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회의는 1946년2월1일,우익 진영이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와 비상정치회의주비회를 통합하여
조직한 단체이며,약칭 국민회의 로도 불린다.
비상정치회의주비회는 임시정부가 임정법통론에 입각하여 소집·구성한 예비 입법기구이자 통일전선체였다. 김구는 1946년 1월 4일, 3단계 정부수립 방안과 함께 비상정치회의의 소집을 공표하였다. 그에 따르면 우선 임시정부를 확대·강화하고, 곧 구성될 비상정치회의를 통해서 과도정부를 수립(임시정부를 해체)하고, 과도정부 아래 민주정신에 따라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정식 독립정부를 구성한다는 것이었다.
비상정치회의주비회는 1946년 1월 20일, 18개 단체 대표로 조직되었다. 좌익인 조선공산당이 초청되지 않았고, 조선인민당과 조선독립동맹은 참석하지 않았다. 임시정부 산하 5개 정당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우익 중에서도 이승만과 한민당 등이 배제되었다.
임시정부는 비상정치회의(주비회)가 과도적 최고 입법기관으로서 임시의정원의 직권을 계승하며 임시의정원 의원은 비상정치회의의 당연직 성원이 된다고 밝혔다. 회장으로 안재홍, 부회장으로 한시대, 서기에 박윤진·장준하가 선임되었다.
비상정치회의 주비회는 1946년 1월 21∼23일 연속하여 회의를 개최하였고, 안건은 비상정치회의 조직 조례와 의사·회원 선정에 관한 초안을 심의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23일 이승만이 주도하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합류시켜 비상국민회의주비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또 같은 날 임시정부 내의 좌익이라 할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이 탈퇴하였다. 24일엔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탈퇴하였다.
국내 좌익뿐만 아니라 임시정부 내부의 좌익마저 제외된 상황에서 이승만이 개입하고 최고 지도자가 됨에 따라, 상황은 비상정치회의주비회의 구성 시점에 상정된 임시정부 중심의 통일전선을 강화한다는 당초 목표와 다르게 전개되어갔다. 비상국민회의의 정식 발족은 1946년 2월 1일 이루어졌다.
1946년1월20일,비상정치 회의 제1차 주비회를 개최하였다.
우익진영은 한국 가톨릭교회의 상징인 명동 성당에서 좌익 세력이 불참한 가운데
1946년2월1일,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비상정치회의 주비회를 통합하여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하였다.
황해도 재령군 출신. 본관은 결성(結城). 호는 설산(雪山). 아버지는 장붕도(張鵬道)이고, 어머니는 김현묘(金賢妙)이다. 1900년 서당에서 1년간 한문 교육을 받았고, 1901년부터 1906년까지 사립연의학교(私立演義學校)에서 수학하였다.
1912년 일본에 유학하여 와세다(早稻田)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여 1916년에 졸업하였다. 192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오레곤(Oregon)주립대학에 입학했으나 중도에 그만두고, 이듬해 컬럼비아(Columbia)대학에 입학하여 1936년에 “영국의 산업화 정책”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김철수(金綴洙 : 부안) 등과 교유하였다.
1907년부터 1912년까지 진남포이사청의 급사와 평양부청의 고원(雇員)을 지냈으며, 1911년 판임관 시험에 합격하였다. 1912년부터 일본에서 유학하면서 재일본동경조선유학생학우회(在日本東京朝鮮留學生學友會)에 가입하고, 이 단체의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을 발간하는 편집부 부장과 평의원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1916년 김철수(金喆壽)를 비롯한 한인 유학생과 중국 학생들과 함께 일제의 타도와 새 아시아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신아동맹당(新亞同盟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7년 귀국했다가 이듬해에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여운형 등을 만나 독립운동의 방략을 논의하였다. 1918년 여운형과 함께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의 결성에 참여하고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의 한국대표로 파견하였다. 1919년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운동의 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주거제한 처분을 받았다.
1920년 『동아일보』 창간과 더불어 초대 주필과 부사장이 되었다. 1920년대 초반 조선교육회 평의원, 조선청년회연합회 집행위원, 조선노동공제회 의사부원을 비롯한 사회단체의 간부로 활동하였으며, 민립대학설립기성준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 동아일보사가 발기한 재외동포위문순회강연단의 일원으로 여러 차례 강연하였으며, 사회주의 계열의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에도 참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부터 미국 유학을 하는 동안 미주지역 한인유학생의 단체인 북미한국유학생총회(北美韓國留學生總會)에 가입하여 부회장 등을 맡아 활동하였다. 특히 이승만의 지지 단체인 동지회(同志會)에 가입하고, 1927년부터 허정(許政) 등과 함께『삼일신보』의 창간 및 발간을 위해 노력하는 등 이승만을 지지, 지원하는활동을 벌였다. 이 무렵 그는 박은혜(朴恩惠 ; 훗날 경기여자고등학교 교장)과 결혼했다.
1936년 귀국하여 이듬해 김성수의 도움으로 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거쳐 교수로서 활동하였으며, 『동아일보』의 취체역도 겸직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사건에 연루되었으며, 이후 일제가 사상전향 공작을 위해 조직한 친일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時局對應全鮮思想報國聯盟)의 간부를 지내면서 기관지『사상보국(思想報國)』의 발간을 주도하였다.
1939년 일제 전시체제하에서 관변 통제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과 1940년 이 단체를 확대 개편한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참사(參事) 등을 맡았고, 야마도쥬쿠(大和塾)에 참여하였다. 1941년 일제 침략전쟁의 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과 이사로 활동하였으며, 1945년 해방 직전에 결성된 국민의용대 조선총사령부 지도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친일단체의 활동과 더불어 일제의 침략전쟁을 지지·지원하는 내용의 글을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고, 여러 차례 강연하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송진우·김성수 등과 함께 한국 민주당의 창당을 주도하고, 외교부장과 정치국장 등을 지내며 당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승만이 주도한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와 대한독립촉성국민회·비상정치회의를 포함한 우파 세력의 정당과 주요 정치단체에 참여하여 대표적인 이론가로서 활동하였다. 1946년 10월에 실시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 선거에 서울에서 입후보하여 당선되었으나, 선거 무효로 다시 실시된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1945년9월6일 창당장덕수를 중심으로 송진우,김성수,김도연,허정,윤치영,유억겸,윤보선 등이
초기에는 중국의 임시정부를 지지하여 그 법통을 옹호하였으나, 점차 이승만의 ‘단정(單政) 주장’과 임시정부측의 ‘단정 반대’로 정치적 의견과 노선이 갈라지자 이승만(李承晩)의 단정론을 지지, 임시정부를 지지했던 태도를 바꾸었다. 그 후 단정인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하여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나 이승만과의 정치적 갈등으로 스스로 야당화하였다. 1945년 9월 6일 여운형의 존선건국준비위원회가가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하자, 고려민주당, 조선민주당, 한국국민당,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국환영국민대회 등 민족주의 민주세력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였다. 이들은 민족진영의 모든 세력을 하나로 통합할 것에 합의하고, 9월 16일 천도교회관에서 100여 명의 대표자들이 모인 가운데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하였다. 그리고 영수로서 이승만(李承晩) ·김구(金九) ·이시영(李始榮) 등을 추대하고 당수격인 수석총무에 송진우(宋鎭禹)를 선정하였다. 그외 각 부서에 당시 대다수의 민족지도자들이 배치됨으로써 어떤 정치단체보다도 유수한 민족주의 민주세력들이 총집결되었다. 이 때부터 이들은 우익 민족진영의 대표적인 정치세력으로 자리잡게 되었고, 미군정에 적극 참여하여 실질적으로 미군정의 여당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그 후 이승만의 단정 추진을 적극 지지함으로써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위해 크게 활약하였으며, 5 ·10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이승만이 이끌던 ‘대한독립촉성국민회’의 55명에 이어 두 번째인 29명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정치활동면에서는 오히려 한민당이 주도권을 잡아, 한민당이 미리 법학자 유진오(兪鎭午)로 하여금 기초하게 한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토대로 헌법제정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마무리 단계에서 이승만의 반대로 대통령중심제 헌법으로 변경되면서 이승만과의 심각한 대립이 시작되었다. 게다가 정부수립을 위한 초대 조각인선에 한민당이 소외되면서 이승만에 대한 본격적인 반감과 대립이 심화되었다. 한편 한민당은 5 ·10총선거를 거치면서 당세가 위축되자 소장파 의원들과의 대립으로 인기가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당의 기본 정치목표의 하나인 ‘내각책임제에 의한 책임정치 구현’을 위해서는 동조 정치세력을 규합, 헌법개정을 통하여 그를 성취해야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리하여 한국독립당 당원이던 ‘대한국민회’의 신익희(申翼熙) 세력과 ‘대동청년단’의 지청천(池靑天) 세력을 규합하여 1949년 2월 10일 한민당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민주국민당(민국당)’을 창당하였다. 그 후 한민당 세력은 여러 차례의 이합집산과 우여곡절을 거듭하면서 민주국민당, 민주당, 신민당, 민중당, 민정당, 신한당 등으로 변천하면서 한국정당사에 있어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민당은 한국의 지주계층, 자산가 및 지성인들이 주축이 된 정당으로서 자연히 그 이념과 성격은 보수적이며 민족주의적 자유민주주의를 근본으로 삼는 정치세력이었다. 이들은 중국에서 돌아오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 그를 중심으로 한 과도정부의 수립을 통한 조국의 정통성 있는 정부수립과 건국을 당면목표로 삼았다. 그들은 창당대회에서의 결의문을 통해 “우리는 독립운동의 결정체이고, 현재 국제적으로 승인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에 소위 정권을 참칭(僭稱)하는 일체의 단체 및 그 행동은 그 여하한 종류를 불문하고 이것을 단호히 배격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그 후, 단정 수립 문제를 놓고 임정계통과 정치적 견해가 달라짐에 따라 한민당은 임정 지지의 노선을 버리고 이승만의 단정노선을 지지, 적극 참여하여 대한민국 건국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한민당의 정강(政綱)은 자주독립국가의 기약, 민주주의 정체의 수립, 근로대중의 복리 증진, 민족문화의 앙양과 세계문화에의 공헌, 국제헌장의 준수와 세계평화의 확립 기약 등 한국 헌법의 기본방향을 정강으로 채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