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유정난(癸酉靖難)과 이징옥의 난       작성일자; 2010.07.05.월요일,맑음

 

계유정난은 단종1년인 1453년11월10일.수양대군이 김종서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한 사건을 말한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은 

영의정 황보인,좌의정 남지,우의정 김종서 등에게 자기가 죽은 뒤 어린 왕세자가 등극하였을 때 보필할 것을 부탁하였다.

문종의 뒤를 이어 즉위 당시 12세인 단종은

어렸기 때문에 세종과 문종의 유명을 받든 김종서가 조정의 인사권 및 정권과 병권을 쥐고 섭정을 하였다.

수렴청정 통해 왕실의 중심점 역할을 해야 할 왕대비,대왕대비 등의 부재 상황에서,

세종 시대에 각종 정치,문화 사업에 참여한 과정에서 각자 만만치 않은 세력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중에서도 세종의 둘째아들 수양대군과 셋째아들 안평대군 등의 세력이 가장 강성해,

조정의 신료와 왕실,심지어 환관,나인까지도 이들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안평대군 역시 수양대군과의 정치적 대결은 친형제 관계를 떠나 피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안평은 혜빈의 아들들과 금성대군 등을 두고 있었다.

수양은 양녕대군과 효령대군 그리고 동생인 임영대군,환명회를

 

그러나 왕권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고 판단한 김종서와 그를 따르는 신하들은 당시 왕자들 세력에 견제가 되는 막강한

세력들이다.

조정 대신들이 안평대군과 손을 잡게 되자, 정치적 입지에 위험을 느낀 수양대군은

자신의 뜻을 뒷받침해 줄 수하 책사로 권람,한명회 등을 맞이하게 되는데,

수양대군은 권람을 통하여 당시 경덕궁직으로 있던 한명회를 얻고,

한명회를 통해 다시 홍달손,양정 등의 유능한 무인 30여 명을 포섭하여 기회를 엿보았다.

 

한명회와 권람 이 두 사람의 합류 이후 수양대군의 정치적 세력 확대에 가속도가 붙어,

평소 절친한 관계였던 신숙주,무예에 정통한 문관 홍윤성,무관 향정, 청백리 영의정 황희의 아들 홍수신,

김종서의 최측근 이징옥의 형과 아우 이징규,이징석 형제 등이 그 세력으로 합류하게 되며,

왕실 인물들의 포섭에도 노력을 기울여  양녕대군,임영대군,영응대군

그리고 세종의 후궁 신빈 김 씨 소생인 계양군 이증 등의 주요 종친도 그의 세력이 되었다.

한명회는 세상을 읽는 능력이 있는 인물로 수양대군의 책사로 활동한다.

불우한 처지에 있던 한명회와 권람은 왕권의 추락과 신권의 막강함과 사회 혼란을 이유로 들어

정변의 당위성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수양대군은 한명회 등의 도움을 받아 정치적 계략을 획책하게 되는데,

그 첫 시도는 김종서와 황보인,민신 등의 경계심을 무마하기 위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원래 안평대군이 책사 이현로의 조언으로 그 중요성을 깨닫고 자신이 자청을 했는데,

수양대군이 세력을 동원해 이를 저지시키고 자신이 가게 된 것이었다.

이 사행길을 통해 수양대군은 신숙주를 완전히 자신의 세력으로 포섭하게 되며,

본래 목적이었던 김종서 등의 조정 대신들의 경계심도 무마시키는 데 성공하게 된다.

귀국 후 수양대군은 한명회,권람,홍윤성 등과 함께

자신의 집권에 방해가 되는 조정 중신들을 제거할 살생부를 작성하고, 쿠데타 계획을 서둘렀다.

거사일은 음력10월10일, 첫 목표는 좌의정 김종서였다.

수양 대군은 병력 동원이 가능했던 무관 양정, 홍달손 등을 통해 경복궁을 점령하기로 하고,

자신은 직접 종 임운,양정 등과 함께 관복 차림으로 김종서의 집으로 향한다.

김종서는 거사 며칠 전 신숙주,최항 그리고 거사 당일 권람의 방문을 받았다.

그러나 수양대군이 쿠테타를 획책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김종서는 무방비 상태였고,

수양대군은 종 임운에게 철퇴를 가지고 있다가 자신이 신호를 내리면 즉시 김종서를 내려치라는 명을 내렸다.

수양대군은 좌의정 김종서의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수하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었고,

김종서는 들어가 담소를 청하나 수양대군은 핑계를 대면서 주저하였고,

미리 준비한 유인용 편지를 김종서에게 전달한다.

김종서가 편지를 달빛에 비춰 보는 순간 수양대군의 신호를 받은 종 임운이 철퇴로 김종서를 내리쳤고,

이어서 임운이 김종서의 아들 김승규와 그 동료들을 철퇴로 내리치니,계유정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수양대군은 준비한 행동을 착실히 실행에 옮긴다.

사대문과 주요 군 시설을 장악한 뒤,

경혜 공주댁 즉,시좌소로 들어가 단종에게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짜고 역모를 획책했다고 보고한다.

단종이 급히 경복궁으로 환궁하고,한명회와 홍윤성을 시켜 광화문과 대궐문을 장악하게 한 뒤,

홍달손에게 환궁하는 단종의 행렬을 3, 4겹으로 호위하게 하고, 시좌소를 지키게 한다.

단종의 명을 빙자하여 조정 대신들을 모두 입궐하게 한다.

이 때 재상들이 들어올 때 겸종은 제거하고 홀로 들어오게 하였는데, 대신들은 근정문 오른편 작은문에

혹은,왼편 작은문에 입궐시킨 뒤에 왼편문은 수양편의 신하들로 무사하고 들어갔던 반에,

오른편문은 김종서 편의 대신들로 홍유성과 함귀, 구치관 등 무뢰배가 철퇴로 내려치는 것이었다.

조정 대신 중 수양대군에게 협조적이었던 판중추원사 정인지,이계전,이순지 등은 무사했던 반면에,

김종서 일파로 살생부에 적힌 영의정 황보인,이양,조극관 등은 모두 철퇴에 맞고 살해되었다.

이명민, 조번, 김대정, 하석 등은 자택에서 수양이 보낸 자객들에게 죽고,

문종의 능인 현릉에서 비석 제작을 감독하고 있던 미신을 현릉에서 창으로 가슴을 찔러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우의정 정분, 우참찬 허후, 평안도 관찰사 조수량 등을 유배시켰다가 사약을 내려 죽였다.

평온하던 서울이 하룻밤 사이에 도살장으로 변해버렸다.

이 때 임운의 철퇴에 맞은 김종서는 가까스로 일어나 입궐하기 위해 여장을 하고,

가마에 올라타 도성의 사대문을 돌고 돌지만 열릴 생각이 없자 차남 김승벽의 처가 즉, 사돈댁에 피신한다.

그러나 김종서를 보았다는 몇몇 행인들에 의해 다음날 아침 양정이 김종서의 숨통을 끊으러간다.

김종서는 갑자기도 어이가 없었고 마지막임을 직감하였다.

죽기전 양정에게 옛날 자신이 육진을 개척하는 도중 도적을 이끌고 행패를 부렸다는 등

폭언하다가 순진하게도 자신이 투옥되는 줄 알고 "정승이 어찌 걸어가느냐? 평교자를 내오너라." 라고 말하는 그 순간,

양정은 가차없이 김종서의 목을 베었다.

그렇게 노인은 비명에 갔다.

김종서가 철퇴를 맞고 깨어난 것처럼, 선공부정 이명민이 집에서 자객에게 철퇴를 맞았으나 깨어나서,

들것에 실려 김종서 집에 갔다.

이때 김종서가 가마를 타고 돌아다녔기에 다시 집으로 가던 중, 소식을 들은 홍달손은 호군 박제함을 보내 죽였다.

수양은 김종서 부자, 황보인, 민신, 조극관, 이양, 원구, 윤처공과 이명민 등의 머리를 베어 저자에 효수시켰다.

또한 반대파 대신들을 귀양 보냈다.

지정을 영암에 보내고, 정분을 낙안, 조수량을 고성, 이석정을 영일, 안완경을 양산(梁山)에 귀양 보내었다.

또 내관 한숭을 여연, 황귀존을 강계에 압송하여 종으로 만들고,

사복소윤 구치관을 지의금 부사로 삼아 경성 도호부사 이경유를 배게했다.

수양대군의 의해 비명에 간 이들은 죽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수양 측은 그 가족과 재산도 그냥 두지 않았다.

가족에게도 가장 못지않은 가혹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의금부는 '대명률''모반 대역조'에 따라 그 가족을 처리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효시된 김종서 계열의 대신들과 안평대군 부자의 아비와 열여섯 살 이상의 자식은 모두 교형에 처하고,

백,숙부와 형제의 자식은 적(籍)과 같고 다른 것을 제한하지 말고 모두 3,000리 유배에 처한다.

열다섯 살 이하 및 모녀, 처와 첩, 조손, 형제 자매는 공신의 집에 주어 종으로 삼고,

재산은 아울러 관에 몰입한다.'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안쓰러운 계유정난이었다.

 

이렇듯 쿠데타가 성공을 거두자, 수양대군은 안평대군의 처벌을 형식적으로 반대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곧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켰다가 의금부를 통해 사약을 내렸으며,

살해된 조정 중신의 처첩, 자녀들을 노비로 전락시켰다.

 그리고 정난공신 1등에 자신과 정인지, 그리고 사돈지간이었던 한학 등을 임명하고,

나머지 신하들을 2등, 3등으로 책록하여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독점했다.

수양 자신은 영의정과 군권을 모두 장악하여 사실상 재위의 기반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역적으로 단죄된 안평대군 등은 선원보략에서 삭제 되었다가 훗날 숙종 때 복권된다.

이 정난과 아주 밀접한 반란이 있었는데,

바로 김종서의 참모 이징옥이 일으킨 이징옥이다.

 김종서를 죽였다는 명분으로 일으켰지만, 이징옥 자신은 칭제건원을 하였다.

'대금'이라는 국가를 세우고, 남만주의 오국성을 도읍으로 황제에 즉위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난도 얼마 못 가 종성 판관 정종과 대호군 이행검의 밀사로 살해당했고,허무하게 이 난은 정리되었다.

수양대군과 정인지 등은 단종을 압박하여 집현전으로 하여금 자신을 찬양하는 교서를 짓게 하는 등

집권태세를 굳혀갔다.

이렇게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여 2년뒤인 1455년 마침내 왕위를 차지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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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 제7대 세조(世祖 ) 이야기          작성일자; 2012.08.14.화요일,맑음

 

세조; 수양대군 이 유(瑈),세종의 둘째 아들

생졸; 1417.09.29~1468.09.07

재위기간;1455년~1468년

능; 경기도 양주의 광릉.

     본래 묘호를 신종으로 하려 하였으나 아들인 예종의 강력한 주창으로 묘호가 세조로 정해졌다.

 

 가계도;

   부 : 제4대 세종

   모 : 심온의 딸 소현왕후 심씨

   왕비 : 정희 왕대비 윤씨(貞熹王大妃 尹氏),윤번의 딸

   후궁 : 근빈박씨  

            덕원군,창원군

 자녀 (5남 2녀)

      1438 (정희왕후 윤씨 生) : 의경 세자 장 : 제9대 성종의 아버지,아들에 의해 추존된 덕종

      1442 (정희왕후 윤씨 生) : 의숙 공주 세선

      1449 (근빈 박씨 生) : 덕원군 서

      1450 (정희왕후 윤씨 生) :해양대군 황: 제8대 조선 왕 예종

      1458 (근빈 박씨 生) : 창원군 성

      미상  (정희왕후 윤씨 生); 의령공주 세령 ; 야사 속 인물로 생존 확인 불가능

 

세종대왕과 소헌왕후 심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수양대군은 조선 왕조에서 최초로 반정을 일으켜 집권한 지도자로,

1455년 계유정란으로 즉위한 후,사육신,생육신 등의 반발과 사림세력의 비판을 초래하였다.

단종 복위 운동을 진압하고 사육신과 그 일족을 대량 숙청하였으나 후일 죄를 뉘우치고 불교에 귀의하였다.

비록 의롭지 못한 행위로 왕위에 오르고 상왕이 된 자신의 조카의 작위를 격하시킨 뒤 다시 그를 죽여서

큰 도덕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 후 스스로 뉘우치고 정사에 몰두하여 재위 14년간 많은 치적을 쌓았으며 조선 초기의 왕권 확립에 공헌이 많았다. 글씨에 뛰어났다는 평도 있다.세조는 왕위에 오르는데 큰

기여를 해준 공신들을 대부분 죽인 할아버지 태종에 반해, 세조는 공신들을 내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대

하여 결국 조선의 당파 싸움을 최초로 시작한 훈구파의 형성을 가져오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1417년9월29일 충녕대군인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제3대 태종이 어린 손자들과 산책을 하던 중

한 고승이 두번째 손자분이 할아버지의 기상을 많이 닮았다고 하자,

어떻게 닮았느냐고 묻자, 둘째 손자(수양대군)가 같은 운명을 걷게 될 것이라는 예언하였다.

그가 태어날 무렵 태종은 자신의 뒤를 이을 양녕대군(장자)이 세자로서의 위치가 상당히 불안하고,

주색을 즐기는 등의 많은 문제를 일으키자,태종은 세자를 교체할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의 나이 2살때,

숙부인 성녕대군(네째)이 세상을 떠나고,아버지인 충녕대군이 왕세자를 거쳐 세종으로 즉위하였다.

처음에는 진평대군이었으나,후에 함평대군,진양대군으로 개봉되었고,

세종10년 1428년.수양대군으로 개봉되었다.

 

 수양대군은 박식하고,병약했던 형 문종과는 달리 무예 실력도 출중했다.

승마와 격구, 활쏘기 재주가 뛰어났고 사냥을 즐겼다.

세종이 병들고 세자였던 문종이 대리청정을 하자,

그는 동생인 안평대군(세째)과 함께 신하들에게 세종과 문종의 교지를 전하기도 하였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형제는 당시 조정 중신들이 왕권에 공공연히 도전하는 것을 보고 탐탁치 않게 여겼다.

세종의 병약함을 기회로 일부 국정 전반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는 왕이 되고자 하는 야심을 철저히 숨겼고,정치 보다는 학문과 서적 간행에 힘쓰면서 인맥을 형성하고

정치를 하려는 기회를 노리던 중 한명회,권람을 알게 되고 그들로 부터 후에 신숙주 등의 인재들을 포섭하게 된다. 

문종의 건강이 상당히 좋지 않았고, 후사도 나이가 어렸다.

세종 자신도 건강이 좋지 않은데다,문종은 세종보다도 더 병약하여 일찍 사망할 우려도 있었다.

세종은 일찍 문종에게 대리청정을 하게 하여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였고,

세종은 또, 자신이 일찍 죽고 세자 역시 오래 못갈 것을  예상하고 집현전의 학사들에게 어린 세손의 보필을 부탁하였는데

그는 이를 기회로 여기게 되었다.

 

1450년 세종이 승하하고

그 뒤를 이은 문종은 병약하여 왕위에 오른 지 2년여 만에 승하하고 12살의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였다.

단종이 즉위하면서 김종서,황보인등의 신하들이 정권을 장악하자 왕실과 훈신들은 위기 의식을 느끼자  

이때 안평대군(세째)과 금성대군(여섯번째) 등이 두각을 드러내고 ,

안평대군 계열에서 왕권에 뜻을 두고 있음을 알게 되자 수양대군 역시 발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단종이 즉위하자 왕족의 대표로서 자신을 단종을 최측근에서 모실 수 있는 보호자라고 말하였고,

무신 세력을  양성하여 왕위를 찬탈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안평대군계열이 먼저 손을 쓰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자 1453년에 계유정난을 일으켜, 

신권을 억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왕족과 성리학자들의 지지를 획득한다.

이어 정인지,한명회,권람 등과 공모하고 홍윤성,홍달손등을 통해 병력을 모은 뒤

문종의 명으로 단종의 보호책임을 맡은 황보인,김종서 등을 죽이고,아우 안평대군을 강화도에 유배시키고  

영의정 부사가 되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어 안평대군을 탄핵하여 사형시킨 뒤,훈신들의 추대로

1455년.단종을 강제적으로 상왕으로 올려 조선의 새로운 임금으로 등극하였다.

1455년.즉위하여 14년간 왕위에 있었다.

1453년.함길도 종성에서 이징옥 난이 발생했으나 부하들이 이징옥을 배신하는 내분으로 쉽게 토벌했다.

1456년 2월 단종을 복위시킬 목적으로 성상문,성승,유응부등이 거사를 도모하다가 세조의 측근인 정창손의

 사위 김질의 밀고로 일망 타진 되었고,세조가 즉위한 이듬해(1456년)에 성상문,유성원,하위지등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과 무인들은 연회때 별운검을 설치한 뒤 세조3부자를 제거하고  단종의 복위를

 꾀하려 계획을 수립하였다.그러나 가담자의 한명인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에게 이를 말하고,

 정창손의 설득에 의해 사육신의 정변 기도를 폭로한다.

1456년.성상문등이 단종의 복위를 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조는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한 후 강원

 영월로 유배보내고,집현전을 폐지하였다.세조는 사육신 중 성상문,하위지,박팽년,유응부등을 회유하려

 하였으나 이들은 거절하고 죽음을 택했다. 세조는 사육신과 그 가족 6백여 명을 처형하고,유배 보냈으며

 사육신 가문의 여성들은 공신의 노비와 관비가 되었고, 4촌 이상의 친척들은 노비로 삼거나 외지로 유배를

 보내는 등의 대숙청을 감행한다.

1457년.넷째 동생 금성대군의 단종 복위 계획을 세운다.

  동생 금성대군,순흥부사 이보흠 등이 또다시 단종 복위 사건을 일으키자 금성대군을 죽이고 단종도 같이

  죽였다.또한 사육신과 관계된 여인과 재산을 공신의 노비로 분배하여 멸문시켰다. 

  사건은 세조로 하여금 의심을 더욱 부추기는 원인이 됐고,조카인 단종을 죽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

  하였다.사육신등을 처형한 뒤 문사들을 억압,탄압한다는 비판에 직면하자

  그는 정몽주의 후손들과 문도들을 발굴해서 등용한다.이때 김숙자와 김종직 역시 등용되는데,

  김종직은 세조에 의해 등용 되었으면서도 후일 조의제문을 지어 세조의 반정을 조롱했고,

  김종직의 제자들과 그의 학파는 세조의 반정을 찬탈로 규정하고 조롱하였다.

 

1457년 단종을 노산군으로 강봉하여 영월에 유배하였다.

1459년 신숙주를 파견하여 여진족을 타이르게 했고,경고를 듣지 않자 토포사를 보냈다.

1460년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간경도감을 신설하여 불경을 간행 했으며,불교를 숭상하여 '원각경'을 편찬하게 하고 원각사를 창건했다.

   또한 과전을 폐지하고 직전제를 실시토록 하였다.  

 

   한편, 그가 며느리뻘인 귀인 권씨와 소훈 윤씨를 범하려 했다는 추문이 돌았다. 

   권귀인과 윤소훈은 세조의 장남 의경 세자의 후궁들이었다.

   김일손은 이 사실을 그대로 사초에 실었다가 사화의 원인이 되었고 자신도 희생되었다.

   김일손은 귀인 권씨의 조카이자 양자 허반에게서 들은 것을 사초에 기록하였는데

   연산군은  사초 기사 중 권 귀인은 바로 덕종의 후궁이온데 세조께서 일찍이 부르셨는데도  분부를 받들지

   아니했다'는 구절과 '세조는 소훈 윤씨에게 많은 전민과 가사를 내렸고 항상 어가가 따랐다'는 사초의

   내용을 구실삼았다.

  1461년에는 간경도감을 설치해 많은 불경을 국역하도록 명하기도 했다.

  함경도에서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조카 귀성군을 파견하여 평정케 하고,

  강순을 파견하여 건주위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1468년 세조는 자신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어 가고 있음을 깨닫고,

   한명회,신숙주,구치관 등을 불러 그들에게 왕세자 해양대군을 잘 보필해줄 것을 부탁했다.

   9월6일 왕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다음 날,향년 52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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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성대군       작성일자; 2010.05.09.일요일,맑음

 

금성대군;

생졸;1426(세종 8년)~1457년(세조 3)

금성대군은  단종의 숙부이며,이름은 유(瑜)이며 세종의 여섯째 아들이며,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이다.

양육은 태종의 후궁인 의빈 권씨가 맡았다.

1433년(세종 15년) 1월에 금성대군에 봉해지고,

3년 후인 1436년(세종 18년) 4월에 친형 광평대군과 함께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어 12살 때인 1437년(세종 19년) 2월 최사강의 딸과 혼인하여, 후에 아들 이맹한을 두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세종의 명으로  태조의 8남 의안대군의 봉사손으로 출계하였다.

세종은 그를 총애하여 계속 그의 집에 거처하거나 이어하기도 했다.

1440년(세종 22년) 6월 경 한때 창진(瘡疹)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기도 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그의 병환이 나았고, 세종은 그를 치료한 의관들과 관련자들에게 크게 상을 내린다.

그는 불교 신자였고 사찰에 후원을 하기도 했다.

1452(문종 2년) 한때 문종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병환을 낫도록 사찰에 파견될 계획이 세워졌으나 중간에 취소되었다.

1452년에 단종이 즉위하자 형인 수양대군과 함께 즉위한 단종에 의해 사정관으로 호출되었다.

이때 단종에게 친히 물품을 하사받으면서 좌우에서 보필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1453년 수양대군이 정권탈취의 야심을 가지고 한명회,신숙주 등과 결탁하여 안평대군을 숙청하고

단종의 보필대신인 김종서 등을 제거하자, 형의 행위를 반대하고 조카를 보호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조카 단종이 즉위하면서 단종을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는데, 이것이 친형 수양대군(세조)의 반감을 샀다.

1455년(단종 2년) 1월에는 영의정 수양대군을 비롯한 여러 대신들이 왕족들이 그의 집에서 활쏘기 시합을 한 것을

구실삼아 탄핵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2월 고신을 박탈당하고 유배령이 내려졌으나, 무죄로 판결받고 고신을 되돌려받는다.

그러나 세조 즉위 후인 1455년(세조 1년)에 경상도 순흥(현재의 경북 영주시)에 안치되고,

그의 재산 및 노비는 모두 몰수당했다.

2년 후,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함께 비밀리에 단종복위를 위한 거병과 거사를 계획한다.

그러나 당시 순흥의 관노가 탈출하여 한성으로 달려가 세조에게 '금성대군이 순흥부사 이보흠과 함께 노산군(단종)의

복위를 꾀하고 있다.' 라는 보고를 올려 사사되고 말았다.

그 때가 1457년(세조 3년) 음력 10월 21일로,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다.

이와 더불어 그의 자손들은 단종과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했던 다른 세종의 왕자들(한남군,영풍군 등)의 자손들과 함께

종친록에서 모두 삭제되었다.

금성대군의 묘소를 찾던 순흥부의 주민들은 금성대군이 사약을 받고 사사된 곳에서 그의 혈흔이 묻은 돌을 발견하고

주변에 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

이를 금성단이라 한다.

그 뒤 중종조에 와서 금성대군의 증손 이의가 왕에게 청을 올려, 금성대군의 억울함을 주장하였다.

이를 옳게 여긴 중종은 1519(중종 14년), 금성대군의 자손 3대에게 관작을 봉하고 승습의 명을 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아들 이맹한은 1519년(중종 14년)에 특명으로 함종군에 추증되고 손자 이연장은 동평군에 봉작되었다.

이후 금성대군의 관작이 숙종조에 들어 복구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정조 때에는 그의 자손들이 종친으로써 대접을 받아 제사를 지낼 수 있게 되었다.

현재도 금성대군을 기리는 여러 사적지에서 그에게 사사 명령이 내려진 음력 10월 21일을 기일로 보고,

봉사손들이 중심이 되어 제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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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육신과 생육신         작성일자; 2010.04.29.목요일,맑음

 

<사육신>

1453년 수양대군은 계유정난을 통해 단종의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병권을 장악했다.

이때 성삼문·정인지·박팽년 등 43명이 정난공신의 칭호를 받았고, 이어 수양대군은 왕위에 올랐다.

세조가 왕의 전제권을 확립하려 하자 집현전 출신의 유신들은 즉각 반발했다.

일부 유신들은 세조를 몰아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계획을 도모하였고,

이 계획은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이들은 1456년 6월 창덕궁에서 명의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를 이용하여 세조를 살해할 계획이었으나

연회 절차에 변동이 생겨 거사가 미루어지게 되었다.

이때 불안을 느낀 김질이 밀고해 주모자 6명은 모두 처형당했다.

훗날 남효온은 '추강집'에 사육신전을 적어 이들 6명의 충절을 기렸다.

                  

 

 

<생육신>

사육신에 비교해서 살아서 절개를 지킨 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을 가리키는 말이다.

계유정난에 의한 세조의 왕위찬탈은 집현전 출신의 학자들이 추구하는 유교정치와 상이하여 갈등으로 나타났으며

단종 복위 운동으로 나타났다.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어 이 때 죽음을 당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를 사육신이라 부르고,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유랑 생활을 하며 초야에 묻힌 사람을 생육신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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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과 엄홍도         작성일자; 2011.04.29.목요일,맑음

 

 

단종이 숨을 거둘 때의 정확한 날짜와 상황은 알려져 있지 않다.

단종은 14571021(양력117) 자살하였다.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떠난 지 약 4개월 정도되었을 때이다.

 

여러 부서의 신하들이 단종과 금성대군 등의 처벌을 건의하였지만 세조는 답을 피하였다.

단종의 할아버지격인 양녕대군과 영의정 정인지 등의 상소도 소개하고 있다.

그들 역시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이에 세조는 금성대군에게는 사약을 내려 죽도록 하고 단종의 장인인 송현수는 교수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단종이 이를 듣고 스스로 목매어 자살을 하였다는 것이다.

 

즉,112일,114일,115일,116까지 단종이 자살 했음을 기록하기 바로 직전의 4일간이다.

그날도 포함 시킨다면 5일간 이다.

그 시기는 세조의 큰 아들이자 왕세자인 도원군이 죽어서 상중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도원군의 묘 자리를 찾기 위해 거의 모든 신하들이 동분서주하고 있었던 때이다.

단종이나 금성대군의 처벌을 요구하던 사람들이 주로 왕의 종친들이었다.

세조는 자신의 자식이 숨을 거둔 어수선한 상황에서 단종을 미리 죽여 놓고 그가 자살 할 수밖에 없었다는 명분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방아쇠를 당겨준 인물이 바로 신숙주,정인지였다는 합리적 의심도 간다.

즉 ,유배 초기에 몇 번 언급되었던 단종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그러다가 928일에 신숙주,정인지에 의해서 처벌하자는 내용으로 바뀌어서 등장한다.

그 이전에는 그런 내용의 말들이 오고 간적이 없었던 것이다.

) --> 

단종의 죽음에 관한 단초를 제공하는 것은 야사이다.

단종의 죽음에 관한 것을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서 찾기란 어렵다.

단종의 죽음에 관련된 말들의 대다수는 야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야사인 '병자록'이 단종의 죽음을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병자록'에 의하면,

금부도사 왕방연이 사약을 받들고 영월의 관풍헌 이르러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 때 나장이 시각이 제체 된다고 발을 굴렀다.

왕방연이 하는 수 없이 들어가 뜰 가운데 엎드려 있으니 단종이 나와서 온 까닭을 물었으나 그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 때 단종을 항상 보살피던 통인 하나가 스스로 할 것을 자청하고 활줄에 긴 노끈을 이어서,

단종이 앉은 좌석 뒤의 창문으로 그 끈을 잡아당겨서 죽였다는 것이다.

이 일을 마친 왕방연이 다음과 같은 시로 자신의 마음을 달랬다.

) -->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임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더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 --> 

단종의 죽음을 충절로 마무리한 사람이 엄홍도이다.

엄홍도는 영월의 하급관리였다.

그런 그가 영월에서 단종과 거의 동급으로 존중받는 이유는 충절의 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관풍헌에서 죽음을 맞은 단종은 시신도 수습되지 않고 동강에 버려졌다.

단종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엄명을 내려졌기 때문에 아무도 단종의 시신을 거두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엄흥도가 목숨을 걸고 동강에 나가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다.

그는 지게에 단종의 시신을 싣고 동을지산 오르다 노루가 잠자던 자리에 눈이 쌓여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그곳에 시신을

암매장했다고 한다.

그 곳이 현재의 장릉인 것이다.

이렇듯 단종의 비참한 죽음을 충절로 마무리한 사람이 엄홍도이다.

 

 

 

조선왕 제6대 단종 이야기       작성일자; 2010.04.29.목요일,맑음

단종; 문종의 첫째 아들

생졸; 1441~1457.17세

제위기간; 1452~1455. 3년

능; 장릉은 비운의 왕으로 알려진 제6대 단종의 능이다.

   조선 왕릉은 현재 북한에 있는 2기를 제외하고 대부분 도성인 서울을 중심으로 반경 4~40km에 조영 되었다.

   장릉은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군에 있다.

가계도;

   부; 제5대 왕 문종

   모; 현덕왕후 권씨

     누나; 경혜공주

     단종; 

       정순왕후 송씨; 생졸(1440년-1521),단종의 정비 여량부원군 송현수의 딸로  본관은 여산이다.

 

단종은 문종과 현덕왕후 권 씨의 아들로 태어난 다음 날 어머니를 여의었다.

10세 때인 1450년, 아버지인 문종의 즉위로 왕세자로 책봉되었는데 문종이 왕이 된 지 2년 3개월 만에 사망하는 바람에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한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왕이 된다.

 

정순왕후 송씨는 김종서의 사후 1454년에 간택령에 따라 왕비 교서를 받고 즉위하였다.

 남편 단종이 강등되면서 군부인으로 격하되었다가 관비가 되었다.

 한때  신숙주가 그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가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이후 세조는 그를 노비이지만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으로 보냈다.

  이후 남편 노산군의 명복을 빌다가 사망하였다.

  중종 때부터 복위가 거론되다가 송시열,김수항의 거듭된 건의로 1698년(숙종 24년)에 단종과 함께 복위되어 왕후로

  추봉되었다.

  전라북도 출신이다.

   세종의 왕자 영응대군의 부인 대방군부인 송씨는 그녀의 고모이자 시숙모이다.

 

1448년(세종 30), 8세 때 왕세손에 책봉되고,

1450년(문종1년), 문종이 즉위하자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1452년(단종1년)5월, 문종이 재위 2년 만에 죽자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문종은 자신이 병약하여 황보인,김종서 등에게 나이 어린 세자의 보필을 부탁했고,

  집현전 학사인 성삼문·박팽년·신숙주 등에게도 좌우에서 힘을 모아 도와주라는 유언을 했다.

1453년(단종2년), 숙부 수양대군이 권람,한명회등과 함께 황보인,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정권 장악하자

    단종은 단지 이름뿐인 왕이 되었다.

    짧은 재위 기간 중에도 양성지에게 '조선도도''팔도각도'를 편찬하게 하고,

1454년에는 '황극치평도'를 간행하게 했다.

  '고려사를 인쇄,반포했으며,그 해 12월에는 각 도에 둔전을 설치하도록 명령했다.

1455년,단종은 한명회·권람 등의 강요에 더이상 견디지 못하여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이 되었다.

1456년 성삼문·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 등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 모두 처형된 뒤,

1457년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

1457년  9월 경상도 순흥에 유배되었던 숙부 금성대군이 다시 단종의 복위를 계획하다가 발각되자,

    노산군에서 서인으로 강봉되었으며 10월에는 마침내 죽음을 당했다.

1681년 숙종7녀에는 노산대군으로 추봉되고,

1698년 복위되어 묘호를 단종으로 추증하고,능호를 장릉이라 했다.

 

영도교

영도교는 단종이 영월로 유배를 갈때 단종비 정순왕후와 마지막 이별을한 다리라 하여 영영 돌아오지 못한 다리라는

뜻에서 영도교라고도하고,영원히 이별한 다리라 하여 영리교 라고도 한다고 한다.

단종은 한사코 따라나서는 정순왕후를 간신히 떼어 놓으며 이다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돌아 섰다고 한다.

그때 단종의 나이는 17살이었으며,정순왕후 송씨의 나이는 겨우 18살이었다.

영도교에서 단종과 이별한 정순왕후는 지금 숭인공원에 있는 청룡사에 들어가 따르던 상궁과 하인등 6분이 함께

스님이 되어 82세까지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후손이 없어 단종 누나 정혜 공주의 시가인 정씨 문중의 선산에 묻혔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남양주에 있는 사릉이다.

 

 

 

 

 

조선왕 제5대 문종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         작성일자; 2010.04.29.목요일,맑음

 

생졸; 1436-1473,38세 

 경혜공주는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제 6대 단종의 친누이이기도 하다.

참판 정충경의 아들 영양위 정 종에게 하가하였는데, 

남편 정종은 단종 폐위와 사육신 사건으로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며 공주의 병을 이유로 잠시 도읍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유배된 뒤 사사되었다.

경혜공주 또한 가산이 적몰되고 유배되어 순천의 관비가 되었으나,

순천부사가 관비의 노역을 시키려 하자 거부했다고 한다.

이후 세조는 경혜 공주에게 집과 재산,노비를 하사하였으며,

예종에 이르러서는 경혜공주 내외의 아들을 종친의 예로 서용하였다.

 

경혜공주는 1473년 성종4년12월30일 죽었으며,

성종은 부의로 쌀,콩 아울러 70석,정포 50필,종이 1백권,석회 60석,촉랍 30근을  내려 주게 하였다.

공주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골에 있다.

 

조선의 국왕 가운데 가장 가엾은 인물로 단종이 손꼽힌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왕위에 오르자마자 숙부에게 왕위도 빼앗기고 결국 목숨마저 빼앗겼던 그의 짧은 인생은

실로 애잔하기 짝이 없다.

한데 그 시절 단종 못지않게 기구한 삶을 보내야 했던 여인이 있었다.

바로 단종의 친누나 경혜 공주였다.

 

경혜공주는 문종 현덕왕후 권씨의 맏딸이다.

1436년,세종 18년에 그녀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세자였지만,

어머니는 후궁인 종4품 승휘였으므로 국법에 따라 정3품 현주에 봉해졌다.

그녀의 신분은 세자의 서녀로서 어머니보다 품계가 높았다.

그해에 세자빈 봉씨가 폐출되었고,

이듬해인 1437년,세종 19년 2월 권씨가 세자빈으로 승격됨에 따라

그녀는 동궁인 경복궁 자선당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런데 7세 때인 1441년,

  세종 23년에 어머니가 남동생 홍위를 낳다가 산욕을 이기지 못하고  24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정2품 평창 군주였던 그녀는 권씨 가문의 여종 어리니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가 없어도 비교적 행복했다.

왕실에는 수많은 어른들이 있었고, 어린 왕자와 군주들의 웃음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수양대군,안평대군,금성대군 등 여러 숙부들의 눈길도 따스했다.

그런데 할아버지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한 15세 때부터 운명이 꼬이기 시작했다.

해가 바뀌어도 세종의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왕실에서는 그녀의 혼사를 서둘렀다.

자칫 국상이 선포되면 왕실이든 사가든 간에 3년 동안 혼인이 금지된다.

시기를 놓치면 그녀는 18세 이후에나 시집갈 수밖에 없다.

부마로 낙점된 인물이 전 한성부윤 정충경의 아들인 정종이다.

 

정충경은 효령대군의 장인이었던 정역의 맏아들이며 세종의 여덟째 왕자인 영응대군의 장인이다.

해주 정씨는 조선 건국 이래 태종·세종·문종·단종·중종·인조까지 여섯 명의 임금과 사돈관계를 맺은 유서

깊은 가문이다.

 

평창군주와 정종은 1450년,세종 32년,1월24일 혼사를 치렀고,

그로부터 52일 만인 2월17일 세종이 승하했다.

그 해에는 1월과 2월 사이에 윤1월이 끼어 있었으므로 날짜가 그렇게 된 것이다.

실로 아슬아슬한 혼인 작전이었다.

 

국상 중이었던 2월 22일 아버지 문종이 보위에 오르자 어머니 권씨는 현덕왕후로 추존되었고

그녀는 자동적으로 공주가 되었다.

공주와 정종 부부가 정식으로 거처를 마련하고 동거하기 시작한 때는 1년 뒤 소상이 끝난 1451년 봄이었다.

당시 문종은 경혜공주의 저택을 수리하게 했지만 오래 되고 기울어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양덕방에 저택을

짓게 했다.

그런데 사헌부 지평 윤면이 농사철에 백성을 동원하고 민가를 철거해서는 안 된다며 공사 중지를 요청했다.

그 무렵 여러 대군들의 저택이 매우 크고 화려해서 세간의 비난을 사고 있었다.

문종은 공주와 부마가 구설수에 오를까봐 걱정하여 윤면에게 헐리는 민가의 수효를 줄이고,

또 다른 폐단이 있는지 살피도록 명했다.

문종의 딸 사랑은 실로 지극했다.

1452년,문종 2년에 중추원 부사 조유례가 할머니의 허물 때문에 사직서를 내놓자 윤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2품의 관직에 제수했다.

경혜공주가 어린 시절 재액을 피하기 위해 그의 집에서 한 동안 살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 세종의 삼년상이 끝나고 불과 한 달 뒤에 아버지 문종 마저 세상을 떴다.

그리하여 남동생 이홍위(단종)가 1452년5월18일 경복궁 근정문에서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다.

그녀의 나이 18세 때였다.

본래 미성년인 세자가 보위에 오르면 성년에 이를 때까지 대왕대비나 대비가 섭정을 맡는 것이 정상이다.

한데 할머니 소헌왕후나 어머니 현덕왕후가 앞서 세상을 등졌으므로 왕실에는 섭정을 할 수 있는 어른이 없었다.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나 문종의 후궁인 귀인 홍씨,사칙 양씨 등에게는 애초에 섭정의 자격이 없었다.

할아버지 세종은 일찍이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김종서와 황보인을 비롯해 집현전 출신 신료들에게 단종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때부터 영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가 단종을 보위하며 황표정사로 조정을 이끌었다.

황표정사란 인사 대상자의 이름에 황색 점을 찍어 올리면

국왕은 그 위에 형식적으로 다시 점을 찍음으로써 추인하는 방식이었다.

그로 인해 조정 신료들은 두 대신(황보인,김종서)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등 왕자들은 두 사람의 독주에 크게 반발했고,

성상문,신숙주,박팽년 등 집현전 출신 신료들도 의정부의 비정상적인 권한 확대에 우려를 표했다.

그런 상황에서 강경파인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보필한다는 명목으로 조정에 드나들자,

김종서와 황보인은 온건파인 안평대군을 끌어들여 그를 견제했다.

이에 위기 의식을 느낀 수양대군은 명나라에 단종의 고명 사은사를 자처함으로써 경계심을 약화시킨 다음

1453년,단종1년10월10일 밤 권남,함녕회,홍윤성,양정 등을 동원해 정변을 일으켰다.

계유정난이라 불리는 쿠데타였다.

 

그날 단종은 마침 누나 경혜 공주를 만나러 영양위궁으로 출타하여 궁에 없었다.

수양대군은 무장 유숙,양정,이을운 등을 데리고 북촌에 있는 김종서를 찾아가 일가를 피바다를 만들었다.

그들은 이어서 곧장 궁궐에 들어가 황보인을 비롯해 수많은 대신들을 척살했다.

거사의 성공으로 정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정인지를 좌의정,한확을 우의정에 앉히고 자신의 심복들을

요직에 배치했다.

이어서 그는 동생 안평대군을 붕당의 주역으로 지목해 강화도로 유배한 뒤 사사했고,

이징옥의 난 까지 진압한 뒤 왕위를 이어받기 위한 왕실 회유에 나섰다.

 

1453년 단종 1년,12월26일에 수양대군은 압수한 황보인과 김종서,정분,허후 등의 땅을 난신전으로 삼아 공신들에게

분배하는 한편 왕실을 회유하기 위해 혜빈 양씨와 경혜공주,경숙옹주,봉보부인 이씨와 궁녀,내시들에게 직분에 따라

고루 나누어주었다.

그 때문에 어린 임금의 처지가 몹시 옹색해졌다.

정난 세력은 왕실을 우군으로 삼기 위해 이후에도 계속 선물 공세를 펼쳤다.

1454년,단종 2년 8월5일 수양대군은 정효전이 음모를 고했다는 이유로 영양위 정종,영천위 윤사로,판내시 부사 이귀,

상궁 박씨에게도 노비와 전답을 주었다.

이듬해인 단종3년 1455년에는 지방의 정적들로부터 빼앗은 노비를 혜빈 양씨,신빈·숙빈·숙의·정의공주,경혜공주,

경숙옹주,봉보부인과 상궁 박씨,판내시부사 윤기,행 내시부 좌승직 복회에게 노비 등을 주었다.

1461년(세조 7년) 7월,영양위 정종은 광주에서 승려 성탄 등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는 죄목으로 의금부에 압송되었다.

이때 그는 혹형을 당하면서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야말로 충신이라고 소리쳤다.

이에 분노한 세조는 10월 20일 정종을 능지 처참하고 아내 경혜공주를 순천부의 관노로 삼았다.

왕족은 대역 죄인이라도 고문하지 않고 노비로 삼지 않는다는 국법은 안중에도 없었다.

광주에 있다가 졸지에 노비 신세가 된 경혜공주는 피눈물을 훔치며 3살짜리 아들의 손을 잡고 순천부로 향했다.

어린 자식을 그곳에 홀로 남겨둘 수 없었다.

다행히 그녀는 순천부에 도착한 지 사흘 만에 사면을 받고 천역에서 벗어났다.

정희왕후 윤씨가 강경하게 남편 세조를 닦달했기 때문이었다.

이 극적인 상황 뒤에는 어린 시절 공주의 유모였던 어리니가 있었다.

그 무렵 자산군의 유모였던 어리니는 세조의 며느리 수빈 한씨를 통해 정희왕후에게 공주의 선처를

부탁 했던 것이다.

그 녀가 돌보던 자산군은 훗날의 성종이다.

만삭의 몸으로 서울에 올라온 공주는 얼마 후 딸을 낳았다.

젖이 떨어질 무렵 공주는 정희왕후에게 두 아이를 맡기고 절에 들어가 남편 정종의 극락 왕생을 빌었다.

세월이 지나자 예전의 따뜻한 숙부로 되돌아간 세조는 그녀를 극진하게 보살폈다.

1462(세조 8년) 2월14일, 세조는 한성부에 명하여 충익사를 경혜공주의 거처로 내주었다.

그 해에는 형조에 명하여 공노비를 내렸고 가을부터 생활에 필요한 녹봉을 지급하게 했고,

이듬해에는 하성위 정현조에게 그녀가 편히 살만한 집을 구하게 했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467년(세조 13년) 7월 8일에는 전지를 지급하기도 했다.

세조의 뒤를 이어 보위에 오른 예종은 1469년(예종 1년) 4월 10일 경혜공주에게 황금 2정과 백금 6정을 돌려주었다.

과거 세조가 그녀의 재산과 노비를 모두 돌려 주었지만 보물만은 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틀 뒤 예종은 신료들에게 선왕의 유훈이라며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를 역적의 후예가 아니라 종친으로

대접하도록 했다.

예종으로부터 보위를 물려받은 성종 역시 경혜공주를 각별하게 모셨다.

그는 어린 시절 유모 어리니로부터 그녀의 고통스런 역사를 들어 알고 있었고 아들 정미수와는 한집에서 살기까지 했다.

경혜공주는 1473년(성종 4년) 12월30일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고양의 대자골에 마련되었다.

 

문신 이승소는 '경혜 공주 묘지'에 이렇게 썼다.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는 서울에 올라온 뒤 정희왕후 윤씨의 배려로 어린 성종과 함께 사가에서 지냈다.

하지만 그는 공주의 자식이기에 앞서 대역 죄인의 아들이었으므로 늘 조심스럽게 살았다.

세조의 유훈이 없었다면 평생 노비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어머니 경혜공주의 고난에 찬 세월을 목도했던 그는 지극한 효성을 바쳤다.

공주가 병석에 누웠을 때 달인 약을 반드시 먼저 맛보았고 간호하면서 옷 띠를 풀지 않았다.

심지어 배변을 맛보아 용태를 살피기도 했다.

 

1476년(성종 7년), 정미수는 소꿉 동무인 성종의 배려로 문과에 합격한 뒤 돈령부 직장,형조 정랑 등의 벼슬을 역임했다.

서거정,신숙주 등의 공신들이 그를 죄인의 자식이라 하여 수시로 탄핵했지만 성종의 비호로 현직에 머물 수 있었다.

정미수는 성종에게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의 양자가 되기를 허락받은 뒤 그녀를 친자식처럼 받들어 모셨다.

이에 화답하여 정순왕후는 말년에 자신의 전 재산과 노비를 그의 아들 해림군 정승휴에게 물려주었다.

 

성종은 1476년과 1477년 두 차례에 걸쳐 유복자로 태어난 그의 여동생 정씨의 혼인 예물을 내려주었다.

또 1487년(성종 17년)에는 경혜공주를 끝까지 모셨던 사노비 강선을 면천시켜 첨지로 삼았다.

사헌부 장령 정지가 개국 이래 천례에게 양반 관직을 제수한 전례가 없다며 반대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그 후 정미수는 선전관.승지.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호조·공조판서를 역임했고,

연산군 대에는 참찬 겸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1506년 ,우찬성 재임 시절 중종 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 해평 부원군에 제수됨으로써 가문의 오점으로 남아있던

아버지 정종의 흔적을 말끔히 지우는 데 성공했다.

 

□ 문종의 딸 경혜 공주와 야사      

조선 문종과 현덕왕후 권씨의 맏딸이자, 단종의 누이이다.

세조 때 계유정난과 단종 복위운동의 돌풍 속에서 남편 정종과 함께 전라도 광주로 유배되었다가,

1461년 순천부의 관노가 되기도 했다.

1436년(세종18년)에 태어나  1473년(성종 4년) 세상을 떠났다.

1461년(세조 7년) 10월 22일,

  순천 부사 여사신은 아침나절 관아 앞마당에서 사내아이의 손을 잡고 우두커니 북쪽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 여종을 보고

  큰소리로 꾸짖었다.

  다른 노비들이 마당을 쓸고 대청마루를 닦느라 부산한 시간이었다.

  한데 여종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내아이와 함께 대청에 오르더니 여사신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이 나라 조선의 공주다.

  난데없이 흉사를 당해 이 꼴이 되었지만 너는 선왕의 신하로써 어찌 내게 이토록 무엄한가?”

  그 말을 들은 여사신은 깜짝 놀라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녀는 바로 문종의 딸이며 단종의 누이인 경혜공주였다.

  그녀는 몇 해 전 남편 영양위 정종이 귀양살이 하던 광주에서 아들을 낳았고 ,

  새로이 생명을 잉태한 상태에서 세조의 명을 받은 전라도 관찰사 함우치의 조치에 따라 순천부의 노비가 되었던 것이다.

  비로소 경혜공주를 알아본 여사신은 정중하게 예를 표한 다음 그녀에게 노비처럼 일하는 흉내라도 내달라고 간청했다.

  광주 목사 유곡이 부마인 영양위 정종의 감시를 소홀히 했다는 죄목으로 투옥되었고 가솔이 모두 노비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면 공주 때문에 자신도 그런 모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방에 세조의 눈과 귀가 있던 시절이었다.

  여사신의 말을 들은 경혜공주는 사내 아이를 한쪽으로 물러서게 한 뒤 걸레를 집어 들었다.

  남편 정종이 역모 혐의로 능지처사 당한 지 사흘 째 되는 날이었다.

  지옥 같은 세상에서 그녀가 구차한 삶을 이어가야 했던 것은

  아들 정미수와 태중에 숨 쉬고 있는 생명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왕 제5대 문종의 처 현덕왕후 권씨 야사      작성일자;  2011.09.12.월요일

 

현덕왕후 권씨; 문종의 처,단종의 어머니생졸; 1418-1441.24세

 조선왕 제5대 문종은 

세종과 소현 왕후 심씨 사이에 태어난 장남으로 천문,역수,산술에 뛰어났고,서예에도 능했다.

성격이 유순하고 자상하며,거동이 침착하고 판단이 신중한 성격이었다.

척불언론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며,세종 말기에 세종과 왕실에 의해 이루어진 호불정책은

문종이 즉위하자 유학 중심의 언관들은 왕실의 불교적 경향을 불식하고 유교적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안간 힘을 썼으며,

이는 대부분 문종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문종은 첫번째 빈궁으로 김씨,두번째로 봉씨가 있었으나 둘 다 과실이 있어 폐위되었다.

순빈 봉씨가 폐출되자 권전의 딸이 세자빈으로 정해졌는데 그녀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이다.

야사는 1457년 세조는 아들 덕종(의경세자)이 일찍 죽자,

아들 단종의 죽음에 한을 품은 문종비 현덕왕후의 혼령이 사주한 것이라 착각하여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헤치고 ,

관을 꺼내는 엽기적인 행각을 저질렀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 낭설이다.

덕종(의경세자)이 사망한 것은 1457년 음력9월2일로,오히려 단종은 음력 10월 21로 단종보다 한 달 정도 먼저 사망했다.

또한, 현덕 왕후가 세조 시기인 1457년 음력 8월 28일에 서인으로 격하되었지만,

그것 또한 현덕왕후의 어머니와 동생이 단종 복위 운동을 벌이다 발각되어 처형 당해 ,

현덕 왕후(1457년음력 6월26일 폐서인)가 아버지 권전(1458년 음력7월7일 폐서인)과 함께 연좌된 것이었다.

 

폐서인된 왕후의 능은 평민의 격에 맞도록 작게 재조성 되었고, 제사 또한 지내지 않게 된다.

이후 중종 때부터 현덕왕후의 연좌제 적용이 합당치 않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고,

그에 따라 1513년음력3월12일에는 11대 중종이 현덕왕후를,

1699년 음력7월15일에는 19대 숙종이 현덕왕후의 아버지 권전을 명예 회복시키게 된다.

 

 

 

 

 

왕세자 문종과 휘빈 김씨(徽嬪 金氏)    작성일자; 2010.04.27.화요일.맑음

 

휘빈 김씨는 문종의 세자 시절 세자빈으로

판돈녕부사 김구덕의 손녀이자, 상호군 김오문과 그 아내 정씨의 딸이다.

 

1427년 왕세자 이향(문종)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었으나 세자는 세자빈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휘빈 김씨는 문종 보다도 나이가 많았다.

이에 세자빈은 세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시녀 호초(원주 목사 이반의 첩의 딸;동궁 시녀)에게

민간에서 쓰는 갖가지 비법을 묻자 호초는 “남자가 좋아하는 여인의 신을 불에 태워 가루를 만들어 남자에게 마시게 하면

사랑을 받는다.” 라고 대답했다.

세자빈은 평소 시기하던 궁녀 효동·덕금의 신으로 시험해 보고자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다른 방법을 물었다.

호초는 대신들의 첩인 중가이와 하봉래에게서 들은 방법을 전했고,

그러던 중 세자궁의 시녀 순덕이 세자빈의 약낭에서 가죽신 껍질을 발견하고 세자빈의 어머니에게 이 일을 보고했다.

뒤늦게 세자빈이 각종 비방을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세종과 소헌왕후의 추궁에 세자빈이 모든 것을 자백하였다.

순덕이 가죽신 껍질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자백이 명확하자

세종은 1429년 7월 18일 세자빈을 폐위하여 폐빈으로 강등시켰다.

또한 폐빈 김씨의 아버지 김오문과 호초의 아버지의 직첩을 거두고 김씨의 오빠 김중엄도 파면시켰다.

김오문과 처와 폐빈 김씨는 사약으로 죽고 김오문은 자결하게되었다.  

세자빈에게 압승술을 가르쳤다는 죄로 호초는 참형에 처해졌다.

 

문종과 세번의 왕비          작성일자; 2010.04.18.일요일,맑음

 

문종은 임금에 오른 뒤 2년만에 죽었다.

문종이 세자 시절 첫번째 맞이한 빈은 휘빈 김씨다.

압승술(壓勝術)을 쓴 단서가 발각되어 휘빈 김씨는 폐출되어 아버지 김오문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후 아무 여자가 없는 상태에서 어느날 중전 시녀 순임이와 정을 통하게 되었다.

시녀와 정을 통하는 와중에 봉녀의 딸인 봉씨를 세자빈으로 맞이하게되었다.

세종은 새로운 세자빈은 몸집이 작고 유약한 여자라고 생각하여 간택하였는데 색광이며 음탕하였다.

세자는 지난번 휘빈 김씨를 생각하여 성실하게 대하게 하려했으나 봉씨를 만족 시킬수 없음을 알게되어 멀리하게 되었다. 

쓸쓸하게된 세자빈은 궁녀들간에 은밀히 행해지는 동성간의 애정 행각을 하게 되었다.

또한 순임이가 아이를 잉태한 것을 알게돼 심한 매질을 가하는 등 행투가 사나워 중전에게 알려져

중전 소현왕후가 문초하니 부끄럼없이 자기의 소행이 당연한 것 처럼 속시원히 털어놓았다.

봉씨도 폐출되어 친정에 이르자 봉녀는 딸을 목졸라 죽이고 시신을 거둔 후 자결하였다.

세종 18년10월의 일이다.

세번째 맞이한 세자빈이 현덕왕후 권씨다.

현덕황후는 경혜공주와 단종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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