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탁통치 반대 비상 국민회의(이하 국민회의)       2019.11.15.금요일,맑음

1946년 2월 17일              

국민회의는 1946년2월1일,우익 진영이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와 비상정치회의주비회를 통합하여

조직한 단체이며,약칭 국민회의 로도 불린다.


비상정치회의주비회는 임시정부가 임정법통론에 입각하여 소집·구성한 예비 입법기구이자 통일전선체였다. 김구는 1946년 1월 4일, 3단계 정부수립 방안과 함께 비상정치회의의 소집을 공표하였다. 그에 따르면 우선 임시정부를 확대·강화하고, 곧 구성될 비상정치회의를 통해서 과도정부를 수립(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과도정부 아래 민주정신에 따라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정식 독립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비상정치회의주비회는 1946년 1월 20일, 18개 단체 대표로 조직되었다. 좌익인 조선공산당이 초청되지 않았고, 조선인민당과 조선독립동맹은 참석하지 않았다. 임시정부 산하 5개 정당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우익 중에서도 이승만과 한민당 등이 배제되었다.

임시정부는 비상정치회의(주비회)가 과도적 최고 입법기관으로서 임시의정원의 직권을 계승하며 임시의정원 의원은 비상정치회의의 당연직 성원이 된다고 밝혔다. 회장으로 안재홍, 부회장으로 한시대, 서기에 박윤진·장준하가 선임되었다.

비상정치회의 주비회는 1946년 1월 21∼23일 연속하여 회의를 개최하였고, 안건은 비상정치회의 조직 조례와 의사·회원 선정에 관한 초안을 심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23일 이승만이 주도하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합류시켜 비상국민회의주비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또 같은 날 임시정부 내의 좌익이라 할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이 탈퇴하였다. 24일엔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탈퇴하였다.

국내 좌익뿐만 아니라 임시정부 내부의 좌익마저 제외된 상황에서 이승만이 개입하고 최고 지도자가 됨에 따라, 상황은 비상정치회의주비회의 구성 시점에 상정된 임시정부 중심의 통일전선을 강화한다는 당초 목표와 다르게 전개되어갔다. 비상국민회의의 정식 발족은 1946년 2월 1일 이루어졌다.



1946년1월20일,비상정치 회의 제1차 주비회를 개최하였다.

우익진영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상징인 명동 성당에서 좌익 세력이 불참한 가운데

1946년2월1일,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비상정치회의 주비회를 통합하여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하였다.

1946년2월13일에는 이승만,김구,김규식,여운형,조소앙,안재홍등 28명의 최고정무위원직을 선출하였다.

장면은 가톨릭 대표로 선출되었는데

이 최고 정무위원회는 1946년2월14일, 미군정의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으로 개편되었다.

초대 의장은 이승만이 맡았다.

이에 대응해 좌익 진영에서는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을 구성하였고 주도 단체는 박헌영의 조선 공산당이다.


약산 김원봉                  작성일자;  2019.11.15.일요일,맑음

 

 

약산 김두봉(생졸;1898년9월28일-1958년10월?)은

독립운동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이었으며,

해방 후에는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 및 군사부장을 맡았다.

 

경남 밀양읍에서 아버지 김주익과 어머니 이경념이다.

김원봉이 4살 되던 해 어머니가 사망하여 아버지는 영양 천씨인 천연이와 재혼하여 8남2녀를 두었고,

재혼한 천연이가 사망하자 박순남과 재혼해서 3명의 이복 남동생이 태어 났다.

계모 천연이가 낳은 이복 남동생들 중 김봉철,김봉기,김덕봉,김구봉은

보도 연맹원으로 몰려서 한국 전쟁 중 처형되었다.

 

중앙 중학교 재학 중 김원봉은 김약수(김두전),이여성(이명건) 등과 교류하였으며,

중앙 중학교를 먼저 졸업한 김두봉,윤치영과 나중에 졸업하게 된 무정 등을 만나 친분관계를 쌓았다.

1916년,경성 중앙중학교를 졸업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평안도 출신의 최석진이라는 사람의 딸과 결혼하였으나 사망한 후 독립 운동가 박차정과 재혼하였다.

 

1919년11월19일,길림성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여

단장에 선임된 김원봉과 단원 안건호,곽재,김옥,윤시위,윤치영,이성우,가애우,한봉인,신철휴,배동선,서상락,

권준 등 12명과 함께 일본의 침략 본거를 파괴할 것을 결의하고 

국내의 기관 파괴,요인 암살 등 여러 차례 무정부주의적 항일 투쟁 활동을 벌였다.

1931년을 기점으로 일본의 중국 침략 본격화에 맞서 만주,베이징,상하이 등의 일부 독립운동가들은

분열된 해외운동 진영의 통일과 항일 역량 규합을 도모하기 위해 김원봉의 조선의열단을 중심으로

1932년10월부터 상해에서 여러 차례의 준비 회의를 갖고 ‘한국대일전선 통일동맹’을 조직하였다

 

1932년10월12일, 한국독립당 대표 이유필·송병조·김두봉,조선혁명당 대표 최동오,

한국혁명당 대표 윤기섭·신익희, 조선의열단 대표 한일래·박건웅, 한국광복동지회 대표 김규식 등이

상하이에서 회합하였다.

1932년10월23일, 준비위원회를 열어 연합체의 명칭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으로 정하였다.

1933년 재미 대한독립당·대한민족총회, 뉴욕 대한인교민단·하와이 대한인국민회·하와이 대한인동지회

·재미 대한인국민회총회 등이 가맹하였다.

또 중국측 항일운동과도 제휴하여 중한민중대동맹을 조직하였다.

 

일본군이 상해를 침공한 뒤에는 활동무대를 난징으로 옮겼으나,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은 애초에 각 단체 간의 연락 및 협의기관이라는 조직적 제약이 뚜렷했기 때문에

한국독립세력의 통일기관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김원봉을 비롯한 조선 의열단 인사들을 중심으로

‘통일동맹’을 기초로 한 새로운 정당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중국 황푸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1935년6월29일 신당창립총회를 개최하였고,

1935년7월5일 조선의열단·한국독립당·신한독립당·조선혁명당·대한인독립당이 연합한 민족 혁명당이 조직 되었다.

'조선민족 혁명당'을 이끌고 중국내 민족 해방 운동을 주도했다.

 

그러나 노선이 달랐던 까닭에 통합 추진 당시부터 알력다툼이 있었다.

일례로 당명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할지 ‘한국민족혁명당’으로 할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기도 했다.

또 민족혁명당 결성의 모체가 되었던 단체들이 표면적으로만 해체성명서를 발표하고 실

제로는 여전히 독자적 대외활동을 이어나갔고.

서로 간의 혁명노선의 차이로 결성 7개월 만에 조직 내의 분열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이 분열은 구성원간의 사상적 차이와 함께, 독립운동방략의 차이에 대한 갈등,

그리고, 양대세력인 김원봉과 지청천(池靑天) 양파의 대립에서 파생된 결과였다.

특히 김원봉파인 조선의열단의 전횡과 독단이 문제가 되었는데,

그 결과 한국독립당의 박창세·조소앙과 신한독립당의 민병길·조성환·홍진 등이

1935년 9월을 전후하여 탈당하여,

민족혁명당의 기세는 크게 저하되었다.

당 잔류 인물들은 1937년 1월, 난징에서 대표대회를 개최하여 조직을 '민족혁명당'으로 결의하고,

김원봉·지청천·윤기섭성주식·신익희·윤세위·김상덕·최동오·천병일·유동열·김홍서·이경산·정팔선

정일붕 등을 위원으로 선출하였다.

 

전당대표대회에서 총서기로 선출된 김원봉은 당권을 장악하고 당명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바꿨다.

 이로써 갈등은 심화되었다.

1937년 3월 청당(淸黨)과 당적제적 등의 갈등 속에서 지청천 일파가 탈당하여 4월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자,

김원봉의 조선 의열단이 조선 민족 혁명당을 독점하는 상황이 되었으며,

루거우차오사변 이후 중국 공산당의 활동에 자극을 받은 인사들이

김원봉의 중간적인 좌경 노선을 비판하며 탈당하여 '조선청년전위동맹'을 조직하였으며,

공산주의자 왕지연 등도 재차 탈당함으로써 조선민족혁명당의 세력은 더욱 약화되었다.

김원봉 등은 이러한 당세의 약화를 만회하기 위하여 1939년부터 단일당운동을 제창하여

1943년 2월 제7차 전당 대회에서 이전의 탈당분자, 청년전위동맹과 해방동맹이 합쳐 이루어진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한국독립당 통일동지회·조선혁명당 해외전권위원회 등과

당의 개조형식으로 합병하여 임시정부의 양대 정당의 하나가 되었다.

이들은 공·농 소자산계급을 당의 주요 기초로 하고

국민헌법 제정과 보통선거제 실시, 토지개혁·남녀평등,

그리고 민족자유·정치자유·경제자유·사상자유의 4대 자유에 입각하여

인류평화를 실현하는 신민주공화국의 건립을 표방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의 조직은 대표회의 중앙집행위원회 및 그 예하의 각 부로 되어 있다. 

각부의 책임자는 주석 김규식, 총서기 김원봉, 비서처주임 신기언, 조직부장 김인철, 선전부장 손두환,

재정부장 성현원, 통계부장 신영삼, 미주총지부 주석 김강, 미주총서기 이경선 등이었다.

조선민족혁명당은 조선민족해방자동맹·조선혁명자연맹 등을 규합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다.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원봉은 조선 의열단을 중심으로

1938년 연맹 산하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여 중국의 항일투쟁 대열에 함께 참가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1941년 이전까지는 대체로 임시정부의 반대입장에 서서 무시 또는 무관심의 태도를 가지고 취하였다.

그러나 유럽에서 폴란드·네덜란드·프랑스 등의 망명정권의 수립과 임시정부를

한국인의 상징적인 정권으로 인정하여 지원하려는 중국 당국의 정책결정태도를 보고,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여,

1942년 10월 25일 제34차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선전부장 김규식과 학무부장 장건상(張建相) 2인을 임시정부에 입각시켜 본격적으로 임시정부에 참가하였다.

 

1944년 4월 제36차 임시의정원회의에서는 김규식을 부주석으로 하는 4인을 입각시켜

임시정부 안에서 명실상부한 제1야당이 되었다.

이와 같은 좌우합작은 조선의용대의 광복군 합류 및 인도연락대의 파견 등 많은 활동을 남기기도 했으나,

다시 임시정부 내부에서의 좌우의 파벌싸움에 따른 심각한 내부문제를 야기하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1945년10월10일,당은 충칭에서 제9차 전당대회를 개최하고,

전국 통일적 임시연합정부건립을 주장하는 당면 강령 및 정책을 제정하였다.

1945년12월, 김규식·김원봉·성주식·김상덕은 중앙 대표단의 명의로

환국하는 동시에 당 중앙부도 서울로 옮기게 되었다.

1946년2월, '조선 공산당'이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했을 때 5명의 의장 가운데 1인이었다.

1946년3월까지는 관망하는 태도를 취하다가 4월부터 활동에 착수하여,

6월 말 김원봉을 위원장, 성주식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인민공화당으로 개칭하였다.

이들은 서울 및 지방에 지부조직과 상해·로스앤젤레스·하와이 등지에

총지부를 설치하는 조직결성에 노력하는 한편,

김원봉·성주식 등이 임시정부 국무회의에 참여하여

좌우의 통일합작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하여 노력하였고,

그것이 실패하자 비상국민회의를 탈퇴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가하였다.

 

1947년무렵 부터, 일제 강점기 형사 출신 경찰에게 체포되어 고문과 수모를 받은 끝에 

1948년 남북 협상 때 월북,

1948년8월, 북한 최고 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에는 국가 검열상에 올랐다.

1958년10월, 북한의 '최고 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된 후 숙청되었다.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에 만주로 이주해 성장기를 보냈다.

1918년 금릉대학에 입학했고,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하여 단장에 선임되었다. 중국 황푸 군관학교를 졸업했으며

1930년경 베이징에서 안광천과 함께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결성했고, 레닌주의 정치학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설립·운영했다.

1930년대 후반 조선민족혁명당을 지도하면서 우리나라 민족주의 운동의 한 축을 이루었고,

   김구의 한국 국민당과 서로 대립하면서 중국 관내지역 민족 해방운동을 주도했다.

   또한 '조선의용대'라는 강력한 군사조직을 결성하기도 했다.

1939년 5월에는 김구와 전국 연합전선협회를 결성했고,

단일당 결성에 합의하여 7당 통일회가 열렸으나 결국 실패했다.

1941년 6월 조선 민족 혁명당은

제6회 전당 대표대회에서 임시정부 참가를 결의했고 '조선의용대'도 광복군 제1지대로 합편 되었으며,

1942년 광복군 부사령에 취임하였다.

1944년 임시정부 제38차 회의에서 국무의원 및 군무부장에 올랐다.

8·15해방 후 12월에 귀국, 여운형 등을 중심으로 한

'조선 인민공화국'이 결성되면서 중앙인민위원 및 군사부장을 맡았다.

1946년2월, 조선 공산당이 좌익단결을 위해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했을 때

5명의 의장 가운데 1인이 되었으며, 중앙위원직도 맡았다.

1946년10월 발생한 대구 10월 사건 등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구금된 이래,

1947년까지 일제 강점기 형사 출신의 경찰에게 체포와 고문, 수모를 겪었다.

이후 계속되는 좌익 단체에 대한 탄압과 테러에 실망과 좌절이 반복된 후

1948년 남북협상 때 월북,

그해 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에는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1952년 5월 북한 노동상을 맡았으며

1956년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중앙위원이 되었다.

1957년 8월 최고인민회의 제2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에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에 올랐다.

또한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의 중앙위원 및 중앙위원회 상무위원직을 맡았다.

그러나 1958년 10월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무위원 부위원장직에서 해임되었으며,

그후 숙청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 민주주의 민족전선                    2019.11.14.목요일,맑음

1946년1월19일 발기되어 2월19일에 결성을 본 민주주의 민족전선은

1946년2월8일에 발족한 '대한 독립 독촉국민회'(독촉 국민회)와 '한국 민주당 등 우익계 세력과 대항하여

정식으로 국민 대표기관이 구성될 때까지 과도적 임시국회의 기능을 맡아 과도 정부 수립을 담당하며,

미.소 공동위원회의 임시 정부 조직 사업에 있어서 남한의 유일한 민족 대표로서의 참여를 의도하여

조선공산당과 조선인민당에 의하여 결성한 남한의 모든 좌익계 정당 및 사회 단체의 총집결체이다.


의장에 여운형,허헌,박헌영,김원봉,백남운,

부의장에 백용희,홍남표,이여성,김성숙,장건상,,윤기섭,성주식,정노식,유영준,한빈이 선출되었고,

상임위원으로는 의장단을 포함하여 73명, 중앙위원은 전국에서 305명이 선출되었다.

사무국장 이강국,조직부장은 홍덕유,선전부장은 김오성,문화부장은 이태준,재정부장은 정노식,기획부장

최익한,외교부장 강진이 맡았다.


강령은 조선 공산당의 주장과 같았으며,

1946년2월8일에 발족한 '북조선 임시 인민위원회'의 당면 목표와 같은 것들이었다.


민주주의 민족 전선의 결성은

1946년2월1일,김구 중심의 '비상 국민회의'와

1946년2월14일, 미군정의 자문기관으로 발족한 '대한국민 민주의원'에 대응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으며,      좌우익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다.


우익계의 '비상 국민회의'와 좌익계의 '민주주의 민족 전선'은

서로 과도적 임시 국회의 역할을 자임하며 과도 임시정부의 수립을 목표로 하였다.

우익계는 '신탁 통치 반대', 좌익계는 '신탁 통치 찬성'의 태도를 취하였다.

따라서 서로 매사에 있어서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급기야 광복 뒤 처음 맞이한 1946년 3.1절 기념행사

마저 따로 거행하였다.

'민주주의 민족전선'은 조직 형태로는 좌익 단체들의 민주적 연합체였으나 실질적으로는 조선공산당에

의하여 움직여졌다.


조선 정판사 위폐사건(1945년10 20일부터 6회에 걸쳐 조선 정판사 사장 박낙종 등 조선 공산당원 7명이

위조 지폐를 발행한 사건)을 계기로 남조선 노동당의 주요 간부들이 북한으로 탈출하고 지하로 들어가게

되자 이 단체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1949년6월27일,명목상으로는 평양에서 '북조선 민주주의 민족통일전선'과 통합하여 '조선 노동당'의

외곽 단체인 '조국통일 민주전선'으로 되어 있다.






 

⊙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                   2019.11.14.목요일,맑음

1945년10월23일,'대한독립촉성 협의회'는 조선호텔에서 한국 민주당,한국 국민당,조선 공산당,건국동맹 등

각 정당 단체 200여 명이 모여 조직한 대한민국의 단체이다.

안재홍 제안으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라 칭하고 이승만이 만장일치로 회장에 추대되었다.

통일 문제 등에 이승만에 일임한다는 의견을 표하였다.

다만, 공산당,학병동맹,청년단체 대표자 등 4,5단체에서는 상당히 강경한 의견도 있어 인민공화국이 우리

나라의 총의에 가깝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1945년11월2일,천도교 강당에서 이승만의 사회로 안재호.여운형,박헌영,이갑성 등 각 정당 단체들이 모여, 조선의 즉시 독립, 38도선 철거, 신탁 통치 절대반대를 선언하였다.


회장으로 추대된 이승만은 좌.우익을 총괄하는 남한 내 유일한 정치 체계가 되어 자신이 민족 통일 전선의

최고 지도자로 부각되기를 의도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지지를 내세우면서도 임정이 정부 자격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귀국한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강조하고 임정 귀국 전까지 독촉의 조직을 완성하고 좌익 세력을 독촉에 포섭하는데

전력을 기울였다.


1945년11월23일,이승만은 임정 제1진의 서울 도착을 계기로 독촉의 중앙 집행위원회 구성을 서둘렀다.

1945년11월28일부터 시도된 중앙 집행위원회 구성은 전형위원 선출 방식에서 갈등을 드러냈다.

   여운형은 전형위원 7명 중 5명이 한국 민주당원이라면서 퇴장했다.

   조선 공산당 측 인사는 한 명도 없어 '인민당'과 '조선 공산당'은 전형위원회에 불참했다.

   임정 세력은 독자적인 활로를 꾀했다.

1945년12월13일, 자신이 지명한 전형위원들을 소집하여 13일과 14일 이틀 동안 전형위원회를 진행했지만

   좌파 세력은 독촉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임정 세력 역시 임정 인사들을 독촉에 참여시킨 후 임정을 해산한다는 이승만의 계획을 받아 들일 수

   없었고 특별 정치위원회라는 독자적인 조직화 방안을 모색했다.

   탁치 정국 하인 1946년1월15일, 독촉은 제2회 중앙 집행위원회를 개최하고 임정 세력 중심의 비상정치

   회의를 흡수한다고 발표했다. 독촉을 주축으로 비상정치회의를 흡수해서 임정을 수립한다는 계획이었다.

1946년1월18일, 독촉은 비상 '국민회의'로 개칭하고 이승만에게 최고 위원 선출권을 일임했다.

   반탁 투쟁을 반소·반공과 연결시키면서 임정 세력을 흡수하고자 한 것이었다.

   독촉은 좌.우익 망라,임정 포섭 등 처음 계획에는 실패했지만 최고 지도자로서 이승만을 부각시킨다는

   데에는 부응했다.

  '대한 독립 촉성 협의회'는 1945년10월23일에 창설하여 1946년1월18일 해체된다.

조국의 완전독립을 달성할 때까지 강력하면서도 영구적인 조직체를 만들 목적으로,

이승만 중심의 1946년1월18일 해체된'대한 독립 촉성 협의회'와 

김구 중심의 기존의 반탁 운동 기관인 '신탁통치 반대국민총동원 중앙위원회'가 통합하여

1946년2월8일에 '대한 독립 독촉국민회'(독촉 국민회)가 발족된다.


범국민적인 반탁 운동과 미.소 공동위원회의 활동 반대,좌익 운동의 봉쇄 등이 행동 목표였으므로

좌익 진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우익 진영의 대표적 정치 단체였다. 

1946년6월, '민족 통일 총본부'로 개편되어 재발족하였다.

총재 이승만,부총재 김구.김규식,고문에 권동진,김창숙,함태영,조만식,오화영,회장에 오세창이 추대되었다.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           2019.11.14.목요일,맑음

모스크바 3상회의(1945년12월16일-27일)에서 한반도에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미소 공동위원회'가 한반도의 신탁 통치안을 협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945년 12월 28일,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진영이 긴급 국무회의를 열어 각 정당,종교단체,언론기관 대표

   들을 초청하여 비상 대책회의를 개최하여 신탁 통치 반대 활동을 펼치려는 목적에서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의 구성을 결의하였다.


위원장으로 권동진,부위원장으로 안재홍과 김준연이 추대되었으며,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는 임시 정부 국무 위원회의 지도를 받도록 배치되었고,

그 장정위원 9인 모두가 임시 정부 요인이었다.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는 구성 당일 연합국 4국(미,영,소,중국) 원수에게 신탁통치 반대 결의문을 발송하였고, 12개항의 '반탁 국민 동원 실행방법'을 결의하고 이의 이행을 전국민에게 호소하였다.

다음 날인 1945년12월29일, '중앙위원회의'를 열어서 임시 정부의 즉각적 주권 행사를 건의하였다.

12월 31일에는 전국적 총파업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1946년2월8일, 이승만이 지도하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통합하여 '대한독립촉성국민회'로

재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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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스크바 3상 회의                 2019.11.14.토요일,맑음

모스크바 3상 회의(모스크바 삼국 외상회의)는

1945년12월16일부터 26일까지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영국,소련의 외무장관 회의며,

   임시정부 수립을 선결 과제로 제시하였지만,

   미국이 제시한 신탁 통치 제안도 받아들인 일종의 절충안이었다.

1945년12월27일, 미국과 소련은 첨예한 대립을 보였으나  3국 외무장관은 4개조로 구성된 합의문을 작성

   발표하였다.

     (1) 조선 임시 민주주의 정부 수립,

     (2) 정부 수립을 위한 남조선 미합중국 사령부,북조선 소련 사령부의 대표자들로 구성 공동 위원회 설치,

     (3) 공동 위원회는 최고 5년 기간의 신탁 통치안,

     (4) 남,북 조선과 관련된 행정 조치의 구체화를 위해 2주 내 미국과 소련 사령부 대표 회의 소집 등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과는 좌익과 우익의 극심한 분열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 통치가 합의 되었다는 사실이 처음 알려진 1945년12월28일 부터

처음에는 좌,우파가 강력한 반탁 의사를 표명했다.

 

1945년12월28일, 모스크바 삼상 회의에서 미.소 양국은 한국의 독립 정부 수립을 위해 

    '미.소 공동 위원회'를 결성하기로 합의 되었다. 

1946년1월16일에는 덕수궁 석조전에서 '한국의 신탁 통치'와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제반 문제 해결을

   위하여 예비 회담을 가진 후, 1946년3월20일,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 회의가 서울에서 열렸다.



1945년12월30일, 임시정부가 주도하여 결성한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에

   공산당 당수 박헌영은 중앙위원이 되었고,이튿날인 31일, 상무위원에 선정되었다.

1946년1월1일,하지 장군이 박헌영을 만났을때는 강경한 반탁 입장이었으나

1946.1월3일,다시 만났을 때는 입장이 정반대로 바뀌어 있었다고 한다.

1946년1월2일, 공산당 중앙 위원회가 모스크바 3상회의 합의 사항을 지지(찬탁)하기로 결정했는데,

   신탁통치에 대한 책임 비서 박헌영의 입장은 1월 2일에 정반대로 바뀐 것이다.

   지난 연말까지도 반탁을 강력히 표명하던 여러 좌파 단체들도 1월 2일을 기점으로 찬탁으로 바뀌었는데,

   미군정도 이러한 일에는 소련의 의사가 작용했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1946년1월3일에 예고 되었던 좌익들의 반탁 집회는 집회 당일날 지도부에 의해 찬탁 집회로 돌변하여

   진행되어 일대 혼란이 벌어졌다.


   우익 진영의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 세력은 반탁 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실제로 처음부터 신탁 통치안을 제시한 나라는 미국이었다.

   좌익은 처음엔 미온적이었으나,나중에 소련측의 요구에 의해 모스크바 회의의 내용의 전문이 공개된 후,  

   회의의 결과를 받아들인다는 입장에 섰고,우익은 즉각적으로 반탁 운동을 전개하였다.

   좌익 계열은 임시 정부 건설 원칙에 강조를 했었으며,

   우익 계열은 신탁 통치 반대에 강조하면서 서로 대립하게 되었다.


북한정권 수립 후 문화 선전성 제1부상(차관)을 지낸 소련파  장상진은

해방후 북한 정권 수립 이후 

"북한은 해방 후 20년 역사를 위조했다"며

"일본군을 내몬 뒤 소련 정부에서 북한 정권 수립을 지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해방 후 원산항에 귀국하는 김일성을 맞으러 간 것도 장상진이었다.

소련은 고려인을 통해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

1945년부터 1965년까지 북한에서 발표된 모든 연설문은 다 소련에서 작성됐어요."라고 폭로했다.

2010년에는 1945년12월29일,소련군 중좌 페드로프가 소련군 진주 후 북한의 황해도와 평안남북도 등

3개도를 방문 조사한 뒤 만든  보고서에서 

258 소총 사단장인 '드미트리예프 대좌'는 “조선사람은 35년간 노예로 있었다. 좀 더 노예로 있게 하자”는 말도 남겼다고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고당 조만식     작성일자; 2019.11.14.목요일,맑음

 

고당 조만식(植;생졸; 1883.2.1-1950.10.18)은 
민족의 사표(師表)였으며,
오산 학교 교사로 시작한 그는 열렬한 애국심과 독립 정신 속에서
'독립 만세 운동','국산품 애용운동'의 선봉에 앞장섰다.
또한 좌.우파가 하나가 되는 신간회 결성에 애썼으며,
광복 후엔 반탁 운동과 민족 자주 독립 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평남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내동에서 창녕 조씨 조경학과 경주 김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7세 때에 한문 공부를 시작해 10년에 걸쳐 사서삼경 등 기초 과정을 배웠다.

15세 되던해 평양에서 포목상,지물상을 꾸러온 그는 5척 단신의 이름난 술꾼이었다.

그러다가 서당에서 알게 된 한정교를 만나 기독교 장로교에 입교했다.

이후  23세의 만학으로 평양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1906년,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나 세이소쿠 영어 학교에 입학했고

1910년, 메이지 대학 전문부 법학부에 입학했다.

1913년, 명치 대학 졸업 후

남강 이승훈의 초청으로 민족 교육의 근원지인 오산 학교의 교사가 되었고

2년 후에는 교장으로 승진했다.

사감까지 겸하여 주야 24시간을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거했다.

선생의 풍모는 매우 독특해서 5척 단구에 머리를 빡빡 깎아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었다.

국산품을 애용을 실천하며 장차 이 나라의 큰 일꾼을 양성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1919년3월1일,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교장직을 사퇴하고

평남 강서군 사천 장날의 독립 만세 운동 시위를 주동하였으며,

그 후 상하이로 망명하려다가 일경에게 붙잡혀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르게 되어

교육계를 떠나게 되었다.

1920년,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 운동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어 사회 운동을 전개했다.

물산 장려운동이 시작되자

전국으로 번져가서 각 지방에서는 '물산 장려회''토산품장려회' 등으로 단체 조직이 속출하고

금주,금연 동맹과 같은 도덕적인 성격의 운동으로까지 파급되었다.

1921년부터 11년 간에 걸쳐

평양 YMCA 총무로서 기독교 정신과 민족 부흥의 정신을 일체화 함으로

항일의 선봉에 서서 일제 말기 신사 참배,궁성 요배 등 강요에 결연히 반대했다.

1923년, 일제에 대항할 수 있는 유능한 인재 양성을 위하여

'조선 민립대학 기성회'를 주축으로 벌어진 '조선 민립대학' 설립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27년, 민족의 좌.우 합작으로 결성된

'신간회(조선일보 계열의 이상재,권동진 등이 사회주의자들과 협력하여

1927년2월15일 YMCA 회관에서 탄생)'가 서울에서 조직되자 

신간회 중앙위원과 평양시 지회장

1937년, 이광수가 조직한 '수양 동맹회'와 안창호의 '대성학교' 및 물산 장려운동 관련자들의

친목 모임인

1945년8월17일, 평양에서 '조선건국 준비평남 위원회'를 조직하여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1945년8월18일, 평남 도청에서 있었던 일본군 항복 조인식에 입회하는 형식으로 참석하였다.

1945년8월26일, 소련군은 '건국 준비위원회'와 '공산당'을 평양 호텔로 초청하고

연립정권을 수립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때 조만식은 위원장이 되고 건국준비위원회 측에서도 여러 명이 조각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 연립 정권의 수립은 이때까지는 조만식의 지도력을 배제할 수 없어

이뤄진 부득이한 방편이었다.

한편 공산당의 위상은 날로 커지고

소련 군정과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인민 위원회'는 날치기 행정으로 세력을 키워나갔다.

1945년11월3일, 조만식은 평양에서 '조선 민주당'을 창당했다.

1945년12월28일,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조선에 대한 5년 간의 신탁통치안이 결정되자

1946년1월2일, 소련 군정에 신탁통치 불찬성의 뜻을 통고하고

한편으로는 반탁 성명을 발표했다. 동시에 '인민 위원회' 위원장 직도 사퇴했다.

1946년1월6일,소련 군정 및 김일성 일파와의 최후 담판은 결렬되고 

인민위원회 건물 현관을 나서자 

소련군에 의해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에 실려 고려 호텔로 연행되어 갔다.

그 후 공개적인 장소에서 선생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던 것이다.

 

 

 ⊙ 원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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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산 장덕수                 2019.11.13.수요일,맑음

황해도 재령군 출신.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설산(雪山). 아버지는 장붕도(張鵬道)이고, 어머니는 김현묘(金賢妙)이다. 1900년 서당에서 1년간 한문 교육을 받았고, 1901년부터 1906년까지 사립연의학교(私立演義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12년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여 1916년에 졸업하였다. 192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오레곤(Oregon)주립대학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이듬해 컬럼비아(Columbia)대학에 입학하여 1936년에 “영국의 산업화 정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김철수(金綴洙 : 부안) 등과 교유하였다.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진남포이사청의 급사와 평양부청의 고원(雇員)을 지냈으며, 1911년 판임관 시험에 합격하였다. 1912년부터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在日本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에 가입하고, 이 단체의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하는 편집부 부장과 평의원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1916년 김철수(金喆壽)를 비롯한 한인 유학생과 중국 학생들과 함께 일제의 타도와 새 아시아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7년 귀국했다가 이듬해에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여운형 등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1918년 여운형과 함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결성에 참여하고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의 한국대표로 파견하였다. 1919년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주거제한 처분을 받았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과 더불어 초대 주필과 부사장이 되었다. 1920년대 초반 조선교육회 평의원, 조선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 조선노동공제회 의사부원을 비롯한 사회단체의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 동아일보사가 발기한 재외동포위문순회강연단의 일원으로 여러 차례 강연하였으며, 사회주의 계열의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에도 참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부터 미국 유학을 하는 동안 미주지역 한인유학생의 단체인 북미한국유학생총회(北美韓國留學生總會)에 가입하여 부회장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특히 이승만의 지지 단체인 동지회(同志會)에 가입하고, 1927년부터 허정(許政) 등과 함께『삼일신보』의 창간 및 발간을 위해 노력하는 등 이승만을 지지, 지원하는활동을 벌였다. 이 무렵 그는 박은혜(朴恩惠 ; 훗날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장)과 결혼했다.

1936년 귀국하여 이듬해 김성수의 도움으로 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거쳐 교수로서 활동하였으며, 『동아일보』의 취체역도 겸직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에 연루되었으며, 이후 일제가 사상전향 공작을 위해 조직한 친일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의 간부를 지내면서 기관지『사상보국(思想報國)』의 발간을 주도하였다.

1939년 일제 전시체제하에서 관변 통제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1940년 이 단체를 확대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參事) 등을 맡았고, 야마도쥬쿠(大和塾)에 참여하였다. 1941년 일제 침략전쟁의 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과 이사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해방 직전에 결성된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 지도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친일단체의 활동과 더불어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지원하는 내용의 글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고, 여러 차례 강연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송진우·김성수 등과 함께 한국 민주당의 창당을 주도하고, 외교부장과 정치국장 등을 지내며 당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승만이 주도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비상정치회의를 포함한 우파 세력의 정당과 주요 정치단체에 참여하여 대표적인 이론가로서 활동하였다. 1946년 10월에 실시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에 서울에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으나, 선거 무효로 다시 실시된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1947년 12월 2일 자신의 집에서 현직 경찰과 학생에게 암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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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9월6일 창당장덕수를 중심으로 송진우,김성수,김도연,허정,윤치영,유억겸,윤보선 등이

초기에는 중국의 임시정부를 지지하여 그 법통을 옹호하였으나, 점차 이승만의 ‘단정() 주장’과 임시정부측의 ‘단정 반대’로 정치적 의견과 노선이 갈라지자 이승만()의 단정론을 지지, 임시정부를 지지했던 태도를 바꾸었다. 그 후 단정인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하여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나 이승만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스스로 야당화하였다. 1945년 9월 6일 여운형의 존선건국준비위원회가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고려민주당, 조선민주당, 한국국민당,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환영국민대회 등 민족주의 민주세력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였다. 이들은 민족진영의 모든 세력을 하나로 통합할 것에 합의하고, 9월 16일 천도교회관에서 100여 명의 대표자들이 모인 가운데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영수로서 이승만() ·김구() ·이시영() 등을 추대하고 당수격인 수석총무에 송진우()를 선정하였다. 그외 각 부서에 당시 대다수의 민족지도자들이 배치됨으로써 어떤 정치단체보다도 유수한 민족주의 민주세력들이 총집결되었다. 이 때부터 이들은 우익 민족진영의 대표적인 정치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미군정에 적극 참여하여 실질적으로 미군정의 여당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 후 이승만의 단정 추진을 적극 지지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해 크게 활약하였으며, 5 ·10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이승만이 이끌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55명에 이어 두 번째인 29명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정치활동면에서는 오히려 한민당이 주도권을 잡아, 한민당이 미리 법학자 유진오()로 하여금 기초하게 한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토대로 헌법제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마무리 단계에서 이승만의 반대로 대통령중심제 헌법으로 변경되면서 이승만과의 심각한 대립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정부수립을 위한 초대 조각인선에 한민당이 소외되면서 이승만에 대한 본격적인 반감과 대립이 심화되었다. 한편 한민당은 5 ·10총선거를 거치면서 당세가 위축되자 소장파 의원들과의 대립으로 인기가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당의 기본 정치목표의 하나인 ‘내각책임제에 의한 책임정치 구현’을 위해서는 동조 정치세력을 규합, 헌법개정을 통하여 그를 성취해야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하여 한국독립당 당원이던 ‘대한국민회’의 신익희() 세력과 ‘대동청년단’의 지청천() 세력을 규합하여 1949년 2월 10일 한민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하였다. 그 후 한민당 세력은 여러 차례의 이합집산과 우여곡절을 거듭하면서 민주국민당, 민주당, 신민당, 민중당, 민정당, 신한당 등으로 변천하면서 한국정당사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민당은 한국의 지주계층, 자산가 및 지성인들이 주축이 된 정당으로서 자연히 그 이념과 성격은 보수적이며 민족주의적 자유민주주의를 근본으로 삼는 정치세력이었다. 이들은 중국에서 돌아오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 그를 중심으로 한 과도정부의 수립을 통한 조국의 정통성 있는 정부수립과 건국을 당면목표로 삼았다. 그들은 창당대회에서의 결의문을 통해 “우리는 독립운동의 결정체이고, 현재 국제적으로 승인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에 소위 정권을 참칭()하는 일체의 단체 및 그 행동은 그 여하한 종류를 불문하고 이것을 단호히 배격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 후, 단정 수립 문제를 놓고 임정계통과 정치적 견해가 달라짐에 따라 한민당은 임정 지지의 노선을 버리고 이승만의 단정노선을 지지, 적극 참여하여 대한민국 건국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한민당의 정강()은 자주독립국가의 기약, 민주주의 정체의 수립, 근로대중의 복리 증진, 민족문화의 앙양과 세계문화에의 공헌, 국제헌장의 준수와 세계평화의 확립 기약 등 한국 헌법의 기본방향을 정강으로 채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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