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이 후궁을 두지 않은 이유?           2019.03.17.일요일,맑음

왕이 후궁을 두지 않는 일은 드물다.

조선 왕 중에 후궁을 두지않은 왕으로는 단종,예종,경종,수종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에겐 각각 이유가 있었다.

단종은 너무 어렸고,예종과 경종은 건강이 나빴고,순종은 정치 상황이 나빠서 후궁을 둘 수 없었다. 
하지만 현종은 이런 이유가 없었는데도 재위 기간도 15년이나 되는데도 
후궁을 두지 않았다.

아들도 왕비인 명성왕후로부터 얻은 숙종 한 명뿐이었다.

왕조 국가에서 왕위 계승권자가 선정되지 못하면 국가가 흔들리고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으므로

왕위 계승을 위해 아들을 여럿 두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도 현종은 후궁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후궁을 두지 않을 정도로 왕비인 명성왕후를 지극히 사랑했던 것일까?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는 금실이 좋았다고 한다.

현정과 명성왕후가 혼인한 건 1651년이었다.

당시 현종은 11살, 김씨는 10살이었습니다. 
흔히 부부가 금실이 좋으면 딸이 많다는데,현종과 명성왕후도 따을 여럿 두었다.

명성왕후는 1남 5녀를 낳았다.


신하들 또한 후궁 간택을 현종에게 권하지 않았다고 한다.이유가 무얼까?
현종은 어릴 때 지병이 있었다.

지병 탓에 자주 눈병이 나고,얼굴에 종기가 생겼다.

이 때문에 자주 침을 맞았고 때로는 종기를 터뜨려 고름을 짜냈다.

하지만 늘 병상에 있었던 것이 아닌 데다 15년 동안 재위했기 때문에 지병 때문에 후궁을 두지 못한 것도

아닌 것 같다. 

현종이 다른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명서왕후 김씨 때문이 아니었을까?

명성왕후는 질투심이 매우 강하고 성질이 드센 여자였다.

고집도 세고 권력욕도 강했다.

신하들이 현종에게 후궁 간택을 권하지 않은것도 명성왕후와 김우명 일가를 의식해서 그랬던 게 아닐까? 

 

 

그런데 현종이 딱 한 번 명성왕후 이외의 여자를 품은 적이 있었다.

그녀는 군기시(軍器寺) 서리(胥吏) 김이선의 딸 김상업이었다.

김상업은 현종의 승은을 입은 유일한 궁녀였으나 후궁이 되지는 못했다. 

원래 궁녀가 승은을 입어 아이를 낳으면 후궁이 되나 승은을 입고도 아이를 낳지 못하면 후궁의 첩지는 받지 못하고 특별 상궁이 된다.

그런데 상업은 후궁도,특별 상궁도 되지 못하고 그냥 궁녀 신분으로 결국 궁궐에서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녀를 내쫓은 사람은 명성왕후가 아니었을까? 

⊙ 현종과 숙희 공주       2019.03.14.목요일,맑

현종 야사가 거의 전하지 않는 평범한 왕이다.

조선 시대의 왕 중에서는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며,

장기간 왕위에 있었던 왕들 중 유일하게 후궁이 없다.

경종이나 단종같이 병약하거나 즉위 기간이 짧았던 왕들,

또 추존왕 들을 제외하면 후궁이 없는 왕은 현종 뿐이다.

현종 시기에
효종의 죽음으로 인한 1차 예송 논쟁이 일어나고,

인선 왕후(효종의 비)의 죽음으로 2차 예송 논쟁이 일어나 서인과 남인의 갈등이 최고조였다.


현종이 후궁이 없던 이유는 예송 논쟁의 주축이었던 서인 집안의 명성 왕후의 성격이 강해서 말도있고,

'경신 대기근'을 비롯한 흉작이 계속되어 현종의 죄책감을 자극해 후궁을 둘 수 없게 했다는 말도 있다.

당시 조선 인구의 5분의1인 100만명의 백성이 굶어 죽은 그 경신 대기근

1670년과 1671년 사이의 일로 전대미문의 기아 사태였다.

오죽하면 임진왜란을 직접 겪은 노인들이 전쟁 때도 이보다 나았다고 했을 정도란다.

현종 시기의 '경신 대기근'과 숙종 시기의 '을병 대기근'은 일종의 자연 재해로 어찌할 수 없는 재앙이었으나 백성들이 수없이 굶어 죽자 젊은 왕 현종은 몹시 괴로워했다고 한다.

신하들은 장렬 왕후의 복상 문제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싸우는데 백성들은 구제할 길이 없고,

현종은 그런 상황에서 후궁을 둘 수가 없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 워낙 몸도 많이 아팠는데 재위 초부터 눈과 습창,종기 때문에 치료 받았단 기록이 끊이지 않는다.

서른 넷의 젊은 나이로 죽어간 현종은 왕들의 고질병인 스트레스성 질환으로 고생한 것이다.

 

숙휘 공주는 청나라에 볼모로 갔던 효종과 인선 왕후의 넷째딸 이다.

1653년 효종 4년,11살에 정제현에게 시집 갔으나  20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되었는데,

남편과 시아버지 부부, 그리고 시아버지의 동생이 거의 같은 시기에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본래 정제현은 우상 정유성의 손자이다.

이렇게 죽음이 이어지자 곡절이 있다고 생각해 집주변을 파헤쳐 흉물을 캐내고,

정유성의 관기 출신 첩 설매와 나인,여종들을 국문했지만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숙휘 공주의 아버지 효종은 종기를 치료 받다 과다 출혈로 죽었다.

그때 시술을 맡은 어의 신가귀는 수전증이 있었다고 한다.

 

북벌 의지를 보이며 몹시 검소하게 살았던 효종과 넷째지만 큰딸이 일찍 죽어 실질적인 셋째딸인 숙휘공주 사이에는 재미있는 야사가 전해진다.

 

효종은 여동생 숙휘 공주가 수놓은 치마를 한벌만 해달라 졸랐더니 거절한다.
자수놓은 스란 치마같은 화려한 사치품이 유행해 효종이 단속하고 신하들도 경계하는 경우가 많았다.

효종은 사위가 밥을 물에 말아 먹다 남기니 먹을 만큼만 말아야지 하면서 꾸짖었다고 한다.

효종과 현종이 딸이자 여동생인 공주들에게 무척 신경쓴 건 사실이지만,

효종은 '내가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 검소함을 솔선하고자 하는데, 어찌 너로 하여금 수놓은 치마를 입게

하겠느냐'며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 효종은 내가 죽거든 입으라 했지만 공주는 과부가 되어 입으라고 해도 입을 수가 없었다.

숙휘공주가 남편과 시아버지를 한번에 잃고 2남 1녀의 자식들 중 아들 정태일을 제외한 모든 자식들이

죽고  정태일 마저 후손없이 죽는 불행을 겪는 공주라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효종이 수치마 하나 쯤은 사줬을 것이다.

 

어쨌든 정사와 야사 속에 등장한 현종은 흠잡을 곳도 없지만 강경하지도 않았던 왕이란 인상이 강하고 ,

숙휘공주는 상당히 귀여움을 받았지만 사치한 공주였단 느낌이 강하다.

숙휘 공주는 고귀한 신분에도 불구하고 평생을 홀로 살다 죽었다 한다.

 

⊙ 예송 논쟁(禮訟)          2018.03.14.목요일,맑음

예송이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느냐 하고 벌였던 서인과 남인의 논쟁이다.

1차 기해예송은

   효종이 사망하자 자의대비(장열왕후;인조의 계비)가 계모로서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느냐로 벌였던

   논쟁으로,

   이조 반정과  소현 세자의 죽음으로까지 되짚다 보면 효종과 현종의 정통성을 건드리기 때문에 목숨을

   격렬한 싸움이 이어졌다.

   서인이 결과적으로는 이기지만 현종에게 미운 털이 박히게 되고 만다.
2차 갑인예송은

   며느리인 효종의  비인 인선황후 장씨가 죽자

   자의대비(장열왕후)가 시어머니로서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느냐로 벌인 논쟁이다.

   현종15년,1차 논쟁 때 말싸움은 이겼지만 하마터면 역적으로 몰릴 뻔 했던 서인들이

   이번에는 더 버티지 못하고 정권을 내놓는 것은 물론,

   나는 새도 떨어 뜨린다던 송시열까지 도태되는 대사건으로 번졌다.

   남인의 승리였다.

⊙ 조선왕 제18대 현종 이야기   2019.03.13.수요일,

현종; 조선 제 18대 왕,효종의 맏아들

이름; 이연

생졸; 1641-1374,34세

재위기간; 1659-1674,15년

능;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숭릉(崇陵).

가계도

   명성왕후 김씨

     19대; 숙종

     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

 

재위 기간 중 양란을 겪으면서 흔들렸던 조선 왕조 지배 질서의 확립을 위해 선왕인 효종이 추진해오던

명분론적 북벌은 중단했으나,군비 강화에 힘썼으며 재정구조의 재건을 위해서 호구수의 증가와 농업의

발전,조세징수 체계의 확립에 노력했다.

즉위 직후 벌어졌던 예송 논쟁에서 서인의 주장을 물리치고 기년복을 채택함으로써 서인 정권이 무너지고

남인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여러 국가제도의 개선에 힘썼으며,강화도의 정족 산성에 새로이 사고를 마련해 역대 실록을 보관하게 했다.


1641년 인조19년,현종은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청의 볼모로 있을 때 심양에서 인선왕후 장씨 사이의

장자로 태어났다.

현종은 왕세손 책봉과 11세의 나이로 왕세자가 되었으며,

1659년 효종10년,효종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효종의 죽음과 함께 10년의 재위 기간 내내 이루고자 했던 북벌의 꿈도 물거품이 되었고,

북벌론을 주장했던 송시열 만이 여전히 북벌을 매개로 조정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현종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송시열은 효종의 부름을 받고 입조했으며,그가 효종의 극진한 존경과 예우를 받은 것은 북벌 때문이었다.

그러나 효종의 기대와 달리 송시열의 북벌론은 오히려 효종의 북벌 의지를 가로막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런 가운데 효종이 죽고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송시열은 효종이 장자가 아니었음을 들어 현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까지 취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불거진 두 번의 예송(禮訟)은 현종의 위상을 대변하는 사건이자,

조선 후기의 권력 구도를 규정짓는 주요한 사건이였다.

 

현종은 김육의 아들인 김우명의 딸인 명성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1남3녀를 두었으며,

장자가 19대 왕 숙종이다.

송시열의 시대에 현종이 의지할 곳은 외척인 청풍 김씨 집안 밖에 없었다.

 

서인과 남인의 당쟁 속에서 무시된 왕의 권위 속에서 두번의 예송이 일어났다.

첫번째 기해예송으로 효종이 죽자 일어났다.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장렬왕후)의 상복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논쟁의 핵심이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은 효종이 인조의 적장자였다면 당연히 그 어머니가 3년복을 입어야 하지만,
효종이 둘째 아들이기 때문에 중자복인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남인들은 효종이 왕실의 종통을 이었으므로 적장자로 보아 3년복을 입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결국,이 문제는 단순한 상복 문제를 넘어 효종이 적통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까지 확대되었다.

이는 효종은 물론이고 아들인 현종의 정통성마저 위협하는 매우 민감한 사안이었다.

송시열은 4종설을 들어 1년복을 주장했다.

4종설이란 3년복을 입을 수 없는 4가지 이유를 말하는 것으로,

 1.적자로서 병 때문에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경우,

 2.서손이 뒤를 이었을 경우,

 3.서자가 뒤를 이었을 경우,

 4.적손이 뒤를 이었을 경우 그 부모는 1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송시열은 효종이 세 번째 이유에 해당된다고 보았다.

이는 효종과 그의 아들인 현종을 적통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송시열의 태도가 그대로 반영된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효종에 대한 정통성 논란으로,

자칫 조정에 커다란 분란을 불러일으킬 것을 염려한 영의정 정태화는 서둘러 장자,차자 구별 없이 1년복을 입는다는 규정을 들어 기년복으로 확정했다.서인인 송시열 역시 동의했다.

그러나 1년 뒤인 1660년 현종1년3월,남인인 허목이 1년복이 잘못되었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면서 논쟁에 다시 불이 붙었다. 허목은 장자가 죽으면 적처 소생의 둘째 아들을 장자로 삼을 수 있으므로 효종이 둘째

아들이라도 종통을 이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송시열이 4종설을 들먹이며 말한 서자는 중자(衆子)가 아니라 첩자(妾子)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효종에게 해당되지 않을 뿐 아니라 대를 이은 둘째 아들을 위해 1년복을 입는다는 규정은 찾아볼 수 없다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이에 송준길과 송시열이 다시 반박했다.

허목의 주장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지만 서인이 정국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허목의 주장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런데,윤선도의 상소가 올라오면서 예송은 학설 논쟁에서 정치 논쟁으로 번졌다.

윤선도는 상소에서 허목의 주장이 옳고 송시열의 주장이 틀리며,

송시열과 송준길이 효종의 덕은 있는 대로 다 받고 효종에게 각박한 까닭이 무엇이냐고 공격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상소가 받아 들여지는가 받아 들여지지 않는가는 왕의 권세가 든든한지 그렇지 않은지와 관계가 있고,그것으로 국운이 이어지고 이어지지 않음을 판단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이러한 윤선도의 상소는 파란을 몰고 왔다.

서인들은 윤선도가 예론을 빙자해 상하를 이간질한다며 맹렬히 비난하고 그를 문책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윤선도의 상소문은 불태워지고 그는 삼수(三水)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현종은 내심 윤선도의 주장에 동조했으나 여론에 밀려 그를 처벌할 수 밖에 없었다.

서인들의 뜻대로 1년복으로 마무리되었으나 논란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예송은 중앙 정계에서만 논란이 된 것이 아니라 성균관과 지방 유생들에게까지 번져나갔다.

저마다 옳다고 생각하는 당파의 주장을 옹호하면서,

상대 당파를 비난하는 유생들의 상소가 전국에서 끊임없이 올라왔다.

이는 조선 후기의 당쟁이 중앙의 벼슬아치들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림에게로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두번째 갑인예송으로 선왕의 정통성을 다시 세운 현종이다. 
1674년 현종15년 2월,효종비인 인선왕후 장씨(우의정 장유의 딸)가 죽었다.

이번에도 대왕대비인 자의대비 조씨의 상복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었다.

즉,인선 왕후를 조대비의 장자부(長子婦)로 볼 것인가,중자부(衆子婦)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또다시
거론된 것이다.

그런데 예조에서는 처음엔 조대비의 상복을 1년복으로 정했다가 나중에 다시 대공복(9개월복)으로 고쳐

올렸다.이는 현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기해예송 때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하던 발언들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터였다.

그러던 차에 그해 7월,영남 유생 도신징이 기해 예송 당시 조대비의 복제는 장자복이었고,

따라서 이번에도 장부복인 1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현종은 이 상소를 가지고 있다가 대신들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에게 내보이며 조대비의 복제를 9개월복

으로 바꾼 까닭을 따져 물었다.

또한 김석주에게 기해년의 복제가 어디에서 유례된 것인지 조목조목 따져서 보고하도록 명했다.

김석주는 현종의 외척인 청풍 김씨의 일원으로,같은 서인이지만 송시열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김석주는 현종의 명에 따라 '의례주소'를 해설해 올리면서,

기해년에 의견이 갈렸던 '서자'의 해석을 허목의 의견과 같이 '첩자'로 규정했다.

이는 송시열의 주장을 우회적으로 비난하는 것이었다.

결국 현종은 이를 근거로 인선왕후 상에 대한 조대비의 복제를 1년복으로 다시 바꾸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일갈했다.

가시의 소에 이르기를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가 낳은 둘째 아들을 취해 세우고 이를 역시 장자라 한다." 했으니,경들이 오늘날 종묘의 일을 주장하지 못하는 사람을 가지고 인증한 것은, 종묘의 일을 주장하지

못하는 자는 산 사람을 일컫는 것이요, 세워서 역시 장자라고 부른다는 것은 죽은 자를 일컬음이니,

경들이 이와 같은 이치에 맞지 않은 어그러진 말을 가지고 예율을 정하고,

선왕을 가리켜 '체이부정(적자이면서 장자가 아닌 경우)'이라고 지목하니,

임금에게 박하고 어느 누구에게 후하게 한단 말인가. 내 실로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니 결단코 막중한 예법을 자기 당파에 덩달아 붙은 의논으로써 제도를 단정할 수 없으니, 당초에 마련한 국가의 법전에 있는 기년

제도에 의해서 시행하도록 하라.

기해예송 때 서인들에게 밀려 달성하지 못했던 효종과 자신의 정통성을 바로 세우고자 했다.

이틀 동안 네 차례에 걸쳐 열린 빈청 회의에서

"중자가 승통(承統)하면 장자가 된다."는 결의를 얻어 내고자 했던 것도 이러한 의도 때문이었다.

현종은 이러한 조항을 '경국대전'에 새로 보완해 넣으려고까지 했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이런 가운데 서인의 반발이 계속되자,

현종은 김석주를 앞세워 서인 세력을 몰아내고 남인 세력을 끌어들였다.
이것이 서인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현종의 조치는 숙종 때에 펼쳐진 환국으로 이어지며 왕권을 강화할 빌미로 작용했다.

현종은 그해 8월에 갑작스럽게 병세가 악화되어 서거했다.

향년 34세, 재위 기간은 15년이었다.

예송에 가려지기는 했어도 현종은 재위하는 동안 양란으로 혼란해진 조선의 지배 체제를 재확립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다.

비록 효종의 북벌 정책은 포기했지만 군비 강화에는 여전히 힘썼다.

조세징수 체계의 확립에도 노력을 기울였으며,대동법을 호남 지방으로 확대 실시했다.

 

⊙ 안빈 이씨        2019.03.13.수요일,맑음

안빈 이씨(1녀);

효종의 제1후궁으로 효종의 7녀 숙녕옹주를 낳고 1693년(숙종19)10월23일에 별세 하였으며,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사릉리에 있다.효종대왕이 심양의 볼모로 있을 때부터 함께 이었다
1녀인 숙녕옹주는 금평위 박필성에게 하가했다.  



⊙ 효종의 딸 숙희 공주          2019.03.13.수요일,맑음

숙희 공주(淑徽公主);

숙희공주은 효종의 딸로서 인평위 정제현에게 하가하여

1661년 현종 2년에 아들 정태일을 낳았고,다음해인1662에 남편 정제현이 사망하여 21세의 젊은 나이로

청상과부가 되었다.

외아들인 정태일 또한 1685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후사없이 요절하였다.

1696년 숙종 22년.공주의 병이 심해져 숙종이 직접 병문안을 갔으나 별 차도가 없이 10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숙종이 친히 공주의 집으로 조문을 가고 제수를 넉넉히 내렸다.


⊙ 효종의 딸 숙정공주      2019.01.22.화요일,맑음

17대 효종의 딸이자 18대 현종의 누이 동생인 숙정공주는

숙정공주와 그의 오빠 현종은 아버지 봉림대군이 볼모 생활을 하던 심양에서 태어났다.

현종은 조선 왕조 역대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왕이다.

수리산 기슭 속달동 덕고개 마을에 가면 숙정공주의 묘를 만날 수 있다.

숙정공주는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 사이에서 태어난 1남 6녀 중 다섯째 딸이다.

숙정공주는 12세때 ​9살의 정재륜을 만나 혼인하게 된다.

궁궐에서 지내던 공주들이 칠거지악이 허용되는 조선시대 사가로 시집와서 무난하게 결혼생활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던 듯 하다.임금인 아버지는 시집간 딸에 대한 걱정이 끊이질 않았다.

공주를 시집 보낼때 집과 땅을 내어 주기도 하고 결혼 후에도 남편보다 높은 신분으로 대우를 받게 한다.

공주 며느리는 시부모에게 절을 하지 않아도 되었고,시집살이를 시키지 못하게 했을 뿐아니라 남편이건

시부모이건 공주에 대한 하대는 화를 면치 못하게 했다.

그러나,이러한 조치는 출산 중 오히려 공주들을 단명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정재륜과 숙정공주 사이에는 1남1녀가 있었는데 공주가 죽은 후 아들도 후사없이 죽게 된다.

숙정공주가 24살의 어린 나이에 죽게 되자 현종은 누이 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며 300명의 조묘꾼을 보내

공주의 예장을 치르게 하였다.

숙정공주가 세상을 뜬해에는 전국적으로 천연두가 돌았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들과 부인을 잃은 정재륜은 상심하며 지내다가 숙정공주 사후 13년이 되던해에 임금에게 상소를 올리게 된다.

내용은 부마의 재취(새 장가)를 허락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재신들의 반대로 정재륜의 상소 이후 다시는 부마가 공주 사후 재혼을 계획하지 못하도록하는

'부마 재혼 금지법'을 만들게 된다.

이후 정재륜은 76세까지 혼자 살다 공주곁에 묻히게 된다.

지금 숙정 공주묘는 부부가 쌍분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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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선왕후 장씨      2019.01.22.화요일,맑음(1남6녀);    

인선왕후 장씨; 조선 제17대 왕 효종의 비

생졸; 1618년(광해군10)12월25일-1674년(현종15년)2월24, 57세

본관; 덕수

부; 반정 공신인 우의정 신풍부원군 장유의 딸

모; 김씨는 우의정을 지낸 김상용의 딸


인선왕후 장씨는 1618년(광해군10년), 시흥 장곡동 안골 마을에서 출생하였다.

인선왕후 장씨는 우의정 장유의 딸로 효종보다 한 살 위다. 
1631년(인조9), 14세로 당시 봉림대군이던 효종과 가례를 올려 풍안부부인에 초봉되고,

   병자호란 후 봉림대군과 함께 선양에서 8년간의 볼모 생활을 하였다.


1645년(인조23)에는 청나라에 볼모로 있던 소현세자가 돌아와 변사하자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 됨에

   따라 세자빈이 되었다.봉림대군이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의 심양,연경 등지에서 볼모살이를 할 때 함께

   가서 타국생활을 하였다.이 곳에서 현종을 낳았다.1649년(인조27년) 효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고,

10년 뒤 1659년(효종10년)에 효종이 머리에 난 종기에 침을 맞다가 피를 너무 많이 쏟아 재위 10년만에

   사망하였다.이로서 북벌론은 물거품이 되었고 아들 현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세력이 커진 조정대신들에

   의해 실권에서 멀어져 갔다.아들 현종이 즉위하자 대왕대비로서 효숙의 존호를 받았다. 

1674년(현종15년)2월24일에 승하하니 57세였다.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있는 영릉에 효종과 같이 안장되었다.


 


⊙ 김상헌          2019.01.22.화요일,맑음

김상헌(金尙憲);생졸 1570-1652 조선 중·후기의 문신, 학자이다.

병자,정묘호란시 척화대신으로 이름이 높았으며 효종의 묘정에 종사되었다.

본적; 안동

 

3세 때 큰아버지인 김대효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윤근수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소학(小學)》 공부에 힘썼으며 성혼의 도학에 연원을 두었다.

1590년에 진사가 되고, 1596년(선조 2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통례원 인의(引儀)가 되었다. 이후 부수찬·예조좌랑·부교리를 역임했고, 예조좌랑·시강원사서·이조좌랑·홍문관 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32세 때인 1601년 제주도에서 발생한 길운절의 역옥을 다스리기 위해 안무어사로 임명되어 6개월 동안 제주도에 파견되었다. 이후 정인홍 등이 성혼 등을 비판할때 연루되어 외직으로 좌천되었다. 이후 고산찰방(高山察訪)·경성판관(鏡城判官) 등을 지내고 1608년 문과중시에 급제하여 사가독서 한 후 동부승지가 되었으나,

이언적과 이황을 배척하려던정인홍을 탄핵하였다가 광주부사(廣州府使)로 좌천되었다.

이후 이황,이언적 등을 문묘에 종사하는 일을 놓고 1611년정인홍 등이 상소를 올려 이황과 이언적을 격렬히 비난하자, 승지로 있으면서 정인홍을 규탄하였다.

1614년(광해군 6년) 위성원종공신에 책록되었다.

161년10월 부터 1618년에 인목대비 폐모론이 나오자, 그는 폐모론에 반대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이조참의에 발탁되었고,서인 청서파의 영수가 되었다.

1624년 인조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 등이 거병하여 이괄의난이 일어나자, 그는 인조에게 누차 상소를 올려, 붕당·파벌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하며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정 이후에도 강직한 성격으로 누차 시사를 비판하다가, 반정 주체들의 뜻에 거슬려 향리로 귀향하였다. 이후 대사간·이조참의·도승지·부제학을 거쳐,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구원병을 청하였고, 돌아와서는 후금(後金)과의 화의를 끊을 것과 강홍립(姜弘立)의 관작을 복구하지 말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인조가 자신의 부친 정원대원군을 대원군에서 다시 왕으로 추존하려 하여, 이른바 추숭논의가 일어나자 예법에 어긋남을 들어 그에 강력히 반대하였고, 찬성한 반정공신 이귀 등과 갈등을 빚어 다시 낙향하였다.

그뒤 다시 육조의 판서 및 예문관,성균관의 제학 등을 지냈다.

공조,형조,병조,예조,호조,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1633년 사헌부대사헌에 기용되었는데, 이후 2년간 5차례나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강직한 언론활동을 벌이다가 여러 고관들과 충돌, 출사와 사퇴를 여러번 반복하였다.

1636년 예조판서로 재임할 때,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하였으며 주화론을 배척하고 끝까지 주전론을 펴다가 대세가 기울어 항복하는 쪽으로 굳어지고 인조가 항복하자 최명길(崔鳴吉)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고 통곡하였다. 항복이 정해지자 식음을 전폐하고 교수 자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는데,

최명길은 이를더러 가족들이 다 보는 앞에서 자살을 시도해서 죽을 수나 있겠냐며 쇼를 한 것이라 비난했다.

정축하성(소위 삼전도 굴욕) 때 인조를 따라가지 않고 남한산성 뒷문으로 나가 안동의 학가산에 들어갔다. 와신상담해서 치욕을 씻고 명나라와의 의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린 뒤 안동 소산으로 은퇴하였다.

1638년 사헌부 장령 유석(柳碩) 등으로부터 "김상헌이 혼자만 깨끗한 척하며 임금을 팔아 명예를 구한다."라는 내용의 탄핵을 받았다. 그러나 인조는 받아들이지 않고 곧 조정에 다시 들어오라는 명을 내렸으나, 조정에서 군대를 보내 청이 명을 치는 것을 돕는다는 말을 듣고 의연히 반대하였다.

 

 

1639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요구한 출병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의 요구로 압송되어 4년 뒤에야 풀려났다.선양에 잡혀 있을 때, 여진족은 수시로 회유하였으나, 그는 강직한 성격과 기개로써 청인들의 타협 요구를 거절하고 끝내 조금도 굽히지 않아, 청나라 사람이 의롭게 여기고 칭찬해 말하기를 “김상헌은 감히 이름을 부를 수 없다.라고 했다.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하였지만,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인조와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석실(石室)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을 추진할 때 그 이념적 상징으로 대로)라고 존경을 받았으며, 1649년 대학자로 존경을 받는 가운데 의정부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수차례 거절하며 은퇴의 뜻을 밝히고 효종에게 인재를 기르고 대업을 완수할 것을 강조하였다.

김육이 추진하던 대동법의 시행을 김집 등과 함께 강력 반대하기도 하였다. 이후 영돈령부사로 있다가 1650년 녹봉을 수령하지 않았다 하여 효종이 녹봉을 내려 승지가 달구지에 싣고 갔으나 업무를 보지 않았으니 받지 못한다며 도로 실어가게 하였다. 그해 8월 다시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효종은 불허하였다.

1651년 5월 28일 영돈녕부사직 등 모든 직함을 사직하였으나 불허하였고, 11월 13일 병이 나자 어의(御醫)를 보내어 진찰하고 약물을 하사하였다.

1652년 다시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거부되었고, 영돈령부사로 재직 중 사망하였다.

1653년 특명으로 의정부 영의정이 증직되었다. 명필로도 이름이 높았으며,

문집으로 '청음전집'40권이 있다.

 

그의 후손에서 13명의 재상과 수십 명의 판서, 참판이 배출되었고, 순조비, 헌종비, 철종비 등 왕비 3명과, 숙종의 후궁 영빈 김씨가 모두 그의 후손이었다. 죽은 뒤 대표적인 척화신으로서 추앙받았고, 1661년(현종 2) 효종의 묘정에 종사되었다. 묘는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 안동김씨분산에 있다

⊙ 김자점 (金自點)      2019.01.22.화요일.맑음

김자점; 서인

생졸; 1588~1651,64세

 

1623년,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하고 능양군(인조)을 추대한 인조반정의 1등 공신으로 책록된

서인 세력의 무장이다.

병자호란(1637) 당시 도원수로서 임진강 이북에서 청군을 저지해야 할 총책임을 맡고도 전투를 회피하여

적군의 급속한 남하를 방관하여 삼전도의 치욕을 초래케 했다.
그 시절 그는 탐관 오리의 중심에 서서 백성들의 원성의 대상이 됐다.

그는 인조와 소현세자 사이를 이간질 하기도 하였다.

광해군 시절,임경업 장군이 청의 남침로인
의주산성을 지키고 있어 범접을 못하게 하였는데,

김자점이 임장군을 남침 길목에서 백리나 떨어진 고지 자모 산성으로 이동시켜 청의 길을 열어주었다.

황해도에서도 방어군을 작동 시키지도 않고,피란 부터 서두르다 삼전도의 항복을 하게했다.
병자 호란이 끝난 뒤 군율로 처형해야 한다는 비난 속에
유배에 처해졌으나,

1640년(인조18) 1월 강화유수로,그해 2월에는 호위대장으로 재기용되었다.

그는 인조의 비호 속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1646년에는 영의정에까지 올랐다.

이후 자신의 손자인 김세룡을 인조 소생인 효명옹주 결혼시킴으로써 인조와의 밀착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그 후에도 
청나라의 위세에 빌붙어 정치적 입지를 굳혔고,반청적인 성향의 임경업을 처단하는 데 앞장섰다.

 

1649년,효종 즉위 이후 송시열,송준길 등 사림 세력들이 대거 조정에 등용되고,이들을 중심으로 북벌론이 대두되자 위협을 느끼고,청나라의 앞잡이인 역관 정명수 등을 통해 그 계획을 청나라에 누설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간들의 극렬한 탄핵을 받아 광양으로 유배되었고,

유배지에서 1651년 조귀인과 짜고 다시 역모를 획책하다가 아들 김 익과 함께 능지처참을 당했다.

이를 “김자점의 역모 사건”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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