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 제5대 문종      작성일자; 2010.04.18.일요일,맑음

 

제5대 문종;이 향(제3대 태종 셋째 아들)

생졸; 1414(태종 14)-1452(문종 2).39세

재위기간; 1450-1452.2년

 가계도; 3명의 부인에게서 1남 2녀

  부;제3대 태종 셋째 아들

  모;원경왕후 민씨

  왕후; 현덕왕후 권씨

     단종; 이홍위 제6대왕 

     경혜공주

   귀인 홍씨

   사측 양씨;경숙옹주

 

세종의 첫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며 비는 권전의 딸 현덕왕후다.

1421년,세종 3년에 세자로 책봉되어 일찍기 학문을 좋아하고 인품이 관후했다.

세종은 자신이 각종 질환을 앓게 되자 세자인 문종이 섭정하는 데 필요한 체제를 마련했다.

1445년부터 시작된 세자 문종의 섭정은 세종이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문종은 세종 즉위 3년에 왕세자에 책봉되어 29년 동안 왕세자에 머물렀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해 학자를 가까이 했으며 측우기 제작에 직접 참여 했을 정도로 천문.역수 및 산술에도

뛰어났고 서예 에도 능했다.

성격이 유순하고 자상하여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았으며 거동이 침착하고 판단이 신중하여 남에게 비난받는 일도 없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착하고 어질기만 하여 문약함을 벗어나지 못했다.

1442년부터 1450년까지 8년간의 섭정을 통해 정치 실물를 익혔고, 여러 가지 치적을 남기기도 했다.

때문에 세종 후반기의 정치적 치적은 세자 향의 업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언관의 언론이 활성화되었고 6품 이하의 신하에 대해서는 윤대를 허락해 벼슬이 낮은 신하들의 말에 대해서도 경청했다.

이렇듯 유연함과 강인함을 곁들인 정책을 실시하였으나 건강 악화로 제위 2년3개월만에 3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문종은 첫번째 빈궁으로 김씨,두번째로 봉씨가 있었으나 둘 다 과실이 있어 폐위되었다.

순빈 봉씨가 폐출되자 권전의 딸이 세자빈으로 정해졌는데 그녀가 단종의 어머니인 현덕왕후 권씨이다.

현덕왕후는 1441년 세자빈 시절에 단종을 낳고 3일만에 죽었는데,

그녀의 원혼이 수양대군이 왕권을 찬탈한 후에 궁중에 나타나 그의 가족들을 괴롭혔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래서 세조의 큰아들 의경 세자가 그녀의 원혼에 시달려 죽었으며,

세조 역시 꿈에서 그녀가 뱉은 침 때문에 피부병에 걸려 고생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세조는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해 쳐 관을 파내기도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문종은 즉위 후 당시 언관(대간)의 언론이 정치 전반에 걸쳐 활발히 전개 되었음에도 자주 구언을 했고,

언로를 넓혀 조신 6품 이상에게는 모두 윤대(임금을 만나 직무에 대해 아뢰던 일)를 허락했다.

또한 세자 때부터 군정에도 관심이 많아,

1451년, 3군에 속한 12사를 5사로 줄인 반면 병력을 증대시키고 각 병종을 5사에 배분하는 등 군제를 정비했다.

서적 편찬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여 즉위년에 '동국병감'이 출간되었고, 1

449년에 김종서,정인지 등에 개찬을 명한 '고려사'가 1451년 완성을 보았다.

1452년에는 편년체로 서술된 '고려사절요'도 완성되었다.

 문종은 유학·천문·역법·산술 등에 정통했고, 글씨에도 뛰어났다.

그러나 몸이 허약해 재위 2년 4개월 만에 죽어 나이 어린 세자 단종이 즉위하게 되었다.

능은 경기도 양주에 있는 현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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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장인 심온       작성일자; 2010.04.17.토요일,맑음

 

본관은 청송. 자는 중옥. 아버지는 청성백 덕부이다.

세종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가 그의 딸이다.

고려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지냈으며, 조선왕조 개국 후 의랑·대호군이 되었다.

1404년(태종 4) 상호군 겸 판통례문사가 되었고, 이후 좌부대언·좌군동지총제 등을 역임했다.

1408년 딸이 충녕군(나중에 세종)의 비가 되었다.

1411년 풍해도관찰사·대사헌을 거쳐, 1414년 형조판서가 되었고,

이후 호조판서·판한성부윤·좌군도총제·이조판서를 역임했다. 태종의 선위로 세종이 즉위하자 영의정이 되었다.

1418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는데,

이때 병조참판 강상인과 그의 동생인 도총제 심정(沈泟)이 금위의 군사를 분속시키면서 상왕인 태종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태종은 분노하여 이들과 함께 병조판서 박습 등을 참수하게 했다.

심온은 당시 명나라에 가 있었기 때문에 이 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었으나 주모자로 지목되어 귀국하는 길에

의주에서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된 후 사사되었다.

뒤에 이 사건은 심온이 국구로서 세력이 커지는 것을 염려한 태종과 좌의정 박은이 무고한 것으로 밝혀졌다.

1424년, 성산부원군 이직 등이 청하여 관작이 복귀되고 시호가 내려졌다.

시호는 안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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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정승             작성일시; 2010.04.15.목요일,맑음

 

생졸; 1363년 공민왕12년~1452년 문종2년

본관은 장수,호는 방촌(厖村).

황석부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균비이고, 아버지는 부사 황군서이며, 어머니는 김우의 딸이며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가 되었다.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하였다.

그리고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공양왕 2)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일정 기간 은둔생활을 하며 고려 유신으로 지냈다.

   '장수황씨 가문의 전승에 의하면 두문동에 은거하였다는 설화가 전하지만 역사적 사실이었는지는 판단할 수 없다'.

1394년(태조 3) 태조의 적극적인 출사 요청을 수용하여 성균관학관에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를 겸임하였다.

  이후 직예문춘추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398년 ,문하부우습유 재직 중 언관으로서 사사로이 국사를 논의했다고 문책되어 경원교수로 편출되었다가,

1398년(정종 즉위년) 우습유로 소환되었다.

1399년(정종1년),언사로 파직되었다가 그 해 2월경 문하부우보궐에 복직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언사로 파직되었으며, 곧 경기도도사를 거쳐 형조·예조·이조·병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1401년(태종 1)경, 지신사 박석명이 태종에게 천거해 도평의사사경력에 발탁되었고 그 뒤 병조의랑에 체직되었다가

1402년, 아버지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 해 겨울 군기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인물난으로 기복되어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다.

1404년, 우사간대부를 거쳐 승정원좌부대인에 오르고,이듬해 박석명의 후임으로 승정원지신사에 발탁되었다.

1409년, 참지의정부사가 되고,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지의정부사·대사헌 등을 지냈다.

1411년, 병조판서,

1413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1414년, 질병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1415년, 이조판서 재직중 송사 처리와 관련해 육조에 문책이 내려지면서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 해 행랑도감제조에 복위 된 데 이어, 참찬·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16년에는 세자인 양녕 대군의 실행을 옹호하다가 다시금 파직되었다.

  그 뒤 조정으로 복귀해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윤, 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다.

1418년, 세자 폐출의 불가함을 극간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교하로 유배되고, 곧 남원부에 이치 되었다.

  세종의 치세가 시작되고 아울러 상왕(태종)의 노여움이 풀리면서,

1422년(세종 4), 남원에서 소환, 직첩과 과전을 환급받고 참찬으로 복직되었다.

1423년, 예조판서에 이어 기근이 만연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어 구휼하였다.

  그리고 판우군도총제에 제수되면서 강원도관찰사를 계속 겸대하였다.

1424년, 찬성, 이듬해에는 대사헌을 겸대하였다.

또한 1426년에는 이조판서와 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발탁되면서 판병조사를 겸대하였다.

1427년, 좌의정 겸 판이조사가 되었고, 그 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기복되어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이어 평안도도체찰사로 파견되어 약산성기를 답사하였다.

  이 때 약산이 요충지라 해서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한 뒤 평안도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하였다.

1430년, 좌의정으로서 감목을 잘못해 국마 1,000여 필을 죽인 일로 해서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의 일에 개입해

  선처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일국의 대신이 치죄에 개입함은 부당할 뿐더러, 사헌부에 개입하는 관례를 남기게 되므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래서 한때 파주 반구정에 은거하였다.

1431년, 다시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치사(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하였다.

  그리고 치사한 뒤에도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처럼 그는 왕을 보좌해 세종성세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를 통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1452년(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1455년(세조 1) ,아들 황수신이 좌익공신에 책록되면서 순충보조공신 남원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상주의 옥동서원과 장수의 창계서원에 제향되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으며,시호는 익성(翼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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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과 수맥 피해        작성일자; 2010.04.15.목요일,맑음

 

산소가 수맥의 영향을 받아 관 안에 물이 차 있으면 시신이 썩지 않고 그대로 있으며

이와 관련된 후손들은 가난.자살.이혼.자식들이 적령기에 혼인 못함.가출.난치병 등 고통에 시달리고 있는 경우를

주변에서 많이 목격하고 있다.

이라는 썩지 않은 시신으로 그것이 바짝 말라 있던 물에 불어 있든 마찬 가지이며 후손의 삶은 고달프기만 하다

특히 조상의 산소가 수맥의 영향을 받으면 족(足) 빠지게 일을 해도 가난을 벗어나기 힘든다.

그리고 수맥의 측정은 현대에서는 엘로드(기구가 영어의 L자 모양으로 생겼다)나 팬들륨(추)로 측정 하고 있으며

수맥 피해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를 하나 소개 한다

 

―조선 4대 임금인 세종대왕은

낮에는 신하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정사에 힘써 한글창제와 측우기 등을 만들어 나라를 부강케 하고

밤에는 건강한 체력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房事(방사)에 열중하여 6명의 왕비와 후궁들로 부터 22명의 왕자와 공주를

생산하여 왕손을 번성 시켰으니 누가 세종임금을 성군이라 하지 않을 것인가.

우리가 조선시대 역사를 보면 방사에만 집중한 “등대(燈臺)”같은 연산군이 폐위 되 듯

어느 한쪽만 추구하면 성군이라는 칭호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 등대는 선박들의 항해를 도와주기 위해 야간에 불을 밝히는 것인데

     요즈음은 여자를 밝히는 사람을 일컬어 등대라고 한다

 

―세종대왕의 강한 효심

세종대왕이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회복할 기미를 보이지 않자 승하하기 직전 상지관(궁중지관)과 대신들이 세종에게

아뢰고 있다.

“전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전하의 묏자리를 어디로 정했으면 좋겠사옵니까?”

“아버지 태종(이방원)이 묻혀 있는 헌인릉(서울 강남구 내곡동 대모산 아래)밑에다 장례를 지내라

그러면  죽어서도 아버지를 모시고 있겠노라”

“전하 그곳은 부왕이신 태종께서 이미 명당에 들어 있기 때문에 그 아래쪽은 물구덩이여서 아니 되옵니다

 다른 곳을 천거 하시옵소서”

“아니다 다른 곳이 아무리 좋다 한 들 내 아버지 밑보다야 더 좋은 데가 있으랴 !”

“그리고 임금인 짐이 불경스럽게 역장(조상보다 위쪽으로 올라가서 쓰는 산소)을 하란 말이냐?

경들은 나의 유언을 소홀히 하지 말고 부왕의 아래로 장지를 정하도록 하라”

상지관과 대신들이 극구 만류 했으나 세종의 고집이 완강하여 할 수 없이 수맥이 흐르는 곳에 장례를 치르게 되었는데

이로서 왕실은 참혹하리만치 처참한 비극의 서막이 오르고 있었다.

 

- 세종이 붕어하자 큰아들 문종이 대를 이어 즉위 했으나 2년 만에 종기로 병사,

- 문종의 아들인 단종은 3년 만에 숙부인 세조에게 에게 왕위를 빼앗기면서 사약을 받아 비명횡사,

- 조카에게 왕권을 빼앗아 천년만년 부귀를 누릴 것 같았던 세조도 얼굴과 몸에 부스럼이 나는 병에 걸려 살이 문드러지는

  고통에 시달리면서 13년 만에 병사하고

- 세조의 큰아들 의경세자는 20세에 이유모를 가위 눌림에 즉위도 못하고 죽음을 당했으며

- 둘째 아들 예종은 19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재위 1년 만에 그 또한 병사하니 도합 19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래서 궁중에서는 세종대왕의 묘가 수맥에 들어가서 계속 흉한 일이 일어나니 이장을 해야 한다는

강력한 여론이 형성되어 상지관(궁중지관) 안효례의 주도로 예종 1년(이장 후 병사함)에 이장을 할려고

광중(시신을 묻은 구덩이)을 파니 관에는 물이 가득 차 있고 시신은 물론 수의 하나 썩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여주로 이장한 세종대왕의 영릉은 회룡고조형(용이 머리를 돌려 할아버지 용을 바라보는 형,

또는 비룡승천형.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으로서 능 뒤에서 들어오는 용맥(산맥)은 거대한 용이 꿈틀 거리며

여의주를 물고 금방이라도 승천 할 듯 기세 왕성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며 능 앞으로 전개되는

좌청룡 우백호의 경치도 장관을 이룬다.

가깝고 멀리 있는 모든 산들은 하나도 배신한 것이 없이 영릉을 향해 공손하게 절하는 모습이여서

조선 왕조는 세종대왕의 영릉 발복으로 100년은 더 연장 됐다고 하며 왕릉 중에 제일로 치는 명당중의 명당이다

 

※ 참고로 우리나라에서 풍수를 공부하는 사람 중 여주의 세종대왕 영릉, 이성계의 동구릉과 태종의 헌릉을

    답산(踏山)하지 아니하면 풍수가가 아니다 할 정도로 유명한 명당이다

 

세종대왕의 시신이 여주 영릉으로 이장한 후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인 성종 임금이 보위에 올라 25년간 재위 하면서 새로운 정치기구로 내사성과 문하성

그리고 어사도성(御事都省)을 두어 삼성 체제를 완성하고 홍문관, 존경각, 독서당을 창설해 어진 인재들을 등용하는 등

훌륭한 치적을 남긴 반면,

그 당시 당대의 여인으로 회자되었던 어우동을 궁으로 불러들여 연희를 즐겼고 그녀와 하룻밤을 보냈다는 야사가 전해오고

또 폐비 윤씨와의 대립 등 여난도 있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서

집안에 줄초상이 나거나 계속 흉한 일만 일어날 때 “우리집안이 쑥대밭이 되었다”고 한다.

이는 조상의 산소가 수맥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산소에는 쑥만 자란다.

“우리 집안은 뼈대 있는 가문이다”라고 하는 것도 조상의 묘를 명당에 두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지나도 뼈가 그대로

남아있어 후손이 조상의 음덕을 받아 부귀를 누린다는 뜻이며,

반대로 타인을 욕할 때“뼈도 못 추린다”는 것은 수맥파의 영향을 받아 뼈가 녹아 없어져 후손이 이장할 때 뼈가 없어

후손이 불행해 진다는 것을 뜻 한다 .

또, 4대(부모.조부.증조부.고조부) 봉사(奉祀) 제사를 지내는 것은

땅속에 매장된 조상의 뼈는 120년(1대가 30년으로 계산)이 지나면 더 이상 자손에게 음덕을 주지 못한다 하여

고조부 이상은 제사를 지내지 않는 등 모두 풍수에서 유래된 것이다.

아울러 돌아가신 조부나 부모님이 꿈에 나타나 물과 관계된 것을 암시하면 이장을 해달라는 뜻 이다.

 

 

 

 

-봉분

봉분에 잔디를 심었는데 잘 자라지 않고 잡초만 무성하다

봉분에 물풀이나 이끼가 낀다든가 쑥이 많이 자라고 있다.

봉분에 금이 가거나 갈라지거나 함몰 된다

봉분에 구멍이 뚫렸거나 개미집이 많다

이상의 4가지만 관심 있게 살피면 길지와 흉지의 감별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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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이방원은 형제들 사이의 치열한 왕권 쟁탈 싸움을 통해 왕위에 올란 인물이다.

그의 나이 51살에 셋째 아들 충녕군에게 왕위를 넘겨 주었으니 그가 바로 세종이다.

태종은 왜 아직 젊은 나이에 서둘러 왕위를 세종에게 넘겨 준 것일까?

그것은 자신의 예기치 못한 갑작스런 사고에 대비 하려는 뜻과 왕위에서 물러나 상왕의 자격으로

세종의 왕권을 보강하려는 뜻도 있었다.

상왕 태종 이방원은 세종의 집권 초기에 각종 국사에 관여하고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런데 태종 이방원에게 대들었던 사람이 있었으니,장미라는 예쁜 이름의 시녀였다.



세종 2년(1490.10.11)  53살의 상왕 태종은 말한다.

내 나이 오십이 지난 뒤에는 잠을 편케 못 자고해서 시녀 장미를 시켜서 무릎을 두드리게 했더니 마음에 맞지 아니해,

내가 조금 꾸짖어 주고 바로 잠이 들었다.

그런데 장미가 갑자기 두들겨서 놀라 잠을 깨었다.

그 무례함을 미워해 대비에게 보내 그 정상을 물었으나 실상대로 대답하지 아니하므로,

내가 불러서 친히 물으니 말하기를 “꾸지람 하심에 분이 나서 조심 없이 두드렸다”고 하니 그 불경함이 크다.

인명이 중하다 하겠으나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잡아서 물에 넣든지 목을 졸라 죽이든지 해야겠다.

상왕이 격노 했으니 세종이 이 일을 수습해야 했다.

변계량을 비롯한 세종의 대신들이 앞을 다투어 준엄하게 충언한다.

장미가 저지른 죄는 반역으로 논해야 될 것이니, 마땅히 세 정승과 함께 국문해 사형에 처해야 할 것입니다.

안마를 세게 했으니 반역이요,

영의정·좌의정·우의정 세 정승이 몸소 심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23살의 세종은 다소 침착한 편이었다.

장미의 일은 말만 해도 오히려 부끄러우니 세 정승까지 번거롭게 할 것이 있겠는가.

영의정이 이미 몸소 국문하기로 되어 있으니 그렇게 하라.

‘반역자’ 장미는 어떻게 되었는가?

꺼낼수록 부끄러운 일인지.

세종실록에 그 뒤의 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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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숙주;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문신·정치가,외교관

생졸; 1417(태종17년)-1475(성종 6년).59세

본관; 고령

호; 희현당 또는 보한재

 

신숙주는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며 문신으로써 정치가며 외교관이다.

또한 훈민정음 창제자의 한사람이기도하다.

신장(申檣)의 아들이자 윤회의 손녀 사위이기도 하다.

 

1438년,세종 20년에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여 정가로 입문하게되었다.

1439년에는 친시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의 학사로서 성상문,박팽년,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와 연구에 기여하였다.

1477년,세종 29년에는 문관 중시에 4등으로 합격하여 당상관이 되었으며, 이후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을 적극 지지하였고,

   세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문신의 신분이었으나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과 왜구 토벌에 여러 번 출정하였으며,

1461년,1464년,1471년 부터 1475년까지 의정부 영의정을 역임했다

 

사육신과 함께 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으나 변절하여 수양대군(세조로 즉위)의  편에 가담하였다.

단종 복위 운동 실패 후 단종과 금성 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남이의 옥사 때 남이의 처형에도 적극 참여하여,사 후 사림파,도학자들로부터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6대 왕을 섬겼고,

사육신과  생육신 김시숩, 그 밖에  한명회,권람 등 다양한 인맥을 형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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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지(河緯地)          작성일자; 2010.04.14.수요일,맑음

 

하위지; 조선 전기의 문신,정치인,학자이며 조선 단종 때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생졸; 1412~1456

본관; 진주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세종 때의 학자로 최만리,정창손 등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반대하였다.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의 측근들에 의해 강압을 받아 양위하자,

성승,유응부,성상문,김질 등과 함께 세조 3부자를 타살하고 단종 복위를 거사했다가

회유 또는 실패를 예상한 김질의 밀고로 발각되어 처형당했다.

세조는 그의 재능을 아까워하여 친히 국문을 하면서도 여러번 그에게 회유를 권고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시호는 충렬이며,사육신 중 박팽년 가와 함께 후손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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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팽년(朴彭年)   작성일자; 2010.04.14.수요일,맑음

 

생졸; 1417-1456

본관;순천. 자(字)는 인수, 호는 취금헌(醉琴軒),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박팽년은 조선 전기의 문신 겸 학자로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의 학사로 활동했고, 관직은 형조 참판에 이르렀다.

손자 박일산이 생존하여 사육신 중 하위지가와 함께 후손이 전한다.

중종 때의 권신 박원종의 일족이기도 하다.

 

조선 세종 때인 143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상문 등과 함께 집현전 학사가 되어 편찬 사업에 참가하였고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황보인.김종서 등과 함께 문종과 단종을 보필하였다.

  세종 말년에 신숙주,성상문,성상문,윤기견,윤회,김종서 등과 고려사 절요,고려사의 편찬과 간행에 참여하였다.

 

1453년10월 계유정년을 전후해서 좌부승지가 되었다.

1454년 좌승지를 거쳐

1455년 충청도 관찰사에 제수되었다. 수양대군이 황보인, 김종서,안평대군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후,

  그를 형조판서에 임명하였으나,

세조가 즉위한 다음 해인 1456년, 형조참판의 자리에 있으면서 성삼문, 하위지,이개,위지,유성원,유응부 등과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김질의 밀고로 6월 2일 잡혀 갔으며,

고문 받던 중  6월7일 사망하였다.

뒤에 아버지와 동생, 아들까지 사형 당했으나,사육신중 하위지와 함께 유일하게 친후손이 존재한다.

그의 며느리이며 장남 박순의 아내 이씨는 사육신에 연좌되어 노비가 되었는데,

며느리 이씨와 한 여종의 기지로 그의 아들은 무사하였다 한다.

뒤에 그 아이는 박비라는 이름으로 숨어 지내다가 성종때 자수하여 성종으로부터 박일산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숙종은 그의 관작을 복구시키고 절개를 표창하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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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문        작성일자; 2010.04.14.수요일,맑음

 

생졸; 1418-1456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으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충청남도 홍성(洪城) 출신.

개성유후(開城留后) 성석용(成石瑢)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성달생(成達生)이고, 아버지는 도총관(都摠管) 성승(成勝)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襜)의 딸이다.

 

1435년(세종 17)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는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했으며,

1447년에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다시 급제하였다.

  집현전학사로 뽑혀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승진하였다.

1442년에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를 했고,

  세종의 명에 따라 '예기대문언두(禮記大文諺讀)'를 펴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최항·박팽년·신숙주·이개 등과 함께 이를 도왔다.

특히 신숙주와 같이 명나라 요동을 여러 번 왕래하면서,

그 곳에 유배 중인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을 만나 음운(音韻)을 질문하였다.

또한, 명나라 사신을 따라 명나라에 가서 음운과 교장(敎場) 제도를 연구해와

1446년 9월 29일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1453년(단종 1) 좌사간으로 있을 때,

  수양대군(首陽大君: 뒤의 세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 인·김종서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고는 그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의 칭호를 내렸는데 이를 사양하는 소를 올렸다.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가 되었다.

그 해 세조가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 선위를 강요할 때,

그가 국새를 끌어안고 통곡을 하니 세조가 그를 차갑게 노려 보았다.

이후 아버지 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박중림·박팽년·유응부·허조·권자신·이개·유성원 등을 포섭,

단종 복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러던 중 1456년(세조 2) 6월 1일에 세조가 상왕인 단종과 함께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위한 잔치를 열기로 하자,

그 날을 거사일로 정하였다.

그는 거사일 전날에 집현전에서 비밀 회의를 열고 그의 아버지 승과 유응부·박쟁 등 무신들에게는

세조와 윤사로·권람·한명회를, 병조정랑 윤영손에게는 신숙주를 각각 제거하도록 분담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중신들은 여러 무사들이 나누어 제거하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김질에게는 그의 장인인 정창손으로 하여금 상왕 복위를 주장하도록 설득하라 하였다.

그러나 당일 아침에 갑자기 연회 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의 시립이 폐지되어 거사는 일단 중지되었다.

이에 거사는 세조가 친히 거둥하는 관가(임금이 봄에 권농하기 위해 곡식의 씨를 뿌리는 것을 관람하던 행사) 때로

미루어졌다.

거사에 차질이 생기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그의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밀고하여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갔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나으리(進賜: 종친에 대한 호칭)’라 호칭하고 떳떳하게 모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세조가 준 녹(祿)은

창고에 쌓아두었으니 모두 가져가라 하였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했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으면서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또한 신숙주에게는 세종과 문종의 당부를

배신한 불충을 크게 꾸짖었다.

격노한 세조가 무사를 시켜 불에 달군 쇠로 그의 다리를 태우고 팔을 잘라내게 했으나 그는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사건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고 있던 강희안을 변호해주어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그 달 8일 아버지 승과 이개·하위지·박중림·김문기·유응부·박쟁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를 당하였다.

그 때 동생 삼빙·삼고·삼성과 아들 맹첨·맹년·맹종 및 갓난아이까지 모두 죽음을 당해 혈손이 끊겼다.

그가 형을 당한 뒤 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 거적자리만 깔려 있을 뿐이었다.

이처럼 그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절신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일 뿐

아니라,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문명이 높았으며, 조정의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특히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한 것은 그의 높은 절의에 뒤지지 않는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뒷날 남효온은 '추강집'의 육신전에서 대의를 위해 흔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 그의 높은 절의를 기록, 후세에 전하였다.

1691년(숙종 17),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1791년(정조 15) 단종충신어정배식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묘는 서울 동작구 노량진동 사육신 묘역에 있으나, 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은진에 있다.

장릉(단종의 능) 충신단에 배향되었으며, 영월의 창절사, 서울 노량진의 의절사, 공주 동학사의 숙모전에 제향되었다.

송시열이 쓴 '홍주성선생유허비'와 '연산성선생유허비'가 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저서로 '매죽헌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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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          작성일자; 2010.04.14.수요일,맑음

 

강력한 신분제도를 바탕으로 양반 중심의 사회를 유지했던 조선 시대에 천민은 백성 취급조차 받지 못했다.

하지만 개중에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여 천출이란 주홍글씨를 벗어던지고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또렷하게 새겨놓은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세종 시대의 과학자 장영실이다.

선왕 태종의 혈흔이 낭자한 정치 안정의 기반 위에서 즉위한 세종은

초기부터 전제와 세제의 개혁이라는 화급한 과제와 마주쳤다.

토지의 분배와 공평무사한 세금 징수야말로 안정적인 국가 경영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한데 이런 목적을 달성하려면 경지 당 농업생산성을 대폭 향상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때문에 세종은 근대적 농법을 보급하고, 우리 실정에 맞는 역법을 제작함으로써 시기에 맞는 파종과 추수를 가능하게 했다.

농업이 국가의 중심 산업이었던 그 시기에 국왕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치력명시(治曆明時)’,

곧 백성들에게 농사지을 최적의 시간과 계절을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세종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가 농업 발전을 위한 과학기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막연히 하늘의 뜻에 기대어 농사지을 것이 아니라 과학의 힘을 빌려 자연의 변화를 계수화 함으로써 기회는 최대화하고

위기는 최소화하겠다는 뜻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조선 최고의 발명가로 거듭난 장영실의 이름이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장영실

기록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원나라 소항주 출신의 귀화인이다.

장영실이 살던 시기는 중원에서 원나라가 축출되고 명나라가 기세를 올리던 때이다.

중국에서 왕조가 흥망하면 수많은 망명객들이 조선으로 몰려오곤 했다.

장영실의 아버지도 그런 사람들 틈에 끼어 조선에 들어왔으리라 짐작된다.

그렇다면 양반은 아니더라도 양인 정도의 신분을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식인 장영실이 어찌하여 천민이 되었을까?

그 해답은 바로 '조선왕조실록'에 나온다.

어머니가 동래현의 기생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장영실은 어머니가 관기였으므로 관청에 소속된 관노가 된다.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도에 따르면 일천즉천(一賤則賤),

즉 부모 중 한 명이라도 천민이라면 자식은 무조건 천민이 된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이 조건은 완급을 되풀이했지만,

어머니가 천민이면 자식은 천민의 신분을 갖는 천자수모(賤者隨母)의 법칙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말기까지 바뀌지 않았다.

러기에 조선시대에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무수한 홍길동들이 많았다.

이런 고통스런 환경 속에서도 장영실이 과학자로 거듭날 수 있었던 것은

기술자였던 아버지의 자질을 이어 받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장영실을 선조로 모시는 '아산장씨세보'에는 그가 항주 출신인 장서(蔣壻)의 9세손이고,

부친은 장성휘(蔣成暉)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실록과 족보의 기록상 다른 부분은 쉽게 사실 여부를 가릴 수 없지만 세종 시대에 그가 관노 신분이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기술자로서 장영실의 이름은 태종대부터 한양까지 알려져 있었다.

어린 시절 그가 틈틈이 동래현의 병기 창고에 들어가 낡고 못쓰게 된 병장기를 손질하면서 천재적인 자질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장영실은 관상감 출신의 남양 부사 윤사웅의 추천으로 한양에 올라와 궁중에서 일하게 된다.

 

1421년(세종 3년), 장영실은 윤사웅과 함께 북경에 가서 관성대를 살펴보고 돌아왔다.

  관성대는 13세기 원나라의 곽수경이 만든 동양 최대의 천문대로 각종 천문기기를 통해 천문을 살피는 장소였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장영실은 세종 시대에 완성된 각종 천문기기를 제작했던 것이다.

 '보문헌비고'에 따르면,

  세종은 '우리나라는 멀리 해외에 있어서 모든 것을 하나같이 중국의 제도를 따라 시행하는데, 유독 천문을 관찰하는

  기계만 빠졌다.'라면서 정인지와 정초에게 천문기상기기의 내력 및 출전을 연구하게 하고,

  이천과 장영실에게 천문기상기기의 제작을 맡겼다.

  당시 세종은 양각혼의성상도감을 설치하고 기기 제작을 맡은 장영실에게 책임에 걸맞은 벼슬을 내려주려 했지만

  중신들의  완강한 반대로 포기해야 했다.

  천출이라는 신분의 제약 때문이었다.

  하지만 장영실은 낙심하지 않고 1424년(세종 6년)에 수동 물시계인 경점기(更點器)를 개선함으로써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자 세종은 그에게 상의원 별좌 벼슬을 내리기로 마음먹고 이조판서 허조와 병조판서 조말생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이때 허조는 '기생의 자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다.'며 반대했지만

  조말생은 “이런 무리는 오히려 상의원에 적합하다.”며 찬성했다.

  이에 세종이 다른 대신들을 불러 재차 묻자,

  그 중에 유정현이 나서서 “장영실이라면 상의원에 임명할 수 있다.”며 찬성했다.

  그렇게 세종은 여러 대신들의 공론을 거친 다음에야 장영실에게 ‘상의원 별좌(尙衣院 別坐)’ 벼슬을 내렸다.

  장영실을 면천시켜 양반으로 만드는 과정에서 행여 뒷말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상의원(尙衣院)은 임금의 의복을 만들고 궐내의 재물과 보물을 관리하던 관청이었고, 별좌는 종5품의 문반직으로

월급은  없는 무록관(無祿官)이었다.

  하지만 장영실이 천민의 너울을 벗어던지는 데는 충분한 자리였다.

  이런 영광이 그를 자만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이듬해 1425년(세종 년) 5월,

  장영실은 이간이란 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대사성 황현, 양주 부사 이승직 등과 함께 태형 20대의 벌을 받았다.

   하지만 그 후에도 장영실은 세종의 배려로 궁궐에서 자신의 직무에 종사했고,

   수시로 사신을 따라 명나라를 오가며 우수한 과학기술을 입수했다.

1432년(세종 14년)부터 세종은 농업 생산성 향상을 위한 과학기술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가동시켰다.

    천문 관측기구를 제작하는 의표창제(儀表創製)를 시작하면서 예문관 제학 정인지에게 총 지휘를 맡기고

    천문관측 관청인  서운관을 확장하는 한편, 대형 천문대인 대간의대(大簡儀臺)를 경복궁 안에,

    소형 천문대인 소간의대(小簡儀臺)를 북부 광화방 인근에 지었다.

    대간의대는 높이가 9.5미터에 이르는 왕립천문대로서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다.

    이때 장영실은 이천과 함께 간의대에 필요한 각종 기구 제작에 나섰다.

    여기에는 과거 명나라의 관성대에서 입수한 정보가 커다란 밑천이 되었음은 두 말 할 필요조차 없다.

    두 사람은 우선 간이(簡儀)를 만들어 한성의 위도를 새로 측정하는 한편,결과를 기준으로 각종 기구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간의는 원나라의 천문학자 곽수경이 만든 천문 의기로 혼천의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혼천의는 천체의 위치와 시각과 함께 태양과 달의 운동을 측정할 수 있지만 간의는 천체의 위치만 측정하는 기기였다.

    세종은 그 과정에서 장영실에게 정5품 무관직인 ‘행사직(行司直)’을 제수함으로써 업무 의욕을 고취시켰다.

    그러자 장영실은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불과 1년 만에 혼천의를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혼천의는 ‘선기옥형(璇璣玉衡)’ 또는 ‘기형(璣衡)’이라고도 하는데,

천구의(天球儀)인 혼상(渾象, 하늘의 별을 둥근 구형에 표시한 의기)과 함께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이용하여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체의 운행에 맞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으므로 혼천시계(渾天時計)라고도 부른다.

 

                                                             자격루

시계가 없었던 고대에는 낮에는 해 그림자를 통해 시간을 측정했고, 밤에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관찰하여 시간을 측정했다.

하지만 날이 흐리면 해도 별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만들어낸 것이 물시계였다.

기원전 7세기경 중국에서 발명된 물시계는 매우 단순한 구조였다.

물을 채운 항아리 한 귀퉁이에 구멍을 뚫어 물방울이 떨어지게 한 다음

다른 항아리에 그 물방울을 받아 부피를 잰 다음 12등분하여 한 시간의 길이를 계산했던 것이다.

그런데 물시계는 매일 물을 갈아주어야 했고, 조금만 주의를 게을리 해도 물이 말라 시간을 제대로 맞출 수 없었다.

그래서 송나라의 과학자 소송(蘇訟)은 1091년경 물레바퀴로 돌아가는 거대한 자동 물시계를 발명했지만

장치가 너무 복잡하여 기술을 이어받을 사람이 없었으므로 그가 죽은 뒤 사라졌다.

12~13세기경에는 아라비아인들이 쇠공이 굴려 종이나 북을 쳐 시간을 알리는 자동 물시계를 만들었다.

세종은 일찍이 자동 물시계를 구상했지만 과학기술의 불모지였던 조선 땅에 시계 제작에 필요한 자료와

기술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정인지와 정초가 중국에서 소송의 물시계와 이슬람의 물시계 자료를 수집했고,

장영실이 그것을 바탕으로 ‘자격루’라는 새로운 자동 물시계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오랜 자신의 구상이 실현되자 세종은 매우 기뻐하며 경회루 남쪽에 보루각(報漏閣)을 짓고 자격루를 설치했다.

자격루는 보루각루(報漏閣漏), 혹은 궁궐 안에 있다고 하여 금루(禁漏)라고도 불렸다.

혼천의가 국가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다면 자격루(自擊漏)는 백성들을 위한 순수한 창작품이었다.

당시 세종이 장영실의 공로를 치하하며 정4품 무관직인 ‘호군(護軍)’을 제수하자 여러 대신들이 반대했다. 그

러나 황희가 과거 태종이 김인이라는 평양의 관노를 호군으로 제수한 적이 있다는 전례를 듦으로써 무리 없이 통과되었다.

그 무렵 세종은 장영실의 교묘한 실력만이 아니라 매우 똑똑하다는 이유로 늘 곁에 두고 내시를 대신하여 왕명을 받들게

하기도 했다.

 

1434년(세종 16년) 7월 1일, 세종은 자격루를 조선의 표준 시계로 선포했다.

   그때부터 자격루에서 시간을 알려주면 궁궐 밖에 있는 종루에서 북이나 종을 쳐서

    오정(낮 12시)이나 인정(밤 10시경) 등의 시각을 백성들에게 알려주었다.

   서울의 거리 이름인 종로(鐘路)는 바로 이 종루에서 유래된 것이다.

1438년(세종 20년), 장영실이 또 하나의 자동 물시계인 옥루(玉漏)를 완성하자,

   세종은 경복궁 천추전 서편에 흠경각(欽敬閣)에 짓고 옥루를 설치했다.

   옥루는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와 천체의 운행을 관측하는 혼천의의 기능을 합친 다목적 물시계였다.

   시간은 물론 계절의 변화와 절기에 따라 필요한 농사 일까지 알려주는 기계가 탄생한 것이다.

세종은 새삼 장영실의 능력에 감탄하며 우승지 김돈에게 '흠경각기(欽敬閣記)'를 짓게 했다.

안타깝게도 옥루는 1553년(명종 8년)에 화재로 소실되었었고,

이듬해 다시 제작했지만 임진왜란으로 불타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그 무렵 장영실이 제작한 과학기기는 혼천의를 간소화한 대간의와 소간의, 휴대용 해시계인 현주일구, 천평일구,

시간과 함께 남북의 방위도 알려주는 해시계인 앙부일구, 밤낮으로 시간을 잴 수 있도록 만든 일성정시의,

해 그림자에 따라 절기를 알 수 있게 만든 규표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나라의 금속활자 개발은 고려 고종 때인 1234년에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본인  '상정고금예문(詳定古今禮文)'

인쇄 이 후 답보상태에 빠졌다.

조선에서는 1403년 금속활자인 계미자(癸未子)가 만들어졌는데,

크기도 일정하지 않았고 활자를 고정하는 데 밀랍을 사용했으므로 많은 양의 인쇄물을 찍을 수가 없었다.

몇 차례만 인쇄해도 밀랍이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1420년, 장영실은 이런 현실을 직시하여 이천, 김돈, 김빈 등과 함께 계미자보다 작고 정교한 경자자(更子字)를 만들었고,

이를 다시 개량한 것이 바로 갑인자(甲寅字)이다.

대소 활자 두 종류로 20여만 자가 넘는 갑인자의 효용은 대단했다.

아름답고 선명한 인쇄는 물론이고 종전보다 2배나 빨리 인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주자소에서는 이 갑인자를 이용해 수많은 서적을 인쇄함으로써 세종 대 문화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

현재 갑인자는 전해지지 않지만 '대학연의','분류보주 이태백시' 등 갑인자로 찍어낸 서책들이 살아남아 그 유적을

보여주고 있다.

 

장영실이 만든 또 하나의 회심의 작품이 바로 측우기다.

농업국가인 조선에서는 농산물의 생산량이 곧 국력의 바로미터가 된다.

때문에 정밀한 강우량의 측정은 농사의 질과 양을 좌우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였다.

그때까지 조선에서는 비가 땅 속에 스며든 깊이를 재서 강우량을 측정하는 원시적인 방법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1436년 전후 한발과 폭우로 인한 흉년이 거듭되자 세종은 장영실에게 측우기 개발을 명했다.

그리하여 세자 이향과 장영실이 함께 아이디어를 짜낸 끝에

1441년, 높이 41.2센티미터, 직경 16.5센티미터 크기의 원통형 쇠그릇을 만들었다. 세계 최초의 측우기였다.

이 측우기는 이듬해 높이 30.9센티미터, 직경 14.1센티미터로 규격이 통일되었다. 그

런데 측우기는 정밀한 만큼 대량 제작이 어려웠다.

이에 장영실은 좀 더 대중성 있는 측우기를 구상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수표(水標)이다.

 

                                      측우기

 

청계천의 마전교 서쪽과 한강변에 설치된 수표는 백성들이 쉽게 강우량을 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실용적이었다.

수표교(水標橋)라는 다리 이름의 유래이기도 하다.

이것은 쉽게 강우량을 알아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실용적이었다.

장영실은 이처럼 조선의 과학 발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종3품 대호군까지 승진했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쓸쓸했다.

최근 학계의 연구에 따르면 장영실은 세종대의 유명한 천문학자 김담의 매형이었다.

그가 실력을 발휘한 천문 분야에 대한 지식의 원천이 어디에서 유래되었는지를 추측하게 한다.

그렇듯 뛰어난 능력으로 세종의 과학 입국을 선도하던 장영실의 만년은 쓸쓸했다.

 

1442년3월 16일 자의 '세종실록' 기록에 따르면 

바로 그 해에 세종이 어가(御駕)에 올랐다가 부서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어가는 장영실이 설계하고 장인 임효돈이 제작한 것이었다.

그 일로 인해 대간의 탄핵을 받은 장영실은 졸지에 죄인의 몸이 되고 말았다.

대신들은 때를 만난 듯 그를 성토했고, 파직과 함께 곤장 100대에 처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그런데 세종의 조치는 뜻밖이었다.

저간의 공이 있으니 곤장 80대로 감해주라는 것이었다.

그 동안 장영실을 중용하고 아꼈던 세종의 마음이 왜 그렇듯 냉정하게 돌아섰던 것일까?

그 후 장영실의 자취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사생활은 물론이고 말년의 행적조차 깨끗하게 묻혀버렸다.

일개 관노에서 종3품 벼슬까지 올랐던 그의 영광도 거기에서 끝이었다.

어쩌면 미천한 출신 성분 때문에 사가들로부터 외면당했을 수도 있다.

혹은 그가 갑작스런 지위 상승으로 인해 오만하고 나태해져서 완벽주의자 세종에게 버림받았을 수도 있다.

단초는 있다.

그가 몇 차례 뇌물 수수로 벌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정도의 잘못으로 저간의 빛나는 업적이 상쇄될 수는 없다.

더군다나 그는 과학입국을 지향하던 세종대왕의 대표선수가 아니었던가.

그러기에 오늘날 그의 말년 행적을 둘러싸고 다양한 추측이 나돌고 있지만 대부분 드라마틱한 상상일 뿐이다.

장영실,

귀천이 엄연했던 전제정치 시대에 강고한 신분의 벽을 뚫고 조선 최고의 과학자가 되었던 인물,

매 순간마다 뜨겁게 열정을 불살랐던 그는 아직도 조선 최고의 발명가로서, 성공을 꿈꾸는 모든 이들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오늘날 우주를 유영하고 있는 소행성 68719호에는 ‘장영실(Jangyeongsil)’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아직도 그는 별빛을 반짝이며 우주 공간을 유영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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