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조 반정 2018.12.21.금요일,맑음
1638년 광해군10년에 있었던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 대비 서궁 유폐 사건은
지금껏 대북 세력에게 눌려 지내던 서인들에게 좋은 구실을 주었다.
서인 이귀,김류,김자점,이괄 등은 마침내 이것을 문제삼아 군사를 일으켜 광해군을 폐출하고
왕의 조카인 능양군(인조; 생졸1595-1649.재위기간;1623-1649)을 옹립하니,
이것이 이른바 인조 반정이다.
능양군은 추촌왕 원종 정원군(1580,선조13년-1619.광해군11년)의 맏아들이다.
그의 부친 정원군은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서 인빈 김씨의 소생이었다.
정원군은 왕자로 있었을 뿐 인조의 등극 이전에 작고하였는데,
인조가 반정을 이룬 다음 그의 부친을 원종(元宗)으로 추존하였다.
1623년3월12일 밤,오랫동안 물샐 틈 없는 준비를 해오던 반정의 군사들은 드디어 일어났다.
이때 능양군은 친히 여러 공신들과 함께 연서역으로 나아가 이서가 거느리고 오는 6천 명의 군사를 맞았다. 그리고는 즉시 장사 이기축으로 하여금 창의문을 부수도록 하여 도성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창덕궁에서 훈련대장 이흥립이 군사를 거느리고 궁성을 지키고 있다가 반정의 군사가 당도하자 그와 합류
하였다.이흥립은 당시 집권 세력이었던 박승종과는 사돈간이었다.
더구나 그가 궁궐의 수비를 맡고 있었으므로 반정의 성공에는 대단히 필요한 존재였다.
그래서 일찍부터 이귀 등이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놓았다가 한번은 그 사실을 박승종이 알아차린 적이
있었다.이흥립의 딸이 박승종의 둘째 며느리가 되어 서로 사돈 사이였지만 박승종에게는 그런 관계가
문제가 아니었다.
박승종은 즉시 광해군에게 사실을 아뢰고 이흥립을 죽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옆에 있던 김상궁의 말만 믿고 따르는 광해군은 박승종의 말을 곧이 듣지 않았다.
그때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이흥립은 사돈 박승종을 찾아가 누누이 변명하였다.
그런데도 박승종은 끝까지 듣지 않고 장차 직권으로 이흥립을 잡으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마침 밖에 나갔던 박승종의 둘째 아들 즉 이흥립의 사위가 들어왔다.
이흥립은 그를 보자 와락 달려들어 사위를 붙들고 늘어졌다
.“이보게 사위, 영상 대감께서 내가 역모에 가담했다고 하시는구먼. 아 글쎄, 억울한 일도 분수가 있지.
자네가 좀 해명해 드리게나.”그러고는 통곡을 하니,박승종의 아들은 그 말을 듣고 자기 부친에게 놓아주라고 간청하였다. 그리하여 이흥립은 위태로운 목숨을 건지게 되었고, 능양군 또한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능양군은 이흥립에게 명하여 종묘와 대비전이 있는 서궁을 수비케 한 다음 금호문 밖에 당도하니,
수문장 박효립이 기다렸다는 듯 문을 활짝 열고 맞아들였다.
그리하여 장졸들은 무난히 궁내로 돌입하였다.
그리고 공사에 쓰려고 쌓아둔 나뭇더미 위에다 불을 질렀다.
타오르는 불길, 그것은 반정에 성공하였다는 신호이기도 하였다.
사실 그들은 대사를 위하여 칼을 빼어들고 집을 나올 때 그들 가족에게 만약 화광이 오르거든 성공한 줄
알고, 그렇지 않거든 실패한 줄 알라고 일러두었던 것이다.
능양군은 돈화문 안에 등상(牀 : 나무로 만든 걸상)을 놓고 앉아 궐내 각 직소의 관원들을 불러오게 하였다. 병조판서 이하 여러 관원들이 모두 달려 나와서 절하고 엎드렸다.
이때 반정군이 새로 호응하는 군사 수천 명과 함께 물밀듯이 정청 안으로 달려 들어가니 광해군의 좌우에
있던 시신들은 모두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술에 취하여 몽롱히 잠들려 하던 광해군만이,왠일이냐하고 물었다.“큰일났습니다. 큰 변이 일어났습니다.”다급해진 목소리로 한 내시가 아뢰었다.
광해군은 그만 허겁지겁 일어나서 대궐 담을 뛰어넘어 도망쳐버렸다.
반정군이 밤새도록 그를 찾다 못하여 날이 새자 그들은 차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능양군은 궐내를 떠나지 못하고, 그 대신 승지 이덕형이 서궁으로 인목대비를 모시러 갔다.
그러나 대비는 능양군이 친히 오지 않음을 불쾌히 여겨 이덕형을 도로 보내었다.
이때 이귀가 능양군에게 말한다.
“일이 광명 정대한데 별다른 염려가 어찌 있겠습니까. 또한 주상이 몸소 가서 청하지 아니하고 사람을 시켜
맞이하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것이니 군사는 창덕궁에다 머물고 주장이 친히 서궁에 문안드리는 것만
같지 못하오.”
그러자 능양군은 이귀의 건의를 받아들여 친히 신하들을 거느리고 대비전 앞에 나아갔다.
대비는 그제야 좌우를 명하여 선조의 허위(虛位)를 배설하고 능양군과 제신들을 맞아들였다.
신하들이 차례로 뵈온 다음 어보(御寶)를 바치니 대비는 어보를 받아든 채 감개무량한 듯,
지난날 겪어온 고초담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데, 서너 시간이 지나도록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아직도 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 신하들은 초조하여 아뢰었다.
“처분할 일이 많사오니 속히 환궁해야 되겠습니다.”
그제야 대비는 이야기를 그치고 어보를 받들어 능양군에게 전하였다.
“위로 선왕의 뜻을 받들고 아래로 백성들 마음을 편안케 하여 일국이 화합하도록 하라.”
능양군이 세 번 사양하다 받으니 신하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이렇게 하여 등극한 이가 인조이다.
그는 대비를 모시고 즉시 창덕궁으로 들어가 허물어진 기강과 국정을 바로잡고 팔도에 고시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안도케 하였다.
한편 광해군은 대궐 담을 뛰어 넘어 자수궁으로 도망가다가 정몽필을 만났다.
정몽필이 광해군에게 말을 주자, 광해군은 그간 자기가 총애하던 안국신의 집으로 갔다.
이에 안국신은 광해군에게 상중에 입던 흰 개가죽 남바위를 쓰게 하고 생포로 지은 철릭과 삼띄, 짚신 차림을 하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의원인 정남수가 알고 대궐에 알리었다.
이에 대궐에서는 도총부 군사를 보내 그를 데려오도록 하였다.
대비는 광해군이 잡혀 들어옴을 보자 뜰아래 무릎을 꿇어 엎드리게 하고 36가지 극악대죄를 들어 그를 꾸짖었다. 그리고는 말끝을 맺었다.“이러하니 너는 마땅히 춘추의 대의 아래 중벌을 받아야 한다.”
즉 죽어야 한다는 말이었으리라.
그러나 인조와 제신들이 극형을 베푼다는 것은 너무 과하다고 하며 살려주기를 간청하였으므로 대비도
노여움을 낮추어 그의 처리를 인조에게 일임하였다.
이에 인조는 광해군을 강화도에 위리안치시켰다가, 다시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이때도 대비는 광해군과 그의 처첩들을 따로 두라고 하였으나,
인조가 함께 있게 하고 노비도 몇 명 주어 의식 거처를 어렵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의 아들은 땅을 파고 울타리 밖으로 나가 도망 치려다가 붙들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뒤 부인 유씨는 며칠을 굶다가 죽어버렸고, 그의 첩도 자결하여 죽었으므로 광해군은 부끄러움과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병들어 앓다가 얼마 뒤에 죽었다.
반정이 일어나던 날 대북 이이첨,정인홍,유희분 등은 그들이 낮에 올린 정청에 대한 답변을 기다리느라고
궐문 밖에서 지체하고 있었다. 이들이 지체하고 밤에 되어서 별안간 자하문 쪽에서 함성이 일어나며 장안이 삽시간에 발칵 뒤집혔다
.“아! 모반을 꾸민다는 게 사실이었구나!”
그들은 허둥지둥 도망치다가 이윽고 군교에게 붙들려 처형되었다.
인조는 반정을 이룩한 다음,
승지 이덕회를 제주도로 보내어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씨를 모셔왔으며,
죄없이 귀양간 사람들을 모두 풀어서 제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폐가 되는 일은 모조리 고치고,축문을 지어 우주 제신에게 고하였으며
고문(告文)을 팔도에 반포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편안케 하였다.
♣ 인조반정과 광해군 폐위와 폐위이유
광해군이 집권한 후 이이첨,정인홍 등 대북파를 중용하면서 독단적인 정치를 감행하자, 정치적으로 소외되었던 서인세력들은 광해군의 여러가지 실정과 폐단을 문제삼고서, 능양군을 옹립하면서 ‘인조반정’을 일으키게 된다.
1623년 서인세력인 김류, 김자점, 이귀, 이괄등은 광해군의 패륜정치의 척결을 명분으로 삼으면서, 능양군을 옹립하는 ‘인조반정’을 일으켰다.
1623년 4월 11일 능양군을 주축으로 한 반정세력들은 2,000명의 군사들을 동원해서 한성부를 공격했으며,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통으로 인해 반정은 손쉽게 성공할 수 있었다.
반정군이 궁궐로 쳐들어올 당시에, 궁궐밖으로 도망가 의관집에 숨어었었던 광해군은 곧바로 붙잡히게 되었고, 폐위되어 강화도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인조반정’이 성공한 이후, 이이첨, 정인홍, 김개시 등 광해군과 함께 했던 대신들 40여명이 참수되었고, 그 외 200명의 사람들이 유배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광해군과 그 일파를 몰아내며 반정에 성공한 반정세력은 능양군(인조)을 왕위에 옹립하고, 서인들의 정권을 다시 열어나간다.
그렇다면 반정세력들이 반정을 시도해서 광해군을 폐위시킨 폐위이유와 명분은 무엇이었을까?
반정군은 궁궐을 접수하고 광해군을 체포하고 난 후, 다음과 같은 광해군의 죄상을 밝혔다고 한다.
첫째 광해군은 무리한 궁궐축조 공사를 과도하게 벌여서, 백성들의 생활을 도탄에 빠뜨렸다.
셋째 광해군은 명나라의 은공과 의리를 배반하고, 오랑캐인 청나라와 내통하고 화친하였다.
셋째 광해군은 동생인 영창대군을 살해했고,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폐륜을 저질렀다.
이것이 반정세력들이 인조반정을 일으킨 명분이면서, 동시에 광해군 폐위의 이유라고 한다.
임진왜란이라는 7년간의 긴 전쟁을 치르면서 전국토가 황폐화되고, 특히 수도인 한양의 도성과 궁궐들이 화제로 대부분 유실되어 버렸다고 한다.
선조와 광해군 등 왕실세력들이 전쟁으로 피난갔다가 다시 한양에 돌아왔을 때에는, 경복궁은 불에 완전히 타버려서, 재만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선조와 왕실사람들은 거처할 곳이 없어서, 양반저택을 임시로 개조해서 만든 덕수궁에서 지냈다고 한다. 당시의 덕수궁은 지금의 덕수궁처럼 화려한 것이 아니라. 양반주택을 개조해서 만든 임시거처였다고 한다.
그래서 광해군은 전쟁이 끝나고 국가를 다시 재건하는 과정에서, 불에 타서 없어진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등의 누각들을 다시 축조했다고 한다.
전쟁으로 기울어졌던 나라의 기틀을 다시 세우는 것이 급선무였던 당시에, 무엇보다도 국가 권위의 상징인 궁궐을 다시 재건하는 것은 당연했다고 본다.
이미 불에 타서 완전히 무너진 궁궐을 다시 복원하는 것은 임금으로서,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의무였다고 본다. 광해군이 아니더라도 어떤 군주라도 이같은 상황에서는 분명히 무너져버린 궁궐을 다시 재건했을 것으로 본다.
무너진 궁궐을 다시 복구한 광해군의 행위를 폐위의 이유로 삼은 것은 너무 지나친 처사 내지는 무리한 설정이라는 느낌이 든다.
전쟁으로 무너진 궁궐을 그대로 두고 재건하지 않는다면, 나라의 권위가 제대로 설 수 있겠는가? 또한 왕의 권위도 땅에 떨어질 것이며 국가기강이 제대로 세워지질 않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궁궐복원공사에 들어가는 비용을 각지방에 분배했는데, 공사비용을 거둬들이는 일부의 조도사들이 중간에서 갈취하거나, 과다비용을 청구하는 부작용이 발생했다고 하며. 이들의 농간으로 일부지역의 백성들이 수탈을 당했다고 한다.
광해군폐위의 둘째이유로 드는 것이 명나라와의 의리를 배반하고, 후금(청나라)과 화친한 것이다.
17세기 들어서면서 명나라와 후금(청나라)간의 전쟁이 발발했고, 명나라가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는데, 광해군이 파명군으로 보낸 강홍립의 군대가 요동으로 출병해서 후금(청나라)과 싸우지도 않고, 몰래 후금에 항복했다고 반정세력은 주장을 펼쳤다.
이것은 임진왜란 때에 목숨을 걸고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같은 반정세력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강홍립의 12,000명의 군대는 요동으로 가서 명나라를 도와서, 후금(청나라)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그런데 요동에서 후금(청나라)과 싸운던 명나라가 크게 패해서, 곧바로 후퇴해버렸다고 한다.
전쟁의 주인공인 명나라는 조금 불리해지자 별로 싸우지도 않고 후퇴를 했는데도, 명나라 지원병으로 간 강홍립의 군대는 요동에서 후금(청나라)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고 한다.
후금(청나라)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강홍립군대는 군사 12,000명 중에서 과반수의 군사를 잃을 정도로 맹렬하게 싸웠다고 한다.
그런데 명나라의 군대가 협조를 하지않고 도망가 버린 상태에서, 더이상 군사를 잃을 수가 없다고 판단한 강홍립장군은 불리해진 상황에서 후금(청나라)에게 투항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반정세력이 주장했던 데로 강홍립군대가 후금(청나라)과 싸워보지도 않고, 곧바로 항복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닌 것이며, 강홍립군대는 군사의 반을 잃을 정도로 싸웠던 것이다.
승산이 전혀 없는 싸움에서, 강홍립군대가 군사를 모두 잃으면서까지, 더 이상 후금(청나라)군대와 싸우는 것은 무리라고 보며, 명분이나 실익이 모두 없다고 본다.
따라서 강홍립군대의 투항은 시기적절한 행동인 것이지,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 아닌 것이다. 명나라군대는 다 도망갔는데, 우리군대만 남아서, 남의 전쟁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병사들이 다 죽을 때까지 싸울 필요는 전혀 없다고 본다.
이것을 가지고 반정세력들이 억지를 쓰는 것은, 중국(명나라)에 대한 지나친 사대주의 사상 때문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동북아정세는 동북아의 패권자리를 놓고서, 명나라와 후금(청나라)이 서로 싸우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신흥강국으로 떠오른 후금(청나라)이 명나라를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즉, 동북아시아의 패자가 명에서 후금(청나라)으로 바뀌고 있는 상황이었다.
광해군은 명나라가 쇠퇴해가고, 여진족이 세운 후금(청나라)이 강성해지는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으며, 쇠하는 명나라와 강성해지는 후금(청나라)사이에서 적절한 중립외교를 펼쳤으며,
이러한 광해군의 중립외교 때문에 적어도 광해군 때에는 후금(청나라)의 침략을 한번도 받지 않았던 것이고, 조선의 평화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반정세력이 광해군의 폐위의 이유로 주장한 두가지는 광해군이 폐위를 당할 정도로 큰 잘못을 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폐위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거나, 폐위의 명분이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세번째 폐위의 이유는 바로 폐모살제(廢母殺弟)로서, 광해군이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것을 말한다.
광해군은 자신이 세자시절부터 왕위세습의 경쟁자였던 영창대군을 죽이고, 어머니나 다름없는 인목대비를 폐위시켰는데, 바로 이러한 광해군의 행위가 성리학의 도덕적 가치를 훼손하는 광해군의 가장 큰 잘못으로 지적된 것이다.
의붓어머니를 죽이고 이복동생을 살해한 폐모살제(廢母殺弟) 행위가 광해군이 폐위된 이유로써 가장 타당성있는 이유라고 본다.
전혀 반역을 도모하지도 않은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의 행위는 어떠한 명분을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잘못한 행위이며, 누가 보더라도 욕먹을 짓을 한 것이다.
광해군이 영창대군과의 왕위세습경쟁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임금이 되었을 때에는, 선조가 이미 죽은 상태여서 이 당시의 인목대비와 3살베기 영창대군은 아무런 힘도 권력도 없는 연약한 존재들이었다.
이미 승자가 되어서 국가의 모든 권력을 휘어잡았던 광해군은 이들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에게 승자의 배려를 보여주었어야만 했다.
인목대비가 자신보다 9살이나 어렸다고 하지만, 아버지의 부인인 인목대비는 분명이 자신의 어머니나 다름없는 존재감이었고, 도덕적 가치를 제일 중요시했던 당시의 상황에서,
다른 것을 몰라도 어머니를 폐위시키고, 감금하는 행위는 임금으로서 가장 중요한 성덕을 잃어버리는 행위인 것이다.
이것이 반정쿠테타의 가장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했으며, 가장 도덕적이어야 하는 왕이 자신의 어머니를 폐위시키는 것은 인간의 가장 큰 패륜행위라고 보았던 것이며, 반정세력들이 반정에 가담할 수 있는 대신과 군사들을 모으는 데에 이것이 가장 중요한 명분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반정군들을 무려 2,000천명이나 모았을 정도로 반정세력은 큰호응을 받았던 것이다. 그렇게 많은 반정군들을 모을 수 있는 명분이 바로 광해군의 ‘폐모살제’인 것이다.
한때는 경기도땅에서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백성들을 위해서 선정을 펼치기도 했던 영특했던 광해군이 어쩌다가 이런 패륜적 행위를 하게 되었을까?
광해군은 폐위당하면서 패륜군주로 낙인찍혔지만, 한 때는 선정을 펼치기도 했던 현명한 군주였었다.
광해군은 대동법을 실시해서 백성들의 세금부담을 줄여주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전쟁터를 누비고 다니면서, 의병을 모았고 게릴라전쟁을 지휘해서 임진왜란에서 큰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광해군은 양전제를 실시해서, 토지에 대한 정확한 측량을 통해서, 토지결수에 비례한 정확한 세금을 메기고, 경작지를 확대시켰다.
그리고 광해군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동북아의 질서가 바뀌는 격변의 시기에서, 적절한 중립실리외교를 펼쳐서, 한반도에 안전과 평화를 지켜낼 수가 있었다.
이렇게 나름대로 적지않은 업적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집권후기로 접어들면서,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에 대한 ‘폐모살제’를 저지르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함으로써, 성군이 되지 못하고, 포악한 페륜군주라는 낙인이 찍히게 되어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광해군이 폐위되고 난 후, 새로 정권을 잡았던 인조 등 서인세력들은, 청나라를 철저히 배척하는 정책 때문에, 청나라의 15만대군의 침략을 받게되었고 청나라군대에 항복하고 말았으며, 인조가 청태조에게 아홉번 절하는 삼전도의 굴욕과 수모를 당하고야 만다.
적어도 광해군이 균형감있는 중립외교를 펼칠 때에는, 이같은 전쟁의 패배나 삼전도의 굴욕 같은 수모는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광해군의 폐위이유와 업적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어느쪽을 더 중시하느냐에 따라서 광해군은 폭군이 될 수도 있고, 성군이 될 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좀 더 연구해볼 가치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어쩌면 광해군은 원래는 선한 군주였는데, 이이첨, 김개시 같은 측근들이 눈과 귀를 막고 아첨하는 정치를 하는 바람에, 더욱 잘못된 길로 접어들게 되지는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