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종 정원군        2018.12.23.일요일,맑음

정원군 이부(李琈);

생졸; 1580(선조13)-1619(광해군 11)

가계도

부;선조

모;인빈김씨

  처; 인헌왕후

  자; 4남

       능양군(인조)

       능원대군,

       능창대군; 1615년 죽임을 당함

             음보는 고려와 조선 시대에 중신 및 양반의 신분을 우대하여 친족 및 처족을 과거와 같은 선발

            기준이 아닌 출신을 고려하여 관리로 사용하는 제도)로 벼슬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지내다가

            1615년(광해군 7) 정원군의 차남 능창군을 왕위에 옹립하려 했다는 신경희의 옥사로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던 중 장살되었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이후 신원이 복권되었다.


16대 인조의 아버지인 원종 정원군은 선조의 아들로,어머니는 좌찬성 구사맹의 딸인 인빈 김씨이다.

인조 및 능원대군,능창대군을 낳았다.

1587년정원군에 봉해지고, 1604년 임진왜란 중 왕을 호종하였던 공으로 호성공신 2등에 봉하여졌다.

인조 반정을 계기로 대원군이 되었다.

사후 1632년(인조 10년) 원종이란 묘호를 정하였으며 부인은 인헌왕후로 추존되었다.

1635년(인조 13) 종묘에 부묘되었다.능호는 김포의 장릉(章陵)이다.

 

1607년(선조 40년)에 능양군에 봉해졌다.

1615년 신경희의 옥사로 둘째 아우 능창군이 죽임을 당하자 아버지 정원군은 홧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 능양군은 빈소에서 통곡하며 복수를 다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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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조 반정        2018.12.21.금요일,맑음

1638년 광해군10년에 있었던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 대비 서궁 유폐 사건은

지금껏 대북 세력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들에게 좋은 구실을 주었다.

서인 이귀,김류,김자점,이괄 등은 마침내 이것을 문제삼아 군사를 일으켜 광해군을 폐출하고

왕의 조카인 능양군(인조; 생졸1595-1649.재위기간;1623-1649)을 옹립하니,

이것이 이른바 인조 반정이다.

 

능양군은 추촌왕 원종 정원군(1580,선조13년-1619.광해군11년)의 맏아들이다.

그의 부친 정원군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서 인빈 김씨의 소생이었다.

정원군은 왕자로 있었을 뿐 인조의 등극 이전에 작고하였는데,

인조가 반정을 이룬 다음 그의 부친을 원종(元宗)으로 추존하였다.

 

1623년3월12일 밤,오랫동안 물샐 틈 없는 준비를 해오던 반정의 군사들은 드디어 일어났다.

이때 능양군은 친히 여러 공신들과 함께 연서역으로 나아가 이서가 거느리고 오는 6천 명의 군사를 맞았다. 그리고는 즉시 장사 이기축으로 하여금 창의문을 부수도록 하여 도성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창덕궁에서 훈련대장 이흥립이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을 지키고 있다가 반정의 군사가 당도하자 그와 합류

하였다.이흥립은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박승종과는 사돈간이었다.

더구나 그가 궁궐의 수비를 맡고 있었으므로 반정의 성공에는 대단히 필요한 존재였다.

그래서 일찍부터 이귀 등이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놓았다가 한번은 그 사실을 박승종이 알아차린 적이

있었다.이흥립의 딸이 박승종의 둘째 며느리가 되어 서로 사돈 사이였지만 박승종에게는 그런 관계가

문제가 아니었다.

박승종은 즉시 광해군에게 사실을 아뢰고 이흥립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옆에 있던 김상궁의 말만 믿고 따르는 광해군은 박승종의 말을 곧이 듣지 않았다.

그때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이흥립은 사돈 박승종을 찾아가 누누이 변명하였다.

그런데도 박승종은 끝까지 듣지 않고 장차 직권으로 이흥립을 잡으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마침 밖에 나갔던 박승종의 둘째 아들 즉 이흥립의 사위가 들어왔다.

이흥립은 그를 보자 와락 달려들어 사위를 붙들고 늘어졌다

.“이보게 사위, 영상 대감께서 내가 역모에 가담했다고 하시는구먼. 아 글쎄, 억울한 일도 분수가 있지.
자네가 좀 해명해 드리게나.”그러고는 통곡을 하니,박승종의 아들은 그 말을 듣고 자기 부친에게 놓아주라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이흥립은 위태로운 목숨을 건지게 되었고, 능양군 또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능양군은 이흥립에게 명하여 종묘와 대비전이 있는 서궁을 수비케 한 다음 금호문 밖에 당도하니,

수문장 박효립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활짝 열고 맞아들였다.

그리하여 장졸들은 무난히 궁내로 돌입하였다.
그리고 공사에 쓰려고 쌓아둔 나뭇더미 위에다 불을 질렀다.

타오르는 불길, 그것은 반정에 성공하였다는 신호이기도 하였다.

사실 그들은 대사를 위하여 칼을 빼어들고 집을 나올 때 그들 가족에게 만약 화광이 오르거든 성공한 줄

알고, 그렇지 않거든 실패한 줄 알라고 일러두었던 것이다.

능양군은 돈화문 안에 등상(牀 : 나무로 만든 걸상)을 놓고 앉아 궐내 각 직소의 관원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병조판서 이하 여러 관원들이 모두 달려 나와서 절하고 엎드렸다.

이때 반정군이 새로 호응하는 군사 수천 명과 함께 물밀듯이 정청 안으로 달려 들어가니 광해군의 좌우에

있던 시신들은 모두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술에 취하여 몽롱히 잠들려 하던 광해군만이,왠일이냐하고 물었다.“큰일났습니다. 큰 변이 일어났습니다.”다급해진 목소리로 한 내시가 아뢰었다.

광해군은 그만 허겁지겁 일어나서 대궐 담을 뛰어넘어 도망쳐버렸다.
반정군이 밤새도록 그를 찾다 못하여 날이 새자 그들은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능양군은 궐내를 떠나지 못하고, 그 대신 승지 이덕형이 서궁으로 인목대비를 모시러 갔다.

그러나 대비는 능양군이 친히 오지 않음을 불쾌히 여겨 이덕형을 도로 보내었다.

이때 이귀가 능양군에게 말한다.

“일이 광명 정대한데 별다른 염려가 어찌 있겠습니까. 또한 주상이 몸소 가서 청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시켜
맞이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니 군사는 창덕궁에다 머물고 주장이 친히 서궁에 문안드리는 것만

같지 못하오.”

그러자 능양군은 이귀의 건의를 받아들여 친히 신하들을 거느리고 대비전 앞에 나아갔다.

대비는 그제야 좌우를 명하여 선조의 허위(虛位)를 배설하고 능양군과 제신들을 맞아들였다.

신하들이 차례로 뵈온 다음 어보(御寶)를 바치니 대비는 어보를 받아든 채 감개무량한 듯,

지난날 겪어온 고초담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데, 서너 시간이 지나도록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 신하들은 초조하여 아뢰었다.
“처분할 일이 많사오니 속히 환궁해야 되겠습니다.”

그제야 대비는 이야기를 그치고 어보를 받들어 능양군에게 전하였다.

“위로 선왕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 백성들 마음을 편안케 하여 일국이 화합하도록 하라.”

능양군이 세 번 사양하다 받으니 신하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이렇게 하여 등극한 이가 인조이다.

그는 대비를 모시고 즉시 창덕궁으로 들어가 허물어진 기강과 국정을 바로잡고 팔도에 고시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안도케 하였다.

 

한편 광해군은 대궐 담을 뛰어 넘어 자수궁으로 도망가다가 정몽필을 만났다.

정몽필이 광해군에게 말을 주자, 광해군은 그간 자기가 총애하던 안국신의 집으로 갔다.

이에 안국신은 광해군에게 상중에 입던 흰 개가죽 남바위를 쓰게 하고 생포로 지은 철릭과 삼띄, 짚신 차림을 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의원인 정남수가 알고 대궐에 알리었다.

이에 대궐에서는 도총부 군사를 보내 그를 데려오도록 하였다.

대비는 광해군이 잡혀 들어옴을 보자 뜰아래 무릎을 꿇어 엎드리게 하고 36가지 극악대죄를 들어 그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말끝을 맺었다.“이러하니 너는 마땅히 춘추의 대의 아래 중벌을 받아야 한다.”

즉 죽어야 한다는 말이었으리라.

그러나 인조와 제신들이 극형을 베푼다는 것은 너무 과하다고 하며 살려주기를 간청하였으므로 대비도

노여움을 낮추어 그의 처리를 인조에게 일임하였다.

이에 인조는 광해군을 강화도에 위리안치시켰다가, 다시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이때도 대비는 광해군과 그의 처첩들을 따로 두라고 하였으나,

인조가 함께 있게 하고 노비도 몇 명 주어 의식 거처를 어렵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아들은 땅을 파고 울타리 밖으로 나가 도망 치려다가 붙들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뒤 부인 유씨는 며칠을 굶다가 죽어버렸고, 그의 첩도 자결하여 죽었으므로 광해군은 부끄러움과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병들어 앓다가 얼마 뒤에 죽었다.

 

반정이 일어나던 날 대북 이이첨,정인홍,유희분 등은 그들이 낮에 올린 정청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느라고
궐문 밖에서 지체하고 있었다. 이들이 지체하고 밤에 되어서 별안간 자하문 쪽에서 함성이 일어나며 장안이 삽시간에 발칵 뒤집혔다

.“아! 모반을 꾸민다는 게 사실이었구나!”

그들은 허둥지둥 도망치다가 이윽고 군교에게 붙들려 처형되었다.

인조는 반정을 이룩한 다음,

승지 이덕회를 제주도로 보내어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를 모셔왔으며,

죄없이 귀양간 사람들을 모두 풀어서 제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폐가 되는 일은 모조리 고치고,축문을 지어 우주 제신에게 고하였으며

고문(告文)을 팔도에 반포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편안케 하였다.

 

 

인조반정과 광해군 폐위와 폐위이유

광해군이 집권한 후 이이첨,정인홍 등 대북파를 중용하면서 독단적인 정치를 감행하자,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서인세력들은 광해군의 여러가지 실정과 폐단을 문제삼고서, 능양군을 옹립하면서 인조반정을 일으키게 된다.

1623년 서인세력인 김류, 김자점, 이귀, 이괄등은 광해군의 패륜정치의 척결을 명분으로 삼으면서, 능양군을 옹립하는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1623411일 능양군을 주축으로 한 반정세력들은 2,000명의 군사들을 동원해서 한성부를 공격했으며,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통으로 인해 반정은 손쉽게 성공할 수 있었다.

  반정군이 궁궐로 쳐들어올 당시에, 궁궐밖으로 도망가 의관집에 숨어었었던 광해군은 곧바로 붙잡히게 되었고,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이후, 이이첨, 정인홍, 김개시 등 광해군과 함께 했던 대신들 40여명이 참수되었고, 그 외 200명의 사람들이 유배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광해군과 그 일파를 몰아내며 반정에 성공한 반정세력은 능양군(인조)을 왕위에 옹립하고, 서인들의 정권을 다시 열어나간다

  그렇다면 반정세력들이 반정을 시도해서 광해군을 폐위시킨 폐위이유와 명분은 무엇이었을까

반정군은 궁궐을 접수하고 광해군을 체포하고 난 후, 다음과 같은 광해군의 죄상을 밝혔다고 한다.

  첫째 광해군은 무리한 궁궐축조 공사를 과도하게 벌여서, 백성들의 생활을 도탄에 빠뜨렸다.

  셋째 광해군은 명나라의 은공과 의리를 배반하고, 오랑캐인 청나라와 내통하고 화친하였다.

  셋째 광해군은 동생인 영창대군을 살해했고,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폐륜을 저질렀다.

이것이 반정세력들이 인조반정을 일으킨 명분이면서, 동시에 광해군 폐위의 이유라고 한다.

  임진왜란이라는 7년간의 긴 전쟁을 치르면서 전국토가 황폐화되고, 특히 수도인 한양의 도성과 궁궐들이 화제로 대부분 유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선조와 광해군 등 왕실세력들이 전쟁으로 피난갔다가 다시 한양에 돌아왔을 때에는, 경복궁은 불에 완전히 타버려서, 재만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선조와 왕실사람들은 거처할 곳이 없어서, 양반저택을 임시로 개조해서 만든 덕수궁에서 지냈다고 한다. 당시의 덕수궁은 지금의 덕수궁처럼 화려한 것이 아니라. 양반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임시거처였다고 한다.

  그래서 광해군은 전쟁이 끝나고 국가를 다시 재건하는 과정에서, 불에 타서 없어진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등의 누각들을 다시 축조했다고 한다.

  전쟁으로 기울어졌던 나라의 기틀을 다시 세우는 것이 급선무였던 당시에, 무엇보다도 국가 권위의 상징인 궁궐을 다시 재건하는 것은 당연했다고 본다.

  이미 불에 타서 완전히 무너진 궁궐을 다시 복원하는 것은 임금으로서,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의무였다고 본다. 광해군이 아니더라도 어떤 군주라도 이같은 상황에서는 분명히 무너져버린 궁궐을 다시 재건했을 것으로 본다.

 무너진 궁궐을 다시 복구한 광해군의 행위를 폐위의 이유로 삼은 것은 너무 지나친 처사 내지는 무리한 설정이라는 느낌이 든다.

  전쟁으로 무너진 궁궐을 그대로 두고 재건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권위가 제대로 설 수 있겠는가? 또한 왕의 권위도 땅에 떨어질 것이며 국가기강이 제대로 세워지질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궁궐복원공사에 들어가는 비용을 각지방에 분배했는데, 공사비용을 거둬들이는 일부의 조도사들이 중간에서 갈취하거나, 과다비용을 청구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고 하며. 이들의 농간으로 일부지역의 백성들이 수탈을 당했다고 한다.

 광해군폐위의 둘째이유로 드는 것이 명나라와의 의리를 배반하고, 후금(청나라)과 화친한 것이다.

  17세기 들어서면서 명나라와 후금(청나라)간의 전쟁이 발발했고,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는데, 광해군이 파명군으로 보낸 강홍립의 군대가 요동으로 출병해서 후금(청나라)과 싸우지도 않고, 몰래 후금에 항복했다고 반정세력은 주장을 펼쳤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에 목숨을 걸고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같은 반정세력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강홍립의 12,000명의 군대는 요동으로 가서 명나라를 도와서, 후금(청나라)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그런데 요동에서 후금(청나라)과 싸운던 명나라가 크게 패해서, 곧바로 후퇴해버렸다고 한다.

  전쟁의 주인공인 명나라는 조금 불리해지자 별로 싸우지도 않고 후퇴를 했는데도, 명나라 지원병으로 간 강홍립의 군대는 요동에서 후금(청나라)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후금(청나라)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강홍립군대는 군사 12,000명 중에서 과반수의 군사를 잃을 정도로 맹렬하게 싸웠다고 한다.

그런데 명나라의 군대가 협조를 하지않고 도망가 버린 상태에서, 더이상 군사를 잃을 수가 없다고 판단한 강홍립장군은 불리해진 상황에서 후금(청나라)에게 투항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반정세력이 주장했던 데로 강홍립군대가 후금(청나라)과 싸워보지도 않고, 곧바로 항복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며, 강홍립군대는 군사의 반을 잃을 정도로 싸웠던 것이다.

 

승산이 전혀 없는 싸움에서, 강홍립군대가 군사를 모두 잃으면서까지, 더 이상 후금(청나라)군대와 싸우는 것은 무리라고 보며, 명분이나 실익이 모두 없다고 본다.

 

따라서 강홍립군대의 투항은 시기적절한 행동인 것이지,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 아닌 것이다. 명나라군대는 다 도망갔는데, 우리군대만 남아서, 남의 전쟁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병사들이 다 죽을 때까지 싸울 필요는 전혀 없다고 본다.

 

이것을 가지고 반정세력들이 억지를 쓰는 것은, 중국(명나라)에 대한 지나친 사대주의 사상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동북아정세는 동북아의 패권자리를 놓고서, 명나라와 후금(청나라)이 서로 싸우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후금(청나라)이 명나라를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 동북아시아의 패자가 명에서 후금(청나라)으로 바뀌고 있는 상황이었다.

  광해군은 명나라가 쇠퇴해가고, 여진족이 세운 후금(청나라)이 강성해지는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으며, 쇠하는 명나라와 강성해지는 후금(청나라)사이에서 적절한 중립외교를 펼쳤으며,

이러한 광해군의 중립외교 때문에 적어도 광해군 때에는 후금(청나라)의 침략을 한번도 받지 않았던 것이고, 조선의 평화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반정세력이 광해군의 폐위의 이유로 주장한 두가지는 광해군이 폐위를 당할 정도로 큰 잘못을 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폐위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거나, 폐위의 명분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세번째 폐위의 이유는 바로 폐모살제(廢母殺弟)로서, 광해군이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것을 말한다.

광해군은 자신이 세자시절부터 왕위세습의 경쟁자였던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나 다름없는 인목대비를 폐위시켰는데, 바로 이러한 광해군의 행위가 성리학의 도덕적 가치를 훼손하는 광해군의 가장 큰 잘못으로 지적된 것이다.

  의붓어머니를 죽이고 이복동생을 살해한 폐모살제(廢母殺弟) 행위가 광해군이 폐위된 이유로써 가장 타당성있는 이유라고 본다.

  전혀 반역을 도모하지도 않은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의 행위는 어떠한 명분을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잘못한 행위이며, 누가 보더라도 욕먹을 짓을 한 것이다.

  광해군이 영창대군과의 왕위세습경쟁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임금이 되었을 때에는, 선조가 이미 죽은 상태여서 이 당시의 인목대비와 3살베기 영창대군은 아무런 힘도 권력도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었다.

  이미 승자가 되어서 국가의 모든 권력을 휘어잡았던 광해군은 이들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에게 승자의 배려를 보여주었어야만 했다.

  인목대비가 자신보다 9살이나 어렸다고 하지만, 아버지의 부인인 인목대비는 분명이 자신의 어머니나 다름없는 존재감이었고, 도덕적 가치를 제일 중요시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다른 것을 몰라도 어머니를 폐위시키고, 감금하는 행위는 임금으로서 가장 중요한 성덕을 잃어버리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이 반정쿠테타의 가장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했으며, 가장 도덕적이어야 하는 왕이 자신의 어머니를 폐위시키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패륜행위라고 보았던 것이며, 반정세력들이 반정에 가담할 수 있는 대신과 군사들을 모으는 데에 이것이 가장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반정군들을 무려 2,000천명이나 모았을 정도로 반정세력은 큰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반정군들을 모을 수 있는 명분이 바로 광해군의 폐모살제인 것이다.

 

한때는 경기도땅에서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백성들을 위해서 선정을 펼치기도 했던 영특했던 광해군이 어쩌다가 이런 패륜적 행위를 하게 되었을까?

 

광해군은 폐위당하면서 패륜군주로 낙인찍혔지만, 한 때는 선정을 펼치기도 했던 현명한 군주였었다

광해군은 대동법을 실시해서 백성들의 세금부담을 줄여주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면서, 의병을 모았고 게릴라전쟁을 지휘해서 임진왜란에서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광해군은 양전제를 실시해서, 토지에 대한 정확한 측량을 통해서, 토지결수에 비례한 정확한 세금을 메기고, 경작지를 확대시켰다.

  그리고 광해군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동북아의 질서가 바뀌는 격변의 시기에서, 적절한 중립실리외교를 펼쳐서, 한반도에 안전과 평화를 지켜낼 수가 있었다.

 

이렇게 나름대로 적지않은 업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집권후기로 접어들면서,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에 대한 폐모살제를 저지르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함으로써, 성군이 되지 못하고, 포악한 페륜군주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광해군이 폐위되고 난 후, 새로 정권을 잡았던 인조 등 서인세력들은, 청나라를 철저히 배척하는 정책 때문에, 청나라의 15만대군의 침략을 받게되었고 청나라군대에 항복하고 말았으며, 인조가 청태조에게 아홉번 절하는 삼전도의 굴욕과 수모를 당하고야 만다.

  적어도 광해군이 균형감있는 중립외교를 펼칠 때에는, 이같은 전쟁의 패배나 삼전도의 굴욕 같은 수모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광해군의 폐위이유와 업적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어느쪽을 더 중시하느냐에 따라서 광해군은 폭군이 될 수도 있고, 성군이 될 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좀 더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광해군은 원래는 선한 군주였는데, 이이첨, 김개시 같은 측근들이 눈과 귀를 막고 아첨하는 정치를 하는 바람에, 더욱 잘못된 길로 접어들게 되지는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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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 이종

생졸; 1595-1649.55세

재위기간; 1623-1649.26년

능;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에 위치한 장릉(長陵)

가계도;

 조부; 선조

 조모; 인빈 김씨

   부; 원종 정원군

   모; 인현황후 구씨

      능풍군; 조졸

      능양군 (조선 16대 인조); 인조는 인령 왕후 한씨를 비롯 3명의 부인에게서 6명의 왕자와 1명의 옹주를

                                         낳았다.

        인렬왕후 한씨; 1594년-1635년,42세

                             영돈녕 부사 한준경의 딸로써 1610년에 능양군(선조)와 결혼하여 청성현 부인에

                             봉해지고 1923년 선조가 왕위에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소현세자; 생졸-1612-1645

           봉림대군; 17대 효종

           인평대군

           용성대군

        장렬왕후 조씨; 한원부원군 조창원의 딸

        귀인 조씨; 1630년 숙원으로 궁에 입성하여 귀인까지 올랐다.소용인 조씨는 인조의 총애를 독차지한

                       인물로 후궁으로서 모략을 일삼으며 권세를 장악했다.1635년 인조13년 정비 인령왕후가

                       죽자 1638년 인조16년 계비로 책봉됐던 장렬왕후 조씨를 인조와 별거시킬 정도로 투기가

                       심하고 모사와 이간질에 능하였다.

                       소용 조씨는 소현세자빈 강씨와 불화가 심했는데,이로인해 인조가 장자인 소현세자를 감시

                       하게 되었다.병자호란 후 1637년 인조 15년,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청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관계를 유지하자 소용조씨는 세자가 왕위를 차지할 목적이라며

                       갖은 모함으로 인조를 부추겼다.결국 1645년 인조 23년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가 환국

                       한 후 두달만에 소연세자는 돌연사하고 만다.당시 주치의 이형익은 소용 조씨의 어머니

                       한옥의 집에 드나들던 자로 인조의 신임을 받고 있는 자였다.

                       독살의 흔적이 뚜렸하였으나 인조는 서둘러 장례를 마첬고,이형익에 대한 처벌도 하지

                       않았다.또한 인조는 적자 계승자인 소현세자의 원손이 아닌 차자 봉림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세자 책봉 직후인 1645년 인조 23년 10월 소용 조씨는 소의에 올랐고,

                       계비인 장렬 왕후 조씨를 이간질하여 별궁인 경덕궁으로 몰아 내는데 일조하였다.

                       소현세자빈 강씨가 자기를 저주했다는 하던 소의 조씨는 1646년 인조 24년,

                       세자빈 강씨가 인조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받게돼 별당에 유치됐던 강씨는 

                       폐서인으로 사약을 받았고,왕손 3형제는 제주도로 유배되었다.12월에는 소의 조씨의

                       소생인 왕자 이징이 숭선군으로 삼았다.1647년 장녀인 효명옹주에 봉해져,

                       영의정 김자겸의 손자인 낙성위 김세룡과 혼인하였다.
                       1648년 소의 소생인 세 아들 모두
작호를 받았다.

                       이 후 조씨는 인조가 죽기 전 1649년 인조47년 종1품 귀인으로 진봉 되었다.

             숭성군

                동평군

             낙성군

             효명공주-김세룡

         귀인장씨                

         숙의난씨

 

조선 제16대 왕이자 선조의 5번째 아들인 원종 정원군의 아들이며,어머니는 구사맹의 딸인 인헌왕후다.

비는 영돈녕부사(돈녕부는 조선시대 종친부에 속하지 않은 종친과 외척을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 한준겸의 딸인 인열왕후이며,계비는 영돈녕부사 조창원의 딸인 장렬왕후다.

인조는 선조40년 1607년에 능양군에 봉해졌다.

 

광해군 15년인 1623년3월13일,서인인 김유,이귀,이괄,최명길 등이 일으킨 인조 반정에 의해 광해군을

내쫓고 왕위에 올랐으나 반정의 세력인 서인들로 인하여 왕권을 강하게 내세우지 못했다.

반정의 명분을 확립함과 동시에 서인을 중심으로 왕권을 안정시키는 작업을 폈다.

광해군을 서인으로 강등시켜 강화도로 귀양 보내고,대북파의 이이첨,정인홍 등 수십 명을 처형했다.

반면, 반정에 공을 세운 33명은 3등급으로 나누어 관직을 내렸다.

대북계로부터 축출 당했던 남인의 이원익·정경세·이수광서인계의 정엽,오윤겸,이정구,김상헌 등이 다시

 

등용되었다.특히 서인세력은 반정 이후 정국을 주도하고,남인의 정계 진출을 견제하여 인조의 왕권 행사를 제약했다.

인조 반정의 명분으로 광해군의 부도덕성과 실정이다.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박해하고 영창대군을 살해한 반인륜적인 행위와

후금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일이다.

 

1623년7월, 대북파의 기자헌,유몽인 등은 인조반정 때 김유,이귀 등이 역모 가담을 요청했으나 거절하였고,반정 후에 인조가 등용할 때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이 때문에 이들은 역모죄로 서울에 압송되어 지정한 장소에서만 머물도록 한 형벌인 중도부처(유형으로 지정 장소를 떠나지 못하도록 하던 형벌) 하였다.

 

1623년10월에는 선조의 10번째 아들인 온빈 한씨 소생의 흥안군(아버지의 이복동생)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황현,이유림 등의 역모가 있었다. 흥안군은 성품이 활달,호협하여 엉뚱한 짓을 잘하였다.

1624년 서인 사이의 반목으로 일어난 이괄의 난 때, 그들과 내통하여 역모하였다는 설이 있어 대간이 주청하여 남쪽에다 안치하려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괄의 난을 피해 왕과 함께 공주로 가던 중 도망하여 이괄의 군중으로 들어갔다.
반란군이 서울에 입성하자,이괄은 그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관군의 승전으로 패하게 되자 소천으로

내려가 숨었다가 현감 안사성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된 뒤 도원수 심기원 등에게 살해되었다.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기자헌의 일족도 몰살 당하고,유몽인과 황현,이유림등이 처형되었다.

이들은 1627년 남인의 이원익,이귀의 상소로 복관 되었다.

 

이괄의 난은 1624년 인조2년 1월에 발생하여 동년 2월15일에 끝난 사건이다.

이괄은 인조 반정 후 도감대장 이수일이 공이 있다 하여 공조판서로 중용된 데 비해,자신은 2등으로

평가 받고 도원수 장만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된 것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인조는 인조 반정의 공신인 서인들의 영향으로 친명배금 정책을 내세웠다.

이로 인하여,국세가 날로 강대해지고 있었던 후금의 태종은 선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조선이 형제의 관계를 맺자는 요구에 응하지 않자,1627년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한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의주를 거쳐 평산까지 함락되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했으며,최명길의 강화 주장을 받아들여 형제의 의를 약속하는 정묘화약(丁卯和約)을 맺었다.

이 후 1636년12월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형제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바꾸자고 요구했으나

거부하자 10만여 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해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막지 못한 인조는 봉림대군,인평대군과 비빈을 강도로 보낸 뒤,남한 산성으로 후퇴하여 항거했다.
전쟁 수행 여부를 놓고 김상헌,정온을 중심으로 한 척화파와 최명길 등의 주화파 간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

되었으나,주화파의 뜻에 따라 항복을 결정하고 삼전도에서 군신의 예를 맺었다.

이와 함께 소현세자,봉림대군과 척화론자인 삼학사,즉 홍익한,윤집,오달제를 청나라에 인질로 보냈다.

 

임진왜란 후 2차례의 전란을 거치면서 기강과 경제는 파탄 상태로 빠지는 한편,정국은 친청파와 배청파로 분화하고 대립해 혼란스러워졌다.

특히,주도 세력인 서인의 분화는 가속화하여 1)김자점을 영수로 하는 낙당과 2)원두표를 중심으로 한 원당, 3)김집,김장생,송시열 등의 산당, 4)김육 등의 한당이 형성되었다.

 

인조 말년 영의정 김자점은 외척(1647녀,효명옹주와 김자점의 손자인 김세룡과 혼인)으로서 친청 세력을 규합하여 정권을 장악했고,이에 반해 산당을 중심으로 반청친명사상과 북벌론이 강화되어 광범위한 여론이 형성되었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강빈의 옥사,봉림대군의 세자 책봉과 왕위 승계는 이러한 대립 속에서 이루어졌다.

 

즉위 초기에

국방정책과 경제정책  허약한 왕권을 강화함과 동시에,친명정책을 추진하면서 생겨난 전란의 위협에 대처

하기 위해 군사력 강화책을 활발히 추진했다.

1623년 호위청을 신설하여 인조 반정을 주도한 세력의 사병을 정규병력으로 변화시켰다.
1624년에는 어영군을 창설했으며,이해 6월에는 기존의 경기군을 정비·강화하여 총융군으로 재편했다.

이와 함께 방어의 거점으로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강화도의 군사력을 정비했다.

 한편 군역 자원과 재정의 확보를 목적으로 직후부터 호패청을 설치하고 호패법을 시행하여 거의 완성했으나 정묘호란 때 소실되어 이를 통한 군사력 증강은 실패로 돌아갔다.

 

1627년 정묘호란이 끝난 후, 군사력 강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즉 남한산성의 수비강화를 위해
수어청을 신설하고 어영청과 훈련도감의 인원을 증강함으로써 조선 후기 5군영 체제의 기초를 마련했다.

이같은 군제의 재편과 함께 경제질서의 재건을 위한 정책도 각 방면에서 실시되었다.

이는 왜란과 호란으로 말미암아 파탄 직전에 놓였던 국가재정·농민경제·농업생산력을 되살리기 위한
일련의 조치였다.

광해군 때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실시했던 요역과 공물의 전세화 조치인 대동법을 이원익의 건의로 1623년 실시했다.애초 강원도·전라도·충청도 등 3도에 시행하기로 했으나 1626년에 강원도에만 실시했다.

 

1633년 김육의 주장에 따라 상평청을 설치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하고 그 유통을 시험했다.

이는 실패로 끝나기는 했으나 효종대 이후 화폐 유통의 기초를 이루었다.

 

1634년에는 삼남에 양전을 실시하여 전결 수를 증가시킴으로써 세원을 확대했다.

세종 때 제정 되었던 연등구분의 전세법을 폐지하고,전세의 법적인 감하를 주된 내용으로 하는 영정법과

군역의 세납화를 실시했다.

 

또한, 청인과의 민간 무역을 공인하여 1637년 북관의 회령 및 경원개시,1647년 압록강의 중강개시가 행해졌다.개시에는 상고의 수,개시 기간, 유왕 일수,매매 총수 등을 미리 결정하도록 했다.

 

또한 1641년에는 군량 조달을 위해 납속 사목을 발표하고,

납속자에 대한 서얼허통(양반의 첩에게서 태어난 사람과 그 후손들을 서얼) 및 속죄(금품이나 노력으로 지난날의 죄나 과오를 씻음)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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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해군과 야사      2018.12.21.금요일

선조가 세자를 가리기 위해 여러 왕자를 시험하였는데

'반찬을 만드는데 무엇이  제일 이냐고 '선조가 묻자

광해군이 '소금이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인 선조가 이유를 묻자

광해군은 '여러가지 맛을 조화 시키려면 소금이 아니면 안됩니다'라고  답하여 그 현명함을 인정 받았다.

이에 선조가 '너에게서 부곶한 것이 있느냐?'라고 묻자

광해군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가장 애통합니다'라고 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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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동법       2018.12.21.금요일,맑음

대동법은 1608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되기 시작하여 1708년에 완성되었다.

호역으로서 존재하던 각종 공납과 잡역의 전세화가 주요내용이었다.

대동법에서는 공물을 각종 현물 대신 미곡으로 통일하여 징수했고, 과세 기준도 종전의 가호에서 토지의 결수로 바꾸었다.
따라서 토지를 가진 농민들은 공납의 부담이 다소 경감되었고,무전농민이나 영세농민들은 이 부담에서 제외되었다.

대동세는 쌀로만 징수하지 않고 포나 전으로 대신 징수하기도 했다.

대동법의 시행은 조세의 금납화로 상품 화폐 경제의 발전을 촉진시켰으며, 임진왜란 이후 파국에 이른 재정난을 타개할 수 있었다. 또한 공인들의 활동에 의해 유통경제가 활발해지고 상업 자본이 발달했으며, 공인의 주문을 받아 수요품을 생산하는 도시와 농촌의 수공업도 활기를 띠었다.

 

                                                    -대동법 조판-


1608년(광해군 즉위) 경기도에서 처음 시행되기 시작하여 1708년(숙종 34)에 완성되었다.

호역으로서 존재하던 각종 공납과 잡역의 전세화(田稅化)가 주요내용이었으며, 이는 중세적 수취체계에 있어 획기적인 변화였다.

조선정부 재정수입의 하나인 공물은 농민의 생산 물량을 기준으로 한 과세가 아니라 국가의 수요를
기준으로 한 과세였기 때문에 과세량에 무리가 있었다. 또한 고을에 따라서는 생산되지 않거나 이미

절산된 물품이 부과됨에 따라 방납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래서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미 공물의 과중한 부담과 방납의 폐단, 군포부담의 가중 등이 겹쳐서 농민층의 유망이 증가하던 터였다. 그리고 전쟁 후 정부가 재정 파탄을 수습하기 위해 재정수입을 급격히 확대시키는 과정에서 농민들의 공물 부담이 늘어나면서 그 징수의 기반마저 붕괴될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이와 같은 폐해를 조정하여 농민의 유망을 방지하면서 한편 국가 재정수입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동법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동법의 실시는 방납의 폐해를 조정하기 위한 논의 과정에서 점차 구체화되었다.

이 가운데 임진왜란 이전부터 검토되어왔던 것은 공물을 미곡으로 대신 거두는 대공수미의
방안이었다. 1569년(선조 2) 이이에 의해 건의된 대공수미법은 징수된 공납미를 정부가 지정한 공납 청부업자에게 지급하고, 이들로
하여금 왕실·관아의 수요물을 조달케 함으로써 종래 불법적으로 관행되던 방납을 합법화시켜 정부의 통제하에 두고 이를 통하여 재정을 확충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러한 방안이 논의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15세기 후반 이후 계속된 유통경제의 성장이 자리잡고 있었다.그러나 대공수미의 방안은 당장은 실현되지 못하다가 전쟁으로 전국의 토지결수가 줄어 재정수입이 감소하게 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다시 제기되면서 대동법이라는 이름으로 실시되었다.

대동법은 1608년 영의정 이원익의 주장에 따라서 우선 경기도에 시험적으로 시행되었고,
이후 찬반양론의 격심한 충돌이 일어나는 가운데 1623년(인조 1)에는 강원도에서 실시되었다. 그리고 17세기 중엽에는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의
순으로 확대되었고, 1708년에 황해도까지 실시됨으로써 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에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이와 같이 대동법이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데 100년이란 시간이 걸린 것은 새로운 토지세인 대동세를
부담하게 된 양반지주와 중간이득을 취할 수 없게 된 방납인들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대동법 하에서는 공물을 각종 현물 대신 미곡으로 통일하여 징수했고, 과세의 기준도 종전의 가호에서
토지의 결수로 바꾸었다. 따라서 토지를 가진 농민들은 1결 당 쌀 12두(斗)만을 납부하면 되었으므로 공납의 부담이 다소 경감되었고,
무전농민(無田農民)이나 영세농민들은 일단 이 부담에서 제외되었다.

대동세는 쌀로만 징수하지 않고 운반의 편의를 위해서나 쌀의 생산이 부족한 고을을 위해 포(布)나
전(錢)으로 대신 징수하기도 했다. 따라서 충청·전라·경상·황해의 4도에서는 연해읍과 산군을 구별하여 각각 미 혹은 포·전으로
상납하도록 했다. 이와 같이 공납의 전세화를 기본으로 하는 대동법은 지금까지의 현물징수가 미·포·전으로 대신됨으로써 조세의 금납화(金納化)를
촉진했다. 농민들로부터 거두어진 대동미·대동포·대동전은 처음에는 지방관아의 경비로서 절반이 유치되고 나머지는 중앙으로 보내어지다가 점차 대부분이
중앙으로 상납되었다.이를 관리하는 전담기관으로서 선혜청(宣惠廳)이 신설되었고, 여기서는 징수된 대동미를 물종에 따라
공인들에게 공물가로 지급하고 필요한 물품을 받아 각 궁방과 관청에 공급했다.

. 따라서 공물의 조달은 선혜청으로 일원화되었다.

대동법의 시행은 조세의 금납화로 상품화폐경제의 발전을 촉진시켰으며, 임란 이후 파국에 이른 재정난을 일정하게 타개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공인들의 활동에 의해 유통경제가 활발해지고
상업자본이 발달했으며, 또한 공인의 주문을 받아 수요품을 생산하는 도시와 농촌의 수공업도 활기를 띠었다. 공인의 상업자본가로의 성장과 수공업자의
상품생산자로의 변신은 조선후기 사회경제 발전의 일면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한편 대동법 시행에 따른 농촌수공업의 발전은 농민층분화를 촉진시켜
토지소유 관계의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새로운 지주층의 성장도 가능하게 했다.

 

1659년 대동법의 성과를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의 탁본. 대동법은 공납을 특산물에서 미곡으로 바꾸어 통일한 납세제도로, 상품화폐경제를
촉진시키고, 임진왜란이 야기한 재정난을 타개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대동법 시행 기념비는 영의정 김육이 세웠으며, 기념비는 경기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다.

 

◐ 이수광의 지봉유설     2018.02.19.수요일,맑음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峰類說)은 1614년(광해군6년)에 지은 일종의 백과사전적 저서이다.

가톨릭 및 서양 여러 나라의 사정을 처음으로 소개함으로써 실학이라는 새로운 학풍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수광이 살았던 시대는 안으로는 붕당 정치가 본격화되면서 정치세력들 사이에 정쟁이 불붙기 시작하고, 밖에서는 명의 쇠퇴와 여진족(만주족)의 흥기로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가 재편 되어가고 있었다.

임진왜란(1592년)은 이수광에게는 전란의 참상을 직접 체험하게 된 계기이자,

위기의 시대에 지식인의 역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문제를 다시금 되짚어보게 한 일대 사건이었다.


선조 집권기 후반부터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던 붕당 정치와 이로 인한 정쟁은

마침내 광해군 5년(1613년), 정국을 주도하던 대북 세력이 주도가 된 계축옥사라는 대규모 정치 보복으로

까지 이어졌다.

이수광은 이 사건의 여파로 관직을 그만두고 동대문(흥인지문) 바깥에 있던 그의 자택에 은거하면서

그간 틈틈이 견문한 내용들을 모아 '지봉유설'을 완성하게 된다.


서문에 따르면 '지봉유설'은 저자 나이 52세 때인 광해군 6년(1614년)에 탈고되었는데,

이 책은 한 가지 사실을 체계적으로 논술하여 일시에 완성한 것이 아니라 저자 자신이 오랜 시일에 걸쳐

보고 들은 사실, 평소에 느끼고 깨달은 바를 그때그때 메모했다가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분류 편찬한 것이다


그리고 인조 11년(1633년) 저자의 두 아들에 의해 '지봉 선생집'이라는 이름으로 함께 출간되었다.

책의 서두에는 이수광의 교우였던 김현성의 서문과 함께 이수광 자신이 직접 쓴 서문,그리고 편찬 원칙을

밝힌 3칙의 '범례'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천문·지리·병정·관직·유도·경서·문학·인물·궁실·복용 등에 관하여 3,435개조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사실의 설명에 있어서 되도록 주관적인 견해는 회피하고 고서나 고문에서 널리 참고하고

근거로 삼아 이를 채집, 인용하였고, 고서와 견문에서 발췌한 경우는 반드시 그 출처를 적었다.

이 책에 인용된 서목은 육경에서부터 저자 생존 당시의 소설·문집에 이르기까지 무려 348가나 되고,

인용된 인명은 2,265명이다.

그 가운데 이름을 바로 쓰고 싶지 않은, 혹은 숨겨야 할 경우는 성만 적고 이름은 적지 않았다.

이수광은 '지봉유설' 에서 "학문을 하는 사람은 실천에 힘써야지 입으로만 떠들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학문을 폭넓게 섭렵하되,이단이라 해도 선입견에 빠져 배척하기보다 그것이 갖는 유용성에 가치를

두는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보여준다.


광해군이 축출된 인조 반정 직후,인조 3년(1625년)에 국가 중흥을 위한 방책으로 그가 제시한 상소문은

성리학의 이념에 입각해 제도를 개혁할 것을 추구하는 성리학자로서의 그의 입장이 잘 나타나 있다.

당시 사회의 주류적인 사상이 성리학 이념이었고 이수광 자신도 기본적으로는 성리학자로서 성리학 이념을

완전히 버린 방외인적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성리학의 모든 측면을 신념화하지 않고 성리학에서도 시대적인

 과제를 해결할 수 있는 부분들을 강조하는가 하면, 성리학 이념을 보완할 수 있는 다른 사상체계의 수용에

도 적극성을 보였다. 

이러한 그의 개방성은 당시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세상에 대한 인식으로도 이어졌다.

동서 권2의 '제국부''외국'조에는 안남(베트남),유구(오키나와)·섬라(태국).일본·대마도·진랍국(캄보디아)·

방갈랄방글라데시·석란산(실론) 등 동남아 국가의 역사와 문화, 종교에 대한 정보들과 함께,

회회국(아라비아) 및 불랑기국(포르투갈)·남번국(네델란드)·영길리국(영국)·대서국(이탈리아) 등

유럽의 국가들에 대한 정보까지도 소개하였다.

이들 국가에 대해서는 자연 환경이나 경제 상황,역사,문화,종교 등을 가능한 객관적으로 서술하면서

실용적인 측면을 서술하고 있다.

특히 불랑기국(포르투갈)이나 영길리국(영국)에 대해서는 이들 국가가 보유한 군함이나 화포에 대한 내용도

 수록하고 있는데,이는 임진왜란 직후 서양의 국방력에 깊은 관심을 보였음을 드러내주는 자료이다.

 대서국(이탈리아)에 대한 항목에서는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가 중국으로 들어와

'천주실의'를 소개하였다고 적었는데, 이는 조선의 기록에서 최초로 천주교와 관련된 내용이 등장하는 부분

으로 평가받는다.

동서 '제국부''외국'조와 함께 따로 설정된 '북로(北虜)'조를 따로 설정하여 세계 50여개 국의 지리와 기후,

물산, 풍속, 역사 등을 가능한 객관적으로 자세히 소개함으로써 조선 사회를 고립적으로 이해하지 않고

세계와 함께 공존하는 사회로 인식하고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책의 편찬 동기를 "예악의 나라로서 이름난 우리 문화와 행적이 뛰어난 역사적 인물을 소개하는 데에"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지봉유설' 곳곳에 이러한 저자의 정신이 배어 있는데,

'제국부''본국'조에서는 각종 자료를 이용해 우리 역사에서 쟁점이 되는 부분들을 서술한 뒤,

중국의 '산해경' 같은 저술들을 인용하여 우리 나라가 군자국이라 불렸던 사실과 동방은 전통적으로 착한

품성을 지닌 곳으로 여겨져왔다는 것을 강조한다.


고려라는 국호에 대해서는 "산고수려"라는 말에서 유래한 이름이라 설명하고,

 "중국에는 고려국에 태어나 금강산을 보기를 원한다는 시가 있으니 금강산의 이름이 천하에 떨친 것은

이미 오래되었다."고 하여 우리 나라의 아름다운 경치에 자부심을 보이는 한편,

명에서 외국 사신들의 서열을 매길 때에 우리 나라를 제1로 두고 안남과 유구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 이유를 "조선은 예의지국이고 시서가 뛰어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언어부''잡설'조에서는 "우리 나라 사람에게 중국 사람들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 네 가지가 있는데 부녀자가

 수절하는 것과 천인의 장례 및 제사와 맹인의 점치는 재주와 무사의 활 쏘는 재주 등이다.",

"우리 나라에는 나는데 중국에는 없는 것이 네 가지가 있는데 경면지와 황모필과 화문석, 양각삼이다."라고

하여 우리 나라의 미풍 양속이나 물산에 대해서 깊은 관심과 애정을 드러냈다.

술에 대해서는 "함부로 술 마시는 사람 치고 일찍 안 죽은 사람 없다. 술이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것이 여색보다도 더 심하다."고 비판하고,

한편으로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과일로 거창의 감,보은의 대추,밀양의 밤,충주의 수박,회양의 해송자(잣),

안변의 배를 들기도 한다.















 

정충신      2018.12.19.수요일, 맑음 
정충신; 조선 선조 시대의 무신

생졸; 1576(선조)-1636년(인조)

시호; 충무(忠武).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목사 권율 밑에서 종군 하였다.

이 때 권율이 장계를 행재소에 전달할 사람을 모집했으나 응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17세의 어린 그가 왜군으로 가득한 길을 단신으로 뚫고 행재소에 도착하였다.

권율의 장계를 가지고 의주 행재소에 갔다가

병조판서 이항복의 눈에 띄어 학문과 무예를 닦아 그 해 겨울 문과에 급제하였다.

머리가 총명하여 이항복은 아들같이 사랑하였다.

1621년 광해군의 명을 받들어 만포첨사로 국경을 수비하면서

후금(여진족;청)과 접촉한 후 장차 우환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623년 안주목사 겸 방어사를 겸임하였고 다음해 이괄의 난 때는 도원수 장만의전부대장으로서 반군을

황주,안현에서 물리쳐 난을 진압한 공으로 진무공신 1등에 책봉되었다.

이어 1627년 정묘호란 때는 부원수로 종군하여 가도의 유홍치를 의주에서 격퇴하였다.

1633년 조정에서 후금에 대한 세폐의 증가를 반대하여 단교를 결정하자

이에 극구 반대하다 당진으로 유배 당하였다.

이 후 다시 장연으로 이배 되었다가 곧 풀려 나와 이듬해 포도대장,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636년 병이 심해져 인조는 의관에게 치료에 진력하게 했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이어 인조는 내시로 하여금 호상하게 하고 어복을 주어 수의로 하게 했으며,

관청에서 의로써 장사를 치르게 하였다.

 

키가 작으면서도 씩씩했고 청렴하며 덕장이라는 칭송을 들어며 많은 전설을 남겼다.

천문,지리,복서,의술 등 다방면에 걸쳐서 정통했으며,

저서로는 '만운집''금남집''백사북천일록' 등이 있다.
광주 경렬사에 제향되었다.

 

.

 

고사성어         2018.12.19.수요일,맑음

백락(伯樂)의 본명은 손양(孫陽)으로 생몰년도는 미상이다.
중국 춘추 전국시대 주나라의 인물로
을 감정하는 상마가(相馬家)라는 직업에 종사하던 인물이었다.

안목이 특출나 그가 고르는 말은 백이면 백 명마였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이 본명인 손양 대신 백락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하며 현대에도 본명보다는 별명이었던

백락으로 주로 불려지는 인물이다.


이 인물에 대해 두 가지의 이야기(고사)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이  두 가지고사는 재능이 세상에 어떻게 드러나고 쓰여지는가에 관한 우화로서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첫째는 백락일고(伯樂一顧)라는 고사성어로 백락이 한 번 뒤돌아본다는 뜻이다.

어느 날 말을 팔려는 사람이 백락에게 와서 말 감정을 부탁했다.

그 사람은 꼭두새벽부터 말을 팔려고 나왔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사려고 하지 않아 난감한 지경에 있었다.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따라 나선 백락의 눈에 비친 그 사람의 말은 생각보다 훨씬 좋은 준마였다.

놀란 백락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감탄하는 표정을 지은 채 한동안 말을 바라보다가 아깝다는 표정을 지은 채 그 자리를 떠났다.

유명한 백락이 그리하는 것을 본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그 말을 사려고 했고,

말 주인은 처음 생각했던 값의 열 배가 넘는 돈을 받고 말을 팔 수 있었다.

둘째는 백락상마(伯樂相馬)라는 고사성어로
백락이 말을 관찰한다는 뜻이다.

초나라 왕이 백락에게 좋은 말을 구해오라는 명을 내렸다.

명을 받은 백락이 길을 나서던 중 소금 장수의 마차와 마주쳤다.

소금 마차를 끌던 말은 비쩍 마르고 볼품없이 생겨 언뜻 보기에는 아무데도 쓸데없어 보이는 말이었는데,

천하의 명인이었던 백락은 단번에 그 말이 천닐마의 자질을 갖추고 있음을 직감했다.

불세출의 천리마로 태어나 왕을 태우고 세상을 호령했어야 할 말이 보잘것없는 먹이를 먹고 비쩍 마른 채

소금 수레를 끌고 있는 모습을 보자 백락은 절로 측은지심이 들어 입고 있던 베옷을 벗어 말의 잔등을 덮어 주었다. 그러자 말은 자신을 알아주는 데 감격해 길고 우렁차게 울었다.
소금 장수에게서 말을 사 온 백락이 초나라 왕에게 그 말을 보이자 초나라 왕은 대뜸 화를 내었다.

좋은 말을 구해오라 했더니 웬 비루먹은 말 한마리를 끌고 덜렁덜렁 왔으니 화가 날 수밖에.

하지만 말에 대해서는 이길 자가 없다는 백락이 강권하는지라 초나라 왕도 못 이긴 체 며칠간 기다려 보기로 하였다. 백락이 비루먹은 천리마에게 나라 안에서 가장 좋은 먹이와 마굿간을 내주어 힘써 보살피니 말은

곧 비쩍 말랐던 예전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어지고 위풍당당한 천리마의 모습을 되찾았다.

이에 초나라 왕이 몹시 기뻐하며 바로 말 위에 올라타 채찍을 한 번 휘두르니

말은 그 길로 천 리를 질주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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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주인을 찾아온 준마      2018.12.19.수요일,맑음 

옛날 조선 광해군 때 한 수령이 있었다.

부임하자마자 수 년 동안 억울한 옥살이를 했던 사람을 처리해 주었더니

모친이 은혜를 갚고자 하여 치마에다 갓 태어난 망아지를 싸가지고 와서 수령에게 바치며 말하였다.

“첩의 아비가 말을 400 마리 길렀습니다만 항상 말다운 말이 없다고 한탄하셨습니다.

하루는 한 암말을 가리키며 ‘이 암말은 반드시 신령한 망아지를 낳을 것이다’라고 저에게 말씀하셨는데,

지금 이 망아지가 바로 그 말이 낳은 것입니다.”

   

수령이 임기가 끝나 경성에 이르렀을 때에도 여전히 작은 망아지였는데,

 

그 당시 백락(중국 춘추 전국 시대 주나라의 사람으로 말에 관한 일에 밝은 사람을 지칭)으로 칭해지던

전창위 유정량(선조의 딸  정휘옹주의 남편)이 백금을 주고 그 말을 샀다.

 

이름을 ‘표중(豹重)’이라 하였는데,

그 말이 성장하여 큰 말이 되자 그 말은 과연 영묘하고 뛰어났다.

광해군이 그 말에 대한 소문을 듣고 빼앗아 가버렸다.

 

후에 전창위가 할아버지가 영경(永慶)의 옥사에 연좌되어

고부(정읍)에 위리(圍籬;유배지 둘레에 가시울타리를 치는 것) 되었다.

 

하루는 광해군이 그 말을 타고 후원을 달리자,

말이 갑자기 몇 길을 뛰어올라 광해를 번쩍 날려 떨어뜨렸는데,

마침 왕을 따르던 호휘병이 손으로 받았는지라 살아날 수 있었다.

말은 담을 넘어 달아나 하룻만에 고부(정읍)에 다달았다.

 

전창위는 깜깜한 밤에 울타리 안에서 홀연히 무엇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불을 들어 살펴보았더니

말이 방문으로 뛰어 들어와 벽 사이의 협소한 곳에 몸을 숨긴 뒤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일어나지 않았다.

전창위는 몹시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말을 벽장에 놓아두고 1년 동안 길렀다.

광해군은 크게 노하여 현상금을 걸고 대대적으로 말을 찾아 샅샅이 뒤졌으며,

전창위의 유배지에도 세 차례나 이르렀지만 끝내 발각되지 않았다.

 

하루는 말이 갑자기 갈기를 떨면서 배회하더니 목을 들고 길게 울었다.

그런지 얼마 안 있어 인조 반정이 있어 전창위는 석방되었다.

전창위 행차가 서울에 도착하자 말이 갑자기 스스로 산길 소로로 들어섰다.

종복들이 대로로 잡아 당겼으나 말은 말을 듣지 않고 고집스럽게 소로로 향했다.

말이 가는대로 내버려 두었더니 한 울창한 숲에 다달았는데 그 곳에는 어떤 사람이 엎드려 있었다.

전창위가 보니 그 사람은 바로 유씨 집안의 평생 원수로 반드시 원수를 갚고자 하였었는데,

우연히 서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종을 시켜 그 놈을 결박하여 잡아오게 한 뒤

마침내 복고(伏辜;죄를 인정하고 형벌을 받음)에 이르렀으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하게 여겼다.

 

인조가 이 소식을 듣고 말에게 자품(資品)을 더해 주도록 명하였다.

전창위가 죽어 반혼(죽은 사람의 시체를 화장하고 나서 그 망령을 다시 집으로 불러들이는 것) 한 후

말도 먹지 않고 죽으니 시체를 성의 동문 밖에 묻어 주었다.

                                                -청구 야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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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조선 선조,광해군 시대의 문신이며 문인

생졸; 1569(선조)∼1618(광해군).50세

 

허균은 국문학사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작가이며,

한글로 된 '홍길동전' 을 남김으로써 한국 문학사에 일획을 긋는 대업을 이루었다.

 

대대로 고관직을 누리던 양반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의 수제자격으로 높은 벼슬을 지낸 동인의 거두였으며, 
맏형 허성은 임진왜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다녀와서 일본 침략을 정확하게 예단한 인물로

알려졌으며,둘째 형 허봉은 명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조천기'를 쓴 인물로 유명하다.

또 누이는 여류 시인 허난설헌이다.

허균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일찌기 12세 때에(1580년 선조13년) 아버지를 잃고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했다.

학문은 영남학파의 거두 유성룡에게 배웠으며,

시는 삼당시인(이달,최경창,백광훈을 묶어서 부르는 용어)의 하나인 이달에게서 배웠다.

 

이달은 허균의 둘째 형 허봉의 친구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에 살고 있었다.

이달은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으며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후 허균은 '손곡산인전'을 지어 이달을 기렸다.

 

허균은 26세 때인 1594년(선조 27)에 문과에 급제하고 설서를 지내다,

1597년(선조 30)에는 문과 중시에 장원이 되어 이듬해에 황해도도사가 되었으나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했다는 탄핵을 받고 부임한지 6달 만에 파직됐다가
그 뒤에 춘추관기주관 형조정랑을 지냈다.

1602년 선조 35년에는 사예,사복 시정을 역임했으며 원접사 이정구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했다.

1604년 선조 37년에는 수안 군수로 부임했으나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허균은 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학식을 높이 평가 받았고,

누의 허난설헌 의 시를 보여 중국에 책을 출판하는 계기를 마련하여 다시 삼척부가가 되었으나,

세달이 못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고 세번째로 관직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그의 학식을 높이 평가하던 조정은 그에게 다시 공주목사로 기용하였으나,

서류 출신들과 지내며 관직을 너럽힌다는 이유로 네번째 파직을 당하고 만다

그 뒤에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을 만났다.

 

허균은 1609년 광해군1년에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에 이상의의 종사관이 됐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됐다.

1610년(광해군 2)에 전시의 시험을 주관하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로

유배됐다.그 뒤에 몇 년간은 태인에 은거했다.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 출신의 서양갑,심우영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에게 아부해 대북에 참여했다.

1614년에 천추사가 돼 중국에 다녀왔고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 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에 '태평광기'를 비롯해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1615년 이이첨의 주선으로 승정원의 책임자가 되었고,

중국 문헌에 조선 종묘사에 대한 기록이 잘못되었음을 발견하고 이를 정정시켜 광해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광해군의 총애를 받아 광해군에게 수많은 찬사를 받았고 일약 형조판서가 되었으며

1617년 광해군 9년 좌참찬이 돼어 인목대비 폐모론을 주장시켜 성사시켰다.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과 사이가 벌어졌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됐다.

그 아들 기준격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리니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했다.

 

1618년(광해군 10)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허균의 심복 현응민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 났다.

허균은 자신이 모아온 세력을 바탕으로 반역을 도모하였고 서얼차별을 없애고 신분 계급을 타파,

붕당을 혁파해야 한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 시킨 끝에 역적 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작거리에서

능지 처참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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