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해방 이후 북한에서 남조선 노동당 부위원장,부수상,외상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 운동가,
생졸; 1900년-1955년
출생; 충청남도 예산
본관; 영해
박헌영은 쌀장사를 하던 아버지 박현주와 소실인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한문을 배우다 12세 되던 해인 1912년 예산군 대흥면 대흥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
하였다.
1915년,경성 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에는 조선 중앙 기독교 청년회(YMCA)
영어반에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1919년 경성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계속 영어 공부를 하는 한편, 승동교회에 다니면서 미국유학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1920년9월,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어 민족 운동의 거점이었던 중국 상해로 갔다.
상해에서도 조선 중앙 기독교 청년회 부설 강습소에 다니면서 영어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임원근 등과 알게 되어 임원근·김단야·최창식 등과 함께 김만겸의 이르츠크파 고려 공산당 상해 지부에
입당하였다.
정식으로 공산당에 입당한 이후 프랑스조계에 위치한 사회 과학연구소에서 공산주의 선전팜플렛을 번역
하는 일에 열중하였으며, 고려 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1921년에는 허정숙의 소개로 뒤에 국내에서 결혼하게 되는 주세죽을 만나 열애에 빠지기도 하였다.
1921년 늦가을, 김단야·임원근과 함께 극동 인민 대표자 회의에 참석키 위하여 모스크바로 가,
1922년1월,고려 공산 청년 동맹 대표로 참가하였다.
1922년4월,김단야·임원근과 함께 국내 공산당 조직을 위해 귀국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징역 1년 6월의
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24년1월, 만기 출옥한 직후 그 해 2월 결성된 신흥 청년 동맹에 가입하여 김찬·신철 등과 청주·대구 등
전국 28개 도시를 순회하며 '청년의 사회적 지위','식민지청년운동' 등의 주제로 강연을 하였고,
기관지 '신흥청년'의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4월, 허헌이 사장으로 있던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하였다.
같은 시기에 국내 청년 단체의 통일 조직인 조선 청년총 동맹이 창립되자,
한신교·주종건·최순탁·강제모 등과 함께 중앙 검사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4년9월에는 홍증식의 추천으로 '조선일보' 사회부로 자리를 옮겼으나,
1924년10월15일, 신일용의 '조선과 러시아의 정치적 관계'라는 사설이 문제가 된 '조선일보' 제3차 정간
사건으로 임원근·김단야와 함께 해직되었다.
1925년4월20일, 국내의 공산당 조직을 결성하기 위하여 국내 공산주의 운동의 한 핵심 분파로 박헌영이
속해 있던 '화요회'계가 중심이 되어 전조선 민중 운동자대회,
1925년4월15일, 전조선 기자 대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하여 일본 경찰의 관심을 흩어놓고,
1925년4월17일, 김약수·김재봉·윤덕병 등과 함께 조선 공산당 창당대회를 개최하여 마침내 국내 공산당
조직을 창설하게 되었다.
1925년4월18일,자기 집에서 고려 공산 청년회를 결성하고 책임 비서직을 맡아 본격적인 조직 활동을 전개
하였으나, 그 해 11월 30일, 처인 주세죽과 함께 제1차 조선 공산당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잡혀 복역하게
된다.
공판 도중 미친 사람으로 가장하여 1927년11월, 병보석으로 출감,
1928년11월, 국내에서 탈출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인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29년6월, 모스크바로 옮겨 동방 노력자 공산대학에서 2년간 수학하였으며,
1932년1월, 상해로 가서 김단야와 접선하여 김형선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코뮤니티'라는 기관지를 제작,
국내에 배부하다가 1933년7월, 상해 일본 영사관에 잡혀 경기도 경찰부로 압송,치안 유지법·출판법 위반
으로 기소, 6년형을 언도받아 복역하였다.
1939년, 만기로 출소하여 김삼룡·정태식 등과 함께 세칭 경성콤그룹을 조직하는 데 지도 역할을 하였으나, 1942년12월, 일본경찰이 검거망을 좁혀오자 광주로 피신하여 김성삼이란 가명으로 기와공장 인부로 취직
하여 몸을 숨겼다.
1945년8월15일, 광복이 되자,8월19일 서울로 올라와 광복 다음날 결성된 장안파 공산당에 대항하여
1945년8월20일, 김형선·이관술·김삼룡·이현상 등과 함께 회합을 가지고 공산당 재건에 주력하였다.
1945년9월1일,6일,8일, 열성자 대회를 개최하였다.
1945년9월8일, 열성자 대회에서 세칭 장안파와 재건파가 연석회의를 가지고,이를 통합한 조선 공산당의
중앙기구를 구성하여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그는 소위 8월 테제, 즉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테제를 발표하여 당시의 혁명 단계를 민주주의 혁명
단계로 규정하여, 노동자뿐 아니라 농민 및 양심 있는 지주·자본가와도 연합하여 혁명전선을 결성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실천에 있어서는 모험주의적 노선에 편향되어 연합전선과는 거리를 보이게 되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하여 '독립 촉성 중앙협의회'를 창설하자,
1945년10월23일, 조선 공산당을 이끌고 이에 참여하였으나
1945년11월16일, 친일파를 우선적으로 숙청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면서,선건국 후친일파 숙청을
내세운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에서 탈퇴하여 이승만과의 연합을 포기하게 된다.
1945년 말, 모스크바3상회의 결과 한반도에 대한 신탁 통치안이 발표되었을 때 조선 공산당이 찬탁으로
노선을 결정하면서,
1946년1월8일, 그는 '뉴욕타임즈'와의 기자 회견에서, 소련만의 신탁 통치를 찬성하며, 조선은 소련의 연방
국으로 편입될 것을 주장했다는 시비로 이의 사실 여부를 둘러싸고 물의가 빚어지기도 하였다.
1946년2월15일, 좌익 세력의 총결집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결성되자, 여운형·허헌·김원봉·백남운과
함께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는 등 활약하였다.
1946년7월12일, 이른바 조선 공산당 위폐 사건을 계기로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 국면이 전개되면서
1946년9월6일, 미군정이 박헌영 등 공산당 핵심 간부에 대한 검거를 감행하려 하자,
하루 전인 1946년9월5일, 관 속에 누워 영구차 행렬로 자신들을 위장,북한으로 탈출하게 되었다.
그 뒤 1946년11월3일, 조선 공산당·조선 인민당 및 남조선 신민당이 합쳐 남조선 노동당으로 결성되자
부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북한에 머물면서 이른바 ‘박헌영 서한’을 통해 남로당의 활동을 지도하였다.
1948년에는 남한에서 단독 선거에 의한 총선거가 실시되자 지하 선거를 실시하여
1948년8월29일, 해주에서 남한 선출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360명을 선출하는 데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다.
1948년9월9일, 북한에 정권이 수립되자 부수상 및 외상에 취임하였으나, 세력 기반이 남한에 있는 그는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에게 실권을 빼앗겼다.
1950년1월에는 ‘남로당의 한국화’·‘남로당 지하당의 남북 통일에 관한 정책 입안의 건’ 등을 작성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10월에는 인민군내에 총정치국을 창설하여 인민군 중장으로 참전하였다.
6·25전쟁 발발 원인에 관한 북한의 남침설 중의 한 갈래로
박헌영이 자신의 지지 기반인 남한을 해방하여 자신의 세력을 만회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1953년에 김일성에 의하여 남로당계 숙청이 감행되면서
1953년8월3일, 체포되어 평안북도 철산군 내의 산골에 감금되어 고문을 받았다.
1955년12월15일, 미국의 첩자·정부 전복 음모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고 한다.
(처형일에 대해서는 1955년12월15일,1956년12월5일 등의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