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한국 임시위원단                2019.11.15금요일,맑음

제2차 유엔(UN) 총회’(1947.11.14) 결정에 따라 5·10 총선거의 공정한 감시 및 관리를 위해 입국한 유엔 산하의 임시기구로서 영문 약칭은 UNTCOK(UN Temporary Commission on Korea).

두 차례의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1947년 10월 유엔 총회에 한반도 문제를 상정했다.

유엔 총회는 소련의 불참 속에(찬성 41, 반대 0, 기권 4) 한반도에서 인구비례에 따른 총선거 실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하 위원단) 파견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호주·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 등 8개국 대표로 구성된 위원단이 1948년 1월 7일 한국에 도착했다. 우크라이나도 지명되었으나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나 소련이 위원단의 38선 이북 지역 입북을 거부함으로써 유엔 총회가 결의한 전 한반도 선거는 무산되었다.

위원단은 선거를 남한지역에서만 실시할 것인가에 대해 심의하는 과정에서 이견으로 엇갈렸다.

중국·필리핀·엘살바도르·프랑스는 단독 선거라도 실시하자고 주장했고

호주·캐나다·인도·시리아 대표는 반대했다. 결국 위원단은 독자적 결론을 내지 못하고 유엔 총회에 자문을 구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1948년 2월 유엔 소총회는 격론 끝에 소련 등 공산진영 11개국이 불참하고 11개국이 기권한 상태에서,

31개국(캐나다·호주 제외)이 찬성하여 위원단이 선거 실시가 가능한 지역에서만이라도 선거를 감시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위원단은 논란 끝에 1948년 5월 선거안을 찬성 4, 반대 2(호주·캐나다), 기권 2(인도·프랑스)로 가결했다. 캐나다와 호주는 극우단체를 제외한 한국 내의 모든 정당이 선거를 보이콧하는 중대한 사태가

발생했다는 이유로 선거안을 반대했다.

 


⊙ 백범 김구         2019.11.15.금요일,맑음

1876년(고종 13) ~ 1949년

을사조약, 안명근사건, 안중근 하얼빈 의거, 반탁운동

상해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 중경 임시정부 주석, 비상 국민회의 부총재

상해 임시정부 초대 경무국장, 중경 임시정부 주석, 비상 국민회의 부총재


본관은 안동(). 아명은 창암(), 본명은 김창수(), 개명하여 김구(, ), 법명은 원종(), 환속 후에는 김두래()로 고쳤다.

호는 백범(). 황해도 해주백운방() 텃골[] 출신. 김순영()의 7대 독자이며, 어머니는 곽낙원()이다.

인조 때 삼정승을 지낸 방조() 김자점()이 권세 다툼에서 청병()을 끌어들였다는 역모죄로 효종의 친국을 받고 1651년 사형당하자, 화를 피하여 선조되는 사람이 그 곳으로 옮겨왔다.

4세 때 심한 천연두를 앓아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고, 9세에 한글과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으며, 아버지의 열성으로 집안에 서당을 세웠다.

14세에 『통감』·『사략』과 병서를 즐겨 읽었으며, 15세에는 정문재()의 서당에서 본격적인 한학수업에 정진하였고, 17세에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벼슬자리를 사고 파는 부패된 세태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18세에 동학에 입도하였으며, 황해도 도유사()의 한 사람으로 뽑혀 제2대 교주 최시형()을 만났다.

19세에 팔봉접주()가 되어 동학군의 선봉장으로 해주성()을 공략하였는데, 이 사건으로 1895년 신천 안태훈()의 집에 은거하며, 당시 그의 아들 중근()과도 함께 지냈다.

또한, 해서지방의 선비 고능선() 문하에서 훈도를 받았고, 항일의식을 참지 못하여 압록강을 건너 남만주 김이언()의 의병부대에 몸담았다.

을미사변으로 충격을 받고 귀향을 결심, 1896년 2월 안악 치하포()에서 쓰치다[]를 맨손으로 처단하여 21세의 의혈청년으로 국모의 원한을 푸는 첫 거사를 결행하였다.

그 해 5월 집에서 은신중 체포되어 해주감옥에 수감되었고, 7월 인천 감리영()에 이감되었으며, 다음해인 1897년 사형이 확정되었다. 사형직전에 집행정지령이 내려져 생명을 건질수 있었지만, 석방이 되지 않아 이듬해 봄에 탈옥하였다.

삼남일대를 떠돌다가 공주 마곡사에 입산하여 승려가 되어 원종()이란 법명을 받았고, 1899년 서울 새절(봉원사)을 거쳐 평양 근교 대보산()영천암()의 주지가 되었다가 몇 달 만에 환속하였다.

수사망을 피해 다니면서도 황해도 장연에서 봉양학교() 설립을 비롯하여, 교단 일선에서 계몽·교화사업을 전개하였으며, 20대 후반에 기독교에 입교하여 진남포예수교회 에버트청년회(Evert) 총무로 일했다.

이런 가운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상경하여 상동교회 지사들의 조약반대 전국대회에 참석하였으며, 이동녕()·이준()·전덕기() 등과 을사조약의 철회를 주장하는 상소를 결의하고 대한문 앞에서 읍소하면서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였다.

한편, 종로에서 가두연설에 나서기도 하여 구국대열에 앞장섰다. 1906년 해서교육회(西) 총감으로 학교설립을 추진하여, 다음해 안악에 양산학교()를 세웠다.

1909년 전국 강습소 순회에 나서서 애국심을 고취하는 한편, 재령 보강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때 비밀단체 신민회()의 회원으로 구국운동에도 가담하였다. 그 해 가을 안중근의 거사에 연루되어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뒤 1911년 1월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안명근()사건의 관련자로 체포되어 17년형을 선고받았다.

1914년 7월 감형으로 형기 2년을 남기고 인천으로 이감되었다가 가출 옥여 김홍량()의 동산평() 농장관리인으로 농촌부흥운동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직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경무국장이 되었고, 1923년 내무총장, 1924년 국무총리 대리, 1926년 12월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헌법을 제정, 임시정부를 위원제로 고치면서 국무위원이 되었다. 1929년 재중국 거류민단 단장을 역임하였고 1930년 이동녕·이시영() 등과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였다.

19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의혈청년들로 하여금 직접 왜적 수뇌의 도륙항전()에 투신하도록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에 중국군 김홍일() 및 상해병공창 송식표()의 무기공급과 은밀한 거사준비에 따라, 1932년 1·8이봉창()의거와 4·29윤봉길()의거를 주도한 바 있는데, 윤봉길의 이 의거가 성공하여 크게 이름을 떨쳤다.

1933년 장개석()을 만나 한·중 양국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중국 뤄양군관학교[]를 광복군 무관양성소로 사용하도록 합의를 본 것은 주목받을 성과였으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령에 재임되었고, 1940년 3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주석에 취임하였다.

같은해 충칭[]에서 한국광복군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지청천(), 참모장에 이범석()을 임명하여 항일무장부대를 편성하고,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 즈음하여 1941년 12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를 하면서 임전태세에 돌입하였다.

1942년 7월 임시정부와 중국정부 간에 광복군 지원에 대한 정식협정이 체결되어, 광복군은 중국 각 처에서 연합군과 항일공동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그 뒤 개정된 헌법에 따라 1944년 4월 충칭 임시정부 주석으로 재선되고, 부주석에 김규식(), 국무위원에 이시영·박찬익 등이 함께 취임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에 강제 징집된 학도병들을 광복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산시성[西]시안[西]과 안후이성[] 푸양[]에 한국광복군 특별훈련반을 설치하면서 미육군전략처와 제휴하여 비밀특수공작훈련을 실시하는 등, 중국 본토와 한반도 수복의 군사훈련을 적극 추진하고 지휘하던 중 시안에서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임시정부 국무위원과 함께 제1진으로 환국하였다. 그 해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의 신탁통치결의가 있자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적극 앞장섰으며, 오직 자주독립의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정계를 영도해 나갔다.

1946년 2월 비상국민회의의 부총재에 취임하였고, 1947년 비상국민회의가 국민회의로 개편되자 부주석이 되었다. 그 해 6월 30일 일본에서 운구해온 윤봉길·이봉창()·백정기() 등 세 의사의 유골을 첫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봉안하였다.

이를 전후하여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민주의원()·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김규식과 함께 이끌었다. 1947년 11월 국제연합 감시하에 남북총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결의안을 지지하면서, 그의 논설 「나의 소원」에서 밝히기를 “완전자주독립노선만이 통일정부 수립을 가능하게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1948년 초 북한이 국제연합의 남북한총선거감시위원단인 국제연합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선거가능지역인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김구는 남한만의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수립방침에 절대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 해 2월 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서를 통하여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강력히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하여 5·10제헌국회의원선거를 거부하기로 방침을 굳히고, 그 해 4월 19일 남북협상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등이 남북협상 4자회담에 임하였으나, 민족통일정부 수립에 실패하고 그 해 5월 5일 서울로 돌아왔다. 그 뒤 한국독립당의 정비와 건국실천원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며 구국통일의 역군 양성에 힘썼다.

남북한의 단독정부가 그 해 8월 15일과 9월 9일에 서울과 평양에 각각 세워진 뒤에도 민족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통일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하던 가운데, 이듬해 6월 26일 서울 서대문구의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고, 1962년 건국공로훈장 중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4·19혁명 뒤 서울 남산공원에 동상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백범일지()』를 남겼다


 

김구 남한 단독 정부 수립 반대 성명       2019.11.15.금요일,맑음

1947년 12월 22일 

김구는 이승만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단독정부 절대반대와 '한국민족대표단'의 해산을 주장하였다 
김구의 항의로 이승만의 민족대표단은 한국민족대표자회와의 합동작업이 재개되었지만 
한민당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UN 소총에서 남한만의 총선안 가결

1947년2월26일



⊙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 결렬       2019.11.15.금요일,맑음

1945년12월16일부터 27일까지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개국  3상회의가 개최되었으며 미국의 제안으로

한반도에서 신탁통치 실시를 결정하였고 합의문에 따라 1945년12월28일,'미.소 공동 위원회'가 설치된다.

'미.소 공동위원회'는 신탁 통치를 포함한 한국문제 토의를 위해

1946년1월16일부터 2월5일까지 예비회의,3월20일 덕수궁에서 본회의가 개최되었으나 진전없이

1946년5월6일, 무기한 휴회를 선언하였다.

1947년5월21일,'미.소 공동위원회'가 재개되었으나 협의 대상 선정 문제를 놓고 양측의 의견이 맞서고

1947년8월21일,2차에  걸친 '미.소 공동위원회'는 결국 결렬되고 말았다.



 


⊙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2019.12.15.일요일,맑음

1945년11월5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한국의 초기 노동조합이자 광복 직후 허성택에 의해 세워진 남로당 좌파 계열의 노동조합이다.

전평의 산하에는 16개 산업별 노조가 참여했고,전국 11개 도시에 지방 평의회를 조직했다.

전평은 남·북한을 통합한 인민 공화국 제창 및 신탁 통치 찬성 운동으로 민족주의 진영으로

부터 반발을 샀으며 '대한 민주 청년동맹'에 의해 본부가 점거되기도 했다.

1946년과 1947년에 두차례에 걸쳐 제네스트를 지령,

민족주의 노선의 노동조합인 대한 노총에 들어갔으나 패배·소멸하였다.

1948년8월15일,대한민국 정부는 전평을 비합법화하였다.



'



북조선 인민위원회                 2019.11.15.금요일,맑음

1947년1월에 결성한 '북조선 인민 위원회'는 

1차 회의에서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여 결성되어 1년 반 동안 북한 최고 집행기관 역할을 했던 기관이며,'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모태가 된 기관이다.

또한, 하원 의회의 기능을 했다.


1946년2월8일,

김일성이 이끄는 조선 로동당에 의해 소련 군정지역에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창설된것이

모체다.

'임시인민위원회'는 약 1년 동안 활동한 뒤 1947년2월에 북조선인민위원회로 개칭했다.

1947년2월,

제1차 회의에서 인민위원장에 김일성,부위원장에 김책과 홍기주 등 22명의 위원을 선출

했다. 중앙의 인민위원회는 최고인민회의와 함께 의회의 기능을 수행했다.

보통 최고 인민회의가 상원의 기능을 수행하고, 인민위원회는 하원의 기능을 수행했다.

중앙 인민위원회 외에 각 자치단체별로 지역 인민위원회가 있었다.

지역의 인민위원회는 각 도별로 도 인민위원회가 있고,

시·군·구에는 각각 시·군·구의 인민위원회를 설치했다.

지역 인민위원회는 도와 시·군·구의 행정활동을 감사, 감찰했다.

형식적으로 복수정당의 후보자가 인민위원회 위원 선거에 출마하지만,

실질적으로 조선로동당 소속 출마자들이 대거 당선되었다.

1947년과 그 이듬해에 인민경제계획을 실행하고 인민군 창건 업무를 수행,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기반을 다졌다.

1948년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모든 권한을 공화국 정부로 이양하고 해체되었다.



 

⊙  조선 공산당                           2019.11.15.일요일,맑음

1925년4월25일,

국내 공산주의 서클이었던 화요회 등 구성원 19명은 서울에서 조선 공산당을 창당하고,

국제 공산당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과 국제공산주의청년동맹으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았다. 당의 당면과제를 조선의 완전독립,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의무교육 및 직업교육 실시 등으로 정하고, 계급투쟁과 민족해방을 기치로 일제하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고, 신간회를 통해 전국적 규모의 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4차례에 걸친 검거선풍으로 조직이 와해되는 와중에서 제3인터내셔널은 조선 공산당의 해체를 지시하고, 당 재건의 지침을 내림으로써 제1차 조선 공산당은 1928년 12월 7일자로 막을 내렸다.
조선공산당은

당초 조직구성에서 인텔리겐치아와 소부르주아지가 중심이었던 한계로 인해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한 대중정당으로서 뿌리를 내리지 못했으며, 파벌간의 대립과 갈등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한인들의 초기 공산주의 운동은 해외에서 시작되었다. 이동휘 등이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918년경 조직한 한인사회당, 한명길 등이 역시 러시아의 이르쿠츠크에서 1921년 4월 결성한 이르쿠츠크파 공산당, 그리고 이와 별도로 이동휘 등이 1921년 5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결성한 고려공산당(상해파공산당)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나, 한국에서의 공산당 결성의 기원은 국내에서 조직된 조선공산당에서부터 유래한다고 본다.

1925년 4월 25일 국내 공산주의 서클이었던 화요회와 일본유학생계의 북풍회, 그리고 민중사계 및 신생활사계 구성원 19명은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을 창당하고, 다음날에는 고려공산청년회도 결성했으며, 국제공산당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과 국제공산주의청년동맹으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았다.

당 조직은 책임비서에 김재봉, 조직부장 조동호, 선전부장 김참, 인사부장 김약수, 노농부장 정해운, 조사부장 주종건 등을 선임하고, 당의 당면과제를 조선의 완전독립, 8시간 노동제, 최저임금제, 의무교육 및 직업교육 실시, 언론·집회·결사의 자유, 타도 일본제국주의·봉건세력 등으로 정하고, 계급투쟁과 민족해방을 기치로 일제하에서 사회주의운동을 전개하여 1926년 6·10만세운동 발생에 배후에서 영향을 미치고 신간회(新幹會)를 통해 전국적 규모의 활동을 벌여나갔다.

그러나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산발적인 활동을 벌이다가, 1925년 11월 신의주에서의 제1차 검거사건을 시발로 1926년 6월, 1928년 2월과 7월 등 4차례에 걸친 검거선풍으로 조직이 와해되고 말았다. 조선공산당은 당초 조직구성에서 인텔리겐치아와 소(小)부르주아지가 중심이었던 한계로 인해 노동자·농민을 중심으로 한 대중정당으로서 뿌리를 내리지 못했으며, 파벌간의 대립과 갈등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제3인터내셔널은 1928년 '12월 테제'를 통해 1926년 3월에 승인했던 조선공산당의 해체를 지시하고, 당 재건의 지침을 내림으로써 제1차 조선공산당은 1928년 12월 7일자로 그 막을 내렸다. 이후 공산주의자들은 이 테제에 따라 여러 차례 당 재건을 위해 노력했으나 결실을 보지 못하고 해방을 맞이했다.

1945년 8월 해방과 더불어 그동안 잠적했던 공산주의자들은 다시 표면에 등장, 8월 15일 종로에 있는 장안 빌딩에서 이영·정백 등의 서울청년회계와 ML(마르크스·레닌)계, 그리고 화요회계 일부가 모여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논의, 조직선언을 발표하고 16일 공산당 결성을 마쳤는데, 이것이 세칭 '장안파공산당'이다.

한편 8월 20일 박헌영을 중심으로 한 재건파가 장안파와는 별도로 '조선공산당재건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자신들의 정치노선을 담은 '8월 테제'를 발표했으며, 동시에 1928년 해체된 바 있던 조선공산당의 정통 계승을 자임했다. 재건파공산당은 9월 8일 장안파를 흡수하고, 12일 정식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으며, 이후 1946년 11월 23일 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과 합당해 남조선노동당을 결성했다.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                2019.11.15.일요일,맑음

1946년5월,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후 미군정은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는 한편

1946년10월12일, 군정법령 제118호로 '남조선 과도 입법의원' 창설을 공표했다.

    입법의원은 총 9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중 민선의원은 이승만의 '독립촉성국민회'계와 '한국민주당'계의 보수세력이 당선되었고,

   관선의원은 '좌우합작'파에서 임명되었다.

그러나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좌파 인물들이 대거 사퇴함에 따라 중도세력의 중심 역할을 기대했던 미군정의 의도는 실패했다.

1946년12월12일, 입법의원은 개원하여

1948년5월10일, 선거 후 제헌국회가 성립되어 해체되었다.


입법의원은 형식상으로는 입법기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자주적인 입법권을 행사하지 못하고

1948년 5·10선거를 위한 대표기구와 미군정의 자문기구의 역할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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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헌영            2019.11.15.일요일,맑음

박헌영; 해방 이후 북한에서 남조선 노동당 부위원장,부수상,외상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 운동가,

생졸; 1900년-1955년

출생; 충청남도 예산

본관; 영해

 

박헌영은 쌀장사를 하던 아버지 박현주와 소실인 어머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한문을 배우다 12세 되던 해인 1912년 예산군 대흥면 대흥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

하였다.

1915년,경성 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에는 조선 중앙 기독교 청년회(YMCA)

영어반에서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1919년 경성 고등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계속 영어 공부를 하는 한편, 승동교회에 다니면서 미국유학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1920년9월, 3·1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어 민족 운동의 거점이었던 중국 상해로 갔다.  

   상해에서도 조선 중앙 기독교 청년회 부설 강습소에 다니면서 영어 공부를 계속하는 한편,

   임원근 등과 알게 되어 임원근·김단야·최창식 등과 함께 김만겸의 이르츠크파 고려 공산당 상해 지부에

   입당하였다.

   정식으로 공산당에 입당한 이후 프랑스조계에 위치한 사회 과학연구소에서 공산주의 선전팜플렛을 번역

   하는 일에 열중하였으며, 고려 공산청년동맹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1921년에는 허정숙의 소개로 뒤에 국내에서 결혼하게 되는 주세죽을 만나 열애에 빠지기도 하였다.

1921년 늦가을, 김단야·임원근과 함께 극동 인민 대표자 회의에 참석키 위하여 모스크바로 가,

1922년1월,고려 공산 청년 동맹 대표로 참가하였다.

1922년4월,김단야·임원근과 함께 국내 공산당 조직을 위해 귀국하다가 일본 경찰에 잡혀 징역 1년 6월의

   형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24년1월, 만기 출옥한 직후 그 해 2월 결성된 신흥 청년 동맹에 가입하여 김찬·신철 등과 청주·대구 등

   전국 28개 도시를 순회하며 '청년의 사회적 지위','식민지청년운동' 등의 주제로 강연을 하였고,

   기관지 '신흥청년'의 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4월, 허헌이 사장으로 있던 '동아일보'에 기자로 입사하였다.

같은 시기에 국내 청년 단체의 통일 조직인 조선 청년총 동맹이 창립되자,

   한신교·주종건·최순탁·강제모 등과 함께 중앙 검사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4년9월에는 홍증식의 추천으로 '조선일보' 사회부로 자리를 옮겼으나,

1924년10월15일, 신일용의 '조선과 러시아의 정치적 관계'라는 사설이 문제가 된 '조선일보' 제3차 정간

   사건으로 임원근·김단야와 함께 해직되었다.

1925년4월20일, 국내의 공산당 조직을 결성하기 위하여 국내 공산주의 운동의 한 핵심 분파로 박헌영이

   속해 있던 '화요회'계가 중심이 되어 전조선 민중 운동자대회,

1925년4월15일, 전조선 기자 대회를 개최한다고 발표하여 일본 경찰의 관심을 흩어놓고,

1925년4월17일, 김약수·김재봉·윤덕병 등과 함께 조선 공산당 창당대회를 개최하여 마침내 국내 공산당

   조직을 창설하게 되었다.

1925년4월18일,자기 집에서 고려 공산 청년회를 결성하고 책임 비서직을 맡아 본격적인 조직 활동을 전개

   하였으나, 그 해 11월 30일, 처인 주세죽과 함께 제1차 조선 공산당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잡혀 복역하게

   된다.

공판 도중 미친 사람으로 가장하여 1927년11월, 병보석으로 출감,

1928년11월, 국내에서 탈출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한국인 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29년6월, 모스크바로 옮겨 동방 노력자 공산대학에서 2년간 수학하였으며,

1932년1월, 상해로 가서 김단야와 접선하여 김형선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코뮤니티'라는 기관지를 제작,

   국내에 배부하다가 1933년7월, 상해 일본 영사관에 잡혀 경기도 경찰부로 압송,치안 유지법·출판법 위반

   으로 기소, 6년형을 언도받아 복역하였다.

1939년, 만기로 출소하여 김삼룡·정태식 등과 함께 세칭 경성콤그룹을 조직하는 데 지도 역할을 하였으나, 1942년12월, 일본경찰이 검거망을 좁혀오자 광주로 피신하여 김성삼이란 가명으로 기와공장 인부로 취직

   하여 몸을 숨겼다.

1945년8월15일, 광복이 되자,8월19일 서울로 올라와 광복 다음날 결성된 장안파 공산당에 대항하여

1945년8월20일, 김형선·이관술·김삼룡·이현상 등과 함께 회합을 가지고 공산당 재건에 주력하였다.

1945년9월1일,6일,8일, 열성자 대회를 개최하였다.

1945년9월8일, 열성자 대회에서 세칭 장안파와 재건파가 연석회의를 가지고,이를 통합한 조선 공산당의

   중앙기구를 구성하여 책임비서에 취임하였다.

   그는 소위 8월 테제, 즉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테제를 발표하여 당시의 혁명  단계를 민주주의 혁명

   단계로 규정하여, 노동자뿐 아니라 농민 및 양심 있는 지주·자본가와도 연합하여 혁명전선을 결성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나, 실천에 있어서는 모험주의적 노선에 편향되어 연합전선과는 거리를 보이게 되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하여 '독립 촉성 중앙협의회'를 창설하자,

1945년10월23일, 조선 공산당을 이끌고 이에 참여하였으나

1945년11월16일, 친일파를 우선적으로 숙청하여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면서,선건국 후친일파 숙청을

   내세운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에서 탈퇴하여 이승만과의 연합을 포기하게 된다.

1945년 말, 모스크바3상회의 결과 한반도에 대한 신탁 통치안이 발표되었을 때 조선 공산당이 찬탁으로

   노선을 결정하면서,

1946년1월8일, 그는 '뉴욕타임즈'와의 기자 회견에서, 소련만의 신탁 통치를 찬성하며, 조선은 소련의 연방

   국으로 편입될 것을 주장했다는 시비로 이의 사실 여부를 둘러싸고 물의가 빚어지기도 하였다.

1946년2월15일, 좌익 세력의 총결집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결성되자, 여운형·허헌·김원봉·백남운과

   함께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는 등 활약하였다.

1946년7월12일, 이른바 조선 공산당 위폐 사건을 계기로 좌익 세력에 대한 탄압 국면이 전개되면서

1946년9월6일, 미군정이 박헌영 등 공산당 핵심 간부에 대한 검거를 감행하려 하자,

하루 전인 1946년9월5일, 관 속에 누워 영구차 행렬로 자신들을 위장,북한으로 탈출하게 되었다.

그 뒤 1946년11월3일, 조선 공산당·조선 인민당 및 남조선 신민당이 합쳐 남조선 노동당으로 결성되자

   부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북한에 머물면서 이른바 ‘박헌영 서한’을 통해 남로당의 활동을 지도하였다.

1948년에는 남한에서 단독 선거에 의한 총선거가 실시되자 지하 선거를 실시하여

1948년8월29일, 해주에서 남한 선출 최고 인민회의 대의원 360명을 선출하는 데 주도적인 활동을 하였다.

1948년9월9일, 북한에 정권이 수립되자 부수상 및 외상에 취임하였으나, 세력 기반이 남한에 있는 그는

   소련을 등에 업은 김일성에게 실권을 빼앗겼다.

1950년1월에는 ‘남로당의 한국화’·‘남로당 지하당의 남북 통일에 관한 정책 입안의 건’ 등을 작성하도록

   지시하기도 하였으며,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10월에는 인민군내에 총정치국을 창설하여 인민군 중장으로 참전하였다.

   6·25전쟁 발발 원인에 관한 북한의 남침설 중의 한 갈래로

   박헌영이 자신의 지지 기반인 남한을 해방하여 자신의 세력을 만회하려 했다는 주장도 있다.

1953년에 김일성에 의하여 남로당계 숙청이 감행되면서

1953년8월3일, 체포되어 평안북도 철산군 내의 산골에 감금되어 고문을 받았다.

1955년12월15일, 미국의 첩자·정부 전복 음모 등의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받고 처형되었다고 한다.

    (처형일에 대해서는 1955년12월15일,1956년12월5일 등의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음).


1953년 남로당계열인 박헌영·이승엽 등 13명을 간첩행위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하여 숙청한 일. 52년 12월 15일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에서 당의 조직적·사상적 강화와 종파주의 잔재 청산을 강조하는

김일성의 보고가 있은 후, 노동당은 각 정당·단체들에게 당성() 검토를 하게 하는 한편, 박헌영·이승엽 등을 체포·구속했다. 53년 7월 30일 이승엽·조일명·임화·박승원·이강국·배철·윤순달·이원조·백형복·조용복·맹종호·설정식의 12명이 기소되어 8월 3일부터 6일까지 심리가 진행되었다.

기소장에는 ①미제국주의를 위해 감행한 간첩행위 ②남반부 민주역량 파괴·약화, 음모와 테러·학살행위 ③공화국 정권 전복을 위한 무장폭동 행위 등 3가지 내용의 죄상이 제시되었다. 이들 중 이원조 징역 12년에 재산몰수, 윤순달 징역 15년에 재산몰수, 나머지 10명은 모두 사형과 재산몰수를 선고받았다. 박헌영은 55년 12월에 기소되고, 그의 재판을 위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특별재판소를 설치,최용건을 재판장에 임명했다. 박헌영의 기소내용은 ①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한 간첩행위 ②남반부 민주역량 파괴·약화행위 ③공화국 정권 전복음모 행위 등이었다. 12월 15일 열린 공판에서 박헌영은 사형과 재산몰수를 선고받았으며, 그해 처형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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