했는데,

양준혁은 그와 동일하게 좌타자이면서 타격왕을 네 차례나 수상하였다.

양준혁의 네차례 타격왕 수상은 역대 타격왕 최다 수상 횟수이다.

두 선수의 통산 타율은 각각 장효조 0.331와 양중혁 0.316로서 타율 1위와 2위의 성적이다.

◑ 대통령 이명박 독도 방문                        2020.02.16.일요일,맑음

2012년8월10일,

이명박 대통령은 한국 국가 원수 최초로 독도를 방문하였다.

공식적인 방문 목적은

환경 보전 차원의 지방 순시라고 발표하였으나,

이 대통령은 이후 일본과의 외교적 관계를 염두에 둔 것임을 밝혔다.


일본 정부는 강하게 반발해 신각수 주일 한국 대사를 초치하였으며,

무토 마사토시 주한 일본 대사를 일시 귀국 조치했다.

일본 언론 또한 이 사건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며 일본 내 거센 비판 여론을 반영했다.

반면 한국 여론은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높은 지지를 보냈다.


독도 방문의 배경으로는 당시 양국 간에 과거사 문제로 갈등이 고조되는 상황과 임기 말

레임덕이 제시되었다.

이대통령의 독도 방문으로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초래했다고 비판하였으나,

일부에서는 한국의 영토인 독도를 방문하지 못할 이유가 없고,

공세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라며 긍정적인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독도 방문에 뒤이어 일본 천황이 한국을 방문하고자 한다면 진심으로 사과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일본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이를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이고, 유감스럽다”라고 비판했으며, 일본 각료 역시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일본 언론 역시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을 비판하였으며,

광복절을 전후한 이 대통령의 도발로 인해 한일 관계가 급랭했다고 분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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