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30회 런던 올림픽 개막                    2020.02.16.일요일,맑음

2012년7월28부터 8월12일까지,

영국 런던에서 204개국 10.568명의 선수들이 참가하여

제30회 런던 올림픽이 열렸다.

경기종목은 28개며,세부종목은 근대5종 경기를 포함하여 302개였다.


대회 결과

미국이 46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종합 순위 1위에 복귀하였고,

중국이 38개로 2위,영국이 29개로 3위를 차지하였다.

우리나라는 금메달 13개,은메달 8개,동메달 7개로 5위다.

특히 여자 양궁 단체전은 올림픽 7연패라는 금자탑을 쌓았다.

한국 선수단의 규모는

선수 248명,임원129명이며,

참가 종목은

근대 5종을 비롯해 레슬링,배구,배드민턴,복싱,사격,사이클,수영,양궁,역도,요트, 유도, 육상,조정,체조,축구,탁구,태권도,트라이애슬론,펜싱,하키,핸드볼이다.

◑ 세종 특별자치시 출범                    2020.02.16.일요일,맑음

2012년7월1일,

충남 연기군을 폐지하면서 충북 청원군과 충남 공주시 일부를 병합하여,

한국에서 17번째 광역자치단체로 출범하였다.

동쪽은 충북 청주시,서쪽은 충남 공주시,남쪽은 대전광역시,북쪽은 충남도 천안시와 경계를 이룬다.

면적은 464.90㎢이고,인구는 30만 6476명(2018년 현재)이다.

행정 중심 복합도시와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9개 면,3개 행정동(14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은 세종특별자치시 보람동에 있다.








◑ 2012년 여수 세계 박람회 개최                 2020.02.16.일요일,맑음

2012년5월11일부터 8월12일까지,

2012년 '여수 세계박람회' 또는 '여수 엑스포'가 '살아 있는 바다,숨쉬는 연안'이라는 주제로

전남 여수신항 일대에서 개최되었다.

개최 목적은

세계에 해양의 지속 가능한 개발·이용 모델을 제시함으로써 해양이 인류의 공동 유산이라는 해양 사상을 고취하고,국제 협력을 통해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기 위함이다.

흔히 여수엑스포라고 부른다.

2008년11월27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박람회기구 총회에서 개최지로 선정되어,

1993년의 대전 세계박람회에 이어 한국에서 2번째로 열리는 국제 공인 박람회다.


박람회장은 여수신항 내에 위치하며 바다와 인접해 조성된다.

주요 공간으로

바다에는 Big-O,연안에는 다도해공원,도시에는 엑스포디지털가로를 조성하여,

도시·연안·바다가 조화를 이루도록 구상했다.

전시 시설은

주제관,한국관,부제관,국가관,지자체관,국제기구/NGO관,기업관으로 구성되고,

해양 산업 및 지역 발전의 계기가 될 것이며,

박람회에 전시된 제품과 기술 및 다양한 형태의 문화·예술 공연 등을 통해,

세계적으로 한국을 홍보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 제19대 국회위원 선거 실시                   2020.02.16.일요일,맑음

2012년4월11일,

2012년5월30일부터 2016년5월29일까지 4년 임기의 제19대 국회위원을 선출하는 선거가

실시되었다.

2012년 재보궐 선거,세종특별자치 시장,세종 특별자치시 교육감 선거도 동시에 실시하였다.이번 선거는 한국의 재외국민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었던 최초의 선거이다.


선거제도는 1인 2표제로,

하나는 지역구 국회의원을 뽑는 투표지이고, 또 하나는 전국구 비례대표 정당 투표지이다.

의원수는 

299석이던 의석이 1석이 추가되어 지역구 246석,비례대표 54석으로 총 300석이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선거일 기준으로 만19세 이상인 한국 국민에 한하여 결격사유에 없는 경우 선거권이 있으며,

선거일 기준으로 만25세 이상인 한국 국민에 한하여 결격사유에 없는 경우 피선거권이 있다.


참여 정당은 총14개 정당이 예비 후보자를 등록하였다.

원내정당: 새누리당,민주통합당,자유신진당,통합진보당,창조한국당,국민생각

원외정당: 국민행복당,미래연합,댁국민중심당,진보신당,구가재건친박연합,한나라당,

             정통민주당,녹색당

투표율은

총 선거인수 40,205,055명 중 21,806,798명이 투표권을 행사하여 평균 투표율은 54.2%로 집계되었다.

정당별 의석수는 지역구 246석,비례대표 54석 합계 300석 중

새누리당     지역구 127석   비례대표 25석    합계 152석 

민주통합당  지역구 106석   비례대표 21석    합계 127석

통합진보당  지역구    7석   비례대표   6석     합계  13석

자유선진당  지역구    3석   비레대표   2석     합계    5석

무소속        지역구    3석                .           합계    3석


◑ 2012년 핵안보 정상 회의 개최             2020.02.16.일요일,맑음

2012년3월26일 부터 3월27일까지 2일간,

서울의 코엑스에서 제2차 핵안보 정상회의가

53개국(아시아14개국,유럽23개국,중동7개국,아메리카6개국,아프리카3개국)

4개 국제기구(UN,IAEA,EU,INTERPOL) 대표가 참여하여 개최되었다.


제2차 핵안보 정상회의에서는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평화적 원자력 발전 시설을 테러 집단이 공격,

핵 공포 분위기를 만들려는 것을 차단하면서 지진과 쓰나미 같은 자연 재해로부터도 원전의 안전성을 유지하는 내용인 핵안보-원자력 안전을 연계하여 논의하였다.


핵안보 정상회의(NSS)는 

핵무기 보유국과 원전 보유국들이 참여하는 국제 회의로,

주된 의제인 핵 테러 위협 방지뿐만 아니라 핵물질의 불법 거래 방지,핵물질 및 시설의 방호 방안,원자력 안전 방안 등 폭넓은 의제가 논의된다.

 

2001년,9.11 테러 이후 핵을 이용한 테러 가능성이 높아지자 방지하고자 열리게 되었다.

2009년,

핵안보 정상회의는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프라하 연설에서,

국제 안보를 위해 핵 안보 강화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발족되어

2010년4월12일부터 4월13일까지 

미국에서 제1차 핵안보 정상회의가 열렸다. 

◑ 한.미 자유무역 협정 발효     2020.02.16.일요일,맑음

2012년3월15일,

한.미 자유무역 협정(한미 FTA)는 한국과 미국이 양국간 무역 및 투자를 자유화하고 확대할 목적으로 체결한 자유 무역 협정(FTA)이다.

오래동안 끌어온 협정이 발효되는 시점이었다.

1989년,

미국 국제 무역위원회가 미국에게 바람직한 FTA 대상 국가로 싱가포르,한국,중국을 꼽으면서 한-미 FTA 체결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고,

2006년2월3일,

양국이 한·미 FTA 협상 출범을 공식 선언한 후

2007년4월2일,

14개월간의 긴 협상을 마치고 최종 타결하였다.

2007년5월25일,

협정문 내용이 공개되었다.

2011년11월22일,

한미FTA 비준안이 한국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2012년3월15일,

한미 FTA 협정이 발효되었다.



◑ 새누리당 당명 변경                  2020.02.16.일요일,맑음

2012년2월13일,

한나라당은 이름을 새누리당으로 바꾸었다.

한나라당’이라는 이름은 환인,환웅 등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표방하였다.

새누리당에서는 당명 변경에 반발하였다.

2012년3월5일,

경상도 지역을 기반으로 한 군소 정당인 영남신당 자유평화당이 당명을 ‘한나라당’으로

바꾸었다.


한나라당은

2011년10월26일,

한나라당은 재보궐 선거에서 야권 연대에 패배하였다.

2011년12월,

홍준표 대표와 지도부가 모두 사퇴하였고 비상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박근헤 전 대표가 비상대책 위원장으로 선임되었으며,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개명하였고

강령과 정책 방향을 바꾸었다.

정홍원 위원장(전 국무총리)을 중심으로 한 제19대 총선을 위한 공직후보자 추천위원회가

'하위 25% 컷 오프 룰'과 서울 강남 지역 현역 의원 전원교체,

비레 대표 의원 강세 지역 출마 배제 등의 규칙을 도입하여 2012 3월 중순 심사를 마쳤다. 그러나 기존 당내 세력 중 하나였던 '친이계' 다수가 공천에서 탈락하였고 여러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북한, 김정일 국방 위원장 사망     작성일자;  2020.02.16.일요일,맑음

 

 

2011년11월7일, 

북한의 김정일(생졸;1941년2월16일~2011년12월17일) 국방 위원장은 북한의 최고지도자이다.

김일성과 김정숙 사이의 첫째 아들이다. 

2011년12월17일,8시30분,

희천 발전소 현지 지도 방문을 위해 탑승한 열차에서

과로로 인한 급성 심근근색과 심장 쇼크로 인해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사망 사실은 2일 동안 극비에 부쳐졌으며,

2011년12월19일,정오,

조선 중앙 방송은 사망 소식이 공식 발표되었고

시신은 금수산 태양 궁전에 안치 되었다.

 

 

◑ 서울 시장 박원순 당선            2020.02.16.월요일,맑음

서울 시장 박원순은

변호사 출신으로 제35·36·37대 서울 시장을 역임한 정치가다.


박원순(생졸; 1955년2월11일~)은 경남 창녕군에서 2남5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74년,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졸업한 후,

1975년,서울대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유신체제 반대 운동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어

서울대에서 제적되어 단국대 사학과에 재입학하여 졸업했다.

1982년,대구 지방검찰청 검사로 첫 발령을 받았으나, 6개월만에 사표를 내고

1983년,변호사로 개업했다.

1985년6월6일,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에서 조영래 등과 함께 피해자 권인숙 씨의 변호인단을 맡았다.

부천 경찰서경장 문귀동이 조사과정에서 22세이던 대학생 권인숙을 추행한 사건이다.
2000년1월12일,

16대 총선을 앞두고 시민단체와 함께 '2000년 총선 부패정치 청산 시민연대'(이하 총선연대)를 구성, 단체 상임집행위원장 자격으로 낙천·낙선 운동을 이끌었다.

낙천·낙선운동이 벌어졌던 2000년 16대 총선에서 대상자 132명 중 102명이 낙선했다.

2002년9월26일,

이종찬 민주당 상임고문인 이종찬 '총선 연대가 낙선운동을 벌이며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참정권을 침해했다'면서 박원순 등 총선연대 간부4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피고는 연대해서 원고에게 10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시했다.

2006년,희망 제작소를 설립하여 지역사회 운동, 청년 벤처 운동, 소기업 지원 운동을 했다.

2006년,박원순은 만해상,막사이사이상 '공공봉사'부문을 수상하였다.

2010년12월8일,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이 국회 본회의에서 2011년 예산안을 강행 처리하며 급식 관련 예산을 전액 삭감해 새해가 시작되는 일주일 뒤부터 당장 급식 지원이 끊기는 아이들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박원순은 즉각적으로 '결식제로' 운동을 시작했다.

 2010년 당시 '결식 제로' 운동을 선언하며 박원순은

국가가 책임을 지지 못하면 국민이라도 나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며

12월 중으로 4만원을 내놓아라 한다, 

2011년10월3일,민주당 소속 박영선,민주 노동당 최규엽,무소속 박원순 세 후보는 단일화

후보 경선을 치렀다.

박원순은 경선에서는 박영선에 패하였으나 TV토론 배심원단 조사, 일반 시민 여론조사를

포함해 실시된 선거인단 투표 결과를 집계한 결과 박원순이 박영선을 이겼다.

2011년10월11일,

박원순은 선거대책위원회 '새로운 서울을 위한 희망캠프'를 공식 출범시켰다.

범야권 단일화의 결과 민주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등 야3당이 참여하고 있으며 시민사회, 문화계 인사, 언론계 등이 총 집결하였다.

상임 선대위원장은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맡았으며 유시민 ,국민 참여당 대표 노희찬,심상정

전 진보신당의 지도 인사와 문제인 노무현재단 이사장, 이해찬,한명숙 전 총리,정동영,이계안

문성근 등이 주요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여 선대 위원장직을 맡았다.

범야권 통합후보 경선에서 경쟁한 민주 노당당의 최규엽과 민주당의  박영선 역시 경선 당시의 약속을 지켜 선대 위원장직을 맡았다.

고문에는 김근태 한반도재단 이사장, 특보단에 최재천 전 의원, 선대본부장에 문용식 나우콤 사장,정봉주,천호선 전 의원 등이 참여했다.

2011년10월26일,

서울시장 보궐 선거에서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와의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2014년6월4일,

제6회 지방 선거에서 제36대 서울시장에 재선되었다.

2018년6월13일,

제7회 지방 선거에서 3선에 성공하였다.





◑ 가다피 사망              2020.02.16.일요일,맑음

가다피(생졸;1942년6월7일~2011년10월20일)는 리비아의 국가원수,국가평의회 의장,총리,국방장관이다.

1551년,리비아 지역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된 이래 리비아의 최장기 국가 지도자였으며,

2011년2월에 시작된 아랍의 민주화 시위의 영향을 받아

2011년10월20일,

자유 리비아군에 체포되어 한 시민군이 쏜 총상으로 고향 시르테에서 사살되었다.


1942년에 리비아 시르테 주 시 시르테로 근처의  유목인인 베드인족의 일파인 카다피 부족 가문에서 태어나 전통적인 베두인식 이슬람 종교 교육을 받으면서 자랐다.

가난한 환경에서 여러 형제와 친척들과 함께 성장했으나 그는 공부와 출세에 대한 의욕,

욕망이 남달랐다고 한다.

1952년 10살 때,

방송으로 이집트 대통령 가말 압델 나세르 등이 이집트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선포

하자 여기에 영향을 깊게 받아 그의 아랍 사회중의 및 민족주의 의념을 따랐다.

이때부터 카다피는 나새르의 영향을 받아 아랍세계를 통일해 기독교 세계에 대항하려는

의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1956년에는 수에즈 사태에서는 반이스라엘 시위에 참가했다.  

1963년,

벵가지의 리비아 대학교를 졸업한 후, 육군 사관학교에 입교해 재학 당시부터 동료 생도들과 왕정 타도를 목표로 하는 자유 장교단을 조직했다.

1965년,

사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1년 간 영국으로 유학 겸 파견 근무를 하게 되었고,

귀국 후 첫 보직으로 통신 부대 장교로 부임하였다.

나중에 그리스 아테네의 헬리나 군사학교와 영국에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69년9월1일,

국왕 이드리스 1세가 신병 치료차 터키에 체류 중이던 틈을 타

가다피는 육군 중위로 동료 장교들과 함께 수도 트리폴리를 공격하면서 무혈 쿠테자로

정권을 잡는데 성공 하였다.

국왕 이드리드 1세는 객지에서 퇴위 당해 터키로 망명하게 되었다.

정권을 잡은 카다피는 쿠데타 직후 군 총사령관에 올랐고, 대령으로 승격했다.

9월11일에 잠정헌법을 공포한 이후 신생 리비아 공화국의 최고 정치기구인 혁명지도평의회의장에 취임했다.

쿠데타 이후 리비아는 왕조가 교체되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었다.

1969년9월1일,

리비아 '비상 혁명위원회'를 설치하고 비상혁명 위원장이 되면서 그는 총리와 국방장관과

국가평의회 의장(의회 의장)과 국가 원수를 모두 겸직한다.

1972년,

2년만에 총리직과 국방 장관직은 내놓고 국가 원수 겸 국가 평의회 의장으로 머물렀다.

1974년,

정치 이론을 연구하는 데 전념하여 혁명 평의회의 의장 권한을 2인자에게 잠시 위임하였고,

이슬람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문화 대혁명을 주도했다.

엄격한 이슬람 율법에 의해 음주를 금지시키고  독자적인 직접 민주주의를 구상하였다.

이러한 그의 정치 이론을 집대성한 1975년에 발간된 '녹색서'에서 잘 밝혀져 있다.

1977년3월2일, 비상 혁명위원회는 해산되었다.

소위 '인민주권 확립선언'을 공포한 후 초대 전국 인민 위원회 서기장에 취임했다.

1978년부터 1979년까지는 리비아와 국경을 접한 차드와의 전쟁에 나섰지만 차드-프랑스

연합군에게 패전하고 만다.

1979년,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였다.

그 대신 오로지 혁명 지도자라는 명예 직함만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상의 국가 원수이자

리비아의 모든 국가 업무는 카다피의 지도 하에 돌아가게 되었다.

그 후,반미 주의를 주창하여 미국 군사 기지를 철수시키고 외국 자본을 추방했으며,

이탈리아,프랑스인 등을 추방했다.

외국의 석유 회사들을 추방하고 석유를 국유화했다.

또한 도로와 해운, 항만, 항공 등의 기반시설도 국유화와 국영화로 전환시켰다.


카다피 정권은 반미주의에 입각하여 미국과 성방권을 상대로 로커비 사건(팬암항공기 폭발) 등 수차례의 테러를 감행했다.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은 리비아를 테러리스트 국가로 지목하면서 리비아를 침공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1986년, 미국 공군,해군이리비아를 공습했지만 국제 사회는 미국을 규탄,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


아랍 민족주의자였던 카다피는 중동 지역에 단일 아랍 국가를 건설하려는 시도로 이집트와 아랍 연합 구성에 합의했으나,

중동 전쟁 이후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추진한 평화 정책에 반발하여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

1980년,

시리아와의 합방을 선언했으나 곧이어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나 합방은 무산되었다.

그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과 이란 호메이니에게 싸움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으나,

사담 후세인,호메이니 모두 거절하였다.

이란-이라크간의 전쟁을 관망하였다.

2003년,

미국의 부시 대통령 등이 이라크를 침공하자 이라크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한편 유럽과 서방 세계에 개방을 선언하고,외부의 학술 연구단의 출입을 완화시키기도 했다.

2004년, 미국과 외교관계를 복원시켰으며,

2006년, 미국은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하였다.

2008년9월,

라이스 미국무장관은 트리폴리를 방문하여 카다피와 회담하였다.

또한 과거 이탈리아인의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한 것에 대해 사과하고 이탈리아의 식민 지배 사과를 받아들였다. 

 
카다피 퇴진 시위

42년간 지속되어온 카다피의 장기집권으로 인하여, 카다피에게 반기를 든 시민군으로부터 그의 정치에 반대하는 반정부 시위가 시작되었다.

반정부 시위 직후 리비아 시민군은 벵가지 등의 도시를 장악 후 나토의 지원을 얻어 트리폴리 시를 점령했다.

이후 카다피의 리비아 정부군이 트리폴리를 빼앗기자 카다피는 시르테에 완전히 고립되었다. 카다피가 사망할 당시 상황은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결국 리비아 시민군에게

체포당하던 중 한 시민군이 쏜 총상으로 인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는 집권 초기부터 아랍 사회주의에 근거하여

이집트,시리아와 함께 아랍 공화국 연방 건설을 추진하엿으며,리비아 대수로를 건설하였다. 유전을 개발하고 아프리카의 빈국에서 1인당 GDP 1만달러의 경제 부국으로 탈바꿈 시킨

강력한 지도자였다.

당시 리비아의 노동 복지는 아프리카와 중동을 통틀어 상당히 높은 수준이었으며,

교육,의료가 전면적으로 무상이었다.

그는 파레스타인과 아프리카 내에 존재하는 흑인 해방운동을 비롯한 세계의 혁명 단체들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기도 했다.

카다피는 오사마 빈 라덴을 상당히 싫어했다고 한다.

카다피와 빈 라덴과의 관계는 빈 라덴이 국제 사회의 수배를 받기 시작한 1998년3월로

거슬러 올라오는데, 이 시기는 빈 라덴에 대한 인터폴의 첫 체포영장이 발부된 시점이었다. 이 영장은 카다피가 이끄는 리비아 정부의 청구로 발부되었는데,

그 이유는 빈 라덴의 알 카에다가 카다피의 고향인 리비아 시르테에서 독일 정보기관 요원 부부에 대한 살해를 저지른 혐의 때문이었다.

이 사건을 전후로 카다피는 빈 라덴이 이끄는 알 카에다에 대해 증오하게 되었다.

1인 독재를 추구한 카다피는 알 카에다 등 이슬람 원리주의자들도 강력하게 탄압했으며

이에 맞서 알 카에다는 수차례 카다피 암살을 시도했다.

2001년,9.11 테러 이후에 카다피는 미국의 빈 라덴 색출 작전에 협조하며 알 카에다와 줄곧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2011년,리비아 봉기가 일어나자, 카다피는 이 사건의 배후로 알 카에다를 지목할 정도로

알 카에다에 대한 심한 반감을 드러냈다.


2009년2월부터2010년1월까지,

아프리카 연합 의장을 지냈으며,

1551년 리비아 지역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된 이래로 리비아의 최장기 국가 지도자였다.

그러나 2011년 초에 시작된 아랍의 민주화 시위의 영향을 받아

2011년2월,

가다피 정권에 대항해 반정부 시위가 일어났으며,

2011년8월22일,

자유 리비아군이 크리폴리에 진입하여 그의 아들 둘을 생포했다.

2011년10월20일, 고향 시르테에서 사살되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