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곽재우    2018.10.03.수요일,맑음

곽재우는 1585년 34세의 나이로 별시에 뽑혔으나 지은 글이 왕의 뜻에 거슬러서 합격이 취소됐다.

그는 벼슬길을 포기하고 은거했으나 임진왜란이 터지고 관군이 대패하자 의병을 일으켜 싸운다.

그는 의병활동 초기에 의령에 지휘본부를 두고 활약했고 스스로를 <천강홍의 장군>이라 칭했다.

연전연승을 거두어 휘하의 병력이 2천 명에 육박하기도 했고 왜군이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하는 것을 정암진에서 완전히 차단하여 이순신의 배후를 보호했다.

곽재우는 그 공으로 벼슬에 올랐으나 1595년 강화회담이 진행되자 벼슬을 내놓고 은거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다시 나와서 창녕의 화왕산성을 수비했다.

그는 조정에서 여러 번 관직에 나올 것을 요청받았으나 거절하고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밑바탕은 민족적 저항의식이었다.

의병장은 전직 관원이나 문반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단순한 무장 출신은 소수에 불과했다.

 

◐ 허준

허준은 1546년 무인 집안에서 태어나 29세 때 의과에 급제하여 의관으로 봉직하게 된다.

허준은 어의로 활동하며 왕자의 두창을 낫게 했고 임진왜란 때는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고 의주까지 호종하여 호종공신이 되었다.

허준은 선조의 명을 받아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 <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25권 25책인 <동의보감>을 완성시켰는데 이책은 당시의 의학지식을 총망라한 임상의학의 백과전서로서 각 병증의 항과 목이 증상을 중심으로 열거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따라서 임상의가들이 환자를 대했을 때 많은 책을 참고로 하지 않아도 이 책 한 권으로 손쉽게 고금의 의서들을 열람한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게다가 세종 때 만들어진 <향약집방서>,<의방유취>와 선조 때의 <의림촬요>,복희의 저작으로 알려진 <천원옥색>,신농의 저작이라는 <본초> 등 83종의 고전 들과 <상한경>,<맥경> 등의 70여 의방서들을 인용한 <동의보감>은 편집력과 서술의 우수성으로 인하여 출판된 뒤 일본과 중국에도  전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귀중한 한방 임상 의학서로 취급되고 있다.


경상우수사를 지낸 허곤의 손자이자 용천부사 허윤의 서자출신.원래 무인 출신 집안이었으나 무과에 응시하지 않고 29세때 의과에급제 하여 내의원에 봉직되었다 이후 내의 태의어의로 명성이 높았고 1575년 안광익과 함께 입진하여 실력을 증명하였고 1581년 "찬도맥결"을 교정 하였으며 왕자의 두창을 치료하여 선조로부터 당상의 가자를받기도했다

임란때는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호종하여 호종공신이 되었으며 그 뒤에도내의원에 남아 의료의 모든 행정에 참여하여 왕의 건강을 돌보았다 그러던중 1596년 선조의 명을 받아 유의 정작, 태의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등과 함께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 "동의보감" 을 편집하기 시작했으나 이듬해 정유재란이 일어나 의관들이 흩어지는 바람에 훗날 단독으로 의서 편집을 하게되고 그는 내의원 어의로 종사하면서도 편집일에 전념하여 광해군 2년 인 1610년에 "동의보감" 을 완성시켰다

그 뒤에도 "언해구급방" "두창집요" "언해태산집요" 등 많은 의서를 개칭하여 간행하였다 그는 동의학사에 이 같은 많은 업적을남기고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 정철     2018.10.03.수요일,맑음

정철은 아버지가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가 풀려나 전라도 담양으로 이주하자 그곳에서 임억령에게 시를 배우고 이이,성혼,송익필 같은 유생들과 친교를 맺었다.

26세에 진사시에 1등으로 합격했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가 첫 벼슬을 하고 처음 다룬 일은  명종의 사촌동생이 저지른 살인 사건이었는데 왕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죄인을 사형에 처해 버리자 왕은 그를 지방으로 좌천시켰다.그는 지방을 떠돌다 31세 때 함경도 암행어사를 지낸 뒤 여러 벼슬을 하다가 40세가 되던 1575년 벼슬을 내놓고 낙향했다. 그는 강직한 성격 때문에 가는 곳마다 논쟁을 벌였고 친하게 지내던 이이로부터 정쟁을 일삼지 말라는 충고를 듣자 실망하여 낙향했던 것이다.

3년뒤 다시 관직에 복귀했으나 동인의 탄핵을 받고 낙향했고 2년뒤 강원도 관찰사가 되자 <관동별곡>과 <훈민가>16수를지었다.

48세 때 예조판서로 승진했으나 이듬해 동인의 탄핵을 받아 사직하고 4년 동안 향촌에 은거하면서 <사미인곡>,<속미인곡>,<성산별곡>등의 한문과 한글로 된 시를 창작했다.

54세 때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우의정으로 발탁되어 동인을 치죄했으나 56세 때 이산해의 계략에 빠져서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건의하다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 있던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유배되었다.

이때 선조는 정철에게 주색에 빠졌으니 나랏일을 그르칠 수밖에 없다고 말했는데 정철은 주색을 즐기고 말을 함부로 했던 모양이다.

유배된 그는 57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사은사로 명나라를 다녀오기도 했으나 동인의 모함으로 다시 사직하고 58세를 일기로 죽었다.

 

허준은 1546년 무인 집안에서 태어나 29세 때 의과에 급제하여 의관으로 봉직하게 된다.

허준은 어의로 활동하며 왕자의 두창을 낫게 했고 임진왜란 때는 선조의 곁을 떠나지 않고 의주까지 호종하여 호종공신이 되었다.

허준은 선조의 명을 받아 내의원에 편집국을 설치하고 <동의보감>을  편집하기 시작하여 광해군 2년인 1610년에 25권 25책인 <동의보감>을 완성시켰는데 이책은 당시의 의학지식을 총망라한 임상의학의 백과전서로서 각 병증의 항과 목이 증상을 중심으로 열거되어 있다는 특징이 있다.따라서 임상의가들이 환자를 대했을 때 많은 책을 참고로 하지 않아도 이 책 한 권으로 손쉽게 고금의 의서들을 열람한 효과를 얻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게다가 세종 때 만들어진 <향약집방서>,<의방유취>와 선조 때의 <의림촬요>,복희의 저작으로 알려진 <천원옥색>,신농의 저작이라는 <본초> 등 83종의 고전 들과 <상한경>,<맥경> 등의 70여 의방서들을 인용한 <동의보감>은 편집력과 서술의 우수성으로 인하여 출판된 뒤 일본과 중국에도  전해져 오늘에 이르기까지 귀중한 한방 임상 의학서로 취급되고 있다

 

○ 이항복과 이덕형,이원익        2017.10.15.일요일,맑음

오성 이항복; 생졸; 1556~1618
한음 이덕형; 생졸 1561~1613)         

인품이 넉넉하고 남다른 우국충정과 도량을 지닌 명신이요, 외교가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많은 인사들이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풍파에 휩쓸리고 비난에 시달렸으나, 이덕형만은 드물게도 입방아에 별로 오르내리지 않았다. 그는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 인물이었다.그가 태어날 때는 나라가 정치적 · 사회적으로 혼란한 시기였다. 위로는 연이은 사화가 일어나고 뒤이어 당쟁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또 척신(임금과 성이 다르지만 한집안인 신하) 윤원형이 권세를 제멋대로 부리며 날뛰고 있었다.

아래로는 각지에서 지방 호족들이 난리를 일으켰고 도적들이 제멋대로 행동했다.
나주의 토호 김응란과 황해도 의적 임꺽정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역사인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이들은 어릴 적에 동화나 만화를 통해 오성과 한음의 따뜻한 우정과 유머러스한 장난을 알고 있을 것이다. 오성은 이항복, 한음은 이덕형을 가리킨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항복이 이덕형보다 다섯 살 위였으니 형 뻘이다.

이들은 포천 출신으로 함께 서당에 다녔으며 이항복의 장인이 된 권율의 지도를 받기도 했다.
그런 탓으로 두 사람은 벼슬길에 나와서도 뜻을 같이해 우정을 저버리지 않았으며 정치적 노선의 지향도

달리하지 않았고 명나라 외교에도 힘을 보탰다.

이덕형이 벼슬자리에 나와 활동하던 시기, 짧다면 짧은 50여 년 동안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다.

동 · 서의 치열한 당쟁, 정여립의 모반 사건, 대전란인 조일전쟁 등이 연이어졌다.

또 그가 죽을 무렵은 임진왜란(조일전쟁) 뒤에 필연적으로 유발된 사회 전반의 파탄, 광해군의 정치적 마찰, 대외적으로는 명나라가 꺼져 가고 후금이 강력하게 등장하던 시기였다.

그러니 이덕형이 산 기간은 조선조 중기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이런 시대상황 속에서 이덕형은

1580년(선조 13) 20세의 나이로 별시문과에 급제하며 관계에 몸을 담았다.

 

교리 · 대사성 등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예조참판 겸 대제학이 되었다.

 

31세의 젊은 이덕형은 이때부터 정치가로서의 수완과 외교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동래를 함락시킨 뒤, 파죽지세로 경상도를 휩쓸며 북상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군 측에서는 조정의 화전 교섭 제의를 다 물리치고 이덕형만 만나고 싶어 했다.

한양의 벼슬아치들이 허겁지겁 북쪽으로 달아나고 있을 때,

 

이덕형은 길을 남쪽으로 돌려 전선에 나가 있었다.

그는 밀양에 내려가서 단신으로 적진에 들어가 일본의 배신을 힐책하며 물러 나왔다.

 

일본군은 평양성 함락을 앞두고 또 한 차례 이덕형을 만나자고 제의했다.

이덕형은 종자 두어 사람만을 데리고 회담장소인 임진강 한가운데로 나갔다.

 

일본 측에선 안면 있는 승려 겐소와 야나가와 등이 나와서 명나라를 치러 가는 길을 비켜 주고 협조해 달라고 강요했다.

 

이덕형은 조금도 굽힘없이 한마디로 거절하고 물러 나왔다.

그는 이때 일본군이 우리나라와 강화를 한다고 해서 물러가지는 않을 것을 간파했다.

 

그는 이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고, 선조를 정주까지 호위하여 따랐다.

그는 이항복과 함께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자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 의견이 받아들여져
이덕형은 청원사가 되어 명나라로 건너갔다. 명나라는 국내의 사정으로 구원병 보내기를 주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덕형은 명나라가 결국은 구원병을
파견할 것이라고 판단하며 온갖 설득 끝에 친조파인 병부상서 석성(石星)을 움직여 끝내 구원병 파견을 성공시켰다.명나라 총대장
이여송의 부대가 압록강에 당도하자, 이덕형이 접반관이 되어 접대를 맡았다.

그는 오만무례한 이여송을 여러모로 달랬다.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가 평양을 점령하고 있었다. 이여송이 평양 탈환작전을 벌일 때, 이덕형은 또 다른 막역한 친구요 선배인 평양관찰사 이원익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탈환작전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했다. 평양 탈환의 성공은 전란 중 처음 기록한 조명 연합군의 승리였다.

 

이덕형은 1593년 병조판서가 되어 전쟁을 지휘했으며 임진왜란이 끝날 무렵인 1598년에는 38세의 장년으로 우의정에 승진했고, 이어 좌의정에 역임했다.

 

1601년에는 경상 · 전라 · 충청 · 강원도의 사도도체찰사가 되어 지방을 순행하면서 민심
수습에 나섰다.난이 끝난 뒤에 온 나라에 역질과 기근이 돌아 전쟁에 시달린 민중이 괴롭힘을 당했고, 풍기는 극도로 문란해져
있었다. 이때를 당하여 그는 사도의 도체찰사로서 민중의 구호사업과 민심의 수습, 그리고 지방군대 정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난이 끝난 뒤
호성공신(扈聖功臣, 난에 선조를 호위하여 공을 세운 신하들)이 문서에 훈공이 기록될 때, 그의 친우인 이항복과 이원익은 1, 2등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으나 그는 애써 사양했다. 사실 그는 잠시 왕을 호종했을 뿐 그의 뜻은 언제나 전선을 달리거나 명나라에서 교섭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할 일을 다 했을 뿐, 훈공이 기록되는 것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다.<BR><BR>다른 각도에서 보면 호성공신을 서둘러 녹훈한
것은 순서도 틀렸고 사리에도 맞지 않는다. 선조 자신이 북쪽으로 파천할 때 민중은 돌을 던지면서 저항의 기세를 보였다. 전선으로 달려가야 할
벼슬아치들이 북쪽 안전지대로 도망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도 난중에 임금을 모셨다고 하여 내시들을 공신으로 올리면서도 정작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죽어 간 장수들은 뒷전으로 밀어 놓았다.

 

이덕형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마침내 1602년 이덕형은 정치가로서나 벼슬아치로서 최고의 영록인 영의정이 되었다. 이덕형은 4년 동안 영의정의 자리에 있으면서 전쟁으로 피폐된 나라를 바로잡기에 힘썼다.

 

그는 인맥으로는 남인 계열에 들었으나 당색에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정직하고 바른 정사를 폈다. 이 과정에서 친구 이항복의 협조가 그를 받쳐 주었다. 그 뒤 이덕형은 잠시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나
있다가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진주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다시 영의정에 복직되었다. 그러나 그는 광해군이 여러모로 빚어내는 마찰을 몸소 겪으면서 관계에 있고 싶은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이덕형은 마침내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벼슬이 박탈되는 삭직(削職)의 아픔을 겪었다. 1613년 대북파의 충동에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제거하고 인목대비를 폐모하려 했다. 이덕형은 이원익 · 이항복과 함께 이를 크게 반대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그는 곧장 행장을 꾸려 양근(楊根)에서 숨어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그가 살던 시대는 힘든 일이 많았지만, 개인적으로는 순탄한 길을 걸었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는 현관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온갖 현관을 지냈으며, 탁월한
지도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주위는 늘 그에게 심복했고, 권모술수형 정치가가 아니면서도 당시 세상은 늘 그의 편에 서 있었다. 이것은 그의
인간적 풍모와 원만한 성품 탓이었다. 친구 이항복이 명신 권율을 장인으로 두어 부러움을 샀다면, 이덕형은 영의정을 지낸 북인 이산해(李山海)를
장인으로 두었다. 관계에서는 이산해의 보이지 않는 권위에 힘입은 바도 컸다.“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듯이 임진왜란 때는
뛰어난 선비들이 널려 있었다.

 

임진왜란을 치러낸 첫째 공로자로 서애 유성룡과 충무공 이순신을 꼽는다. 그 다음은 3리(李)라고 한다. 3리란
이원익 · 이항복 · 이덕형을 말한다. 이 세 사람은 각기 개성과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절친한 사이였다. 그들 가운데 이원익이 맏형이었다.

 

 

이원익(1547~1634)은 체구는 작으면서도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솔직 대담성, 소탈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항복(1556-1618)은 기지와 해학, 재기발랄함과 명민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남을 사랑하고 인정이 넘치는 인간적인 인물이었다.

 

이덕형(1561~1613)은 위풍이 당당하고 언변이 뛰어났으며, 언제나 상대에게 호감을 주면서 상대를 압도했다.

이 세 사람은 남다른 교분을 지녔고, 또 영의정을 번갈아 역임하면서 숱한 일화를 남겼다.

이원익은 오리(梧里) 정승으로 통했고, 이항복은 오성(鰲城) 대감으로 불렸다. 이덕형은 이항복과는
한 스승 밑에서 함께 학문을 닦은 벗이었다. 이덕형은 세 사람 중 나이가 제일 적으면서도 먼저 높은 벼슬을 얻었고 제일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항복은 이덕형이 죽은 5년 뒤, 인목대비 폐모논의에 반대하다가 북청의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이원익도 폐모논의에 반대하다가 홍천에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 뒤 영의정에 추대되었고,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호란을 겪고 난 뒤 죽었다.

세 사람의 나이는 이원익,이항복,이덕형 순이었으나 죽은 연대는 이덕형,이항복,이원익 순이다.

그들은 인생관과 현실에 대응하는 방법은 같았으나 태어나고 죽은 순서는 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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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조의 죽음       2017.10.15.일요일.맑음

우리나라 조선의 역사상 폭군과 성군의 두 이미지를 모두 다 갖고 있는 임금이 광해군이다.

 

선조의 아들인 15대 광해군은 폐모살제를 행하고 독선적인 정치를 행하였기 때문에 폭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동북아 정세가 급변하던 국제 질서 속에서 합리적인 판단으로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적절한 등거리 중립 외교를 하는 등 군사 외교적으로 안정된 기반을 마련했던 현명한 군주라는 평가도 함께 받고 있다.

 

광해군을 설명하는 데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두사람이 있는데 인목대비와 상궁 김개시다.

특히 광해군은 인목대비와 대립 관계를 형성하면서,성군의 이미지에서 폭군의 이미지로 변화해 갔다.

광해군이 세자 시절부터 선조의 왕비 이자 계모인 인목대비와 왕위 계승 문제로 대립 관계였다.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인 공빈 김씨의 소생으로 왕의 서자라는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는데,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자식을 낳지 못하고,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후사를 이어야 하는 중대한 필요성

때문에 서자 인데도 왕세자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가 죽고 선조가 새로 맞이한 왕비인 인목왕후(인목대비)가 아들인영창대군을 낳았다서자 출신인 광해군이 이미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그 후에 선조의 정비인 인목대비가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광해군과 인목대비는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다. 인목왕후(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을 낳고 난 후에 선조에게 요청해서 자신의 처소에

궁녀를 400명이나 충원했다고 한다.인목왕후(인목대비)의 처소에 배치시킨 400명의 궁녀들 중 100명의

궁녀들은 광해군 처소에 있는 궁녀들이었다.

인목왕후(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을 낳자마자 미래의 왕위 경쟁자인 광해군의 기세를 꺾기 위해서 그의 궁녀들을 축소시키는 공작을 벌인 것이다.

 

서자로인 광해군에게는 왕의 정비인 인목대비와 정실의 자식인 영창대군은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으며,

자신의 왕세자 자리를 빼앗아 갈지 모르는 정적 같은 존재감이었다.

더욱이 광해군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선조는 인목대비를 총애한 나머지 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왕세자로 세우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는데,자기 선조가 병(뇌경색)으로 사망하는 바람에,

해군은 왕세자를 유지할 수 있었고 1608년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선조는 선조는 자신의 지병인 뇌경색에 걸려서 한동안 병석에 누워있다가  1608년 아직 젊은 57세의

나이에 의문의 죽음이었다.

선조는 인목왕후(인목대비)의 정성스러운 병간호를 받고 난 후 다시 병세가 호전되어서 다시 일어나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쾌차한 선조는 궁녀가 올린 약밥을 먹었다가 급체하여

쓰러져 곧바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고 한다.

 

숨을 거둔 선조의 얼굴빛이 검푸른빛이었다고 하는데 독을 먹고 죽었을 때에 검푸른빛을 띤다고 한다

그 당시 장안에는 선조가 누군가에게 독살을 당해서 죽었다는 독살설이 퍼져 나갔다고 한다.

만일 선조가 정말로 독살 당했다면 선조를 독살할 사람은 광해군 밖에 없는 것이다.

 

선조는 정비의 아들이 아닌 광해군을 세자로 세운 것을 후회하였고,

자신이 총애하는 인목왕후(인목대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내심적으로 왕세자로 세울 의도를 갖고 있었다.

 

결국 선조가 57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음으로써 인목왕후(인목대비)는 겨우 25살의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었으며, 3살베기 영창대군과 함께 자신들을 지켜줄 수 있는 든든한 보호막이 완전 사라져버린 것이다.

 

160834살의 나이로 조선의 15대 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정적에 대한 대대적인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광해군은 자신의 왕권 유지에 방해가 될까 우려하여 자신의 친형인 임해군도 역모의 누명을 씌어서 죽였다.

왕의계승의 경쟁 관계였던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재남과 처가식구 3명을 역모 혐의로 사사했다.

인목대비의 아들이자 자신의 이복 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유배보냈다가 끔찍하게 살해하고 만다.

그리고 1618년 광해군은 자신의 의붓 어머니나 다름없는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서궁에 유폐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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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개         2017.10.15.일요일, 맑음

논개(朱論介); 조선 선조 시대의 열녀로 의암(義巖)이라고 한다.

생졸; 1574년9월3일-1593년

그녀는 재주와 지혜가 뛰어나고 시문에 능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제2진주성 전투에서 왜장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였다.

병마절도사 최경희의 후처(부실)이다.

논개는 전라북도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출생으로 1574년 선비 주달문과 부인 밀양박씨 사이에서 양반의 딸로 태어났다.

부친 주달문은 진사로 일찍이 슬하에 아들 주대룡을 두었으나 15세에 괴질로 요절하였고 이후 40세가 넘은 나이에서야 딸 논개를 보았다.

1578년 부친 주달문의 별세 후 숙부 주달무에 집에 의탁되었으나, 숙부가 벼 50석에 김부호의 집에 민며느리로 혼인시키려 하니 이를 피해 모녀는 경상도 안의현의 친가에서 피신하였고,

이에 김부호는 1579년 기소하여 모녀를 구금하였다.

이때, 장수 현감 충의공 최경희의 명판결로 모녀를 석방시키고 모녀는 현감의 관저에 의탁하게 되고 후일에 최경회가 성년이 된 논개를 후처로 맞아 들인다.

1592년 임진왜란발발하고,최경희가 전라 우도의 의병장으로 의병을 모집하고 병사를 훈련할 때 논개는 이를 도우며 보필한다.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동행하였으나, 진주성이 함락되고 최경회가 순국하자 논개는 왜장들이 촉석루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을 때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유인하여 남강에 투신하여 순절 하였다.

(게야무라 로쿠스케가 확실한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일본에서는 박종화의 소설 '논개와 계월향'(1962년)에서 최초로 언급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1594년 유몽인은 삼도순안어사가 되어 하삼도의 피해상황을 살피게 되는데, 진주에 머물면서 진주상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명단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논개의 이야기를 듣고 정사에 실리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였다.

광해군 9년 편찬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논개가 관기로 알려졌다는 이유만으로 순국 사실이 기록되지 않자 이를 안타까워하며 논개의 순국 기록을 1624년 자신이 편찬한 '어우야담'에 남기게 된다.

'어우야담》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논개는 진주의 관기였다. 계사년에 창의사 김천일이 진주성에 들어가 왜적과 싸우다가 성이 함락되자 군사들은 패배하였고 백성들은 모두 죽었다. 논개는 몸단장을 곱게 하고 촉석루 아래 가파른 바위 위에 서 있었는데 바위 아래는 깊은 강물이었다. 왜적들이 이를 바라보고 침을 삼켰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했는데 오직 왜장 하나가 당당하게 앞으로 나왔다. 논개는 미소를 띠고 이를 맞이하니 왜장이 그녀를 꾀어내려 하였는데 논개는 드디어 왜장을 끌어안고 강물에 함께 뛰어들어 죽었다.


《어우야담》의 이 기록을 근거로 그 동안 논개는 진주의 관기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1987년 해주 최씨 문중에서 발행한 《의일휴당실기(日休堂實記)》에 논개 관련 부분이 언급되는데, 최경회를 의미하는 경상우병사증좌찬성최공시장에 논개 관련 부분이 언급되어 있다.

공의 부실(副室)이 공이 죽던 날 좋은 옷을 입고 강가 바위에서 거닐다가 적장을 유인해 끌어안고 죽어 지금까지 사람들은 의암이라고 부른다 (且其副室 公死之日 盛服婆娑於江中巖石 誘賊長因而俱墜死 至今人稱義巖)

이 내용을 근거로 논개는 최경회의 후처(後妻)로 알려졌으며, 이로 인해 논개가 기녀의 신분이었는지에 대한 논란이 제기되었다. 1625년(인조 3년) 논개가 순국한 지 32년 뒤 논개가 떨어져 죽은 바위에는 진주의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논개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는데,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의 둘째 아들 정대륭이 진주로 이사를 와서 의암(義巖)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겼다.[4] 1651년(효종 2년) 경상우도의 재난을 살피러 조정에서 파견된 오두인이 진주에 들렀다가 바위에 새겨진 ‘의암(義巖)’이라는 글자를 보고, 촉석루에 의암기(義巖記)를 지었다. 1721년(경종 1년),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의암사적비의암 바로 위에 세워 그 뜻을 기렸다.

가족 관계[편집]

  • 부친 : 주달문(朱達文)
  • 모친 : 밀양박씨(密陽朴氏)
  • 오빠 : 주대룡(요절)
  • 남편 : 최경회(崔慶會)

의기사[편집]

1739년(영조 16년)에는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가 논개의 애국충정을 추모하는 사당인 의기사촉석루 옆에 세웠다.

1846년 장수현감 중주석이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논개생장향수명비(論介生長鄕竪名碑)’라는 추모비를 세운 후, 1955년 군민들의 성금으로 남산에 의암사(義巖祠)라는 사당을 건립하였다. 현재 지방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논개가 태어난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마을에는 논개의 생가가 복원되어 있다.

신분 논란[편집]

그 동안 한국 역사학계에서 논개는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남아 있는 기록을 근거로 진주성의 관기(官妓)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이후 논개는 관기가 아니라 몰락한 양반 가문의 딸로서 최경회가 목숨을 구해준 것을 계기로 그의 후처가 되었다가 사후 정실 부인으로 승격된 인물이며, 적장을 죽이기 위해 연회장에 잠입할 목적으로 기생으로 위장하였을 뿐인데 이로 인해 논개가 관기로 잘못 알려졌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5][6][7]

의암 별제[편집]

1868년(고종 5년) 진주목사 정현석(鄭顯奭)의 노력으로 매년 6월 논개를 기리는 의암 별제(義巖別祭)가 마련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중단되었다가 최근에 진주논개제로 부활하였다. 진주논개제는 매년 5월 의암별제 서막으로 시작된다.

재조명 노력[편집]

한편 19세기까지만 해도 그는 유교사회에서 첩이 되었다는 점, 혹은 왜장을 껴안고 투신한 점, 그의 숙부가 가산을 탕진한 점 등으로 문중에서 기피인물로 외면당하다가 1970년대에 방계 후손들이 그의 묘소를 방문하면서 재평가 논의가 이루어졌다.
묘소는 최경회와 정실이 안장된 묘소 아래에 안장되어 있고, 비석이 세워져 있다.

논개 영정[편집]

2008년 2월 4일 문화체육관광부충남대학교 윤여환 교수가 그린 논개 영정을 정부표준영정 제79호로 지정하였다. 진주시는 표준영정 원본을 진주박물관에 보관하고, 사본을 의기사에 봉안해 일반인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원래 의기사에는 이당 김은호 화백이 그린 '미인도 논개' 그림의 사본이 걸려 있었으나, 2005년 6월 10일 한 진주 지역 시민단체가 김은호의 친일 행적을 문제삼아 의기사에 봉안되어 있던 논개 영정 사본을 무단으로 뜯어낸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논개의 출생지인 전북 장수군과 순국지인 경남 진주시가 공동으로 표준영정 제작에 합의해 전국에 걸쳐 공모를 하였으며, 윤여환 교수가 새로 그린 그림이 표준영정으로 채택되었다.[8]



○ 선조와 임진왜란과 3대 대첩         2017.10.15.일요일, 맑음

선조 시대인 1592년 임진년에 발생했다 하여 '임진왜란' 혹은 '7년전쟁'이라고도 한다.
1592년4월 일본군 선봉대가 부산포로 쳐들어와 서울을 향한 북진을 계속해 
2개월도 되지않아 전 국토가 유린되어 선조와 세자인 광해군은 평양으로 피난하였다.
한산도 대첩 등 해전의 승리로 일본의 해상 작전이 좌절되고,유학자들과 농민이 주축이 된 의병이 일어나

육상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1592년12월 명나라는 4만3,000여 명의 병력을 파견했고

1593년1월8일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하고 일본과 협정에 들어갔다.
강화가 결렬되자 1597년 다시 침입했으나

육지에서는 권율,이시언의 조명 연합군에 패하고 해상에서는 이순신에게 패하여 7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다.

 

임진래란의 3대 대첩은 조선군이 왜적을 무찌른 3대 싸움을 말한다.

1.한산도 대첩: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7월.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연합 함대는 한산도 앞바다에서 왜선60척을 전멸시켜 왜의 수군에 큰 타격을

     주어 해상권을 잡았다.

2.행주 대첩: 임진왜란이 발발한 그 이듬해인 1593년 2월

     전라 순찰사 권율이 서울 수복을 위해 북상하다가 행주산성에서 왜적을 크게 쳐부수어 승리한 전투를

     말한다.이때 동원된 부녀자들이 긴 치마로 돌을 날라 석전(石戰)을 벌인 것이 유명하다.

3.진주성 대첩;

     1차 대첩;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10월

       3만의 왜군 연합부대가 공격해 왔으나 진주 목사 김시민이 끝까지 이를 고수하였으며,

       이때 의병 곽재우가 합세하여 화약물과 돌로 왜군을 물리쳤다.

     2차 대첩; 임진왜란이 발발한 그 이듬해 1593년 6월

        1차전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왜군은 대군으로 공격하였으나 의병인 고종후,강희열등이 참가하여

        항전하다 전원이 전사하였다.

 

임진왜란을 치러낸 첫째 공로자로 유성룡과 충무공 이순신을 꼽는다.

그 다음은 3리(李)라고 하는데,3리란 이원익(남인),이항복(서인),이덕형(남인)을 말한다.

 

이 세 사람은 각기 개성과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절친한 사이였다.

그들 가운데 이원익이 맏형이었다.

이원익(1547-1634)은 이원익은 오리(梧里) 정승으로 통했고,

    체구는 작으나 굽힐 줄 모르는 의지와 솔직 대담성,소탈한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항복(1556-1618)은 기지와 해학,재기 발랄함과 명민함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남을 사랑하고 인정이 넘치는 인간적인 인물이었다.

 

이덕형(1561-1613)은 오성(鰲城) 대감으로 불렸으며,

    위풍이 당당하고 언변이 뛰어 났고,상대에게 호감을 주면서 상대를 압도했다.

이 세 사람은 남다른 교분을 지녔고,영의정을 번갈아 역임하면서 숱한 일화를 남겼다.

이덕형은 이항복과 한 스승 밑에서 함께 학문을 닦은 벗이었고,

이덕형은 세 사람 중 나이가 제일 적으면서도 먼저 높은 벼슬을 얻었고 제일 먼저 세상을 떠났다.
이항복은 이덕형이 죽은 5년 뒤,인목대비 폐모 논의에 반대하다가 북청의 배소(配所)에서 죽었다.

이원익도 폐모논의에 반대하다가 홍천에 유배되었으나 인조 반정 뒤 영의정에 추대되었고,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을 겪고 난 뒤 죽었다.

세 사람의 나이는 이원익 ·
이항복 · 이덕형 순이었으나 죽은 연대는 이덕형 · 이항복 · 이원익 순이다. 그들은 인생관과 현실에 대응하는 방법은 같았으나 태어나고 죽은
순서는 반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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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룡   2015.08.17.월요일,맑음

류성룡(柳成龍); 조선 중기의 문신,인문학자,의학자,저술가

생졸; 1542-1607 

호; 서애

출신;경상도 의성의 외가

  

    이황문하에서 후에 1590년 통신사로 갔던 김성일과 동문 수학하였으며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용되어 이산해와 같은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정여립 난과 기축옥사를 계기로 강경파인 이산해,정인홍 등과 결별하고 남인을 형성하였다.

    임진왜란발발하기 직전 이순신을 천거하여서조로 하여금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도록 하였으며,

    이순신으로 하여금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웠고,

    임진왜란에 4도 도제찰사, 여의정으로 어려운 조선 조정을 총 지휘하였다.

    노량해전과 같은 날인, 정인홍,이이첨 등의 북인의 상소로 인해 영의정에서 관직삭탈하게 된다.

    안동으로 내려가 선조의 부름에도 올라가지 않고 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대한민국 국보 제132호이다.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았던 청백리이면서 ‘조선의 5대 명재상(名宰相)’ 가운데 한 사람

     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란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활을  하였으며,

     이순신의 형 이요신과 친구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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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權慄)     2015.8.17.월요일. 맑음

권율; 선조 시대의 문신·명장

생졸;1537(중종 32)∼1599(선조 32).63세


할아버지는 강화부사 권적, 아버지는 영의정 권철, 어머니는 조승현의 딸이며,

이항복의 장인이다.

1582년 선조 15년에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정자,전적·감찰·예조좌랑·호조정랑·전라도 도사·경성

관을 지냈다.재차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바로 의주목사로 발탁 되었으나,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 목사에 제수되어 바로 임지로 떠났다.왜병에 의해 수도가 함락된 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과 방어사 곽영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 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서 서울의 수복을 위해 함께 북진했다.이광이 수원과 용인 경내에 이르러 이곳에 진을 친 소규모의 적들을 공격하려 하자

극력 반대하였다.그러나 이광이 듣지 않고 무모한 공격을 취해 대패하고 많은 장수들이 전사했다.혼자만이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광주로 퇴각해 후사를 계획했다.

한편, 남원에서 1,000여 명의 의군을 모집해 다시 북진, 금산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고바야카와의 부대를 맞아 동복현감 황진과 함께 이치에서 싸웠으나,황진이 총을 맞아 사기가 저하되었으나 왜병을 격퇴 시켰다.이치싸움의 공으로 곧 전라감사에 승진하였다.

12월 도성 수복을 위해 1만여 명의 군사와 함께 북진 길에 직산에 이르러,정철이 군량미 마련 등에 어려우니돌아가기를 원했으나,북상하라는 전갈을 받고 북진을 계속했다.바로 북상하는 것을 피하고, 수원 독성산성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했다.왜병의 총사령관 우키타는 후방의 연락이 단절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도성에 주둔한 왜병을 진을 친 다음 독성산성의 아군을 밖으로 유인하려 했다.아군이 타격을 가하자 진영을 불사르고 도성으로 물러났다. 퇴각할 때 기병 1,000명을 풀어 왜병을 기습해 많은 왜병이 죽었다.그 뒤 명나라와 함께 도성을 수복 하기 위해 독성산성으로부터 서울 근교 행주산성을 택했다.

조경에게 2일 동안 목책을 설치하고 독성산성으로부터 행주산성으로 군사를 불시에 행주산성으로 옮겼다.  4,000명만 금천(지금의 시흥)에 주둔하게 하고 도성의 왜병을 견제하도록 하였다.행주산성에 포진한 총 병력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총대장 우키타를 위시해서 3만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했다.관군과 의승병이 사력을 다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대패한 왜병은 시체를 모아 불을 질러고, 유기된 시체가 200구에 달했다. 1593년 2월 12일에 있었던 행주대첩이다.

권율은 왜병의 재침을 경계해 행주산성은 오래 견디어내기 어려운 곳으로 판단, 파주산성으로 옮겨가서 도원수 김명원, 부원수 이빈 등과 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했다.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 회담이 진행되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휴전 상태로 들어가자,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로 복귀했다.

1593년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로 승진되어 영남에 주둔했는데,

1596년 도망병을 즉결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바로 한성부판윤에 기용되었으며, 호조판서·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재차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 대진했으나 도어사 양호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했다.이어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장들의 비협조로 실패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841년 행주에 기공사를 건립.그가 임진왜란 대 활약한 공훈을 중심으로 기록된 사적이 '권원수실적( 權元

    帥實蹟)'이란 책명으로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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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李舜臣)     2015.8.17.월요일 맑음

생졸;1545(인종 1)∼1598(선조 31). 조선 선조 시대의 명장,


아버지는 이정이며, 어머니는 초계 변씨로 변수림의 딸이다.

서울 건천동(지금의 중구 인현동 부근)에서 출생하였고,

고려 때 중랑장을 지낸 이돈수의 가문으로  이순신은 12대손이다.

이순신의 가문은 4대 때에 조선 왕조로 넘어오면서 두각을 나타내며,

5대조인 이변은 영중추 부사와 홍문관 대제학을 지냈고,

증조부 이거는 병조참의를 지냈다.할아버지 이백록이 조광조 뜻을 같이하다가 기묘사화의 참화를 당한 뒤로는 아버지 이정도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던 만큼 이순신이 태어날 즈음에 가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어머니 변씨는 가정교육을 엄격히 하였다.

이순신은 희신,요신의 두 형과 아우 우신 모두 4형제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순신이 어린 시절부터 큰 인물로 성장할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었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그를 꺼려 감히 그의 문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하려 하였다. 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

28세 되던 해에 무인 선발시험의 일종인 훈련원 별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왼발을 다치고 실격하였다.

 

1576년 선조 9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로 처음 관직에 나갔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에 보직되고, 이듬해에 발포수군만호를 거쳐,

1583년 건원보권관·훈련원참군을 역임하고,

1586년에는 사복시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무관으로 발을 들여놓은 그의 진로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사복시주부에 이어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가 되었는데,

    이 때 그는 국방의 강화를 위하여 군사를 더 보내줄 것을 중앙에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던 차에

    호인(胡人)의 침입을 받고 피하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그의 죄라 하여 문책하여 판결에 불복하면서 끝내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중형을 면하기는 하였으나,첫번째로 백의종군이라는 억울한 길을 걷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에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선전관 등이 되고,

1589년 정읍 현감으로 있을 때 유성룡에게 추천되어 고사리첨사로 승진,이어 절충장군으로 만포첨사,

   ·진도군수 등을 지내고,47세가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 절도사가 되었다.

    왜침에 대비하여 좌수영(여수)을 근거지로 삼아 전선을 제조하고 군비를 확충하는 등 일본의 침략

    대처하였다..

1592년4월13일 임진왜란이 발발되었는데 일본의 대군이 침입해 왔다는 급보가 전달된 것은 이틀 뒤였다.

    국기일로 공무를 보지 않고 있었는데,

    해질 무렵 경상 우수사 원균으로 부터 왜선 350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이라는 통보에 이어 부산과

    동래가 함락 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그 때 부산 앞바다의 방어를 맡은 경상 좌수영의 수군은 왜선단을

    공격하지도 않았고,경상 좌수사 박홍은 부산이 함락된 뒤에야 동래에 당도하였으나,

    동래가 함락되는 것을 보고는 군사를 돌려 육지로 도망하였다.

    거제도에 근거를 둔 우수사 원균은 접전을 회피하자 왜구는 싸우지도 않고 제해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이순신은 전선을 정비하고 임전태세를 갖추고 전황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1592년4월29일 수영 앞바다에서 전투태세에 임하게 되었다.

1592년5월2일 이순신은 총지휘관으로 기함에 승선하였다.

1592년5월4일 출진을 명하니,규모는 전선 24척,협선15척, 포작선46척, 도합 85척의 대선단이었다.

1592년5월6일 한산도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3척과 협선 2척과 연합함대를 조직하였다.

1592년5월7일 옥포 앞바다를 지날 무렵 적선 30여척 있다는 연락이 왔다.

     옥포에 정박중인 왜군은 조선수군이 해상으로부터 공격해 외선 26척이 격파되었다.

     이 싸움이 옥포대첩로 그의 최초의 해전으로 기록된다.

1592년5월8일 고성의 적진포에 정박중인 왜선 13척을 쳐서 불태웠다.

1592년5월29일 거북선을 앞세우고 23척의 전선으로 여수항을 출항하였다.

    노량 앞바다에  3척을 인솔하고 있던 원균이 적정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사천엔 왜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다.바다로 유인하여 왜선 12척을 파괴하고 왜군을 섬멸하였다.

    이 싸움에서 군관 나대용 등이 부상하고, 그도 적의 조총탄에 맞아 왼쪽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이 싸움에서 최초로 출동한 거북선의 위력은 확고한 인정을 받았다.

1592년6월2일 왜선이 당포에 정박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당포 선창에는 일본 수군장 가메이와 구루시마가 인솔하는 대선 9척,중·소선 12척이 정박하고 있었으며,

    거북선을 앞세운 조선수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대패하고 왜장 구루시마가 전사하였다.당포해전이다

1592년6월3일 이순신은 창신도를 떠났다.

1592년6월4일 당포 앞바다에서 왜선이 거제로 향하였다는 정보를 받고 즉시 전함대에 거제 출격을 명하고

     전라우수사 이억기가 전선 25척과 합류하였다.

1592년6월5일 전선51척과 중·소선 수십척의 연합함대는 일제히 거제로 향하였다.

     이때 거제로 도피하였던 왜선단이 당항포로 도주하였다는 정보가 있어 바로 당항포로 향하였다.

     당항포 에는 왜의 대선9척,중선4척,소선13척이 정박 중이었다.조선수군은 적선을 포위하였다.

     왜군은 대패하였고 왜선은 모두 소실되었다.

    이순신의 연전연승으로 자헌대부에 승계되었다. 

1592년7월6일 전라좌·우수군이 일제히 출동한 뒤 노량 해상에서 경상 우수사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

    하였다.

1592년8월14일 왜군은 해전에서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병력을 증강하여 견내량에는 적장 와키사카의

    대선 36척,중선 24척,소선 13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그는 견내량이 지형이 좁아 전투하기에 불편하다는 판단 아래 장소를 한산도로  물색하였다.

    몇척의 판옥선으로 왜군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을 쳐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층각선7척, 대선 28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격파하였다.

    와키사카의 가신 와키사카사베에·와타나베등이 전사하였다.한산대첩이다.

    한산대첩의 공으로 이순신은 정헌대부에 승계되었다.

 

한산 대첩 후 그는 다시 전진하여 안골포(창원군 웅천면)의 적선을 격파하였다.

와키사카와 합동 작전을 하려던 구키,가토(가등청정) 등의 일본 수군장은 와키사카의 수군이 전멸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골포에 정박 중이었다.

그는 수심이 얕아서 적선을 유인하여 공격하려 하였으나 적선이 포구 밖으로 나오지 않자,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교대로 종일토록 적선을 공격하여 대선을 거의 분멸하였다.

제3차 출동의 결과로 가덕도 서쪽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그는 왜침의 교두보인 부산포공격의 결단을 내렸다. 전라좌·우도의 전선 74척, 협선 92척은 8월 24일 좌수영을 떠나 가덕도 근해에서 밤을 지냈다.

공격 전날은 밤을 새우며 원균,이억기와 작전 회의를 하여 부산포 공격에 따른 작전을 구상하였다.

9월 1일 오전 몰운대를 지나 파도를 헤치고 다대포를 바라보며 절영도(영도)에 이르렀을 때,

왜의 대선 수 척이 아군함대를 보고 도주하였다.

절영도에서는 수 척의 적선을 쳐부수고 척후선을 부산포에 보내어 적정을 탐지하게 한 결과,

왜선 약 500척이 선창 동쪽 산기슭 해안에 줄지어 정박해 있고 대선 4척이 초량 쪽으로 나오고 있다는 보고였다.적이 부산포를 요새화한 것을 알게 된 여러 장수들은 부산포로 깊이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고 독전기를 높이 들고 진격을 재촉하였다.

우부장 정운 등이 선두에 서서 먼저 바다로 나오는 왜군의 대선 4척을 공격하여 불사르니,

뒤에 있던 여러 전선들도 함께 돌진하였다.

그러나 3진으로 나누어져 정박 중인 일본수군의 대·중·소선 470여 척은 아군의 위용에 눌려 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아군이 돌진하며 맹공을 가하자, 배의 안과 성 안, 굴 속에 있던 왜군은 모두 산으로 올라가 아군에게 총통과 화전을 쏘았다.

아군은 이에 맞서 더욱 맹공을 가하며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선 100여 척을 격파하였다.

날이 어둡자 그는 육지로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전함을 돌리게 하였다. 이 싸움에서 적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이 컸으며, 아군도 이 해전에서 30여 명의 사망자를 냈으며 정운이 전사하였다.

1593년 다시 부산과 웅천의 적 수군을 궤멸, 남해안 일대의 적군을 완전히 소탕하고 한산도로 진을 옮겨 본영으로 삼고, 그 뒤 최초로 삼도 수군 통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내원하자 죽도로 진을 옮기고,이어 장문포에서 왜군을 격파,적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안으로 진출하려는 왜군의 전진을 막아 이들의 작전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 회담이 진행되면서 전쟁이 소강 상태에 들어가자,

그는 후일에 대비하여 군사 훈련,군비 확충,피난민 생업의 보장, 산업 장려 등에 힘썼다.

1597년 명.일 사이의 강화 회담이 결렬 되자,

본국으로 건너 갔던 왜군이 다시 침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는 적을 격멸할 기회가 다시 왔음을 기뻐하고 싸움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원균의 모함과 왜군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는 몸이 되었다.

고니시(소서행장)의 부하이며 이중 간첩인 요시라 라는 자가 경상 우병사 김응서에게 가토(가등청정)가

어느날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이를 사로잡을 것을 은밀히 알려오자,

조정에서는 통제사 이순신에게 이를 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는 이것이 적의 흉계인 줄 알면서도 부득이 출동하였으나,가토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에 들어온 뒤였다. 이 때 마침 조정에서도 영의정 유성룡을 몰아내려는 자들이 있었다.

그는 유성룡이 전라 좌수사로 추천한 사람이라 이를 구실로 먼저 그가 모함 당하게 되었다.

또,그 중에서도 경상 우수사 원균 같은 이는 한층 더 노골적인 불만을 가졌던 터라 이순신을 모함하는 소를 올리게 되었다. 상소를 받은 선조는 돌아가는 실정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원균의 상소만을 믿고 크게 노하여 이순신이 명령을 어기고 출전을 지연하였다는 죄를 들어 그에게 벌을 주고 원균으로 하여금 그 직을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유성룡은 끝까지 “통제사의 적임자는 이순신 밖에 없으며, 만일 한산도를 잃는 날이면 호남지방

또한 지킬 수 없습니다” 하고 간청하였지만 정세판단에 어두운 선조가 그것을 받아들일 리 없었기에,

이순신을 잡아들이라는 명령만을 내렸다.

이 때 그는 전선을 거느리고 가덕도 앞바다에 있었는데, 이러한 소식을 듣고 바로 본영인 한산도로 돌아와 진중을 정리하고 원균에게 직위를 인계하였다.

당시 한산도에는 밖에 있는 군량미를 제외하고도 9,914석의 군량이 있었으며, 화약은 4,000근, 총통은

각 선척에 적재한 것을 제외하고도 300자루나 되었다.

이 때,영남 지방을 순시하던 도체찰사 이원익은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왜군이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의 수군인데, 이순신을 바꾸고 원균을 보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허사였다.

그가 서울로 압송되자 백성들이 모여들어 통곡을 하며 “사또는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십니까. 이제 우리는 모두 죽었습니다” 하였다.

서울로 압송된 그는 이미 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였지만, 그러한 공로도 아랑곳없이 1차 신문 때 한 달여 동안 혹독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자초지종을 낱낱이 고하였다.

1차 신문으로 몸이 쇠약해지자 이순신은 우의정 정탁의 적극적인 변호로 인해 추가적인 신문을 받지 않게 되었으며, 도원수 권율의 막하로 들어가 두번째 백의종군을 하게 되었다.

남해안으로 향하던 그는 중도에서 어머니의 부고를 받고 “세상 천지에서 나 같은 일을 겪는 수도 있을까.

일찍이 죽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고 한탄하면서 잠시 들러 성복을 마친 다음 슬픔을 이기고 다시 남쪽으로 향하였다.

그 해 7월 삼도 수군 통제사 원균이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량에서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함으로써 그가 힘써 길러온 무적 함대는 그 형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한산도의 군비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초계에서 이 소식을 들은 그는 “우리가 믿은 것은 오직 수군인데 그같이 되었으니 다시 희망을 걸 수 없게 되었구나” 하며 통곡하였다.

원균의 패보가 조정에 이르자 조야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고, 왕은 대신들을 불러 의논하였으나 바로

대답도 못하였다. 오직 병조판서 이항복만이 그를 다시 통제사로 기용할 것을 주장하였을 뿐이었다.

많은 죄명을 뒤집어씌워 죽이려고까지 하였던 그를 다시 통제사로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순신은 통제사에 재임용된 그는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남은 군사 120인에 병선 12척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실망하지 않고 조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전에서 적을 맞아 싸울 것을 결심하였다.

명량 해전에 앞서 장병에게 필승의 신념을 일깨운 다음 8월 15일 13척(일설에 12척)의 전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부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이 싸움은 재차 통제사로 부임한 뒤의 최초의 대첩이며 수군을 재기시키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한 싸움이었다.

명량 대첩으로 제해권을 다시 찾은 그는 보화도(목포)를 본거로 삼았다가, 다음해 2월에 고금도로 영(營)을 옮긴 다음, 군사를 옮겨 진을 설치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널리 둔전을 경작시키고 어염도 판매하였다.

이로 인하여 장병들이 다시 모여들고 난민들도 줄을 이어 돌아와서 수만 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군진의 위용도 예전 한산도시절에 비하여 10배를 능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단시일에 제해권을 회복하고 수군을 재기시킬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개인적 능력에 의한 것이었다.

1598년11월19일 그는 노량에서 퇴각하기 위하여 집결한 500척의 적선을 발견하고 싸움을 기피하려는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을 설득하여 공격에 나섰다.

그는 함대를 이끌고 물러가는 적선을 향하여 맹공을 가하였고,

이것을 감당할 수 없었던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와 선척을 잃었다.

그러나 선두에 나서서 적군을 지휘하던 그는 애통하게도 적의 유탄에 맞았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삼가라” 하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운명을 지켜보던 아들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그대로 통곡하려 하였으나,

이문욱이 곁에서 곡을 그치게 하고 옷으로 시신을 가려 보이지 않게 한 다음,

북을 치며 앞으로 나아가 싸울 것을 재촉하였다.

군사들은 통제사가 죽은 사실을 미처 모른 채 기운을 내어 분전하여 물러나는 왜군을 대파하였으며,

모두들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물리쳤다”며 외쳤다. 부음이 전파되자 모든 백성들이 애통해 하였다.

그는 지극한 충성심, 숭고한 인격, 위대한 통솔력으로 보아 임진왜란 중에 가장 뛰어난 무장으로 큰 공을 세워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민족사에 독보적으로 길이 남을 인물이다.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도 그의 부음을 접하자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정인보는 '이충무공 순신 기념비'에서 이수신은 명장보다도 성자다. 공은 성자이므로 명장이다”라고 하였고,

천관우의 '한국사의 재발견'에서 “충무공은 거의 완전 무결한 인물이었다.그러기에 성자라 하고 영웅이라 일컫는 것이다”라 하였다.

 

그는 당대에는 죽음으로써 나라를 구하였고,사후에는 그 정신으로써 민족의 나아갈 길을 일깨워 주었다.

그가 전사한 데 대하여는 후대인들의 많은 의문을 자아내고 있지만,그것은 어디까지나 추리에 불과한 것이며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는 글에도 능하여 '난중일기''시조' 등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진중에서 읊은 시조들은 우국 충정이 담긴 걸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그가 전사 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상하고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고 덕풍 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좌의정에 추증,

1793년(정조 17)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묘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있으며,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다.

충무의 충렬사,여수의 충민사,아산의 현충사 등에 제향하였는데,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현충사는 조선 숙종때 이 고장의 유생들이 그의 사당을 세울 것을 상소하여

1707년,숙종33년에에 현충사가 건립되었다.

그 뒤 일제 강점기 때에 동아 일보사가 주관하여 전국민의 성금을 모아 현충사를 보수하였고,

제3공화국 때 대통령 박정희의 특별 지시에 의하여 현충사의 경역을 확대 성역화하고,새로이 전시관을 설치하여 종가에 보존되어 오던 '난중일기'와 그의 유품 등을 전시하였다.

 

그리고 그의 일생과 중요 해전을 그린 십경도가 전시되어 있다.

시호는 충무이다.저서로는 '이충무공전서'가 전한다.

또,그를 대상으로 삼은 작품으로는 신채호의 '이순신전' 등이 있으며,

'성웅 이순신'이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제작되어 그의 행적과 공로를 일반에 널리 알리기도 했다.

 

참고로 이순신의 3대첩은 한산도대첩.명량대첩.노량대첩이며

거북선이 최초로 출현한 전투는 사천 해전 이다.

□ 이 이  율곡      2015.08.17.수요일,맑음

이이;율곡(栗谷) 조선 중기의 학자·문인

아명; 현룡(見龍)

1536(중종 31)∼졸1584(선조 17).

출생지;강원도 강릉 .

부; 증좌찬성 이원수(李元秀)

모;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

 

이이는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로 1536년 강릉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이름이 높아 13세 때 진사시에 합격했고 16세 때 어머니가 죽자 3년간 시묘한 후  19세 때 성혼을 만나 학문을 논했으며 23세 때 별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했다.

26세 때 아버지 이원수가 죽자 3년간 시묘한 후 29세 때 처음으로 관직에 나갔고 47세 때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인심도심설>을 지었으며 이듬해 십만 양병설을 주청하였다.

그가 정계에 진출한 때는 사림이 동서로 분당되어 정쟁을 할 때였다. 동서로 분당된 사림의 동인 측이 이황과 조식의 학문을 추종하는 무리였다면 서인 측은 이이와 그의 친우 성혼의 학문을 따르는 무리였다. 그럼에도 이이는 정쟁을 중재하여 그가 살아있을 동안은  일시적이나마 정쟁은 휴전상태에 머물기도 했다.

이이는 명분과 이익에 대하여 논하기를 이들의 관계에 우위가 없으므로 중용을 취하면 명분과 이익을 함께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가치관은 국가를 평안하게 하고 민중에게 이로우면 모두 다 행할 수 있다고 하는 인본중심의 중용 정신이었다.

이이의 인본 중심 사상은 조선 중기 이후의 역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실학의 핵심적인 사상으로 발전하게 된다.


어머니 사임당이 그를 낳던 날 흑룡이 바다에서 집으로 날아 들어와 서리는 꿈을 꾸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그 산실은 몽룡실이라 하여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8세 때에 파주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에 올라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 났다.

 1548년(명종 3) 13세 때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다.

1551년 16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자, 파주 두문리 자운산에 장례하고 3년간 시묘하였다. 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고

1555년 20세 때 하산해 다시 유학에 전심하였다.

1557년 성주 목사 노경린의 딸과 혼인하였다.

1558년 봄 예안의 도산으로 이황을 방문했고, 그 해 겨울의 별시(문과 초시)에서 「천도책(天道策)」을 지어 장원하였다. 전후 아홉 차례의 과거에 모두 장원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1561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1564년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예조좌랑·이조좌랑 등을 역임하고,

1568년(선조 1)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부교리로 춘추기사관을 겸임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 해에 19세 때부터 교분을 맺은 성혼과 ‘지선여중(至善與中)’ 및 ‘안자격치성정지설(顔子格致誠正之說)’ 등 주자학의 근본문제들을 논하였다.

1569년 임금에게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 올렸다.

1572년 파주 율곡리에서 성혼과 이기(理氣)·사단칠정(四端七情)·인심도심(人心道心) 등을 논하였다.

1575년 주자학의 핵심을 간추린 『성학집요(聖學輯要)』를 편찬했다.

1577년 아동교육서인 『격몽요결(擊蒙要訣)』,

1580년 기자의 행적을 정리한 『기자실기(箕子實記)』를 편찬했다.

1582년 이조판서에 임명되고, 어명으로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지어 올렸다.

이 해에 김시습전을 쓰고, 

1583년 「시무육조」를 올려 외적의 침입을 대비해 십만양병을 주청하였다.

1584년 서울 대사동(大寺洞)에서 영면하여, 파주 자운산 선영에 안장되었다

.

1545년 을사사화가 발생해 수많은 사류가 죽고 유배되었다. 사림은 출사를 포기하고 물러서서 학문을 닦을 수밖에 없었다.

1565년(명종 20) 문정대비의 죽음과 20년간 정사를 전횡하던 권신 윤원형의 실각으로 나라 안의 정세가 바뀌었다. 을사사화 이후 죄를 입은 사람들이 풀려나고, 사림은 다시 정계로 복귀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 이이는 30세로서 출사 1년째 되는 해였다.

1567년에는 이황이 상경하였다.

그 해 6월,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면서 8월에는 을사사화 이후 피죄되었던 노수신·유희춘 등이 서용되었다.

선조 즉위 다음해인 1568년에는 조광조에게 영의정을 추서하고, 이황이 일시에 대제학에 취임하고, 남곤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이황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올렸고,

1569년(선조 2)에는 이이가 「동호문답」을 지어 올렸다.

1570년에는 유관·유인숙의 신원이 이루어지는 등 정국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면서 사림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오랜 구습이나 폐풍은 일시에 시정될 수 없었고 유림의 활동은 떨쳐 일어나지 못했다. 더구나

1575년부터는 동서의 분당으로 사림이 분열되고 정쟁이 심각해졌다. 연산군 이래의 폐법은 고쳐지지 않은 채 국가의 기강은 무너지고 민생의 곤고는 극도에 달하였으며, 군사적으로도 무력한 상태에 빠져 있었다.

1565년부터 1592년(선조 26)까지의 약 30년간은 국정을 쇄신해 민생과 국력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이는 16세기 후반의 조선사회를 ‘중쇠기(中衰期)’로 판단해 일대 경장(更張)이 요구되는 시대라 보았다. 이이는 「만언봉사」에서 “시의(時宜)라는 것은 때에 따라 변통(變通)하여 법을 만들어 백성을 구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는 조선의 역사에 있어서도 “우리 태조가 창업했고, 세종이 수성(守成)해 『경제육전(經濟六典)』을 비로소 제정하였다. 세조가 그 일을 계승해 『경국대전』을 제정했으니, 이것은 모두 ‘시의(時宜)에 따라 제도를 개혁한(因時而制宜)’ 것이요, 조종(祖宗)의 법도를 변란(變亂)함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대의 변천에 따른 법의 개정은 당연한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이이에게 성리학은 단순한 사변적 관상철학(觀想哲學)이 아니었다. 그는 성리학의 이론을 전개함에 있어 시세(時勢)를 알아서 옳게 처리해야 한다는 ‘실공(實功)’과 ‘실효(實效)’를 항상 강조하였다. 그는 「만언봉사」에서, “정치는 시세를 아는 것이 중요하고 일에는 실지의 일을 힘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니, 정치를 하면서 시의를 알지 못하고 일에 당해 실공을 힘쓰지 않는다면, 비록 성현이 서로 만난다 하더라도 다스림의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이는 항상 위에서부터 바르게 하여 기강을 바로잡고 실효를 거두며, 시의에 맞도록 폐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사화로 입은 선비들의 원을 풀어주고, 위훈(僞勳)을 삭탈함으로써 정의를 밝히며, 붕당의 폐를 씻어서 화합할 것 등 구체적 사항을 논의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기(國基)를 튼튼히 하고 국맥(國脈)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이는 성현의 도는 ‘시의와 실공’을 떠나서 있지 않으므로 현실을 파악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요(堯)·순(舜)·공(孔)·맹(孟)이 있더라도 시폐(時弊)를 고침이 없이는 도리가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이이는 진리란 현실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고, 그것을 떠나서 별도로 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여기서 이(理)와 기(氣)를 불리(不離)의 관계에서 파악하는 이이 성리설의 특징을 보게 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이와 성혼은 평상시에 경학이나 도학과 관련해 문답하는 서한을 교환하였다. 이황이 죽은 지 2년 뒤 이이가 37세가 되던 1572년에 성리설에 대한 본격적인 논란을 벌였다. 그것은 이황과 기대승의 논변처럼 오랜 세월을 두고 계속한 것이 아니라, 단 1년 사이에 9회에 걸쳐 주고받은 것이다. 대체로 성혼이 이이에게 질의하고 이이가 회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성혼의 질의내용은 비교적 단순한 것으로, 주자학의 핵심 논제를 집중적으로 거론하였다. 성혼은 일찍이 이황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오간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대해 기대승의 논의를 존중하다가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의 도덕적 고민을 이해하고 그 취지에 수긍하게 되었다. 성혼은 이 문제를 과연 어떻게 정돈해야 하느냐고 이이에게 의견을 물었던 것이다.

호발설(互發說)에 대한 성혼의 재론을 계기로 이이는 이황은 물론이요 서경덕(徐敬德)과 나흠순(羅欽順)에 대한 논평뿐 아니라, 경전의 본의와 송대 제유(諸儒)의 성리설을 집약적으로 논술해 나갔다. 이 논쟁은 이이에게 성리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리하고 심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후기의 저작인 『성학집요』 속의 성리설이나 만년작인 「인심도심설」의 내용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다.

이이는 선배인 이황의 이원적 이기론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황이 이기를 그처럼 분열적 대립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그 자신이 잇단 사화를 겪으며 당시의 사회정치적 혼란과 부조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던 데 연유한다. 그는 개인과 집단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가 공의(公義)와 사리(私利)의 분별이 명확하지 못한 데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그가 천리와 인욕, 인심과 도심, 사단과 칠정, 그리고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을 대립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자각의 반영이다.

이황에게 이발(理發)과 기발(氣發), 사단과 칠정, 그리고 도심과 인심은 각기 순수한 정신적 가치와 신체적·물질적 욕구의 두 방향을 의미하였다. 그는 이기가 왕신관계(王臣關係)에 있으며, 인심은 항상 도심의 명령을 순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러한 관계가 전도되면 개인적으로는 도덕성의 방기를, 그리고 사회적으로는 윤리의 파멸과 정치의 타락을 초래하게 된다. 따라서 그는 일체의 작위의 근원은 마음의 위미지간(危微之間)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혼탁한 정치현실을 떠나 학문을 닦음으로써 ‘입언수후(立言垂後)’하여 도(道)를 전해주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았다.

이에 비해 이이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1565년 이후로 사림이 다시 복귀하게 되면서 사회적 상황을 개선하고 민생의 문제를 해결하며 국맥을 바로잡을 수 있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이이는 현실의 개선 그 자체에 진리성을 찾았다. 그가 이기를 불상잡(不相雜)의 대립이 아니라 불상리(不相離)의 묘(妙)에서 파악하는 것도 이 같은 낙관을 반영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이의 사칠론이나 인심도심설에 대한 해석도 이황의 이원적인 논의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칠정을 형기(形氣)에 속한 것으로만 보지 않고 본연지성 또한 기질지성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와 기는 논리적으로 구별하는 것이지, 사실적으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이에게 기란 단순히 혈기지기(血氣之氣)로서 타락의 가능성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기는 물질적인 것, 감성적인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 심령이나 이성까지도 포괄한다. 여기서 기는 본연지성을 엄폐(掩蔽)하는 것일 뿐 아니라, 본연지성을 드러나게도 하고 나아가 회복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이이는 “인심도심이 다 기의 발이요, 기에 있어 본연지리(本然之理)를 순(順)한다면 기가 본시 본연지기(本然之氣)이다.”라고 하며, “기의 청명여부(聽命與否)는 다 기의 소위(所爲)이니, 호발이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인심도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심은 ‘구체(口體)’를 위한 것으로서 그리고 도심은 ‘도의(道義)’를 위한 것으로서 서로 구별된다. 그러나 그는 이황의 주장처럼 하나는 기발, 하나는 이발로 서로 다른 본질과 근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하나의 심이 “단지 발하는 곳에 있어서 이단(二端)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인심은 성현이라도 면할 수 없으며, “먹을 때 먹고 입을 때 입는 것”은 바로 천리인 것이다. 이이는 인심이라 해도 그것이 알맞게 조절된 상태에서는 “인심 또한 도심이 된다.”고 하였다.

흔히 서경덕은 물론이요 이이까지도 ‘주기론(主氣論)’이라 하여 학문적으로 연관시켜 보는 경향이 있다. 서경덕과 이이는 다 같이 기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기의 불멸성, 능동성을 강조해 기의 면을 전폭적으로 긍정한 점에서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이이는 서경덕이 이기의 불리(不離)에 대한 이해는 깊고 투철하지만, 그 위에 뚜렷이 극본궁원(極本窮源)하는 이(理)의 면이 있음을 몰랐다고 비판했다. 서경덕이나 송대의 장재(張載)가 기에 치우치고 이기를 혼동해 성현의 뜻에 묘계(妙契)치 못하였다고 지적했다.

이이는 서경덕의 유기론적(唯氣論的) 입장에 대해 ‘이통기국(理通氣局)’을 모르는 소치라 하여 ‘한 모퉁이를 본 사람(見一隅者)’라 폄하했다. 이이 또한 이기지묘(理氣之妙)를 말하지만 그는 서경덕처럼 구극적(究極的) 존재를 태허지기(太虛之氣)로 보지 않고, 태극지리(太極之理)로 이해한다.

이이는 이황처럼 이와 기를 엄격하게 구별하고, 이가 기에 우월하다는 이우위설(理優位說)을 주장했다. 이와 기는 결코 혼동할 수 없는 것이며, 이는 기의 추뉴(樞紐)요 근저(根柢)요 주재(主宰)라는 것이다. 이의 본체는 통일적 원리이지만 그것은 사사물물에서 유행하는 것이요 만유(萬有)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황이 이와 기가 각각 실질적 동력으로 발용한다는 호발설을 주창한 데 대해, 이이는 이기는 이합과 선후가 없다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했다. 이이의 견해는 처음부터 이기를 이원적으로 파악하는 이황과 달리 물질적이든 정신적이든 현상 그 자체의 소이연으로서 이를 말하는 까닭에 이발(理發)이 따로 있을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이는 서경덕의 주기론에 대해서는 ‘이통기국설’로, 그리고 이황의 이기이원적 경향에 대해서는 ‘기발이승일도설’로 대응했다. 서경덕은 실재하는 기의 생성변화를 떠나서 별도로 묘(妙)를 말하는 것은 진리를 모르는 자라 하였다. 그러나 이황은 이와 달리 이(理)야말로 가장 알기 어려운 것으로서 이로 말미암아 모든 학문 도술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이황은 만유를 가능하게 하는 초월적 존재로서 이를 강조한 반면, 서경덕은 이를 기 자체와 작용상의 자율성 또는 내재율로 보아 기의 실재성과 사실성을 강조하였다. 서경덕은 유기론자로서 기를 중시하고, 이황은 이우위설을 논해 이의 구극성(究極性)을 강조하였다. 서경덕과 이황은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면서도 이와 같이 매우 대조적인 견해를 견지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이는 이의 세계와 기의 영역을 완전히 긍정하여 포괄하면서, 동시에 양면을 아울러 지양시켰다. 이이는 기의 사실성과 이의 초월성을 체인(體認: 충분히 납득함)해 양자를 불리의 관계에서 파악하면서 ‘이기지묘’를 강조했다. 이이는 이기의 묘처(妙處)야말로 알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설명하기도 어렵다고 하였다. 이이는 태극과 음양, 이와 기의 관계는 일이이(一而二)요 이이일(二而一)이라는 기본 인식을 바탕으로 그의 이론을 대략 다음과 같이 집약하였다.

“전훈(前訓)을 고찰하면 이기는 일(一)이면서 이(二)요, 이(二)이면서 일(一)이다. 이기가 혼연무간해 원래 떨어지지 않으므로 정자는 ‘기즉도(器卽道)요 도즉기(道卽器)’라 했고, 떨어지지 않을지라도 혼연한 가운데 섞이지 않아서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주자는 ‘이는 스스로 이요, 기는 스스로 기’라고 한 것이다. 이 두 설을 종합해 깊이 생각하면 이기지묘를 거의 알 수 있으리라. 그 대강을 말하면 이는 무형하고 기는 유형하다. 그러므로 이는 통(通)하고 기는 국(局)한다. 이는 무위하고 기는 유위하므로, 기는 발(發)하고 이는 승(乘)한다. 무형무위하면서 유형유위한 것의 주(主)인 것은 이이며, 유형유위하면서 무형무위한 것의 기(器)인 것은 기이다(聖學輯要).”

이이의 이통기국과 기발이승일도설은 보편적 원리와 특수한 사실을 상호관련 하에 파악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사사물물을 관통하고 있으며, 본연지리는 스스로의 보편성을 가지는 것이지만, 변화하는 사실과 관련한 유행지리(流行之理)를 떠나서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보편적 원리가 사사물물의 개별적 사실을 관통하고 있으며, 또한 구체적인 변화의 상을 떠나서는 추구할 수 없다는 논리로서, 성리와 실사가 혼융무간한 관계임을 통찰한 결과이다.

또한, 이이는 이른바 의(義)와 이(利)를 구별해 이원화하는 사고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의리(義理)와 실리(實利)를 불가리(不可離)의 관계에서 보고 있다. 그는 「시무칠조책(時務七條策)」에서 “도(道)의 병립할 수 없는 것은 시(是)와 비(非)이며, 사(事)의 함께 할 수 없는 것은 이(利)와 해(害)이다. 한갓 이해가 급하다고 하여 시비의 소재를 불고(不顧)한다면 제사지의(制事之宜)에서 어긋난다. 또한 시비를 생각해 이해의 소재를 살피지 않는다면 응변지권(應變之權)에서 어긋난다. …… 권(權)에는 정규(定規)가 없으니 중(中)을 얻음이 귀하고, 의(義)에는 상제(常制)가 없나니 의(宜)에 합함이 중하다. 중을 얻고 의에 합하면, 즉 시(是)와 이(利)가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진실로 국가를 평안하게 하고 민중에게 이로우면 다 행할 수 있는 일이요, 나라를 평안하게 하지 못하고 민중을 보호하지 못하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옳고 그름을 가르는 규범의 문제와 이해관계를 따지는 현실 문제가 ‘득중(得中)’, ‘합의(合宜)’함으로써, 보국과 안민이라는 차원에서 시(是)와 이(利)의 조화라는 하나의 사실로 지양됨을 볼 수 있다. 이이는 시대에 따라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 각기 다르다고 보았다. 그는 시대를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그리고 ‘경장(更張)’의 과정으로 나누어 논했으며, 당시를 경장기라고 보았다.

이이는 「동호문답」에서 가장 큰 폐법으로 다섯 가지를 들어 설명하였다. 그것은 모두 민생에 관계되는 것으로서, ① 일가절린(一家切隣)의 폐, ② 진상번중(進上煩重)의 폐, ③ 공물방납(貢物防納)의 폐, ④ 역사불균(役事不均)의 폐, ⑤ 이서주구(吏胥誅求)의 폐를 꼽았다. 이러한 그의 지적은 당시의 시대상과 민중의 질고(疾苦)를 가장 잘 나타낸 것이다.

또한, 그는 국세조사와 같은 전국적인 규모의 조사를 실시해 실정에 알맞게 폐법을 개혁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밖에도 이이는 「만언봉사」·『성학집요』 및 수많은 상소문을 통해 정치·경제·문교·국방 등에 가장 필요한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더 나아가 이이는 국정을 도모함에 있어서도 개인이나 일부 지도층으로부터 하향식으로 수행될 것이 아니라, 언로를 개방해 국민 모두가 말할 수 있게 하고, 위정자는 아래로부터의 중지(衆智)를 모아야 한다고 보았다. 조광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이에게 언로의 개색(開塞)은 국가 흥망에 관계된 중대한 일로서 강조되었다. 공론(公論)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국민의 정당한 일반 의사가 곧 국시(國是)가 된다고 지적하면서, 언로의 개방성과 여론의 중요성을 피력했다.

또한, 이이는 경제사(經濟司)의 창설을 제의하면서 단지 기성 관료가 아니라, 시무를 밝게 알고 국사를 염려하는 사류로서 윤리성과 합리성을 겸비한 최고의 지성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렇듯 의리와 실리, 이념과 현실의 통합적 구상은 후기에 한국의 의리학과 실학으로 전개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도 조선 중기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 전개에서 이이의 성리설이 끼친 영향을 깊이 관찰해야 한다. 그의 성리사상은 오늘날에도 유심과 유물, 주체와 상황, 그리고 현실과 이상의 괴리로부터 양자의 조화와 발전을 도모하는 데에 새로운 방향을 던져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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