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 왕후 윤씨와 조두대(曹豆大)   작성일자; 2012.08.14.화요일,맑음

 

정희왕후 윤씨는 세조의 부인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한 왕후다.

세조가 죽은뒤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해양대군)은 겨우 16살의 나이로 죽자,

예종의 큰아들이 아니라 세조의 첫째 아들 의경 세자의 둘째 아들인 13살의 성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에 정희 왕후는 신숙주를 비롯한 조정의 중신들의 중론에 의해서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희 왕후는 정치 감각은 뛰어났으나 한문을 알지 못하는 까막눈이었다.

조선의 행정 문서는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어 한문을 모르는 정희 왕후로써는 여간 어려움이 아니었다.

당시 궁에서 한문을 잘 아는 여성2명이 있었는데,

한 명은 성종의 생모이자 정희대비의 큰며느리인 수빈 한씨(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였고,

다른 한 명은 조두대라는 여종이었다.

큰며느리 수빈 한씨는 한문을 잘 안다는 이유로 수렴청정 적격자로 추천 되기까지 됐지만 성사 되지 않았고,

이에 따라 정희대비가 믿고 쓸 수 있는 측근은 몸종인 조두대라는 여종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바로 숨은 실세인 '조두대' 인 것이다.

 

그로인해 조선의 모든 문건은 실세인 조두대를 거처야 하였으며,

정희 왕후의 정치 감각이 뛰어 난 것이 아니라 실상은 조두대의 정치 감각이 뛰어 난 것이다.

조두대는 자신의 조카를 이용해 각종 이권에 개입해 막대한 부를 형성하였다.

궁에서의 조두대에 대한 잡음이 끊이지 안했고 그럴수록 정희 왕후의 입지가 좁아질수 밖에 없었다.

결국 정희 왕후는 수렴청정에서 물러났으나 정희왕후가 죽을때 까지 조두대의 권력은 줄지 않았다.

 

정희 대비 이후를 대비한 조두대는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성종의 부인)의 신임 조차 얻었고,

그의 권력은 제10대인 연산군 까지 이어졌다.

조선시대 여종의 신분은 천민이었다.

그런 조두대가 정희대비와 함께 권력구조의 정점에 자리했다는 사실 자체가 역사적이었다.

나아가 조두대가 정희대비의 측근이 된 사연 역시 역사적이었다.

 

원래 조두대는 세종의 다섯번째 아들인 광평대군의 여종이었다.

세종 7년(1425)에 태어난 광평대군은 12세 되던 해에 신자수의 딸과 혼인해 출궁했다.

그 직후 세종은 광평대군을 무안군 이방번(태종에게 살해당함)을 후사로 삼아 제사를 받들게 했다.

무안군의 혼령을 위로하고 그의 미망인 왕씨를 봉양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부인 신씨와 함께 양모 왕씨를 모시고 살던 광평대군이 20세 되던 해 7월에,

첫째 아들을 본 후 5개월만인 12월에 젊은 나이에 갑자기 광평대군이 죽자

충격을 받은 부인 신씨는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버렸다.

죽은 아들과  출가해 버린 며느리를 보면서 세종은 손자를 살려야 했다.

이 손자가 바로 영순군(永順君)이다.

세종대왕의 손자로서 깊은 사랑을 받았으며 단종과도 가깝게 지냈고,

세조 때에는 왕실의 최고위직에도 제수되었지만 성종 2년인 1470년 27세의 나이로로 죽었다.

핏덩이 때부터 영순군을 돌보며 키운 사람은 사실상 유모와 몸종이었다.

영순군의 유모는 홍씨라는 여성이었고 조두대는 바로 유모 홍씨의 몸종이었다.

조두대는 세종 때 영순군을 시중들기 위해 처음 입궁했다.

이후 영순군은 출궁했지만 조두대는 궁중에 남아 궁녀가 되었다.

한문에 능통했을 뿐만 아니라 영리했기 때문이었다.

세종,문종,단종,세조,예종 대에 걸쳐 궁녀 조두대는 영순군과 궁중을 이어주는 끈이기도 했다.

세조는 그 어느 국왕 보다도 조두대를 신임하고 중용했다.부왕 세종의 유언 때문이었다.

세조는 조카 영순군을 친아들처럼 애지중지했다.

그 연장선상에서 핏덩이 영순군을 길러준 조두대를 신임하고 중용했던 것이다.

이런 인연을 중시한 정희대비는 세조 사후에 조두대를 더더욱 신임하고 중용해

국가 권력 구조의 정점에 올려 놓기까지 했다.

 

정희대비의 수렴청정 기간 중 조두대의 공식 직함은 ‘전언(典言;정희대비의 말씀을 관장하는 궁녀’라는 뜻)이었다.

전언 조대두는 한문 뿐 만 아니라 정치 감각도 뛰어났다.

재상 이철견(정희대비의 조카 즉 정희대비의 여동생 아들)의 수양녀였다.

조두대는 정희 대비에게 손녀나 마찬가지 존재였다.

조두대는 정희대비는 물론 인수대비와도 깊은 관계를 유지했다.

조두대는 분명 역사와 고사에 두루 능통했다.

당시 궁중에서 여성의 몸으로 이 정도의 식견과 한문 실력을 가진 인물은 인수대비와 조두대 두 명뿐이었다.

수렴청정을 하는 정희대비의 손녀 같은 딸이자 대비의 말씀까지 관장하는 궁녀일 뿐만 아니라

국왕 성종의 생모인 인수대비와도 밀접한 조두대의 영향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당연히 조두대의 영향력에 빌붙으려는 자들이 줄을 섰고,

비공식적인 줄을 이용해 절대 권력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내알(內謁;안에서 은밀하게 자행되는 알현과 청탁)이었다. 

내알에 빌붙으려는 자들을 이용해 거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자신은 궁중에 있었으므로 직접 나서지 않고 대신 조카 조복중을 내세웠다.

천민 신분의 조복중은 고모 조두대를 배경으로 국내외의 각종 이권에 개입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조복중은 면포를 바치는 사업을 독점적으로 하여 재벌이 되었던 것이다.

정희대비의 수렴청정과 더불어 조두대의 정치,경제,사회적 영향력이 격증하면서 온갖 구설도 격증했다. 

 

런 상황에서 성종 6년(1475) 11월 익명서 사건이 발생했다.

조정 중신들이 작당하여 역모를 도모한다는 내용의 괴문서가 승정원 문에 붙었던 것이다.

익명서는 묻지 않고 바로 소각하는 것이 당시 관행이었지만,

이미 소문이 널리 퍼졌고 이름이 거론된 조정 중신들은 사퇴 의사를 밝혔다.

성종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큰 상을 내걸어 주모자를 색출하려 했다.

만약 주모자가 자수하면 면죄 해주고,

모의에 참여한 자가 고발하면 천인은 면천하며 양인은 3품 관직을 내리고,

주모자를 체포 또는 고발하는 자도 같은 상을 내린다는 내용이었다.


12월10일,승정원에 친군위 권즙의 고발장이 접수되었다.

최개지라는 사람이 누군가와 노비 소송을 벌였는데,

그 누군가가 정희대비의 친정식구와 조두대에게 뇌물을 써서 이겼고 분개한 최개지가 괴문서를 붙였다는 내용이었다.

권즙은 이런 내용을 친척인 박윤형으로부터 들었는데 박윤형은 최개지에게서 직접 들었다고 했다.

이 고발장은 익명서 사건을 궁중 문제로 비화시켰다.

 

성종은 익명서에 거론된 조정 중신들의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주모자를 색출하려 한 것인데,

고발장의 내용은 엉뚱하게도 정희대비를 겨냥하였다.

정희대비의 친정과 측근 조두대가 뇌물을 받고 노비 소송을 왜곡 했다면

그것은 곧 그들이 내알을 통해 국정을 농단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익명서 사건은 주모자 색출에서

정희대비와 관련된 언급을 최초로 발설한 자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사건으로 비화했다.


의금부에서는 처음에 박윤형과 최개지를 체포하여 사실여부를 조사하였지만

박윤형은 그런 말을 권즙에게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고,

최개지 역시 그런 말을 박윤형에게 한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도리어 최개지는 그런 말을 한 사람은 박윤형이었다고 주장했다.

최개지와 박윤형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희대비와 관련된 언급을 최초로 발설한 자는 권즙이었고,

그 말을 들은 박윤형이 최개지에게 전달 했다는 추정이 가능했다.

그렇다면 권즙은 자신의 죄를 박윤형과 최개지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

먼저 고발장을 제출했다는 추정도 가능했다.

이렇게 되자 의금부는 다시 권즙을 체포해 조사했지만 그는 물론 사실무근이라 주장했다.

결국 정희대비와 관련된 언급을 최초로 한 자가 누군지는 오리무중에 빠져들었고,

도리어 그 발언의 진위여부가 논란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 논란은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따지는 논란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사가 진행되고 논란이 거세질수록 곤란해진 사람은 오히려 정희대비였다.

궁지에 몰린 정희대비는 12월13일 승정원에 다음과 같은 명령서를 내렸다.

“처음에 주상이 어리고 대신들이 나의 수렴청정을 요청하기에 나는 사양하지 못하였다.

그 후 나는 매사에 조심하고 노력했는데,지

금 최개지의 말에 ‘전언 조두대가 정희대비에게 아뢰지도 않고 제멋대로 판단하여 소송판결을 내렸다’는 내용까지 있다.

이것은 내가 수렴청정을 하기에 나타난 결과다.

정치는 부인의 일이 아니고 또 이제 주상이 총명하니 만기가 비록 번거롭다고 해도 어찌 결단하기 어렵겠는가?”

정희대비 스스로 모든 책임을 지고 수렴청정을 그만 두겠다는 내용이었다.

성종과 조정중신들은 만류했지만 정희대비의 강경한 고집으로 결국 철렴이 결정되었다.

성종 7년(1476)1월13일이었다.

이렇게 정희대비의 수렴청정 7년은 불명예스럽게 막을 내렸다.



돌이켜보면 정희대비의 불명예 퇴진은 사소하다면 사소한 익명서 사건이 발단이었다.

그리고 익명서의 발단은

정희대비의 친정과 측근 조두대의 국정 농단으로 최개지가 억울하게 패소했다고 하는 소송 사건이었다.

그런데 실제 최개지의 패소가 국정농단 때문인지,아니면 최개지 본인의 잘못 때문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정희대비가 철렴하면서 최개지 사건은 흐지부지되었고

정희대비의 친정과 조두대에 대한 조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최개지 사건에서 국정농단이 있었을 수도 있고 없었을 수도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최개지 사건에 등장하는 최개지 본인을 위시하여

권즙,박윤형 모두가 국정농단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비록 그런 말을 최초로 발설한 자가 누구인지를 놓고 서로 다른 주장을 펼쳤지만

국정농단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이들의 인식은 바로 당시 백성의 여론이었다.

물론 이런 여론은 문자를 모르는 정희대비를 대신하는 조두대를 곡해해서 나타난 것일 수도 있고

실제 조두대의 국정농단이 있었기에 나타난 것일 수도 있다.

진실이 무엇이든 정희대비가 수렴청정을 시행하면서 조두대를 측근으로 두는 한 이런 여론은 사라질 수 없었다.

그런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조두대를 물리치든가 아니면 수렴청정을 그만두든가 둘 중 하나였다.

정희대비는 조두대를 내치는 대신 자신의 수렴청정을 포기했다.

권력의 속성상 그 맛을 본 사람이 자발적으로 권력을 내려놓기가 거의 불가능함을 동서고금의 역사는 웅변한다.

그런데 정희대비는 자발적으로 불명예 퇴진을 택했다.

성종에 대한 믿음도 믿음이지만 조두대를 희생시키지 않기 위함이었다.

그런 면에서 조두대와 영순군에 대한 정희대비의 자비심은 가히 바다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성종 14년(1483) 정희대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두대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비록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은 끝났지만 왕실 최고 어른으로서의 영향력은 여전했고

조두대에 대한 신임 역시 여전했기 때문이다.

정희대비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조두대는 인수대비의 강력한 신임을 확보함으로써 정치적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이른바 변처녕 사건이었다.

성종 22년(1491) 겨울, 명나라 황태자가 조만간 책봉되리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성종은 이를 축하하기 위해 진하사를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성종 23년 봄에 진하 정사에 정괄,부사에 변처녕이 임명되었다.

당시 조선의 부상대고는 북경 무역을 통해 큰 이익을 남겼다.

조선에서 북경으로 갈 때는 인삼을 가져다 팔아 이익을 남겼고,

올 때는 또 비단이나 고급 약재를 가져와서 이익을 남겼다.

하지만 북경 무역을 위해서는 사신 행렬에 합류해야만 가능했다.

이에 따라 명나라 사행이 결정되면 조선을 대표하는 부상대고 사이에 격렬한 경쟁이 벌어졌다.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부상대고는 고귀지와 조복중이었다.

고귀지는 정희대비의 친정인 파평 윤씨에 줄을 댄 부상대고였고,조복중은 조두대의 조카였다.

진하 부사에 임명된 변처녕은 처음에 고귀지의 아버지 고윤량을 수행군관 명목으로 사신 행렬에 합류시켰다.

본래 수행군관은 사신을 호위하기 위한 무관이기에 장사꾼이 할 수 없는 임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귀지의 아버지는 돈과 인맥을 동원해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자리가 갑자기 조복중으로 교체되었다.

당연히 고귀지는 의심했다.

조복중이 자신보다 더 많은 뇌물을 썼거나 아니면 조두대를 이용했을 것이라 짐작했던 것이다.

분개한 고귀지는 조복중을 찾아가 크게 따졌다.

싸움이 커져 결국 사헌부에 적발되었고 정치 문제로 비화되었다.

사헌부를 비롯한 삼사에서는 변처녕은 물론 고귀지와 조복중도 엄히 조사해 처벌할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의금부에서는 고귀지와 조복중을 체포해 조사했다.

그런데 당시 백성들 사이에는 “조복중은 분명 죄를 받지 않을 것이고 엉뚱한 나무들만 화를 당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배후인 조두대를 처벌하지 않는 한 조복중 처벌이 불가능하다는 여론이었다.

이에 따라 삼사에서는 조두대도 엄히 조사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여론의 예상대로 조두대에 대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조사 후, 진하부사 변처녕은 교체 되었을 뿐만 아니라 패가망신했다.

하지만 조복중은 멀쩡했다.

진하부사는 재상급인데 그런 변처녕도 패가 망신하는 마당에

천민인 조복중이 멀쩡했다는 것은 결국 조두대의 영향력이 그 정도로 막강했다는 반증이었다.

이에 사관은 이런 논평을 남겼다.

위 사건이 일어난 성종 23년은 이미 정희대비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럼에도 이런 일이 발생한 이유는 조두대의 내알이 여전히 강력했기 때문이다.

당시 조두대의 내알을 받아준 사람은 인수대비였다.



정희대비와 비교할 때 인수대비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우선 정희대비는 문자를 몰랐지만 인수대비는 문자를 알았다.

또 정희대비는 수렴청정을 했지만 인수대비는 그러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대비 사이에는 같은 점도 많았다.

가장 현저하게 드러나는 같은 점은 내알을 조장했다는 사실이었다.

정희대비의 경우 내알은 일면 불가피한 면이 있었다.

문자를 모르기에 수렴청정을 하면서 어쩔 수 없이 문자를 아는 조두대를 중용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인수대비는 문자를 잘 알았고 수렴청정을 하지도 않았다.

객관적인 면에서 볼 때 조두대를 측근으로 둘 이유는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인수대비는 왜 조두대를 측근에 두어 내알을 조장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시부모인 세조와 정희대비가 중용했기 때문이었다.

시부모가 쓰던 사람을 며느리 입장에서 매정하게 내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수대비는 정희대비와 마찬가지로 조두대에게 매우 자비로웠다.

인수대비는 아들인 성종이나 월산대군 그리고 손자인 연산군에게는

매정한 어머니 또는 할머니로 알려져 있지만 측근에게는 매우 자비로웠다.

특히 .조두대.와 .백어리니.라는 두 여성에게 그러했다.

원래 백어리니는 문종이 세자이던 시절 세자빈 권씨의 여종이었다.

그녀는 강선의 부인이었으며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총명했다.

 세자빈 권씨는 훗날의 경혜 공주를 출산한 후 총명한 백씨를 유모로 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계유정난 이후 경혜공주의 남편 영양위 정종이 역모로 몰려 죽은 후

백씨는 수양대군에게로 넘어갔다.

수양대군은 총명한 백씨를 큰아들에게 주었고,

그 인연으로 백씨는 훗날 성종이 되는 자산군의 유모가 되었다.

자산군은 백씨를 마치 생모처럼 존중했으며,훗날 인수대비가 되는 수빈 한씨 역시 백씨를 극진히 신임했다.

이 같은 인연으로 백씨는 성종이 즉위 한 후 봉보 부인의 자격으로 입궁했다.

이처럼 인수대비와 백씨의 인연은 정희대비와 조두대의 인연 못지 않게 구구절절하다.

뿐만 아니라 정희대비가 조두대를 측근으로 중용했듯이 인수대비 역시 백씨를 측근으로 중용했다.

나아가 정희대비 사후에는 조두대 역시 측근으로 중용했다.

결과적으로 정희대비 사후에는 궁중 내알이 기왕의 조두대 한 명에서 백씨까지 더하여 두 명으로 늘었다.

당연히 궁중 내알에 빌붙으려는 자들은 조두대와 백씨 두 명에게 줄을 섰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앞에 나왔던 변처녕과 이공이라는 인물이었다.

 

이공은 세종대의 유명한 역법학자 이순지의 아들인데,

실록에는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사론이 여러 차례 실려 있다.

예컨대 이런 사론이 대표적이다.


“처음에 이공이 봉보부인 백씨의 조카딸을 첩으로 삼고 백씨 부부를 부모처럼 섬겼다.

순천부사가 되어서는 몰래 뇌물을 들여 백씨와 깊이 사귀었다.

임기가 만료되어 곧 승지가 되었다가 일 때문에 파직되었는데 또 얼마 안 되어 특별히 가선대부에 올라 호조판서가 되었다.

백씨가 아들을 장가들이던 날 이공이 백씨의 집안 일을 마치 늙은 종처럼 맡아 보았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다 비루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공은 권세와 이익을 달게 여겨 스스로 좋은 계책이라고 생각하였다.

안주 목사가 되어서는 더욱 부지런히 섬겨 뇌물을 땅으로 나르고 바다로 날라 바쳤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보면 정희대비나 인수대비는 조두대와 백씨에게 바다처럼 자비로웠다.

그러나 국가적으로 볼 때 그 자비심이 공식적인 행정조직을 무력화하고 내알을 조장했으며,

성종의 치세를 불명예 스럽게 만들었다.

이런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 유교 지식인들이 제시한 대표적인 처방이'대학연의'의 ‘엄내치’였다.

궁중의 여성이나 환관이 정치에 간여하지 못하도록 엄히 하는 것,

즉 내알을 방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엄내치’였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니,엄내치에 소홀하여 비극에 빠진 권력자들이 헤아릴 수 없다.

 

□ 성종과 폐비 윤씨(숙의 윤씨;淑儀 尹氏          2012.08.14.화요일,맑음

조선의 9대 임금인 성종의 계비이자 둘째 부인이다.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윤기무와 고령신씨 사이의 딸)는 질투심이 많은 여자였다.

여자 관계가 복잡한 남편인 성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러할 수 밖에 없었다.

성종이 처소인 교태전에 들르지 않고 후궁들의 처소만 찾자,

질투하여 후궁들을  잡아다가 추궁,취조하는 등의 행위를 일삼다 성종의 눈밖에 났는데,

성종과 말싸움 중 성종의 얼굴에 손톱 자국을 낸 것이 화근이되어

연산군의 할머니(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분노를 샀다 폐위가 되었다.

성종의 후궁인 정귀인,엄귀인들이 인수대비를 찾아가 폐위를 부추기기도 하였다.

 

1473년에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의 신분으로  있다가 

그 이듬해인 1974년 공혜왕후가 죽자

공혜왕후의 3년상을 마친 1476년 음력8월8일(양력8월27일)에 숙의였던 윤씨를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로 책봉된지 3개월만에 연산군을 낳았고,

왕비로 책봉된지 3년만인 1479년.

성종의 얼굴에 상처를 내어 자신의 생일 바로 다음날인 6월2일(양력6월21일)폐비가 된 것이다.

폐비된 이후 조정에서는 

폐비 윤씨를 다시 왕비로 복위시켜야 된다는 상소와 시위로

많은 조정 대신들이 파직 당하거나 유배를 가게 되었다.

 

1479년 연산군의 생모인 왕비 윤씨가 폐위되자

인수대비(수양대군의 맏며느리)는 어린 연산군이 더 자라서 어미 얼굴을 기억할까봐

1473년에 숙의로 봉해진 파평윤씨인 정현왕후를 1480년11월에 성종의 왕비로 책봉되었다.

버지는 우의정 영원부원군 호다.
정현왕후는 진성대군(11대 중종;중종 반정)과 신숙공주를 낳았는데,공주는 일찍 죽었다.

 

폐비가 된지 3년 후 폐비 윤씨는 1482년 8월16일(양력8월29일) 사사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 28세(생졸;1455년7월15일(음력 윤6월1일)~1482년8월29일(음력8월16일)였다.

 

성종은 폐비 윤씨를 경기도 장단에 매장하였고

폐비 윤씨의 묘를 '윤씨지묘'라 비석을 세우고, 제관 2명을 보내 기일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되,

묘의 이름을 영구히 고치지 못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장지가 좋지않아 신하들의 건의로,

성종9년 1488년에 지금의 동대문구 회기동 경희 의료원 자리로 이장 하였으며,

 

연산군이 즉위 한 후 

폐비 윤씨의 묘가 회묘에서 효사묘로 바꿨다가 다시 회릉으로 격상시켰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윤씨를 복위 시켜야 된다고 하여 유배를 갔거나 파직당한 대신들은 복위되었으나

윤씨 폐위에 앞장 섰거나 복위에 동참하지 않았던 대신들은 무자비한 보복을 당했다.

대표적 인물로 한명회,한치형,윤필상 등이다.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 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어 폐비 윤씨 올린 관작과 존호는 모두 삭탈되었고, 회릉 역시 회묘로 격하되었다.

폐비 윤씨는 제헌왕후로 추존되었으나  중종 반정 이후 삭탈되면서 죽을 당시의 폐서인 신분으로 돌아갔다.

 

그 뒤 무덤은 현 위치인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로 이장하였으며,서삼릉 내에 위치한 회묘다.

회묘 근처에는 후궁 묘역이 있으며, 그 중 윤씨의 묘소는 봉분이 크고 석물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는 지명이 되어 오늘날의 서울 특별시 동대문구 회기동의 지명 유래가 되었다.

왕비의 예에 따라 능으로 개장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화려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서삼릉(西三陵)은

 경기도 고양시 덕댱구 원당동에 있는 희릉,효릉,예릉의 세 능(三陵)이다.

 1970년5월26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200호로 지정되었고 유네스코 세계 유산이다.

 

 서삼릉은

 중종 계비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이 처음 들어선 이후

 인종과 인종비 인성왕후의 무덤인 효릉,

 철종과 철종비 철인왕후의 무덤인 예릉 등 3기의 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양의 서쪽에 있다 하여 '서삼릉'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삼릉에는 3기의 왕릉과 3기의 원과 1묘,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7기,태실54기가 자리 잡고 있다.

 

 1665년(인조 23) 소현세자가 죽자 소현세자를 이곳에 안장하고 소현묘라고 칭하였으나,

 1870(고종 7)에는 소경원으로 개호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조선 왕실의 태실,왕자묘,후궁묘,공·옹주묘가 현재의 위치로 집결되었으며,

 해방 이후에 명종 후궁 경빈 이씨의 묘 외 6기의 묘를 옮겨왔다.

  1944년에는 정조의 장남 문효 세자의 묘인 효창원이,

  1949년에는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장남 의소세손의 묘 의령원이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1969년에는 성종 폐비 윤씨의 회묘가 서삼릉으로 옮겨왔다.

  서삼릉 능역에는 의친왕과 의친왕의 모친 덕수 장씨의 묘도 있었으나 1996년 의친왕묘가,

   2009년엔 귀인 장씨(의친왕의 모친)의 묘가 서삼릉에서 홍유릉 경역으로 이장하여,

  서삼릉은 현재의 3릉 3원 1묘 및 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7기,태실 54기로 구성 되어있다.

□ 조선왕 제9대 성종 이야기        2014.04.20.일요일.맑음

성종; 이 혈(娎),조선 제 9대 세조의 큰아들 덕종의 둘째 아들.

생졸; 1457(세조 3)~1494(성종 25)

재위기간; 1469~1494

능;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선릉(宣陵)


조부; 세조

조모; 정희왕후 윤씨

부; 의경세자(덕종德宗)

모; 소혜왕후(한확의 딸)

      월산대군(1445-1489)은 조선 전기의 왕족, 시인이다.

         이름은 정(婷)이다.

         덕종에 추존된 의경세자의 장남이었으나 월산군에 책봉되었다가 아버지 사후, 1470년 대군으로 진봉

         되었다. 아버지 의경세자가 1470년 의경왕에 추존되고 1475년 회간대왕에 추존되고 덕종의 묘호를

         받았지만, 그는 세자에 추존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북촌에다 별장을 지어놓고 그 곳에서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자연 속에 묻혀 일생을 보냈다.

         친조카인 중종의 계비장경왕후 윤씨의 친정아버지 유녀필은 그의 처제의 남편으로 동서간이 되는데,

         다시 윤여필의 딸 중 1명이 그의 서자 덕풍군 이이와 결혼하여 이중 겹사돈이 되었다.

 

         세조 유의 장손으로, 덕종에 추존된 의경세자 이장의 맏아들로 성종의 친형이며, 세조의 첫손주이자

         장손이다. 어릴 때에는 할아버지인 세조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으며 문장에도 뛰어나 중국에까지

         그의 시가 알려졌다. 1457년 아버지 의경세자가 갑자기 사망하였으나 조부 세조에 의해 궁중에서

          양육되었다.

          1460년(세조 6) 정의 대부(正義大夫) 월산군(月山君)에 임명되고, 1462년 중의대부가 되었으며

          1466년 병조창판 박충선의 딸과 혼례를 올렸다.

          영순군 이부의 집에서 친영하였고, 부인 박씨는 상원군 부인에 봉작되었다가 뒤에 승평부부인으로

          개봉되었다. 예종 즉위 후 1466년(예종 즉위) 10월8일 현록대부(顯祿大夫)에 가자되었다.

           그해 11월 예종이 갑자기 죽자 어려서부터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배제당하고 그의 동생 자을산군이

          성종으로 즉위하였다. 한때 한성을 떠나 전라도 깊은 산 속 절에 들어가 숨어지내있기도 했다 한다.

           1473년 되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집 뒤쪽에 풍월정을 지었고, 경기도 고양군의 북촌에다 별장을

           지어놓고 그 곳에서 시를 짓고 책을 읽으며 자연 속에 묻혀 일생을 보냈다.

           예종의 사후 장손인 자신 대신 동생인 자을산군이 왕위를 계승했으나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불평불만을 나타낼 것을 내다본 정희왕후의 지시로 그는 반발 무마용으로 특별히

           좌리공신 책록된다. 성종실록의 그의 졸기에 의하면 그후 한때 문소전 제조직과 종부시 제조직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한다.

            1476년 조선에 사신으로 온 명나라 호부시랑에게 시를 지어주었다.

            1483년 봄 정희왕후와 인수대비, 인혜왕대비가 함께 온양온천에 행차할 때 호종하여 다녀왔으며,

            이때 전주에 있는 태조의 영정에 참배하였다.

            그의 시들 중 일부는 명나라에도 소개되어 중국의 '전우산열조시집'에도 일부 수록되었다.

            1488년10월 부터 11월 어머니 인수대비의 병간호를 하다가 과로로 11월부터 2개월간 병석에

            누웠다가 1489년에 사망하였다.

      태안군주(여)

      잘산군(자산군;제9대 성종)

      삼촌;해양대군(제8대 예종)

      고모;숙의 공주

왕비 공혜왕후 한씨(영의정 한명회의 네째딸; 생졸 세조 2~1474 성종 5)

계비 정현왕후 윤씨(자순대비)

            성종의 계비인 자순대비는 영원부원군 평정공 윤호와 연안부부인 전씨의 딸로

            1462년에 태어나 1530년에 69세로 사망하였다.

            자순대비는 1473년 아버지가 병조 참지로 있을 당시 숙의로 뽑혀 입궁했고,

            1479년 중전윤씨(연산군의 어머니)의 폐위로 새로이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가 친정 아버지 윤호와 육촌 윤필상 등과 함께 폐비 윤씨 폐출 당시 17세였던 정현왕후가 윤씨를

            폐출하는 데 일조했다.

            진성대군(중종)과 여러 공주들을 낳았는데,공주들은 일찍 죽었다.1480년에 성종의 세 번째 왕비로

            책봉되었다.이후 폐비윤씨 소생 연산군은 그를 생모로 알고 자라다가,1493년 성종의 묘비명과

            행장을 쓸때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을 알게 되면서 갑자사화를 통해 사림파를 학살하는 원인을

            제공했다.1506년 중종 반정때 반정의 주도 세력이 진성대군(중종)을 왕위에 세울 것을 주청하니

            이를 승낙하였다.중종 반정시 중종을 왕으로 세우는 것을 승낙한 인물로 유명하다.

            능은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선정릉 내에 위치한 선릉으로, 남편 성종과 동원이강의 형태로 같이

            묻혀있다.

        진성대군(성종의 둘째 아들;제11대 중종)

        순숙공주(요절)

        신숙공주(요절)

        3녀(요절)

        4녀(요절)

숙의 폐비 윤씨

       연산군(성종의 장남;10대 연산군)

영빈 김씨  무산군

귀인 정씨 

       안양군 봉안군(두 형제 연산군에 의해 죽음)

       정혜옹주(연산군에 의해 직위 폐함)

귀인 권씨  전성군

귀인 엄씨(엄소용) 공산옹주(연산군에 의해 직위 폐함)

숙의 하씨  계성군

숙의 홍씨  완원군 회산군 건성군 억양군 거명군 은천군 양원군 혜속옹주 정순옹주 정숙옹주

숙의 김씨  희숙옹주 경숙옹주 희정옹주

숙의 김씨  이성군 영산군 경순옹주

숙용 권씨  경희옹주

  

성종

       

성종은 세조의 큰아들인 덕종의 둘째아들이며,계비는 우의정 윤호의 딸 정현왕후다.

1461년(세조 7) 자산군(者山君)에 봉해졌다가 1468년 잘산군(乽山君)으로 개봉(改封)되었다.

이해 세조가 죽고 예종이 19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자 세조의 즉위 때 공을 세운 신숙주·정인지·한명회 등의 훈신들이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정치적 지위가 급상승한 남이 세력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이에 따라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가운데, 1469년 예종이 죽자 병약한 형 월산군을 대신하여 13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7년간 정희대비(세조의 비)의 수렴청정을 받아 독자적으로 정국을 운영하지 못했으며, 훈신세력이 모든 군국사무를 주도했다. 훈신세력은 성종이 즉위하던 해 가장 위협적인 정적이던 구성군 준(浚)(부;세종의 4남 임영대군 구(璆))를 1463년 구성군을 유배시킴으로써 권력을 더욱 안정시킬 수 있었다.

1476년(성종 7) 친정을 시작했으나 세조와 같은 전제권을 확립하지는 못했다.

이해 공혜왕후가 아들이 없이 죽자 윤기견의 딸 숙의윤씨를 왕비로 삼아 연산군을 얻었다.

그러나 윤씨의 투기가 매우 심해 왕의 얼굴에 상처를 입히는 사건까지 일어나자 1479년 윤씨를 폐위하고

1482년 사사했다.

성종은 친정을 시작하면서 신진사림세력을 등용하여 훈신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사림세력은 성종대에 이르러 훈구세력을 비판하면서 향사례·향음주례 보급운동과 두 의례에 입각한 유항소 재건운동을 통해 기존의 훈구세력에게 장악된 향촌질서를 성리학적 향촌질서로 재편하고, 나아가 중앙정계에 진출하여 그들의 이상이었던 도학정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사림세력의 정치적 지향은 성종의 왕권강화 노력과 많은 부분 일치했으므로, 성종대에는 김종직·김굉필·정여창·김일손·유호인 등의 사림이 정계에 진출하고 1488년 유향소가 부활됨에 따라 조선 중기 사림정치의 막을 열었다.
그러나 사림의 정계진출 및 급속한 성장은 훈구세력과의 필연적 마찰을 불러일으켜 연산군 때부터 시작된
4대 사화(무오사화(1498, 연산군 4)·갑자사화(1504, 연산군 10)·기묘사화(1519, 중종 14)·을사사화(1545, 명종 즉위)를 말한다로 이어졌으며 지방에서는 유향소의 지배권을 둘러싼 대립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성종은 재위 기간 동안 숭유억불의 정책을 더욱 굳건히 펴 나갔다. 조선왕조 통치체제의 기본방향을 제시하는 '경국대전'은 세조 때 건국초의 법전인 '경제육전'의 원전과 속전, 그리고 그 뒤의 법령을 종합하여 편찬되기 시작하여 원래 예종 때 반포될 예정이었으나 예종의 죽음으로 보류되었다.

성종은 즉위 이후 '경국대전'의 편찬사업을 이어받아 1471, 1474년 2차례의 수정을 거쳐 1485년 이를 최종적으로 완성·반포했다.

 이어 이극증 등에게 명하여 1492년 당시 사회 실정에 비추어 〈경국대전〉과 불일치를 보이는 부분을 보완,<대전속록>을 편찬하게 했다. 이로써 '경국대전체제'라고 불리는 조선 일대의 통치이념과 국가체제가 완성되었다.

한편 성종은 불교를 통제하기 위해 1471년 간경도감을 폐지했다.

이어 1469년 사족(士族) 부녀가 승려가 되는 것을 금지하고 1471년에는 도성 안에 있는 사찰을 도성 밖으로 철거했다.

1492년에는 도첩의 법을 중지시켰다. 이러한 억불정책으로 불교 및 사원세력은 세조대에 비해 위축되었다. 반면 유학을 장려하기 위해 1475년 존경각을 세워 왕실소장의 경서를 보관하여 열람하게 했으며 수차례에 걸쳐 성균관과 각도의 향교에 학전과 서적을 지급하고 유생들의 군역을 면제시켜 주었다.

특히 1466년 겸예문관제도(兼藝文館制度)를 확충하여 사령(辭令)을 제찬(製撰)하는 고유한 임무에 더하여 경연관(經筵官)·고제연구(古制硏究)·편찬사업 등 옛 집현전의 기능까지 겸하게 했다.

1478년에는 단순한 장서(藏書) 기관에 불과하던 홍문관을 예문관의 집현전적인 기능을 편입시켜 명실상부한 학문연구기관으로 개편했다.

이밖에도 유학의 진흥과 깊은 관련을 가지는 편찬사업에도 힘써 〈동국여지승람〉·〈동국통감〉·〈악학궤범〉·〈국조오례의〉 등을 간행했으며,

 1484년에는 갑진자(甲辰字) 30여 만 자를 주조하여 인쇄술을 발전시켰다.

조선의 수조권(收租權) 분급제도인 과전법은 1466년 현직관리에게만 과전을 지급하는 직전법으로 바뀌었다. 이에 관료들이 퇴직 후의 생활보장을 위해 현직에 있을 때 농민을 수탈하고 토지를 겸병하는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1470년 관수관급제를 실시했다. 그 내용은 국가가 농민으로부터 직접 조세를 거두어들인 다음 관리들에게 녹봉을 현물로 지급하는 것이었다. 관수관급제의 실시로 우리나라 토지제도의 한 축이 되었던 수조권적 토지지배가 소멸하게 된다. 한편 국방대책에도 힘을 기울여 윤필상(尹弼商)으로 하여금 1479년 압록강 이북의 건주야인(建州野人)의 본거지를 정벌하게 하고, 1491년에는 허종(許倧)을 도원수로 삼아 두만강 이북의 우디거 부락을 소탕했다.


 

예종과 인수대비   2012.05.06.일요일,맑음

인수대비(소혜왕후 한씨); 조선 초기 세자빈이자 덕종(추존왕)의 왕비다.  

생졸; 1437.10.07-1504.5.11

능;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경릉(敬陵)

 

 

1450년(문종 즉위년)에 수양대군의 큰아들인 도원군(의경세자,덕종)과 혼인하여 하였고

1455년(세조 즉위년)에 수양대군이 왕위로 즉위하자 맏며느리로서 세자빈이 되어 궁궐에 들어갔으나,

1457년(세조 3년)에 남편 의경세자가 20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어 사가로 물러났다.

1469년에 자신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성종)이 왕위에 등극하고

자신도 궁궐에 다시 들어가 왕비로 진봉   되었다가

1475년(성종6년) 왕대비에 올라 인수대비가 되었다.  

좌의정 지낸 한학과 홍씨 사이 여섯째 딸로 본관은 청주다.   

 

 

당시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한문과 유교 경전에 능통하여

'열녀''여교''명감''소학'등에서 발췌하여 내훈을 편찬하였다.

내훈은 조선시대 사대부 여인들의 수신서 이자 당시 여성 교육의 기본서가 되었다.

또한 그녀는불교 옹호론자로 불교 억불정책에 강력히 반발하였으며,

이 때문에 당시 조정의 신하들과 4차례의 격한 논쟁을 벌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금승법과 그녀가 추진한 봉선사 금자경 간행 작업이다.

 

 

인수대비는 연산군의 할머니로도 유명한데,

며느리 이자 연산군의 생모가 되는 폐비 윤씨가 왕비 시절 성종의 얼굴을 할퀴는 사건으로

내쫓기고 사사는 전적으로 할머니인 인수대비의 의지로 단행 되었기 때문이다.

 

 

1504년(연산군10년)봄,

연산군은 생모인 폐비 윤씨를 제헌왕후로 추숭했다.

이 과정에서 윤씨를 폐비하고 사사하는 데 개입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추방했는데,

인수대비는 당사자가 되므로 손자인 연산군과 갈등을 빚었다.

 

세조의 첫째 아들인 의경세자는 인수대비(한학의 딸)와 혼인하여 월산군과 자을산군(훗날 성종)을 낳았으나

일찍 세상을 하직하였으며,

동생 해양대군이 부친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조선의 8대왕인 예종이다.


예종은 불과 14개월이라는 짧은 재위기간 동안 왕위를 유지하다  29세로 죽은 비운의 왕이기도 하다.두 아들(인성,제안대군)을 두었으나 큰 어머님 (훗날 인수대비)와 당시 최고 권력자인 한 명회의 정치적 결탁으로 두 아들은 왕위를 잊지 못하고 대신 조카인 자을산군이 왕권을 잇게된다.

 

세조의 정변과 함께한 훈구 세력인 한명회,신숙주,정인지 등으로부터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으나,결과는 종친 이준과 이징옥의 난을 정벌하고  28세에 병조판서에 오른 남이 장군 등 훈구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신진 세력의 몰락과 본인의 사망으로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죽은 왕이기도 하다.

 

예종의 첫째 부인은 당시 실력자인 한명회의 딸(장순왕후 한씨;한명회의 셋째딸)로 이 둘의 결혼은 선친 세조와 한명회의 권력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나 첫째 부인이 일찍 사망하고 그 아들도 일찍 사망하여 세조가 죽기 바로 전에 둘째 부인 안순황후 한씨가 책봉되었다. 그의 아들이 제안대군이다. 한 명회는 딸과 손자를 잃어서 정치적으로 심한 타격을 받았으나,그 후 인수대비와 또다시 결탁하여 그의 딸을 성종의 부인(공혜왕후 한씨;한명회의 넷째딸)으로 다시 혼인시킴으로써 두 딸을 왕비로 만들었다.

 

남이의 옥사남 이는 16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27세에 이 징옥의 난을 정벌하여 세조 때 이미 병조판서를 지낼 정도의 출중한 무관이었다. 그리고 이 방원(태종)의 외손주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최고의 모사꾼인 유 자광의 음모에 의해 처참하게 죽은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한 명회를 비롯한 훈구 세력의 계략에 의해 남 이를 정치적으로 경쟁자라고 믿었던 예종이 자충수를 둔 결과라 하겠다. 세조가 살아 있었을 때에는 한 명회를 비롯한 구세력과 귀성군, 남 이 등의 신 세력간의 균형이 유지될 수 있었으나 세조 사후 구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했던 예종이 오히려 그 견제세력이 될 수 있었던 신진세력 가운데 중심 인물인 남 이를 오히려 제거하고 말았으며 결국 본인도 구세력의 권력 아래로 전락하고 만다. 즉, 구 세력의 핵심인물들이 유 자광을 사주하여 남 이를 죽게 하고 본인도 왕위 14개월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된다.

 

 

예종은 선친 세조와 같이 정변을 일으키고 권력을 잡았던 한명회 등의 훈구 세력을 견제하고자 엄격한 조치를 취했는데,그 하나가 분경을 금하는 것 이였으며 또 다른 하나는 대납을 금지하는 것 이었다.분경이란 분주하게 다니면서 이권을 경쟁한다 에서 비롯된 말로 정치권의 실세를 찾아 다니며 관직을 부탁하는 인사청탁을 말한다. 인조는 인사와 관련된 권력의 남용은 종친, 대신, 공신을 막론하고 무조건 목에 칼을 씌워 보고하고 족주(온 가족을 다 죽인다)한다고 했으니 당시의 권력자들에게는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그리고 대납이란 타인이 먼저 서울에 올라와 선납하고 지방으로 돌아가 백성들에게 세금을 징수하는 제도인데 그 값이 정상 세금의 몇 배가 되어 이 것이 공신들로 하여금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갖게 한 제도였다. 이런 제도는 세조가 신하들로 하여금 자기에게 충성하도록 하기 위해 만든 기막힌 제도였다.예종의 이런 조치는 훈구세력에게는 직격탄이 되었을 것이며 자연스럽게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야합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예종이 승하한 후 예종의 모친 즉, 정희왕후는 당연히 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을 차기 왕(주상)으로 천거를 해야 하는데 , 제안대군이 어리고(당시 4살) 예종의 둘째 조카인 자을산군이 세조가 총애했다는 이유를 들어 자을산군을 주상으로 천거한다. 여기에는 훈구세력과 인수대비간의 정치적 담합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예종의 첫째 조카 즉, 인수대비의 큰 아들인 월산군의 장인이 훈구세력이 아니라 신진 세력이었기 때문에 훈구 세력들은 이를 기피하였고, 인수대비는 둘째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릴 수 있다면 굳이 이를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예종의 모친인 정희왕후는 권력의 힘 앞에 자기 친 손자인 제안대군을 왕위에 올리지 못하고 오히려 훈구세력들의 의견대로 따라가게 된다. 예종의 사인은 족질인데 죽음 후 이틀 만에 시신이 검게 변하고 (이는 보통 약물 중독에 의해 사망 할 경우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함) 예종이 오전 9시 이전에 사망하였는데 성종이 당일 오후 4시경에 즉위식을 거행했다는 점 등이 예종의 죽음이 정상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겠다.남편이 일찍 사망하여 세자빈자리에서 쫒겨나 평범한 삶을 살아야 했던 인수대비나, 중전의 딸과 손자가 모두 사망하여 커다란 정치적 위기를 맞이했던 한 명회에게 예종의 죽음은 이들로 하여금 한 여자는 대비가 또 한 남자는 국구(중전의 아바지)가 되는 영광을 주었으니, 두 독한 남녀의 정치적 결합은 예종의 죽음과 결코 무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예종의 아들인 제안대군은 사실 정상적인 상황이었으면 왕위를 이었으나 권력의 야합에 의해 종친으로 전락했으며 이런 과정에서 생긴 권력에 대한 불만은 세상을 바꿔버리고자 하는 욕망으로 발전하여 조카인 연산군으로 하여금 전혀 다른 각도에서 복수극을 벌이는 참사로 나타나게 된다.

 

 

 


 

 

  

 

 

 

생졸;1437.10.7(음9.8)~1504.5.11음(4.27)는 조선 초기의 세자빈이자 덕종(德宗, 추존왕)의 왕비다.




 

 

 

 

 

조선왕 제8대 예종 이야기     작성일자; 2011.06.09.목요일,맑음

 

예종; 요절한 덕종 의경세자의 동생 해양대군 이 광으로 세조의 둘째 아들이다.

생졸; 1441-1469

재위기간; 1468-1469 (1년2개월)

능; 창릉은 제8대 예종(1450~1469)과 계비 안순왕후 한 씨(1445?~1498)의 능이다.

 

가계도;

부; 세조

모; 정희왕후 윤씨 

  정비; 장순왕후 한씨는 제8대 얘종의 정비로 한명회의 셋째딸(생졸1445-1461)이다.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 한씨는 한명회의 셋째 딸로 세자빈때 17세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자; 인성대군-3살 때 요절

         

   한명회는 자신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했으나 세자빈으로 죽자

   다시 넷째 딸을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과 혼인 시킨 후에 소혜왕후(인수대비)와 합심하여

   자을산군을 왕위에 올려 놓으니 넷째 딸이 왕비가 된다.          

   셋째 딸은 세조에게서 장순빈의 시호를 받았다가 그후 제부인 성종이 장순 왕후로 추존했다.        

 

    계비; 안순왕후 한씨(생졸 ? - 1498)는 청주 부원군 한백륜 딸로 예종이 세자 시절 한명회의 딸(장순왕후)이 세자빈에

             책봉되었다가  다음해 산후병으로 요절하자 세조 8년(1462)에 두 번째 세자빈이 된 후 예종의 즉위와 함께 왕비에 

             오르지만 즉위 14개월만에 남편 예종이 승하하고,왕비 한씨는 어린 나이로 청상이 되었다가 

             1498년12월 23일 창덕궁에서 승하하였다.        

         자; 제안대군-어리다는 이유로 왕위 계승 못함

         딸;현숙공주

 

예종은 세조의 둘째 아들로 형인 의경 세자가 요절하는 바람에 세자가 되었다가 19세에 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원래는 의경 세자의 아들인 원손 월산군을 세자로 책봉하는 것이 적통 계승의 원칙에 맞는 것이었으나,

월산군은 불과 4세 였으므로 8세가 된 세조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훗날 예종)이 세자로 책봉되었고,

1468년9월7일, 19세인 세자인 해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날 세조는 승하 하였다.

예종은 왕이 되었지만 19세로 성년이 되지 않아 모친인 세조비 정희왕후가 조선 왕조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한명회,신숙주,정인지,구치관 등의 중신이 원상(세조가 죽기 전에 신하들에 의한 섭정제도)으로 현직 의정부 대신들 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정희왕후는 정무를 처결하는 등 실질적 권력을 장악했다.

  

                             

                                                               ▶ 왼편이 예종릉이며 오른쪽이 인순왕후릉.

      

 

이러한 상황 속에서 원상 세력(한명회,신숙주,정인지,구치관)과,

이시애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뒤 정치적 지위가 상승한 강순,남이,구성군 등 간의 권력 다툼이 노골화되어

결국 강순.남이.구성군 세력이 반역 혐의로 제거되었으며,

이후 한명회는 영의정 이자 임금의 장인으로서 절대적 권력을 누렸다.

 

세조(世祖, 재위 1455~1468)는 즉위 초 부터 왕권 강화와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구사했다.

세조는 실추된 왕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대신 6조 판서가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나랏일을 직접 왕에게 보고하는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시행했다.

또 사육신 사건 과정에서 세조와 정면으로 대치했던 집현전을 해체하고,

국왕의 비서실 격인 승정원(承政院)의 기능을 보강해 비서실 중심의 측근 정치를 펼쳤다.

세조는 동시에 국가 재정과 국방력을 키우기 위해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대폭 강화했다.

조세 수입을 확충하기 위한 양전(量田) 사업,호구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한 호패법 복원 등도 이 같은 목적에 따른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과거 세종 시절 6진 개척으로 조선 영토에 편입된 함길도(咸吉道, 함경도) 지역의 토호층이 반발하였다.

6진 개척 당시 세종은 이 지역에서 여진족을 몰아내고 함길도 남부와 삼남 지역의 백성을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이주시키면서 각종 국역을 면제하는 등 다양한 혜택을 베풀었다.

이른바 북방사민 정책으로, 이 지역을 확실히 조선의 영토로 삼아 여진족이 다시 넘보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였다.

당시 이곳에 이주한 백성들은 주로 땅을 가지지 않은 가난한 농민들이었고,

지역 토착 세력인 토호층이 이들을 예속민으로 지배하며 중앙 정부로부터 비교적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일종의 지방 자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세조는 중앙집권 정책을 강도 높게 시행하면서 함길도의 이 같은 특혜를 인정하지 않았다.

과거처럼 현지 토호들에게 관직을 내리는 대신 지방관을 중앙에서 직접 파견하는가 하면,

호패법을 통해 주민들의 이주를 제한했고, 군역과 부역 등을 부과했다.

특히 1453년,함길도 도절제사 이징옥이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해 난을 일으키면서 이 지역에 대한 통제는 높아졌다.

이 과정에서 토호층의 예속민에 대한 지배력은 차츰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 수령과 토호층 사이에 갈등도 불거졌다.

 

 

이시애의 난; 1467년5월(세조13년)

세조의 중앙집권 정책으로 함길도의 특혜가 없어지자 불만과 위기감이 누적된 토호층이 난을 일으킨다.

세조 13년인 1467년5월,이시애의 선동으로 일어난 이 반란은 조선 초기 최대의 반란 사건으로 기록된다.

반란군 2만여 명은 정부의 토벌군 5만여 명을 상대로 저항하다가 그해 8월 진압됐다.

세조가 병으로 타계하기 한 해 전의 일이다.

 

이시애(李施愛)는 함길도 길주(吉州)를 기반으로 한 토호층으로, 회령 부사를 지내다 해임된 적이 있었다.

그는 1467년5월,모친 장례식에서 동생 이시합, 매부 이명효와 거사를 모의한 뒤,

토호들이 자주 모이는 유향소(지방 수령의 자문 관청)를 중심으로

‘조정에서 군사를 보내 함길도 사람들을 다 죽이려 한다’라는 내용의 유언비어를 퍼뜨리며 동조 세력을 널리 모았다.

이시애는 또 “조정에서 함길도 사람들을 호패법으로 묶어두는 바람에, 이제 마음대로 옮기면서 살 수 없게 됐다.”라며

민심을 선동하기도 했다.

거사를 결심한 이시애는 5월 10일에 길주를 습격해 중앙에서 파견된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과 길주 목사 설정신,

부령 부사 김익수를 살해하고, 마침내 난을 일으켰다.

이때 이시애는 한양 조정으로 사람을 보내 ‘절도사 강효문이 조정의 한명회,신숙주 등과 내통해 역모를 꾸민 것을 알고,

강효문을 처단했다’라는 내용의 거짓 보고서를 올렸다.

이시애가 함길도 전역의 유향소에도 이 같은 내용을 퍼뜨리자 토호와 농민들이 잇달아 반란군에 합세했다.

이시애의 거짓 보고를 받은 세조는 현지의 진상을 파악할 길이 없었지만, 한명회와 신숙주가 왕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의심이 들어 일단 이들을 하옥시켰다.

이시애의 기만 전술이 제대로 먹힌 셈이다.

조정이 혼란을 겪으며 반란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홍원 이북에서 모여든 토호와 군민 등 반란군 2만여 명은 함길도 전역의 고을 수령들을 대부분 죽이며

단천과 북청, 홍원을 공략하고, 뒤이어 함흥을 점령했다.

심각한 보고가 잇따르자 세조는 5월 17일이 되어서야 뒤늦게 정부 토벌군을 편성했다.

귀성군 이준을 함길,평안,강원,황해 사도병마도총사로 임명하고,호조판서 조석문을 부사로,허종을 함길도 절도사로

삼았다.강순,어유소,남이가 토벌대장을 맡았다.

귀성군은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아들이며,토벌 대장 남이는 태종의 사위인 남휘의 손자다.

당시 귀성군과 남이의 출전은 한동안 소외됐던 종친 세력이 조정에서 다시 일어서는 계기가 됐다.

처음에 2만 명으로 출발한 토벌군은 세조가 한양과 삼남, 평안도, 황해도 출신의 지원군을 계속 추가로 보내면서

나중에는 5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즈음 이시애가 이끄는 반란군은 철령 북쪽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토벌군의 움직임을 관망하고 있었다.

6월 들어 반란군과 토벌군 사이에는 크고 작은 충돌이 잇따랐다.

토벌군이 6월 중순 반란군을 밀어내고 함흥에 들어간 뒤, 세조는 비로소 사태의 진상을 보고받고 하옥된 신숙주 등을

무혐의로 풀어 주었다.

이어 반란군과 토벌군은 북청에서 격전을 벌였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그

러자 양쪽은 서로 물러나 한 달 정도 휴전한 후에 7월 중순 다시 맞붙었다. 결국 이 싸움에서 반란군은 퇴각하였다.

결국 반란군의 주력부대는 8월초 이원(利原)의 만령(蔓嶺)에서 강순과 허종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크게 무너지고,

이시애는 길주를 거쳐 경성으로 물러나 국경 넘어 여진으로 달아나려 했다.

이때 이시애의 처조카이자 허종의 휘하에 있던 허유례가 자기 아버지가 억지로 이시애의 무리에 휩쓸렸다는 소식을 듣고,

이시애의 부하인 이주, 황생 등을 설득하였다.

이에 이주 등은 잠을 자고 있던 이시애와 이시합 형제를 묶어 토벌군에게 넘겼고,

이시애와 이시합은 8월 12일 토벌군의 진지 앞에서 처형당했다.

이로써 이시애의 난은 3개월 만에 진압됐다.

 

병약했던 예종은 재위 1년2개월 만에 20세의 어린나이로 요절하였고,형님 의경 세자도 20세의 어린 나이에 죽고,

예종의 세자빈인 장순왕후 한씨(한명회 셋째 딸)도 궁에 들어온지 2년도 채 못되어 원손을 낳다가 산후병으로 16살에 일찍

죽은후 원손도 어머니를 따라 가는 등 세조의 자식들에게 불행이 연속되자 백성들은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업보라고 하였다.

 다만 예종은 효성이 지극하였는바 예종이 부왕 세조가 세상을 떠난 것에 충격을 받아 건강을 해쳤다며

예종이 세자일 때 세조가 병환이 생기니 수라상을 보살피고 약을 먼저 맛보며 밤낮으로 곁을 지키며 한잠도 못 잔 지가

여러 달이 되었다.

세조가 돌아가매 슬픔이 지나쳐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건강을 해치게 되어 이 해 겨울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고 적고 있다.

"예종은 평소 공신들의 전횡에 분개하다가 즉위 직후 분경을 금지하는 등 공신들과 맞서다 재위 1년 남짓 만에 독살을

당했다고 주장한다.

같은 구테타로 집권했지만 태종과 세조는 공신을 대하는 방식이 완전히 달랐다.

태종은 공신 집단을 해체해 깨끗한 조정을 세종에게 물려준 반면,

세조는 왕권을 능가하는 공신 집단을 그대로 예종에게 물려주었다.

잘못된 쿠테타의 업보였다.  

 

― 예종 시대 최대의 옥사 "남이(南怡, 1441~1468)의 역모 사건"

남이의 본관은 의령이며 태종의 외손자로서 어머니가 태종의 네째 딸 정선 공주이다.

1457년(세조3) 약관의 나이로 무과에 장원 급제하였고,

 1467년(세조13)에는 경기도 포천, 영평 일대의 도적떼를 토벌하였다.

또한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자 이를 평정하였고 그 공로로 1등 공신에 올랐다. 

무관으로서의 여러 공로로 세조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1468년에는 28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예종이 즉위한 해인 1468년에 신숙주,한명회 등의 세력에 의하여 이시애 난 때 등장한 신진 세력을 제거하면서

남이도 강등 당하였다. 

그 후 유자광이 남이가 역모를 꾀한다고 예종에게 고하여 정승 강순과 함께 거열형에 처해졌고 많은 사람이 처형당하였다.

'남이섬'에는 예전부터 남이장군 무덤이라는 불리는 묘가 한기 있는데,

정확한 사실이 확인된 것은 아니고 다만 그가 이섬에 묻혔다는 전설이 담긴 돌무더기가 전하여 왔고

그 돌을 함부로 가져가면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는 이야기가 인근 주민들사이에는 입으로 전한다고 한다.

그래서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는 남이섬에 남이 장군의 무덤이 있는 것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 남이섬의 남의 장군 묘

                                     

             △ 경기도 화성의  남이 장군묘 

 

 

-창릉 8대 예종과 계비 인순 왕후 한씨-

창릉은 세조의 둘째 아들 예종과 그의 계비 안순왕후의 동원 이강릉이다.

예종의 정비 장순왕후 한씨(한명회 셋째 딸)는 파주 삼릉의 공릉에 모셔져 있다. 

예종이 이곳으로 모셔짐으로써 비로소 왕릉이 서오릉에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처음 모셔진 의경 세자는 세자 신분으로 죽어 대군의 묘로 상설하였기 때문이다.

 

-역풍수의 묘자리

서오릉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창릉은 예종의 비극적 종말과도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형님 의경 세자는 세자 신분으로 죽었음에도 세조가 친히 나서서 명당을 찾아 극진히 장사 지냈지만

예종은 왕으로 죽었음에도 (세조가 없자) 명당은 커녕, 졸속한 국장 처리가 일사천리 진행 되었으며,

대신들 중 정인지 만이 '좌청룡 우백호중 백호가 낮다'고 하여 쓸수 없다는 의견을 냈을뿐 그 누구도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예종의 후손 2남 1녀중 큰 아들 인성대군 일찍 죽었으나 

제안대군(1466-1525)은 왕위 서열상 아버지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야 했으나 4촌인 성종에게 자리를 빼앗기고,

이혼과 재혼을 거듭하는 등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못하고 끝내 자손없이 죽었다. 

현숙공주는 병조판서를 지낸 임사홍의 아들 임광재에게 시집을 갔으나 남편의 문란한 사생활 때문에 

끝내는 별거를 하고 후손없이 죽었다.

예종의 후손들이 절손 된 것이다.

또한 창릉은 이후 여러번의 변고가 있었는바 인조 3년(1625)과 4년(1626)에 봉분이 불에 타 잔디를 다시 입혔고,

영조 32년(1756)에는 정자각에 불이나 중건 했으며,

고종 33년(1896)과 38년(1901)에도 봉분에 불이 나는 등 화재가 빈발했다.

창릉은 서오릉의 여역내의 왕릉으로 조영된 최초의 능으로 

병풍석을 세우지는 않았으나 봉분 주위에 난간석을 두르고 있다. 

창릉은 조선 제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1498)의 능이다.

안순왕후는 우의정 청천부원군 한백륜의 딸로 예종 즉위년(1468년)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연산군 4년(1498)에 죽었다.

 

예종은 평소 공신들의 전횡에 분개하다가 즉위 직후 분경(인사청탁)을 금지하는 등 신들맞서다

재위 1년 남짓 만에 독살을 당했다는 주장이 있다.

개혁 목표는 옳았으나 현실적인 힘을 확보하는 능력이 부족했다.

특히 남이를 비롯한 신공신 집단을 제거한 것은 구공신에 맞설 세력을 스스로 제거한 결정적 하자였다.

 

-세조의 아픔은 자식이 없음이다.

온갖 공 다들인 장남 의경세자가 20세에 요절하자 차남을 세자 책봉 하였는데

그도 즉위 14개월만에 역시 20세에 요절했다.

예종은 11세 때 아들을 보았다.(조선왕 중 최연소 기록) .

한명회의 딸 장순왕후가 낳은 인성대군은 3살 때 죽었다.

장순왕후도 산후통으로 죽었다.

결국 예종의 2남1녀 후손들이 끊기고 말았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조선왕 제9대 성종 이야기/120814  (0) 2012.08.14
예종과 인수대비  (0) 2012.05.06
세조와 문수동자  (0) 2011.04.06
한명회  (0) 2011.04.06
금계필담  (0) 2010.09.10

세조와 문수동자            작성일자; 2011.04.06.수요일,맑음

 

세조는 피부에 고름이 생기다가 문둥병으로 이어졌다.

전설에 의하면 단종의 모친인 현덕왕후의 원혼이 세조의 꿈에 나타나 내 아들을 죽인 원수라며 침을 뱉은 이후로

병증이 심해졌다 한다.

어의들도 치료를 못하자 그는 그 치료를 위해 온천욕을 즐겨 다녔으며,

오대산 상원사 문수보살상 앞에서 100일 기도를 했다.

기도를 마치고 몸이 가려워 혼자 목욕을 하는데, 지나가는 동자승이 있어서 등을 밀어 달라고 했다.

그리고 "네가 나가서 행여나 사람을 만나더라도 상감 옥체에 손을 대고 흉한 종기를 씻어드렸다는 얘기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더니 동자승이 미소를 지으며 "잘 알겠습니다.

상감께서도 후일에  누구를 보시던지 오대산에 가서 문수동자를 친견했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기를 부탁드립니다"하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현재 오대산 상원사 문수전에는 세조가 보았다는  목조 문수동자상이 있다.

만년의 세조는 심한 악몽에 시달렸고, 악몽을 계기로 불교에 귀의할 결심을 한다.

이는 유교 .성리학을 국교로 하는 조선의 국가 이념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었다.

그의 불교 귀의에 항의  하여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 학자들은 연명 상소와 사퇴 등으로 항의의사를 표시하기도 했으나,

세조의 만류로 무마되었다.

왕자 시절부터 불교에 심취했던 그는 불교는 왕실의 안녕과 미래를 보장하는 종교적인 신앙으로서 필요했다. 

세조는 불교가 가지고 있는 호국성에 근거한 국가·민족 의식의 고양을 통해 국방력과 집권체제의 강화를  도모하고자

원각사(圓覺寺)를 세우고 '월인석보'를 간행하였다.

 

                               문수동자(文殊童子)가 세조의 등을 밀어주는 모습으로 상원사 문수전 월랑에 그려진 벽화.

 

병을 고친 이듬해 봄,세조는 다시 상원사를 찾았다.

상원사에 도착한 왕은 곧바로 법당으로 들어갔다.

막 예불을 올리는데 어디선가 별안간 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세조의 곤룡포 자락을 물고 자꾸 앞으로 못 가게 잡아

당기는 것이 아닌가.

이상한 예감이 든 왕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병사들을 풀어 법당 안팎을 샅샅이 뒤지게 했다.

아니나 다를까. 불상을 모신 탁자 밑에 세 명의 자객이 세조를 시해하려고 시퍼런 칼을 들고 숨어 있었다.

그들을 끌어내 참하는 동안 고양이는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하마터면 죽을 목숨을 구해준 고양이를 위해 세조는 강릉에서 가장 기름진 논 5백 섬지기를 상원사에 내렸다.

그리고는 매년 고양이를 위해 제사를 지내주도록 명했다.

이때 부터 절에는 묘답 또는 묘전이란 명칭이 생겼다.

즉 고양이 논, 또는 고양이 밭이란 뜻.

궁으로 돌아온 세조는 서울 근교의 여러 사찰에 묘전을 설치하여 고양이를 키웠고,

왕명으로 전국에 고양이를 잡아 죽이는 일이 없도록 했다. 최근까지도 봉은사 밭을 묘전이라 부르는 이유도 이에 기인한다.

또 지금도 상원사에 가보면 마치 이 전설을 입증하는 듯 문수  동자상이 모셔진 청량선원 입구 계단의 좌우에는 돌로 조각한

고양이 석상이 서 있다.

속설에 의하면 '공양미'이란 말도 고양이를 위한 쌀이란 말이 변하여 생겼다는 일설도 있다.

고양이 사건이 있은 지 얼마 후 세조는 다시 상원사를 찾았다.

자신에게 영험을 베풀어준 도량을 중창하여 성지로서 그 뜻을 오래오래 기리기 위해서였다.

대중 스님들과 자리를 같이한 왕은 상원사 중수를 의논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공양 시간을 알리는 목탁이 올렸다.

소탈한 세조는 스님들과 둘러앉아 공양 채비를 했다.

'마마, 자리를 옮기시지요.'

'아니오. 대중 스님들과 함께 공양하는 것이 과언은 오히려 흡족하오.'

그때 맨 말석에 앉아 있던 어린 사미승이 발우를 들더니, 세조의 면 전을 향해 불쑥 말을 던졌다.

'이거사, 공양하시오.'

놀란 대중은 모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몸둘 바를 몰라했다.

그러나 어찌 된 일인가. 정작 놀라야 할 세조는 껄껄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과연 도인될 그릇이로다.'

왕은 그 사미승에게 3품의 직을 내렸다.

그리고는 그 표시로서 친히 전홍대(붉은 천을 감은 허리띠)를 하사하였다.

아마 세조는 지난날 자신의 병을 고쳐준 문수 동자를 연상했던 모양이다.

그 후 세간에서는 어린아이들이 귀하게 되라는 징표로 붉은 허리를 졸라매 주는 풍속이 생겼다고 한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예종과 인수대비  (0) 2012.05.06
조선왕 제8대 예종 이야기  (0) 2011.06.09
한명회  (0) 2011.04.06
금계필담  (0) 2010.09.10
세조와 술자리  (0) 2010.08.04

한명회(韓明澮)        작성일자; 2011.04.06.수요일,맑음

 

한명회

생졸; 1415년~1487년

본관; 청주출신

별칭; 칠삭동이

가계도;

  조부; 태조 때 학사로 명나라에서 조선이란 국호를 받아온 개국공신 한상질

    조모 : 창화군부인 경주이씨-문하시중 월성부원군 이성림의 딸

    조모 : 창화군부인 청풍 송씨-청풍도사 송신의의 딸

     부: 사헌부감찰 증 영의정 한기

     모 : 정경부인  여주 이씨-예문관 대제학 이척의 딸

          동생 :서원군 한명진-불교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의 선조

           제수 : 안동 권씨- 문경공 권제의 딸. 길창 부원군  권람의 동생. 슬하 1남 1녀

     장인 :  민대생-단종 비 정순왕후의 외조부인 민소생의 형이다

     장모 : 양천 허씨-허선의 딸

           한명회

           아내 : 황려부부인 여흥 민씨(? ~ 1490년) - 단종비 정순왕후의 모친 여흥부부인과 친사촌지간이다.

              장남: 낭성군 한보

                며느리 : 한산 이씨- 한성군 이훈의 딸. 슬하 3남 2녀.

              장녀: 한씨(韓氏) - 신주의 처.

              차녀: 한씨 - 영천군 윤반의 처. 슬하 2남 5녀.

             삼녀: 장순왕후-예종의 정비

             사녀: 공혜왕후-성종의 정비

 

한명회는 조선 왕조 실록에 그 이름이 2300건이나 등장하는 인물이며,

단종,세조 대부터 성종 대까지 3대에 걸쳐 세상을 쥐락펴락했던 인물이기도하다.

그가 바로 수양대군의 장자방으로서 계유정난을 주도했던 한명회이다.

그는 야심만만한 수양대군이 동생 안평대군의 기세에 눌리고 세종의 고명대신 김종서와 황보인의 견제로 옴짝달싹 못하고

있을 무렵 홀연히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여 일대 돌풍을 일으킨다.

계유정난을 배경으로 하는 현대의 사극 속에서 그는 유들유들한 표정으로 굳게 쥔 주먹을 쑥 내밀며 이렇게 소리친다.

불안했던 단종 초기의 난세에 뛰어든 그는 남다른 자신감과 통찰력으로 수양대군을 권좌에 밀어올렸다.

이어서 충심으로 굳게 뭉친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을 분쇄하고, 노산군으로 강봉된 단종과 금성대군 등

잠재적인 위협세력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이후 노련한 정치력을 발휘하여 세조의 철권통치를 뒷받침하면서 세종 이래 약화일로를 걷던 왕권을 곧 추세웠다.

그와 같은 공적을 바탕으로 한명회는 세 차례나 영의정을 지냈으며,

두 딸을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내 권신과 외척으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렸다.

세조가 죽은 뒤에는 신숙주와 함께 예종과 성종 시대의 정국을 이끌었다.

한명회는 국가 경영에도 수완을 발휘하여 북방을 안정시켰고, 그가 만든 면리제도는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사후 연산군으로부터 폐비 윤씨의 죽음을 방관했다는 죄목으로 부관참시라는 수난을 겪었고,

의리와 예도를 숭상하는 조선의 사관들에게 유능한 책사가 아니라 권모술수에 능한 모리배로 평가받았다.

         

태종 15년인 1415년.

한성부에서 태어난 그는 칠삭둥이 인데다 병약 했으므로 곧 죽을 줄 알고 버려두었는데,

그를 가엾게 여긴 늙은 여종이 거두어 키웠다.

태어날 때부터 배 위에 검은색 점이 몇 개 있었으므로 세간에 북두칠성의 정기를 품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이 비상하고 행동이 활달했으므로 종조부 한상덕이 장차 집안을 일으킬 인물이라 하여 집안에 들였고

종조부 한상환이 학문을 가르쳤다.

일찍이 부모를 잃고 동생 한명진과 함께 불행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다행히 한상덕의 지원을 받아 강원도 자망산에 은거하고 있던 유학자 유방선의 문하에서

지기인 권람, 서거정 등과 함께 공부했다.

유방선은 권근 변계량의 제자로 일찍이 세종이 집현전 학사를 보내 자문을 구하기도 했던 유현(儒賢)이었다.

그러나 친구 권람은 문종 원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집현전 교리가 되었지만 그는 낙방을 거듭했다.

이에 주변에서 비웃는 이들이 많았지만 그는 흔들리지 않고 마차에 술과 책을 싣고 천하를 주유하면서 비상의 그날을 기다렸다.

“궁달은 다 때가 있는 법이다. 선비로서 어찌 부유, 속사들의 말 한 마디에 실망하고 비통하기를 즐겨하겠는가?”

한명회는 그렇듯 느긋한 태도를 견지했지만 좀처럼 그 때는 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38세 때인 1452년에 간신히 문음(고려와 조선 시대에 중신 및 양반의 신분을 우대하여 친족 및 처족을

과거와 같은 선발 기준이 아닌 출신을 고려하여 관리로 사용하는 제도)으로 경덕궁직을 얻었다.

경덕궁은 개성에 있던 태조 이성계의 잠저(왕이되기전 기거하든 곳)였다.

관리로서는 초라한 출발이었지만 그는 고위직에 있던 친구 권람에게 이렇게 큰소리를 쳤다.

“문장과 도덕은 네게 양보하겠지만 정사만은 양보할 수 없다.”

        

한명회가 관직에 나간 그해에 문종이 죽고 12세의 어린 단종이 보위에 올랐다.

당시 정권은 단종을 보좌하던 김종서와 황보인 등 고명대신들에게 주어져 있었다.

그로 인해 신권이 강화되면서 조정에서 멀어진 왕족들은 크게 불만을 품었다.

특히, 세종 말기부터 신료들의 압박으로 부왕이 고통 받는 장면을 생생하게 목도했던 수양대군은

추락하는 왕실의 권위에 분개하면서 내심 권좌를 꿈꾸었다.

그 동안 재야를 전전하며 정세를 헤아리던 한명회는

풍운아 수양대군의 야망을 한 눈에 꿰뚫어보고 친구 권람을 통하여 그를 만난 뒤 노골적으로 야심을 부추겼다.

그때부터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최측근 참모로서 왕권 탈취의 모든 단계를 진두지휘했다.

당시 수양대군의 세력은 안평대군에 비해 턱없이 빈약했다.

한명회는 수양대군에게 활쏘기 훈련을 빌미 삼아 모화관과 훈련원에 가서 무사들에게 술과 안주를 대접하게 함으로써

많은 인원을 끌어 모았다.

그 결과 내금위 무사 양정을 비롯하여 홍윤성, 홍달손 등 당대에 내로라하는 무사 30여 명이 수양대군의 심복이 되었다.

수양대군은 또 한명회의 조언에 따라 신숙주, 정인지, 정창손 등 유력한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했고,

김종서와 황보인의 경계심을 늦추기 위해 명나라 사신을 자청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조정에 안평대군을 지지하는 신료들이 많았으므로 거사를 망설이자 한명회가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길가에 집을 지으면 3년이 지나도 완성되지 않습니다. 대군께서는 속히 결단하십시오.”

1453년(단종 1년) 10월 10일, 결심을 굳힌 수양대군은 휘하 무사들을 이끌고 밤늦게 김종서의 집을 찾아가

김종서와 아들 김승규를 제거했다.

이어서 당시 경혜 공주궁에 머물고 있던 단종에게 안평대군이 난을 일으켰다고 거짓 보고하여 환궁하게 한 다음,

경복궁을 장악하고 승지 최항과 환관 전균을 통해 어명으로 중신들을 대궐로 불러들였다.

이때 한명회는 수양대군의 정적으로 지목한 사람들의 명단을 적은 '살생부'를 들고 그들의 생사를 관장했다.

쿠데타 모의 과정에서 그는 신하들의 성향과 능력, 세조에 대한 지지, 설득의 가능성 여부 등을 파악하여

살생부를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생사의 갈림길은 근정문 좌우에 있는 출입문이었다.

이때 친수양 대군파로 분류된 정인지, 이계전, 이순지 등은 근정문 왼쪽 문으로 들어와 무사했지만

정적으로 분류된 황보인과 조극관,이양 등은 근정문 오른쪽 문으로 들어왔다가 한명회의 신호에 따라

홍윤성과 함귀, 구치관의 철퇴를 맞고 목숨을 잃었다.

한명회는 이어서 입궐하지 않은 윤처공,이명민,조번,원구,김연 등의 집에 무사를 보내 일가를 몰살시켰고,

문종의 비석 제작을 감독하던 민신을 창으로 찔러 죽였으며,안평대군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

마지막으로 그때까지 살아있던 김종서를 추적하여 죽임으로서 역사에 계유정난으로 이름 지어진 유혈 쿠데타를

마무리했다.

그날의 공적으로 한명회는 종8품 군기녹사를 거쳐 종4품 사복시 소윤이 되었다.

그때부터 보잘 것 없는 궁지기의 초고속 출세 행진이 시작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영의정이 되어 조정을 주물렀다.

이윽고 한명회의 사주를 받은 공신들은 단종에게 연일 왕위를 내놓으라고 겁박했다.

그들의 서슬퍼런 공세를 견디지 못한 단종은 왕위를 수양대군에게 넘길 수밖에 없었다.

과거 세종으로부터 단종을 지켜달라는 부탁을 받았던 성상문은 예방 승지로서 세조에게 옥새를 전달하며 통곡했다.

그때부터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함께 집현전 학사인 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김문기,김질 등을 끌어들여

은밀히 단종 복위 운동을 개시했다.

1456년(세조 2) 6월 세조가 창덕궁 광연루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송별연을 베풀 때 별운검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결정되자 성삼문은 당일로 거사를 확정지었다.

이때 기이한 낌새를 눈치챈 한명회는 신숙주와 함께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세조를 설득하여 별운검을 폐지하고

연회에 세자를 불참하도록 함으로써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그로 인해 거사 날짜가 연기되자 불안감을 느낀 김질이 장인 정창손을 통해 세조에게 고변함으로써 거사 계획이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그해 6월 2일, 경자(庚子)일, 실록에 선연히 박혀있는 두 글자가 뒤이을 참사를 예고하고 있다.

‘낮이 어두웠다평소 아꼈던 집현전 학사들의 모의를 알게 된 세조는 격노했다.

그리하여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성원·유응부 등 관련자 70여 명을 죽이거나 귀양 보냈고,

그들의 16세 이상의 아들을 모조리 처형했으며, 15세 이하의 아들과 부인, 식솔들을 공신들의 노비로 삼았다.

특히 성삼문의 가문은 아버지 성승을 비롯하여 형 성삼고, 동생 성삼빙, 성삼성과 조카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해 버렸다.

이어서 사육신의 거사를 묵인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봉시키고 영월로 귀양 보냈다.

얼마 후 금성대군과 순흥 부사 이보흠이 주도한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단종은 폐서인되었고,

 17세에 청령포의 고혼이 되었다.

선혈이 낭자했던 이 비극적인 사건은 후대에 세조의 원죄보다 한명회의 간교함과 세종에 대한 신숙주의 불충을

증명하는 단서로 더 많이 애용되었다.

        

한명회는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분쇄한 공적으로 그해 겨울 도승지가 되었고,

1457년(세조 3년)부터 조정을 주도하면서 위정자로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당시 세조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재상 중심의 의정부의 기능을 축소하는 대신 육조직계제를 실시하여 만기를 친람했다.

또 유명무실했던 체찰사 제도를 활성화시켜 지방감찰제도를 강화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통제권도 확보했다.

1458년,병조 판서에 임명된 한명회는 평안도와 함경도 변방에 출몰하는 여진족과 야인 부락을 토벌하고 축성작업을

독려했다.

1459년(세조 5년)에는 황해·평안·함길·강원 4도의 병권과 관할권을 가진 4도 도체찰사가 되어 지방 수령과 향리들의

실태를 파악하고 민생을 살폈다.

 

한명회는 이후 세조 재위 14년 동안 총 14회에 걸쳐 전국을 주유하며 지방의 현안들을 처리했고,

승정원과 육조, 변방 등지에서 왕명 출납권과 인사권, 병권 및 감찰권을 마음껏 행사했다.

이는 군왕 세조의 절대적인 신임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1464년(세조 10년)에는 평안북도 의주의 하류에 진보가 없고 희천과 영흥 사이의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의주에 인산진을 설치하게 했고, 희천과 영흥 사이에는 영원군 설치를 주도했다.

법전의 편찬에도 관여하여 육전상정소를 설치함으로써 성종 대에 완성된 경국대전의 초안을 마련했고,

성균관에 장서를 수집하여 학문 우대의 풍조를 권장했다.

이런 업적이 있었기에 부당한 방법으로 왕위에 올랐던 세조가

오늘날 조선 전기의 문물과 제도를 완성시킨 임금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명회는 1461년 북방을 안정시킨 공으로 상당부원군에 진봉되었고,

1463년 좌의정, 1466년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그렇듯 출세 가도를 달리던 한명회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1466년, 회령 절제사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면서 조정의 혼란을 야기할 목적으로

한명회, 신숙주가 강효문과 함께 반역을 도모했다는 장계를 올렸던 것이다.

깜짝 놀란 세조는 전례에 따라 한명회와 신숙주를 하옥시킨 다음 조사를 벌였지만 무고임이 밝혀지자 곧 석방했다.

엄혹했던 왕조시대에 역모는 그 혐의만으로도 목숨이 위태로운 중죄였다.

하지만 세조의 굳은 신뢰를 담보하고 있던 두 사람은 아무런 신체적 위해도 입지 않고 옥문을 나설 수 있었다.

그 후 의정부와 충훈부, 육조, 대간 등이 한 목소리로 한명회와 신숙주가 권력을 남용했다며 처벌을 종용했지만

세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이야말로 자신의 치세를 지탱하는 철골임을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명회는 그 상황을 개인적인 망신으로 여기고 명예회복의 기회를 기다렸다.

2년 뒤인 1468년(세조 14년) 9월 7일, 예종이 보위에 오르자 정국이 일변했다.

이시애의 난과 여진족을 평정한 구성군과 종친 남이 등의 신진세력이 한명회와 신숙주 등의

훈구 세력을 억누르는 형국이 되었던 것이다.

남이는 태종의 외증손자이자 친구 권람의 사위였는데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고,

여진족을 토벌한 공로를 인정받아 27세에 병조 판서가 된 기린아였다.

 

그 무렵 남이가 출현하자 한명회는 반역의 기운을 암시하면서 임금에게 창덕궁의 방비 강화를 진언했다.

때맞춰 예종이 남이를 경원하는 태도를 보이자 기회를 엿보던 유자광은 남이가 백두산 정상에서 썼다는 한시에서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이라는 구절에서 ‘평(平)’을 ‘득(得)’으로 바꾸어

‘사나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나라를 얻지 못하면’이라는 내용으로 역심을 도드라지게 했다.

그 결과 남이와 영의정 강순 등이 대역 죄인으로 체포되어 거열형에 처해졌다.

한명회는 그 과정에서 유자광을 옹호함으로써 약진하던 신진세력을 일거에 제거함은 물론

과거 자신에게 씌워졌던 역모의 어두운 그림자를 깨끗하게 걷어낼 수 있었다.

         

한명회는 평생 네 차례 공신에 봉해졌다.

계유정난으로 정난공신,단종복위운동 처리로 좌익공신,남이의 옥사를 통해 익대공신,성종 즉위 후에 좌리공신에

책록되었던 것이다.

 영의정을 수차례 거쳤고, 두 딸이 왕비가 되어 세조와 사돈이 되었으며,

권람과 신숙주와도 사돈 관계를 맺어 권력 기반을 다졌다.

 

일찍이 세조의 맏아들 의경세자는 병약하여 월산대군과 자산군을 남기고 20세에 요절했다.

세조는 며느리 수빈 한씨를 대궐에 머물도록 허락했지만 그녀는 사양하고 사가로 물러났다.

그로 인해 둘째아들 해양대군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때 한명회는 맏딸을 해양대군과 혼인시켜 권력을 공고히 했다.

그런데 딸이 세자빈이 된 지 1년 7개월 만에 인성대군을 낳고 산욕으로 세상을 떠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인성대군마저 병약하여 일찍 죽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한명회는 수빈 한씨를 찾아가 사돈을 맺는 조건으로 그녀 소생의 장래를 약속한다.

수빈 한씨는 그 제안을 수락하고 둘째아들 자산군과 한명회의 둘째딸을 혼인시키기에 이른다.

세조로부터 폭빈이라 불릴 정도였던 여걸과 권신의 밀계였다.

1468년(예종 즉위년) 17세였던 해양대군이 즉위하자

한명회는 세조의 유언에 따라 신숙주, 홍윤성, 정인지 등과 함께 원상이 되어 각종 업무를 처결했고,

병조 판서를 겸했으며 인사권까지 틀어쥐었다.

1469년(예종 1년) 예종이 재위 14개월 만에 급서하자 한명회는 4세에 불과했던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을 제쳐놓고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자 자신의 넷째 사위인 자산군을 임금으로 추대했다.

그리하여 수빈 한씨는 대비 자격으로 입궐하게 되었으니,

그녀가 바로 훗날 폐비 윤씨 문제로 연산군과 갈등했던 인수대비이다.

 성종은 즉위 당시 13세에 불과했으므로 세조의 정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 했지만 실권은 인수대비와 한명회에게 있었다.

당시 한명회는 신숙주, 구치관 등과 함께 원상으로서 국정을 주관했다.

런데 성종의 정비이자 한명회의 딸인 공혜왕후가 17세의 나이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자

연산군의 어머니인 숙의 윤씨를 중전으로 삼았는데 투기가 심하여 폐출되었다가 사사되기에 이른다.

 성종 초기에 한명회는 유자광의 공격을 받았지만 흔들리지 않고 국가 원로로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세조 치세에 북방을 안정시킨 경험이 있었던 그는

1479년(성종 10년) 건주위 여진족을 정벌하려던 명나라를 지원하기 위해 참전한 어유소가 추위와 험로를 이유로 퇴각하자

재출병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압록강과 두만강 변에 장성 축조를 건의하여 여진족의 내침을 방지하기도 했다.

1480년(성종 10년) 노쇠한 한명회는 은퇴를 결심하고 사직소를 올렸지만 성종이 허락하지 않았다.

1481년(성종 11년) 한명회가 정현왕후의 책봉 주청사로 명나라에 갔을 때 황제는 “충직한 노한이 다시 왔다.”라며

치하했다.

1484년(성종 15년) 봄 70세가 되어 사직소를 올렸지만 반려되었다.

1485년(성종 15년)에 재차 병을 이유로 사직하려 하자 성종은 “경은 나라의 으뜸 공로자이며

인간적으로는 덕있는 노인이며 사직에는 천주(天柱) 같은 존재다.”라면서 궤장(几杖)을 하사하며 사임을 물리쳤다.

말년에도 한명회의 지략은 녹슬지 않았다. 그

는 조정의 행정력이 민간에 고루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직시하고 주민들의 자치 조직인 오가작통법을 창시했다.

오가작통법이란 한성부의 방(坊) 밑에 다섯 집을 1통으로 통합하여 관리하게 하는 방법이다.

지방에서도 다섯 집을 1통으로 하고 5통을 1리로 하여 호구 조사, 세금 징수, 부역 동원, 범죄자 색출이 용이하게 했다.

이때 만들어진 면(面)과 리(里)라는 행정구역은 오늘날까지 통용되고 있다.

1485년(성종 15년) 한명회는 종묘사직을 위해 평생을 바쳤으니 이젠 유유자적하겠다는 뜻으로

한강변에 ‘압구정(鴨鷗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선비들과 함께 시흥을 즐겼다.

갈매기가 노닌다는 뜻의 정자 이름은 명나라의 문객 예겸이 지어준 것이었다.

 

                    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청춘부사직 백수와강호)
 
             젊어서는 나라를 위해 몸 바쳤고 늙어서는 강변에 누워 세상을 바라보네.
 
 

한명회는 이렇듯 낭만적인 시구로 노년을 보내고자 했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부원군의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하고 있었으므로 압구정에는 매일 조정 신료와 벼슬을 탐하는

무리들이 몰려들어 아첨을 일삼았다.

그 때문에 이윤중이란 선비는 다음과 같은 시로 그를 조롱했다.

         有亭不歸去 人間眞沐侯(유정불귀거 인간진목후)
              정자를 지어놓고도 돌아가지 않으니
              이 인간 참으로 갓 쓴 원숭이일세.

여기에서 ‘목후’란 '사기'의 ‘목후이관(沐侯而冠)’에서 나온 말로 부귀를 이루고도 고향에 돌아가지 않은 항우를

일컫는 말이다.

압구정은 겸재 정선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단아한 숲 사이로 한강이 내다보이는 정취가 고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얼마 후 조선에 들어온 명나라 사신이 그 소문을 듣고 구경을 청하자 한명회는 정자가 좁다는 이유로

성종에게 궁중에서 사용하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요청했다.

당시 한명회의 권력 남용에 불만을 품은 성종이 야멸차게 거절하자 빌미를 잡은 대간과 사헌부에서

그를 강력하게 탄핵했다.

그 결과 한명회는 모든 관직이 삭탈되고 유배형에 처해졌지만 배소로 가던 도중 사면되어 풀려났다.

아름다운 압구정은 갈매기와 노니는 장소가 아니라 추락하는 권세의 날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1487년(성종 17년) 한명회가 병석에 눕자 성종은 날마다 의관과 신하들을 보내 문병하게 했다.

그해 11월 14일, 최후를 직감한 한명회는 성종에게 “처음에는 부지런하고 나중에는 게으른 것이 사람의 상정이니

원컨대 나중을 삼가기를 처음처럼 하소서.”라는 말을 남기고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처럼 한명회는 평생 부귀영화를 한 몸에 누리다 이승을 떠났지만 저승에서는 편히 쉬지 못했다.

1504년(연산군 10년) 갑자사와가 일어났을 때 정창손 등과 함께 12간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관작을 추탈당하고 그 시체가 무덤에서 꺼내져 도륙되었으며, 수급이 한양 네거리에 효수되었던 것이다.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반정으로 신원되었지만, 사림이 조정을 장악하면서 한명회는 간신으로 격하되었고,

계유정난이나 단종복위운동에 관련하여 교활한 책사의 이미지로 굳어졌다.

하지만 오늘날 그는 세조의 등극을 뒷받침한 혁신적인 킹메이커이자 왕권 강화를 주도한 명참모로서,

아울러 평생 자신의 꿈을 이루고 관리했던 적극적인 경영자로서 활발하게 재조명되고 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왕 제8대 예종 이야기  (0) 2011.06.09
세조와 문수동자  (0) 2011.04.06
금계필담  (0) 2010.09.10
세조와 술자리  (0) 2010.08.04
세조의 장녀인 의령 공주 세령  (0) 2010.07.05

금계필담(錦溪筆談)                  작성일자; 2010.09.10.금요일,맑음

 

금계필담은 1873년(고종10년) 서유영(1801~?)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수록한 141편의 한문필 사본인 문헌 설화집이다.

2권 2책으로 한문필 사본으로 우리나라의 기록에 빠진 이야기를 모았다는 뜻인 '좌해일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141편의 설화가 주인공의 신분과 시대순에 따라 실려 있다.

조선 단종부터 순조 때까지의 왕·왕비·문신·이인·양반층여인·기생·하층여인·무인·장사의 차례로

이들에 얽힌 이야기를 적고 풍속에 대한 이야기들을 덧붙였다.

주인공들은 하층계급보다 상층계급이 많으며, 현실에서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는 인물이 많다.

조선 후기에 나온 야담집들과는 달리 다른 책을 보지 않고 지은이가 직접 들은 이야기만을 싣고 있다.

국립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조와 문수동자  (0) 2011.04.06
한명회  (0) 2011.04.06
세조와 술자리  (0) 2010.08.04
세조의 장녀인 의령 공주 세령  (0) 2010.07.05
계유정난과 이징옥의 난  (0) 2010.07.05
세조와 술자리      작성일자; 2010.08.04.수요일,맑음
 
 
1.세조와 신숙주
   세조는 신하들과 술자리를 자주 베풀었다.
   세조는 술자리에서 여러가지 정사를 논하는 주석 정치였다.
   술자리에서 신하들과 격조 없이 놀다보니 이와 관련된 많은 일화들이 있었다.

     하루는 세조가 신숙주에게 팔씨름을 제안한다.

     첫 판은 원래 무예적 기질이 뛰어난 세조가 이겼다.
 
     이에 신숙주는 한 번 더 하자고 제안하고 술김에 잔꾀로 세조를 이긴다.
 
     시작 하자 마자 확 넘겨버리는 꼼수를 쓴 것이다.

     이를 지켜본 한명회는 신숙주의 종에게 신숙주의 방의 촛대를 치워 버리라고 지시하다.

     세조는 신숙주가 아무리 술에 취해도 촛불을 켜고 책을 보는 버릇이 있다는것을 알고 있었다.
 
     책 읽는 모습을 보면 자신을 이긴 것이 술김이 아니라 제정신인 상태에서 한 것이라고 세조가 생각할까 걱정한 것이다.

     나중에 세조가 정말로 괘씸히 여겨 신숙주의 집에 들렀다가 촛불이 꺼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 일을 문제 삼지

     않았다는 야사다.

 

 

 

2. 세조와 정인지
 
    반면,술에 취해 인생이 망한 신하가 바로 정인지다.
 
    정인지는 세조에게 '네가 그럴 수 있느냐!'고 하는 등 술에 취해 주사를 많이 부렸다.
 
    결국 술자리에서의 행태로 정인지의 신임이 떨어져 그는 점점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명회  (0) 2011.04.06
금계필담  (0) 2010.09.10
세조의 장녀인 의령 공주 세령  (0) 2010.07.05
계유정난과 이징옥의 난  (0) 2010.07.05
조선왕 제7대 세조 이야기  (0) 2010.07.05

세조의 장녀인 의령 공주 세령(儀寧公主 世寧)     작성일자; 2010.10.05.월요일,맑음

 

정희왕후 윤씨 소생의 의령 공주 세령은 야사 속 인물로 생존 확인 불가능하다.

금계필담에 의하면

세조의 행동에 대해 직언을 마다하여,

세조가 장녀인 의령공주 세령(혹은 세희)을 죽일까 두려워 정희 왕후는 유모와 함께 야반도주 시켜 멀리가 살라하였다.

심신유곡에서 우연히 만난 계유정란의 피바람을 모면한 김종서의 손자(김승유)와 결혼하여 아들까지 낳아 살고 있었다.

후일 마침 요양차 세조가 이 곳에 왔다는 소식에  마중나간 의령공주는는 아버지를 만나 슬피울었고 ,

지난날의 과오를 뉘우치고 있던 세조는 두 사람의 결혼을 승락하였다 한다. 

그래서 김종서의 대가 끊어지지 않고 내려 올수 있었다 한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계필담  (0) 2010.09.10
세조와 술자리  (0) 2010.08.04
계유정난과 이징옥의 난  (0) 2010.07.05
조선왕 제7대 세조 이야기  (0) 2010.07.05
금성대군  (0) 2010.05.09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