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양 여운형                                                2019.11.03.일요일,맑음  


                                   


몽양 여운형(생졸; 1886년5월25일~1947년7월19일)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신원리 묘곡에서 부친 여정현과 모친 경주 이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14세에 유세영의 장녀와 혼인하였으나 사별하고 충주의 진상하와 재혼했다.

조부 여규신과 종조부 여규덕은 동학에 가담했는데 몽양에게 끼친 영향이 컸으며,

부친 여정현은 조부와 달리 조선 시대 양반 사회의 계급 주의를 신봉했다.

몽양은 부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로 갔다.

1900년,

배재학당에 입학하여 기독교를 접하고 중도에 그만두고,

흥화학교와 우무학당에서 전신 기술을 공부하여 통신원 기술자가 되고자자 하였으나,

통신원이 일본 소유로 넘어가 취업을 그만두었다.

1906년,

부친이 사망하자 집안의 노비를 모두 불러모아 노비 문서를 모두 불태워 그들을 해방시켰다.

1907년부터,

서울 종로에 있던 승동 교회에서 선교사 보조원 생활을 했었고,

양평 고향집에 기독교 광동 학교를 세워 향리의 청년들을 계몽하는데 앞장섰다.

경기도 양평에서 국채보상운동의 지회를 설립하여 활동하였고 개신교에 입교했다.

1908년,

미국인 선교사 클라크 목사의 조수로 있으면서 기호학회에 참여하여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승동교회를 출입했다.

1910년,

선교보다 교육의 중요성을 절감하여 강릉에 '초당의숙'을 세워 신학문을 가르치는데 전념

하였으나 총독부에 의해 학교는 1년만에 폐쇄되고 말았다.

학교가 폐쇄되자 승동 교회로 돌아와 평양 신학교를 다녔다.

대한민국 최초의 야구팀인 YMCA 야구부(황성 기독교 청년회)의 주장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
강원도 강릉에서 남궁억의 후원으로 운영되던 초당의숙의 교사가 되어 청년교육에 힘썼다.

1911년, 평양의 장로교회 연합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수학하고,

1912년11월2일,

와세다 대학의 초청을 받아 일본까지 원정 경기를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직접 목격한 신문물과 조선 유학생을 통해 선교사 클라크를 따라 중국 서간도

(퉁화)의 신흥 학교를 견학하였는데 이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1914년 겨울,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에서 활동하다가 금릉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였다.



언더우드 선교사로 부터 추천장을 받아 장로교 선교회가 운영하는 난징 진링대학에서 3년간

영문학과 철학을 공부하였다(1915년2월~1917년1월;28~30세)

1916년,

상하이에서 협화서국 서점에 취업 하였으며 선교사,인성 학교 교사,여행 대행업 등을 했다.

1917년,

상하이로 활동무대를 옮기고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8년,

상하이에서 장덕수를 만나면서 여운형은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몽양은 정치와 독립 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조선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김규식을 파리 평화 회의에 대표로 파견하였고 신한 청년당을

발기했다. 

이 일은 국내 독립운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계기가 되었다. 

1918년,

상해고려민친목회를 조직하였으며,

신한청년당의 조직을 주도하고 총무간사로 활동하였다

1919년4월,

상하이에서 임시 정부가 조직되자 임시 의정원 의원이 되었는데,

일제는 이를 자치 운동으로 회유코자 11월에 그를 도쿄로 초청하였으나 장덕수를 통역관

으로 삼아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역설하였다.

재일 유학생의 2·8독립선언과 3·1운동에 관여하고,
김규식을 상하이로 초빙하여 파리강화회의 한국대표로 결정하였다.
상해임시정부의 수립에 힘썼으며 임시의정원 의원과 외무부 차장으로 활동하였다.
상하이에서 아동들에게 독립사상과 애국정신을 교육시키기 위해 인성학교를 설립하였다.
1920년,
사회주의 계열의 상해파 고려공산당과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으며,

5월에는 상하이에서 고려 공산당에 가입하였는데 국제 공산당 위원인 보이틴스키가 조선의 독립을 지원할 수 있다는 제안에 공산당에 참여하게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볼셰비키 정부가 상하이 임시 정부에 제공한 자금을 이동휘,김립이 가로채

독단적인 처리하자 고려 공산당은 분파되어 와해되고 말았다.

1921년,

이르쿠츠크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원동 피압박 민족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고비 사막을 횡단하고,바이칼 호수를 건너는 고난한 여행으로 도착하였으나 대회 장소는 모스코바로 변경

되었다.

1922년1월7일,

모스크바에 도착하여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났으며 조선의 사정을 논의하였다. 

중국 상하이로 돌아와 쑨원과 중국 공산당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였다.

김구,손정도 등과 함께 한인노병회를 조직하여 노농병 양성과 군비 조달에 힘썼다.

1925년부터는 중국 혁명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1925년,

쑨원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하고 중국혁명운동에 참여하였다.

1927년,

장개석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 축출로 몽양이 믿었던 소련의 지원과 국공합작 체계의

정치적 모델이 무너지고 말았다.

낙담한 그는 체육부 코치로 생활하면서 싱가포르에서 인삼 사업을 모색하다

1926년, 중국혁명운동이 실패한 후 독립운동을 하다가

1929년7월10일,

독립 운동을 지원하였다는 혐의로 상하이 주재 일본 영사관 경찰부에 체포되어 일본을 거쳐 국내로 압송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고 1933년 출옥하였다.

중국에서 실패한 공산 주의자이자 독립 운동가로서 허망한 날을 보냈으나 국내에서는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1933년,

출옥하자 그는 민족의 영웅으로 추대되었고 조선 중앙 일보사 사장에 취임하였는데 경영난으로 어려웠던 신문사는 그의 명성에 힘입어 번창하였다.

1934년, 조선체육회 회장직을 맡았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신문이 폐간되어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1942년,치안유지법 등의 혐의로 구속되어 징역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44년, 비밀 결사인 '조선 건국 동맹'을 조직하였다.

8월에는 일제의 패전을 예상하고 독립운동과 국가건설을 위하여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고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건국동맹의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여 농민동맹·부인동맹 등을 조직하였으며,

옌안의 독립동맹과 제휴하여 연합작전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1945년,

8.15 광복을 맞아 안재홍,정백 등과 건국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였으나 임시 정부의 지사들과 대립되었고 건준위 조직 내부 박헌영이 주도하는 극좌익 세력과 정치 투쟁 내분에 휩싸였다.

1945년9월,

조선 인민 공화국을 선포하였으나 우익 진영의 반대와 미군정의 인정을 받지 못해 실패했다.

1945년12월, '조선 인민당'을 창당,

1946년2월,

북한을 방문하여 조만식과 김일성을 만나 미소공동위원회의 대처문제 등을 논의하였다.

좌파 세력의 연합단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45년5월,

미소공동위원회가 휴회된 후 김규식 등과 함께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에 기반을 둔 미소공동위원회 재개와 성공을 목표로 좌우합작운동을 전개하였다.

1945년8월,

조선인민당 당수직을 사임하였으며,

1945년9월,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 3당 합당문제를 포함한 남한 현안에 대한 의견교환을 위해 북한을 방문하였다.

1945년11월, 사회노동당 준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남조선노동당과 합동을 제의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1946년,

29개의 좌익단체를 규합하여 '민주주의 민족 전선'을 결성하였으나 정책 노선이 명확치 못해

조직을 장악하지 못했고 반대파 좌익 세력에게 밀려 탈퇴하였다.

1947년1월,
우파 세력의 반탁운동과 좌파 세력의 편협성을 비판하는 담화를 발표하면서 정계에 복귀
하였다.
1947년3월, 신당 결성을 위한 준비 활동에 착수하여

1947년5월,

'근로 인민당'을 창당하여 위원장을 맡아 김규식·김창숙 함께 임시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민족통일전선운동을 펼치는 등 활동 하였으나 극좌·극우 양측으로부터 소외당한 채

좌우 합작 운동을 추진하던

1947년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극우파 한지근에 의하여 암살되었다.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와 여운형       작성일자; 2019.11.03.일요일,맑음

 

1945년8월 초,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배가 유력시 되자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일본의 항복과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독부 정무 총감 엔도 류사쿠를 앞세워 조선의 민족 지도자와 

 협상 대상자를 물색 중 민족 지도자인 여운형은 총독부 제안을 받아 들이고,

1945년8월15일 오전8시,엔도와 만나 일본인들의 귀환 문제,정치·경제범의 석방문제 등을 협상 타결하였다.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여운형은 ‘건국 준비 위원회’를 발족시켰고,

그 이튼날인 8월16일 오후1시, 서울의 휘문중학교 교정에서 엔도와의 회담 경과 보고 연설회를 개최하였다.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安在鴻)은 한·일 두 민족의 자주호양을 요망하는 담화를 방송하면서,

경위대 편성을 넘어 정규병의 무장대를 편성하여 질서를 도모할 것과,

식량 정책을 넘어 경제상 통화와 물가에 대한 신정책을 수립하고

근본적인 정치운영 대책을 발표하겠다고 하였다.

이들은 서울 풍문 여자 중학교에 사무소를 두고 건국 준비 사업 선전 공작과 치안 활동을 개시하였다.

8월17일에는 건준의 중앙 조직이 발표되었는데,

여운형이 위원장이 되고, 부위원장 안재홍, 그 외 5개부서로 총무부장 최근우, 재무부장 이규갑, 조직부장 정백,

선전부장 조동호, 무경부장 권태석으로 진용을 갖추었다.

8월18일에는 여운형이 제1차 위원회를 개최, 건준 명의로 ‘3천만 동포에게 지령’을 발표하였다.

자치기관을 신속하게 조직하고, 조직이 완료되면 건준에게 연락하며,

건국준위원회 공작에 협력할 것을 지시하였다.

하지만 민족주의 계열 일부 및 공산주의 계열 내부에서 건준의 조직상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8월18일 김병로,백관수,이인 등은 민족주의 계열과 건준 합작을 위해

여운형 안재홍과 담판을 제의하였고, 이들 간에

8월19일, ‘전국 유지자 대회’를 소집하기로 합의 하였으나

그날 밤 여운형이 해방 후 최초의 테러를 당하면서 이는 실행되지 않았다.

또한 테러로 여운형이 공석인 상황에서

8월21일 고경흠, 윤형식, 정백 등 소위 장안파 공산주의 계열에서 상의 없이 건준 경성지회를 휘문 문학교

강당에서 조직하고 15명의 위원을 선출하여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이런 상황에서

8월 22일에 건준 2차 중앙 조직이 구성되었다.

여운형, 최근우, 이동화, 이병학, 이여성, 이상도, 장권, 권태석, 권태휘, 김약수, 박문규(, 이강국, 최용달,

이광, 정의식, 정화준, 김교영, 홍기문, 고경흠, 윤행식, 최성환, 최익한, 정백, 안재홍, 양재하, 이승복,

이의식, 유석현, 이규갑, 김준연, 함상훈, 이용설, 정순용 등 총 33명으로 확대되었다.

중앙조직이 발표된 다음 날부터 좌우협상 및 건준 확대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8월23일 선전부장 권태석은 백관수를 만나 좌우를 아우른 건준 확대위원을 논의하였고,

여운형은 건준이 신국가 권력을 독점하려는 행위라는 민족주의 계열의 비판을 겨냥해

건준은 신정권이 수립될 때까지의 준비와 치안 확보를 위한 것이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8월25일에 권태석은 다시 김병로, 백관수, 이인, 박명환, 김용무, 박찬희, 김약수 등과 만나

확대위원 명단을 합의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위원장 직무대리인 안재홍이 직권으로 5명의 우익인사를 추가하고

건준 내부에서 좌익적인 소장파 백여명을 추가하는 등의 문제로 좌우간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러한 중앙 집행부 내부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건준은 8월말까지 전국적인 조직을 완료한다는 목표를 위해 지역 조직을 구성하였다.

 8월 26일 위원회의 기획부 전조선직역자치본부에서는

각 지역 종업원들에게 지역별 자치회의 조직을 통고하고, 또 각 지방에는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무경부 산하에는 장근을 대장으로 하는 치안대가 조직되어

사무국장에 정상윤, 총무부장에 송병무 등이 17개 부서를 맡게 되었다.

9월2일 서기국을 통해 발표된 강령을 보면

① 우리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을 기함,

② 우리는 전 민족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기본 요구를 실현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을 기함,

③ 우리는 일시적 과도기에 있어서 국내 질서를 자주적으로 유지하며 대중생활의 확보를 기함 등의

     3개항을 내세웠다.

그러나 건준과 민족주의 계열의 협상이 결렬된 상황에서

8월 31일 여운형은 사직을 선언하고, 안재홍도 건준에 사표를 제출했다.

 

건준은 9월1일 사회주의 계열 인사 중심으로 135명의 확대 위원 명단을 발표하였다.

9월 4일에는 확대위원회가 열렸으나 135명 중 일부만이 참석한 가운데

여운형과 안재홍의 사임 수리 건을 18대17로 부결시키고,허헌을 부위장으로 추가 하였다.

한 증언에 따르면

같은 날 허헌, 박헌영, 여운형, 정백 등 4인이 회동하여 인민 공화국 수립문제와 구성을 형의했다.

이틀 후인 9월 6일 위원회는 600여 명으로 된 ‘전국 인민 대표자 대회’를

서울 경기 여자중학교 강당에서 소집하였다.

이 회의는 헌법 기초 위원을 겸직하는 전국 인민 대표위원에

이승만·여운영·허헌·김규식·김구·김성수·김병로·안재홍·이강국·신익희·조만식 등 55명을, 고문에 오세창·권동진·김창숙·이시영 등 12명을 각각 선출하고, '조선 인민공화국 임시 조직법'을 통과 시킨 다음

‘조선 인민 공화국’ 수립을 발표하였다.

따라서 건국 준비 위원회는 9월7일 해체되었고,

9월 11일, 주석에 이승만, 부주석에는 여운형, 총리에는 허헌이 각각 추대, 임명되었으며,

9월 14일 인공 중앙 위원회에서 인공의 정부 부서 및 정강, 시정 방침 등을 발표하였다.

9월 7일,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여운형은 2차 테러를 당하였고,

상해 임시정부의 환국을 기다리던 송진우·김성수·장덕수 등은

'임정 봉대론'을 주장하며 이들 조각을 인정하지 않았고,

미군정은 10월10일, '조선 인민 공화국'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환국한 이승만도 주석 취임을 거절하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자연적으로 해체되었다.

 

1946년 좌우 합작 운동이 일어났을때 미군정의 지지를 받으며 '좌우 합작위원회'를 정식으로 설립하고

미소 공동 위원회의 성공을 위해 노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47년7월 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암살되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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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과 분단              작성일자; 2019.11.03.일요일,맑음

 

 

1939년9월1일 부터 1945년9월2일 까지 치러진 제2차 세계 대전은 

독일,이탈리아,일본의 추축국들과 프랑스,영국,미국,소련,중국의 연합국 간의 전쟁으로,

유럽 대륙 전역과 태평양의 섬들,중국과 동남아시아,북아프리카,세계의 바다를 무대로 전쟁이 전개되었다.

1943년9월8일의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항복에 이어,

1945년5월8일의 독일의 항복,

이어 1945년8월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 전쟁은 종식되었다.

4000만-5000만명의 희생자를 낸 인류 역사상 가장 피비린나는 전쟁이었다.

대전 결과 소련의 세력이 동유럽으로 뻗치는 결과를 낳았고,중국에서는 공산당 정권이 수립되었으며,

세계의 지배력이 서유럽 국가에서 미국과 소련으로 옮겨가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43년11월22일-26일,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의 루즈벨트,영국의 처칠,중국의 장제스가 참가한 가운데

   일본과의 전쟁 및 일본 처리 문제에 대한 논의와 동시에 한국의 독립 문제가 처음 언급되었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해방시키며 독립 시킬 것을 결의했다.

   카이로 회담에서 언급된 한국의 독립 문제는 스탈린의 동의로 재확인되었다.

1945년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는 미국의 루스벨트,영국의 처칠,소련의 스타린은

   한국의 독립 문제는 논의되지 않은 채 독일의 전후 처리문제,소련의 대일 전쟁 참여만이 결정되었다.

1945년7월17일, 포츠담 회담에서 미국의 트루먼,영국의 처칠,소련의 스타린 등 수뇌들은

    한국에 대한 신탁 통치를 실시한 뒤 독립을 부여한다는 것만을 논의하였다.

 

1945년8월15일,대한민국은 해방되었다.그것은 완전한 독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으며,

   한국의 운명은 국제 질서를 좌우하던 세계 열강들에게 달려 있었다.

1945년9월2일,맥아더의 조선 분할 점령 정책인 '일반명령 1호'에 의거 한반도는 38선이 그어지며

   ·소 양군이 북쪽은 소련군이,남쪽은 미군이 점령함으로써 두개의 분단된 국가가 형성하게 되어 

   통일 정부의 수립이 요원하게 되었다.

 

 

1945년8월 초,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의 패배가 기정화되자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키'는 일본의 항복과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의 안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를 앞세워 조선의

   민족 지도자와의 협상 대상자인 여운형에게  총독부 제안을 제시하였고,받아들여 협상을 타결하였다.

1945년8월15일,여운형은 일본의 항복과 동시에 ‘조선 건국 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고,

1945년8월16일 오후1시,서울의 휘문 중학교 교정에서 엔도와의 회담 경과 보고 연설회를 개최함과 동시에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은 한.일 두 민족의 자주 호양을 요망하는 담화를 방송하면서,

   정규병의 무장대를 편성하여 질서를 도모할 것과,통화와 물가에 대한 신정책을 수립하고 근본적인 정치

   운영 대책을 발표하겠다고 하였다.

   '건준'은 서울 풍문 여자중학교에 사무소를 두고 건국 준비사업 선전 공작과 치안 활동을 개시하였다.

1945년8월17일,'건준'의 중앙 조직에는 위원장 여운형,부위원장 안재홍,최근우,이규갑,정백,조동호,권태석

   으로 갖추었다.

1945년8월18일에는 여운형이 제1차 위원회를 개최하고,건준 명의로 ‘3천만 동포에게 지령’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민족주의 계열 일부 및 공산주의 계열 내부에서 건준의 조직상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김병로,백관수,이인 등은 민족주의 계열과 건준 합작을 위해 여운형 안재홍과 담판을 제의하였고,

1945년8월19일,‘전국 유지자 대회’를 소집하기로 합의하였으나 그날 밤 여운형이 테러를 당하면서 실행

   되지 않았다. 또한 테러로 여운형이 공석인 상황에서

1945년8월21일, 고경흠,윤형식,정백 등 소위 장안파 공산주의 계열에서 상의 없이 '건준 경성 지회'를

   휘문 중학교 강당에서 조직하고 15명의 위원을 선출하여 이에 대한 반발이 일어났다.

1945년8월22일,이런 상황에서 '건준' 2차 중앙 조직이 구성되었다.

   여운형,최근우,이동화,이병학,이여성,이상도,장권,권태석,권태휘,김약수,박문규,이강국,최용달, 이광,

   정의식,정화준, 교영,홍기문,고경흠,윤행식,최성환,최익한,정백,안재홍,양재하,이승복,이의식,유석현,

   이규갑,김준연,함상훈,이용설,정순용 등 총 33명으로 확대되었다.

   중앙조직이 발표된 다음 날부터 좌우협상 및 건준 확대가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1945년8월23일,선전부장 권태석은 백관수를 만나 좌우를 아우른 건준 확대위원을 논의하였고,

   여운형은 건준이 신국가 권력을 독점하려는 행위라는 민족주의 계열의 비판을 겨냥해 건준은 신정권이

   수립될 때까지의 준비와 치안 확보를 위한 것이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1945년8월25일,권태석은 다시 김병로,백관수,이인,박명환,김용무,박찬희,김약수 등과 만나 확대 위원

   명단을 합의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위원장 직무 대리인 안재홍이 직권으로 5명의 우익 인사를 추가하고

   건준 내부에서 좌익적인 소장파 백여명을 추가하는 등의 문제로 좌우간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이러한 중앙 집행부 내부의 문제에도 불구하고 건준은 8월말까지 전국적인 조직을 완료한다는 목표를

   위해 지역 조직을 구성하였다.

1945년8월26일,위원회의 기획부 전조선직역자치본부에서는 각 지역 종업원들에게 지역별 자치회의

   조직을 통고하고, 또 각 지방에는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무경부 산하에는 장근을 대장으로 하는 치안대가 조직되어 사무국장에 정상윤,총무부장에 송병무 등이

   17개 부서를 맡게 되었다.

1945년9월2일, 서기국을 통해 발표된 강령에는 완전한 독립국가의 건설,민주주의적 정권의 수립,

   국내 질서의 자주적유지 등 3개 항을 내세웠다.

   그러나 건준과 민족주의계열의 협상이 결렬된 상황에서

1945년8월31일,여운형은 사직을 선언하고,안재홍도 건준에 사표를 제출했다.

1945년9월1일,건준은 사회주의 계열 인사 중심으로 135명의 확대위원 명단을 발표하였다.

1945년9월4일에는 확대 위원회가 열렸으나 135명 중 일부만이 참석한 가운데 여운형과 안재홍의 사임

   수리건을 18대17로 부결시키고,허헌을 부위원장으로 추가하였다.

   같은 날 허헌,박헌영,여운형,정백 등 4인이 회동하여 인민 공화국 수립 문제와 구성을 협의했다.

1945년9월6일,위원회는 600여 명으로 된 ‘전국 인민 대표자대회’를 서울 경기 여자중학교 강당에서 소집

   하였다.

   이 회의는 헌법 기초위원을 겸직하는 전국 인민 대표위원에 이승만·여운영·허헌·김규식·김구·김성수·

   김병로·안재홍·이강국·신익희·조만식 등 55명을,고문에 오세창·권동진·김창숙·이시영 등 12명을 각각

   선출하고,'조선 인민공화국 임시조직법'을 통과시킨 다음 ‘조선 인민 공화국’ 수립을 발표하였다.

   따라서1945년9월7일, '건국 준비위원회'는 해체되었고,여운형은 2차 테러를 당하였고

1945년9월11일,주석에 이승만,부주석에는 여운형,총리에는 허헌이 각각 추대,임명되었으며,

1945년9월14일, 인공중앙위원회에서 인공의 정부 부서 및 정강,시정 방침 등을 발표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의 환국을 기다리던 송진우·김성수·장덕수 등은 임정봉대론을 주장하며 이들 조각을 인정

   하지 않았고,

1945년10월10일,미군정은 조선 인민공화국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또한 환국한 이승만도 주석 취임을 거절하는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자연적으로 해체되었다.

 

1945년8월15일,

   여운형이 1944년8월10일.사회 주의자와 민족 주의자들이 건국 준비를 위해 결성한 자신의 지하 조직인

  '조선 건국 동맹' 을 중심으로 안재홍,정백,최근우,조동호,권태석등과 함께 해방후 조직된 최초의 건국

   준비  단체인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결성하였으나 임시 정부의  지사들과 대립되었고

'건준위' 내부 박헌영이 주도하는 극좌익 세력과 정치 투쟁으로 내분에 휩싸였다.

   '조선건국 준비 위원회'의 여운형과 우익 세력인 김규식이 좌우 합작을 추진하자

김구,이승만,이시영,서재필,조병욱 등 이 포함한 '한국민주당'은 이를 냉대했다.

 

1945년8월17일, 평양의 조만식은 '평안남도 건국 준비 위원회' 등 각지에 건국 준비 조직이 결성되었으며,

이러한 조직들은 소련군의 명령으로 좌·우 합작의 '인민 위원회'로 개편되었다.

북한은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를 구성되었고,이후 북한은 공산주의 체제를 확립하여 갔다.

 

1945년8월17일,조만식은 평양에서 ‘평안남도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조만식은 8월18일.평안남도 도청에서 있었던 일본군 항복 조인식에 입회하는 형식으로 참석하였다.

1945년8월26일에는  소련군이 "건국 준비 위원회" 와 공산당을 평양 호텔로 초청하고

연립 정권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때 조만식이 위원장이 되고 '건국 준비위원회' 측에서도 여러 명이 조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연립 정권의 수립은 이때까지는 조만식의 지도력을 배제할 수 없어 이뤄진 부득이한 방편이었다.

이러는 가운데 한편 공산당의 위상은 날로 떠오르고 소련군정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인민 위원회'는

날치기 행정으로 제 세력을 키워갔다.

 

1945년12월16일-25일 까지 개최된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국에 대해서는 미·영·중·소 4국 대표에 의한 신탁통치를 기본 취지로 하는 미국측 제안과 민주주의적

임시정부 수립을 기본 취지로 하는 소련측의 수정안이 토론되어

12월28일,영국의 동의로 협정이 체결되어 발표 한 것은 5년 이내로 기한으로 하는 4대 강대국에 의한 

신탁 통치의 협정은 한국 임시 정부의 협의를 거처 4개국이 심의하여 제출한다고 결정 하였다.

1945년12월30일. 사회 단체와 정당의 이름으로 '반탁 전국 대회'를 열고 신탁 통치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1945년12월31일에는 권동진을 위원장,안재호,김준연을 부위원장으로 '신탁통치 반대 민총동원위회'

조직하고 반탁 시위 대회를 전개하였다.

신탁통치에 대한 반응은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조선 민주당'의 주도로 광범한 반탁 운동이 전개되었고,공산주의자들도 반탁의 뜻을 명백히 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삼상회의의 결정에 반대하는 세력은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할 수 없다'

    주장하자 공산 주의자들은 찬탁으로 나서게 되었다.

또한 1946년1월, 모스코바 협정에 따라 한국의 신탁 통치와 완전 독립을 토의 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의 대표가

서울에서 미.소 공동 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미,소에 의해 신탁 통치 결정이 내려지자 국내에서는

소련의 지지를 받는 공산주의 좌파와 미국의 지지를 받는 우파 간의 신탁통치 찬반을 놓고 대립이 급격히 심화되었다.

이후 미국과 소련은 두 차례에 걸쳐 '미·소 공동 위원회를 열어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였지만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유엔 총회에서는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설치되어 남.북한 총선거를 통해 통일 정부 수립이 결의되었다.

하지만 소련은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38선 이북으로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므로,

유엔은 선거가 가능한 지역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세울 것을 결의했다.

 

1946.1.2. 공산주의 정당과 사회 단체 연명의 모스크바 결정 지지 공동성명서,

1946.1.3. 북조선 행정 국장회의 성명서 등이 잇달았는데,이 성명서들은 한결같이 임시정부

수립의 의의를 강조하고 신탁 통치는 후견제라고 역설하였다.

1946.1.4 박헌영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좌익 진영은 신탁 통치를 찬성하고 나섰으며,

신탁 통치 문제는 민주주의적 민족통일 전선의 결성을 통해 해결할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반탁 운동은 금지되고 조만식은 연금되기에 이르렀다.

소련은 그들의 점령지역 안의 모든 반탁 세력을 거세하여 북한의 정당과 사회 단체

들을 모스크바 협정 지지로 통일시키고 남한의 좌익 진영도 찬탁하게 하여 미 ·소 공동

위원회에 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좌익 계열의 찬탁을 분쇄하기 위해 민족 진영 단체들이 단결하여

반탁 운동을 전개, 시위,집회,언론 등을 통해 미.소 공동 위원회에 항의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대한 독립촉성국민회'를 조직하였다.

·소 공동 위원회가 격렬한 반탁 운동과 미 ·소의 의견대립으로 결렬되고,

이를 계기로 우익 민족 진영은 다시 '민족 통일총 본부'를 창설하여 독립쟁취의 기틀을 잡으려 하였다

1946.1.16. 미소 공동위원회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제반 문제 해결을 위하여 예비 회담을 열었고,

1946.2 독립 정부의 수립을 갈망해온 전국민은 이에 분노했다.

조국의 완전독립을 달성하기위한 조직체로 기존의 반탁 운동 기관인 이승만 중심의

'독립촉성중앙 협의회'와 김구 중심의 '신탁통치 반대국민총동원 중앙위원회'가 통합하여

'대한독립독촉국민회'‘ 독촉 민회를 발족하였다.

반탁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의 활동 반대, 좌익 운동의 봉쇄 등이 행동 목표였으므로

좌익 진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우익 진영의 대표적 정치 단체였다.

19466, '민족 통일 총본부'로 개편되어 재발족하였다.

총재 이승만,부총재 김구.김규식,고문에 권동진,김창숙,함태영,조만식,오화영,회장에 오세창이 추대되었다

1946.2.15. 좌익 세력의 총결집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이 결성되자,

박헌영은 여운형·허헌·김원봉·백남운과 함께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는 등 활약하였다.

1946.3.20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결정된 미소 공동위원회는 제1차 회의를 열었다.

미국측 대표로는 소장 아놀드, 소련측 대표로는 중장 스티코프이었다.

벽두부터 난관에 부닥뜨리게 되었는데 가장 큰 논란은 민주주의라는 용어와

민주주의제 정당에 관한 해석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회의에서는 5년 동안의 신탁 통치가 요구되었으나 남한의 우익 정당과 사회단체는

신탁 통치를 반대하였다.

이에 소련측 대표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의를 반대하는 정당과 사회 단체는

임시정부 구성에 참여시킬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미국측 대표는 의사 표시의 자유 원칙에 입각하여

모스크바 삼상회의 신탁 통치안을 반대한다고 해서 임시 정부 수립에서 제외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1946년3월, 북한에서는 '북조선 임시 인민 위원회'가 구성되었고,

1946.5.1 공동성명 제7호까지 발표하였으나 의견 대립으로 아무런 결실 없이

1946.5.6 휴회에 들어갔다.

1946.10 이범석은 조선 민족 청년단을 결성,

비정치·비군사를 내걸고 국가지상·민족지상의 청년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주위로부터 국수 주의적 극우 단체라는 비난을 받아 대한 청년단으로 통합되었다.

조선민족청년단의 이념은 이후 1공화국 이승만 정부가 내세운 일민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1946.11.3. 박헌영은 조선 공산당·조선 인민당 및 남조선 신민당이 합쳐 남조선 노동당으로 결성되자

부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북한에 머물면서 이른바 박헌영 서한을 통해 남로당의 활동을 지도하였다.

1946년12월, 남한에서는 이승만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천명하였고,

1947년1월에 결성한 '북조선 인민 위원회'는 1차 회의에서 위원장을 김일성으로 하여 결성되었다.

김구,김규식은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였지만 미·소 냉전 체제로 인해 이들의 뜻은 실현되지 못했다.            

1948년, 남한에서는 5.10 총선거를 통해 이승만 정부가 들어섰다.

또한,1948년9월9일,김일성이 내각 수상에 취임하면서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이로써 한반도는 두개의 분단된 국가가 형성하게 되었다.

 

⊙ 일제 강점기-6             2019.11.03.일요일,맑음

일제 강점기인 1931년5월 신간회가 해체된 아픔을 겪은 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의 급속한 강행 속에서도 1931년에 조선어 연구회가 조선 어학회로 발전하여 민족어와 민족문자를 보존 발전시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그 결실로 '한글맞춤법통일안'·'표준말모음' 등이 나왔다.

'우리말본'·'한글철자법일람표'·'우리말사전'' 등도 이때 나왔다.


문학·예술분야에서도 민족적 작품들이 나와서 국민들에게 애독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한국어 잡지들도 정간과 폐간을 되풀이 당하면서도 민족과 민족문화의 보존 발전을 위하여 문화투쟁을 전개하였다. 동아일보·조선일보·조선중앙일보 등 언론 기관과 잡지들은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사학을 국민들에게 교육하여 일제의 식민주의 사관에 대항해서 투쟁하였다.

민족 언론기관과 청년 학생들은 한글 보급과 함께 민중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민중 속으로!’

라는 구호를 내걸고, 1931년부터 브나로드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경성 제국대학 학생들의 반제 동맹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단체들이 조직되어 완강하게 항일투쟁이 전개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1937년까지는 소작쟁의와 노동운동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시기의 소작쟁의와 농민운동은 물론이요 노동쟁의와 노동운동은 비단 농민·노동자층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1차로 일제의 식민지수탈의 강화에 대항하고 투쟁하여 민족운동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1940년대에 들어와서 일제의 폭압이 극악하여 표면상 모든 민족운동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던 시기에도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무수한 지하 서클들이 조직되어 완강하게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국외에서는 일제가 1931년 만주침략을 자행하여 만주 괴뢰국을 세우고, 전만주를 장악하였음에도

한국민족은 굴복하지 않고 독립군의 무장 투쟁을 완강하게 전개하였다.

남만주의 국민부는 800명의 조선혁명군을 편성하여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서 한중 연합군을 조직하고,

조선 혁명군의 양세봉이 총사령이 되어 1932년에 일본군을 신빈에서 대파하였다.

조선 혁명군은 1933년 흥경현의 일만 연합군을 공격하여 흥경성을 점령하였다.

한편, 북만주에서는 이청천이 지휘하는 한국독립당독립군이 1931년에 중국 호로군과 길림 자위군의

연합군과 연합하여 한중항일연합군(중한연군)을 조직하였다.

1932년5월초 한국 독립군은 길림자위연합군 제3군과 엽합하여 길림자위군중로연합군 제3군 독립영으로 편제되어 연합 작전을 수행하였다.

한중항일연합군은 1932년 9월에 쌍성보에서 일본군 1개중대를 섬멸하였였다.

이후 11월 2차 쌍성보 전투를 벌였고 전투기 폭격을 받는 등 악전고투 끝에 철수하였다.

한국 독립군은 한국독립당의 결정에 따라 동만주로 이동하였고 그곳에서 중국의용군 길림구국군과 연합

하였다.

1933년 1월 한국 독립군은 길림구국군 제14사 부대와 연합하여 중한연합토일군을 조직하였다. 또 참모장 신숙과 참모 김상덕을 난징 국민 정부에 파견하여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1933년 2월에는 경박호에서 2,000명의 일만연합군을 격파하였다.

4월에 사도하자에서 일만 연합군 1개사단을 격파하였으며, 6월초 동경성 전투에 승리하여 동경성을 점령하였고 같은 달 30일 개전한 대전자령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이후 전략의 차이로 갈등을 겪기도 했으나, 연합은 유지되었다.

한중 연합에 따라 홍진, 지청천, 조경한, 오광선, 공진원, 김창환 등 독립군 간부 및 사병 40여명은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훈련반에 입교하여 체계적 교육을 받았다.

한국독립군부대들은 1941년까지 중국군과 연합하여 만주에서 용감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에는 의열투쟁도 강화되었다.

큰 사건만을 들어도 1932년 1월 이봉창의 일본천황 투탄,

1932년4월 윤봉길의 상해 훙커우공원 투탄,

1933년3월 백정기의 재중국 일본공사 투탄,

1934년3월 강명학의 상해 훙커우 공원투탄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다수의 의열 투쟁이 있었다.

1938년에는 김원봉이 조선 의용대를 결성하여 중국 본토에서 항일 전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1920년대에 한때 침체되었으나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투탄 사건을 계기로 항일 전선을 정비하고,

임시정부의 독립군으로서 1940년 9월에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도 임시정부와 연합하여 광복군 제1지대가 되었다.

이범석의 제2지대와 김학규의 제3지대가 편성되어 임시정부의 광복군은 이청천을 사령관으로, 김원봉을

부사령관으로 하여 3개지대가 주력이 되었다.


김구를 주석으로 한 임시정부는 또한 일본의 패망을 전망하고 건국을 준비하여

1941년11월,'대한민국 건국강령'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광복군이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하여 연합군과 함께 조국을 광복한 뒤 신국가를 수립하는 기본원칙을 공표한 것이었다.

1941년12월8일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도발하자 임시 정부는

12월9일 대일 선전 포고를 하고 뒤이어 대독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광복군은 중국의 각 전선에 투입되어 일본군에 대한 심리작전에 큰 성과를 올렸고,

이를 알게 된 영국군이 광복군의 인도·버마전선 투입을 요청하게 되어

1943년6월에 한영 군사 협정이 체결되고, 광복군 공작대가 인도·버마전선에 파견되어 버마 탈환 작전에

참가하였다.

또한, 광복군과 미국군과의 합동작전이 계획되어 미군 전략정보처(OSS)의 특수훈련이 실시되었다.

광복군은 1945년4월 낙하산 투하와 유격전 훈련을 받고 국내투입이 준비되었으나,

일본이 예측보다 빨리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광복군의 국내 투입은 실현되지 않았다.

한편, 중국 연안에서는 조선 독립 동맹이 1942년 7월에 조선의용군을 편성하고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전쟁에 참가하였다.

미주지역에서도 1942년에 한인 국방경비대(맹호군)가 편성되어 100명의 한인 청년들이 국내 투입의 특수훈련을 받다가 일본의 항복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1944년 8월에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여 비밀 결사로서 '건국 동맹'이 조직되어 건국을 준비했다.

'건국 동맹'은 임시정부와 조선 독립 동맹과 비밀 연락을 시도하면서 조직을 확대하여,

1945년 8월에는 국내의 건국을 준비하는 강력한 단체가 되었다.

한국 민족은 이와 같이 1940년대에도 불굴의 투지로 민족의 광복과 독립을 위한 투쟁과 더불어 준비를 전개하면서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을 맞은 것이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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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하에서 국내에서는 일본의 민족 말살 정책에 대항하여 민족과 민족문화를 보존, 발전시키려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1년 조선어 연구회(조선 어학회 전신)가 조직되어 기관지 '한글'을 간행하고,

'조선어 사전' 편찬 사업을 시작함과 함께 민족어와 한글을 발전시키려는 투쟁이 전개되었다.

문학 부문에서도 '창조(1919)'·'폐허(1920)'·'백조(1922)'·'조선문단(1924)'·'조선문예(1929)'·'조선시단

(1929)'·'문예공론(1929)'·'예술운동(1929)' 등의 문학지가 창간되고,

한글로 된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창작되어 민족어와 민족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또한, 시조가 현대화되어 부흥되고 민족고전들이 간행되었다.

1920년대에는 프로 문학도 형성되어 가난에 허덕이는 민중의 참상을 고발하였다.

국사 연구에 있어서도 박은식이 중국에서 '한국통사(1915)'·'한국독립운동지혈사(1920)'를 저술하여

근대사를 정립하고,신채호가 일찍이 '독사신론(1908)'을 저술한 이래 망명한 뒤에도 '조선사 연구초'·

'조선상고사'·'조선상고문화사'를 저술하여 민족주의 사학을 확립시켰으며,

정인보가 국내에서 '조선사 연구'를 저술하였다.

이러한 국사 연구들은 일제가 1925년에 '조선사 편수회'를 조직하여 식민 주의사관에 의거하여서 한국사를 왜곡하고 날조하는 것에 대항하여 학문적 투쟁을 전개하고, 민족 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서는 장기적으로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야 한다고 판단하고, 전국에서 민족교육의 열기가 고양되었으며, 1922년에는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가 조직되어 민립 대학 설립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에 놀란 일제는 할수없이 그 무마책과 회유책으로 1924년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하였다.

또한 경제적으로도 민족 실업이 육성되어야 한다고 판단하고, 1923년에 조선물산 장려회가 창립되어 전국 각지에 지부를 결성하면서 1930년대까지 민족 산업 진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4월, 조선 왕조 마지막 국왕 순종이 죽자 그 장례일인 6월10일 대규모 독립 시위 운동을 전개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은 3·1운동의 경험에 의하여 경계를 엄중히 하고 있던 일제 군경에게 사전에

발각되어 일제는 수많은 인사들을 전국적으로 일제히 검거하고, 인쇄된 격문을 압수하였다.

심지어는 장례에 참석하러 상경하는 것도 엄금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6월10일 서울에서 대대적인 만세 시위 운동을 벌여 서울만은 3·1운동

때와 같이 철시와 시위 운동이 전개되었다.

 

3·1운동 후 1920년대에는 농민 운동도 크게 고양되었다.

소작쟁의는 농민들이 농민조합·농우회·소작인조합 등의 농민 단체를 조직하면서 전개되었고,

   일본인 지주의 대농장에서 많이 일어났으며, 1922년,1925년,1930년에 일어난 소작쟁의다.

노동운동도 1920년에 '조선 노동 공제회'가 조직되고, 이어 1922년에 '조선 노동 연맹회'가 결성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노동파업도 활발히 전개되어, 1921년에 부산 부두노동자들의 파업,1923년에 서울고무공장 여공들의 파업,

   1929년의 원산노동자의 총파업 등은 그 대표적인 것들이었다.

이러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은 비단 노동자·농민들의 권익 향상뿐만 아니라 일제 지주와 공장주에 대항한

민족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가진 것이었다.


3·1운동 후 1920년대 초에는 민족독립운동에 두개의 큰 과제가 발생하였다.

하나는 일부 민족 주의자들이 기만적 ‘문화 정책’에 휘말려 완전독립·절대독립을 포기하고 일제국 내의

  ‘자치’를 주장하는 이른바 ‘자치론’이 대두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주의운동이 강력히 대두하여 민족 주의독립운동과 사회 주의독립운동 사이에 분열이

   발생한 것이었다.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절대 독립을 추구하는 민족 주의자와 사회 주의자가 연합하여 1927년2월 민족협동전선으로서 신간회를 조직하였다.

신간회는 급속히 발전하여 강력한 민족 운동단체가 되었다.

신간회는  완전독립·절대독립옹호,자치론과 일제에의 타협주의 타도,민족의 대동단결 결성,한국인 착취기관

   철폐,일본의 이민 정책 반대,한국인 본위의 민족 교육 실시,한국어 교육의 실시,과학 사상 연구의 자유,

   한국인에 대한 특수 취체법의 철폐, 소작쟁의 지원,노동쟁의 지원,학생 독립운동 지원 등의 민족 운동을 

   전개하고, 당시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한국민족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신간회가 창립되자,1927년5월에는 여성 자매 단체인 근우회가 조직되어 여성 독립운동의 단일전선이 결성되었다. 또한 해외에서도 그 해 11월 '한국 유일 독립당 촉성회'가 조직되어 민족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독립운동의 민족 협동전선이 결성되었다.

이러한 민족 운동전선의 통일은 한국 민족의 독립 쟁취에 대하여 매우 고무적인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의 코민테른이 사회 주의자들에게 신간회로부터의 탈퇴를 지시하고 일부 사회주의자들이 이에

복종함으로써 신간회는 만주사변이 일어났던 1931년5월에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1929년11월3일, 광주에서 한국 학생과 일본 학생이 충돌하여 일제 경찰이 일방적으로 한국 학생만 검거

하자 광주의 학생들이 총궐기하여 검거된 학생의 석방, 민족 차별의 철폐, 약소 민족의 해방, 제국주의 타도 등을 외치며 격렬한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전국에 파급되어 학생 시위 독립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립 시위운동에 참가한 학생은 퇴학처분,무기정학,피검자가 발생하여 신간회도 조사단을 파견

하고 민중대회를 계획하는 등 학생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광주학생사건에서 비롯된 1929에서 1930년 까지의 학생 독립운동은 3·1운동 이후 독립을 요구하는 최대의 시위운동이었다.

1920년대에는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이 막강하게 고양되어 일제는 수세에 몰려 전전긍긍하였다.

    

일제는 1931년9·18만주침략 이후부터 조선 주둔 일본군을 증가시켜 탄압무력을 강화한 다음 한국민족말살정책을 적극적으로 강화하였다.


일제는 한국어를 말살시키고 말살에 광분하였다.

일제는 1930년대에 들어오자 관청에서는 한국농민의 민원도 일본어를 사용할 경우에만 접수하도록 하여

한국어 사용을 엄금하고, 사립학교에서의 한국어 교육과 한국어 사용을 엄금하였다.

또한 1935년부터는 한국 문자를 농민들에게 가르치는 학생들의 하기 계몽운동을 총독부령으로 엄금하고,

1937년 중국 침략 때부터는 한국인들의 일상 사회생활에서의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여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명령하였다.

일제는 국민학교 학생들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매질을 하고 벌칙을 적용하였다.

그리고 한국어로 간행되는 신문과 잡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간 등 탄압을 가하다가,

1936년에는 '신동아'를 폐간시켰으며,

1940년에는 '동아일보'·'조선일보' 등 모든 한국어 신문들을,

1941년에는 '문장','문평론' 등 모든 한국어 잡지들을 폐간시켜 버렸다.

1938년 일본어 강습소를 만들어 한국농민들에게 강제로 일본어를 배우게 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였다. 일제의 한국어말살과 일본어 전용정책이 한국인들의 저항으로 진전되지 않자 그 씨를 없애야 한다며

1942년에는 조선 어학회 회원과 학자들까지 체포, 투옥하였다.

또한, 1937년부터 한국인의 성명을 말살하고 일본식 이름을 짓도록 하는 이른바 ‘창씨개명’을 본격적으로 강행하였다.

1939년에는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전한국인에게 강요하는 파쇼적 방법으로,

일제는 1940년까지 한국인의 성명말살과 ‘창씨개명’을 강행하였다.


일제는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은 한국인에 대해서는 자녀의 학교 취학을 금지하고,

학생들에게 매질을 가하는가 하며, 직장에서 채용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심지어 우편물 수송까지 금지

시켰으며, 경찰관 주재소로 호출하여 응할 때까지 무기한 구류해 두고 박해를 가하므로 이에 불응하고는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없었다.

일제는 또한 전부터 날조해오던 식민주의 사관을 더욱 본격적으로 발전시켜

1932년부터 '조선사'를 간행하기 시작하여 1940년에는 전37권을 완간하였다.

그리하여 동조동근설을 날조하여 일본 민족은 시조신인 ‘아마테라쓰오미카미’의 적자이고,

한국 민족은 그 서자로서 같은 기원과 뿌리에서 나왔으므로 한국 민족은 당연히 한국 민족됨을 버리고,

‘황국신민화’되어 천황에 무한한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설교하고 한국인에게 집집마다 ‘가미타나’라는

그 시조신이 들어 있다는 나무 상자를 모셔 아침마다 경배를 드리도록 강요하였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에게 관제 미신인 신사 참배를 강요하고,

1937년부터는 매일 일본 천황이 있는 동쪽을 향하여 최경례를 강제하는 이른바 ‘동방요배’ 라는 것을 강요하였다.

또한, 일제는 한국인이 한국민족의 성원이 아니라 일본천황의 신민임을 맹세하고,

‘황국신민서사’라는 것을 날마다 외워 맹세하도록 강제하였다.

그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한국민족을 말살하여 일제의 천민을 만들 수 있다고 망상하고 한국인에게 무한한 고통과 박해를 가한 것이었다.


일제는 1937년 중일 전쟁을 도발하여 인력 부족이 격화되자 징용제도·징병제도·근로보국대제도·근로동원제도·여자정신대제도를 만들어 한국인의 인력을 강제 수탈하였다.

일제는 중일 전쟁 이전까지는 ‘모집’이라는 형식으로 일본의 광산이나 토목공사에 집단 동원하더니,

중일전쟁 이후인 1939년에 '국민 징용령'을 공포하여 한국인 청장년들을 강제 연행해다가 노동력을 수탈

하였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이후 징용영장에 의한 징용이 잘 안되자 트럭을 농촌에 몰고 가서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강제로 실어다가 징용에 보내는 만행을 예사로 자행하였다.

이렇게 해서 1945년 8월까지 146만명의 한국인 청장년을 징용하여 광산·토목공사·군수공장에 투입하여

무보수 노예노동을 시켰다.

군사기밀에 관한 공사에 투입한 경우에는 기밀 유지상 필요하다는 이유로 공사가 끝난 뒤에 징용당한 한국인 노무자들을 집단 학살하는 만행을 수없이 자행하였다.

일제는 또한 1943년 ‘학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여 한국인 전문·대학생 4, 500명을 지원형식으로 전쟁에 강제로 내몰더니,

1944년에는 ‘징병 제도’를 실시하여 패전 때까지 20만명의 한국청년들을 침략전에 대폿밥으로 강제동원하여 내몰았다.

일제는 중학생은 물론이고 국민학생까지 ‘근로보국’이니 ‘근로동원’이니 하여 날마다 군사시설공사에 강제로 동원하였다.

또한, 일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44년 '여자 정신대 근무령'을 제정, 공포하여, 12세부터 20세까지의

한국인 처녀 수십만명을 강제 징집하여 일본과 한국내의 군수공장에서 사역시키고,

중국과 남양지방의 전선에 군대위안부로 내모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하였다.


일제는 1931년 만주침략 이후부터는 그들의 대륙침략정책에 발맞추어 한국을 병참기지화한다면서 일본의 독점자본을 동원하여 북한일대에 군수공장을 설치하고, 대대적인 광산자원 약탈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금·철·석탄·중석·마그네사이트·아연·망간·니켈 등을 대대적으로 채굴, 약탈하였다.

미곡수탈도 이 시기에 급속히 강화되어 1933년부터는 미곡 총생산량 중에서 일본으로 실어간 약탈량의

비율이 50%를 초과하기 시작하였다.

식량 약탈의 증가는 1933년부터 '미곡통제법'과 '미곡자치관리법' 등을 실시하여 미곡은 일본으로 실어가고, 만주로부터 잡곡을 한국에 수입하여 한국인은 잡곡을 먹도록 하는 정책에 따라 나타난 것이었다.

1930년대부터는 미곡 이외에도 면화와 누에고치의 약탈이 격증되었고, 한국인에 대한 조세수탈도 격증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조세 수탈만으로는 전비 조달이 제대로 되지 않자,

1939년부터 '총동원물자사용수용령'을 공포하여 백주에 공공연히 물자를 약탈하는 공출제를 시행하였다. 이 공출제는 처음에는 양곡부터 시작하더니, 1940년대에는 모든 일반 물자에 확대하여 송진기름·아주까리기름, 심지어 놋그릇·숟가락까지 백주에 강탈해갔다.

한국인은 일제의 이러한 약탈정책하에서 광복의 날을 기약하며 초근목피로 연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의 한국민족말살정책과 식민지 수탈정책을 비롯한 온갖 탄압이 1930년대 이후에 더욱 강화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이 이 시기에 줄기차게 발전된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국내에서는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체된 아픔을 겪은 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의 급속한 강행 속에서도 1931년에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로 발전하여 민족어와 민족문자를 보존 발전시키기 위한 투쟁을 전개하였으며, 그 결실로 『한글맞춤법통일안』·『표준말모음』 등이 나왔다. 『우리말본』·『한글철자법일람표』·『우리말사전』 등도 이때 나왔다.

문학·예술분야에서도 민족적 작품들이 나와서 국민들에게 애독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한국어 잡지들도 정간과 폐간을 되풀이 당하면서도 민족과 민족문화의 보존 발전을 위하여 문화투쟁을 전개하였다. 『동아일보』·『조선일보』·『조선중앙일보』 등 언론기관과 잡지들은 신채호 등의 민족주의사학을 국민들에게 교육하여 일제의 식민주의사관에 대항해서 투쟁하였다.

민족언론기관과 청년학생들은 한글보급과 함께 민중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하여 ‘민중 속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1931년부터 브나로드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학생들 사이에서는 경성제국대학 학생들의 반제동맹(反帝同盟)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단체들이 조직되어 완강하게 항일투쟁이 전개되었다. 1930년대에 들어와서 1937년까지는 소작쟁의와 노동운동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 시기의 소작쟁의와 농민운동은 물론이요 노동쟁의와 노동운동은 비단 농민·노동자층의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한 것만이 아니라, 1차로 일제의 식민지수탈의 강화에 대항하고 투쟁하여 민족운동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1940년대에 들어와서 일제의 폭압이 극악하여 표면상 모든 민족운동이 정지된 것처럼 보이던 시기에도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하여 무수한 지하 서클들이 조직되어 완강하게 항일독립투쟁을 전개하였다.

[2.2. 국외독립군의 무장투쟁]

한편, 국외에서는 일제가 1931년 만주침략을 자행하여 만주괴뢰국을 세우고, 전만주를 장악하였음에도 한국민족은 굴복하지 않고 독립군의 무장투쟁을 완강하게 전개하였다.

남만주의 국민부는 800명의 조선혁명군을 편성하여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서 한중연합군을 조직하고, 조선혁명군의 양세봉(梁世奉)이 총사령이 되어 1932년에 일본군을 신빈(新賓)에서 대파하였다.

조선혁명군은 1933년 흥경현의 일만연합군을 공격하여 흥경성(興京城)을 점령하였다. 한편, 북만주에서는 이청천(李靑天)이 지휘하는 한국독립당독립군이 1931년에 중국 호로군(護路軍)과 길림자위군의 연합군과 연합하여 한중항일연합군[중한연군(中韓聯軍)]을 조직하였다. 1932년 5월초 한국독립군은 길림자위연합군 제3군과 엽합하여 길림자위군중로연합군(吉林自衛軍中路聯合軍) 제3군 독립영(獨立營)으로 편제되어 연합 작전을 수행하였다. 한중항일연합군은 1932년 9월에 쌍성보(雙城堡)에서 일본군 1개중대를 섬멸하였였다. 이후 11월 2차 쌍성보 전투를 벌였고 전투기 폭격을 받는 등 악전고투 끝에 철수하였다.

한국독립군은 한국독립당의 결정에 따라 동만주로 이동하였고 그곳에서 중국의용군 길림구국군과 연합하였다. 1933년 1월 한국독립군은 길림구국군 제14사 부대와 연합하여 중한연합토일군을 조직하였다. 또 참모장 신숙과 참모 김상덕을 난징[南京] 국민정부에 파견하여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1933년 2월에는 경박호(鏡泊湖)에서 2,000명의 일만연합군을 격파하였다. 4월에 사도하자(四道河子)에서 일만연합군 1개사단을 격파하였으며, 6월초 동경성(東京城) 전투에 승리하여 동경성을 점령하였고 같은 달 30일 개전한 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고 각종 포 8문, 기관총 110자루, 소총 580자루, 권총 200자루 등 많은 물품을 빼앗았다.

이후 전략의 차이로 갈등을 겪기도 했으나, 연합은 유지되었다. 한중 연합에 따라 홍진, 지청천, 조경한, 오광선, 공진원, 김창환 등 독립군 간부 및 사병 40여명은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훈련반에 입교하여 체계적 교육을 받았다.

한국독립군부대들은 1941년까지 중국군과 연합하여 만주에서 용감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에는 의열투쟁도 강화되었다. 큰 사건만을 들어도 1932년 1월 이봉창(李奉昌)의 일본천황 투탄,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상해 훙커우공원 투탄, 1933년 3월 백정기(白貞基)의 재중국일본공사 투탄, 1934년 3월 강명학의 상해 훙커우공원투탄 등이 있으며, 그 밖에 다수의 의열투쟁이 있었다. 1938년에는 김원봉이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여 중국본토에서 항일전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2.3. 건국준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20년대에 한때 침체되었으나 1932년 윤봉길의 훙커우공원투탄사건을 계기로 항일전선을 정비하고, 임시정부의 독립군으로서 1940년 9월에 광복군(光復軍)을 창설하였다.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도 임시정부와 연합하여 광복군 제1지대가 되었다. 이범석(李範奭)의 제2지대와 김학규(金學奎)의 제3지대가 편성되어 임시정부의 광복군은 이청천을 사령관으로, 김원봉을 부사령관으로 하여 3개지대가 주력이 되었다. 김구(金九)를 주석으로 한 임시정부는 또한 일본의 패망을 전망하고 건국을 준비하여 1941년 11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광복군이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하여 연합군과 함께 조국을 광복한 뒤 신국가를 수립하는 기본원칙을 공표한 것이었다.

1941년 12월 8일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하자 임시정부는 12월 9일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뒤이어 대독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광복군은 중국의 각 전선에 투입되어 일본군에 대한 심리작전에 큰 성과를 올렸고, 이를 알게 된 영국군이 광복군의 인도·버마전선 투입을 요청하게 되어 1943년 6월에 한영군사협정이 체결되고, 광복군 공작대가 인도·버마전선에 파견되어 버마탈환작전에 참가하였다.

또한, 광복군과 미국군과의 합동작전이 계획되어 미군 전략정보처(OSS)의 특수훈련이 실시되었다. 광복군은 1945년 4월 낙하산투하와 유격전훈련을 받고 국내투입이 준비되었으나, 일본이 예측보다 빨리 무조건항복함으로써 광복군의 국내투입은 실현되지 않았다.

한편, 중국 연안에서는 조선독립동맹이 1942년 7월에 조선의용군을 편성하고 중국공산당과 연합하여 항일전쟁에 참가하였다. 미주지역에서도 1942년에 한인국방경비대(일명 맹호군)가 편성되어 100명의 한인청년들이 국내투입의 특수훈련을 받다가 일본의 항복으로 실현되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1944년 8월에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하여 비밀결사로서 건국동맹이 조직되어 건국을 준비하였다.

건국동맹은 임시정부와 조선독립동맹과 비밀연락을 시도하면서 조직을 확대하여, 1945년 8월에는 국내의 건국을 준비하는 강력한 단체가 되었다. 한국민족은 이와 같이 1940년대에도 불굴의 투지로 민족의 광복과 독립을 위한 투쟁과 더불어 준비를 전개하면서 1945년 8월 15일의 광복을 맞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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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한국민족의 3·1운동에 큰 타격을 받고 대책에 부심하였다.

3·1운동의 타격을 받고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변동을 보였다.

1.'무단 정치'에서 ‘문화 정치’로의 전환을 표방하면서 회유와 가장된 유화 정책을 통하여 한국민족의 독립

   운동 전선을 이간하고 분열시키며, 가혹한 식민지 통치를 은폐하려는 것이었다.

   종래 육해군 대장으로 조선 총독을 임명하던 것을 고쳐 문관도 그 자리에 임명할 수 있게 하고,

   헌병경 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전환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언론 통제를 완화하여 한국인이 경영하는 한글 신문의 간행을 허가하고, 필요하면 내정에 한해서

   한국인에게 참정권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1945년 해방되기까지 총독을 단 한번도 문관으로 임명한 적이 없었다.

   또한,1920년에 '조선일보(3월 일)', '동아일보(4월1일)','시사신보(친일신문,4월1일)'의 창간을 허가하였

   으나 한국인의 언론을 분열시켜 통제하려는 교묘한 수단으로 취해진 조처였다.

   또한, 한국인에게 참정권을 허용할 것처럼 선전한 것도 친일파와 자치 운동파를 육성하여 종래 완전독립·

   절대 독립을 목표로 하던 독립 운동을 약화시키고,절대 독립의 독립 운동 전선을 분열시키려는 책동에

   불과한 것이었다.

2.경찰관의 수를 대폭 증가시키고 독립 사상에 대한 사찰을 강화한 것이었다.

   헌병 경찰제를 폐지하고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으나 이것은 제복과 제도만을 형식상 바꾼 것이고 여전히

   헌병이 예비역으로 편입되어 보통 경찰관이 되도록 하였다.

   1920년10월-12월의 간도 일대의 한국인 1만여명에 대한 학살을 자행한 경신참변 또는 간도학살사건과 

   1923년 9월 일본 관동 대지진 때 2만여명의 재일 한국인에 대한 학살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또한, 독립 운동가와 지식인·학생들에 대한 사찰이 더욱 강화되었다.

3.식량 수탈 등 사회·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다.

   일제는 일본 공업화에 소요되는 식량 등을 한국에서 수탈하기 위하여 1920년부터 ‘조선산미증식계획’을

   수립하여 집행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3·1운동 이후 한국 민족의 항일 독립운동이 워낙 맹렬하였으므로 일제는 1920년대에 한국 민족의 기세에 

   밀려 할 수없이 한국민족 말살 정책을 후퇴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반면에, 일제는 사회·경제적 수탈정책을 강화하기에 급급하였다.


 3·1운동에 고취되어 임시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하여

1919년4월,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서울의 '한성 정부', 노령에서 '대한 국민의회'가 수립되었다.

이 3개의 임시 정부는 1919년 9월 상해에서 하나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통합되었다.

임시 정부는 민주 공화정체를 채택하여 의정원과 국무원을 두고 대한민국 임시 헌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이것은 9년간 단절되었던 민족 정권을 계승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수립한 것만으로도 한국 역사상 획기적인 것이었다.

임시 정부는 국내와의 비밀 연락망으로 연통제를 조직하여 국내 통치권을 일부 행사하고,

독립 운동자금을 국내로부터 공급받았다.

연통제 실시 2년 만에 전국의 도군면에는 독판·군감 등의 비밀 행정 조직이 만들어져서 국내 독립 운동을

지도하였으며,국내인들이 군자금을 모집하여 전달하였다.

임시정부는 또한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에 파견되어 있는 김규식을 외교총장 겸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유럽에서의 외교활 동과 미국에 구미 위원회를 두어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8월에 스위스에서 열린 '만국 사회당대회'에도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결의하게 하는 등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국제연맹과 태평양회의에도 대표를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는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배포하고,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하여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시정부는 만주의 독립군에게도 군자금을 지원하고 독립 전쟁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3·1운동 직후에 만주와 노령에서 3·1운동에서 폭발한 독립 의지와 독립 역량을 독립군의 무장 투쟁으로

한차원 더 발전시키려는 운동을 전개하여, 독립군 단체들이 자발적으로 조직되기 시작했다.

1920년말경까지 조직된 독립군 단체들은

북간도 지방의 '대한 독립군''군무도독부''북로군정서'''국민회군''의군부''대한정의군정사''한민회군''

   조선 독립군''의단''대한 독립군 비단''광복회군''의민단''흥업단''신민단''광정단''야단''혼춘 군무부'

  '국민의사부''대진단''백산 무사단''혈성단''태극단''노농회''광영단'과

서간도 지방의 '서로군정서''신흥학우단''광한단''대한독립의용단''대한독립청년연합회'' 광복군사령부'

  '광복군총영''천마산대''보합단''의성단 등과,

노령 지방의 '대한 독립군 결사대''대한 신민회''대한독립군 등 30여단체에 달하였다.


3·1운동 후에 급속히 성장한 독립군 부대들은 무장을 강화하고 실력을 기르면서 군사 통일을 추진함과 함께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시작하였다.

홍범도가 지휘하는 대한 독립군은 1919년8월에는 두만강을 건너 함경남도 혜산진에 진입을 감행하여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해서 섬멸하고, 3·1운동 후 처음으로 국내 진입 작전을 단행하였으며,

1919년9월에는 함경남도 갑산군에 진입하여 일제 경찰관 주재소 등 식민지 통치 기관을 습격하였고,

1919년10월에는 평안북도 강계군의 만포진에 진입하여 이를 점령하고,자성군으로 진출하여 일본군 70여명을 살상시키고 일본군을 패주시켰다.

이듬해인 1920년부터는 독립군 부대들이 실력과 기회만 있으면 끊임없이 크고 작은 국내 진입 유격전을

감행하였다.

독립군 부대들의 국내 진입 유격전에 여러 차례 패배한 일본군 수비대는 1개중대를 두만강을 불법으로 월강하게 하여 독립군에 대한 추격을 시도하였으나,독립군은 1920년6월4일 삼둔자에서 매복하여 일본군을

섬멸해버렸다. 이것이 삼둔자 전투다.


일본군 제19사단은 이에 분개하여 1개 대대를 월강시켜 봉오동까지 추격해 왔으나, 대한독립군·군무도독부·국민회군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편성하여 1920년6 7일 봉오동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하여

157명을 사살하고,200여명의 중상자와 100여명의 경상자를 내게 하여 일본군을 섬멸해버렸다.

이것이 봉오동전투이다.


독립군의 급성장에 크게 당황한 일제는 이에 대한 대응으로 처음에는 중국에 외교적·군사적 압력을 가해서 중국군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토벌하려 하였다. 독립군은 중국군과 협상하여 일본군의 이 대응을 근거지

이동으로 극복하였다.

독립군이 근거지를 이동하여 장기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일본군은‘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이라는 토벌작전을 수립하고, 혼춘 사건을 조작하여 출병 구실을 만든 다음 5개사단에서 차출한 2만 5000명의 병력과 항공대까지 동원하여 1920년10월 독립군을 토벌하겠다고 간도에 불법 침입하였다.

일본군은 이 토벌작전을 2단계로 나누어,

제1단계는 1개월 동안 간도 일대의 독립군을 섬멸하여 한국민족의 무장투쟁 능력을 완전히 섬멸하고,

제2단계는 다시 1개월 동안 촌락에 잠복한 독립 운동자들을 색출해서 발본 색원하여 한국민족의 비무장

   독립운동의 능력도 완전히 뿌리뽑겠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와 이도구 어랑촌 일대의 독립군을 포위하여 들어가다가 김좌진이

지휘하는 600명의 북로군정서 제1대대,이범석이 지휘하는 500여명의 사관생도로 구성된 북로군정서

제2대대와 홍범도가 지휘하는 1,400명의 독립군 연합부대의 공격을 받고는 도리어 참패를 당하였다.

2,500명의 독립군 부대들은 1920년10월21일 아침부터 10월26일 새벽까지 6일간 백운평전투·완루구전투·천수평전투·어랑촌전투·맹개골전투·만기구전투·쉬구전투·천보산전투·고동하곡전투 등 10여개 전투에서

실로 영웅적 혈전을 전개하여 일본군 1,200명을 사살하고 2,100명을 부상당하게 하는 등 일본군을 섬멸

하여 패주시켰다.반면, 독립군의 전사자는 130명에 불과하였다. 이것이 유명한 청산리 전투다.


청산리 전투는 일본군의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을 완전히 붕괴시켰으며,

일본군의 작전목표가 제2단계에 들어 가기는커녕 제1단계에서 실력으로 분쇄해버려,

간도·노령일대의 독립 운동을 보위하고 독립 운동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독립군은 1920년12월,밀산에 집결하여 '대한독립군단'이라는 군사 통일을 실현한 다음 소련의 적군과 합작하기 위하여 자유시에 들어갔다가 1921년6월에 '자유시 참변'을 겪었다.

그러나 독립군은 여기에 좌절하지 않고 산개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와서 '참의부(1923)'·'신민부(1924)'·

'정의부(1925)'를 조직하였다가 '혁신의회(1928)'와 국민부(1929)'로 통합,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무장투쟁을 본격적으로 재개하였다.

또한 3·1운동 후 1919년11월에 만주에서 김원봉을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 조직인 '의열단'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관들을 폭파하였다.

조선총독부 파괴를 기도한 밀양폭탄사건(1920.3),부산 경찰서 투탄사건(1920.9),밀양 경찰서 투탄사건

(1920.12), 조선총독부 투탄사건(1921.9),일본군 대장 다나카 총살 저격 사건 (1922.3), 종로경찰서 투탄

사건(1923.1월), 조선총독부·조선은행·경성우체국·경성전기회사 파괴 및 조선총독과 정무총감 총살기도사건(1923.3),일본정부대신 총살기도사건(1923.12), 일본 동경 천황궁성 이중교투탄사건(1924.1), 의열단

군자금 사건(1925.10, 조선식산은행 및 동양척식주식회사 투탄사건(1926.12) 등은 그 대표적 운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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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3          2019.11.03.일요일,맑음                        

일제 강점기 하의 한국 민족은 일제의 무단 통치 체제의 아래 탄압은 실로 말할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은 비밀 결사를 조직해서 독립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11년 ‘105인 사건’ 이후 발각된 비밀 결사만 해도 '독립의군부'(1913)','광복단(1913)','광복회(1913)',

'기성볼단(1914)','선명단(1915)','조선국권회복단(1915)','영주 대동상점,사건(1915)','한영서원 창가집

사건(1916)','자립단(1916)','홍천 학교창가집 사건(1916)','이증연,비밀결사(1917)','조선산직 장려계

(1917)','조선국민회(1918)','민단조합(1918)','자진회(1918)','청림교,사건(1918)' 등이 있다.

이 밖에 대동 청년단을 비롯하여 소규모 비밀 결사들과 계(契) 형식의 지하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해외에 망명한 애국자와 국민들은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 창건 운동과 외교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신민회는 만주·노령 일대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근거지를 건설하며,독립군을 창건하여 국내에 진공하여 독립 전쟁을 감행함으로써 독립을 쟁취한다는 ‘독립 전쟁 전략’을 채택하고,

만주 국경 부근에 1911년 신흥 무관학교,

1913년에는 동림 무관학교와 밀산 무관학교를 설립해서 독립군 근거지를 창건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무관학교는 청년 학생들을 모집하여 사관 교육을 철저히 시키고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였다.

무관학교 졸업생은 독립군을 편성하여 본격적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다.

또한 미국의 클레어몬트와 하와이에서도 한인 소년병 학교가 설립되어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으며,

멕시코에 이민간 동포들도 자제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켜 독립 전쟁에 대비하였다.

만주에서는 '광복회',노령에서는 '권업회',상해에서는 '동제사'와 '신한청년당',미주에서는 '대한인 국민회',

'신한 협회' 등의 단체가 조직되어 독립을 위한 활발한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1917년,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만국 사회당 대회가 열리자 한국 민족은 대표를 파견하여 독립을 결의

하였으며, 같은 해 뉴욕에서 열린 '세계 약소 민족회의'에도 대표를 파견하여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1910년대 한국 민족의 독립 운동의 결정을 이룬 것은 바로 3·1운동이었다.

     

국내외에서 대규모 독립운동을 일으킬 절호의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

1918년11월 세계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이듬해인 1919년1월,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승전국인 미국대통령 윌슨이 이 강화 회의의 회담 원칙으로 패전국의 식민지 처리에 민족자결 원칙이 적용된다는 항목이 있었다.


상해에서 독립 운동을 하고 있던 '신한청년당'은 '파리 강화회의'에 '신한 청년당' 대표 김규식을 파견하고, 국내의 애국자들과 노령·만주의 망명 독립 운동가 및 일본에 있는 유학생들에게도 기다리던 대규모 독립

운동을 일으킬 기회임을 알렸다.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 학생들은 '조선 청년독립단'을 조직하고,

1919년2월8일에는 남녀 유학생이 동경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2·8 독립 선언’이다. 2·8독립선언은 국내에서 대규모 독립 운동을 모색하던 인사들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국내의 애국자들은 해외에서의 이러한 움직임에 큰 자극을 받고,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단 등이

민족 대연합전선을 결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천도교의 손병희,기독교의 이승훈,불교의 한용운 등 33인이 ‘민족 대표’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1919년3월1일 오후 2시에 민족 대표들은 태화관에서, 학생과 시민들은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고  독립 만세 시위에 들어감으로써 3·1운동이 폭발하게 되었다.


1919년3월1일 오후2시,

파고다 공원에서 독립 선언식을 거행하고 학생들과 서울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서울 시내를 누비면서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한 것과 때를 같이하여 같은날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의 여러 곳에서 거의 동시에 독립 만세 시위가 일어남으로써 3·1운동은 초기 조직 단계에서 민중 운동 단계로 비약하게 되었다.

19년3월2일에는 함흥·해주·수안·황주·중화·강서·대동 등지에서 독립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났으며,뒤이어 민족 독립을 요구하는 시위 운동은 함경북도 북단에서 제주도 남단까지 전국 방방곡곡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민중들에 의하여 자발적으로 퍼져나갔다.

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3월6일에는 서간도 환인현에서, 3월13일에는 북간도 용정에서 한국인 동포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대규모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뒤이어 만주 각 지방·상해·노령 연해주와 미주 등 해외 각지에서도 3·1운동에 호응하여 독립 선언과 시위 운동이 전개되었다.

1919년3월1일부터 5월말까지 3개월간 참가 인원수가 202만 3,098명에 달했다.

이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전대미문의 전민족적 대규모 독립 시위 운동이었으며, 당시 1700만명의 총인구에 대한 비율로 볼 때 약소 민족 독립 운동 사상 전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위 운동이었다.

3·1운동은 비폭력 방법에 의한 평화적 만세 시위 운동으로 전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헌병과 경찰뿐 아니라 육해군 정규군까지 동원하여 평화적 시위군중에게 총탄을 쏘아 살육하고, 민가·교회·학교 등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수원 제암리에서와 같이 교회 안에 수십명을 감금하여 불을 질러 태워 죽이고, 탈출하는 사람은 총을 쏘아 죽인 만행도 비일비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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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2        2019.11.03.일요일,맑음

일제 강점기가 시작하는 첫해 부터인 1910년 부터 1918년까지

토지 약탈과 식민지  착취를 목적으로  ‘토지 조사 사업’을 감행했다.

토지 소유권을 재조사하고 토지 가격과 지형을 조사한다고 하면서 신고 주의의 약탈적 방법으로,

1. 임야 및 민간인 공유지 미간지와 개간지,농경지의 토지를 약탈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국토 면적 약 62%에 해당하는 실로 방대한 것이었다.

   미신고와 신고에 필요한 증빙 서류가 미비할 경우 토지는 모두 조선 총독부 소유로 약탈 당하였다.

   또한, 농민의 권리인 '관습상의 경작권','도지권','개간권',' 입회권 등을 소멸하였다.

   예컨대,공유 미간지를 개간하는 경우에 그 토지는 개간한 농민의 사유 토지가 되어 자작농이 되었는데,

   토지 조사 사업 이후에는 공유 미간지를 개간하는 경우 조선 총독부의 소작농이 되었다.


1911년8월,'조선 교육령'을 공포하여 민족 말살과 식민지 교육을 위한 첫 조처를 자행했다.

'조선교육령'의 내용은

1. 조선인에 대한 교육은 일제에 충량한 국민을 육성하는 것을 본의로 하며

2. 일본어를 보급하고,

3.조선에는 대학을 설치하지 않도록 하고, 필요하면 실업 기능 교육만 시킨다는 것이었다.

공립 학교 뿐만 아니라 사립 학교의 교원과 교과 과정, 교과서를 총독부의 지시에 따르도록 제도화하였다.

한국어 시간을 줄이고 일본어 시간을 대폭 증가시켰다.

날조 과장된 일본 역사를 강제로 학습시켜 일본 숭배 사상을 고취시키고, 한국사를 왜곡하고 날조하여 한국민족은 고대부터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아온 정체적인 민족이며, 오늘날 한국이 일본의 지배를 받는 것은 역사적·필연적 귀결이라는 의식을 주입시켰다.

또한, 자부심이 강하고 독립심과 단결성이 강한 한국 민족에 대하여 한국 민족의 민족성은 본래 사대성과

당파성이 강한 결점을 가지고 있다고 교육하여 패배 의식을 주입시키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민족 말살을 위한 식민지 노예 교육에 철저히 순종하지 않을 때에는 가차없이 이를 탄압하고,

사립학교는 폐쇄하였다. 함경북도의 사립 온천 학교는 교사가 학생들에게 조선어 읽기를 강조한다 하여

폐쇄당하였다.

한국 민족의 찬란한 민족 문화와 슬기롭고 유구한 민족사를 알지 못하도록 하면서 민족 말살 정책을 지원

하기 위하여 우리의 민족 문화 유산을 대대적으로 약탈하고 파괴하였다.

1910년 총독부 안에 ‘고적 조사반’을 만들어서 서울·개성·평양·부여·공주·경주 등지의 수많은 고분과 산성, 고적을 파괴하고 수많은 출토품들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실어갔다.

총독부의 고급 관리들이 일본인 골동품상과 결탁하여 헌병 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관제 도굴단을 조직하여

전국 각지의 고적들을 도굴해서 수많은 금관들,금·은·옥의 부장품들과 불상 등의 미술품들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실어갔다.

또한, 1910년 11월부터 헌병경찰을 동원하여 전국의 서점·향교·서원은 물론이요 서적을 다수 보관하고

있는 개인집까지 수색하여 우리의 고전들을 약탈하고, 불태우고,일부는 일본으로 실어갔다.

일제 강점기에 약탈해간 민족 문화 유산들은 낱낱이 들 수 없을 정도로 대량이었다.


일제는 한국을 일본 공업 발전을 위한 원료 공급지와 독점 상품시장으로 착취하기 위하여 1910년12월29일 이른바 '회사령'을 제정,공포하였다.

1.한국내에서의 회사 설립은 반드시 조선총독의 사전 허가를 받도록 하고,

2.허가 없이 회사를 설립한 경우에는 투옥하며,

3.허가를 받고 설립한 회사일지라도 일제의 눈에 거슬리면 언제든지 회사를 정지,폐쇄,해산시킬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한말부터 한국인들은 실업률이 점차 높아졌으나,'회사령'체제하에서 회사 설립 허가를 얻지 못해 민족

   산업은 심하게 탄압을 받았다. 1918년까지 일본인에게는 많은 회사설립을 허가해 주면서 한국인에게는

   조금만 허가해주지 않았다.


일제의 탄압으로 한국의 민족 산업은 발흥할 수가 없었다.

또한 ,1915년12월24일에 '조선광업령'을 제정, 공포하여 '회사령'과 동일한 총독의 허가제를 실시하였다.

무연탄·흑연·동광·아연광·텅스텐광·몰리브덴광은 완전히 일본 재벌이 독점하였으며,

금광과 은광도 대부분이 일본인의 소유로 되었다.

1918년 일본인 소유의 광산액은 한국인 소유의 300배에 달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방식으로 광산 자원을 약탈하여 일본으로 실어갔다.

심지어 어업 부문에서도 일본 어민을 이주시켜 회사를 조직하게 하여 한국의 황금어장을 독점하였다.

일본의 어획고가 한때 세계2위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것도 한국 주요 어장을 독점하여 약탈하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이와같이 극소수 친일분자들의 회사를 제외하고는 한국인의 민족산업은 탄압당하고 파괴

되어 산업진흥을 이룰 수 없었을 뿐더러 심하게 약탈당하고 착취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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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란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하여 식민 통치를 당한 35년간(1910∼1945)의 시대를 말한다.


일제 강점기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 민족이 가장 크고 아픈 상처를 입은 한국사의 특수한 시기다.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을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과도 다른 그들의 독특한 식민지 정책을 구사했다.

식민지 정책의 특징은 '한국 민족 말살 정책'과 '식민지 수탈 정책'으로 요약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이전까지의 열강의 식민지 정책은 나라에 따라 각각 유형적 특징이 있었다.


영국형은 사회·경제적 수탈이 목적이므로 ‘간접 지배’를 원칙으로 하였다.

 식민지의 행정 관리는 토착인을 고용하면서 독립 운동을 막기 위하여 토착인에 대한 분할과 지배의 정책을

 채택했다.또한, 식민지 관리를 충원키 위해 토착인들에게 고등교육을 시켜 민족 보존운동이나 민족 문화

 운동에 대해서는 대체로 방관적 정책을 취했다.

프랑스형 역시 사회·경제적 수탈이 목적이므로 영국과는 달리 ‘직접 지배’를 원칙으로 하였다.

  따라서,식민지 행정 관리는 대부분 프랑스인을 고용하였다.

  토착인의 민족 보존운동에는 방관적이었으나 민족 문화운동에 대해서는 교육을 통하여 통제하고,

  프랑스식 생활 양식과 가톨릭교를 보급하여 프랑스식 문화 체계를 이식시키려 하였다.

네덜란드형 역시 사회·경제적 수탈이 목적이므로 ‘직접 지배’를 원칙으로 하고,식민지 관리도 네덜란드인을

  고용하였다.프랑스형과 다른 점은 토착인의 민족 보존은 물론이요 민족 구성이나 민족관습,민족문화에

  대해서는 가능한 한 이를 침해하지 않고 그대로 보존시켜 독립 운동의 저항을 줄이면서 극대화하려는

  정책을 취하였다.

일본형은 프랑스형을 모방하여 직접 지배의 원칙을 채택하였으나,프랑스형과 다른 점은 ‘동화 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한국 민족 말살 정책을 강행한 데 있었다.

  즉, 사회·경제적 수탈의 극대화와 함께 한국 민족을 지구 위에서 소멸시키려 한 것이었다.

  이 점이 서구 제국 주의의 식민지 정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서구의 식민지정책은 간접 지배이든 직접 지배이든 사회·경제적 수탈을 목적으로 하고, 

피지배민족의 민족보존은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였으며, 민족문화운동에 대해서는 그것이 직접적인 정치적 독립 운동이 아닌 한 방관적 정책을 취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식민지 정책은 사회·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한국 민족을 말살, 소멸시켜서 일제의 공식·비공식적으로 차별 받는 종속 천민 신분층으로 만들 것을 목적으로 한국 민족 말살 정책을 강행하는 악랄한

정책을 집행하였다.또한 식민지 정책은 가장 폭압적이고 무단적이었으며 가장 악랄한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한국 민족의 '항일 독립 운동'이 전세계 약소 민족의 모범이 될 만큼 완강하고 줄기차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일제는 한국 민족 말살정책은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하였으며,

사회·경제적 수탈정책도 많은 부분에서 그들이 원한 바 대로 되지는 않았다.

한국 민족은 식민지 정책으로부터 자기 민족을 보위하고 일제를 몰아내어 조국의 광복과 독립을 쟁취하려고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한국 민족의 독립 운동과 연합국의 승전으로 마침내 일제는 한국에서 쫓겨가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강점이 한국 역사에 끼친 해독은 참으로 심대한 것이었다.

일제는 한말까지 꾸준히 전개되던 한국의 자주 근대화를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강점 기간 내내 한국사회를 정체시키고 온갖 학살과 약탈을 자행했으며,결국 일제 강점의 소산으로 남북 분단까지 초래하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 민족이 타의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괸것도 ㅇ리제의 한국 강점으로 말미암은 소산이다.

    

1910년8월29일은 대한민국의 국치일이며 또한 일제 강점기가 시작하는 시점이다.

대한제국의 주권을 완전히 강탈후 식민지로 강점하자 한국에 대한 식민지 통치 기구로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총독을 두어 식민지 통치를 담당하게 하였다.

조선 총독은 행정권,입법·사법 및 군대(조선군) 통수권까지 가진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일제는 조선 총독을 반드시 일본의 육군·해군 대장으로 임명하도록 함으로써 한국을 일본 군부의 지배하에 두고,군사 방식에 의한 무단 통치를 자행하도록 하였다.

또한, 한국에 대한 식민지 통치에 있어서 ‘법률’이 필요한 부문도 총독의 ‘명령’으로 행하도록 하였으며,

동서고금에 없는 특별 권한이므로 총독의 법률 효과를 가진 명령에 특별히 ‘제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제는 조선 총독에게 한국인의 모든 생사여탈을 결정할 수 있는 특별 권한을 주어 한국인의 독립운동 등

저항을 신속하고 철저하게 탄압하도록 하였다.

일제 강점기 속의 한국은 명목상의 법률이 부분적으로 있다고 하나 실질적으로는 법률에 의한 통치된 법치지역이 아니며 군왕 보다도 조선 총독의 제령에 의해 전제·파쇼적으로 지배되고 탄압된 '특수 지역'이었다.

일제는 조선 총독부의 부서를 대폭 증설하고 지방 행정조직을 개편했다.1911년3월이었다.

관리 중 한국인은 극소수며 대부분 일본인이었다,

즉, 일제는 한국인에 대하여 생사여탈권을 쥔 조선 총독 밑에 일본인 관리들을 늘어놓아 식민지 통치의 행정조직을 편성한 것이었다.


1910년9월10일에 가서는‘무단통치’라 하여 '헌병 경찰 제도'를 창설하였다.

헌병 경찰 제도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제도로서 헌병으로 하여금 일반 국민에 대한 경찰 행정을 담당하게 하는 제도이며 일본 헌병은 한국의 민간인에 대한 경찰을 담당하게 되었다.

일반 경찰도 헌병 제도와 결합하여 한국의 민간인을 군사적 방식으로 사찰하게 되었다.

이 '헌병 경찰 제도'에 의하여 일본 헌병 사령관이 중앙의 경무 총감이 되고, 각도의 헌병 대장이 해당 도의

경무부장이 되었으며,위관이 경시, 하사관이 경부, 사병이 순사의 지위와 역할을 수행하였다.

물론 일제의 '헌병 경찰 제도'에 의하여 종래의 경찰 제도가 없어진 것은 아니고,

경찰 제도는 그대로 두고 군사적으로 지휘 관리되는 위에 다시 일제의 헌병대가 일반 경찰 직무를 수행

하도록 개편된 것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헌병 경찰 관서와 헌병 경찰을 전국 각지에 조선 총독부 행정 조직과 함께 거미줄같이 늘어

놓아 한국인을 탄압하는 무력 조직을 편성한 것이다.

헌병경찰제도에 의거하여 조선 총독부의 행정 관리에게도 그에 준하는 제복을 착용시키고 무기로 대검하게 하였으며, 심지어 학교 교원들에게까지 제복과 함께 대검을 착용하게 하여 한국인을 처음부터 무력과 폭력으로 탄압하였다.


일제는 '무단 통치'를 조선 총독부와 헌병 경찰에만 의존하는 것이 불안하여 정규군을 배치하였다.

일제는 일본 육군을 나남에 주둔시켜 북부 조선 일대를 지역별로 구획하여 배치하였으며,

용산에 주둔시켜 중부와 남부 조선을 지역별로 구획하여 각지에 배치하였다.

일제는 이를 합하여 '조선군'이라고 부르고 조선군 사령부를 용산에 두었다.

일제강점기의 한국은 전국이 거미줄 같은 일본 정규군의 배치망 하에 중첩되어 들어가게 되었다.

일제는 또한 경상남도 진해와 함경남도 영흥만에 일본 해군 요새 사령부를 설치하고,해군과 중포병 대대를 주둔시켰다. 

일제 강점기 초기의 식민 통치의 무력은 약 5만2,086명에 달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5만여명의 무력 조직을 전국에 거미줄같이 배치하여 무단 폭압 통치체제를 만들었다.

일제는 완전 무장한 반면 한국인들은 저항치 못하도록 완전 무장 해제하였다.

무장을 본격적으로 해제하기 시작한 것은 1907년8월1일의 대한제국 구군대의 해산과,1907년9월3일에

일제 통감부가 의병 전쟁 탄압책으로 '총포급 화약류단속법'을 공포하여 한국 민족이 무기를 가질 수 없도록 규제하였을 때부터였다.

일제는 1910년 강점 이후에는 이 단속법을 더욱 강화하여 집행하고,위반한자는 투옥 등 형벌을 가했다.

특히,일제는 매년 이른봄에 정기적으로 총포 소지를 단속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밀고제를 설정하여 한국인의 무기 소지자를 색출하여서 엄벌에 처하였다.

민간인에게 총기 소유를 허가한 경우는 한국에 이주한 일본인 유력자들과 한국인으로서는 친일 지주들에게 극소량의 수렵용 엽총을 허가한 것뿐이었다.

일반 한국인은 엽총 소유도 엄금하여 위반자는 가혹하게 처벌하고 투옥하였다.

일제의 한국 민족에 대한 완전 무장 해제 정책은 일제 식민지 무단 통치에 대한 한국인의 무력 저항과 독립운동의 능력을 완전히 박탈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제는 헌병 경찰제와 무단 탄압 체제를 구축하고, 한국인을 완전 무장 해제 시킨후 한국인의 모든 생활을 철저히 탄압하고 규제하기 위하여 헌병 경찰에게 일정한 사법관의 특권을 부여하고 태형제도를 제정,공포

하였다.

1910년12월3일, 총독의 제령 제10호로 '범죄 즉결례'라는 것을 제정,공포하였는데,

경찰서장 또는 각 지방 헌병 대장은 '징역 3개월 이하''.벌금 100원 이하'에 해당하는 처벌은 재판소의 재판 없이 판정하여 즉결로 집행한다는 것이었다.

1912년3월에는 제령 제13호로서 '조선태형령'을 제정,공포하였다.

그 내용은 3개월 이하 징역이나 구류에 처할 자와 100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자는 헌병 경찰이 필요에 의해 '형1일 또는 벌금 1원'을 태1개로 환산하여 이를 집행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일제는 이 야만적 제도를 만들면서 조선의 옛 제도를 부활하는 것이라고 뒤집어씌웠다.

조선 왕조의 태형은 중범에 대한 것이었는데도 야만적 형벌이라고 하여 1894년 갑오경장 때 폐지하였는데, 일제는 경범과 일상생활에 관한 모든 것에 이를 즉결하는 새로운 야수적 탄압 제도를 만든 것이었다.

일제강 점기의 한국 사회는 일본군과 헌병 경찰이 한 손에는 총검을,다른 한 손에는 채찍을 들어 한국인을 탄압,학살,착취하는 하나의 커다란 감옥이었다.


일제는 이러한 식민지 무단 통치 체제를 만들어 놓고 한국인의 국권 회복 운동·독립 운동에 대한 잔혹하기 짝이 없는 탄압을 자행하였다.

그 중에서 1905년 이래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여 1907-1908년에 절정을 이루며 치열하게 전개되던 의병

전쟁에 대하여서는 이미 한말에 ‘조선 주차군’이라고 부르던 일본군을 투입하여 잔혹하게 탄압하였다.

1910년 일제 강점 이후에도 부분적으로 1914년까지 줄기차게 의병 전쟁을 전개하였다.

일제는 의병 운동에 참가한 의병은 물론 그 가족과 그들에게 식량·물자를 제공한 한국인까지 처참하게 학살하고,가옥에 방화하는 등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탄압과 학살을 자행하였다


일제는 또한 애국 계몽 운동을 전면적으로 탄압하고 그 영향을 배제하려 하였다.

1910년8월 이후,대한협회·서북학회·기호흥학회·관동학회·교남교육회·호남학회·대한흥학회)·흥사단 등 모든 애국 계몽 운동 단체들을 강제 해산시켰다.

또한 '황성신문''대한매일신보''제국신문''만세보''대한민보'를 비롯하여 애국 계몽 운동을 주도하던 모든

신문들을 강제 폐간시켰다.

뿐만 아니라 '소년'을 비롯하여 모든 잡지들과 각 학회의 기관 잡지들을 모두 강제 폐간시켰다.

그리고  조선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와 그 영문판인 '서울 프레스', 일본인 거류민들의 '경성일보' 만을 남겨 일제의 통치를 선전하도록 하였다. 일제는 그들의 한국민족 말살정책의 집행에 종래의 애국계몽운동의 영향이 크게 방해된다고 보고, 애국 계몽 운동의 영향을 조직적으로 배제하려 하였다.

한말에 한국인이 저술한 각급 학교용 교과서들을 모두 몰수하여 사용 금지 시켰고,

이때에 간행된 모든 애국 계몽 서적들을 ‘금서’라고 하여 모두 몰수하고 판매 금지시켰으며,

이들을 읽는 한국인은 가혹하게 처벌하였다.

그리고 학교교과서는 일본인 저작의 교과서로 대체시켰다.

또한,한국인의 정치 집회는 물론 교양 강연회와 연설회도 금지시켰으며,종교 집회까지도 반드시 사전에

조선 총독부의 허가를 받도록 하였다.

한국인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철저하게 박탈당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무단 탄압 조처에 의하여 한국인의 입과 행동은 완전히 봉쇄 당하였으며,

일제의 사슬에 묶여 입이 있어도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완전히 무력한 상태에 묶이게 되었다.

한국 사회는 완전히 암흑 천지가 되고, 오직 조선 총독부와 일본의 기관지들만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한국인이 행복에 가득 차 있으며 크게 발전하고 있다고 전세계에 거짓 선전을 하고 있었다.

일제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내의 독립 운동 세력이나 민족 자주 세력을 뿌리부터 뽑아버리려고 획책하였다. 일제가 가장 주목하여 탄압하려고 노린 것이 1907년에 비밀 결사로 조직되어 일제 강점 후까지

활동하고 있던 신민회와 그 회원들이었다.

당시 전국의 지도적 애국자들이 거의 모두 신민회에 가입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제는 신민회를 해체시키고 그 회원을 탄압하기 위하여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을 조작하였다.

신민회 회원들이 초대 총독 데라우치를 암살하려고 음모하였다는 것이다.

물론, 신민회는 이러한 암살 음모를 한 일이 없었고, 이것은 일제가 조작해낸 각본이었다.

일제는 1911년8월에 총독 암살 음모 혐의로 전국에서 약 800명의 신민회 회원들을 체포하였다.

이 사건은 일제가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날조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일제는 기소 요건을 만들 수가 없어서

검거된 회원에 대한 전대미문의 잔혹한 고문을 가하였다.

일제는 이 기회에 한국인들에게 독립 운동을 탄압할 결의를 보이고, 만일 독립 운동에 가담할 경우에 당해야 할 잔혹한 개인적 고통을 보이기 위해서 다수의 체포된 신민회 회원들을 고문 도중에 학살하고 수많은 애국자들을 불구자로 만들었다.

이 중에서 122명을 기소하여 그 중 105명에게는 징역 5년에서 10년까지의 실형을 선고하였다.

105인사건의 조작과 지도적 애국자들에 대한 고문·학살·탄압은 일제가 사소한 독립운동의 가능성에 대해서조차 정치적 날조극을 만들면서까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탄압과 학살을 야만적으로 자행하는 야수적 강도 들이었음을 한국인들에게 증명하여 보여주었다.

일제는 그밖에 독립 운동을 위한 비밀 결사들을 찾아내어 수많은 애국자들을 학살하고 투옥하였으며,

독립사상을 가진 개인들에 대해서도 독립운동을 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체포하여 고문하고 투옥하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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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란 우리나라가 일본제국주의에 의하여 식민통치를 당한 35년간인 1910년8월29일부터

1945년8월15일 해방되기까지를 일제 강점기 시대라 한다.

그 기간에 조선어를 연구한 학자들을  '함흥 학생 사건'을 계기로 탄압한 사건이다.

1942년10월부터 조선어학회 회원 및 관련 인물을 검거해 재판에 회부한 사건으로

함흥영생고등여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한국말로 대화하다가 조선인 경찰관인 야스다

(안정묵)에게 발각되어 취조를 받게 된 사건이 벌어졌다.


조선 어학회는 1929년 10월, 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조직했다.

조선어 사전 편찬회의 발기인 108명 모두가 민족주의 사상을 지녔다고 판단한 일제는 이들을 강제 해산

시키기 위해 '함흥 학생사건'을 꾸며 조선어 학회의 사전 편찬을 맡고 있는 정태진을 관련자로 검거하고

조선 어학회가 독립 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민족주의 단체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냈다.

이에 따라 33명이 내란죄로 기소를 당했다.

이들 중 16명은 기소되었고, 나머지 12명은 기소 유예되어 석방되었다.

이윤재와 한징이 옥중에서 사망하고,장지영·정열모 두 사람이 석방되어 공판에 넘어간 사람은 12명이었다. 이들은 1945년 해방을 계기로 풀려났다.

이 사건으로 조선 어학회는 강제로 해산되었다가 해방 후 조직을 정비한 뒤

1949년9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창립 초기부터 우리말인 한글을 통해 민족 사상을 고취시키려 하던 조선 어학회 회원들은 1929년 10월

조선어 사전 편찬회를 조직해 '사전'의 편찬을 시도했다.

조선어 사전 편찬회의 발기인 108명 모두가 민족주의 사상을 지녔다고 판단한 일제는 이들을 강제해산하기 위한 구실을 찾기 시작했다.

이에 회원들은 사전 출판을 서둘러 1942년4월, 그 일부를 대동 출판사에 넘겨 인쇄하기 시작했다.

이때 일제는 조선 어학회 사건을 조작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함흥 학생 사건'을 꾸몄다.

함흥 영생 여자 고등 보통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태극기를 그리며 '우리나라 국기'라고 속삭이다가 경찰에게 발각되어 취조받게 되었는데,

취조 결과 조선 어학회의 사전 편찬을 맡고 있는 정태진이 관련되었음을 알았다.

1942년9월5일, 정태진이 검거되어 조선 어학회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거짓자백을 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42년10월1일,이중화·장지영·최현배·이극로·한징·이윤재·이희승·정인승·김윤경·권승욱·이석린 등 핵심 인물 11명이 검거되어 함경남도 홍원으로 압송된 뒤,

1943년4월1일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되어 고문을 당했다.

사건을 취조한 홍원경찰서에서는 33명 모두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기소했다.

이들 중 16명은 기소,12명은 기소 유예되었으며 기소자는 예심에 회부되고 나머지는 석방되었다.

함흥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이윤재가 1943년12월 8일에,1944년2월22일에는 한징이 옥중에서 사망하고, 장지영·정열모 두 사람이 공소 소멸로 석방되어 공판에 넘어간 사람은 12명이었다.

1945년1월16일, 함흥 지방 재판소에서는 이극로 징역 6년,최현배 징역4년,이희승 징역2년6개월, 정인승·

정태진 징역 2년, 김법린·이중화·이우식·김양수·김도연·이인 각 징역 년 집행유예 3년,장현식 무죄 등의

판결을 내렸다.

실형을 받은 이들은 1945년 해방을 계기로 풀려났으며,

이 사건으로 조선 어학회는 강제로 해산 당했다가 해방 후 조직을 정비한 뒤

1949년 9월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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