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오사화 (戊午士禍)-연산군4년(1498)       2014.11.05.화요일.맑음

연산군 4년(1498년)에 사초(史草) 문제로 김종직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가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로 말미암아 화를 입은 사건으로,성종 때부터 중앙 관계에 진출하기 시작한 사림파가 날로 세력이 커지자, 훈구파와의 반목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때마침 '성종실록' 편찬 사업이 시작되자, 훈구파가 사초에 들어 있는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祭文)'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사실을 비방한 글이라 하여 문제삼고 나서서 연산군을 충동질했다.이에 연산군이 김일손 등을 심문하고, 김종직의 관을 파헤쳐 시체의 목을 베게 하였으며(부관참시), 사림파에 속한 많은 신하들을 처형하거나 귀양보냈다.

 조의제문; 조선 초기의 학자 김종직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글.  
   김종직은 항우에게 죽은 초희왕,즉 의제를 조상 하는 글을 지었는데,이것은 세조에게 죽음을 당한 단종을
 

   의제에 비유한 것으로, 세조의 찬탈을 은근히 비난한 것이었다.


세조의 비인 정희 왕후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전라 감사로 있던 이극돈은 조문을 하러 올라가지도 않고 기생과 놀았어요.김일손은 그 사실을 신하의 바르지 않은 행동이라며 역사에 기록하려 했다.

그러자 이극돈은 김일손을 찾아가 그 내용을 빼 달라고 부탁했지요. 하지만 김일손은 이극돈의 부탁을
거절했다.이극돈은 자신의 허물을 들추는 이야기가 더 있는지 살폈다.

그러다 김일손이 ‘조의제문’을 칭찬하는 내용이 있는 것을 보았다.

조의제문은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글로,

단종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를 은근히 비꼬는 뜻>이 담겨 있었다.

이극돈은 유자광에게 이 일을 알렸다.

“이번 기회에 젊은 학자들을 조정에서 몰아 냅시다.”

유자광은 당장 조정의 원로 대신들인 윤필상, 노사신, 한치형 등을 찾아갔다.

훈구파를 이끌고 있던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 날 밤, 대궐에 들어갔어요.

“전하,김일손 등 사림의 젊은 학자들이 세조 대왕을 깎아 내리고 있사옵니다.”

“뭐라고? 당장 그놈들을 잡아들여라!”
연산군은 당장 김일손을 잡아들여 고문을 했다.


“네가 반역을 꾀한 신하들을 엄벌로 다스린 세조 대왕을 비난한 김종직의 글을 실록에
남기려 했느냐?”
“그렇사옵니다.”“어째서 그리하였느냐?”
사실을 그대로 쓰는 것이 저의 일이기 때문이옵니다.”
김일손이 당당하게 말했어요. 연산군은 그런 김일손에게 더욱 화가 났어요.

훈구파와 마찬가지로 연산군도 사사건건 간섭하는 사림파를 미워하고 있었던 거예요.

연산군은 이미 죽은 김종직을 무덤에서 꺼내 목을 베게 하고, 김일손을 비롯한 사림파 수십 명을 죽이거나 귀양을 보냈어요. 이 일을 무오사화라고 한다.

 

갑자사화 (甲子士禍)-연산군10년(1504)

연산군 10년(1504년)에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를 다시 왕비 자리에 복위하는 문제로 일어난 사화.

(윤비 폐출 사사 사건) 
성종비 윤씨는 질투가 심한데다 왕비답지 못한 행동을 일삼다가 1479년에 궁에서 쫓겨나서 이듬해에 사약을 받았다. 그 뒤 궁중과 부중(府中)이 토지 문제로 대립할 때,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어머니 윤씨의 죽음에 대한 경위를 들려 주었다.이에 연산군은 자기 어머니를 해친 사람들에게 포악한 보복을 가하게 되었고,

또 윤씨를 다시 왕비 자리에 복위하는 일에 반대하던 김굉필, 정여창 등을 처형하였다.이러한 참화가 갑자년에 일어났다 하여 갑자사화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