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장생       2019.0101.화요일,맑음

김장생;

본관; 광산,서울 출신

호;사계(沙溪).

조부; 지례현감 김호

부; 대사헌 김계휘

모; 평산 신씨 우참찬 신영의 딸이다.

자; 김집


1560년 송익필로부터 사서와 '근사록' 등을 배웠고, 20세 무렵에 이이의 문하에 들어갔다.

1578년(선조11) 학행으로 천거되어 창릉참봉이 되고, 1581년 종계변무의 일로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와서 돈녕부참봉이 되었다.그 뒤 정산현감이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호조정랑이 된 뒤, 명나라 군사의 군량 조달에 공이 커 종친부전부로 승진하였다.

1596년 한 때 연산으로 낙향하였다.
이듬해 봄에 호남 지방에서 군량을 모으라는 명을 받고 군자감첨정이 되었다가 곧 안성군수가 되었다

북인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1605년 관직을 버리고 연산으로 다시 내려갔다. 그 뒤에 익산군수를 지내고,

1610년(광해군) 회양·철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613년 계축옥사 때 동생이 연좌되었다가 무혐의로 풀려나자, 관직을 버리고 연산에 은둔해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75세의 나이에 장령으로 조정에 나갔으나,

곧이어 사업으로 옮겨 원자보도의 임무를 겸하다가 병으로 다시 낙향했다.

이듬해 이괄의 난으로 왕이 공주로 파천해오자 길에 나와 어가를 맞이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왕을 따라 서울로 와서 원자 보도의 임무를 다시 맡고 상의원정으로 사업을 겸하였다.

집의를 거친 뒤 낙향하려고 사직하면서 13가지의 중요한 정사를 논하는 소를 올렸다.

그 뒤 좌의정 윤방,이조판서 이정구 등의 발의로 공조참의가 제수되어 원자의 강학을
겸하는 한편, 왕의 시강과 경연에 초치되기도 하였다.

1625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임명받았으나 이듬해 다시 사직해 행호군의 산직으로 낙향한 뒤

이이.성혼을 제향하는 황산서원을 세웠다.

같은 해 용양위부사직으로 옮기고, 1627년 정묘호란 때 양호호소사로서 의병을 모아 공주로
온 세자를 호위하였다. 곧 화의가 이루어지자 모은 군사를 해산하고 강화도의 행궁으로 가서 왕을 배알하고, 그 해 다시 형조참판이 되었다.

그러나 한달 만에 다시 사직해 용양위부호군으로 낙향한 뒤 1630년에 가의대부로 올랐으나, 조정에 나가지 않고 줄곧 향리에 머물면서 학문과 교육에 전념하였다. 늦은 나이에 벼슬을 시작하고 과거를 거치지 않아 요직이 많지 않았지만,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의 영수격으로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인조 즉위 뒤에도 향리에서 보낸 날이 더 많았지만, 김장생의 영향력은 이이의 문인으로 줄곧 조정에서
활약한 이귀와 함께 인조 초반의 정국을 서인 중심으로 안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문과 교육으로 보낸 향리 생활에서는 줄곧 곁을 떠나지 않은 아들 김집의 보필을 크게 받았다.
김장생의 문인은 많은데,
송시열.송준길.이유태.강석기.장유.정홍명..최명룡.김경여.이후원.조익.이시직.윤순거.이목.윤원거.최명길.

이상형.송시영.송국택.이덕수.이경직.임의백 등 당대의 비중 높은 명사를 즐비하게 배출하였다.

아들 김집도 문하이지만, 문인들 사이에는 김장생을 ‘노선생’, 아들을 ‘선생’으로 불렀다고 한다.
학문적으로 송익필.이이.성혼 등의 영향을 함께 받았다.

하지만 예학 분야는 송익필의 영향이 컸으며, 예학을 깊이 연구해 아들 김집에게 계승시켜 조선 예학의 태두로 예학파의 한 주류를 형성하였다.

인조 즉위 뒤 서얼 출신이던 송익필이 아버지 송사련의 일로 천인이 되자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같은 문하의 서성.정엽 등과 신변사원소를 올렸다.

또한, 이이와 성혼을 위해 서원을 세우고 1만 8000여 자에 달하는 이이의 행장을 짓기도 하였다.

스승 이이가 시작한 '소학집주'를 1601년에 완성시켜 발문을 붙였는데,

'소학'에 대한 관심은 예학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저서로는 1583년 첫 저술인 '상례비요' 4권을 비롯,
'가례집람''전례문답''의례문해' 등 예에 관한 것이 있고,
'근사록석의''경서변의'와 시문집을 모은 '사계선생전서'가 전한다.

 

1688년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연산의 돈암서원을 비롯해 안성의 도기서원 등 10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묘호(廟號)의 뜻/190112  (0) 2019.01.12
⊙ 윤경/190101   (0) 2019.01.01
⊙ 소현세자/190101   (0) 2019.01.01
⊙ 서얼허통/190101   (0) 2019.01.01
⊙ 영정법/190101   (0) 2019.01.01

⊙ 소현세자       2019.0101.화요일,맑음

생졸; 1612-1645.34세

인조와 인렬왕후 사이에서 1612년에 태어난 맏아들이다.

이름은 왕이다.

1625년 인조3년에 세자에 책봉되었고 1627년 병자호란때 전주로 내려가 남도 민심을 수습하기도 했다.

이해 강석기의 딸과 혼인하였다.

1637년 병자호란때 삼전도에서 인조의 굴욕적인 항복이 있자 자청하여 봉림대군및 척화파 대신들과 함께

심양에 인질로 잡혀갔다.

이 후  9년동안 인질로 머무르면서 외교관의 소임을 도맡아 청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면 담판을 짓거나 막아내기도 하였다.청은 조선과의 문제를 소현세자와 해결하려고 했고,왕권이 둘로 나누어지는 양상을

가져오게 되자 인조와 조정은 친청행위로 규정하고 좋화하지 않았고,인조가 총애하는 귀인 조씨(조소영)가

세자빈과 사이가 좋지 않아 부자의 관계를 더욱 악화 시켰다.

1945년 9년동안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 한 후 2달 뒤인 4월23일 병으로 드러눕고 3일 후 의문의

죽음을 당하였다.

이듬해 세자빈 강씨도 인조로 부터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두 아들도 제주도로 귀양가 두명 다 병에 걸려 죽었다.

인조는 아들과 며느리를 죽였다는 세상의 비난을 피하고자 그들을 돌보던 나인을 장살시켰다.

 

소용 조씨는 소현세자빈 강씨와 불화가 심했는데,이로인해 인조가 장자인 소현세자를 감시하게 되었다.

병자호란 후 1637년 인조 15년,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잡혀갔던 소현세자가 청나라와 긴밀한 관계를 관계를 유지하자 소용조씨는 세자가 왕위를 차지할 목적이라며 갖은 모함으로 인조를 부추겼다.

결국 1645년 인조 23년 소현세자와 세자빈 강씨가 환국 한 후 두달만에 소현세자는 돌연사하고 만다.

당시 주치의 이형익은 소용 조씨의 어머니 한옥의 집에 드나들던 자로 인조의 신임을 받고 있는 자였다.

독살의 흔적이 뚜렸하였으나 인조는 서둘러 장례를 마첬고,이형익에 대한 처벌도 하지 않았다.

또한 인조는 적자 계승자인 소현세자의 원손이 아닌 차자 봉림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하였다.

세자 책봉 직후인 1645년 인조 23년 10월 소용 조씨는 소의에 올랐고,

계비인 장렬 왕후 조씨를 이간질하여 별궁인 경덕궁으로 몰아 내는데 일조하였다.

소현 세자빈 강씨가 자기를 저주 했다는 소의 조씨는

1646년 인조 24년,세자빈 강씨가 인조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받게 되어

별당에 유치 됐던 강씨는 폐서인으로 사약을 받았고,왕손 3형제는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 곳에서 첫째,둘째는 병사하고 세번째인 임창군 이혼만 살아 남았다.

후일 영조때  임창군의 아들 6형제 중 장남인 밀풍군은 이인좌의 난 때 연좌되어 좌결하게 된다.

경기도 고양시 소현묘에 묻쳤다가 고종 때 서야 소역원으로 격상 되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윤경/190101   (0) 2019.01.01
⊙ 김장생/190101   (0) 2019.01.01
⊙ 서얼허통/190101   (0) 2019.01.01
⊙ 영정법/190101   (0) 2019.01.01
⊙ 상평통보/190101   (0) 2019.01.01

⊙ 서얼허통      2019.0101.화요일, 맑음

양반의 첩에게서 태어난 사람과 그 후손들을 서얼이라 하는데,

서는 양첩 소산, 얼은 천첩 소산을 가리킨다.

이들은 문과의 생원, 진사 시험에 응시하지 못하며 잡직 이외의 관직은 맡을 수 없었고

승진에도 제한이 있었다.

서얼의 허통 문제를 처음으로 제기한 것은 조광조였다.

이후 이이 등에 의해 허통 문제가 계속 제기되었다.
인조,현종,숙종 때
에도 계속 허통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서얼들의 집단 상소 운동도 숙종 대 이후에는 자주 나타난다.

그리하여 영조 때는 호부호형을 인정하고 문과를 개방하기도 하였다.

서얼허통 문제가 큰 진전을 보인 것은 정조 때이다.

정조는 즉위 직후 서얼에 대한 승진 제한을 대폭 풀었으며,

규장각에 검서관 제도를 두어 유득공,이덕무,박제가,서이수와 같은 서얼을 검서관으로 등용하였다.

또 초계 문신 가운데도 서얼 출신이 다수 있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장생/190101   (0) 2019.01.01
⊙ 소현세자/190101   (0) 2019.01.01
⊙ 영정법/190101   (0) 2019.01.01
⊙ 상평통보/190101   (0) 2019.01.01
⊙ 이원익/190101   (0) 2019.01.01

영정법         2019.0101.화요일,맑음

1635년(인조13년) 시행된 전세(田稅) 징수법으로 정식 명칭은 영정과율법이다
세종 때 제정된 공법은 전분6등(田分六等)·연분9등(年分九等)으로 나누어 총 54등급의 과세 단위를 설정, 그 판정과 운영이 복잡했고 전체적으로 세율이 높아 현실적으로 시행되기 어려웠다.

따라서, 15세기 말부터 전세는 풍흉에 관계없이 최저 세율에 따라 쌀 4∼6두(斗)를 고정적으로 징수하는 것이 관례화되었다.

영정법은 이러한 관례를 법제화하고 세수를 늘리기 위해 그 해의 풍흉에 관계없이 농지의 비옥도에 따라
9등급의 새로운 수세액을 정한 것이다.

즉, 상상전(上上田) 20두, 상중전 18두, 상하전 16두, 중상전(中上田) 14두, 중중전 12두, 중하전 10두,

하상전(下上田) 8두, 하중전 6두, 하하전 4두였다.

여기에 경상도는 최고 급지를 상하전 쌀 16두로, 전라도·충청도는 최고급지를 중중전 쌀 12두로, 기타
5도는 하하전 쌀 4두로 한정하였다. 그러나 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서도 대부분의 농지가 하중·하하전이었으므로 전세는 전체적으로 4∼6두를 넘지 않았다.

그러나 농지에는 전세 외에도 1결당 대동미 12두, 삼수미(三手米) 2두, 결작(結作) 2두의 정규
부세와 여러 가지 명목의 수수료·운송비·자연소모비 등의 잡부금이 부가되어 과중한 부담이 되었다.

더구나 이러한 부담은 소작농민에게 전가되기 마련이었으므로 임진왜란 이후 국가의 전세 수취에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이리하여 조정에서는 각 도의 농지 총 결수(結數)에 재해 면적을 계산해 삭감하고 수세의 총액을 할당 징수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1760년(영조 36)에 제정, 시행된 비총법(比摠法)이었다.

비총법은 영정법에 기초해 마련된 것으로 국가의 세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게 하여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까지 시행되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소현세자/190101   (0) 2019.01.01
⊙ 서얼허통/190101   (0) 2019.01.01
⊙ 상평통보/190101   (0) 2019.01.01
⊙ 이원익/190101   (0) 2019.01.01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181230   (0) 2018.12.30

⊙ 상평통보       2019.0101.화요일,맑음

1678년(숙종 4) 조선의 유일한 합법적 주화로 채택·유통되기 시작하여

조선 후기까지 사용된 명목화폐이다.

17세기로 들어 사회적·경제적 발전이 급진전 됨에 따라 쌀·포 등 과 금·은 등 이 가졌던 화폐로서의 기능이 점차 한계를 드러내어 명목 화폐인 동전 유통의 필요성이 커졌다.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파탄에 직면한 국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동전 주조, 유통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사용 초기에는 다양한 관청 및 군영이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주조·유통하게 하였으나 점차 기반이 확립되자 국가가 화폐 주조 관리 체계의 일원화를 시도하여 1785년(정조 9) 마침내 호조가 업무를 전부 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순조에 들어서면서부터 관리의 일원화 원칙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하여 다양한 관청에서
주조·발행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민간인에 의한 도급제로 전환되는 민영화 경향이 나타났다.

1860년대에 화폐가치가 낮은 당백전을 남발함으로써 상평통보 유통 체제는 큰 혼란을 겪는다.

결국 1894년(고종 31)에 주조 발행 사업이 중단되고,

20세기 초 부터 시작된 화폐 정리 사업의 추진 과정에서 회수·폐기 되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서얼허통/190101   (0) 2019.01.01
⊙ 영정법/190101   (0) 2019.01.01
⊙ 이원익/190101   (0) 2019.01.01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181230   (0) 2018.12.30
◐ 기자헌/181227   (0) 2018.12.27

⊙ 이원익        2019.0101.화요일,맑음

이원익; (李元翼, 1547~1634년)

조선 시대 중기는 안팎으로 정세가 급변하는 격동의 시대였다.

특히 선조, 광해군, 인조에 이르는 시기는 붕당의 시작과 왜구와 여진족의 침입, 인조반정 등으로 나라 안팎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이때 세 명의 왕 모두가 영의정으로 발탁한 인물이 바로 이원익이다.

이원익은 나라가 어지러울 때 중심을 잡고 바른 정치를 펼쳤으며, 당대는 물론이고 후세에 이르러서도 청렴함으로 높이 칭송받은 인물이다.

이원익의 본관은 전주. 태종의 아들 익령군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함천 부수를 지낸 이억재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급제했다.

승문원 관원과 성균관 전적을 거쳐 1573년(선조 6)에는 성절사 권덕여의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호조·예조·형조의 좌랑을 두루 거치고 황해도 도사를 지내다 이이의 추천으로 내직인 정언으로 발탁

되었다.

1583년(선조 16)에는 우부승지가 되었으나 도승지 박근원과 영의정 박순의 불화로 인해 승정원이 탄핵을 받게 되자 이에 대한 부당함을 상소하다가 파면되기도 했다.

1587년(선조 21)에는 이조 판서 권극례의 추천으로 안주 목사가 되었다.

안주 목사로 부임해 지방의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운 이원익은 그 후 중앙의 요직을 두루 지냈다.이원익이 재상의 반열에 올라 큰 뜻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였다.

1592년(선조 26)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평안도 순찰사가 된 이원익은 왕의 피란길을 호종하고,

명나라 군사와 함께 조선군을 지휘해 평양성을 탈환하는 데 공헌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우의정, 4도의 도체찰사, 중추부사를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광해군 조와 인조 조에도 영의정이 되어, 그는 세 왕조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으로 기록되었다.

이원익은 선조 때 대동법 실시를 건의했고, 불합리한 조세제도와 병역제도를 시정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피란길을 호종했으며, 중앙의 요직을 두루 지내며 선조 조부터 인조 조에 이르기까지 세 임금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이다.

 

이준경과 이이가 알아본 인재

1564년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서 수학하던 이원익을 장차 크게 쓰일 인물로 점찍은 사람이 있다.

당시 영의정이던 동고 이준경이다. 이준경은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을 가진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런 이준경의 눈에 이원익에게 한 가지 우려되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건강이었다.

이원익은 키가 3척(1미터 내외)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굉장히 작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젊을 때는 몸도 약해서 관직에 오르기 전에 몸부터 챙기라는 주위의 걱정을 꽤 들었던 모양이다.

전해지는 일화에 의하면 이준경이 이원익을 왕에게 추천하면서 몸이 허약해서 걱정이라고 하니 왕이 산삼을 내려 병을 고치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이원익을 직접 본 왕이 그 작은 키를 보고
“괜한 산삼만 내다 버렸구나.” 하고 웃었다고 한다.

 

1569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이원익은 승문원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이때 유성룡이 그를 자주 찾아와 교류했다.

이원익은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지 않는 성품이었는데,

유성룡은 그런 그가 믿고 의지한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유광익이 쓴 '풍암집화'에는 두 사람의 사람됨을 비교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원익은 속일 수는 있지만 차마 속이지 못하겠고, 유성룡은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다. 

이원익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가 무엇이든 최선을 다했다.

1574년(선조 7) 황해도 도사로 부임했을 때는 스물여덟 살의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처리를 잘해서

나이 많은 아전들도 그를 존경하고 따랐다고 한다.

마침 이이가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했는데, 젊은 도사 이원익을 믿고 일을 맡겼다.

이이를 황해도 관찰사로 삼았다. 이이가 서울에 들어와 숙배한 뒤에 부임해 상소하면서 도내의 폐막을 전부 개혁하겠다고 청했다. 그런 뒤에 학교를 크게 수리하고 학범을 신명하며, 탐활한 자를 제재하고 선량한 자를 정표하며, 백성의 아픔을 보살피고 군정을 닦으니 군사들과 백성이 감열했으나, 그가 건의한 것을 조정이 많이 따르지 않았으므로 식자들이 유감으로 여겼다.

이때 도사 이원익은 명망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 서관으로부터 막직에 보직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경시했으나, 이이는 한 번 보고 그의 재주를 알아 마침내 정무를 맡겼다. 

선조 7년 10월 1일 이때의 인연으로 이이의 추천을 받은 이원익은

이듬해인 1575년(선조 8) 중앙 관직인 정언이 되었다.

이원익은 1587년(선조 20) 안주 목사가 되었다. 당시 황해도 안주 지방은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백성의

삶이 피폐해져 있었다. 그런데 안주는 관방의 중요한 지역이라 조정에서는 명망 있는 중신을 보내어 민심을 수습하고자 했다. 그러나 안주가 워낙 변방이다 보니 명관들이 모두 가기를 꺼려했다.

이때 이조 판서 권극례가 이원익을 추천했다. 당시 이원익은 1583년에 우부승지로 있다가 도승지 박근원과 함께 파직된 후 복관되지 못하고 있던 터였다. 안주에 부임한 이원익은 기근을 해결하고 민생 안정에 크게
기여했다. 그가 안주에서 활약한 내용에 대해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원익이 단기로 부임해 먼저 조곡 1만 석을 감사에게 청해다가 종자를 주고 경작을 권했더니 가을이 되자 큰 풍년이 들어 조곡을 갚고도 창고가 가득 찼다. 드디어 군정을 변통하고 잡역을 감면해 몸소 변진에
양세를 납입하게 해 조등의 폐단을 없앴다.

안주는 서로에서 누에치기를 힘쓰지 않았다. 이원익이 백성에게 뽕나무를 심어 누에치기를 권장하니, 사람들이 이를 이공상이라 불렀다. 근면하고 민첩하고 청렴하고 일을 잘 처리했으므로 아전은 두려워하고 백성은 사모해 치적이 크게 나타났다. 자주 포상을 받아 품계가 올라 조정으로 돌아오기에 이르렀으니, 공보(公輔)의 명망은 여기에서 기초한다. 비록 작고 병약했으나 그의 능력을 알아본 여러 명관들 덕분에 이원익은 조정에서 힘을 얻기 시작했다.

전쟁에서 공을 세우다 이원익이 재상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부터였다. 관직 생활을 하는 동안 크게 명망을 얻지 못하다가 나라에 변란이 일어나면 그 능력을 십분 발휘해 주목을 받는 사람이 있다. 이원익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하지만 이원익은 이미 준비된 인재였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

중에 큰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이원익은 평안도 도순찰사가 되어 관서의 병마를 감독했다.

같은 해 5월, 선조가 영변으로 몽진하고 나서는 평양성에 남아 성을 방어했다.

그리고 6월에는 군병을 모집해 적진을 공격하는 등 전공을 세운 후에 평안 감사 겸 순찰사로 임명되었다.

1595년(선조 28)에는 우의정이 되어 처음으로 재상의 반열에 올랐으며,

이듬해에는 성주에 주둔하며 산성을 수축하고 다시 남쪽으로 내려가 군사를 지휘했다.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이원익은 충주에 주둔하며 명나라 장수인
경리 양호의 군량을 조달했다. 한편 이원익은 모함으로 파직되었던 이순신에게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없으면 전쟁에서
이기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이순신이 다시 기용되었고, 이원익은 한산도까지 직접 찾아가서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듬해 좌의정에 오른 이원익은 명나라 장수 양호의 변무사로서 연경에 가서 주본을 올렸다. 중국어 실력이 뛰어났던 이원익은 명나라의 장수와 사신을 맞아 이야기를 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명나라의 관원들이 이를 보고 감탄했다.

 

이원익은 명나라에 다녀온 후에 영의정이 되었다. 그러나 넉 달 만에 사직했다.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함께
재상을 지낸 유성룡이 이이첨 등에게 탄핵을 받았을 때 그를 변호하다가 대간의 공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해 9월, 다시 영의정이 되어 조정에 돌아온 이원익은 유성룡과 같이 어진 이를 등용하고 홍여순, 정영국, 채겸길과 같이 불초한 사람들은 물리쳐야 한다고 왕에게 청했다.

유성룡은 청렴하고 지조가 있어 자신을 지키고 혈성으로 나라를 걱정했는데, 이제 전하께서 홍여순 등의

참소를 좇아 어진 이를 끝까지 쓰지 못하고, 일시에 착한 무리를 유성룡의 당이라고 해 멀리하고 배척하시니, 신은 사림의 화가 이를 좇아서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조정이 존엄하지 못하고 임금의 위엄이 서지 못하여 정영국과 채겸길 등이 감히 간사한 언론으로 사람의

귀를 현혹시키므로, 시비가 밝지 못하여 행동거지에 잘못된 점이 많고 사특함과 바름이 분명하지 못하니

조정이 편안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홍여순은 임국로의 무리이니, 만약 이런 사람을 임용한다면 반드시 국가의 화가 될 것입니다.

이는 당색에 구애받지 않은 공평한 인사에 대해 진언한 것이다. 이원익은 전쟁 중에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고 재상의 자리에 올랐으나 당쟁으로 어지러운 조정을 안타깝게 여겼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북인 세력이 득세함에 따라 남인과 서인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그래도 이원익, 이덕형, 이항복, 심희수 등의 원로들은 조정 대신으로 남아 있었다.

특히 이원익은 남인의 영수로서 광해군 대의 대북 정권에서 영의정을 지냈고, 서인 정권인 인조 대에도 영의정을 지냈다. 물론 특정 당파에 권력이 집중되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상호 비판과 견제, 공존의 원리는

겉치레에 불과했다. 따라서 관제 야당에 불과했던 남인이 영의정 자리를 차지한다고 해도 이것은 인심을

수습하기 위한 변통책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이원익은 인물 그 자체로 본성이 정직하고 청렴해 당파를 막론하고 신료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았다.
사실 그는 동인과 서인의 붕당이 형성될 때 동인 계열의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지만 처음부터 당색을 크게 드러내는 인물은 아니었다. 자기 사람을 챙기려고 인사권을 남용하거나 경쟁자를 공격하기 위해 권모술수를 부리지도 않았다.

이런 공명정대한 태도가 선조에서 광해군으로, 광해군에서 인조로 넘어가는 격동의 시대에 원로대신으로서
자리를 보존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물론 그 역시 상황에 따라 면직과 복직을 반복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오히려 화를 입지 않고 오랫동안 권세를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이는 실록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선조 조에 내직으로 들어와 재상이 되었지만 얼마 안 되어 면직되었고 광해군 초기에 다시 재상이 되었으나 정사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사직하고 여주에 물러가 있었으므로 임해, 영창의 옥사에 모두 간여되지 않았다.

 

당쟁의 격랑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이원익은 소신껏 바른 정치를 실천할 수 있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고 선혜청을 설치한 것도 그의 치적 중 하나이다. 그는 방납의 폐단을 없애고 백성들의 부담을 줄여 줄 것을 왕에게 주청했다.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이 각사(各司)의 방납인(防納人)들에 의해 중간에서 가로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십 배, 몇백 배가 되어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었는데, 기전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그러니 지금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청을 설치해 매년 봄과 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1결(結)당 매번 8말씩 거두어 본청에 보내면 본청에서는 당시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넉넉하게 헤아려 정해 거두어들인 쌀로 방납인에게 주어 필요한 때에 사들이도록 함으로써 간사한 꾀를 써 물가가 오르게 하는

길을 끊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거두는 16말 가운데 매번 1말씩을 감해 해당 고을에 주어 수령의 공사 비용으로 삼게

하고, 또한 일로 곁의 고을은 사객이 많으니 덧붙인 수를 감해 주어 1년에 두 번 쌀을 거두는 외에는 백성들에게서 한 되라도 더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오직 산릉과 조사의 일에는 이러한 제한에 구애되지

말고 한결같이 시행하도록 하소서. 

 

이원익이 끈질기게 대동법을 시행할 것을 주장한 것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의 어려움을 살펴 민생을
안정시키려는 의도였다. 당시 대동법은 우선 경기 지역에서 시범적으로 실시되었는데, 이러한 시도가 있었기에 훗날 전국적으로 확대될 수 있었다.

1609년(광해군 1)에는 조정 내에 만연한 붕당의 폐단을 비판했다.

조정에 붕당의 조짐이 30년 전에 일어났는데, 근래에는 그 풍습이 더욱 고질이 되어 인물의
현부는 분변하지 않고 자기 당이면 취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는 버리며, 논의의 시비는 따지지 않고 자기

당이면 가하다 하고 그렇지 않을 경우 불가하다 하므로 현우와 시비가 뒤섞이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진용하면 그 진용된 자가 어진 사람이더라도 반드시 “그 당이기 때문이다.” 하고, 한 사람을 물리치면 그 물리침을 당한 자가 어리석은 사람이더라도 반드시 “그 당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며, 논의의
가부까지도 어느 쪽임을 가리켜 말하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온 나라의 경·사·대부가 단 한 사람도 당목 가운데 들지 않은 자가 없어 피차가 서로를 시기하고 각기 혐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을 만나면 방황하며 담당하려 하지 않고 남의 일을 보듯 하여 국사를 어찌할 수
없는 지경으로 빠뜨리니, 이를 생각하면 진실로 통탄스럽기 그지 없습니다. 

 

한편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정권을 잡은 대북의 실세 정인홍과 이이첨 등은 왕의 친형인 임해군과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제거했다. 그것도 모자라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까지 폐비하고자 했다. 이때 이원익은 광해군에게 어머니께 효성을 다하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광해군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효성을 다하지 못한 일이 없는데 원익이 어찌 감히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어 군부의 죄안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이 사건으로 이원익은 파직당하고 홍천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역시 이원익의 명망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큰 벌은 내리지 않았다.

 

이후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인해 광해군은 폐주가 되었다. 반정 공신들은 인목대비를 폐하고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인 패륜을 이유로 광해군 역시 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이원익은 이에 반대했다. 자신이 한때 임금으로 섬겼던 사람을 죽인다면 자신도 인조의 밑에서 벼슬을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소신있는 발언이었다. 결국 인조는 유배를 보내는 것으로 광해군에 대한 처리를 마무리했다.

1623년(인조 1) 반정으로 광해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인조는 이원익을 다시 영의정의 자리에 앉혔다.

왕의 부름을 받은 이원익은 팔십대의 노구를 이끌고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다. 인조는 이원익을 인견했다.

상께서 이르기를 “오직 경만을 의지하니 경은 모름지기 백관을 통솔하고 힘써 나를 도우라.
조정의 수백 년 종사가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 경의 보좌를 힘입어 위태한 조정이 부지되기를 바랄 뿐이다.” 하니 이원익이 아뢰기를 “신이 나라를 위하는 마음이야 어찌 감히 조금인들 해이하겠습니까.

다만 근력이 부칠 따름입니다.” 했다.

세 분의 왕을 보필하고 전장을 누비며 공을 세운 천하의 이원익도 이제 환관의 부축을 받아 겨우 왕 앞에
나설 수 있을 정도로 기력이 쇠해졌다. 인조는 노대신에게 궤장을 하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원익은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어가를 호종하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세자와 함께 남쪽으로 가 전주에 주둔하는 등 끝까지 신하된

도리를 다했다. 이후 이원익은 몸이 늙고 병들어 더 이상 공무를 다할 수 없으니 퇴직하게 해달라고 왕에게 여러 번 청했다. 그러나 인조는 청을 들어주지 않다가 결국 마지막에서야 퇴직을 허락했다.

1627년(인조 5) 가을이었다. 이원익은 이때부터 관직 생활을 접고 금천에서 여생을 보냈다.

후세 사람들이 이원익을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은 그가 진정한 청백리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그는 재상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항상 검소했다. 뇌물을 주려는 자는 오히려 벌주는 청렴함을 자랑하기도 했다.

한 번은 인조가 퇴직한 이원익의 안부가 궁금해 승지를 보내 알아오도록 했다. 이 일이 실록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상이 승지를 보내 이원익의 안부를 묻게 하면서 승지에게 하교하기를 “그의 기력은 어떻고,
살고 있는 집은 또 어떠한지 내가 자세히 알고 싶으니 일일이 서계하라.” 했다. 승지가 회계하기를 “이원익은 이미 극도로 쇠약해져 기력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돌아앉거나 누울 때에도 꼭 사람이 부축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살고 있는 집도 몇 칸 초옥(草屋)에 불과해 바람과 비를 가리지 못했습니다. 대대로 선영 아래에서 살아오면서도 한 두락의 밭이나 두어 명의 노비도 없이 그저 온 식구가 월봉(月俸)으로 겨우 입에 풀칠한다고 했습니다.” 했다.상이 이에 답하기를 “40년 동안 정승을 지냈으면서 몇 칸 초옥에 살며 바람과 비도 가리지 못한다니, 그의 청백한 삶이야말로 옛날에 없던 일이다. 내가 평소 그를 경모했던 것은 그의 공덕(功德) 때문만이 아니다. 이 공(李公)의 맑고 검소한 삶의 자세를 여러 관료들이 본받는다면 백성이 곤궁하게 될까 걱정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의 검소한 덕행은 또한 높이 표창하여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해당
도(道)로 하여금 정당(正堂)을 지어 주게 하고 해당 조(曹)로 하여금 무명 이불과 흰 명주 요를 주게 해 그의 높은 정신이 이어지도록 하라.” 했다. 

원익은 1634년(인조 12) 여든여덟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이때도 집이 가난해 상을 제대로 갖춰 치르지 못하니, 인조가 관재의 여러 도구를 보내고 세자가 조문했다.

작은 키 때문에 다른 대신들 사이에 서 있으면 잘 보이지 않아 왕이 자리에서 일어서야 겨우 얼굴이
보일 정도였다는 이원익. 그러나 그는 작은 체구와 병약한 체질에도 불구하고 가는 곳마다 치적을 쌓아 인심을 얻었고, 전쟁 중에는 전공을 세워
나라를 구했다. 또한 평생을 강직하고 청렴하게 살았고, 바르고 소신 있는 정치를 했다. 또한 당색에 관계없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았다. 서인인
이항복은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나는 매사를 수반(首班, 이원익)의 재결에 따라 행한다.”

당대는 물론이고 오늘날까지도 ‘오리 정승’이라는 호칭은 명재상의 대명사로 칭송받고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정법/190101   (0) 2019.01.01
⊙ 상평통보/190101   (0) 2019.01.01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181230   (0) 2018.12.30
◐ 기자헌/181227   (0) 2018.12.27
◐ 추존이란?/181222  (0) 2018.12.23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2018.12.30.일요일,맑음

인조반정(1623년) 이후 정치를 주도했던 서인 세력은 명나라와만 친하게 지내고 후금(여진족;청) 세력을

멀리했다. 이를 빌미로 후금 군대가 조선 영토를 두 차례 침범해 왔으니,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년)이 바로 그것이다.

 

정묘호란은

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서인 세력과 인조는 친명배금의 태도를 취하였다.

이를 빌미로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였다.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이다.

후금의 침략에 관군과 의병이 맞서 싸웠으나 침략군을 물리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후금 역시 명과의 전투가 더 중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단 화의가 이루어져,

조선과 후금은 형제 관계를 맺었다.
임진왜란(선조25년 1592년 부터 1598년까지 2차에 걸쳐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으로 피폐한 조선은

이 전쟁으로  또 다시 쑥대밭이 되었으며,백성의 삶은 한층 곤궁해졌다.


병자호란은

오랑캐의 나라라고 얕잡아 보다가 후금에게 크게 당했으면서도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달라진 게 없었다.

오히려 반란과 세력 다툼으로 나라 사정은 더욱 어지러웠다.

후금은 주변 세력을 끌어들여 힘을 키우고,나라 이름도 청나라로 바꿨어요.

청나라의 태종은 조선을 손에 넣으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조선은 후금과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명나라와 가깝게 지내고,청나라를 멀리하고 있다.

이런 조선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청 태종은

정묘호란이 일어난 지 9년 후인 인조 14년 1636년, 20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정묘호란에 이어 병자호란이 일어 났든 것이었다.

6일 만에 한양을 빼앗긴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을 가려 했으나 그 길마저 막히자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청나라 군대는 인조가 있는 남한산성을 겹겹이 에워쌌다.

더 이상 달아날 곳이 없어진 인조는 끝까지 싸울 것인지,아니면 항복을 할 것인지 결정을 내려야했다.

 

1637년,항복을 결정한 인조는 꽁꽁 언 땅 위를 걸어 남한산성 밖으로 나왔다.

그 뒤로 소현 세자를 비롯해 500여 명의 신하들이 줄줄이 따랐다.

인조는 청나라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삼전도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청나라 태종이 아홉 개의 계단이 놓여진 높은 단상 위에 앉아 있었다.

단을 높게 쌓은 것은 태종을 우러러 보라는 뜻이었다.

인조는 청 태종이 앉아 있는 단 앞으로 걸어가 절을 했다.

한 나라의 왕이 무릎 꿇고 엎드려 땅에 머리를 대고 절을 한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치욕적인 일이다.

그래서 이 일을 두고 <삼전도(지금의 송파 삼전 나루)의 치욕>이라고 한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상평통보/190101   (0) 2019.01.01
⊙ 이원익/190101   (0) 2019.01.01
◐ 기자헌/181227   (0) 2018.12.27
◐ 추존이란?/181222  (0) 2018.12.23
◐ 이괄의 난 /181223   (0) 2018.12.23

◐ 기자헌    2018.12.27.목요일,맑음

기자헌; 조선 중기의 문신

생졸; 1562(명종 17)∼1624(인조 2).63세.
본관; 행주

증조부; 응교 준,

조부;  한성부윤 대항

아버지; 응세

어머니; 우찬성 임백령의 딸.

 

1582년(선조 15) 성균관에 입학하여 8년 후 1590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사가독서하고 검열이 되었다.

1592년 병조,이조좌랑 등 여려 관료를 거처 동부승지,우부승지,좌승지가 되었다.

1597년 호조참판으로 진하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고,

1599년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부제학,대사헌이 되었다.

1601년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죽은 최영경을 신원하고,

           당시 옥사를 다스린 서인을 탄핵해 실각시켰다.

1602년 왕세자 광해군의 우부빈객으로서 '맹자'를 강의하였다. 이어 병조,예조판서, 대사헌을 거쳐

1604년 우의정이 되어 사임했으나 허락되지 않았고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다.

           이 때 선조가 세자(광해군)를 폐하고 계비 인목왕후의 소생인 영창대군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자

           이를 적극 반대하였다.

1606년 좌의정을 12번이나 사임한 끝에 판중추 부사가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유영경 등의 소북파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하자,이를 탄핵하고 광해군을 즉위

           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1613년 영창대군 피살의 부당함을 주장한 대북파의 정온이 극형을 받게 되자,

           강력히 반대해 유배에 그치게 하였다.
1614년 영의정에 올랐으며,1617년 폐모론이 일어나자 옳지 못하다고 간언하다 홍원에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길주로 이배되었으며,풀려나와 강릉으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1620년 광해군의 특지로 덕평 부원군에 봉해지고 영중추 부사가 되었으나 끝내 사직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때 김류,이귀 등이 모의 가담을 요청했으나 신하로서 왕을 폐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또한 반정 후에 인조가 신하를 등용할 때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 해 7월 역모죄로 서울에 압송되어 중도부처(지정한 장소에 거처) 되었다.

           그 후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내응을 우려해 옥에 갇힌 사람 모두가 함께 처형되고,

           기자헌의 일족도 몰살당하였다.

1627년이원익,이귀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원익/190101   (0) 2019.01.01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181230   (0) 2018.12.30
◐ 추존이란?/181222  (0) 2018.12.23
◐ 이괄의 난 /181223   (0) 2018.12.23
◐ 원종 정원군/181223   (0) 2018.12.23

추존이란?          2018.12.22.토요일,맑음

실제 왕위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죽은 뒤에 묘호가 내려진 것을 추존이라 말한다.

왕이 죽으면 신주를 종묘에 올릴 때 새로 등극한 왕과 대신이 의논해 정하는 것을 묘호(廟號)라 한다.

이는 임금들이 죽은 후에 그의 신주(神主)를 모시는 종묘(宗廟)에 봉안된 칭호다.

왕비 역시 종묘에 봉안되면 '왕후'라는 칭호를 쓰게 된다.

 

예를 들면 세종대왕 이름은 이 도 였다.

왕으로 즉위 전에는 '이 도'라는 이름을 부르다 즉위 후에는 전하.주상.마마 등으로 불렀다.

죽은 후에 묘호나 능호가 왕의 이름을 대신했다.

 

조선조에는 총9명의 추존왕이 있었다.

이성계의 4대조상-목조.익조.도조.환조

세조 장남-덕종

영조 아들-진종.장조

순조 장남-익종

인조 부-원종이 있다.

 

조선에는 4명의 추존된 대원군이 있었는데,

선조의 아버지 덕흥군을 대원군으로 추존한 것이 처음이었다.

1623년 인조는 아버지 정원군을 대원군에 추존했다가 1632년 다시 원종으로 추존했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철종이 왕위에 옹립되었고 그의 아버지 전계군을 대원군에 추존했다.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자,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 이명복이 왕위에 올라 고종이 되었고,

           아버지 이하응은 흥선대원군에 봉해졌다.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 조대비가

           수렴청정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흥선대원군이 섭정하였다.

           그는 개항 전후 격변하는 국내외의 상황 속에서 10여 년간 권세를 누렸다

           흥선대원군만 살아 있을 때 추존되었다.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 대원군

1530년 중종과 창빈 안씨와의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9살 때 덕흥군에 봉해졌으며,13살 때 정인지의 증손녀와 가례를 올려 선조와 3명의 아들과 1명의 딸,

첩 사이에서 딸 하나를 더 얻었다.

손자들인 임해군,정원군,순화군(선조의 아들)보다는 덜하지만,할아버지인 덕흥대권군도 막장이다.

그러나 3남 선조가 왕이 돼서 그런지 이러한 행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실록은 아무리 왕이라도 함부로 열람할수도 수정할 수도 없었기에 명종실록에 기록된 덕흥대원군의 몹쓸

행각은 지워지지 못하고 전해 내려 오는 것이다.

덕흥 대원군은 어릴 때부터 주색에 빠져 30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선조의 생부 생모가 빨리 죽어서 명종 시절 문정왕후 외척들에 시달린 신하들은 덕흥대원군의 3남 하성군인 선조가 즉위 후 1569년에 대원군으로 추존된다.

 

   도정궁(都正宮)은 한성부 서부 인달방에 있던 궁으로 덕흥대원군이 살았다.

   선조가 태어난 곳이기도 한 이곳은 덕흥대원군의 후손에 의해 사당을 모신 궁으로

   470년 가까이 이어져 내려왔다.

   도정궁 내 덕흥대원군의 사당인 덕흥궁은 장자 하원군의 후손으로 계승되면서 도정(都正)들이 사는 곳이

   라는 뜻에서 ‘도정궁’으로 불리게 되었다.

   후손은 4대까지는 종실의 녹을 받았으며,이후부터는 대대로 도정 벼슬을 세습했다.

 

철종의 아버지인 전계 대원군(1785-1841)은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인 은언군의 세째 아들이며 철종의 생부다.

큰아버지인 상계군(홍국영의 여동생 원빈 홍씨의 양자)과 아버지 은언군에 연루되어 강화도로 추방되어

빈농으로 생애를 마쳤으며, 한때 노비로 전락하기도 했다.

1820년과 1822년,1826년 일시 석방되고 1830년 석방되어 도성에서 살 수 있었다.

은언군의 세째 아들이라 평생 품계와 작위가 내려지지 않았다.

철종 즉위 후 순조의 정비인 순원왕후 명으로 은언군,상계군 관련 일성록,승정원 일기,조선 왕조 길록 등을 대량으로 세초, 인멸해 버렸기 때문에 그의 초기 삶의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영조 시절 첫번째 후궁인 원빈 홍씨(홍국영의 여동생)의 양자가 되었던 상계군은 홍국영이 상계군을 세자로 삼으려던 일로 상계군이 역적으로 몰리면서 연좌되어 죄인의 신분으로 거주지에 가시 울타리가 쳐지고 계속 감시 당했으며,이 후 강화도에서 빈농으로 생활하였다.

형인 이성득이 고문치사한 일을 계기로 순조는 1822년 은언군의 자녀들을 일시적으로 석방하였고,

이때 성인식인 관례를 올렸다. 그러나 다시 강화도로 끌려갔고 1826 노비 신분으로 격하되어

충청도 온양에 정속되었다가 그해 임시 석방되었다.

1830년 최종 석방되면서 한성부로 와서 생활하다 이유를 알수 없는 병에 걸려 사망하였다.

소실 중 한명인 염씨에게서 얻은 셋째 서자 이원범이 1849년 순조의 양자 자격으로 왕위에 오르면서

군호를 의망하여 전계군의 작호가 내려졌다가, 다시 대원군으로 추봉되어 전계대원군이 되었다.

 

   누동궁(樓洞宮)은 한성부 중부 경행방에 있던 궁으로 철종의 생부 전계대원군이 살았고,

   철종이 태어난 곳이다.철종은 왕위에 오른 뒤 생사고락을 함께한 형 영평군을 이곳에 살게 했다.

   1869년에는 안국동 별궁에 있던 전계 대원군의 사당을 영평군의 집으로 옮겼다.

   철종의 딸 영혜옹주와 박영효의 혼례가 이곳에서 치러지기도 했다.


선 전기는 세조를 제외하고 대군이 왕위를 잇는 종법이 무난히 내려왔다.

그러나 선조에 이르면 명종에게 대를 이을 자손이 없고 왕위를 물려줄 왕자가 없자 14대 선조가 즉위하면서 다시 종법의 문제가 대두된다.

선조는 중종의 손자이며 선조의 아버지 덕흥 대원군은 중종과 창빈 안씨 사이에 낳은 7째 아들이다.

 

선조는 덕흥대원군의 3째 아들이다.덕흥대원군은 대군이 아닌 왕자였기에 왕으로 추존되지 못했다.

철종의 아버지 은언군의 손자 전계대원군,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은 왕자가 아니기에 왕으로 추존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왕이 죽은 뒤 다음 왕이 즉위해서 왕과 신하가 선왕에 대해 조()와 종(宗)으로 지었다.

()이 있는 왕에겐 조()를 붙이고 덕()이 있는 왕에겐 종()을 붙인다.

이것을 조공종덕(祖功宗德)이라 하는데,

말의 유래는 사마천이 지은 '사기' 에 의하면

왕 중에서 공적이 있는 자는 '조(祖)'라고 하고,덕망이 있는 자는 '종(宗)'을 붙여 사용한다 라고 하였다

데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 왕조 때 왕들의 묘호를 보면 이런 규칙에서 비롯된 것 만은 아니다.

임진왜란을 당한 선조나 병자호란을 겪은 인조가 공이 있어서 조를 썼다?

그러나 선조는 선종(宣宗)이었으나 국난을 극복했다는 공을 억지로 갖다 붙여 후에 조를 얻어 쓰게 된다.

기실 왕위 계승자가 아닌 왕들이었기에 종법을 피하기 위한 핑계였다.

선조가 죽자 선종(宣宗)이었으나 그의 아들인 15대 광해군 8년 선조(宣祖)로 바꾼다.

왕비가 낳은 대군으로 대를 잇는다는 종법은 숙종 이후 계속된 왕비 불임으로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 이전에 종법을 철저하게 파괴한 것은 16대 인조였다.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쿠데타로 왕위에 앉은 왕이다.

인조의 아버지는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 낳은 정원군이다.

정원군은 왕비가 낳은 대군이 아닌 왕자였으니 조선 왕실의 종법으로 보아 왕으로 추존되지 못하지만

쿠데타로 잡은 정권이 다 그렇듯이 정통성을 만들기 위해 묘에 불과했던 정원군의 묘를 1627(인조5) 김포로 천장하고 흥경원으로 추숭한다.

그 후 인조10년 이귀의 주청에 따라 원종(元宗)이라는 묘호와 장릉이라는 능호를 올려 아예 추존왕으로

만들었고 장릉은 조선 최초의 추존왕릉이 됐다.

대군이나 세자가 아닌 왕자로 추숭왕이 된 건 원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영조, 정조, 순조의 묘호의 유래를 보면 

21대 영조는 숙빈 최씨의 아들이니 당연히 종을 쓸 수 없었다.

22대 정조 역시 아버지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서인으로 폐했기에 종을 쓸 수 없었고

23대 순조 역시 정조와 수빈 박씨 소생이라 종을 쓸 수 없었다.

이들 왕은 영종(英宗),정종(正宗),순종(純宗)이었으나,

1890(고종27) 영조,1899(광무3) 정조,순조로 각각 바로 잡았다.

그렇다면 왜 철종(哲宗)은 바꾸지 않았는지 의문이 남는다.

선왕을 종법을 내세워 당장 묘호를 바꾸기는 어려운 일이고,고종의 가계와 철종의 가계가 같다는 점에서

후로 미룬 것이다.

이후 황제로 등극했고 국운이 기우는 소용돌이 속에서 종법은 별 의미가 없어졌다고 봐야 한다.

고종의 가계도를 살펴보면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와 숙빈 임씨 사이에 낳은 은신군과 은언군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은언군의 순자가 철종이고,은신군의 후손이 고종이다.

고종이 바로잡은 종법이 영조부터 해당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융희2(1908) 철종은 철종장황제로 추존되지만 종법을 고치는 일을 벌이기엔 이미 국운이 기울었고

이후 바로잡을 기회가 없었고 1910년 조선 왕조는 멸망했다.

 

조종(祖宗)이란 묘호가 붙은 역사의 뒷면을 살펴보면 종법 계승인지 아닌지를 두고 벌인 사건들이 드러난다. 겉으로 조공종덕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종법에 어긋난 왕들의 위신을 살려준 내면에는 여전히 종법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조선 왕실의 고민이 엿보인다.

혼란스러웠던 조종(祖宗)의 실체를 알면 조선의 역사가 더 자세히 들여다 보인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정묘호란과 병자호란/181230   (0) 2018.12.30
◐ 기자헌/181227   (0) 2018.12.27
◐ 이괄의 난 /181223   (0) 2018.12.23
◐ 원종 정원군/181223   (0) 2018.12.23
◐ 인조반정/181221  (0) 2018.12.21

◐ 이괄의 난       2018.12.23.일요일,맑음

반정을 명분으로 왕위에 올랐지만,인조는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반정공신 이괄의 반란으로 즉위 1년도

못돼 한양을 떠나야 했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내부 반란으로 도성이 점령된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

 이괄의 도성 점령은 불과 며칠 만에 끝났지만,이를 기화로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인조는 호된 시련과 굴욕을 겪어야 했다.


반정 직후 인종은 53명의 공신들을 정사공신에 책봉했다. 이때 반정군 대장을 맡았던 김류는 일등공신에

포함됐으나, 이괄은 반정 세력에 늦게 참여했다는 이유로 이등공신으로
밀려났다..앞서 이괄은 1623년 반정군이 대궐을 공격하기 위해 집결했을 때, 뒤늦게 도착한 김류에게 반정군의 대장직을 되돌려 주면서 좋지 않은 감정이 생겼다.

이에 거사에 성공한 이튿날 이귀가 인조 앞에서 이괄을 병조판서에 임명할 것을 제안하자,

이괄은 “김류가 늦게 왔기에 그를 베고자 했으나 이귀가 말려 시행하지 못했다.”라며 김류를 노골적으로

비난했다. 인조가 마련한 모화관 회식 자리에서도 이괄은 김류보다 아래쪽에 자리를 배정받은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이처럼 거사를 일으키고 논공행상을 하는 과정에서 이미 이괄은 여러 차례 불만을 드러냈다.

이듬해 이괄이 반란을 모의했다고 고변한 문회 등은 “이괄이 거사한 날 집에 돌아가 분개하여 눈물까지

흘리며 ‘내가 남에게 속아서 이 일을 일으켰다’라고 말했다.” 하고 밝혔다.

불만이 쌓여 가던 이괄은 1623년 5월 변방 수비를 맡기 위해 평안도 영변으로 떠났다.

당시 압록강 너머 후금이 세력을 펼치자,숭명배금 정책을 내세운 조선으로서는 북방 경비가 어느 때보다

중요한 상황이었다. 인조는 도원수 장만에게 수시로 후금의 동태와 경비 상황을 보고받았고,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당시 공석이던 부원수 자리에 이괄을 임명하면서 평안 병마절도사를 겸하게 했다.

당시 장만은 인조에게 부원수 후보로 이괄과 이서 두 사람을 추천했으며, 결국 이괄이 낙점을 받았다.

장만은 지원부대 5,000명을 거느리고 평양에 주둔하고, 이괄은 평안도 토병(土兵) 및 전라도에서
차출된 부방군(赴防軍) 1만 2,000명, 항왜(降倭, 왜란 때 항복한 일본 군인) 130여 명을 휘하에 두고 영변에 자리 잡았다. 영변의
위치로나 군사의 규모 및 수준으로나 이괄이 사실상 변방 수비의 실질적 책임자였다. 이괄은 부임 이후 군사를 훈련시키고, 성채를 보완하는 등
경비를 강화했다>그러던 중 조정에서는 이괄 등의 반란 모의에 대한 고변으로 갑론을박이 벌어졌다. 인조 2년인 1624년
1월, 문회와 이우(李佑), 정방열(鄭邦說) 등은 “이괄과 기자헌, 한명련(韓明璉), 현즙(玄楫), 이괄의 아들 이전(李栴), 한명련의 아들
한윤(韓潤) 등이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라고 고변했다. 이에 이귀와 최명길(崔鳴吉) 등은 이괄을 삭탈관직하고 하옥시켜 국문을 해야 한다고
인조에게 여러 차례 청했다. 하지만 인조는 “이괄은 충의스런 신하인데 두 마음을 품었을 리 없다. 부원수의 직책은 이괄이 아니면 맡을 수
없다.” 하며 이를 거부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기자헌을 비롯해 역모 혐의가 있는 40여
명을 하옥시켜 국문을 진행하고, 이괄에 대해서는 일단 불문에 부치되, 그 아들 이전을 잡아들여 조사를 하기로 했다. 그런데 당시 이전은 아버지와
함께 영변에 머물고 있었다. 이에 인조는 금부도사 고덕률(高德律), 심대림(沈大臨), 선전관 김지수(金芝秀), 중사 김천림(金天霖) 등을
영변으로 보냈다.이 같은 사실을 전해들은 이괄은 아들이 잡혀가면 역모로 몰려 죽을 수밖에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영변을
찾아온 금부도사 일행을 죽였다. 그는 “잡혀 죽으나 반역하다 죽으나 죽기는 일반이니 남자가 어찌 머리를 숙이고 죽음을 받겠는가.”라며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인조 즉위 10개월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조정에서는 이괄의 반란 소식을 듣고, 기자헌과 현즙 등 37명을 역모 혐의로 모두 처형했다.
이괄은 주변의 수령들에게 “도성에 변고가 생겨 구원하러 간다.” 하고 속인 뒤 군사들을 이끌고 영변을
출발했다. 역모 혐의를 받았던 구성 부사 한명련도 자신을 잡으러 온 금부도사를 죽인 뒤 군사를 이끌고 반란군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개천을 거쳐
강동, 황주, 수안, 평산, 개성으로 진격해 한양에 이르렀다.반란군이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조정은 장만과 부체찰사 이시발(李時發) 등으로 하여금 이들을
중간에서 막도록 했다. 하지만 반란군이 경비가 허술한 샛길만 골라 신출귀몰하게 이동하는 바람에 정부군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연전연패하였다.
장만이 “적이 교활하게 샛길로 출몰하여 위치를 종잡을 수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반란군과 정부군이 처음 접전을 벌인 곳은 황주 부근의 상원이었다. 이곳에서 정부군은 반란군이 거짓으로
투항하는 척하자 방심하다가 크게 패하였다. 선봉장 박영서(朴永緖) 등은 사로잡혀 죽음을 맞았다. 항왜를 앞세운 1만여 명의 반란군은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 예성강 상류인 평산 마탄에서 잠복 중이던 정부군을 급습해 무찌르고 방어사 이중로(李重老), 이성부(李聖符) 등을 죽였다. 정부군
중에는 강에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고, 나머지는 모두 반란군에게 항복했다. 정충신(鄭忠信)이 이끄는 군사들이 정부군에 합세하려고 뒤늦게
도착했으나, 반란군이 여러 장수의 머리를 베어 실어 보내자 모두 기세가 꺾이고 말았다. 반란군은 이어 개성을 지나 임진을 지키던 정부군까지 기습
공격으로 격파하고 벽제로 나아갔다.다시 조정에서는 정부군이 마탄에서 대패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한밤에 대신들이 모여 인조에게 도성을 떠날
것을 청하였다. 결국 인조는 며칠 후 비빈, 대신들과 함께 공주산성(公州山城)으로 피란을 떠났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그다음 해에 내부
반란으로 왕이 도성을 버리고 떠나자, 백성들은 충격을 받았고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는 곧 조정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 이미 인조가 즉위한
직후부터 공신 집단의 국정 농단이 심해 민간에서는 ‘광해군 때의 북인과 다를 게 없다’라는 내용의 풍자적인 노래가 유행하던 터였다. 한 예로
반란군에 맞서 도성을 방비할 군사를 급히 모으는데 훈련도감에 소속된 군사 세 명 가운데 한 명은 달아나고 없을 정도였다.

마침내 이괄이 이끄는 반란군은 2월 10일 한양으로 입성했다. 영변에서 군사를 일으킨 지 19일
만이었다. 이괄은 우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도성 곳곳에 방을 붙여 생업에 종사하게 했고, 일반 백성들도 이괄의 무리를 환영했다. 이괄은 이어
선조의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瑅)를 왕으로 옹립했다.</P>
<P class=desc_section>이즈음 이괄의 뒤를 쫓아온 장만과 정충신, 남이흥(南以興)이 각지의 관군 연합군을 이끌고 안현(鞍峴,
길마재)에 도착해 진을 쳤다. 그러자 이괄은 군대를 두 곳으로 나눠 이들을 포위 공격했으나, 관군이 지형상 유리한 지역을 차지하는 바람에 이괄의
군대는 크게 패하였다. 이괄은 야음을 틈타 부상당한 한명련을 비롯해 패잔병 수백 명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 광희문)을 통해 도성에서
빠져나갔다. 하지만 관군의 추격으로 반란군은 뿔뿔이 흩어졌고, 이괄은 40여 명을 이끌고 광주를 거쳐 이천 묵방리에 이르렀다. 이날 밤 반란군의
이수백(李守白), 기익헌(奇益獻) 등은 이괄과 아들 이전, 한명련 등의 목을 베어 관군에게 투항했다.</P>
<P class=desc_section mouseX="340" mouseY="3158">이렇게 해서 이괄의 반란은 평정됐다. 도성으로 돌아온
인조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운 장만과 정충신, 남이흥 등 32명을 진무공신(振武功臣)에 책봉했다. 하지만 역모 혐의를 받고 있던 한명련의
아들 한윤이 후금으로 달아나 인조 정권의 부당성과 친명 외교를 거론하며 조선 침략을 종용하였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3년 뒤 조선은 또다시 전란에
휩싸인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기자헌/181227   (0) 2018.12.27
◐ 추존이란?/181222  (0) 2018.12.23
◐ 원종 정원군/181223   (0) 2018.12.23
◐ 인조반정/181221  (0) 2018.12.21
◐ 제16대 인조 이야기/181221   (0) 2018.12.2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