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                 작성일자; 2019.12.16.월요일,맑음

 

이현상은 남한 빨치산의 공식적인 총수로 알려져있다.

중앙고보 재학중이던 1925년 조선공산당 창설에 참여했으며,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 산하의 여러 학생단체에서

간부로 활동했다.

1928년,반일동맹휴학을 주도하던 중 검거되어 4년간 복역했다.

출소이후 박헌영,김삼룡 등과 함께 경성 콤 그룹을 결성하여 당 재건을 준비했다.

남한에서 공산당 활동이 불법화 되자 평양으로 갔으나

1948년,당 결정에 따라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투쟁을 시작했다.

1950년9월, 6·25전쟁 중에 전황이 불리해지자 강원도까지 북상했으나

다시 남하 하라는 당의 지시로 소백산 일대로 내려왔다.

1951년,덕유산에서 그의 주재로 최초의 '남한 6도 당위원장회의'가 열렸고,

이때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사령관'으로 추대되었다.

1953년9월18일,지리산 빗점골에서 토벌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남부군 창설               작성일자;2019.12.16.월요일,맑음

 

1950년,6.25 전쟁을 전,후 하여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한 이현상이 지휘하던 좌익 빨치산 부대다.

1949년부터,

이현상은 지리산 지구에서 인민 유격대 제2병단을 편성하여 활동하였으며,

6.25 전쟁시에는 광범한 지역에 걸쳐 협동 작전을 벌였다.

유엔군의 반격으로 다시 지리산 지구로 잠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50년11월에는,후평리에서 남반부 인민 유격대로 재편한 다음 남하하였다.

1950년12월,제천지구에서 조선인민 유격대 남부군단으로 부대를 개편 후 덕유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51년7월 중순부터,이현상은 남부군단 총사령관의 직함으로 남한일대의 유격부대들을 총지휘했다.

이들은 주로 지리산,백운산,덕유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한국군 백야전 전투 사령부 등의 토벌 작전에 의해 대부분 토벌되었다.

1950년11월,

이현상은 중순 유격대를 지휘하여 강원 후평리로 후퇴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이승엽 등과 남한지역의 당사업과 유격투쟁에 관한 문제를 토의했다.

이승엽은 6개 도당(충남북, 전남북, 경남북)에 대한 지도 권한을 여운철에게 위임했고,

이현상에게는 유격대의 통일적 지도를 맡겼다.

이현상은 후평리에 집결된 유격대로 남반부 인민 유격대를 조직하여 다시 지리산을 향했다.

이때 편성된 인민 유격대는 유리사단(4백명),혁명지대(60명),인민여단(1백50명)과 사령부 및

기타 직속부대(1백50명) 등 약 8백명의 병력이었다.

1950년12월,'남반부 인민유격대'는 중공군 참전으로 태백산맥을 타고 침투했다.

12월말에는 충북 단양을 거쳐 문경경찰서를 습격한 후 그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이현상은 제천 지구로 이동하여 ‘조선인민 유격대 남부군단’으로 부대를 다시 개편했다.

1951년2월초에, '남부군단'은 속리산을 거쳐 덕유산으로 들어갔다.

1951년7월 중순,덕유산에 들어간 남부군단 총사령관 이현상은 여운철과 함께 충남북, 남북,

경남북의 6개 도당 회의를 열기도 했다.

이후 남한일대의 유격투쟁은 이현상이 총지휘하게 되었다.

남부군단 예하에는 제1전구(전북의 북부지구와 충남)와 제2전구(전북의 남부지구)가 있었다.

제1전구에는 충남 빨치산 5백70명을 68사단으로,전북 북부지방 빨치산 7백명을 45사단으로

각각 개편했다.

제2전구는 전북 남부에 있는 각 유격대를 46사단, 53사단으로 개편했다.

직속부대로는 81사단,92사단,602사단이 있었다.

이들은 지리산에도 병기수리소를 설치하여 하루에 1천발의 탄환을 만들었으며

병원 시설도 있을 만큼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1951년7월부터,

노동당은 남한지역에서 제2전선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각 지대유격대 체제로부터

당 사업을 주로 하는 지구당 체제로 개편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남부군단 예하의 지리산 빨치산은 남부군의 직속부대인 제81,제92사단과 경남도당 사단인 제57사단,

그리고 전북도당 사단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이들은 여순 10.19사건 당시 반란군 출신 중 생존해 있던 인원과 북한군 전투부대의 낙오병들로

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비교적 전투경험이 많은 병력들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으로서는 큰 부담이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과 덕유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두고 한국군과

유엔군의 보급로 차단,식량약탈,지서습격,차량기습,통신망 절단,살인,방화 등을 자행했다.

이들의 행동은 전후방 한국군 전투력에까지 영향을 주었고 민심을 크게 동요시켰다.

제1군단장 백선엽 소장을 사령관으로 하는 남부군을 토벌하기 위하여

‘백야전전투사령부’을 창설하여 토벌작전이 개시되자,

기동타격 부대는 지리산을 남북으로 북쪽은 제8사단이,

남쪽은 수도사단이 담당하여 공비 주력을 타격하였고 저지부대는 빨치산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백야사 예하 부대들은 지리산,백운산,덕유산 일대 전투부대를 동시에 투입하여 대부분 토벌하였고,

핵심 지도자 대부분을 사살하거나 포획하였다.

백야사의 작전 기간 동안 사살 포로 투항 등을 포함하여 1만6천여 명에 달했고,

노획 무기도 3천여 정을 상회하였다.

6.25전쟁 기간 이현상이 이끄는 남부군단은 지리산,덕유산 일대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의 후방을 교란하여 전체 전선에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한국군과 국민들의 사기를 크게 저하시켰다.

이들은 한국군이 빨치산 토벌 작전을 위해 군단급 규모의 부대를 전선에서 이동시키게 하여

한국군의 전투력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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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3월21일,

여순 사건 반란군 김지회 부대가 경남 거창군 북상면 황점 마을을 점령한 뒤 거창 경찰서

위천 지서와 북상 지서를 습격하고 북상 지서장을 납치한 사건이며,

그 뒤 김지회 부대는 1949년4월에 지리산에서 국군과 경찰 부대에 토벌되었다.


1948년2월,

UN에 따라 남한 단독 선거가 결정되자 제주에서 반대하는 제주 4·3 사건이 일어났다.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는 제주 4·3 사건 진압을 명령 받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김지회 중위의 지휘 아래 반란군은 토벌대에 쫓겨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에 근거를 두고 인근 지역에 빈번하게 출몰하며 면사무소나 경찰 지서를 습격하였다.


1949년3월21일,

김지회 부대는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황점 마을을 점령하였다.

다음날 북상을 공격하였지만 경비가 철저하여 점령하지 못하고 거창 경찰서 위천 지서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김지회 부대는 인근 마을에서 ‘보급 투쟁’을 마치고 거창 경찰서 북창 지서를 불태우고 북창 지서장을 납치하여 덕유산으로 철수했다.


1949년3월28일,

국군과 경찰 부대는  함양에 집결하여 덕유산에 대한 포위망을 형성했다.

1949년3월29일 밤,

북창 인근을 공격하여 90여 명을 사살하고,

1949년4월4일,

괘관산을 포위 공격하여 반란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1949년4월9일,

지리산 뱀사골 어귀 반선리에서 토벌대는 반란군을 공격해 홍순석 등 17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했다.

김지회는 부상하여 도주하다 반선리 부근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국군 내 좌익 세력을 척결하고 대한민국의 반공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들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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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작성일자; 2019.12.16.월요일,맑음

 

빨치산은 한국전쟁 전후로 좌익 계열과 인민군 패잔병들에 의해 지리산에서 조직된

유격대를 일컫는다.

지리산에서 벌어진 동족상잔은 민족사의 최대 비극이다.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자행된 살육과 약탈은 빨치산이든 국군·경찰이든 모두 피해자였다.

또한  무고한 주민들이 입은 인적·물적 피해도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빨치산’"게릴라'란 프랑스어’에서 유래하였는데,

빨치산이라는 뜻은 한국전쟁 전후에 반제국주의와 반자본주의를 타도하여

공산주의 인민공화국을 건설할 목적으로 지리산을 대표로하는 험준한 산악 지대에서

무장 투쟁을 전개했던 좌익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빨치산 활동은

일제 말기에 애국지사들이나 징병과 징용을 피해 산으로 들어 갔던 젊은이들이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빨치산 조직을 만들어 활동했는데 그들은 대부분 좌익 계열의 인사들이었다.

훗날 지리산 빨치산의 아버지 혹은 총수라  불리는 '이현상'이 해방 전부터 지리산을 은신처로

일제와 투쟁한 것은 이러한 지리산의 환경적 특징으로 볼 때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한국전쟁 이전에 지리산에 빨치산들이 조직적으로 은거하여 유격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결정적 동기는

이른바 여순 반란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1948년10월19일 저녁8시 경,

여수 주둔 제14연대 인사계 지창수 상사,김지회 등의 좌익계 군인들이

제주도 폭동 진압에 출동을 거부한다는 표면적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약 3천 명의 반란군들은 남로당 당원들의 지원을 받고서 일시에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고

인근 학구, 광양, 벌교 등 세 방면으로 진격하여 1

0월22일 아침에는 지리산 자락의 구례와 곡성까지 점령하였다.

반란군과 남로당 당원들은 지서, 관공서 등을 습격하고 인민 재판을 열어 경찰 간부,우익인사,

지주 등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여 당시 전라남도 남동부 지역을 피바다로 만들었다.

 

1948년10월21일,

14연대의 반란에 놀란 이승만 정부는 광주에 황급히 반란군 토벌 사령부를 설치하고

여수·순천 일대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난 뒤,

전투사령관 송호성이 지휘하는 군대가 진압 작전을 벌였다.

1948년10월23일,

반란군에 대한 토벌 작전이 성공하자 14연대 반란군 패잔병들은

김지회 중위의 지휘 아래 광양의 백운산과 지리산의 문수골,화엄사 계곡,산청 근처의 웅석봉 등지로

숨어 들어 본격적인 유격 투쟁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김지회가 이끄는 여순 반란 사건의 패잔병들이 지리산에 입산한 시점부터

지리산과 빨치산의 운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1948년10월25일,

김지회가 이끄는 패잔병들은 지리산 문수 계곡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난 뒤

함양·하동·순천·구례·남원 등지에 출몰하여 경찰서를 습격하고 우익 분자를 죽이고

지주의 집을 약탈하고,산간 지역에 유격전구를 설치하기도 했다.

1949년4월9일,

국군은 뱀사골 반선 지역에서 김지회 부대와 치열한 총격전을 벌인 끝에 그들을 모두 섬멸하였다.

당시 김지회가 이끈 패잔병들은 약 천여 명 정도 되었는데,

반선 전투에서 김지회,홍순석 등 반란군의 우두머리가 사살되고 패잔병들이 괴멸했을 때

남은 패잔병들은 약2백여 명이었다.

군경에 쫓긴 이들은 지리산 깊숙이 들어가 지리산 일대의 남로당 세력과 연계하여

이른바 '지리산 유격대 를 결성하였다.

1949년6월 하순,

구례 유격 대장 박종하는 여수·광양·구례의 유격대를 규합하여

'백운지구 사령부 유격대'를 조직하였는데,총인원 50명, 무장 13정이었다.

박종하는 50여 명의 병력으로 광양군 진상면 신항리에 주둔 중이었던 국군의 15연대 중화기 중대를

기습하여 박격포 2문과 기관총 5정,소총 70여 정,실탄 수만 발을 노획하여 대부대로 약진했다.

1949년9월,

박종하는 또 15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광양읍 서국민학교에 주둔 중인 15연대 1개 대대병력을 공격하여

포로 6백여 명과 소총 7백여 정 등 대대 병력 보급품 전부를 노획하는

유격 투쟁 사상 초유의 대전과를 올렸다.

14연대 반란군의 정치위원이었던 이현상은,

박종하 부대를 지리산으로 불러 14연대 출신의 패잔병들과 세력을 합쳐

지리산 인민 유격대로 재편성하여 박종하를 총참모장으로 기용하여

그에게 빨치산 투쟁의 지휘권을 맡겼다.

그들은 지리산에서 지서를 습격하고 보급 투쟁을 전개하면서

무기 수리와 폭탄 제조 공장을 운영하였으며,

또 지리산 일대의 해방 지구에서는 등사판을 이용하여

신문과 각종 인쇄물을 발행하여 빨치산과 지리산 자락에 거주하는 양민들에게 배포하는 등

전 활동도 병행했다.

그들이 이처럼 지리산 유격 투쟁의 초기에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추고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산간 주민들의 동조와 협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산주의를 몰랐던 양민들은 빨치산들이 실시한 토지 개혁에 고무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지지했다고 생각한다.

또 당시 북한에서 남한의 빨치산을 지원할 목적으로 파견한 이른바

‘강동정치학원 출신의 남파 유격대’의 일부가 지리산까지 내려와서

지리산 빨치산의 유격전에 참여하게 되었다.

1950년1월,

지리산 빨치산은 산청군 화개면에서 국군 70여 명을 기습하여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국군과 경찰은 추위를 이용하여 민간 부락과 빨치산의 통로와 소통을 차단하고 난 뒤

본격적으로 토벌 작전을 단행하였다.

빨치산들은 혹독한 추위에 보급로가 끊긴 채 군경의 토벌 작전으로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1950년6월 초,

이현상은 지리산에서 유격 활동을 할 수 없음을 깨닫고 잔여 병력 150여 명을 이끌고 월북을 결심했다.

그들이 군경의 포위망을 뚫고 지리산을 떠나 북상 중 무주에서

인민군이 38선을 무너뜨리고 남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현상은 대전에 가서 인민군 전선사령관 김책을 만났는데

김책은 그에게 후방에서 유격 투쟁을 전개하여 인민군의 남하를 도우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현상은 즉시 유격대를 이끌고 다시 남하하였는데,

이때 부터 빨치산의 투쟁과 운명은 다시 한 번 바뀌게 되었다.

1950년6월25일 새벽,

38도선 전역에서 총공세를 시작한 북한은 3일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갔다.

김일성은 전쟁이 터진 직후 평양 방송을 통해 해방 전쟁의 승리를 위하여 남북 조선 인민들이

총궐기해야 한다고 호소하면서 빨치산 등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반부 남녀 빨치산에게! 유격 운동을 한층 맹렬히 더욱 용감히 전개하며,

해방구를 확대하며 또는 창설하며 적은 후방에서 적들의 공격, 소탕하고

적의 작전 계획을 파탄시키며 (중략) 각종 수단을 다하여 적의 전선과 후방 연락을 차단하고

도처에서 반역자들을 처단하며 인민위원회를 복구하고 인민 군대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

김일성이 남침 전쟁을 일으킨 원인 가운데 하나가

전쟁이 일어나면 남조선에서 유격 투쟁하던 빨치산과 좌익 계열의 민중들이 즉시 후방에서

제2전선을 형성하여 북에서 남으로 진군하는 인민군을 도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전쟁 초기에 빨치산의 활약에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전쟁 초기에는 김일성의 생각대로 빨치산들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계속 낙동강까지 진격하는 과정에서 인민군과 협동 작전을 벌이거나 무장 투쟁을 벌였다.

하지만 미국을 중심으로 한 자유 진영 16개 국가의 신속한 참전과

한국군의 낙동강 전선의 성공적인 방어는 점차 한국전쟁의 양상을 바꾸어놓기 시작했다.

1950년9월15일,

맥아더 장군이 주도한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자

인민군은 남북으로 포위된 채 북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퇴로가 막힌 일부 인민군, 인공 치하에서 활동한 좌익 등의 세력이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가

기존의 빨치산들과 연합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한국전쟁 기간 동안 본격적인 빨치산 투쟁이 시작되었다.

1949년 하반기에 인민유격대 2병단을 편성하여 무장 투쟁을 벌여 오던 이현상 부대는

인민군의 남진과 함께 낙동강 전선에서 후방을 교란하는 유격 활동을 하다가

인민군이 퇴각하자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가 백두대간을 타고 북으로 올라갔다.

1950년11월,

이현상이 부대를 이끌고 강원도 후평리에 도착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인민군과 유격대를 편성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던 이승엽과 함께

이른바 '남조선 인민유격대', 속칭 '남부군'을 창설하였다.


이때 이승엽은 이현상을 남부군 부대장으로 임명하고

그에게 즉시 남으로 내려가 유격 활동을 벌이도록 명령했다.

이현상의 남부군은 과거에 동학 혁명군의 집결지이기도 했던 보은군 마로면 갈평이라는

산마을에 2개월 남짓 머무르면서 청주를 비롯하여 문경경찰서 등 각급 기관을 기습했다.

1951년4월 말,

남부군 예하의 결사대 48명이 청주를 습격했다.

그들은 충북도청,청주경찰서,청주형무소 등 주요 기관을 일시에 점령한 뒤

수감 중이던 좌익계 죄수들을 풀어내 속리산으로 철수하였다.

한국 전쟁 중 빨치산이 도청 소재지를 공격하여 한때나마 점거한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남한의 빨치산은

지리산 이현상 부대 1백여 명을 비롯하여 모두 460여 명이었던 것으로 국방부는 추정하고 있다.

이는 제주 4·3항쟁과 여순 반란 사건의 초기 진압으로 숫자가 크게 줄어든 탓이었다.

인민군이 퇴각한 후에는 38선 이남에만 1만여명이 넘는 빨치산들이 산중에 은거하여

제2전선을 형성하였다.

빨치산들의 세력이 이처럼 커지자 이승만 정부에서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후방 지역 작전을 전담할 제3군단을 창설하여

1950년10월 중순부터 조직적인 빨치산 소탕 작전을 전개했다.

1951년7월,

이현상은 남원시 산내면 논골에서 제2차 6개 도당 회의를 열어,

각 도당 유격 사령부를 사단으로 승격 개편하고 직접 지휘하는 남부군 사령부 통제 하에 넣었다.

이때부터 남한 빨치산 세력의 지휘 체계가 이현상을 정점으로 단일화된 것이다.

'남부군'은 국군과 유엔의 공세에 대항하여 각 도당 빨치산을 통일된 지도 체제에 묶어

무장 투쟁을 벌이려 하였다.

그러나 전남 도당의 경우는 남부군의 통제에 들어갈 것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행동을 벌였다.

남부군은 경상남도 산청군 삼장면 조개골에 거점을 두고 무장 부대를 지휘했다.

이처럼 남한 지역에서 빨치산 부대들이 남부군을 중심으로 조직을 개편하고 있을 때,

북한은 인민군의 재침입과 발을 맞춰 남한의 유격대가 제2전선의 역할을 수행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즉 각 도당 조직들을 군사 활동을 위주로 한 지대로 개편하도록 했다.

도당 위원장이 지대장 또는 정치부 지대장이 되어

인민군의 진격에 호응하는 유격 투쟁을 벌이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지대 개편의 지시는 당시 열악한 통신 수단 때문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1951년4월23일,

북에서 지대 개편 지령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423부대를 조직하여 내려 보냈으나,

충청북도 속리산에서 충북 도당 부위원장인 송명현에게 전달된 지령이

지리산에 도착한 것은 거의 11950년10월이 되어서였다.

따라서 이현상이 남부군을 해체하고 4지대로 개편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1951년 중반에,

한국전쟁은 남과 북이 38선에서 일전일퇴의 공방을 거듭하며 장기전으로 접어들었다.

1951년7월7일부터는,

휴전 회담도 시작되었다.

조선 노동당은 남한 지역에서 제2전선 역할을 수행하던 빨치산 유격대 체제를

당 사업을 위주로 하는 지구당 체제로 개편하기로 결정했다.

1951년8월1일,

노동당은 중앙 정치 위원회를 열고 지금까지의 빨치산 투쟁을 평가하고 지구당으로의 개편을 지시했다.

하지만 중앙당 정치위원회의 결정서(94호)는 당시 별다른 연락 수단이 없었고,

효과적 통신 유지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남한의 빨치산들에게 즉시 전달되지 못하였다.

1952년 중반에,조직 개편이 이루어졌다.

94호 결정이 가장 늦게 전달된 곳은 이현상이 통제하고 있던 지리산이어서 제5지구당은

1952년10월에 비로소 조직되었다.

제5지구당 구성을 위한 회의에서 이현상은 김삼용이 중앙당의 결정대로 제5지구당을 만들어

각 도당을 해체하고 소지구당을 조직할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박영발과 방준표는 중앙당의 지시가 정식 문건이 아니며

도당을 해체하라는 것은 중앙당이 남한 실정을 모르고 결정한 것이라 반대했다.

결국 의견 통일을 보지 못하고 중앙당의 지시와는 달리

도당이 해체되지 않은 상태에서 제5지구당을 조직하게 되었다.

위원장으로는 이현상이, 부위원장에는 박영발이 선출되었다.

당시 38선에서 북한의 인민군,중공군과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던 이승만 정부로서는

무엇보다도 후방의 안정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1951년11월26일,

정부는 전라북도 남원에 '백야전사령부'를 설치하였는데,

사령관은 한국전쟁 중 최고의 야전 지휘관 중 한 사람으로 뽑히는 백선엽 장군이었다.

백야 전사령부의 예하 부대로는 수도 사단과 제8사단을 비롯하여 서남 지구 전투 사령부 등의

3개 사단과 태백산 지구 전투 경찰 사령부,지리산 지구 전투 경찰 사령부 등의 4개 전투 경찰 및

7개 전투경찰대대 등 전체적으로 4개 사단 규모의 병력으로 빨치산 소탕 작전에 나섰다.

1951년12월 초,

제1기 작전이 개시되었는데 지리산 속에 갇힌 빨치산들을 토끼 몰이식으로 포위,

압박함으로지리산 근거지를 분쇄하는 것이었다.

1951년12월19일부터,

시작된 제2기 작전은 지리산 외곽 거점을 소탕하는 것이었다.

1952년1월15일부터,

시작된 제3기 작전은 지리산을 재차 포위,공격함으로써 잔존 세력들을 소탕하기 위한 것이었다.

백선엽의 야전 전투 사령부는 이전의 부대와는 달리 탁월한 전투 역량을 바탕으로

군경 합동 작전을 겨울에 전개하였다.

이 때문에 지리산에 있던 빨치산들은 추위와 기아 그리고 무기의 절대적 열세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빨치산은 기본적으로 보급 투쟁으로 연명하는 데,

토벌군은 이를 막기 위하여 산간 마을,심지어 사찰까지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또한 깊숙한 외딴 산간 마을 입구에는 토벌군 매복조가 잠복하거나 봉쇄선을 쳐놓고 대비 하였다.

그 중에서도 1월17일 부터 18일까지가 최대 격전기였다.

1952년1월 한 달 동안,

백야전사령부의 토벌 공세를 피해 궁지에 몰린 빨치산 부대는 야간을 이용하여 빗점골·,

거림골,신흥 등지에 있던 빨치산이 대성골로 집결하였다.

이곳이 지리산 계곡 중 가장 깊은 협곡 인데다가 지세가 험난해

도피하기엔 적합한 지형 이었기 때문이었다.

토벌대는 신속히 정보를 입수하고 모든 도로를 차단시켜 오직 대성골로 가는 길만 터놓았다.

그리고 수도사단은 대성골에서 무려 10일 동안 엄청난 공세를 가했다.

대성골은 5일 밤낮을 불길에 휩싸였다.

지리산 자락에 살던 사람들은 그때의 불을 하늘에서 떨어진 천불이라고 했다.

수도사단은 빨치산 부대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빨치산들은 토벌군의 공격에 쫓기며 추위와 굶주림의 고통을 견디며

눈 속에서 밤낮 없이 숨어 있거나 쫓겨 다니는 일이 전부였다.

공격이 뜸하면 한 웅큼의 쌀과 바위 틈새에서 떨어지는 물로 겨우 연명하였다.

결국 대성골 전투에서 1천여 명의 빨치산들이 섬멸되었다.

훗날 육군본부의 자료에 의하면,

백선엽의 토벌 결과 5천8백여 명이 사살되고 5천7백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심각한 타격을 입은 빨치산은 거의 괴멸 상태로 치달았다.

그들은 총에 죽고,병에 죽고,얼어서 죽고,굶어 죽어갔다.

매년 겨울을 보낼 때마다 빨치산의 숫자는 현저히 줄어들었고 활동영역도 제한적이었다.

1953년7월27일,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을 때 사실상 빨치산의 주력은 와해되어 있었다.

판문점에서 동족상잔의 참혹한 전쟁은 휴전 협정이 이루어졌지만

지리산 일대에서의 모든 총성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백선엽의 토벌 작전이 빨치산을 거의 괴멸시켰지만,

이현상을 중심으로 하는 빨치산의 핵심 세력이 아직 건재했기 때문에

이승만 정부로서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1953년9월21일,

전투경찰대 2연대 2대대가 남원 아영지서 경찰대와 합동 작전으로

빨치산 제5지구당 문남호(본명 오복덕)를 생포했는데,

그는 이른바 ‘빗점골 회의’에서 이현상 몰락을 결정한 제5지구당 결정서 9호와 10호를 소지하고 있었다.

1953년8월6일,

지리산 빗점골에서 열린 제5지구당 조직위원회 회의에서 채택된 결정서 9호는

반당·반국가적 파괴 암해 분자,종파 분자인 박헌영과 이승엽 반역 도당의 잔재와 영향을 근절

청소하기 위하여 제반 대책을 다룬 것이었다.

지도부의 불합리한 조직 체제 운영과 각 도당 단체들과 유격 부대들에게 사상적, 조직적 혼란과

전투력 약화를 가져온 책임을 이현상에게 돌린 것이었다.

이현상은 제5지구당 위원장이라는 직책에도 불구하고

명백히 자신을 겨냥한 이 같은 자아 비판 요구를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당시 한창이던 북한에서의 남로당계 숙청이 남한의 산중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이때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강등되었다.

사실 이현상의 몰락은 곧 남부군의 파멸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현상은 지리산 빗점골에서 죽은 걸로 알려져 있다.

그는 빨치산 제2병단장,남부군 사령관,조선노동당 제5지구당 위원장을 지내면서

남한 내 빨치산의 최고 지도자로 부상하였다.

1953년 9월까지 이현상은 여순 반란 사건 때 반란군을 지리산으로 이끌고 간 뒤

만 5년 동안 지리산에서 유격 투쟁을 전개하였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현재까지 많은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현상을 잡지 않고 지리산 빨치산을 토벌했다고 할 수 없다.

죽은 이현상이 아닌 산 이현상을 생포하여 데려 오라.”고 말하며 군경의 간부들에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이현상의 사살에 대하여 합동 토벌 작전에 참가했던
국군 소속의 남부지구 경비대 사령부와

경찰 소속의 서남지구 전투 경찰대 사령부 간의 공로 다툼은 유명하다.

결국 군경 합동 조사단이 파견되기도 했는데,

관계 경찰은 태극무공훈장을 받고 국군은 을지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결국 국군은 이현상을 사살하고 경찰이 그 시체를 확보한 것으로 마무리된 셈이다.

최근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의 호위병 출신인 김영태

“이현상 사령관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토벌대에 의해 사실된 것이 아니라 자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현상이 죽고 난 뒤에도 빨치산들은 장기적인 활동을 고려하여 부대를 소규모로 편성하여 운영하였다.

1953년 9월에 들어 지구당은 소규모로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에 빨치산은 주로 지리산 지구, 덕유산 지구, 회문산 지구, 형제봉 지구, 모후산 지구,

전남 동부 지구, 영광, 장흥 지구, 운장산 지구에서 활동하였다.

이에 따라 군의 작전도 지리산, 덕유산, 회문산 등 빨치산의 근거지를 공략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1954년2월,

지리산 지구에는 조국 출판사,지리산 주재당,경남도당,중부 소지구당,남원 임실 군당,995부대,727부대,

야지 공작대,이영회 부대가 있었다.

덕유산 지구에는 전북도당 남부 지도부,순천군당,김제군당,정읍군당,고창군당,부안군당이 있었다.

백아산 지구에는 전남 서부도당,백아산 지구당,광주시당,곡성군당,곽용철 부대가 있었다.

화학산 지구에는 전남 남부주재당,두봉산 소지구당,중부지구 기동대가 있었다.

운장산 지구에는 복수 연대가 있었다.

1954년2월부터3월 말까지,

전투 사령부의 작전이 실시되었는데 여기서 빨치산의 부대장,위원장 등의 많은 지휘관들이 전사하였다.

이로 인하여 빨치산은 다시 조직적 편제를 시도하게 되었고

1954년4월경에,

지리산에는 925부대·727부대·남원군당 등 8개 부대가,백운산에는 전남도당·향미연대가,

덕유산에는 전북도당 등 5개 부대가 있었다.

그 외에는 운양산·자작산·회문산·모후산·화학산 등에 두 개 내지 3~4개의 부대가 존재했다.

1954년4월부터5월까지,

군의 작전으로 인하여 많은 수의 빨치산 전투 부대들이 사라졌다.

1956년7월13일,

전라북도 정읍에서 빨치산 1명을 사살하고 2명을 생포한 일이 있었는데,

이로써 빨치산은 정부의 공식 기록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1963년11월,

지리산에서는지리산 최후의 여자 빨치산으로 알려진 '전순덕'이 내원골에서 총상을 입고 생포됨으로써

지리산 빨치산의 최후를 고했다.

사실 지리산에서의 동족상잔은 민족사의 최대 비극이다.

단순히 이념이 다르다고 해서 살육과 약탈 만행을 저지른 것은 빨치산이든 국군·경찰이든 모두 피해자였다.

그렇지만 작전 중에 누대로 지리산 자락에 삶의 터전을 잡았던 무고한 주민들이 입은 인적·물적 피해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른바 “낮에는 대한민국이요, 밤에는 인민 공화국이다”라는 웃지 못할 비극은

그들이 당시에 얼마나 위험하고 절박한 환경 속에서 살 수밖에 없었는지를 반증해 주고 있다.

지리산 일대의 빨치산들은 본질적으로 병력·식량·무기 등을 자체 조달하여 투쟁하는 무장 단체였으므로

밤이면 민가로 내려와 식량을 약탈하거나 지서·관공서 등을 습격하여 무기와 필요한 부품들을 조달했다.

그들은 군경뿐만 아니라 지주와 우익 인사들, 심지어는 양민마저도 닥치는 대로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현재 전라북도 남원시 노암동에 거주하고 있는 빨치산 출신 이모 노인의 증언에 의하면

전라북도 도당 위원장이었던 방준표가 이끈 빨치산 부대는 마을 이장을 총검으로 살인하고 난 뒤

소주를 마시며 간을 꺼내 씹어 먹었다고 한다.

현재 그 진위는 확인할 수 없으나 당시 남원군 일대에서 빨치산들이 벌인 학살과 보급 투쟁은

산간 주민들의 삶에 엄청난 고통을 주었음을 지금도 노인들의 구전을 통해 알 수 있다.

물론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에 의해서도 양민을 죽이는 일이 빈번하게 있었다.

그들은 빨치산에게 보복하기 위해서 빨치산으로 오인된 양민들을 살해하기도 했는데,

1951년 2월경 대량 양민 학살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이미 널리 알려진 것처럼

1951년 2월 11일 국군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 3대대(대대장 한동석)에 의해

거창군 신원면 대현리, 중유리, 와룡리 등 5개 마을의 부녀자, 노약자, 어린이를 포함한

순수 민간인 719명이 공비와 내통했다는 명목으로 집단 학살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 바로 3일전에는(즉 2월 8일경, 음력설 이튿날) 위 부대에 의해서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유림면 주민 500여 명이 학살당하는 엄청난 참사가 일어났다.

속칭 ‘산청 함양 양민학살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은 아직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고 정

확한 사망자 수도 파악되지 않았다.

남원 지역에서는 '운성지'의 기록에 의하면,

지리산 남원 지구 운봉 4개 읍·면의 인적 피해는 사상자 및 행방불명된 주민을 포함하여

총 270여 명에 달했다.

불타거나 파괴된 건물이 360호, 교량 파괴가 5개소, 가축 등 기타 피해가 1,106점이었다.

지역별 손실 상황을 살펴보면,

살해된 공무원 수는 운봉이 총 57명 중 37명으로 가장 많았고,

전체 사망자는 산내면이 123명으로 총 피해자의 절반에 가까웠다.

물적 피해 역시 지리산에 인접한 산내면이 가장 컸다.

 

 

이제 지리산에 평화가 깃든 지도 반세기가 넘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국민들, 특히 지리산 자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과거를 회상하고

이야기하는 것은 빨갱이로 오인을 받거나 참으로 위험하고 불미스러운 일이었다.

아직도 냉전의 이데올로기가 사람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빨치산 전력이 있었던 70~80세의 노인들은 한 평생 숨을 죽이고 숨어 살아야만 했으며,

그들에게 피해를 당한 우익 인사들의 자손들도 가슴에 적개심을 품고 살아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평화와 용서 그리고 화해가 민족사의 화두가 되었다.

우리는 남북 공존과 평화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

따라서 반세기 전에 왜 우리가 지리산에서 그토록 처절하게 싸워야만 했는가에 대한 해답을 얻어야 한다.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빨치산의 아버지 이현상은 지식 분자였으며 반외세, 반제국주의에 헌신한 인물이었다.

그는 남한 사회에 공산주의 이상향을 건설할 수 있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왜 월북하지 않고 끝까지 지리산에 남아 투쟁했는지 생각해 보면,

그에게 지리산은 단순히 산이 아니라 혁명의 요람이었던 것이다.

이현상은 북한의 김일성 정권에게 이용만 당하고 지리산에서 최후를 마쳤다.

그의 유격대가 대한민국에 입힌 타격은 결코 미화되어서는 안 되지만,

이현상은 일본에 저항한 독립운동가로서 그리고 이념과 실천에 충실한 지식인으로서

한국 현대사에 자리매김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또 이현상을 평가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백선엽 장군이다.

지리산을 두고 두 사람은 너무나 판이한 길을 걸어왔다.

만주 군관학교 출신인 백선엽이 해방 전에 벌였던 반민족 행위는 결코 감추어질 수 없다.

하지만 그는 대한민국 군대를 창설하는 데 주요 역할을 했고

한국전쟁 중 혁혁한 전과를 세운 공로도 인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는 대한민국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이 지리산에서 보여 준 인생 행로는 민족사의 모순이자 비극이었다.

따라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반세기 전에 지리산에서 벌어졌던 비극을

용서와 화합으로 승화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 것이다.

역사는 현재와 미래를 위해 필요한 것이지 그것이 그 자체로만 있다면

박물관에 진열해 놓은 박제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 인천 상륙 작전                    2019.12.16.월요일,맑음

1950년9월15일,

맥아더 장군의 1개 군단병력이 투입된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 UN군은 방어 태세에서 공세 태세로 전환되었다.

1950년6월29일,

서울이 함락되고 북한군의 진격이 가속화되자 한강 방어선을 시찰한 맥아더 장군은

북한군이 남진을 계속할 경우 장차 인천으로의 상륙작전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하였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장군이 한강전선을 시찰하고 복귀한 직후인 1950년7월 첫주에,

그의 참모장 알몬드 소장에게 하달한 지시와 더불어 조기에 계획이 진척되었다.

이 계획은 작전참모부장 라이트 준장이 이끄는 합동전략기획단에 의해 연구되었으며

 ‘블루하츠’라는 작전명이 부여되었다.

이에 따라 그는 미 지상군의 참전이 결정된 나흘 뒤에 이미 일본에 주둔한 미 제1기병사단

으로 7월 하순에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할 수 있도록 상륙훈련을 지시하였다.

1950년7월4일에는,

미 극동군사령부에서 상륙작전을 위한 최초의 공식회의가 소집되었다.

'블루하츠 계획'은 북한군을 38선 너머로 격퇴시키려 기도하고 작전일자를 7월22일로

하였으나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할 유엔군의 병력 부족으로 7월10일 경에 무산되었다.


이후 상륙작전 구상은 비밀리에 계속 추진되고 있었다.

합동전략기획단은 인천,군산,해주,진남포,원산,주문진 등 가능한 모든 해안지역을 대상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결국 이들이 마련한 크로마이트 작전 계획 초안이 7월23일 완성되어 극동군사령부 관계자들에게 회람되었다.

맥아더 사령관이 상륙작전을 계획하자 극동군사령부는 세 가지 안을 제출하여 서해안 중

인천으로 결정하였고 잠정적인 D-Day는 9월15일이었다.

1950년 가을,

인천 해안에서 상륙작전이 가능한 만조일은 9월15일,10월11일,11월3일과 이 날짜를 포함한 전후 2~3일 뿐이었다.

10월은 기후관계상 상륙하기에 늦은 시기로서 가장 적절한 시기는 9월15일로 결정되었다.

맥아더는 상륙작전의 기본 계획을 확정한 후 상륙부대의 편성에 착수하였다.

그리고 8월26일 상륙작전을 담당하게 될 제10군단을 공식적으로 편성하였다.

미 제10군단의 주요 부대는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7보병사단이었다.

미 제7보병사단은 한국에 파병된 다른 부대에 많은 장교 및 기간 요원들을 차출 당하여

그 병력이 부족하자 한국 청년 8,000여 명을 선발하여 일본에서 훈련 시킨 후 배치시켰다.

이들이 바로 '카투사'의 시초였다.

한편 국군으로서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한 부대는 제1해병 연대와 국군 제17연대였다.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맥아더의 계획은 9월9일 미 합동참모본부로부터 최종 승인되었다.

인천상륙에 앞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인천지역에 대한 수로, 해안조건, 방파제 및 북한군 상황에 대한 정보수집 문제였다.

따라서 첩보대를 파견하여 인천연안에 대한 각 섬들과 해안을 정찰하여 관련 정보를 확보

하였다.

당시 인천 지역에는 월미도에 제226 독립육전연대 소속의 400여 명과 제918해안포 연대로 하여금 방어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였으며, 인천시에는 제87연대가 방어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미 제10군단은 북한군의 인천 방어 병력을 약 1,000명으로 추산하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하기에 앞서 상륙 부대는 양동 작전을 전개하였다.

1950년9월5일부터,

북으로는 평양에서부터 남으로는 군산까지,인천을 포함한 서해안의 상륙작전 가능 지역에 폭격을 실시하였다.

1950년9월12일부터는,

미국과 영국의 혼성 기습부대가 군산을 공격하고,

관문인 월미도를 제압하기 위한 폭격이 시작되었다.

1950년 9월14일과 9월15일,

동해안 전대는 삼척 일대에 맹포격을 가하며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었다.

제7합동기동부대는 미 제7함대 세력을 주축으로 한 유엔군 261척의 함정과 미 제10 군단

예하 한국군 2개 연대를 포함한 미군 2개 사단 등 총병력 7만여 명으로 구성된 지상군

부대를 통합 지휘하여

1950년9월15일 02:00시를 기하여,

인천 상륙작전을 개시하였다.

상륙작전은 2단계로 전개되었으며,

제1단계는 미 해군이 함포사격을 가하는 동안 미 해병연대가 상륙하여.월미도를 점령하고

제2단계는 후속하는 부대들이 인천 해안의 교두보를 확보하여 인천시가지 작전을 전개해

   나갔다.



6.25 전쟁             작성일자; 2019.12.16.월요일,맑음

 

1950년6월25일 새벽,

한국 전쟁 혹은 6·25 사변이라고도 불리는 6.25 전쟁은 한반도에서

북한이 소련의 지원하에  북한군이 38˚선 이남의 남한에 남침을 함으로

서울은 3일만에 점령되었고

한달만에 낙동강 부근까지 국군은 후퇴하게 되었다.

이에 미국 주도로 안보리가 열려 유엔군이 파병을 결정하게 되었고,

1950년9월15일의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되찾고 압록강까지 진격하였으나,

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전세는 역전되어 다시 서울 빼앗겼다.

1953년7월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됨으로 3년1개월간의 전쟁은 종식되었고,

남,북한은 휴전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6·25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전후하여 극동 아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펼쳐진 미국과 소련 등 열강의 견제와 타협에서 비롯한 한반도 분단의 결과이다.

1943년11월27일,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영국·중국 은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 시키기로 합의했으며,

 

1945년2월.

얄타 정상회담에서 미국·영국·소련는 미국·영국·중국·소련 등 4개국에 의한 일정기간의

신탁 통치를 거친 후 한국을 독립 시키기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1945년8월8일,

 

 

미국은 소련의 조기 참전을 요청했으나 지연하여오다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을 투하한 지

2일 후 대일 선전 포고와 더불어 만주 일대에서 한반도를 향하여 진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군은 한반도에 제일 가까운 부대가 '오키나와'와 '괌'일대에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북위 38선을 미군과 소련군의 경계선으로 정하고,

1945년8월22일,

소련군은 북쪽인 평양에 진주했고,

1945년9월8일,

군 제24사단은 인천에 상륙하여 2일 후 남쪽인 서울에 진주했다.

이로써 한반도는 미군과 소련군에 의해 분할 점령하는 분단 국가가 되었다.

 

미·소 양측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분할 점령하고 있는 양측의 의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미국은 북위 38˚선을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한 잠정적인 것으로 설정한 반면,

소련은 북위 38˚선을 정치적인 경계선으로 항구화시켜 그 북쪽을 소비에트화 하려고 했다.

 

미군과 소련군은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를 구성하고

1946년3월과 1947년5월,

서울에서 두 차례의 회의를 개최했으나 합의점을 찾지 못함에 따라 한반도 문제는

1947년9월에 국제연합(UN)으로 이관되었다.

 

UN에서는 한반도에 'UN한국임시위원단'을 구성하여 제2차 총회에서 통일된 한국정부

수립을 위해 1948년5월31일까지 한반도 전역에서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하였다.

1948년1월,

UN 한국 임시 위원단이 선거를 실시하기 위하여 한반도에 도착했으나 소련군 점령하의

북한 지역에는 소련의 입국 거부로 선거를 치룰수 없었으며,

1948년5월31일,

남한은 'UN 한국 임시위원단 의 감시하에 선거를 실시하여 의회가 구성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고 행정부를 구성하였고,

1948년8월15일,

독립을 선포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했다.

1948년8월25일에는 이북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고,

1948년9월9일,

 

 

 

'조선 인민공화국이라는 공산정권 발족을 선포했다.

이로써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목적으로 설정한 북위 38˚선이,

제2차 세계대전 후 형성된 냉전 체제로 대립하는 양극 체제의 국경선으로 변했다.

북위 38˚선을 경계로 남.북한에 2개의 독립된 정부가 들어서면서,

남.북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38˚선을 통한 북한 무장공비의 침투사건과 남한 후방지역에서의 공산주의자(빨치산)들에 의한 전복활동으로 나타났다.


1946년9월의 서울 철도파업,10월 대구 폭동,1948년 제주 4·3사태와 그 후의 한라산 일대에서의 게릴라전 등을 비롯하여, 1948년10월20일의 여순 반란과 지리산·태백산 및 오대산

일대에서의 빨치산 활동 등으로 남한의 치안은 극히 불안한 상태에 놓였다.

1948년11월17일에는 오대산 부근 북한군의 침투로부터 시작하여 북한의 남침 전까지 38°선 일대에서도 10여 차례의 북한 공산군에 의한 침투가 있었다.

이와 같은 무장 세력에 의한 전복 활동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북한의 김일성은

전면적인 남침으로써 무력에 의한 남북 통일을 성취하기로 결심하게 된 것이다.

 

1945년10월,

 

소련은 북한에 진주한 직후부터 조직적으로 북한의 군사력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설 군사 조직을 해체하고 보안청를 설치한 것을 시작으로,

1946년1월,철도 보안대 창설,8월 보안 기간 요원훈련소 창설,

1947년5월,보병 2개 사단과 1개 혼성여단 및 인민군 총사령부 창설을 거쳐,

1948년2월8일,육군 3개 사단과 해·공군의 기본체제를 바탕으로 '조선 인민군을 창설했다.

1948년12월25일,

조선인민군 창설 후 남한에 대한 북한의 군사적 우위를 확신한 소련은,

북한 주둔 소련군의 철수를 발표함과 동시에 미국도 소련과 마찬가지로 남한 주둔 미군을

철수시킬 것을 촉구했다.

1948년 후반부터 1949년8월 사이에,

중국 공산군 소속 한인 의용군 2만여 명의 편입으로 북한군 규모는 더욱 확대되었고,

1949년9월부터 남침 전까지,

소련으로부터 군사 원조로 북한은 병력과 전차,항공기 등을 보유하게 되었다. 

북한이 소련과 중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아 그 세력을 급격히 팽창시키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남한을 둘러싼 정치적·외교적 상황은 매우 불리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1948년5월14일,

북한이 남한에 대한 송전을 중단하자 남한 산업 시설은 가동이 불과하였다.

1949년9월까지,

중국 공산군은 국민당군(장제스 군대)을 몰아 내므로써 사실상 중국 내전을 종결지었다.

1949년3월,북한의 김일성은 소련을 방문해 조·소 경제 문화 협정을 체결했고,

1950년2월,

소련과 중국은 우호동맹 및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북한은 양 후원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을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다.

 

한편, 1948년부터 시작된 미군 철수로,

한반도 내의 남북한간의 군사력 균형은 붕괴되기 시작했으며 북한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었다.

 

북한으로 하여금 남침을 할 수 있도록 자극했던 외교적인 사건이 계속되었다.

 

아래의 사건은 북한이 남침할 경우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판단을 하기에 충분했다.

첫째는,  

1949년3월,맥아더 장군이 영국 기자와의 회견에서 한반도가 미국의 방어선 밖이라는

것임을 암시하는 설명을 한 것과

둘째는,

1950년1월9일,

소액의 대한 군사 원조법안이 미 하원에서 부결된 사건은 국민이 한국 방어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셋째는,

1950년1월12일,

워싱턴의 신문기자 클럽에서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의 연설에서 극동에서의 미국 방어선은 한반도를 배제,대륙으로 부터 후퇴를 뜻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공표함에 따라 미국이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시 개입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하는 듯한 징후였다.

 

1950년6월25일,

북한이 남침을 감행하자 미국은 UN 안보리에 침략 문제를 제기했다

UN 안보리는 상임 이사국인 소련 대표가 불참한 가운데 북한의 '침략행위'로 규정하고

적대 행위의 즉각적인 중지와 북한군의 38˚선 이북으로의 즉각적인 철수 결의안을 통과

시켰다.

1950년6월27일,

북한이 6월25일의 결의를 무시하고 남침을 계속함에 따라 UN 회원국들은 북한군을 격퇴

시키기 위해 한국 정부에 가능한 모든 원조를 제공하겠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 행정부와 트러먼 대통령은 한반도 내에서의 분쟁이 타이완이나 기타 지역으로 확산

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미국 제7함대로 하여금 타이완과 중국 본토 간의 전투 행위를 차단

시키도록 하면서 한반도의 상황에 대처하려 했다.

트러먼 대통령을 보좌하는 국무부 및 국방부의 참모들은 미국의 참전을 위한 어떠한 의견도 제시하지 못하고 단지 상황만을 보고할 따름이었다.

1950년6월27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해·공군만을 제한적으로 사용하여 북한군을 남한에서
격퇴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1950년6월29일.
맥아더 장군은 한국 전선을 시찰한 후 지상군 투입이 불가피하다는 상황 보고를 했다.
1950년6월30일,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장군에게 지상군의 투입을 명령함으로써 미국의 해·공군도 북한
지역에까지 작전지역을 확대했다.

1950년7월7일,

UN 안보리는 UN회원국으로 부터 UN군 사령관 임명의 요청에 의해

1950년7월8일,트루먼 대통령은맥아더 장군을 UN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역사상 처음으로 UN군이 구성되고,

미국,영국,프랑스,오스트레일리아,캐나다,뉴질랜드,남아프리카공화국,터키,타이,그리스,

네덜란드,콜롬비아,에티오피아,필리핀,벨기에,룩셈부르크 등 16개국이 병력과

장비를 지원했으며,단일 지휘 체계하에서 국제 경찰 기능을 수행하게 되었다.

 

북한군의 남침이 개시된 1950년6월25일부터  인천 상륙 작전 개시 이전인1950년9월15일

 

 

까지 한국군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계속 퇴각했다.

사태의 급박성을 인식한 맥아더 장군은 긴급히 '스미스 '중령이 이끄는 특수 임무 부대를 

오산 일대에서 북한 공산군의 남진을 저지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 뒤를 이어 '딘'소장이 이끄는 미 제24사단과 '워커'중장의 미 제8군 휘하부대의 계속적인 투입으로 북한군의 남진 속도를 둔화시킨 결과,

 

1950년8월경에는 낙동강을 경계로 하는 부산 교두보의 방어선을 구축하여 체계적인 방어를 할 수 있었다.

1950년9월15일,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함으로 UN군은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되었다.

1950년9월28일,

서울을 탈환하고 경인지역을 장악한 UN군은 보급로와 후퇴로를 차단함으로써 북한군의

주력은 거의 궤멸상태에 빠졌으며 UN군은 급속도로 북진을 계속했다.

UN군이 급속히 진격하여 38˚선에 접근하게 되자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맥아더 장군에게

북한군을 섬멸하도록 명령한 데 이어

 

1950년9월30일,

트루먼 대통령이 북한으로의 진격을 승인했으나 맥아더 장군은

1950년10월1일,

한국군만을 38°선 이북으로 진격시키고 기타 UN군은 38˚선에서 대기했다가

1950년10월7일,

UN 총회에서 UN군의 북한 진격을 허용하는 결의안이 통과된 후 북진을 했다.

1950년10월20일,UN군은 평양을 탈환하고

1950년10월26일,일부 부대가 압록강변에 도달했다.

1950년11월부터 1951년7월,
휴전 회담을 개시하기까지 북한군의 붕괴로 UN군이 북한 전지역의 점령이 임박하자
'중국 인민 지원군'이 개입함으로써 전쟁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중국 인민지원군의 '인해전술'로 인해 UN군은 북한으로부터 철수해

1951년1월4일,

서울이 또다시 공산군의 수중에 들어갔으나,미국 공군의 공격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 중국 인민지원군은둔화되어 UN군은 평택과 원주를 연결하는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1951년2월,

UN 총회에서는 공식적으로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했다.

1951년1월말,

차량 사고로 사망한 '워커'장군의 후임으로 미국 제8군사령관에 부임한 '리지웨이'장군은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해 서울을 재탈환하고,

1951년3월31일,

중동부 전선에서는 38˚선을 횡단하여 북진을 계속했다.

이때 맥아더 장군은 중국인민지원군이 개입한 이상 전장을 한반도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중

국 본토에 대한 공격을 주장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이와 같은 행위는 대통령 대한 도전으로 간주한 트루먼 대통령은

1951년4월11일,

맥아더 장군을 모든 직위에서 전격 해임하고 '리지웨이'장군을 그 후임으로 임명했다.

이때 부터 UN군측과 공산군측은 전쟁의 제한에 관한 묵시적인 합의하에 상호 대공세를

피함으로써 전선의 이동이 없는 진지전의 형태로 전환되었다.

 

휴전 회담으로 인한 소강 상태로 양측의 전선이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 이르렀을 때 미국은

한반도 내에서의 전력 낭비는 유럽에서의 소련의 침공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판단 아래

전투 종결을 희망했으며, 북한이나 중국의 의도와도 어느 면에서는 일치하는 것이었다.

1951년6월23일,

UN 주재 소련 대표 '말리크'가 미국에서의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교전 당사자들이 38˚선을

경계로 전쟁 이전의 위치로 복귀할 것을 제의했다.

미국은 이를 휴전을 희망하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리지웨이 장군으로 하여금

1951년6월30일,

공산군측에 대하여 휴전 제의 방송을 하도록 했으며, 공산군측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1951년7월10일 부터,

개성에서 휴전 회담이 개시되었으나 회담 장소는 판문점으로 변경되었다.

 

휴전 회담중 가장 논쟁은

첫번째,

모든 외국군은 한반도에서 철수하자는 북한의 주장과 반대하는 UN군측의 주장이었다.

두번째,

양측의 경계선 문제로서 공산군측은 북위 38˚선으로의 복귀를 주장한 반면 UN군측은

현 전선의 유지를 주장했다.

세번째,

포로 교환 문제로서 공산군측은 모든 포로는 무조건 송환시킨다는 원칙을 주장한 데 반해,

UN군측은 희망자만 송환시킨다는 원칙을 제시한 것이다.

UN 군 포로 17만1,000명 가운데 약5만명은 북한이나 중국 등으로 송환되는 것을 거부했다.

포로 송환 문제로 휴전 회담은 결렬 직전까지 갔으며 8개월 간 회담이 중단되기도 했으나,

1953년1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1953년3월,

소련의 스탈린의 사망으로 회담은 재개되고 포로 교환 문제도 합의에 도달했다.

양측은 현재의 군사 분계선을 경계로 각각 2km씩의 비무장 지대를 설정하게 되었다.

1953년7월11일,

마침내 이승만은 휴전에 동의하였다.

1953년7월27일,

휴전 협정이 이루어짐으로써 3년1개월에 걸친 전쟁은 중지되고 휴전이 성립 되었다.

1954년4월,

제네바에서 남한과 UN 참전 16개국,북한과 중국 및 소련이 참석한 가운데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한 정치 회담이 개최되었으나,

한국과 UN 참전국측은 UN 감시하에 남북한 자유 총선거 실시로 민주적인 통일 정부수립을 주장한 데 반하여,

공산군측은 오로지 주한 UN군의 철수만을 주장함으로써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1954년6월,

회담은 결렬되었고,

남북한은 항구적인 평화가 아닌 휴전 상태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0.6.25 새벽에서의 남침으로 부터 1953년7월27일의 휴전협정까지

 

 

6·25전쟁은 3년1개월간 계속되었으며,인명피해는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450만 명에 달한다. 그 가운데 남한은 민간인 약100만 명을 포함한 약200만 명이며,

공산진영은 100만명의 민간인을 포함하여 약 25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한국군의 군인 전사자는 22만7,748명,미군이 3만3,629명,기타 UN군이 3,194명이며,

중국인민지원군과 북한군의 정확한 전사자수는 확인할 수 없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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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5월30일,

제2대 국회 위원 선거을 뽑는 선거가  치러졌으며 임기는 4년 이다.

  

총선 직전의 국회의 당별 국회위원 수는 

민주국민당이 69석,

대한국민당이 66석,

일민구락부가 35석,

무소속이 27명 등으로 여권이 상대적으로 우세하였다.


1950년초,

이승만은 예정되어 있던 총선에서 패배할 것으로 예상되자 12월로 연기하려고 했다.

또한 적자 예산의 편성을 시도하였다.

이에 대해 1950년4월 초순,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이이 엄중 경고하였다

결국, 이승만은 선거를 예정대로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경쟁률은 의원정수 210명에 대하여 무려 2,209명이 출마하여 평균 10.5대1로 역대선거 중 가장 높았다.

과열 경쟁의 결과는 제헌 국회 총선에 불참하였던 남북 협상파와 중간 계열의 참여 그리고 대한민국을 수립한 지 2년간에 조성된 정치적 과열 현상이기도 하다.

정파별로는 39개 정당,사회단체가 참가했는데,

이 가운데 여당격인 대한국민당소속이 165명으로 가장 많았고,

야당인 민주 국민당 소속이 154명이었다.

이에 반해 10명 이내의 후보를 낸 정당·사회단체가 30개에 달했고,

이 중에는 1명의 후보자를 낸 정당·사회단체가 18개로서 정당 및 사회단체의 극심한 난립현상을 보여주었다.

무소속은 전체 입후보자의 68.5%인 1,513명으로 제헌국헌의원선거의 417명보다 무려 1,096명이나 증가하였다. 

 

정당·단체별 당선자는

무소속이 126명으로 총정원의 60%를,

대한국민당과 민주국민당이 각각 24명을 당선시켰다.


제2대 총선에서 제헌의원의 재선율은 불과 15.5%로 31명에 불과하여

역대 선거 중 재선율이 가장 낮았다.

제헌 의원은 임기가 2년밖에 되지 않아서 의원으로서 업적을 남기기에는 너무 짧은 기간이기도 했다.

이승만 지지자들의 당선이 크게 줄어들고, 무소속이 전체의석의 60%인 126석을 차지하여 이승만 정부를 위협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이승만으로 하여금 자신에게 불리한 간선제에서 직선제 개헌운동을 전개하게 만들었으며,

결국 부산 정치 파동을을 거쳐발췌개헌을 하기에 이르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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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지 개혁법 실시            2019.12.16.월요일,맑음

1950년3월에 제정되어 공포된 농지 개혁법은

1950년5월에 농지 개혁법이 실시되었다.


제헌 국회에서 제정하여 농지를 농민에게 적절히 유상 분배 함으로써 자영농 육성과 농업

생산력 증진으로 인한 농민 생활의 향상 목적으로 제정된 대한민국의 법안이다.

농지개혁법에 의한 농지 매수.분배 사업은 미군정의 귀속 농지 매각 사업과 함께 대한민국 농지 개혁의 주요 사업 중 하나였다.


조선 후기에 조정은 지방 지주 세력에 대한 통제가 약해져 소작료가 수확량의 절반을 넘게 된 상황을 개탄하곤 하였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소작료가 80%를 넘기는 경우까지 나타났다.

1945년11월,

해방 이후, 군정 법령이 공포되면서 일본인의 개인 재산 및 동양척식회사를 위시한 일본계 회사의 재산은 미군정 산하의 신한공사로 몰수 이관되어 관리되었다.

이때 신한공사는 소작료를 기존의 1/3 수준으로 부과하였다.

한편 미군정 당국은 귀속 농지 매각을 위해 1947년 대대적인 농업 조사를 실시하였다.

1948년3월,

미군정은 군정 법령인 '신한공사해산령'을 공포하면서 2정보 미만의 소유 상한을 두고 해당 귀속 농지의 신한공사 소작농에게 우선적으로 불하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농지의 매각 가격은 1년 생산량의 3배로 산정하여 매년 소출의 20%를 15년간 현물로 납부하도록 하였으며,등기를 통해 소유권이 일본인에서 곧바로 한국인으로 이전되는 형태였다.

귀속 농지의 매각 사업은 신설된 미군정 산하의 중앙토지행정처에서 담당하였다.


당시 경제 구조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었고,농민 대다수가 소작농이었기에

농지개혁 문제는 농민들에게 있어서 관심이 높았었다.

미군정은 소작료 3분의 1로 낮추고 소작권 부활만 했을 뿐 구체적인 농지 및 근본적인 토지개혁에는 거의 지지부진 했을뿐만이 아니라 미군정은 현상 유지 하기만을 원하면서 농지

개혁에 소극적이었기에 미비했다.

1946년,

반면, 38선 이북에서는 일찍이 북조선임시 인민위원회에서  토지및 농지개혁이 토지 상한선 5정보로 무상 몰수,무상 분배되어 제도가 실시되어 대한민국에서의 늦은 농지및 토지개혁은 농민들에게 있어 불만을 고조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농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농지 개혁이었기에 

1949년,

제1공화국은 농지 개혁법을 제정하게 된다.

이 농지 개혁법이 처음 제정 되었을 당시, 지주 세력들이나 농민 세력들 양측 다 반발,불만의

목소리가 높았다.

1950년,

3월의 농지개혁법 개정안 및 동법 시행령과 4월의 농지 개혁법 시행 규칙이 공포되면서

법적,제도적 기반이 마련되고, 5월에 농지 개혁법이 실시되었다.

그러나,1950년6월25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농지 개혁법의 전면 실시는 연기되었다.

1951년,

귀속 농지 특별 조치법이 시행되면서 1948년 분배된 귀속 농지도 농지 개혁법의 상환조건을 준용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되자 귀속 농지와 매수 농지의 분배 및 상환 업무를 별도로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1952년4월,

농림부 직제 개정을 통해 기존의 농지국(내국)과 귀속 농지 관리국(외국)을 통합하여

'농지관리국'을 설치하여 농지 개혁을 담당하게 하였다.

1953년,

본격적으로 시행하여 개인에 불하하도록 실시하였다.

1950년에서 1970년 까지 농지 개혁법에 의해 매수.분배된 농지는 34만 2,365정보로 전국 농지 230만여 정보의 약 15%에 해당한다.

1994년에,

 '농지법'이 제정됨으로써 농지 개혁법은 폐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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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경근                2016.12.16.월요일,맑음  

장경근(생졸; 1911년5월18-1978년7월25일)은 평안남도 용천 에서 태어나 부천에서 성장

하였다.

판사 출신의 정치인이며 법조인인 장경근은,

제1공화국 내무부 장관과 제3,4대 민의원 의원을 지냈다.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에 재학하던 중 일본고등 문관시험에 합격하였다.

학교를 졸업하고 경성 지방법원과 검찰국의 사법관 시보로 법조 생활을 시작하여,

경성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 판사를 지냈다.

광복 후 미군정 시기에 경성 지방법원장에 임명되었다가,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제정되면서 일제 강점기 친일파이자 고위 관직 경력자에 대한 여론이 부정적인 쪽으로 흐르자 사임했다.

초대 대통령이던 이승만은 1949년에 장경근을 내무부 차관보와 차관으로 발탁했다.


장경근은 이승만을 설득해 허락을 받고 '반민특위'를 해체하게 만들게했다.

장경근이 내무차관으로 재직 중 그의 지시로 친일 경찰 세력들은 반민특위를 습격하였고,

이 문제가 제헌 국회에서 논의 되었을 때 반민특위 습격은 불법적인 유사 경찰 조직을 무장

해제하기 위한 정당한 것이었다고 답변했다.

또한 반민특위는 공산주의 단체라고 답변을했다.

분노한 국회는 장경근의 퇴진과 처벌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반민특위는 상해 및 공무집행 방해죄로 그를 고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반민특위는 크게 위축되었고,

1949년9월, 반민법 3차 개정을 거쳐 결국 중단되었다.

1960년3.15 부정 선거에 깊이 관여했다.

당시 직책은 자유당 선거대책 위원회의 기획 위원 겸 상임 위원회 제7부장(정책부장)이었다.

장경근은 경찰력을 동원하는 부정 선거 방법을 기획하여 치안 국장을 통해 하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4.19혁명과 5.16군사 정변이 일어나면서 부정 선거 책임자로 지목되어 구속되자,

재판 계류 중 입원해 있던 병원을 탈출해 일본으로 밀항했다.

이후 18년 동안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지병이 심해지면서 1978년 귀국하였고 귀국 직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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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피살              작정일자; 2019.12.16.월요일,맑음

 

백범 김구는(생졸;1876년(고종 13년) ~ 1949년)는

독립 운동가ㆍ정치가. 유명은 창수(). 호는 백범(), 초호는 연하()이다.

 

 

고종13년 1876년,황해도 해주에서 김순영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이 극빈하여 자습하고,

12세 때부터 한학을 공부,

14세 때 해주에서 시행된 임진 경과에 응시했으나 실패,

17세 때에 소년 훈장이 되고

1893년,18세 때 동학당에 가입하여 동학란에 참가했다.

 

신천 청계동의 안중근 아버지인 안 진사를 알게 되어

그 곳에 이주하여 고능선으로부터 많은 교도를 받고

전라도 남원에서 안 진사가 대영웅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김형진과 함께 중국 유람을 위해 출발,

만주에서 김이언의 의병대에 입대한 후,

강계의 왜인 토벌에 참가했으나 실패하여 청계동에 귀환했다.

 

1896년2월,안악 치하포 나루턱 이화보 집에서 일본군 육군 중위 쓰지다를 미우라 고로로 오인하여

살해,체포되어 인천 감리영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8월26일,사형 직전에 왕의 특명으로 죽음을 면했다.

1898년3월,탈옥하여 삼남 각지를 방랑 후 공주 마곡사에 들어가 한 때 승려가 되고 법명을 원종이라 했다.

이듬 해 고향에 귀환하여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종사했으나

1909년11월,이토 히로부미 저격 혐의로 검거되어 한 때 해주 감옥에 투옥되었다.

1910년 국권침탈 직후,남만주 무관 학교 설립 기금을 모집하다가 안명근 사건으로 체포되어 17년 징역 언도를 받았으나

1915년에 출옥하여,

1919년 3.1운동 후,상하이에 망명하여 임시 정부 경무국장,내무총장(1923),국무령(1927)을 역임했다.

1932년,이봉창,윤봉길 두 의사 사건을 지휘하고,

국민 정부 주석 장개석의 요청에 의해

난징에서 면회,뤄양의 중국 군관 학교에 한인 무관 양성소의 특설 허락을 받아 사관 1백여 명을 양성했다.

1940년,충칭에서 임시 정부 주석에 취임하고

시안에 한국 광복군을 설치하고 미국 교관을 청하여 광복군 장병들을 훈련하는 동시에 입국 항전을 계획했다.

1945년8월15일,후 귀국하여 한국 독립당 창설과 함께 당수가 되고 민주의원 총리,민족통일 총본부 부총재 등을 역임했다.

1947년,과도 정부에는 반대하고 남북 협상에 참가하였다.

1949년6월26일,서울 서대문구의 서울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피살 되었다.

국민장이 거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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