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이  율곡      2015.08.17.수요일,맑음

이이;율곡(栗谷) 조선 중기의 학자·문인

아명; 현룡(見龍)

1536(중종 31)∼졸1584(선조 17).

출생지;강원도 강릉 .

부; 증좌찬성 이원수(李元秀)

모;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

 

이이는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1536년 강릉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높아 13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고 16세 때 어머니가 죽자 3년간 시묘한 후  19세 때 성혼을 만나 학문을 논했으며 23세 때 별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했다.

26세 때 아버지 이원수가 죽자 3년간 시묘한 후 29세 때 처음으로 관직에 나갔고 47세 때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인심도심설>을 지었으며 이듬해 십만 양병설을 주청하였다.

그가 정계에 진출한 때는 사림이 동서로 분당되어 정쟁을 할 때였다. 동서로 분당된 사림의 동인 측이 이황과 조식의 학문을 추종하는 무리였다면 서인 측은 이이와 그의 친우 성혼의 학문을 따르는 무리였다. 그럼에도 이이는 정쟁을 중재하여 그가 살아있을 동안은  일시적이나마 정쟁은 휴전상태에 머물기도 했다.

이이는 명분과 이익에 대하여 논하기를 이들의 관계에 우위가 없으므로 중용을 취하면 명분과 이익을 함께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가치관은 국가를 평안하게 하고 민중에게 이로우면 모두 다 행할 수 있다고 하는 인본중심의 중용 정신이었다.

이이의 인본 중심 사상은 조선 중기 이후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실학의 핵심적인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어머니 사임당이 그를 낳던 날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 서리는 꿈을 꾸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 산실은 몽룡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 났다.

 1548년(명종 3)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1551년 16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하였다. 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1555년 20세 때 하산해 다시 유학에 전심하였다.

1557년 성주 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였다.

1558년 봄 예안의 도산으로 이황을 방문했고, 그 해 겨울의 별시(문과 초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였다.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1561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564년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15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해에 19세 때부터 교분을 맺은 성혼과 ‘지선여중(至善與中)’ 및 ‘안자격치성정지설(顔子格致誠正之說)’ 등 주자학의 근본문제들을 논하였다.

1569년 임금에게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올렸다.

1572년 파주 율곡리에서 성혼과 이기(理氣)·사단칠정(四端七情)·인심도심(人心道心) 등을 논하였다.

1575년 주자학의 핵심을 간추린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편찬했다.

1577년 아동교육서인 『격몽요결(擊蒙要訣)』,

1580년 기자의 행적을 정리한 『기자실기(箕子實記)』를 편찬했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어명으로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지어 올렸다.

이 해에 김시습전을 쓰고, 

1583년 「시무육조」를 올려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1584년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영면하여,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

1545년 을사사화가 발생해 수많은 사류가 죽고 유배되었다. 사림은 출사를 포기하고 물러서서 학문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1565년(명종 20) 문정대비의 죽음과 20년간 정사를 전횡하던 권신 윤원형의 실각으로 나라 안의 정세가 바뀌었다. 을사사화 이후 죄를 입은 사람들이 풀려나고, 사림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이이는 30세로서 출사 1년째 되는 해였다.

1567년에는 이황이 상경하였다.

그 해 6월,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면서 8월에는 을사사화 이후 피죄되었던 노수신·유희춘 등이 서용되었다.

선조 즉위 다음해인 1568년에는 조광조에게 영의정을 추서하고, 이황이 일시에 대제학에 취임하고, 남곤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이황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올렸고,

1569년(선조 2)에는 이이가 「동호문답」을 지어 올렸다.

1570년에는 유관·유인숙의 신원이 이루어지는 등 정국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면서 사림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오랜 구습이나 폐풍은 일시에 시정될 수 없었고 유림의 활동은 떨쳐 일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1575년부터는 동서의 분당으로 사림이 분열되고 정쟁이 심각해졌다. 연산군 이래의 폐법은 고쳐지지 않은 채 국가의 기강은 무너지고 민생의 곤고는 극도에 달하였으며, 군사적으로도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1565년부터 1592년(선조 26)까지의 약 30년간은 국정을 쇄신해 민생과 국력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이는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를 ‘중쇠기(中衰期)’로 판단해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 보았다. 이이는 「만언봉사」에서 “시의(時宜)라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變通)하여 법을 만들어 백성을 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조선의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 태조가 창업했고, 세종이 수성(守成)해 『경제육전(經濟六典)』을 비로소 제정하였다. 세조가 그 일을 계승해 『경국대전』을 제정했으니, 이것은 모두 ‘시의(時宜)에 따라 제도를 개혁한(因時而制宜)’ 것이요, 조종(祖宗)의 법도를 변란(變亂)함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대의 변천에 따른 법의 개정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이에게 성리학은 단순한 사변적 관상철학(觀想哲學)이 아니었다. 그는 성리학의 이론을 전개함에 있어 시세(時勢)를 알아서 옳게 처리해야 한다는 ‘실공(實功)’과 ‘실효(實效)’를 항상 강조하였다. 그는 「만언봉사」에서,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에는 실지의 일을 힘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정치를 하면서 시의를 알지 못하고 일에 당해 실공을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다스림의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이는 항상 위에서부터 바르게 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실효를 거두며, 시의에 맞도록 폐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사화로 입은 선비들의 원을 풀어주고, 위훈(僞勳)을 삭탈함으로써 정의를 밝히며, 붕당의 폐를 씻어서 화합할 것 등 구체적 사항을 논의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고 국맥(國脈)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이는 성현의 도는 ‘시의와 실공’을 떠나서 있지 않으므로 현실을 파악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요(堯)·순(舜)·공(孔)·맹(孟)이 있더라도 시폐(時弊)를 고침이 없이는 도리가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이는 진리란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여기서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이이 성리설의 특징을 보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이와 성혼은 평상시에 경학이나 도학과 관련해 문답하는 서한을 교환하였다. 이황이 죽은 지 2년 뒤 이이가 37세가 되던 1572년에 성리설에 대한 본격적인 논란을 벌였다. 그것은 이황과 기대승의 논변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한 것이 아니라, 단 1년 사이에 9회에 걸쳐 주고받은 것이다. 대체로 성혼이 이이에게 질의하고 이이가 회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성혼의 질의내용은 비교적 단순한 것으로, 주자학의 핵심 논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였다. 성혼은 일찍이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오간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해 기대승의 논의를 존중하다가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의 도덕적 고민을 이해하고 그 취지에 수긍하게 되었다. 성혼은 이 문제를 과연 어떻게 정돈해야 하느냐고 이이에게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호발설(互發說)에 대한 성혼의 재론을 계기로 이이는 이황은 물론이요 서경덕(徐敬德)과 나흠순(羅欽順)에 대한 논평뿐 아니라, 경전의 본의와 송대 제유(諸儒)의 성리설을 집약적으로 논술해 나갔다. 이 논쟁은 이이에게 성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고 심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후기의 저작인 『성학집요』 속의 성리설이나 만년작인 「인심도심설」의 내용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다.

이이는 선배인 이황의 이원적 이기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황이 이기를 그처럼 분열적 대립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 잇단 사화를 겪으며 당시의 사회정치적 혼란과 부조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데 연유한다. 그는 개인과 집단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공의(公義)와 사리(私利)의 분별이 명확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가 천리와 인욕, 인심과 도심, 사단과 칠정, 그리고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대립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자각의 반영이다.

이황에게 이발(理發)과 기발(氣發), 사단과 칠정, 그리고 도심과 인심은 각기 순수한 정신적 가치와 신체적·물질적 욕구의 두 방향을 의미하였다. 그는 이기가 왕신관계(王臣關係)에 있으며, 인심은 항상 도심의 명령을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관계가 전도되면 개인적으로는 도덕성의 방기를,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윤리의 파멸과 정치의 타락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일체의 작위의 근원은 마음의 위미지간(危微之間)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혼탁한 정치현실을 떠나 학문을 닦음으로써 ‘입언수후(立言垂後)’하여 도(道)를 전해주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이에 비해 이이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1565년 이후로 사림이 다시 복귀하게 되면서 사회적 상황을 개선하고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며 국맥을 바로잡을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이이는 현실의 개선 그 자체에 진리성을 찾았다. 그가 이기를 불상잡(不相雜)의 대립이 아니라 불상리(不相離)의 묘(妙)에서 파악하는 것도 이 같은 낙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이의 사칠론이나 인심도심설에 대한 해석도 이황의 이원적인 논의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칠정을 형기(形氣)에 속한 것으로만 보지 않고 본연지성 또한 기질지성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 구별하는 것이지, 사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이에게 기란 단순히 혈기지기(血氣之氣)로서 타락의 가능성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는 물질적인 것, 감성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 심령이나 이성까지도 포괄한다. 여기서 기는 본연지성을 엄폐(掩蔽)하는 것일 뿐 아니라, 본연지성을 드러나게도 하고 나아가 회복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이는 “인심도심이 다 기의 발이요, 기에 있어 본연지리(本然之理)를 순(順)한다면 기가 본시 본연지기(本然之氣)이다.”라고 하며, “기의 청명여부(聽命與否)는 다 기의 소위(所爲)이니, 호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인심도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심은 ‘구체(口體)’를 위한 것으로서 그리고 도심은 ‘도의(道義)’를 위한 것으로서 서로 구별된다. 그러나 그는 이황의 주장처럼 하나는 기발, 하나는 이발로 서로 다른 본질과 근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하나의 심이 “단지 발하는 곳에 있어서 이단(二端)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인심은 성현이라도 면할 수 없으며, “먹을 때 먹고 입을 때 입는 것”은 바로 천리인 것이다. 이이는 인심이라 해도 그것이 알맞게 조절된 상태에서는 “인심 또한 도심이 된다.”고 하였다.

흔히 서경덕은 물론이요 이이까지도 ‘주기론(主氣論)’이라 하여 학문적으로 연관시켜 보는 경향이 있다. 서경덕과 이이는 다 같이 기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기의 불멸성, 능동성을 강조해 기의 면을 전폭적으로 긍정한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이는 서경덕이 이기의 불리(不離)에 대한 이해는 깊고 투철하지만, 그 위에 뚜렷이 극본궁원(極本窮源)하는 이(理)의 면이 있음을 몰랐다고 비판했다. 서경덕이나 송대의 장재(張載)가 기에 치우치고 이기를 혼동해 성현의 뜻에 묘계(妙契)치 못하였다고 지적했다.

이이는 서경덕의 유기론적(唯氣論的) 입장에 대해 ‘이통기국(理通氣局)’을 모르는 소치라 하여 ‘한 모퉁이를 본 사람(見一隅者)’라 폄하했다. 이이 또한 이기지묘(理氣之妙)를 말하지만 그는 서경덕처럼 구극적(究極的) 존재를 태허지기(太虛之氣)로 보지 않고, 태극지리(太極之理)로 이해한다.

이이는 이황처럼 이와 기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이가 기에 우월하다는 이우위설(理優位說)을 주장했다. 이와 기는 결코 혼동할 수 없는 것이며, 이는 기의 추뉴(樞紐)요 근저(根柢)요 주재(主宰)라는 것이다. 이의 본체는 통일적 원리이지만 그것은 사사물물에서 유행하는 것이요 만유(萬有)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황이 이와 기가 각각 실질적 동력으로 발용한다는 호발설을 주창한 데 대해, 이이는 이기는 이합과 선후가 없다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했다. 이이의 견해는 처음부터 이기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이황과 달리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현상 그 자체의 소이연으로서 이를 말하는 까닭에 이발(理發)이 따로 있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이는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통기국설’로, 그리고 이황의 이기이원적 경향에 대해서는 ‘기발이승일도설’로 대응했다. 서경덕은 실재하는 기의 생성변화를 떠나서 별도로 묘(妙)를 말하는 것은 진리를 모르는 자라 하였다. 그러나 이황은 이와 달리 이(理)야말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으로서 이로 말미암아 모든 학문 도술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이황은 만유를 가능하게 하는 초월적 존재로서 이를 강조한 반면, 서경덕은 이를 기 자체와 작용상의 자율성 또는 내재율로 보아 기의 실재성과 사실성을 강조하였다. 서경덕은 유기론자로서 기를 중시하고, 이황은 이우위설을 논해 이의 구극성(究極性)을 강조하였다. 서경덕과 이황은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면서도 이와 같이 매우 대조적인 견해를 견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이는 이의 세계와 기의 영역을 완전히 긍정하여 포괄하면서, 동시에 양면을 아울러 지양시켰다. 이이는 기의 사실성과 이의 초월성을 체인(體認: 충분히 납득함)해 양자를 불리의 관계에서 파악하면서 ‘이기지묘’를 강조했다. 이이는 이기의 묘처(妙處)야말로 알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명하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이이는 태극과 음양, 이와 기의 관계는 일이이(一而二)요 이이일(二而一)이라는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그의 이론을 대략 다음과 같이 집약하였다.

“전훈(前訓)을 고찰하면 이기는 일(一)이면서 이(二)요, 이(二)이면서 일(一)이다. 이기가 혼연무간해 원래 떨어지지 않으므로 정자는 ‘기즉도(器卽道)요 도즉기(道卽器)’라 했고, 떨어지지 않을지라도 혼연한 가운데 섞이지 않아서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주자는 ‘이는 스스로 이요, 기는 스스로 기’라고 한 것이다. 이 두 설을 종합해 깊이 생각하면 이기지묘를 거의 알 수 있으리라. 그 대강을 말하면 이는 무형하고 기는 유형하다. 그러므로 이는 통(通)하고 기는 국(局)한다. 이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므로, 기는 발(發)하고 이는 승(乘)한다. 무형무위하면서 유형유위한 것의 주(主)인 것은 이이며, 유형유위하면서 무형무위한 것의 기(器)인 것은 기이다(聖學輯要).”

이이의 이통기국과 기발이승일도설은 보편적 원리와 특수한 사실을 상호관련 하에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사사물물을 관통하고 있으며, 본연지리는 스스로의 보편성을 가지는 것이지만, 변화하는 사실과 관련한 유행지리(流行之理)를 떠나서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보편적 원리가 사사물물의 개별적 사실을 관통하고 있으며, 또한 구체적인 변화의 상을 떠나서는 추구할 수 없다는 논리로서, 성리와 실사가 혼융무간한 관계임을 통찰한 결과이다.

또한, 이이는 이른바 의(義)와 이(利)를 구별해 이원화하는 사고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리(義理)와 실리(實利)를 불가리(不可離)의 관계에서 보고 있다. 그는 「시무칠조책(時務七條策)」에서 “도(道)의 병립할 수 없는 것은 시(是)와 비(非)이며, 사(事)의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이(利)와 해(害)이다. 한갓 이해가 급하다고 하여 시비의 소재를 불고(不顧)한다면 제사지의(制事之宜)에서 어긋난다. 또한 시비를 생각해 이해의 소재를 살피지 않는다면 응변지권(應變之權)에서 어긋난다. …… 권(權)에는 정규(定規)가 없으니 중(中)을 얻음이 귀하고, 의(義)에는 상제(常制)가 없나니 의(宜)에 합함이 중하다. 중을 얻고 의에 합하면, 즉 시(是)와 이(利)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진실로 국가를 평안하게 하고 민중에게 이로우면 다 행할 수 있는 일이요,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고 민중을 보호하지 못하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옳고 그름을 가르는 규범의 문제와 이해관계를 따지는 현실 문제가 ‘득중(得中)’, ‘합의(合宜)’함으로써, 보국과 안민이라는 차원에서 시(是)와 이(利)의 조화라는 하나의 사실로 지양됨을 볼 수 있다. 이이는 시대에 따라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 각기 다르다고 보았다. 그는 시대를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그리고 ‘경장(更張)’의 과정으로 나누어 논했으며, 당시를 경장기라고 보았다.

이이는 「동호문답」에서 가장 큰 폐법으로 다섯 가지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것은 모두 민생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① 일가절린(一家切隣)의 폐, ② 진상번중(進上煩重)의 폐, ③ 공물방납(貢物防納)의 폐, ④ 역사불균(役事不均)의 폐, ⑤ 이서주구(吏胥誅求)의 폐를 꼽았다. 이러한 그의 지적은 당시의 시대상과 민중의 질고(疾苦)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다.

또한, 그는 국세조사와 같은 전국적인 규모의 조사를 실시해 실정에 알맞게 폐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밖에도 이이는 「만언봉사」·『성학집요』 및 수많은 상소문을 통해 정치·경제·문교·국방 등에 가장 필요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더 나아가 이이는 국정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개인이나 일부 지도층으로부터 하향식으로 수행될 것이 아니라, 언로를 개방해 국민 모두가 말할 수 있게 하고, 위정자는 아래로부터의 중지(衆智)를 모아야 한다고 보았다. 조광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이에게 언로의 개색(開塞)은 국가 흥망에 관계된 중대한 일로서 강조되었다. 공론(公論)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국민의 정당한 일반 의사가 곧 국시(國是)가 된다고 지적하면서, 언로의 개방성과 여론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또한, 이이는 경제사(經濟司)의 창설을 제의하면서 단지 기성 관료가 아니라, 시무를 밝게 알고 국사를 염려하는 사류로서 윤리성과 합리성을 겸비한 최고의 지성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듯 의리와 실리, 이념과 현실의 통합적 구상은 후기에 한국의 의리학과 실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도 조선 중기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전개에서 이이의 성리설이 끼친 영향을 깊이 관찰해야 한다. 그의 성리사상은 오늘날에도 유심과 유물, 주체와 상황, 그리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부터 양자의 조화와 발전을 도모하는 데에 새로운 방향을 던져주고 있다.

 


□ 퇴계 이황(李滉)과 조식     2015.08.17.월요일.맑음

이황;퇴계(退溪)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생;1501(연산군 7)∼졸1570(선조 3).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이식의 7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

났다.생후 7개월에 아버지의 상을 잃고,생모 박씨의 훈도 밑에서 총명한 자질을 키워 갔다.

12세에 작은 아버지 이우로부터 '논어'를 배웠고, 14세경부터 혼자 독서하기를 좋아해, 특히 도잠의 시를

사랑하고 그 사람됨을 흠모하였다. 18세에 지은 '야당'이라는 시는 그의 가장 대표적인 글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세를 전후하여 '주역' 공부에 몰두한 탓에 건강을 나빠져 다병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한다.

 

1527년(중종 22) 향시(鄕試)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1533년 재차 성균관에 들어가 김인후와 교유하고, 『심경부주(心經附註)』를 입수하여 크게 심취하였다. 

   이 해에 귀향 도중 김안국을 만나 성인군자에 관한 견문을 넓혔다.

1534년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537년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했고,

1539년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임금으로부터 사가독서의 은택을 받았다.

중종 말년에 조정이 어지러워지자 먼저 낙향하는 친우 김인후를 한양에서 떠나보냈다. 이 무렵부터 관계를 떠나 산림에 은퇴할 결의를 굳힌 듯하다.

1543년 10월 성균관 사성으로 승진하자 성묘를 핑계삼아 사가를 청해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 병약함을 구실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1546년(명종 1) 고향인 낙동강 상류 토계의 동암에 양진암을 얽어서 산운야학을 벗 삼아 독서에 전념하는 구도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에 토계를 퇴계라 개칭하고, 자신의 아호로 삼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임관의 명을 받아 영영 퇴거해 버릴 형편이 아님을 알고, 부패하고 문란한 중앙의 관계에서

   떠나고 싶어서 외직을 지망하여,

1548년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그러나 곧 형이 충청감사가 되어 옴을 피해, 봉임 전에 청해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풍기군수 재임중 주자가 백록동서원을 부흥한 선례를 좇아서, 고려 말기 주자학의

    선구자 안향이 공부하던 땅에 전임 군수 주세붕이 창설한 백운동 서원에 편액·서적·학전을 하사할 것을 감사를 통해 조정에 청원하여 실현을 보게 되었다.

이것이 조선조 사액서원의 시초가 된 소수서원이다.1년 후 퇴임하고, 어지러운 정계를 피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을 지어 다시금 구도 생활에 침잠하다가,

1552년 성균관대사성의 명을 받아 취임하였다.

1556년 홍문관부제학,

1558년 공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여러 차례 고사하였다.

1543년 이후부터 이때까지 관직을 사퇴하였거나 임관에 응하지 않은 일이 20여 회에 이르렀다.

1560년 도산서당을 짓고 아호를 ‘도옹’이라 정했다. 이로부터 7년간 서당에 기거하면서 독서·수양·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훈도하였다.

명종은 예를 두터이 해 자주 그에게 출사를 종용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에 명종은 근신들과 함께 ‘초현부지탄’이라는 제목의 시를 짓고, 몰래 화공을 도산에 보내 그 풍경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 그것에다 송인으로 하여금 도산기 및 도산잡영을 써넣게 해 병풍을 만들어서, 그것을 통해 조석으로 이황을 흠모했다 한다. 그 뒤 친정하게 되자, 이황을 자헌대부·공조판서·대제학이라는 현직에 임명하며 자주 초빙했으나, 그는 그때마다 고사하고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1567년 명나라 신제의 사절이 오게 되자, 조정에서 이황의 내경을 간절히 바라 어쩔 수 없이 한양으로

    갔다. 명종이 돌연 죽고 선조가 즉위해 그를 부왕의 행장수찬청당상경(行狀修撰廳堂上卿) 및 예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하지만 신병 때문에 부득이 귀향하고 말았다.선조는 그를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우찬성에 임명하며 간절히 초빙하였다. 그는 사퇴했지만 여러 차례의 돈독한 소명을 물리치기 어려워 마침내 68세의 노령에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선조에게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이 소를 천고의 격언,

1569년(선조 2)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번번이 환고향을 간청해 마침내 허락을 받았다. 환향

   후 학구(學究)에 전심하였으나,

1570년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인지 우환이 악화되었다.

그 달 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 해 단정히 앉은 자세로 역책(易簀: 학덕이 높은 사람의 죽음)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다.

1574년 죽은지 4년 만에 고향 사람들이 도산서당 뒤에 서원을 짓기 시작해 이듬해 낙성하여 도산서원의

사액을 받았다. 그 이듬해 2월에 위패를 모셨고, 11월에는 문순(文純)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09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그 뒤 그를 주사(主祀)하거나 종사하는 서원은 전국 40여 개 처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의 위패가 있는 도산서원은 제5공화국 때 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국비 보조로 크게 보수·증축되어우리나라 유림의 정신적 고향으로서 성역화 되었다.

 

조식

생졸; 1501-1572

연산군 시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두 차례의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 정치의 폐해를 직접 목격하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자처하며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매진했다.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중요시 여겨 ‘경’과 ‘의’를 강조했고, 경상우도 학문의 특징을 이루었다.

1568년 상소문에서 당대 서리들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했다.

 조식이 살았던 시기는 왕실의 외가에 의한 훈척 정치의 폐해가 가장 극심한 때였다. 조식은 두 차례의 사화를 지켜보면서 훈척 정치의 폐해를 직접 체험했다.

기묘사화 때에는 숙부가 죽고 아버지는 좌천되었으며, 을사사화 때는 많은 친구들이 희생당했다.

이런 정치적 상황에서 그는 한두 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곧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로 자처하면서 오로지 학문과 제자 양성에만 힘썼다.

이황과 더불어 영남 사림의 지도자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흔히 두 사람이 비교되곤 한다.

이황은 37년간이나 벼슬살이를 했고 최고의 품계까지 올라갔으나,

조식은 벼슬을 단념했고 13차례나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거절했다. 이황은 기묘사화의 교훈을 거울삼아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를 거스르지 않으면서 사림의 세력을 키우고 국왕을 성학으로 인도하기 위해 출사할 만하다고 여겼다.

반면 그는 문정왕후나 윤원형이 집권하고 있는 세상에 나가 봐야 뜻을 펼 수 없다고 여겨 끝까지 나가지

않았다.

조식은 1501년 경상도 삼가현 토동의 외가에서 승문원 판교 조언형(曺彦亨)과 인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식의 집안은 아버지 대에 와서야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판교에 올랐고, 작은아버지 조언경(曹彦卿) 역시 문과에 급제해 이조 좌랑에 올랐으나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했다.

아버지도 좌천되어 벼슬길이 순탄치 않았다.

그는 특별한 스승을 두지 않고 일곱 살 때부터 아버지에게 시(詩)와 서(書)를 배웠는데 나름대로 독특한
방법을 터득하여 체계적으로 학업에 매진했다. 그는 고문(古文)을 즐겨 읽는 한편, 사서와 삼경 등 유학의 기초 경전의 의미를 깊이 탐구했다.

그가 열아홉 살 되던 해 그의 작은아버지도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는 아직 조정에 출사할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어머니의 강력한 권유로 과거 시험을 보았고 진사시와 문과의 초시에는 합격했으나 다음 해 있던 생원·진사시 회시에는 응시하지 않았고 문과 회시에는 떨어졌다.

스물두 살에 남평 조씨 가문의 사위가 된 그는 처가를 따라 김해에서 살았다. 그가 평생 일정한 생업이나
녹봉 수입 없이 처사의 신분으로 공부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산가였던 처가의 덕이 컸다.

스물다섯 살 되던 해에 《성리대전》을 읽은 후 그는 크게 깨달음을 얻고 성리학 공부에 전념했다.

그가 특히 마음에 둔 글귀는 “뜻은 이윤(伊尹)의 뜻을 가지고, 학문은 안자(顔子)의 학문을 배운다.

나가면 하는 것이 있어야 하고 물러나면 지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라는 대목이었다.

나가서도 하는 일이 없고 물러나서도 지키는 바가 없으면 뜻을 둔 바나 배우는 바가 장차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자식이 입신하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성화에 조식은 서른세 살이던 1533년(중종 28) 문과 향시에
1등으로 합격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최종 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과거를 통한 출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후 어머니를 설득해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학문에만 전념했다. 그 후 이언적과 이림의 추천으로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제자들과 산 속에서 공부에만
몰두했다. 게다가 을사사화가 일어나 친했던 이림과 곽순, 송인수 등이 차례로 화를 입자 벼슬의 뜻을 완전히 접었다.무오사화, 기묘사화 이후 그의 가르침을 받으려는 제자들이 몰려들자 우선 《소학》을 가르쳐 기본을 세우게 하고 《대학》으로 시야를 넓히도록 했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여러 번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그는 나가지 않았다. 1555년(명종 10)에 쓴 사직소를 보면 그의 생각을 잘 알 수 있다.

“임금의 정치가 이미 그릇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으며, 하늘의 뜻이 이미 떠났고, 인심이 이미 이산되었다. 문정대비는 생각이 깊지만 궁중의 한낱 과부에 지나지 않고 명종은 유충해서 다만
선왕의 일개 고단한 후계자일 뿐이니 천재의 빈발과 인심의 여러 갈래를 어찌 감당할 수 있겠는가. ……아래로 소관이 주색으로 희희낙락하고 있고
위로는 대관이 뇌물을 받아 챙기고 있어 백성들을 착취하느라 여념이 없는데, 나와 같은 하잘 것 없는 신하가 무엇을 어찌 하겠는가. 지금이라도
전하께서 마음을 바로잡고 서정을 쇄신한다면 그때 가서 도울 수 있으면 돕겠다.

1565년(명종 20), 문정대비가 세상을 떠나고 윤원형이 실각하면서 드디어 사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와 더불어 그가 출사를 거부할 명분도 줄어들었다. 윤원형을 몰아낸 명종은 재야의 인사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이려 했다. 66세의 조식은 경상도
관찰사 강사상의 추천으로 서울로 올라왔지만 11일 만에 사퇴했다. 명종에게 개혁의 뜻이 없음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오래지 않아 명종이 세상을 뜨고 선조가 즉위했다. 선조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사림을 기용할 뜻이 있어
널리 인재를 구했다. 다시 조식이 천거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경상도 진주에 살고 있는 백성 조식은 진실로 황송한
마음으로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라고 시작하는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렸다. 이 상소를 통해 조식은 정치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했다.>특히 지방 아전들이 저지르는 공납의 폐해를 단호하게 지적했다. 조선 시대에 문관은 시와 문장으로 시험을
치렀고, 무관은 활쏘기와 말 타기로 선발했기 때문에,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하는 관리들은 실무를 전혀 몰랐다. 게다가 인사이동이 심해서 관리들은
실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고, 파악할 능력도 없었다. 따라서 모든 행정이 아전들 손 안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나라에서 필요한 지방
특산물과 수공업 제품을 농민을 대신해서 공인(貢人)에게 맡겨 바치게 하는 공납제는 공인들이 아전들과 서로 짜고 공납을 가혹하게 거두어들이면서
백성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었다.
결국 남명은 평생 13번이나 나라의 부름을 받고도 한 번도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1572년 72세로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는 대사간에 추증하고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했다.
그는 어려운 시대에는 처사(處士)로 일관하여 학문과 수양에 전념하고, 반궁체험(反窮體驗)을 중시하여 실천
없는 공허한 지식을 배격했다. 투철한 의리와 비리를 용납하지 않았던 그의 사상은 경상우도의 학풍으로 이어졌다. 훗날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 합천 등지에 우거하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서 투철한 선비 의식을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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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와 정여립 역모사건과  기축옥사    2016.12.29.목요일,맑음 

선조 22년(1589) 황해감사 한준으로부터 한 장의 장계가 올라왔다.

장계가 접수된 날 밤 삼정승 등 조정의 고위관리들이 급하게 들어왔다. 무언가 급한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삼정승 등이 입시하자 선조는 신료들에게 한준의 비밀 장계를 내놓았다.

내용을 본즉 안악 군수 이축 등이 역모를 고변한 것이었다.장계에 말하는 역모의 주도자는 정여립이었다.

역모의 괴수로 지목된 정여립, 그는 누구인가?

기록에 따르면 전주 출신으로 출생 당시 아버지가 꾼 태몽에서 정중부가 나타났다고 한다. 고려시대 무신란을 일으킨 정중부가 나타났으니 아버지는 탐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태몽이 그래서인지 정여립은 어려서 성품이 포악하였다. 15, 16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 정희증이 현감으로 나간 적이 있었는데, 정여립이 따라가서는 한 고을의 일을 전부 자기 마음대로 처단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아전들은 정여립의 말만 따랐다고 한다.

이렇게 한때 ‘악장군(惡將軍)’이란 별명까지 들었던 정여립은 후에 정신을 차리고 과거 시험준비를 하여 스물다섯 살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문과에 급제하면 으레 관직에 진출하는 법이다. 그러나 정여립은 관직을 마다하고 서인계 인사인 성혼이나 이이를 찾아가 학문을 토론하는 한편 금구로 낙향해서는 학문에 전념하여 죽도선생(竹島先生)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다.

선조 17년(1584) 노수신이 정여립을 천거하였다. 노수신은 김효원과 심의겸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김효원을 편든 사실로 인해 서인들에게 동인으로 지목되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정여립뿐만 아니고 동인 측 김우옹과 이발을 함께 천거했던 것이다. 그 동안 야인으로 생활하던 정여립에게 노수신의 천거는 고마운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정여립은 노수신의 천거를 받은 후에는 그 동안 평소 학문을 논의하면서 가깝게 지내던 이이를 ‘나라를 그르치는 소인’이라고 헐뜯기까지 했다. 이로 인해 정여립은 선조의 눈밖에 나서는 계속된 천거에도 불구하고 관직생활을 지속하지 못하였다.

불만을 품은 정여립은 전라도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그는 학문을 강론한다고 위장하면서 사람들을 모았다. 정여립은 또한 황해도에서 예전에 임꺽정과 같은 도적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곳으로 가서 처음에는 황해도 도사 자리를 청탁했으나 여의치 않자 변숭복·박연령·지함두 등 불만 세력을 포섭하였다. 이렇게 자기 세력을 모으던 정여립은 하루는 지함두 등과 황해도 구월산을 구경하고 돌아오다가 충청도 계룡산을 유람하고는 어느 폐절에 들어가 시 한 수를 지어 벽에 붙였다.

 

남쪽 나라 두루 다녔더니
계룡산에서 눈이 처음 밝도다.
뛰는 말이 채찍에 놀란 형세요.
고개 돌린 용이 조산을 돌아보는 형국이니
아름다운 기운이 모였고
상서로운 구름이 나도다.
무기(戊己) 양년에 좋은 운수가 열릴 것이니
태평세월을 이룩하기 무엇이 어려우리요.

 

그리고 한번은 당대에 떠돌던 ‘목자(木子)는 망하고 전읍(奠邑)은 흥한다’라는 참언을 옥판에 새겨서는 승려 의연에게 지리산 석굴 속에 감추어 두게 한 다음, 후에 지리산을 구경하다가 우연히 이것을 얻은 것처럼 하였다고 한다. 이 참언은 파자(破字)로서 이씨는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것이다. 정여립이 심부름을 시켰던 의연이란 승려는 평소 각 지방을 두루 돌아다니며 떠들고 다녔던 인물이었다.

“내가 요동에 있을 때에 동쪽 나라에 왕기(王氣)가 있음을 바라보고 한양에 이르니, 왕기는 전라도에 있고, 전라도에 오니 전주 남문 밖에 있다.”

전주 남문은 정여립이 태어난 곳이었다. 이렇게 정여립이 비밀스럽게 가졌던 조선왕조에 반역할 뜻이 어느덧 공공연하게 퍼지게 되었다. 즉 꿈도 꾸어보지 못하고 죽음으로 맞이하게 될 위기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그러자 정여립은 드디어 반란을 결심했다. 그리고 그해 겨울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규합한 군사들을 일제히 일으켜서 바로 서울을 침범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이 사실은 승려 의암의 밀고와 정여립의 제자인 안악의 교생 조구의 자백으로 드러났으며, 이 사실을 안 이축 등이 이를 감사에게 보고하였다.

이렇게 정여립의 반란 사실이 드러나자 조정에서는 정여립을 체포하여 직접 신문을 해서 그 사실을 밝히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를 알아챈 변승복은 3일 밤만에 금구로 달려가서는 정여립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날 밤 의금부 도사들이 정여립의 거처에 도착했으나 체포하지 못했다. 정여립은 이미 변승복 등을 데리고 죽도로 달아난 상태였다. 진안현감이 관군을 이끌고 정여립을 추격하였다. 관군의 추격을 받던 정여립은 결국 막다른 길에 다다르게 되고, 결국 변승복과 자기 아들 옥남을 먼저 죽인 후 스스로 자결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

여러 가지 석연치 않은 정여립의 역모사건을 두고 이 사건을 서인 측에서 조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그 조작의 중심에 서얼 출신으로 학문이 뛰어났으나 정치적으로 진출이 좌절되었던 송익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로서 조작인지 아닌지를 판가름하기란 쉽지 않다. 다만 이 역모사건으로 인해 정치세력의 반전이 이루졌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사건이다. 정여립 역모사건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연려실기술》에서는 이 사건의 여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참고된다.

“큰 변고가 일어나니 서인들은 기뻐 날뛰었고 동인들은 기운이 죽었다. 이것은 앞서 임금이 서인을 싫어하여 이산해를 이조판서 자리에 10년 동안이나 두는 사이에 서인들은 모두 한적한 자리에 있게 되어 기색이 쓸쓸해보였다. 그런데 역변이 일어난 후에는 갓을 털고 나서 서로 축하하였으며 동인들은 스스로 물러나고, 서인은 그 자리에 올라서 사사로운 원한을 보복하기에 꺼리는 바가 없었다.”

이 사건이 발각된 후 역모를 조사하는 책임자는 서인 측 정철이었다. 그는 이 사건을 가혹하게 조사하였다. 그리하여 동인 측 인사들이 대거 처벌되었다. 이때 처벌된 인물들을 보면 이발·이길 형제, 정언신, 백유양, 최영경, 정개청, 김빙, 이언길, 유덕수, 윤기신, 유종지, 김창일 등 많은 수의 동인들이 처벌되었다. 이를 가리켜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때 화를 당한 사람 가운데 최영경은 죄인들의 국문 과정에서 나온 길삼봉이라는 인물로 지목되어 처벌된 인물이었다. 당시 죄인들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역적 모의 때 길삼봉이 상장군이 되고 정팔룡과 정여립이 그 다음이 된다.”

그런데 당시 죄인들의 문책 내용을 보면 길삼봉에 대해서 여러 말이 나왔다.

“전주 길삼봉 집에 갔더니 삼봉은 나이 60세쯤 되고 낯은 쇠빛이고 살이 쪘더라.”

“삼봉은 나이가 30세인데 키가 크고 낯이 여의었다.”

이처럼 인상착의나 그에 대해 말하는 것이 각각 달랐다. 그런데도 정여립이 최영경에게 보낸 〈두류산에서의 약속〉이라는 서간과 인상착의 등이 길삼봉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유사하다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이렇게 정여립의 역모사건으로 시작된 조사 과정은 약 3여 년 이상이 경과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1천 명 이상이 화를 당하였다. 그리고 역모를 고변한 박충간은 형조참판에, 이축은 공조참판에, 한응인은 호조참판에 제수되었으며, 이들을 비롯해 국청에서 죄인들의 심문에 참여했던 인사 22명을 평난공신에 책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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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순봉에 얽힌사연       작성일자; 2015.07.20.월요일,맑음

제천과 단양의 경계에는 옥순봉과 구담봉이 있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제천시에 속하지만 두 봉우리 모두 단양팔경으로 지정되어 있다.

옥순봉과 구담봉을 단양팔경으로 지정한 분은 단양군수로 재임 중이던 퇴계 선생이었다.

퇴계는 청풍 도호부에 속해 있는 두 봉우리를 넣어야 단양팔경의 구색이 맞을 듯 싶어

청풍부사를 찾아가 양도를 요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머쓱하여 돌아오는 길에 퇴계는 옥순봉 석벽에 ‘丹丘洞門’,즉 단양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새겨두었다.

단구는 단양의 옛 이름이다.

 ‘단구동문’을 새겨둔 석벽은 현재 청풍호에 잠겨 있다.

훗날 청풍부사로 부임해온 이지번이 ‘단구동문(丹丘洞門)’이라는 휘호에 반하여

아전에게 사연을 물어 경위를 전해 듣고는,

파안대소 하며 즉석에서 옥순봉을 단양에 할양했다는 훈훈한 얘기가 전해온다.

이지번은 「토정비결」을 지은 이지함의 형이자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아버지로서,

평소 퇴계를 흠모하고 있었다.

이지번의 후손은 대대로 퇴계의 연인이었던 두향의 묘를 보살펴주기도 했다.

 

오늘날 전국 지방마다 지정되어 있는 팔경은

원래 중국 북송(960~1127)의 화가 李成이 그린 <소상팔경도>에서 유래했다.

<소상팔경도>는 중국 서화 베끼는 걸 큰 예술적 성취로 여기던 조선의 사대주의에 힘입어

한양팔경이니 관동팔경이니 하며 전국적으로 팔경 붐을 일으켰다.

문경만 해도 경북팔경 제1경으로 진남교반이,

제2경으로 문경새재가 지정되어 있다.

이와 별도로 경천댐‧문경새재‧봉암사 백운대‧선유동계곡‧쌍용계곡‧용추계곡‧운달계곡‧진남교반 등이

문경팔경으로 지정되어 있다.

가은면 같은 곳에도 풍류를 아는 면장이 부임한다면 가은팔경을 정하겠지만,

가은면장을 지낸 병옥이가 기회를 놓친 이후 지금까지 임자를 못 만났다.

실제 가은에는 문경팔경을 능가하는 절경이 무지하게 맣다.

고향에서 줄창 살고 있는 사람들은 늘 보는 풍경이라 그 아름다움을 실감하지 못하고,

외지에서 이따금 오는 사람은 볼 때만 감탄하고는 고향을 떠나면서 까맣게 잊어버린다.

 

 

 

단양팔경은 옥순봉과 구담봉을 비롯하여 도담삼봉‧석문‧사인암‧상선암‧중선암‧하선암 등이다.

퇴계와 두향의 로맨스가 얽힌 강선대가 왜 빠졌을까 궁금하던 참에,

책장을 넘기자니 유홍준도 단양에는 그 밖에도 단양팔경에 버금가는 볼거리가 많다며 강선대도 넣어놨다.

단양팔경은 지방의 팔경 가운데서 가장 유명하여 예로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다녀갔다.

영조 때 화가 권신응(1728~1786)은 몸져누워 계시는 할아버지를 위해 일일이 팔경을 찾아다니며

<단구팔경>을 그려다 드리기도 했다.

유홍준은 ‘산수화는 원래 와유(臥遊)를 목적으로 유래했다’고 설명해놨다.

즉, 거동이 불편한 사람이 누워서 즐기도록 그려다 바친 그림이라는 것이다.

1977년 충북향토문화연구소에서 간행한 「단양군지」에는

‘단양팔경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이 군지가 처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전인수도 이 정도면 노벨상 깜이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옛말이 있다.

좋은 경치는 영상이나 사진으로 볼 때가 더 아름다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고종 때 민비에 의해 영의정에 오른 이유원(1814~1888)은 그 흔한 이치도 깨우치지 못했던지,

젊은 시절에 쓴 「임하필기」라는 기행문에서 단양팔경을 이렇게 평가했다.

<혹자는 단양팔경을 보고 금강산과 비슷하다고 하는데, 금강산은 산이 높고 바다가 깊다.

이에 반해 단양팔경 가운데 가장 빼어난 옥순봉‧구담봉‧도담삼봉은 동해에 갖다 놓으면 작은 돌덩이에 불과할 것이다.>

필자의 그릇을 짐작할 수 있는 메마른 여행기다.

단양팔경은 그곳 산수와 어우러졌을 때 비로소 빛나는 것이지 왜 동해에 갖다 놓는가 말이다.

그런 안목으로 여행은 뭐 하러 다녔는지…

이유원보다 한참 선배인 현종 때 문인 윤선거는 「파동기행」에서 일찌감치 단양팔경을 이렇게 정리해놓았다.

‘금강산에는 이러한 물이 없고, 한강의 다른 곳에는 이러한 산이 없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그 지방의 절경은 다른 고장의 명승지와 비교하지 않고 각 고을마다 팔경을 정하는 것이다.

 

 

 

 

옥순봉(해발 286m)은 제천팔경으로도 지정되어 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행정구역상 옥순봉은 늘 제천의 산이었는데.

산 이름을 옥순봉이라고 지은 것도 퇴계가 단양군수로 재직할 때였다.

막 비가 갠 후에 보면 옥처럼 푸른 봉우리들이 죽순 돋아나듯 우뚝우뚝 솟아났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옥순봉은 강 쪽에서 바라보이는 곳이 가장 웅장하고 아름답다.

충주호 유람선을 타면 청풍나루와 장회나루 사이에서 옥순봉과 구담봉을 완상할 수 있다.

충주호반의 볼거리 가운데서 옥순봉과 구담봉은 단연 하이라이트인 만큼,

청풍나루와 장회나루 구간만 운행하는 유람선이 별도로 있다.

옥순봉과 산자락으로 이어진 구담봉(해발 343m)은 절벽 위에 있는 바위가 거북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깎아지른 장엄한 기암절벽으로 인해 퇴계뿐만 아니라

율곡‧서포‧추사‧단원 등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글이나 그림으로 그 절경을 예찬했다.

 

옥순봉은 단원 김홍도가 52세 때 그린 <옥순봉도>로 인해 더욱 유명해졌다.

단원이 기행(奇行)으로 이웃 고을인 연풍현감에서 파직된 다음해다.

단원의 <옥순봉도>는 화강암이 절리 현상으로 인해 수평과 수직으로 동시에

결을 이루는 독특한 형태를 선묘(線描)로 표현해낸 걸작 중의 걸작이다.

각중에 춘화(春畵)가 무지하게 그리고 싶어진 단원은

부임한 지 한 달 만에 연풍현의 난제들을 모조리 해결한 뒤,

왜국으로 밀항하여 1년 동안 수백 점의 춘화를 그리고 돌아왔다.

그 소문은 결국 정조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단원의 솜씨와 됨됨이를 사랑하던 정조는

엄벌을 내리라는 신하들의 벌떼같은 상소를 물리치고 현감 직을 삭탈하는 것으로 치죄를 마무리했다.

왜국에서는 요즘도 단원의 춘화가 종종 매물로 나오고 있다.

단원은 산수‧화조(花鳥)‧초상‧풍속‧신선‧인물 등 모든 장르에서 조선제일의 경지를 이룩한 불세출의 화가였다.

 

 

 

 

옥순봉 건너편 제비봉 산자락에는 퇴계의 연인이었던 두향의 무덤이 있다.

강선대 아래 강변에 있던 무덤이 충주호에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단양 유지들이 이장한 것이다.

숙종 때 단양군수를 지낸 문인 임방(1640~1724)은

강선대 아래 있던 두향 묘에 참배한 뒤 다음과 같은 헌시(獻詩)를 지어 바쳤다.

     외로운 무덤 하나 두향이라네

     강선대 그 아래 강변에 있네

     어여쁜 이 멋있게 살던 값으로

     경치도 좋은 곳에 묻어주었네

 

 

 

사인암(舍人巖)은 단양팔경 중에서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운 기암절벽이다.

깎아지른 암벽이 병풍처럼 수직으로 늘어뜨려져 있고 그 아래로는 맑은 여울물이 잔잔하게 흐른다.

가로 세로 절리를 이룬 화강암의 아름다움은 예로부터 수많은 글과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암벽은 군데군데 철분이 녹아내리면서 틈새에서 자라고 있는 초목들과 조화를 이뤄 한 폭의 산수화를 연출하고 있다.

물도 맑고 흐름도 완만한데다,

사방 절경에 에워싸여 있어 여름이면 남녀 불문하고 풍덩풍덩 뛰어드는 바람에 물 반, 사람 반을 이룬다.

사인암이란 이름은 고려 때 단양군수로 있던 임제광이 사인(舍人) 벼슬을 지낸 주역의 대가 우탁(1263~1342)이

이곳에 은거했던 일을 기념하여 지었다.

 

 

 

 

 

 

고려 때부터 워낙 유명하여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오다 보니 사인암은 성한 곳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왜 그리 이름 석 자를 못 남겨 환장하는지,

사인암에도 빈틈이 없을 정도로 빼곡하게 기명(記名) 낙서들을 해놨다.

사인암 아래 너럭 바위에는 장기판과 바둑판을 그려놓고 오락까지 즐기며 장시간 주변 경관을 감상하기도 했다.

유홍준은 그 가운데서 잘 쓴 글씨와 잘 지은 글을 가려 예찬하기도 했지만,

글은 종이에 써서 가져갔어야지 왜 자연경관을 훼손하는가.

금강산 기암절벽마다 새겨놓은 ‘김일성 주석 만세!’와 다를 게 무언가.

2011년 단양군청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확인 가능한 이름만 무려 311개라고 한다.

대부분 벼슬이든 서화(書畵)든 한가닥하던 자들이다.

이 기명 낙서 행각은 현대에도 이어져,

지금 이 시각에도 몰지각한 자들이 전국의 절경마다 자신의 무지(無知)를 새기고 있다. 

 

덕흥 대원군         작성일자; 2015.05.08.금요일,맑음 

 

덕흥대원군(생졸;1560년4월2일~1559년6월14일)은

조선 중기의 왕자이며 조선 최초의 대원군이며 휘는 이초,아명는 이환수이다.

 

조선 제14대 선조의 사친으로

선조는 생부인 덕흥대원군을 왕으로 추촌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는 당시 적서를 가리던 그 시대에,중종 임금의 서자였고,

선조는 서얼 콤플렉스와 방계승통 콤플렉스를 갖게 되었다고 하다.

순조 때 왕족 아들의 수가 귀해지자 선조의 왕자군 후손들에게 왕위 계승권을 적용시켰다가

결국 뒤이어 덕흥대원군의 직계 후손들에게도 왕위 계승권을 부여하였다.

 

덕흥 대원군은 궁궐에서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의 서9남이자,

증 의정부 좌이정에 추종된 안탄대의 딸 창빈 안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친형제로는 영양군 이거,정신옹주가 있다.

처음 이름은 이환수였다가 뒤에 이 초로 개명하였다.

1538년,중종33년 덕흥군으로 책봉되었다.

1542년,영의정 하동부원군 정인지의 손자로 지중추부사와 판중추부사를 지낸 정세호의 딸인

하동 정씨와 가례를 올리고 출궁하였다.

그의 집이었던 도정궁은 처음에 한성부 사직동 근처에 있었다.

1955년4월23일,당대의 고관 몇 명과 사대부들과 시비가 붙고,

기생들과도 어울려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으나 왕이 듣지 않아 무마되었다.

1954년3월에는 덕흥군의 집 노비들과 그의 장인인 정세호의 집 노비들끼리 시비가 붙어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당했으나 역시 명종 무마시켰다.

1559년 명종14년,6월14일에 향년 30세를 일기로 병사하여,

그 해 9월17일에 경기도 양주군 남면 수락산 언덕에 예장하였다.

 

생전 명종에 의하면 그는 무식했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1567년.명종13년.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 균이 후사없이 죽은 명종 뒤를 이어 조선

14대 왕인 선조로 즉위했다.

중종 이후 외척의 발호에 부정적이었던 신하들은 명종의 하성군 낙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바로 동의하였다.

선조는 즉위 후 번번히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삼사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삼사는 선조가 덕흥군의 아들이 아닌 명종으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받아 즉위했음을 이유로 들어

덕흥군의 추존을 반대하였다.

1569년.11월1일.

선조2년에 선조는 북송 영종의 생부 복왕을 추존하는 고사를 따라

생부 덕흥군을 추숭하여 덕흥대원군으로,

생모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대부인으로 추존하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고 하려면 황백부모를 칭하기로 하였다.

그의 아들이며 선조의 형 하원군 이정에게는 작위 정1품에 가하고,

4대에게 작위를 내리고 덕흥대원군 묘를 봉사하게 하였다.

이후 잠저인 도정궁 후원에 가묘(덕흥궁)를 세워 신위는 백세토록 조천하지 않는 것으로 정하였다.

 

선조는 그를 왕으로 추존하려다가 끝내 추존하지 못하고 실패한다.

선조는 이후 생부의 묘를 덕릉이라 불렀는데,

사람을 시켜 남양주 근처에 나무하러 오는 나무꾼 중

덕묘나 덕흥 대원군묘라 하지 않고 덕릉(근처)에 다녀온다 라고 하는 나무꾼에게는

후한 돈을 주고 나무짐을 샀다 한다.

순회세자를 잃은 명종은 덕흥군의 아들들 중에서 후계자를 정하기로 하고

한윤명,정지연 등을 사부로 선정하여 덕흥군의 세 아들의 교육을 맡게 하였다.

한때 윤원형은 그의 아들 들 중에서 후계자가 나올 것이라 예상하고

덕흥군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키자고 강권하여

덕흥군이 수락했지만,명종이 반대하여 결국 무산되었다.

 

 

 

□ 조선왕 제14대 선조(宣祖) 이야기     2015.8.17.월요일.맑음

선조;하성군(河城君) 이 균

생졸; 1552.11.26∼1608.3.16(55세)

재위기간 ;1567∼1608.41년

능호; 목릉(穆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다.

가계도;

    부;

    모;

      처; 의인왕후 박씨(박응순의 딸)

           인목왕후 김씨(김제남의 딸);

                 생졸;(1584~1632)

                 1602년 음력7월13일,선조가 김제남 딸을 계비로 맞이한 인목대비이다.

                 당시 선조의 나이 51세, 인목대비의 나이 19세였다.

              영창대군

              정명공주;

                 선조와 인목왕후를 계비로 맞이한 열 달 후인 1603년음력5월19일 정릉동 행궁에서 정명공주

                 가 태어났다.인목대비의 측근 내인이 썼을 것으로 추정하는 '계축일기'는 당시의 분위기를 이렇

                 게 전한다.

                '계묘년(1603년) 왕비께서 공주를 낳으셨다.왕자에 대한 기대가 컸던지 소식이 잘못 전달되어

                 대군 아기씨가 태어났다고 전해졌다.실망한 유자신(광해군의 장인)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다시 공주마마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그제야 반색하며 축하 예물을 올렸다.

                 얼마나 왕비마마를 미워했으면 그렇게 했을까.'

                 정명공주가 태어난 지 3년 후인 1606년(선조 39) 영창대군(, 1606~1614)이 태어났

                 다. 55세의 늦은 나이에 적장자를 얻은 선조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공빈 김씨

                 소생인 광해군에게는 달가운 일이 아니었다. 선조가 언제 자신을 내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울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인목대비가 낳은 영창대군은 광해군의 왕위 계승권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1608년 선조는 즉위한 지 41년 되던 해에 승하했다. 영창대군은 세 살배기 어린아이였으므로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수밖에 없었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영창대군을 잘 돌봐 달                    라는 유명()을 남겼다.     














































              

광해군은 34세의 나이에 제15대 왕으로 즉위했다. 광해군은 선조가 살아 있을 때와는 달리 영창














































  대군을 본체만체했다. 하지만 정명공주는 받들어 올렸다. [계축일기]에는 당시의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하루는 대군이 ‘대전 형님(광해군)이 보고 싶다.’라고 보채어 정명공주와 영창대군을 나란히 인사시켰다. 상감은 정명공주에게 ‘이리 와 보라.’라며 만져 보기도 하고 ‘참 영민하고 예쁘구나.’라고 칭찬하기도 했으나, 대군에게는 말도 붙이지 않고 본 체도 하지 않았다. 대군이 어려워하자 인목대비께서 ‘너도 상감 앞으로 가 보거라.’라고 일러 주셨다. 대군이 일어나 임금 앞에 가서 섰지만 여전히 본 체도 아니 하시니 대군이 나가서 울음을 터뜨리셨다. ‘대전 형님이 누님은 귀여워하시고 나는 본 체도 아니 하시니 나도 누님처럼 여자로 태어났어야 했는데, 무슨 일로 사내아이가 되었는고.’라며 종일 우시니 불쌍하시어 차마 볼 수가 없더라.

1614년 2월 영창대군은 역모를 꾸몄다는 ‘7서의 옥’에 연루되어 외할아버지 김제남의 뒤를 이어 처형당했다. 인목대비의 입장에서 광해군은 자식이면서도 친자식을 죽인 원수였다. 두 사람은 한 궁궐 안에서 함께 지낼 수 없었다. 1615년(광해군 7년) 4월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두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광해군은 1618년 인목대비를 ‘서궁’으로 격하한 후 경운궁에 유폐했다. 경운궁(옛 정릉동 행궁)은 광해군이 있던 창덕궁의 서쪽에 있어 서궁이라고도 불렸는데, 인목대비를 후궁으로 낮추면서 그녀의 궁호도 ‘서궁’으로 정해졌다. ‘서궁’은 경운궁을 의미하면서 동시에 ‘창덕궁 서쪽에 있는 후궁’을 의미하게 됐다. 광해군은 ‘서궁’ 인목대비가 있는 서궁 주변에 높은 담장을 쌓고 초소를 두어 무관에게 감시하도록 했다.

정명공주도 인목대비와 함께 서궁에 유폐되었고, ‘공주의 봉급과 혼인은 옹주의 예에 의한다.’라는 폐비절목()에 따라 옹주로 강등되었다. 폐비절목의 규정은 예외적인 조항에 불과했기 때문에 사실상 서인()으로 강등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절망에 빠진 인목대비에게 마지막 남은 가족은 딸 정명공주뿐이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이 공주의 소식을 물어올라치면 “이미 죽었다.”라며 둘러댔다.

정명공주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남자가 쓰기에도 힘에 부친다는 한석봉의 필법을 수련하는 데 정진했다. 정명공주는 서궁에 유폐된 동안 ‘화정’을 비롯한 많은 서예 작품을 썼다. 모녀가 처한 비극적 상황은 정명공주를 조선 최고의 여류 서예 작가 반열에 올려놓는 바탕이 되었다.

[화정]은 글자 하나의 사방이 각각 73cm나 되는 대작이다. 연약한 여성의 체력으로 이런 글씨를 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술사가로부터도 타고난 명필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문한()은 부인들이 할 일이 아니다.’라는 유교적 습속 때문에 정명공주는 자신의 작품이 남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이 때문에 정명공주가 글씨를 잘 쓰고 문장에 능하다는 사실은 세상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화정]은 정명공주가 죽은 후 막내아들 홍만회(, 1643~1709)가 물려받았다. 홍만회는 혹시라도 [화정]이 사라질까 두려워 여러 벌의 탁본을 떠서 친인척과 주변 지인들에게 나눠 주었는데, 그들 중 남구만(, 1629~1711)에게는 발문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조선 후기의 문장가이자 서화가인 남구만은 저서 [약천집(藥泉集)]에서 정명공주의 필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공주의 막내 아드님인 무주군이 공주가 서궁에 계실 때 쓰신 ‘화정’이라는 두 대자를 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이는 선비(, 돌아가신 어머니)의 필적입니다. 선비께서 평소 겸손해 하신 뜻을 지킨다면 남에게 보일 필요가 없겠으나 자손들이 선비를 사모하는 마음을 지닌다면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은 우환의 즈음에 쓴 것이고 화려한 날에 쓴 것이 아님을 밝혀 주십시오.” 

이에 나는 일어나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주는 안으로는 밝으시지만 밖으로는 감추고, 재능이 있으시지만 그 명예를 사양하여 심덕의 온전함이 일부분만 나타났소. 공주의 글씨를 받들어 보니 마치 선조 대왕의 필법에서 나온 듯하오. 필적의 기상이 웅건할 뿐만 아니라 온화하면서도 두터워 규중에서 나온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소. 그 필법에서 심획()을 얻었고, 그 성정에서 감동하는 교화를 얻었으니 가문이 엄숙하고 화목한 바 없이 그러하겠소.”- [약천집] 27권, 신사년 (1710년, 숙종 27년)




































































































            공빈 김씨; 선조에게 총애를 받던 공빈 김씨는 둘째아들 광해군을 낳고 2년 후인 1577년에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해군(이진); 생졸;1574(선조7년)-1609(광해1년)

                  임해군은 1572년(선조5년) 8월14일 경복궁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공빈 김씨는 둘째아들 광해군을 낳고 나서 2년 후인 1577년에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임해군은 1585년 4월 17일 허명의 딸과 혼인하여 아들 이태응을 낳았으나 출가하여

                  (법명;일연선사) 종실에서는 양자로 선조의 후궁 정빈 홍씨 소생의 경창군(이주) 자식들인

                  창원군(이준)과 양녕군(이경)을 받아들였다.

                  1592년(선조 25년) 4월13일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대신들은 피란 계획을 세우고 선조에게

                  둘째아들 광해군을 세자로 삼으라고 주청했지만 윤허를 받지 못한다.

                  몽진을 결심한 선조는 사고 뭉치였던  두사람 중 맏아들인 임해군에게 함경도 지방에 가서

                  근왕병을 모으게 하고, 여섯째 아들 순화군에게는 강원도 지방으로 내보냈다. 

                  왜군 선봉대가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북상하자 선조는 평양을 거쳐 의주로,영변에 이르자

                  어쩔 수 없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조정을 둘로 나누는 분조를 행하고 광해군에게 국사를 일부 위임(분조)했다.    

                  광해군의 공적에 비해 임해군의 처신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그들은 파견지에서도 행패를 부리고 잦은 말썽을 일으켜 백성들의 원망을 들었다.

                  근왕병을 모집하기는커녕 술에 취하여 기생들과 놀아나고 민가를 약탈하는 등 타고난 못된

                  성정을 마음껏 발휘했던 것이다.

                  임해군은 왜군을 피해 강원도를 빠져나온 순화군과 합류한 뒤 경성으로 갔다가 회령부 아전

                  출신으로 현지에서 반란을 일으킨 국경인,국세필 일당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국경인은 두 왕자와 수행원인 김귀영,황정욱,황혁(최고의 문인 황정욱의 아들이며,순화군의

                  장인)을 왜군 선봉장인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겨진다.

                  얼마 후, 임해군과 순화군은 조.명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수복되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교섭이 진행되는 와중에 다행히 풀려났다.

                  선조 사후 명나라 조정에서 광해군의 책봉을 미루고 사신을 파견하자 임해군은 자신이 임금이


                  될 수도 있다는 망상을 품었다.스스로 자기 무덤을 팠던 우부에 불과했다.


                  9월에 가서야 의주의 행재소에서 선조는 두 아들이 적군의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1594년(선조 27년),선조는 윤근수를 명나라에 파견해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주청했으나

                  명나라 맏아들 임해군을 구실로 고명을 거부하면서 광해군에게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라고

                  다섯 차례나 종용했다. 

                  당시 황제 신종은 정귀비에게 얻은 주상순을 염두에 두고 장자 주상락의 황태자 책봉을 미루고


                  있는 상태였다.조선의 광해군을 세자로 승인해주면 신종이 주상락 대신 주상순을 황태자로

                  책봉하려 할 것이라고 우려했던 것이다.

                  광해군은 일본군의 철수로 한양이 수복되자 명나라의 요청으로 설치된 군무사의 업무를 주관

                  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며 군대를 모으고 군량을 조달했다.

                  광해군이 차기 왕의 주자임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그 무렵 임해군의 존재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간신히 석방된 그는 폭음과 난행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는 전란 중에 만난 성천 기생을 한양에 데려와 수년 동안 동거하는 등 방종을 멈추지 않았다.

                  1600년(선조33년),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46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선조는 2년 뒤 51세의 늦은 나이에 김제남의 19세 된 딸을 계비로 맞아들였다.


                  1602년,국혼이 진행 중이던 그 시기에 전 주부 소충한을 궁궐 담장 밖에서 몽둥이로 때려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간원에서는 왕자가 살인을 했으니 법에 따라 조사하여 벌하라고

                  간하였으나 선조는 들은 체 만 체 자신의 혼인에 대한 문제만을 처결함으로써 신료들의 조롱을

                  받았다.3년 뒤인 1606년1월,인목왕후로 부터 적통의 왕자 영창대군을 얻었다.
                  1607년10월. 쇠약해진 선조가 광해군에게 전위 하겠다고 밝히고,대리청정이라도 하라고

                  지시했다.그러나 영창대군을 후원하던 소북의 영수 유영경이 그 내용을 숨겼다.

                 1608년1월,전 참판 정인홍이 광해군에게 전위하라는 상소를 올리자 선조는 명나라의 승인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전위하면 문제가 생길수도 있다며 망설였다.

                 그것은 적통인 영창대군에 대한 미련 때문이었다.


                 죽음이 임박해지자 어린 영창대군을 보위에 올린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광해군에게 선위

                 교서를 내렸다.영의정이었던 유영경은 이 선위교서조차 감추었다가 대북파 정인홍에 의해 발각

                 되어 그를 치죄하는 과정에서 선조가 돌연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유영경은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으로 후사를 삼고 수렴청정을 하라고 종용했다.

                 하지만 인목대비는 선조의 유명에 따라 광해군으로 보위를 잇게 했다.


                 1608년2월2일,34세의 나이로 보위에 오른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파탄지경에 이른 국가

                 재정을 확보하는 데 최선을 다하였고,영흥 부원군 이호민을 명나라에 파견하여 국왕 책봉을

                 청하였으나 명나라는  엄일괴와 만애민을 보내 광해군의 세자 책봉 과정에 대해 조사하게 했다.

                 임해군을 빌미로 조선을 압박하려는 뜻이었다.

                 명나라의 뜻을 감지한 조선 조정에서는 엄청난 양의 은을 모아 사신에게 안겨주었다.

                 명나라의 두 사람은 임해군을 면담한 뒤 신료들에게 그를 박대하지 말라고 형식적으로 종용


                 하고 돌아갔다.그때부터 명나라의 환관들은 한몫을 챙기기 위해 너도나도 사신을 자원했다.

                 1608년2월,장령 윤양,지평 민덕남 헌납 윤효선,정언 이사경 등이 어전에서 임해군의 치죄를

                 간청했다.임해군이 광해군이 즉위한 해부터 몰래 사병을 양성하고 있으니 처벌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임해군과 함께 역모를 도모한 기자헌,이흥로 등을 처단하라고 진언

                 했고,홍문관에서도 차자를 올려 임해군의 사형을 독촉했다.

                 임해군을 진도에 안치했고,곧 강화도 교동현으로 이배했다. 

                 이후 광해군이 그의 처리를 계속 미루자 실세였던 이이첨이 은밀히 임해군의 사사를 도모했다.

                 당시 임해군이 갇혀있던 민가는 사방이 막혀 있었는데 관비 하나가 구멍을 통해 안으로 음식을


                 넣어주고 있었다.그해 5월 3일 교동 현감 이직의 명을 받은 수문장 이정표가 관비를 시켜 독살

                 하려 했지만 그녀가 거부하자 직접 안으로 들어가 임해군의 목을 졸라 죽였다.

                 그의 나이 36세였다.보고된 사인은 병사였다.

                 인조반정 이후 살아남은 관비를 통해 임해군의 죽음에 대한 실상을 알게 되었다.


                 부인 허씨가 관을 열어보니 피부가 살아 있을 때와 똑같았는데,목에 새끼줄을 감았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623년, 인조는 임해군을 복권시켰다.

 

               광해군

            인빈 김씨

                의안군

                신성군

                정원군(원종)

                   인헌황후 구씨(구사맹의 딸)

                       인조; 16대

                       능원대군

                       능창대군

                의창군

                정신옹주,정해옹주,정숙옹주,정안옹주,정휘옹주(5명)

            순빈 김씨

                 순화군; 임진왜란 당시 임해군과 함께 포로가 되었던 순화군은 순빈 김씨 소생으로 선조의 
                            여섯째 자식으로 평민과 노비들을 마구 죽였는데 해마다  희생자가 10여 명에 달했다.

                            순빈 김씨가 세상을 떠난 뒤 빈전의 여막에서 어미를 모시던 궁녀를 대낮에 겁탈하기

                            까지 했다. 선조는 중벌을 면하게 하고 유배형으로 대신했다. 
                            유배지인 수원에서도 관원과 백성들에게 행패를 부렸다.

                            선조는 어쩔 수 없이 그를 가택연금에 처했다. 그로 인해 순화군은 1607년 18세의

                            나이로 중풍에 걸려 죽었다.


            정빈 민씨

                 인성군,인흥군,정인옹주,정선옹주,정근옹주

            정빈 홍씨

                 경창군(이준)

                   창원군(이준); 임해군의 양자로 입적

                   양녕군(이경); 임해군의 양자로 입적

                 정정옹주

            온빈 한씨

                 흥안군; 광해군15년 1623년3월13일의 인조반정 이후 7월에는 대북파의 기자헌,유몽인 등은

                            인조반정 때 김유,이귀 등이 역모 가담을 요청했으나 거절하였고,반정 후에 인조가

                            등용할 때 불렀으나 가지 않아 이들을 역모죄로 서울에 압송되어 지정한 장소에서만

                            머물도록 한 형벌인 중도부처 한 사건이 있었다.

                            동년 10월에는 선조의 10번째 아들인 흥안군은 성품이 활달,호협하여 엉뚱한 짓을

                            잘하였다,황현,이유림등이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는 등의 역모가 있었다.

                            1624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 때,그들과 내통하여 역모하였다는 설이 있어 대간이 주청

                            하여 남쪽에다 안치하려 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난을 피해 왕과 함께 공주로

                            가던 중 도망하여 이괄의 군중으로 들어갔다.
                            이괄의 반란군이 서울에 입성하자,이괄은 그를 추대하여 왕으로 삼고 관군과의 싸움을

                            벌렸으나 패하게 되자 소천으로 내려가 숨었다가 현감 안사성에게 잡혀 서울로 압송된

                            뒤 도원수 심기원 등에게 살해되었다.

                 경평군,영성군,정화옹주. 

 

  선조는 중종의 서손,

  제12대 인종과 제13대 명종의 이복 조카다.

  아버지 덕흥대원군 이초는 인종과 명종의 이복 형제다.

  선조는 아버지 덕흥대원군 이초와 하동부대부인 정씨의 아들로

  조선 최초의 서자 출신 임금이며,명종의 사랑을 받았고,

  1567년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즉위하였고 최초의 방계 혈통의 임금이기도 하다.

 

                                               -덕흥대원군 묘-

 

훈구세력을 물리치고 .이황과 이이,유일,조식,성운 등 사림들을 대거 등용하여 침체된 정국에 활기를 불러 일으키고자 힘을 다하였다.그 밖에 기묘사화 때 화를 당한 조광조에게 벼슬을 높여 관직을 내리는 등 억울

하게 화를 입은 사림들을 신원(伸寃)하고 그들에게 해를 입힌 남곤(南袞) 등의 관작을 추탈하여 민심을 수습하기도 하였다.또한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尹任)·유관(柳灌) 등을 죽인 이기(李芑)·윤원형(尹元衡) 등을

삭훈하였다.

1567.8~1568년까지 이복 숙모 인순왕후 심씨가 섭정

1568년부터 1608까지 친정

1575년(선조 8)  사림의 김효원·심의겸을 각각 중심 인물로 하는 당쟁을 벌여 동인·서인으로 분당되어

 

   이이의 양파 조정에도 시끄러워졌다.

1583년,1587년 2회에 걸쳐 이탕개가 주동이 된 야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경원부가 함락되었다.신립(申砬)과

   신상절 등을 시켜 두만강을 건너 그들의 소굴을 소탕시켰다.

1591년 세자 책봉 문제로 집권한 동인도 서인에 대한 논죄 문제로 남북으로 다시 분열되었다.이로써 당쟁에

    휘말렸고 국력은 더욱 쇠약해졌다.

1590년 일본의 동태가 수상하여 통신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등을 일본에 파견해 그 곳 동향을 살펴오게

    하였으나,다음 해 돌아온 두 사람은 서로 상반된 보고를 하였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부산진을 필두로 왜군이 침략한 지 보름 만에 서울도 위급하게 되자 개성으로 몽진,평양,의주로 피난하는

    고급사(告急使)를 명나라에 보내 원병을 요청하였다.세자 광해군에게 의병과 군량 확보에 몰두하도록

    하였고,의병이 봉기해 적의 후방을 위협했고 무기력 했던 관군도 전력을 가다듬어 각처에서 승리를

    거두었다.이순신등 수군이 제해권을 완전 장악했고, 명나라 원군이 와서 우리 관군과 함께 빼앗겼던

    평양성을 수복하였다.권율의 행주대첩으로 적의 사기가 꺾여 1593년 4월에 강화를 조건으로 한성에서

    철수하여 남으로 퇴각하자,10월 선조가 환도하였다.

1593년  훈련도감을 설치,군사 훈련을 강화시키고 투항해 온 왜군에게 조총 쏘는 방법과 탄환 만드는 기술

    을 관군에게 가르치도록 하였다.임진왜란 초기에는 왜군을 격퇴하는 것이 급선무였으므로 군공을 세운

    자는 신분에 따라 응분의 논공(論功)을 시행하는 등 비상책을 강구하였다. 그런데 전쟁이 장기화되고

    명나라 원군이 오랜 기간 머물게 되어 군량미 조달이 심각한 국면에 이르게 되었다.

    군공을 세운 자나 납속을 한 자는 논공을 할 때,주로 공명첩()이나 실직()을 주었으므로 하층 신분을 가진

    자가 양반으로 격상되는 일이 많아져 조선 후기 신분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임진왜란 중에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고 심지어 사람끼리 서로 잡아먹는 일까지 있어 백성들의 생활이

    극도로 궁핍하게 되었다. 이에 매일 왕에게 공급되는 쌀의 양을 줄여서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보태도록

    하였다. 그리고 곳곳에 산재한 유해를 수집해서 단을 설치하고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명나라와 일본간의 강화 회담이 깨지고 재차 왜군이 침입하자 다시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는 한편,관군의

    정비를 촉구하였다.임진왜란 중에 3궁()이 소진되고 귀중한 전적을 보관한 춘추관이 불타 귀중 도서가

    소실된 것을 애석해 하여 각처에 흩어져 있는 서적들을 거두어 모아 운각(校書館)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또한 불타서 없어진 문묘(文廟)에 단(壇)을 설치하고 제사를 드려 전쟁 중에도 윤기(倫紀)의 소중함을

    대내 외에 알렸다. 궁궐이 불타 정릉동 행궁에 거처하게 되자 실의에 잠긴 선조는 불에 탄 옛 궁궐터에

    초가를 지어 옮기려고 하였다. 명나라 장수가 왕의 거처가 초라함을 보고 궁궐의 영건(營建)을 권했으나

    왜군의 깊은 원수를 갚기 전에는 지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정유재란 때, 우리 수군 함대가 부산에 총집결하자 이를 염려하고 왜병은 뜻하지 않은 곳에 나올 수 있는

    것이니 부산에만 군사를 집결시킬 것이 아니라 호남 지역도 소홀해서는 안되며 육지에도 험한 곳에 군대

    를 배치하는 것이 계책임을 역설했다는데 그 추측은 들어맞았다.


1604년  왜란이 끝난 뒤에 호성(扈聖)·선무(宣武)·청난(淸難) 등의 공신을 녹훈하여 전쟁의 마무리를 짓고

    전후 복구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흉년이 거듭되고 동인·서인의 당쟁은 더욱 격심해져서 커다란

    시련을 받았다.더욱이 죽기 직전에 측근을 불러 적자 영창대군을 보필해달라고 유언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영창대군의 수명을 단축하는 결과만 가져왔다.

    두 대비 모시기를 친어머니 섬기듯 효도가 지극하였다. 성품이 본디 검소하여 화려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

    다.음식과 의복도 절제하여 비빈이나 궁인들이 감히 사치하지 못하였다.농민들의 노고를 생각해 한 톨의

    낟알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도 용납하지 않았다.서화에도 뛰어났으며,명나라 이여송이 선조의 어필을

    청했으나 거절하였다. 

 

1608.3 붕어 할 때까지 둘째 서자 광해군 이혼이 왕세자 신분으로 잠시 대리청정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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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 제13대 명종 이야기     2015.4.28.화요일.맑음

명종; 이환(峘),

생졸;1534(중종 29)~1567(명종 22)

재위기간 ;1545∼1567

능;강릉(康陵)으로 서울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가계도;

부;중종

모; 문정왕후 윤씨

왕후;인순왕후(심강의 딸)


중종은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에서 인종을 낳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 윤씨에서 명종을 낳았다.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했으나 재위 8개월만에 죽자, 당시에 12세였던 명종이 즉위하였다.

어린 나이로 임금이 되었으므로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수렴 청정을 하였고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이 득세하여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문정왕후가 명종을 낳자,장경왕후의 동생인 윤임은 김안로 등과 함께 세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문정왕후와 알력이 생겼다.

 

1537년(중종 32) 김안로가 실각하고 윤원형 등이 등용되자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암투가 더욱 치열해졌다. 이 때 윤임 일파를 대윤(大尹), 윤원형 일파를 소윤(小尹)이라고 하였다.

인종이 즉위하자 한 때 윤임이 득세하여 이언적 등 사림의 명사를 많이 등용해 기세를 떨쳤다.

그러나 곧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사태는 크게 변하였다.

윤원형은 윤임이 그의 조카인 봉성군(중종의 여덟째아들)에게 왕위를 옮기려 한다고 무고하는 한편, 윤임이 인종이 죽을 당시에 계성군(성종의 셋째아들)을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이를 구실로 왕과 문정왕후에게 이들의 숙청을 강권, 윤임·유관·유인숙 등을 사사하게 하고, 이들의 일가와 그 당류인 사림을 유배시켰다.

이어서 1547년에는 또다시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을 계기로 그들의 잔당을 모두 숙청하였다.

이로써 외척 전횡의 시대가 전개되자, 명종은 윤원형의 세력을 견제하고자 이량을 등용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작당하여 정치가 더욱 문란해지고 파쟁이 그칠 사이가 없었다.

이러한 때를 틈타 양주의 백정 출신 임꺽정이 1559년부터 1562년 사이에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횡행하였다. 밖으로는 삼포왜란 이래 세견선의 감소로 곤란을 받아온 왜인들이 1555년 배 6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해왔다.

이들은 결국 이준경·김경석·남치훈 등에 의해 영암에서 격퇴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비변사가 설치되었다.

비변사의 설치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1510년(중종 5) 삼포왜란 때 일단 설치되어 임시 기구로서 존속되어오다가

1555년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 기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명종 때는 문정왕후가 불교를 독실히 믿었기 때문에 불교의 교세가 일어났다. 문정왕후는 보우대사(普雨)를 신임하여 봉은사(奉恩寺) 주지로 삼았다. 그리고 1550년에 선·교(禪敎) 양종을 부활시키고 이듬 해에는 승과(僧科)를 설치하였다.

보우는 뒤에 도대선사(都大禪師)가 되었지만, 1565년 문정왕후가 죽자 잇따른 배불 상소(排佛上疏)와 유림들의 기세에 밀려 승직을 박탈당하고 제주도로 귀양갔다가 변협에게 피살되었다. 윤원형은 문정왕후가 죽은 뒤, 관직을 삭탈당하고 강음(江陰)에 안치되어 죽었다.

이 무렵 명종은 인재를 고르게 등용해 선정을 펴보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하고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인순왕후 심씨와의 사이에 순회세자를 낳았으나 1563년에 13세로 죽고, 왕위는 덕흥부원군(德興府院君 : 중종의 아홉째아들)의 셋째 아들이 계승했으니, 이가 곧 선조이다.


○을사사화

1545년(명종 즉위년) 왕실의 외척인 대윤과 소윤의 반목으로 일어나, 대윤이 소윤으로부터 받은 정치적인 탄압

기묘사화 이후 사림이 후퇴한 사이에 신묘삼간(辛卯三奸 : 중종 20년 신묘년에 사형된 沈貞·李沆·金克愊을 말함.)과 김안로(金安老)와의 싸움과 같은 권신간의 치열한 정권다툼이 일어났다.

김안로는 심정 등의 탄핵으로 귀양중 정신(廷臣)과 내통해, 심정 등이 유배중인 경빈 박씨(敬嬪朴氏)를 왕비로 책립할 음모를 꾸몄다고 탄핵하였다. 이로써 반대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잡는 데 성공한 김안로 일파는 허항(許沆)·채무택(蔡無擇) 등과 결탁해 권세를 누리면서,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몰아내겠다고 위협해 조정을 공포에 떨게 했다.

그러나 문정왕후(文定王后 : 중종의 제2계비 윤씨)를 폐출하려고 음모를 꾸미다가 윤안임(尹安任 : 문정왕후의 숙부)의 밀고로 귀양간 뒤 사사되었다. 이 때 허항·채무택도 처형되었는데, 이들을 정유삼흉(丁酉三凶)이라 한다.

김안로가 실각된 뒤 정권 쟁탈전은 권신에서 외척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중종비 신씨는 즉위 직후 폐위되어 후사가 없었고, 제1계비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尹氏 : 윤여필의 딸)는 세자 호(岵 : 뒤의 인종)를 낳은 뒤 죽었다. 그 뒤 왕비 책봉 문제로 조신간의 일대 논란이 벌어졌으나, 1517년(중종 12)에 윤지임(尹之任)의 딸이 제2계비 문정왕후로 책립되어 경원대군(慶源大君 : 뒤의 명종)을 출산하였다.

이에 문정왕후의 형제인 윤원로(尹元老)·윤원형(尹元衡)이 경원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꾀하면서 세자의 외숙인 윤임(尹任 : 장경왕후의 아우)과 본격적인 대립·알력이 시작되었다.

윤임 일파를 대윤, 윤원형 형제 일파를 소윤이라고 했는데, 이로써 조신·사림은 서로 갈리게 되고 외척을 중심으로 궁·정 내부의 갈등이 촉발되면서 정계가 양분되었다. 그러던 중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외척인 윤임을 중심으로 하는 대윤파가 득세하였다.

인종은 유관·이언적 등 사림의 명사를 신임하고 이조판서 유인숙은 자파의 사림을 많이 등용하였다. 이 결과 사림은 기묘사화 이후 다시 정권에 참여하게 되었으나, 정권에 참여하지 못한 사림들은 소윤파에 가담하게 되었다.

인종은 원래 중종의 반목·갈등 속에서 성장한 유약한 군주로 문정왕후의 뜻을 얻지 못함을 항상 상심하던 중 병을 얻어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였다. 인종의 뒤를 이은 명종은 12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정치를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정권은 소윤파인 윤원형에게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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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덕             2015.04.06.월요일.맑음

서경덕(徐敬德); 조선 중기의 학자로써 주기파(主氣派)의 거유(巨儒)다

; 1489년3월18일-1546년8월3일

호; 화담(花潭)

부친; 부위(副尉) 서호번(徐好蕃)


독학으로 사서육경을 연마했으며 정치에 관심을 끊고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일생을 바쳤다.

평생 여색을 멀리했는데, 개성의 유명한 기생 황진이는 그를 시험하고자 교태를 부리며 유혹하였으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의 인품에 감격한 황진이는 그를 스승 겸 서신과 시문을 주고받는 사이로 남았다.

스승없이 독학을 한 학자로도 유명하며, 박연폭포, 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의 하나로 꼽힌다.

그는 평생을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을 즐기다가 58세를 일기로 묵었다.


 붕당의 출현 이후 그의 제자들은 동인북인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사후 명종 때 이준경 등의 추증 건의로 증 호조좌랑에 추증 되었다가 거듭 추증되어 선조 때

의정부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489년 개성 화정리에서 무관인 수의부위를 지낸 서호번의 아들이며 어머니 보안한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당성으로 호는 화담(花潭)이다.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풍덕군에 살았다.

증조부 서득부는 관직이 없었고, 할아버지 서순경은 진용교위 부사용을 지냈다.

아버지 서호번이 개성에 사는 보인한씨에게 장가들면서 개성으로 이주했다 한다.

할아버지 서순경과 아버지 서호번은 하급무사로 그의 가계는 빈한한 가계였으나, 그가 학문적으로 성취를 하면서 가세를 일으켰다.

어머니 한씨가 공자의 사당에 들어가는 꿈을 꾸고 잉태하여 그를 낳았다한다.

기억력이 뛰어났고, 일찍부터 말과 글을 누가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터특해서 쓰기 시작하였다. 나이 7∼8세에 이르자 총명하고 영특하여 어른의 말을 공경히 받들었다. 그 뒤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한 것이 전부였고, 스승 없이 스스로 학문 연구와 사색에 몰두하였다.

그는 영특하였으나 가계가 빈곤하여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14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처음으로 유학 경전인 상서를 접할 수 있었다고 한다.

1502년(14세) '서경'을 배우다가 태음력의 수학적 계산인 일(日) 월(月) 운행의 도수에 의문이 생기자 보름동안 궁리하여 스스로 해득하였다.


그가 상서를 공부할 때 서당의 훈장은 '선생도 잘 알지 못하는 것을 홀로 깊이 생각하여 15일 만에 알아내고 말았으니 너는 상서를 사색으로 깨우친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한다.

또한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밭에 나가 푸성귀를 좀 뜯어오라고 하자, 그는 광주리의 반도 차지 않을 정도의 푸성귀만 가지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어머니가 푸성기를 제대로 뜯지 못한 연유를 물었다.

새가 땅에서 하늘을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하루 종일 그 이유만을 생각하다가 그만 푸성귀 뜯는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화담집 서문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그의 엉뚱한 일면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향후 그가 전개해나가는 독특한 학문 수행 방법의 모태를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밭에 나가 일을 하다가도 서산에 해가 넘어가는 것을 보거나 비가 오는 것, 바람이 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것이 왜 그렇게 되는가에 대해 깊이 의문을 품기 시작하였고, 해가 뜨고 지는 이유, 비가 오고 날이 맑은 것, 바람이 부는 이유,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것, 산 사람과 시체의 차이점 등에 대해 깊이 사색하고 서적들을 찾아 연구, 규명하려 하였다.

18세 때 '대학'의 치지재격물 조를 읽다가 “학문을 하면서 먼저 격물을 하지 않으면 글을 읽어서 어디에 쓰리오!”라고 탄식하고, 천지만물의 이름을 벽에다 써 붙여 두고 날마다 궁구하기를 힘썼다. 19세에 태안 이씨 선교랑 이계종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젊어서 적극적이던 학습 방법과 지나친 독서와 사색 탓으로 과로에 지쳐 다시는 책을 손에 잡을 수 없을 만큼 몸을 상했고, 이 때문에 21세 때에는 어쩔 수 없이 학업을 포기하고 1년여 동안 전국의 명산을 돌아다니며 건강을 회복하는데 주력해야만 했다. 수 년간 요양한 뒤  개성에 돌아와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31세 때 조광조 등에 의해 채택된 현량과에 응시하도록 수석으로 추천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개성 오관산 화담(花潭)에 서재를 세우고 연구와 교육에 더욱 힘썼다.

그는 조광조 등이 실패할 것을 예견하였는데 기묘사화로조광조,김정 등은 몰락하게 된다.

그는 다시 병의 치료를 위해 1522년 속리산,지리산 등의 명승지를 다니기도 했다.

이때 만난 조식,성운 등 같은 당대의 학자들을 만나 교류하였고, 기행시(紀行詩)들을 남겼다.


그 뒤 학문 연구와 교육에 전념하였으나 1531년(중종 26) 어머니의 요청으로 생원시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대과와 벼슬을 단념하고 더욱 성리학의 연구에 힘썼다. 그후 그는 부모의 상을 당하자 여막을 짓고 생활하며 3년을 지내며 시묘살이를 하였다. 3년상이 통례였으나, 3년상이나 3년복을 하지 않고 1년복으로 끝내는 일도 허다하였다. 중종실록의 평에 의하면 그의 시묘살이는 세인들을 감복하였다 한다.

1543년(중종 38년) 중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자, 다들 신왕의 즉위를 기뻐하였으나 서경덕만 홀로 새 왕의 수가 길지 못할 것을 예상하고 슬퍼하며 눈물흘리니 사람들이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당시에 국상에도 3년상과 3년 상복을 입도록 되어 있었으나 당대의 선비들, 관료들은 상복을 입지 않고 다만 흰 갓과 백의를 3년 걸쳤다. 그러나 서경덕은 "임금의 상에 어찌 상복이 없어야 하겠느냐"며 자최(齊衰) 3월간 상복을 입었다. 신도비문에 의하면 중종의 3개월 상을 치루는 동안, 그는 병을 얻었다 한다.


1544년(인종 1년) 5월1일 김안국 등 일부 관료들과 성군관 유생들이 그를 학행으로 후릉참봉에 추천하여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계속 화담에 머물러 연구와 교육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김안국,이언적 등은 그를 후릉참봉에 임명했고, 그는 한사코 부임하지 않아 그해 6월6일 해임되었다. 특히 예학에 밝았으며,

중종과 인종이 죽자 “임금의 상에 어찌 복이 없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자최삼월(齊衰三月)의 복을 입었다.

중종 때의 조광조,김정 등과  인종 때의 이언적 등이 현실정치에 적극 진출하여 문제해결을 하려고 한 반면 그는 이것을 모두 공리공담으로 보고 수신과 제가, 학문연구에 치중, 전념하였다.

그가 이처럼 은거생활을 고집하고 있었던 것은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가 살았던 15세기 말에서 16세기 중엽은 사회가 심한 혼란기에 있었고, 정치적으로도 사림과 훈척 세력의 대립이 극으로 치닫고 있었다.[3] 관료와 지주 계급은 토지 겸병과 사치 행각을 일삼았고, 이로 인해 농민들은 계속해서 토지를 상실해갔다.[3] 그는 관직 출사나 속된 시류와의 타협을 거부하는 대신 학문 연구와 교육으로 사회에 기여하리라 다짐하였다.


1545년(인종 2년)7월,인종이 사망하자 자최 3년복을 입었다 한다.

중종 때 여러번 조광조 일파나 온건파인 김안국 일파,  남곤 일파 등이 그를 여러 번 초빙하려 하였지만 그는 나보다 덕망높은 인재들이 많은데 어찌 내가 나가느냐며 모두 거절한다. 혼란한 사회의 사회적 불안은 그를 결코 불행으로 몰고 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회에 나가지 않고 은둔을 고집한 덕분에 학문적 업적을 쌓을 수 있었고, 학문 수행의 결과물인화담집 같은 저작들은 후대 조선의 성리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만년에 천하의 명기이자 시인인  황진이와 함께 자연을 향유하면서도 선비로서의 인격을 잃지 않는 고고한 학자로써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그와 황진이,박연폭포를 일러 송도 삼절이라 이름 부르기도 했다.


그는  조선의 많은 성리학자자나  양명학,실학 등 유학자들을 통틀어 스승이 없는 몇안되는 특이한 인물로도 기록된다. 그는 겨우 서당에서 한문을 깨우치는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했다.

그의 스승은 자연과 책 뿐이었다. 그 때문에 서경덕은 기존의 유학자들과는 달리 아주 독특하고 진귀한 학문적 업적을 일궈낼 수 있었다.


저서로는 화담집이 있는데, 이 책에서 '원이기', '이기설', '태허설', '귀신사생론' 등의 글을 통해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밝혔다. 만년에는  황진이, 대곡 성운 등 소수의 인물들과 교류하며 시문으로 소일하였다.

또한  허엽 등 소수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철학을 구술하여 기록하게 했다.

또한 조선 각지의 명승지 등을 다니며 경치를 구경하며 풍류를 즐기기도 했다.

조선 중종, 명종 때의 최고의 기생 황진이는 당대의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서경덕을 유혹하는 데는 실패하고 오히려 그의 학문과 고고한 인품에 매료되어 사제 관계를 맺기도 한다.

그의 문인으로는 허엽,박순,민순, 박민헌, 고경허, 신응시, 황진이 등이 배출되었다.

문인의 한사람인 신응시는 후일 '‘오관산 아래 화담 위에 대그릇 / 밥 한 평생 가난을 즐겼네. / 오도가 떨어지지 않아 선각이 되었는데 / 성대에 불행히 일민으로 마쳤네 / 고도 당시에 고사를 흠앙하였더니 / 오늘 지하에 덕인을 매장하였네 / 유명에 알려 그 포증 두루하니 / 아! 백골에도 성은이 젖었어라.' 하며 그를 추모하는 시를 한수 남겼다.


인종 즉위 후 이언적은 그를 초빙하려 하였지만 사양하였다.

오히려 그는 인종의 수명이 짧음을 예언하고, 한탄하며 눈물을 흘리니  이언적 등은 이를 이상하게 여겼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자  이언적 등이 다시 그를 조정에 출사하여 도와달라고 요청했지만 서경덕은 자신보다 유능한 인재가 많을 것이라며 이를 거절하였다.

1546년(명종 1년),개셩에서 58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명종 때 이준경 등에 의해 여러 번 증직 건의가 있었으며, 6품 이상의 실직을 역임하지 않았다 하여 3품 이상의 직책에 증직을 청하는 부탁은 거절되었다. 그러나 실록은 이준경이 3품 증직을 거절한 것처럼 비방이 가해지기도 했다.

1567년(명종 22년)2월,호조좌랑에 추증되었다.


그 뒤 선조 때인 1575년 증 의정부 우이정에 추능 되었다가 다시 증 의정부좌이정에 추서되었다. 그 뒤 문묘 종사 후보자로 올랐으나 도학 사상도 일부 가미되어있다 하여 거절되었다.

허엽 등이 꾸준히 서경덕의 문묘 종사를 상소하자 선조는 불쾌감을 드러내며 우의정도 과한데 정몽주와 같은 자리에 놓을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1585년에는 신도비가 세워지고, 개성의 숭양서원, 화곡서원 등지에 제향되었다.

그의 문하생들은 대체로 붕당 출현 이후 허엽,박순 등을 따라 동인이 되었다가,동인의 남북 분당 이후 북인이 되었고, 북인이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으로 정계에서 완전히 몰락하면서 그의 사상은 평가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의 학맥 중 일부는 남인으로 계승되었다.

제자인 민순의 문인은 윤호전과 한백겸 등인데, 윤효전으로 그는 백호 윤휴의 아버지였다.

또다른 제자는박지하의 문인인 허교(許喬)로 그는허목의 아버지였다 


□  황진이(黃眞伊)           2015.04.05.일요일.흐림

황진이; 조선 중기의 시인,기녀,작가,서예가,음악가,무희

생졸; 1506?-1567년?

이름; 다른 이름은 진랑(眞娘)이고 기생 이름은 명월(明月)


중종,명종(16세기초,중순경) 활동했던 기생으로,

중종 때 개성의 황씨 성을 가진 진사의 서녀로 태어났으며 생부에 대해서는 전해지지 않는다.

시와 그림,춤 외에도 성리학적 지식과 사서육경에도 해박하여 사대부,은일사들과도 어울렸다.

성리학적 학문적 지식이 해박하였으며 시를 잘 지었고, 그림에도 능하였다. 많은 선비들과 이런 저런 인연과 관계를 맺으면서 전국을 유람하기도 하고 그 가운데 많은 시와 그림을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대부분 실전되었고 남은 작품들도 그가 음란함의 대명사로 몰리면서 저평가되고 제대로 보존되지도 않아 대부분 인멸되었다.

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호기로 이름을 떨치던

벽계수라는 왕족의 콧대를 꺾어놓기도 하고,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다.

뛰어난 재주와 함께 출중한 용모로 더욱 유명하였다.

신분 특성상 황진이라는 이름이 정사에 등장하지는 않으며, 여러 야사들을 통해 그에 대한 내용이 전해 내려온다. 성리학 지식도 해박하였으며, 학자 화담 서경덕을 유혹하려 하였다가 실패했다고도 한다.

서경덕,박연폭포와 함께 송도 3절로도 불렸으며,

대표작으로 '만월대 회고시''박연폭포시' 등이 있다.

조선시대 내내 음란함의 상징으로 여겨져 언급이 금기시 되었으나 구전과 민담의 소재가 되어왔다.


황진이의 정확한 출생년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506년 전후로 추정된다. 그녀는 개성에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서녀였다. 아버지는 황씨 성을 가진 양반으로 일설에는 진사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기생 또는 천민 출신으로 누구인지 분명치는 않으나 아마도 '진현금'(陳玄琴)이라고 불리던 시각 장애인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일설에는 시각장애인인 평민의 딸로 태어났다는 전설도 있다.

그녀가 살던 장단군 입우물 고개에는 1945년 광복 당시까지도 약수가 나왔다고 한다.

황진이는 조선의 신분제인 종모법에 따라, 아버지가 양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천출이 될 수밖에 없었다. 황진이라는 이름 자체도 본명이 아닌 것으로 추측하는데, 가장 유력한 가능성은 본명이 ‘황진’이고 접미사 ‘-이’가 붙은 이름이 전해 내려 온다는 것이다.

이 가능성은 옛 조선 여성들의 이름에 그 근거를 둔다.

그녀는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지만 양반집 딸 못지 않게 학문을 익히고 예의범절을 배운 것으로 봐서는 물질적으로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여덟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열 살 때 벌써 웬만한

한문고전을 읽어내고 한시를 지을 정도로 재능을 보였으며, 서화에도 능하고 가야금에도 뛰어났다고 한다.


다른 설에 의하면 어머니는 기생 또는 천인 출신으로, 서녀 출신임을 비관하여 스스로 기녀가 되었다고 한다. 어려서 교방(敎坊)의 동기(童妓)로서 기녀가 되어 대성하였다. 화장을 안 하고 머리만 빗을 따름이었으나 광채가 나 다른 기생들을 압도했다. 어느 날 당대의 명사인 송공(宋公)의 대부인(大夫人) 회갑연에 참석해 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는데 가창과 미모가 아름다워 유명해졌다. 이때 다른 기생들과 송공 소실들의 질투를 한 몸에 받았으며, 명나라 등 외국 사신들로부터 천하절색이라는 감탄을 받았다. 기녀가 된지 수년 안에 그녀의 재주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그녀의 명성은 한성과 전국 팔도에까지 회자화되었다. 시와 글씨, 그림, 서예에 두루 능하였다. 미모와 가창뿐만 아니라 서사(書史)에도 정통하고 시가에도 능하였으며, 성리학과 고전 지식 역시 해박하였다. 한편으로는 당대의 명사, 한량들과 교류하며 시문 등을 주고받기도 하고 연인이 되기도 하였는데, 한번은 왕족인 벽계수를 유혹하는가 하면 당대의 고관대작들을 유혹하거나 망신을 주기도 했다. 또, 10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여 생불(生佛)이라 불리던 천마산 지족암의 승려  지족선사를 유혹하여 파계시키기도 하였다.


당대의 석학의 한사람이던 서경덕을 유혹하는 것은 실패하였으나 그의 인품에 탄복, 서경덕을 사숙하여 거문고와 주효를 가지고 그의 정사를 자주 방문, 그에게서 당시를 배웠다고 한다.

황진이의 여러 시조들은 문학성이 높은 것으로 평가되어 고전 한국 문학의 일부로 인정되며, 교과서에도 실리는 중요한 작품이다. 또한 성리학자 화담 서경덕과의 사랑 등으로도 유명하다.

당대의 일류 명사들과 정을 나누고 벽계수(碧溪守)와 깊은 애정을 나누거나 교류하였으며, 남녀간의 애정에 대한 내용을 시와 그림으로 그렸다.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유실되었으나 몇 수의 시가 현재 전한다. 뛰어난 시, 그림, 글씨 재주와 함께 성리학과 고전에도 능하였으며 뛰어난 미모를 갖추어 유명하였으며, 서경덕 ·박연폭포와 함께 송도삼절로 불렸다.


용모가 출중하고 노래, 춤, 악기, 한시 등에 두루 능했기 때문에 당시 선비들은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는 것을 대단한 자랑거리로 여기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와 당대의 내로라 하는 선비들에 대한 많은 일화들이 남게 되었다.당시 생불이라 불리던  지족선사를 10년 동안의 면벽 수도에서 파계시키는가 하면, 당대 최고의 은둔학자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했으나 나이 들면서 한 남자를 의지 하고 싶은 마음에 벽계수를 사랑하기도 했으나 사랑이 이루어 지지 못하고 크게 상처를 받고 방황을 했다고 한다. 벽계수와 사랑을 이루지 못함에 슬픈 세월을 보내며 방랑을 하다가 쓸쓸히 삶을 마감했다는 이야기는 우리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당시 벽계수라는 인물은 왕손으로써 세종의 손자 영해군파 길안도정(吉安都正) 의(義)의 다섯쩨 아들인 이종숙으로 알려진다. 이종숙은 1508년생으로 인종조 황해도 관찰사를 지냈으며 풍류에 능하여 황진이 명성을 듣고 찾아가 놀기는 했으나 그와 가정은 이룰 수없어 황진이의 사랑을 거절하고 떠났다고 한다.

명창 이사종과는 그의 집에서 3년, 자기 집에서 3년, 모두 6년을 같이 살다가 헤어졌다. 풍류묵객들과 명산대첩을 두루 찾아다니기도 해 재상의 아들인 이생과 금강산을 유람할 때는 절에서 걸식하거나 몸을 팔아 식량을 얻기도 했다고 한다.[3]

이사종과 헤어지고 다시 개성으로 되돌아왔으나 지족선사를 잊지 못해 다시 찾아갔다. 그러나 황진이의 재방문에도 수행중이던 지족은 요지부동이었고, 지족암에서 끄떡없이 앉아 있는 지족에게 다가가 꽃을 꽂고 수행 중이던 지족의 무릎을 베고 잠을 청하기도 하고, 말도 걸어 보았지만 지족선사는 그대로였다. "지족! 그대 같은 큰 위선 덩어린 없을 거요!" 황진이의 지적에 놀란 지족은 다시 무심한 얼굴로 돌아갔다. 다시 암자로 찾아가 황진이가 지족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들었다. 한참 뒤 어깨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끼고 지족이 그를 깨우니 지족이 덤덤한 웃음으로 말을 건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지족선사와의 관계도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떠나게 된다.

한편 황진이는 당대의 은둔학자인 서경덕을 유혹하기도 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는 서경덕을 유혹하는 데 실패하고 오히려 그의 학문과 고고한 인품에 매료되어 사제 관계를 맺기도 한다.

그녀의 사망 일자와 정확한 사망 이유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죽기 전에 나 때문에 천하의 남자들이 자정하지 못하였으니 내가 죽거든 관을 쓰지 말고 동문 밖 개울가에 시체를 두어 여인들로 하여금 경계로 하여 주시오" 라는 유언을 남겼다고도 한다. 일설에는 황진이의 유언에 따라 그대로 하였는데 한 남자가 거두어 장사 지냈다는 전설도 전한다.

1567년 무렵을 전후해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대부의 위선에 대한 조소와 미모로 남성을 유혹한 것 등이 문제시되면서 조선시대 내내 음란함의 상징과 사대부에 대한 모욕적인 행실 등이 문제시되어 언급이 금기시되었으나 구전과 민담의 소재가 되어왔다.

일설에는 그가 죽은 뒤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일부러 들판에 버려졌다는 전승까지 누군가에 의해 유포되기도 했다. 묘소는 경기도 장단군 구정현 판교동(현재 경기도 장단군 장단면 판교리)에 있다.


황진이의 작품은 주로 연석이나 풍류장에서 지어졌고, 또한 기생의 작품이라는 제약 때문에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했다. 황진이 사후 음란하다는 이유로 사대부들에게 지탄을 받았고, 사대부들에 대한 조롱과 풍자, 유혹 등의 행실이 문제시되어 언급이 금기, 기피되었다. 그러나 용모가 출중하며 뛰어난 시 재주와 학식,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었으므로 그에 대한 일화가 구전을 통해 많이 전해졌다.

그의 작품들 역시 그가 음란함의 상징으로 몰렸고, 전란을 겪으면서 대부분 사라졌으며, 남은 작품들 또한 사대부에 대한 조롱과 풍자 등이 문제시되어 제대로 보전되지 못하여 대부분 인멸, 실전되었다. 그의 시와 작품들 중 일부는 '청구영언'과 '해동가요', '동국시선', '가곡원류' '대동풍아' 등의 문헌에 전하고 있다.

또한 금계필담과  어유야담 등에도 그에 대한 일화가 일부 전해져 내려왔다.

그가 지은 작품으로는 한시로 박연폭포시, 영초월시, 등만월대회고 등이 전하고 있으며,

시조 작품으로는 청산리 벽계수야,동짓달 기나긴 밤을,내언제 신의 없어, 산은 산이로되,어져 내일이여 등이 있다.

항간의 소세양 이라는 인물에 대한 사랑과 황진이의 극진한 이별의 시를 지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는 극작가 양인자씨가 황진이와는 전혀 관계없이 본인이 창작한 시 라는 것을 티비에서 밝힌바 있다.


황진이’는 실존 인물로 보입니다. 그에 관한 기록이 참 많습니다. 천한 기생의 이야기가 어찌 이렇게 많은 사람 입에 오르내리고 역사에 기록되었을까요. 그의 삶을 추적해 가는 일은 역사가 무엇인가 다시 깨우치게 되는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녀의 삶은 왕조실록으로 재구성된 과거가 얼마나 우리 삶과 동떨어져 있는지 여실히 보여 줍니다.


『어우야담』 등의 기록에 의하면 기녀 황진이가 인연을 맺은 사람으로는, 수십 년 면벽수련으로 유명한 고승 지족선사, 대학자 화담(花潭) ‘서경덕’, 판서 ‘소세양’, 왕족 벽계수 ‘이종숙’, 선전관 ‘이사종’, 재상의 아들 ‘이생’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물론 이들은 실존 인물이긴 하지만 ‘황진이’와의 애정 행각이 실재했는지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야담으로 전해지다가 기록된 바에 근거했을 뿐입니다. 그녀의 작품이 언급될 때 그 창작 배경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인물들이 언급되었는데 황진이가 유명한 기생이었으며 개경 유수로 임명된 ‘임재’가 ‘황진이’를 위한 헌시를 지었다가 파면당한 사실이 있는 걸 보면 황진이가 실존 인물이며 그녀가 당대 내로라하는 인물들과 연분을 맺은 사건들이 실재했을 개연성이 큽니다. 개경 유수 관직이면 지금의 광역시장에 해당하니 지금의 장관에 해당하는 고위직 판서와 친분이 있었다는 야담도 전혀 황당한 얘기라고는 할 수 없을 듯합니다

유명한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의 ‘벽계수’가 ‘황진이’의 속치마에 시를 쓰는 영화의 한 장면입니다. 벽계(碧溪)라는 말은 ‘맑디맑은 시냇물’이라는 뜻으로 이런 뜻의 호를 쓴 이로 벽계도정(‘도정’은 관직명) ‘이종숙’이 ‘황진이’가 유혹하려 했던 벽계수임을 추측케 하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그토록 고결했던 벽계수마저 꼬임에 넘어갈 수밖에 없을 만큼 ‘황진이’가 매력적인 여인이었다는 얘기가 여기저기에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서유영(徐有英 1801~1874)의 「금계필담(錦溪筆談)」과 구수훈(具樹勳 영조 때 무신)의 「이순록(二旬錄)」을 그 예로 들 수 있습니다.


 『황진이』의 ‘벽계수’가 세종의 증손자인 벽계도정 ‘이종숙’이라는 실존인물이며 고고한 그가 ‘황진이’의 ‘청산리 벽계수야’라는 시조창을 듣고 타고 가던 말에서 떨어질 만큼 ‘황진이’에게 매료되었다는 일화가 거의 비슷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황진이’가 살았던 때는 조선 중종 때로 16세기 무렵입니다. 그런데 영조 때라 하면 18세기이니 2,300년 뒤의 기록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겠나, 의문을 품을 수도 있지만 실존 인물 ‘벽계도정’과 ‘황진이’가 살았던 시대가 같고 가사(歌辭) ‘면앙정가’의 작가로 유명한 ‘송순’이 개성유수를 지낼 때 ‘황진이’와 시(詩)와 술(酒)로 교유(交遊)했다고 전해오니 영화에서 개성 유수가 ‘황진이’더러 왕손인 ‘벽계’를 유혹해 보라고 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법하다고 생각합니다.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ㅣ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도라오기 어려오니,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수여 간들 엇더리.
                                                                          출전 『청구영언』


‘이종숙’의 호 ‘벽계(碧溪)’에 자신의 기명(妓名) ‘명월’을 붙여 이렇게 즉흥시를 써낼 정도이니 ‘황진이’의 문학적 재능은 놀랍다 아니할 수 없습니다. 네가 아무리 고아(高雅, 높고 우아하다)하다고 자부할지라도 나의 미모(明月)에 안 넘어갈 수 있겠느냐는 호기로운 노래가 어찌나 절창인지 이 정도로 재색(才色, 재능과 미모)을 겸비했다면 제 아무리 벽계라도 아니 넘어갈 수 없었겠지요. 이렇듯 ‘황진이’는 당시 사대부의 위선을 통쾌하게 풍자하면서 그의 문학은 널리 인정을 받았습니다. 사대부들이 황진이 문학의 깊이를 인정하는 만큼 그녀는 양반들의 허위의식을 우습게 알았고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한 이는 소리꾼 ‘이사종’이었다고 합니다. 『어우야담』에서는 ‘서화담’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래 소리를 듣고 당대 최고의 명창 ‘이사종’임을 단번에 알아봤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은 만나자마자 깊은 사랑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를 그리워하는 황진이의 시조를 보면 그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 안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영화 『황진이』에서는 ‘진이’가 이토록 사랑한 이가 ‘이사종’이 아니라 자기 집 종이었던 ‘놈이’로 그리고 있는데 ‘서화담’을 만나고 돌아오면서 ‘놈이’의 화적패가 관가의 창고에서 훔쳐낸 곡물을 마음 사람들한테 풀어놓아 마을이 온통 축제 판이 된 모습을 목격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어우야담』은 예능인으로서의 동질감이 두 사람을 깊이 사랑하게 만들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고, 영화 『황진이』는 천한 신분이면서 신분사회에 대한 강한 반감이라는 계급적 동질성이 ‘진이’와 ‘놈이’를 생사를 넘나드는 깊은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천한 신분인 기생으로 당대 내로라하는 문인들과 교유하며 그 작품이 후대에 길이 남아 전해지는 일은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놀랍고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 인물의 존재 자체가 그 시대 사회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역사는 어떻게 변화 발전하는가 보여준다면 그만큼 위대한 역사 서술이 어디 있겠습니까. 어느 시대에나 추한 세속에 영합하지 않고 홀로 고결한 기품을 잃지 않은 정신적 귀감은 있게 마련인데 ‘황진이’가 살았던 시대를 대표하는 청빈한 학자로 화담 ‘서경덕’이 바로 그런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경덕’은 하급 무사의 아들로 집이 가난하여 서당에서 한자 공부를 한 이후로는 줄곧 독학을 하여 그만한 학문의 경지에 올랐다고 합니다. 우리가 알 만한 그의 제자로는 『토정비결』을 쓴 ‘이지함’, 『홍길동전』을 쓴 ‘허균’의 아버지 ‘허엽’이 있습니다. 선조 때 영의정까지 오른 ‘반순’도 그의 제자라고 합니다. 독학해서 이룬 학문의 깊이가 어느 정도이기에 그의 제자들 중에 이렇듯 명망가가 많은가요. 조선 성리학의 양대 산맥이라고 할 수 있는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서경덕’ 학문의 깊이를 인정했다고 하니 놀라울 뿐입니다. 조선 성리학은 당쟁의 영향도 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주자학과 양명학이 사상적으로 대립 경쟁한 측면이 있습니다. ‘퇴계’가 주리론의 학맥의 대표적인 학자이고 ‘율곡’이 주기론의 학맥을 대표적인 학자로 보면 됩니다. 그런데 ‘화담 서경덕’을 조선 성리학 주기론 학맥의 시조로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다고 하니 ‘서화담’ 학문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대단한 학자가 ‘황진이’와 썸씽(something)이 있었다고 합니다. ‘썸씽’이라고 하니 둘 사이의 무슨 치정(癡情)을 먼저 떠올린다면 말한 제가 송구스럽습니다. 화담 선생이 절세가인(絶世佳人) ‘황진이’와 밤새워 대화하면서 도학자로서의 기품에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는 모습에 ‘황진이’는 감동하게 되고 그를 존경하여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 분 사이에 오간 시조는 정다우면서 맑기가 한량없습니다. 도학의 깊이를 측량키 어려운 선생께서도 ‘진이’를 대하는 마음이 분홍빛으로 물들기도 했던 모양인데 그 모습이 오히려 그 분의 학문을 더 인간적으로 보이게끔 합니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화담’ 선생이 이렇듯 체면을 개의치 않고 순정을 표현하니 그 마음이 너무나 아름다워요. 그에 대한 ‘진이’의 답가는 사제 간의 격의를 일부러 들까부는 듯 염치없어 보이기도 하는데 그런 말투가 스승의 파격에 재치 있게 화답하는 듯하여, 그 스승에 그 제자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야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난 닢 소래야 낸들 어이 하리오.


'임꺽정' 을 쓴 홍명희의 손자 홍석중의 [황진이]에서는 진이를 사모하다 죽은 남자가 이웃집 총각이라고 되어 있지만 다른 야사에서는 이웃집 종놈이라고 언급되기도 했습니다. 홍석중의 작품에서 황진이가 종놈 '놈이'에게 정조를 바친 대목은 전해 오는 야담을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진이가 파혼을 당하면서 자신이 실제로는 종년 ‘현금’의 소생이며 아비의 추잡한 욕망의 소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연유로 스스로 신분의 허울을 벗어던지는 것으로 그려낸 것은 ‘황진이’의 화류계 투신에 대해 설득력 있는 사연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황진이의 생모가 ‘현금’이라고 전하는 기록이 있고 홍석중의 [황진이]는 황진사가 부인의 몸종 ‘현금’을 건드려 진이를 낳은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홍석중의 『황진이』와 최인호의 『황진이』를 비교해 보는 일은 흥미롭습니다. 홍석중(『임꺽정』을 쓴 ‘벽초 홍명희’의 손자)은 북한의 문인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내포한 작품으로 ‘황진이’를 그리고 있으며 최인호가 쓴 『황진이』는 에로티시즘을 표방했다고 할 수 있으니 두 작품은 상당한 정도 대척을 이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최인호의 ‘진이’는 서울 양반 댁과 혼담이 오가는 중 이웃의 갖바치가 자기 때문에 상사병으로 죽어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해 속치마를 벗어 관에 씌우는 기행을 했다 하여 파혼당하고 기생이 되었으며 벽계수와 사랑에 빠졌으나 버림을 받고 무능한 선비 ‘이생’과 전국을 떠돌다가 결국 사당패에게 팔리고 마는 것으로 그리고 있고 홍석중은 진이가 자신의 출생 내력을 알고 양반 귀족의 허위에 환멸을 느껴 기생이 되고 그녀를 흠모한 종놈 ‘놈이’와 남녀의 정을 통하며 나중에 역적 무리에 가담하였다가 참살당한 ‘놈이’의 시신을 수습하고 걸인처럼 세상을 떠도는 것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최인호의 작품은 ‘86년 배창호 감독에 의해 영화로 만들어졌고 홍석중의 작품은 장윤현 감독에 의해 ’07년에 영화로 발표되었습니다.『어우야담』에서는 ‘황진이’가 ‘이생’과 남루한 차림새로 금강산 기행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최인호의 작품이 이 기록을 더 충실하게 반영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야담 기록이다 보니 명백한 사실(事實)임이 입증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런데 사실이라는 게 입증이 될 수 있는 것인가요. 형광등은 매우 빠른 속도로 깜박거리고 있는 게 사실인데 인간의 눈으로는 그걸 감지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파리는 사실대로 감각한다는군요. 어떤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리 보일 수밖에 없고 우리 눈은 파리 만도 못할 수 있으니 팩트만 운운하는 게 허황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역사가 무엇입니까. 절대 객관적인 팩트가 가능한가요? 뿐만 아니라 진실(眞實)하지 않은 사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걸 생각하면 역사가 무엇인지 궁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진이'의 연인이 '놈이'였는지 '이생'이었는지 밝히는 일보다 '진이'의 아픔에 공감하는 게 더 진실한 일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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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이 호(岵)

생졸; 1515~1545

재위기간;1544.1~1545.7(9개월)

능;

가계도

부; 중종

모; 장경황후 윤씨

동생;효혜공주

왕후;인성왕후


중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영돈녕 부사 윤여필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이다.

비는 첨지중추 부사 박용의 딸 인성왕후(仁聖王后)이다.

 

성품이 조용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깊고 형제 간의 우애가 돈독하였다.

학문을 사랑하여 3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였다. 동궁으로 있을 때는 화려한 옷을 입은 시녀를 궁 밖으로 내쫓을 만큼 검약한 생활을 하였다.누이 효혜공주(孝惠公主)가 어려서 죽자 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깊어 병을 얻었다. 서형(庶兄)인 복성군 미(福城君嵋)가 그의 어머니인 박빈(朴嬪)의 교만으로 인해 귀양 가게 되었을 때, 이를 석방할 것을 간절히 원하는 소를 올렸다.이에 중종도 그의 우애 깊음에 감복해 복성군의 작위를 다시 주었다고 한다. 중종의 병환이 위독할 때는 반드시 먼저 약의 맛을 보고, 손수 잠자리를 살폈다.

부왕의 병환이 더욱 위중하자 침식을 잊고 간병에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

경복궁에서 31세로 죽었다.능은 효릉(孝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다.


 

인종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장경왕후 윤씨를 잃었다.

1520년(중종 15년) 세자로 책봉되었다.

1522년에 성규관에 들어가 유신들과 옛 글을 강론했다. 형제간의 우애가 두터웠으며,

   중종이 병이 들자 침식을 잃고 간병에 정성을 다했다.

1543년3월부터 부왕 중종을 보좌하여 대리청정을 하기 시작하였고 

1544년11월28일에 25년 간 세자의 자리에 있다가

   부왕의 선위를 받아 즉위했으나 병으로 인하여 정사를 제대로 살피지는 못했다.

1545년 기묘사화때 희생된 조광조,김정,기준 등을 신원하고 현량과를 다시 설치했다.

   왕위에 오른 지 8개월 만에 승하했다.

1545년(인종 1) 인종은 병환이 위독해지자 대신 윤인경을 불러 경원대군(慶源大君 : 뒤의 明宗)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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