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립신문 창간및 독립협회 발족         2019.09.19.목요일,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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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관파천과 이범진        작성일자; 2019.08.19.목요일,맑음

 

1894년 조선은 갑오개혁이 일어 나자 청에 원군을 요청했고,

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톈진 조약(1858년 제2차 아편전쟁)을 근거로 조선에 침입했다.

갑오 농민 전쟁이 진정된 후 청,일 양군의 철병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거부했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했으며 7월 25일 청군을 공격했다.

일본군이 평양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청군은 후퇴했다.

이후 일본은 조선 내정에 적극 간섭했으며 이에 농민 봉기가 일어 났으나 우금치에서 일본에게 패했다.

황해 해전에서 청군을 격파한 일본군은 진저우성과 뤼순을 점령했다.

청은 전쟁에 참패했고 1895년4월17일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청일 전쟁 이후 일본은 자본 주의의 급속한 발전을 이룩한 반면,

조선과 중국은 일본 및 열강의 수탈 대상 및 분할 경쟁의 대상국이 되었다.

 

청일 전쟁 승리로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한 일본은

중국으로부터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는 등 대륙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자 일본의 독주를 우려한 러시아는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게 했다.

 

러시아 공사 베베르는 민비 세력에게 친러 정책을 권유했다.

이에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는 1895년8월20일 을미사변(민비 살해사건)을 일으켰으며,

일본의 민비 학살과 단발령은 반일 감정을 폭발시켜 전국적인 의병 봉기가 일어났다.

민비가 시해된 후 친미,친러 세력은 고종에게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것을 종용했다.

 

1896년2월11일 새벽,고종은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

아관파천을 계기로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전제 왕권이 다시 강화되었다.

이를 계기로 1894년 갑오개혁 이후 계속된 친일 개화파 정권이 무너지고 친러파가 정권을 장악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우월권을 확보하고,

중국으로부터 랴오둥[遼東] 반도를 할양받는 등 대륙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그러자 1860년대 이후 끊임없이 남하정책을 펴면서 조선 내에도 친러세력을 부식하려 했던 러시아는

동아시아에서 일본의 독주를 우려하여 프랑스·독일과 함께 '삼국간섭'으로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게 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영향력에 자극받아 조선의 왕실 및 일부 정치세력 내에서는 배일친러적 경향이 싹트게 되었다. 그

동안 친일개화파 정권에 의해 눌려 있던 민비를 비롯한 척족세력과 구미공사관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친미적·친러적 경향을 보이고 있던 정동파 인사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이때 러시아 공사 K. 베베르[韋貝]는 미국공사와 함께 민비세력에 접근하여 친러정책 실시를 권유했다.

이에 새로 부임한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는

1895년 8월 20일 일본인 낭인과 훈련대를 경복궁에 침입시켜 민비를 학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킴으로써

일본세력을 만회하고자 했다.

그리고 친일 개화파 내각은 단발령의 실시를 비롯한 급진적인 개혁사업을 재개했다.

그러나 민비학살과 단발령은 조선민들의 반일감정을 폭발시켜 전국적인 의병봉기가 일어났다.

민비가 경복궁에서 학살되고 난 후 고종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를 기화로 친미·친러 세력은 고종을 궁궐 밖으로 데려가 자신들이 중심이 된 새 정권을 세우고자 했다.

                                      

1895년 10월 12일 '춘생문사건'은 친러세력이었던 이범진 등이

춘생문으로 입궐하여 고종을 데려오려는 계획이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범진은 또다시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그당시 친미파였던 이완용·이윤용 등과 모의하여 고종에게 접근,

왕실의 안전을 위해 잠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길 것을 종용했다.

고종은 마침내 그들의 계획에 동의하여

1896년 2월 11일 새벽, 왕과 왕세자가 궁녀의 가마를 타고 극비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했다.

파천 직후 고종의 명령으로 개화내각의 총리 대신 김홍집과 농상공부 대신 정병하가 참형되었고,

내부대신 유길준을 비롯한 10여 명의 고관은 일본 군영으로 도피하여 일본으로 망명했다.

탁지부 대신 어윤중은 도망가던 중 백성들에게 살해되었고, 외부대신 김윤식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이와 같이 친일정권이 무너지자 은신중이던 친미·친러파 인물들이 대거 등용되어 내각을 구성했다.

친러내각은 친일내각이 실시한 갑오·을미 개혁사업을 중단하고

내각은 의정부로 환원되어 한동안 약화되었던 전제왕권이 다시 강화되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는 동안

조선 정부의 인사와 정책은 러시아 공사와 친러파에 의해 좌우되었다.

이 파천은 기본적으로 청일전쟁 이후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차지하려 한 일본과

이를 저지하려는 러시아 간의 세력다툼의 결과였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이 다시 환궁하기까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던 1년 동안

러시아를 선두로 한 구미 열강은 왕실을 보호해준다는 대가로 각종 경제적 이권들을 약탈해갔다.

 

이범진       

러시아를 도와 아관파천 일으켜 친일정권을 무너뜨리고 친러내각을 조직했다.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권총으로 자결했다.

1879년 식년문과에 급제하고 1887년 협판내무부사가 되었다.

일본세력의 침투에 맞서 미국 및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95년 10월 친일정권을 타도하여 새 정권을 세우려던 춘생문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듬해 비밀리에 귀국, 러시아 공사 베베르 및 이완용 등과 함께 아관파천을 일으켰다.

친러내각이 들어서자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1897년 주미공사가 되고,

1900년 주러공사로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공사를 겸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 일제가 소환하자 이에 불응하고

황제의 밀사 명목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면서 국권회복에 힘썼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성삼(聖三). 아버지는 경하이고, 범윤(範允)의 형이다.

1879년(고종 16)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887년 협판내무부사가 되었다.

일본세력의 침투에 맞서 미국 및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민비가 친러정책을 표방하게 되자 농상공부대신이 되었다.

1895년 7월 궁내부대신서리가 되었으나 8월 20일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파면되었다.

그해 10월 친일정권에 포위되어 있던 고종을 궁궐 밖으로 피신시키고

친일정권을 타도하여 새 정권을 세우려던 춘생문 사건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자 러시아 공사의 주선으로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듬해 비밀리에 귀국, 러시아 공사 베베르 및 이완용 등과 함께

2월 11일 아관파천을 일으켜 김홍집·유길준 등의 친일정권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내각이 들어서자 법부대신 겸 경무사가 되었다.

1897년 주미공사가 되고, 1900년 주러공사로 독일·오스트리아·프랑스 공사를 겸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된 뒤 일제가 소환하자

이에 불응하고 황제의 밀사 명목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물면서 국권회복에 힘썼다.

1907년 6월 고종의 밀사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이상설·이준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자

그들과 만나 회의에 보내는 장서(長書:控告詞)를 번역했다.

이때 아들 위종도 밀사의 일원이자 통역관으로 함께 헤이그로 떠났다.

1909년 11월에 있을 만국평화회의에서 다시 활동하기 위해 2번째의 평화회의 밀사파견 운동을 계획하여 중심연락을 맡았다.

1910년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권총으로 자결했다.

유언에 따라 그가 교민자제 교육을 위해 기증한 1,000루블은 한민학교를 설립할 때 사용되었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 을미사변            2019.08.19.목요일,맑음

주한공사 미우라는 수십 명의 일본인 낭인과 일본 수비대를 하수인으로 고용하여

1895년8월20일,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일본인들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침소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고종에게 미리 준비한 왕비의 폐출 조서에 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했다.

이어 궁내부 대신 이경직을 살해한 뒤,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무참하게 시해하고 시신을 화장하는 야만적인 행동을 저질렀다.

12월 1일 고종은 정식으로 명성황후가 승하했음을 발표했다.

이후 단발령과 건양 연호의 사용, 친위대·진위대 등으로 군제 개편, 소학교령 공포, 태양력 사용 등의 개혁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황후시해에 대한 국민들의 반일감정이 극도에 달한 상황에서 친일내각에 의해 추진된 개혁은 전국적인 반일의병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 김홍집 내각 붕괴                2019.09.12.목요일,맑음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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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갑오경장)  (0) 2019.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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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오개혁(갑오경장)                 작성일자; 2019.09.12.목요일,맑음

 

1894년부터 1896년까지 개화파에 의해 추진되었던 근대적 개혁 운동을 '갑오개혁','갑오경장'이라 한다.

1894년1월,갑오 농민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청국에 파병을 요청하였다.

청국이 이를 수락하고 군대를 파견하자 일본도 1884년의 톈진(천진) 조약을 빌미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청,일 양군이 주둔한 가운데 양국간에 전쟁 기운이 높아지자 조선 정부는 다시 양국군의 철수를 요청했다.

이미 조선에서 정치적 지배력을 구축하고 있던 청국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침략의 명분으로서 조선에 내정 개혁을 요구하였다. 

 

 

민씨 일가가 장악하고 있던 조선 정부가 이를 내정 간섭이라 하여 거절하자 일본군은

1894년7월23일에 궁중에 난입하여 무력으로 민씨 일가를 타도하고 흥선 대원군을 다시 영입하는 한편,

김홍집 등 개화파 인사들로 신내각을 구성하게 하였다.

이어 1894년7월27일에는 내정 개혁 추진 기구로 군국기무처가 설치 되었고,

총재 김홍집을 비롯한 박정양.김윤식,유길준 등

주로 개화파 인사들로 구성된 17명의 의원이 참여하여 개혁 사업을 총괄 지휘하였다.

 

군국기무처가 설치 되면서 진행된 개혁 사업은 

제1차 개혁에서는 7월27일부터12월17일까지 개혁안을 제정하는 형태로 진행 되었다.

개혁 기간 동안에 일본은 청일 전쟁을 치르는 데 주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 과정에 집중적으로 개입 할 수는 없었다.

이 시기 개혁에는 갑신 정변 이래 개화파가 줄기차게 추구해온 개혁 구상이 비교적 충실히   반영 되었다.

갑오 농민 전쟁에서 농민군이 제기한 요구도 부분적으로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의 압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는 일이었고,

개화파 자신이 친일적 성향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의 이익을 보장하는 내용의 개혁도 상당 부분 존재했다.

정치제도의 개혁을 보면,

7월30일의 의정부 관제안과 8월22일의 궁내부 관제안에 따라 정부와 왕실이 제도적으로 분리 되었고,

의정부 관제안에 따라 국왕의 권한이 대폭 축소되면서 유명무실화 되었던 의정부가 정치의 중추 기구로 자리 잡았다.

조선 초기부터 사무분장 기구였던 6조가 내무·외무·탁지·군무·법무·학무·공무·농상의 8아문으로 개편 되었으며,

관료 선발 장치로서의 과거제가 폐지되는 대신에

총리 대신을 비롯한 각 아문 대신들에게 관리 임용권이 부여 되었고,

18등급의 품계를 12등급으로 축소하여 칙임관·주임관·판임관으로 개편하였다.

그밖에 청국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의 사용을 의무화하여 청국과의 사대 관계를 단절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과거의 봉건적 정치 제도를 근대적인 것으로 일신시켰을 뿐 아니라,

군국기무처를 장악한 개화파로 하여금 국왕의 간섭에 구애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개혁 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 것이었다.

사회 개혁의 측면에서는 문벌 제도와 반상 차별 등의

신분제 철폐, 죄인연좌법 폐지, 조혼 금지 및 과부재가 허용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이들 조처는 갑오 농민 전쟁에서 제기된 요구와 대부분 일치되는 것들 이었다.

이에 따라 수백 년간 지속되어온 봉건적 관습이 적어도 법률적으로는 완전히 폐기되었다.

경제 부문의 개혁은 재정 개혁과 화폐 개혁 중심 이었다.

재정 부문에서는 그동안 각 궁방과 관청에서 자체 경비를 조달하던 방식을 지양하고

모든 국가 재정을 탁지아문에서 전관 하도록 하였으며, 조세의 금납화를 의결하였다.

화폐 제도면에서는 12월에 신식 화폐 장정을 제정하여 은본위제를 채택하였으며,

일본 화폐의 조선내 통용권을 허용하였다.

 

제2차 개혁은 홍범14조 발표를 주도했으며,

1894년12월17일,

청일 전쟁의 승리를 눈 앞에 둔 일본이 대원군을 퇴위시키고 군국기무처를 폐지하는 한편,

일본에 망명중이던 박영효 등을 귀국시켜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을 구성하면서 시작 되었다.

이 시기 일본의 영향력은 이전보다 더 강화되었고,

농민군이 패배함에 따라 사회 개혁의 추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때문에 개혁 과정에서 개화파의 주도성은 거의 상실되었다.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은 고종으로 하여금

청국과의 전통적인 사대 관계 단절, 종친과 척족의 정치 관여 금지, 정부 각 기관의 사무 분장, 재정 제도의 정비 등을

주 내용으로 한 홍범14조를 발표하게 하였다.

이 홍범14조는 우리나라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띤 법령이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새 내각은 개혁안을 제정, 실시하였다.

먼저 의정부와 각 아문의 명칭을 내각과 부로 변경하고

농상아문과 공무아문을 농상공부로 통합, 7부를 설치하는 등의 개혁이 진행되었으며, 궁내부 관제는 대폭 축소되었다.

지방 제도도 크게 변경 되었는데,

종래의 도·부·목·군·현 등의 행정구역을 통폐합하여 23부 337군으로 개편하였다.

재정 제도에서는 전국에 9개 소의 관세사와 220개 소의 징세서를 설치하여 조세사무를 전관하도록 하였다.

군부 관제·훈련대 사관 양성소 관제·경무청 관제 등을 제정하여 근대적인 군사·경찰 제도를 확립하였고,

재판소 구성법·법관 양성소 규정 등을 제정하여 사법제도의 근대화를 기하였다.

 

그러나 제2차 개혁은 개혁 방향에 불만을 품은 일본측과 고종, 왕비 민씨(명성황후) 등의 공격에 의해

박영효가 다시 일본으로 망명함에 따라 끝나고 말았다.

 

제3차 개혁에서는 단발령과 건양 현호를 사용하고 군제 개편을 시행했으나 국왕의 아관파전이 단행되고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면서 좌절 되었다.

박영효가 망명한 이후 다시 김홍집이 내각 수반이 되어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이것이 1895년8월24일부터 1896년2월2일까지 추진된 제3차 개혁이다.

 

박영효를 몰아낸 민씨 세력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몰아 내려고 시도했다.

그 때문에 3차 김홍집 내각 발족 초기 일본의 영향력은 상당히 퇴색 하였다.

그러나 새로 부임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왕비 민씨(명성황후)를 시해 한 후,

개혁은 오로지 일본의 뜻대로만 진행 되다시피 하였다.

이 시기에도 연호의 제정, 태양력의 채택, 소학교령의 발포 등 총 140여 건의 개혁안이 심의·의결 되었다.

그러나 이때 공포된 단발령은 전국 각지에서 보수적인 유생들로 하여금 의병을 일으키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김홍집 내각의 친일적 성격에 대한 민중의 불만에 불을 붙여

급기야 아관파천 이후 김홍집을 비롯한 내각 요인들이 살해당하는 상황을 빚어 내게 되었다.

홍집 내각이 붕괴 됨에 따라 2년 가까이 지속된 갑오 개혁은 끝을 맺었다.

 

갑오개혁은 19세기 이래 조선 봉건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한 개혁의 흐름이면서도,

청일 전쟁의 결과

동아시아에 형성된 일본 중심의 근대적 제국주의 질서 속에

조선이 편입된 과정을 법제화한 양면성을 띤 개혁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것은 대내적으로 반봉건 근대화의 이념에 의한 부국 강병의 근대 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였으나,

대외적으로 반침략 자주화의 민족적 과제를 상실한 예속적 개혁 운동으로,

일제 식민지화의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  개화파의 연립정권 수립    2019.09.12.목요일.비


⊙ 청일전쟁     2019.09.12.목요일,비

1894년 조선은 갑오 농민 전쟁이 일어나자 청에 원군을 요청했고,

침략의 기회를 엿보던 일본은 톈진 조약을 근거로 조선에 침입했다.

갑오 농민 전쟁이 진정된 후 청·일 양군의 철병을 요구했으나 일본은 거부했다.


일본은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 정권을 수립했으며,

1894년7월25일, 청군을 공격했다.

일본군이 평양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청군은 후퇴했다.

이후 일본은 조선 내정에 적극 간섭했으며,

이에 농민봉기가 일어났으나 우금치에서 일본에게 패했다.


황해 해전에서 청군을 격파한 일본군은 진저우성과 뤼순을 점령했다.

청은 전쟁에 참패했고,1895년 4월 17일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었다.
청일전쟁 이후 일본은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을 이룩한 반면,

조선과 중국은 일본 및 열강의 수탈대상 및 분할 경쟁의 대상국이 되었다.


전쟁의 결과 일본은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으며, 조선과 중국은 자주적 개혁이 좌절되고 일본 및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대상이 되어갔다.

1880년대 후반 값싼 노동력을 발판으로 급속히 발전한 일본자본주의는 1890년에 시작된 경제공황을 통해 그 모순을 드러냈다.

즉 값싼 노동력의 국내시장 발전제약과 섬유공업·군수공업 등에 대한 수년 간의 투자확장이 공황의 원인이었다. 1889년의 흉작으로 인한 쌀 생산의 감소도 공황을 더욱 촉진시켰다. 결국 1890년도의 일본경제는 심한 수입초과를 나타냈으며 일본은 무역불균형을 타개하기 위해 해외시장 침략을 꾀하게 되었다. 1890~94년 일본 의회에서 나타난 일본지배층 내부의 대립 격화와 농민·노동자들의 경제상태 악화 및 불만의 증대는 지배층의 침략기도를 부추겼다.

한편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영토 분할을 주도하고 있던 영국은 당시 제정 러시아를 동아시아에서 가장 위험한 적수로 보고,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에 반대하는 동맹세력을 찾고 있었다.

영국은 일본을 장래의 동맹국으로 보고 청일전쟁 개시 2주일 전인 1894년 7월 16일 일본과의 불평등조약 개정에 동의했는데, 이는 일본의 침략전쟁 개시를 승인한 것을 의미했다. 미국도 러시아를 위험시하고 일본으로 하여금 러시아를 견제하게 했다.

반면 러시아는 일본의 조선침략 기도에 대해서는 경계하면서도, 일본에 적극적으로 대항하려는 정책은 취하지 않고 장차의 침략기회만 노리고 있는 단계였다.

1894년 조선에서 발생한 갑오농민 전쟁과 조선정부의 청군개입 요청은 일본에게 침략동기를 제공했다.

순식간에 남부지방 전역을 휩쓴 농민군의 기세에 당황한 조선정부는 농민군 진압을 위하여 청나라에 차병(借兵)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6월 8~9일 청군 2,400여 명이 아산만(牙山灣)에 상륙하여 12일부터 군사행동을 시작했다. 조선침략의 기회를 엿보고 있던 일본은 톈진 조약[天津條約]에 의거하여 청군의 조선출동 통고를 받자마자 곧 조선에 침입했다. 그들은 일본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 아래 해군과 육군의 대부대를 파병했고, 이어 인천-서울 간의 정치적·군사적 요충을 장악했다.

일본군의 침입에 당황한 조선정부는 갑오농민전쟁이 이미 진정되었음을 이유로 청·일 양군의 동시철병을 요구했다.

일본의 오오토리[大鳥] 공사는 본국의 훈령에 따라 갑오농민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과 조선의 내정개혁(內政改革)을 구실로 철수를 거부했다. 일본의 내정개혁 요구는 겉으로는 '일본의 자위(自衛)를 위해 조선내정의 개혁을 촉구하여 변란의 근원을 단절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내세우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러시아에 대처할 전략적 시설을 한반도 안에서 확보하고 불평등조약 체제를 더욱 강화하여 본원적 축적을 강행하려는 것이었고, 나아가 조선을 보호국화(保護國化)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었다. 조선정부는 일본이 철수한 후 비로소 내정개혁을 실시할 수 있다고 하여 일본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에 일본은 7월 23일 무력으로 경복궁을 점령하고 쿠데타를 통해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친일정권을 수립했고, 7월 25일 선전포고도 없이 청군을 공격하여 청일전쟁을 도발했다. 8월초에 일본군은 아산·공주(公州)·성환(成歡) 등지에 포진하고 있던 청군에 공격을 가하여 승리하고, 계속 북상하여 9월에는 평양에서 청군과 대결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청군은 9월 16일 밤 평양을 포기하고 압록강을 건너 후퇴했다. 평양전투의 승리를 전기로 하여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했고, 갑오정권의 개혁적 성격도 희석되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군수물자만 자국에서 가지고 왔을 뿐, 8월 27일 체결된 '대조선대일본양국맹약'(對朝鮮對日本兩國盟約:朝日盟約)에 의해 식량·부식물·군수물자 수송의 노동력을 대부분 현지에서 조달했으므로 전쟁터가 된 조선의 민중은 큰 피해를 입었고 조선의 자주권은 유린되었다.

이에 농민군은 그해 10월 다시 전면적 봉기를 준비하기 시작했고, 11월에는 공주공격을 개시했다. 일본군은 급히 남하하여 조선정부군과 함께 농민군토벌에 나섰다. 결국 농민군은 12월 우금치전투에서 우수한 근대식 무기와 장비로 훈련된 일본군에게 패배했다. 한편 9월 17일 황해해전에서 청나라 북양함대)의 주력을 격파한 일본군은, 10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본토로 진격하고 11월 6일 진저우 성을 점령했다. 부패한 청군 지도부의 무책임한 대처는 군대의 사기를 저하시켜,

11월 22일 뤼순(여순)이 점령되었다.

일본군은 뤼순 시내에서 시민과 포로 약 6만 명을 학살하고 시가지를 불사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전쟁에 참패한 청나라정부는 강화를 시도하고 대표단을 일본에 파견했다.

청나라 대표단이 파견되기 직전, 일본에서는 조선의 독립승인(청의 종주권 파기), 랴오둥(요동),타이완,

펑후의 할양, 배상금지불, 서구열강과 맺은 것과 같은 통상조약(불평등조약)을 일본과 체결할 것 등을 골자로 하는 강화초안을 작성했다. 그러나 1895년 1월 30일 청나라 대표단이 도착하자, 일본은 시간을 지연시켜 점령지를 확대함으로써 유리한 강화조건을 확보하려는 속셈에서, 대표단의 권한부족을 트집잡아 귀국시켰다. 그동안 일본 해군은 1월 20~23일 위해위를 봉쇄한 다음, 2월 12일 육군의 상륙작전으로 이를 함락시켰다.

사태의 급진전에 놀란 청나라 정부는 이홍장을 강화전권대사로 하는 새로운 대표단을 시모노세키 파견하고, 일본측이 제시하는 강화초안을 수용하여 4월 17일 조약에 조인했다. 조약은 배상금 2억 냥(3억 엔) 지불과 랴오둥·타이완·펑후의 할양, 쑤저우 등 4개 도시의 개항을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4월 23일 러시아·독일·프랑스의 3대 강국이 산둥 반도 부근에 함대를 집결시키고 랴오둥 반도 포기를 권고해왔으므로 일본은 이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랴오둥 반도 반환의 보상으로 일본은 3,000만 냥을 더 얻었다.

     청일전쟁은 이후 동아시아 3국의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청일전쟁으로 얻은 막대한 배상금, 과중한 세금수탈로 만들어진 군사비, 식민지 타이완으로부터 얻은 이윤, 전쟁으로 축재한 자본가의 이윤 등을 바탕으로 전쟁 후 일본자본주의는 급속한 발전을 이룩했다. 반면 조선은 갑오농민전쟁으로 표출되었던 변혁의지가 일본군에 의해 무력으로 압살당함으로써 자주적 개혁이 좌절되었고, 일본 및 제국주의 열강의 수탈대상으로 되어갔다. 또한 열강의 중국 분할이 본격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동아시아에 제국주의시대의 막이 열렸다.

⊙ 시모노세끼 조약      

1895년(고종32년)4월17일, 청일 강화 조약인 시모노세키 조약을 성립시켰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시모노세키에서 청과 체결한 강화 조약으로.

청은 이 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의 독립과 랴오둥 반도의 할양,배상금의 지불,다른 열강과 같은 특권의 인정 등을 일본에 약속했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에서 전통적으로 중국이 차지하고 있던 위상이 붕괴되었고 일본은 서구 열강과 같은

근대적 민족 국가의 기틀과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랴오둥 반도에 진출하려던 일본은 러시아,독일,프랑스 삼국의 견제와 간섭으로 철수했으나,

이 삼국 간섭은 이 후 러.일 전쟁의 원인이 되었다.























































































⊙ 갑오 농민 운동          2019.09.12,목요일,비

1894년 동학에 기반을 둔 근대화 운동으로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개혁 지도자를 중심으로 봉건 사회

해체 과정에서 몰락한 계층이 광범하게 참여한 근대화 운동이며,

동학난,동학 혁명,동학 혁명 운동,동학 농민 전쟁이라고도 한다.
1894년1월에 봉건 체제에 대항한 고부 농민 봉기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전봉준은 무장에서 손화중.김개남과 함께 4,000여 명의 농민군을 조직하고,탐관 오리의 숙청과 보국 안민을 위해 일어 서자는 내용의 창의문을 발표했다.
1894년6월,일본군이 왕궁을 점령하고 개화파의 연립 정권을 수립 시키자,동학 농민군의 지도부는 삼례에서 재봉기했다. 남접.북접 연합군은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견디지 못한 채 패퇴하고 말았다.


19세기 후반의 조선 봉건사회는 농업 생산력 및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에 따라 지주제가 확대되고,

농촌 사회는 지주.부농.소농.빈농.임노동자라는 다양한 계층으로 분화되고 있었다.

특히 지주제와 봉건 체제는 직접 생산자인 농민에게 부담이 가중됨에 따라 1860년대부터 군현을 단위로 한 농민 항쟁이 광범위하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농민 항쟁에 대해 정부는 봉건 체제의 두 축인 지주제와 신분제를 개혁하지 않고 단지 현상적인

부세 제도의 부분적인 수정을 통하여 이를 무마하려 했다.


한편 개항을 계기로 제국주의 침략을 받으면서 봉건체제의 모순은 더욱 심화되고 확대 되어갔다.

개항 이후 불평등 무역 구조 속에서 소수의 지주.부농층은 대일 미곡 수출을 통하여 이익을 얻어 토지를

사 모으고 지주제를 강화 시켜갔다.

이에 반해 대다수 농민들은 지주제의 강화와 상인층과 지주들의 고리대의 수탈로 더욱 몰락하게 되었다.

영세 수공업자,상인층도 외국 상인의 침투에 따라 동일한 운명을 맞이했다.


농민 전쟁의 진원지인 호남 지방은 전통적으로 대지주에 의한 봉건적 수탈이 심하고,

강경·법성포·줄포·논산포 등의 포구·개항장은 대일 미곡 수출이 활발한 지역이었다.

미곡 무역에 편승한 지주층의 지주제 강화로 인해 소농,빈농층이 몰락했으며,

농촌사회 내부의 분화 및 계급 대립이 전면에 나타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학의 교세가 급속히 확대되었으며, 봉건 사회를 변혁하려는 일군의 혁명적 지식인들과 결합하게 되었다.

호남 지역에서는 유형원의 학문적 전통을 잇는 부안 동림 서원과 강진에 유배되었던 정약용 등 실학자의

진보적 사상이 몰락 양반을 비롯한 지식인들에게 유포되고 있었다.

농민 전쟁의 지도자인 전봉준도 그중의 한 인물이다.

이들은 기존의 군현 단위의 농민 봉기가 가진 지방적 분산성을 극복하고 체제 개혁을 위한 대규모 농민전쟁으로 발전 시키기 위해서는 각지의 농민들을 조직.동원할 수 있는 수단으로써 광범위하게 교세를 확장하던 동학 조직을 주목했다.


동학은 몰락 양반 최제우가 창시한 종교로,

후천 개벽을 통하여 만민 평등의 지상 천국을 건설하려 했다.

동학의 이념을 실현하는 방법으로는 '무위이화'라는 관념적 차원에 머물렀으나 만민 평등의 원리를 기반

으로 한 반봉건 의식과 척왜양이라는 반침략의 민족 논리를 바탕으로 깔고 있었다.


동학 교단은 1892년11월 삼례 집회와 1893년3월 보은 집회에서 교조 신원 운동이라는 종교적 운동을

벌였다. 이때 전봉준 등 남접 세력은 동학 조직을 이용하여 농민군을 결집시키고 민족적,계급적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혁명을 기도했다.

이들은 교조 신원 운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 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금구 집회(1893.3)를 소집,

'척왜척양'과 '수령의 불법 침학 반대'를 외치면서 사회 혁명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갑오 농민 전쟁은 전통적으로 봉건 지배층의 수탈이 심한 고부에서 1894년1월에 일어난 고부 농민 봉기

에서 비롯되었다.

고부 지역은 1880년대 말경 부터 봉건 정부 스스로도 궁장토의 확대와 균전수도 문제와 같이 농민들의

토지나 지대를 수탈하여 지주제를 확대.발전 시키고 있었다.


1892년,고부 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은 온갖 부당한 수단을 동원하여 세금을 거두어 들이면서 농민들을

착취하자 고부 농민들은 1893년11월경에 조병갑에게 민장을 제출하여 시정을 요구 했지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이에 전봉준을 중심으로 최경선,정익서,김도삼 등 농민 지도자들은 봉기를 계획하고 비밀리에 각

마을의 집강에게 사발 통문을 돌렸다.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효수하고 전주성을 함락하고 서울로 직향한다'는 등 행동 방침을 결정

했다.그러나 조병갑이 익산 군수로 전임됨에 따라 사발 통문 결의는 보류하게 되었다.


전봉준은 1893년12월,60여 명의 고부 농민을 거느리고 새로 온 고부 군수 이은용에게 고부군의 폐정을

시정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군아의 뜰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1894년1월9일,조병갑이 다시 고부 군수로 재부임하게 되자 사발 통문 결의 사항을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1894년1월11일,농민군은 고부 관아를 습격해 아전을 처벌하고 무기고를 부수어 무장한 후 불법 수탈한

곡식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고 수세를 군량으로 확보하였다.

정부는 수습책으로 고부 군수를 새로 임명하여 안핵사 이용태를 파견하여 조사토록 했다.

이에 따라 농민군은 일단 해산하였다.

이처럼 고부 농민 봉기는 아직 국지적인 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채 끝나고 말았지만,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들은 봉건적인 폐정을 개혁하려는 의도 아래 농민 봉기를 일으키려고 했다.

여기에 하나의 요인이 되었던 것은 바로 안핵사의 폭압이었다.

안핵사  이용태는 사후 처리를 빌미로 봉기한 농민들을 모두 동학 폭도로 몰아 처벌하는 등 도리어 사태를 악화시켰다.


고부에서 일어난 1차 농민 운동은 일단 해산한 후, 전봉준은 무장으로 가서 3월 초순부터 손화중,김개남과 함께 농민군을 조직했다.약 15일 동안 4,000여 명의 농민군을 규합한 전봉준은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

안민을 위해 일어서자는 내용의 첫 창의문을 발표했다.

이어 무장·고창·흥덕·태인·정읍·김제·금구 등지 농민들의 호응을 받아 백산에 집결했다.

1894년3월25일, '호남창의대장소'를 조직하여 농민군을 정비했다.

연합 부대의 대장에는 전봉준이 추대되고, 손화중과 김개남이 부대장이 되어 서울로 진격하여 부패한 봉건지배층을 타도하고 외래 침략자들을 내쫓을 것을 제시하며 고통받는 민중과 봉건 통치 지배의 하수인인

아전까지도 힘을 합해 일어나자는 내용의 격문을 전국에 띄웠다.

백산에서 편성된 농민군은 4월7일 황토현에서 전주 감영군을 격파한 후,

정부군과 정면 대결을 피하고 힘을 모으기 위해 남쪽으로 정읍·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장성 등지를 공략했다. 진격하는 곳마다 관청을 습격하여 감옥에 갇힌 백성들을 석방하고 무기를 압수하였으며,탐학 관리를 비롯한 양반,지주,부호들을 징계하고 재물을 빼앗아 빈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정부는 4월2일, 홍계훈을 양호 초토사로 임명하여 장위영병을 현지로 파견했으나 장성의 황룡시 전투에서 홍계훈이 이끄는 장위영병의 선발대는 농민군에게 격파 당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농민군은 장성을 떠나 북상길에 올라 원평·정읍을 거쳐 4월 27일(양력5.31) 전주성에 입성했다.

    

전주성이 점령되자 정부는 자력으로 농민군과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4월29일에 청에 원병을 청했다.

청군과 일본군은 농민 전쟁을 구실로 조선에 들이 닥쳤다.

그러나 농민군은 외세의 출병 구실을 없애고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폐정 개혁안을 제시하여 이를

받아 들이면 해산할 용의가 있음을 밝혔다.

정부측은 이에 응하여 5월7일(양력6.10), 정부군과 농민군 사이에 화약이 체결되었다.

이후 농민군은 전주성을 양도해 주며 사태 진전을 당분간 지켜보게 되었다.


그러나 전주 화약 이후 정부의 폐정 개혁이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자,농민군은 폐정 개혁을 전라도에서 집행하기 위해 집강소를 설치하고 개혁사업에 착수했다.

전봉준은 금구 원평에 본거를 두고 전라우도를,김개남은 남원에 본거를 두고 전라좌도를 통할했다.

농민군은 집강소를 통해 지방 통치의 실권을 장악하고 이속과 행정의 말단 조직을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고무기와 군량을 모으는 한편,삼정 업무를 관장하고 민간의 사송을 처리해 나갔다.

집강소를 운영하는 주체는 신분적으로 하층민, 경제적으로 소작농민, 토지 없는 농민이 중심이었다.

집강소가 설치된 후 농민군의 조직은 크게 확장되어 양반 유생과 이서층들도 참가했으며 무기와 군량을

모으고 무기의 조작법을 익히는 등 군사 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충청도의 동조 세력과 북접에 전면적인 호응을 요구하는 등 본격적인 반침략.반봉건 전쟁을 준비해 갔다.전라도 농민군의 움직임에 자극을 받아 경기도 죽산·안성, 경상도 하동·진주, 강원도 홍천 등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이 봉기하고 있었다.

    

2차 농민 운동은 1894년6월21일 조선을 침략한 일본군은 무력으로 왕궁을 점령하고 청일전쟁을 도발하는 한편, 민씨정권을 무너뜨리고 대원군과 개화파의 연립정권을 수립시켰다.

이어 갑오개혁이 추진되어 봉건체제에 대한 전반적인 개혁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고 농민군을 토벌하려고 했으므로 농민군의 지도부는 군량과 군기를 정비하면서 삼례에 투쟁 본부를 두고 재봉기를 확정했다.

전봉준은 '동도 창의소'란 이름으로 반침략 항일 투쟁에 거병할 것을 촉구하는 한편,

전라도 각지의 집강소를 통하여 농민군을 조직적으로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 반침략투쟁이 농민군의 주요한 과제로 되었다. 그

리고 전봉준은 종전 제1차 봉기 때 반대하던 입장을 지녔던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세력을 설득하여

연합전선을 펴게 하는 데 성공했다.

1894년9월 하순, 논산에 모인 남접,북접 연합군은 공주를 향해 북상을 개시했다.

당시 공주는 농민군 진압에 동원된 일본군과 관군의 공격 거점이었다.

농민군은 공주 외곽의 이인·효포·우금치 등지에서 약 20일간 일본군과 관군에 맞서 공방전을 벌였으나,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을 견디지 못한 채 논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 논산 전투에서도 농민군은 다시 패퇴했고, 금구·태인 전투에서 전봉준이 이끄는 핵심 부대는 마지막

저항을 시도했으나 결국 패퇴하고 말았다.

이후에도 황해도·경상도 등지에서 산발적으로 저항했으나, 양반·부호·관료·이서층이 조직한 민보군에 의해 철저히 괴멸되었다.

민보군·수성군들은 도주한 농민군의 집에 방화하고, 귀순한 동학도들까지도 체포 살해하고 재산을 약탈하는 등 농민군 세력을 초토화했다.

                

1894년 갑오 농민 전쟁은 조선 후기 농민 항쟁을 통한 농민들의 각성과 성장을 바탕으로,

동학의 조직을 이용하여 봉건제도의 모순과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에 반대한 대규모의 반제·반봉건투쟁

이었으며, 이른바 봉건 지배층의 지주적 입장의 근대화 노선과 농민적 입장의 근대화 노선의 대결이었다.

농민군이 지향한 방향은 봉건적인 생산 관계와 수탈을 제거하고 소상품 생산자로서의 자립 발전을 보장해

주는 농민적 토지 소유의 발전을 기초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지향은 일련의 투쟁 과정을 통하여 혁명의 방향으로 다듬어지고 발전해갔다.

탐관 오리의 제거,민씨 정권의 타도와 봉건적 폐단의 시정,봉건 제도의 폐지,친일 정권의 타도와 식민지화의저지로 운동과 사상을 단계적으로 발전 시켜 나갔다.

특히 제2차 농민 전쟁을 통하여 일본 침략 세력을 몰아내려는 반제·반봉건 민족운동을 전개했으나,

당시 갑오정권과 일본 세력 및 보수유생들에 의해 철저히 압살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농민  전쟁은 투쟁 과정을 통하여 농민 대중에게 봉건 지배층과 일본 침략 세력의 본질을 알게

했으며,그들을 민족적,계급적으로 더욱 각성시키는 한편 광범한 대중을 반제·반봉건 투쟁 세력으로 강화

시켰다.









⊙ 최제우,최시형,손병희         2019.09.12.목요일,비

□ 최제우; 1824(순조24년)-1864(고종1년)3월10일

본관은 경주며,아버지는 최옥,어머니는 한씨다.

생7대조는 최진립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워 병조판서의 벼슬과 정무공 시호가 내려진

무관이었으나,6대조 부터는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몰락 양반 출신이었다.


최제우는 조선 동학의 교조이다.

동학은 서양에서 전래한 종교인 '서학'에 대하여 천도교를 이르는 이름이다.

최제우는 세상이 어지럽고 인심이 각박하게 된 것은 세상 사람들이 천명을 돌보지 않기 때문임을 깨닫고

한울님의 뜻을 알아내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1860년 종교 체험 후,1861년 포교를 시작하자 많은 신도가 추종하기 시작했다.
교세는 계속 신장되어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접소는 13개소에 달했다.

정부가 동학의 교세 확장을 경계하여 관헌의 지목을 받게 되자 곧 탄압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해 7월, 최시형을 북접 주인으로 정하고 해월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제2대 교주로 삼았다.

이듬해 3월, 사도난정의 죄목으로 효수형에 처해졌다.


□ 최시형; 1827(순조27)-1898(광무2년)

최제우에 이은 동학의 제2대 교주로써 본관은 경주며,

최제우가 동학을 포교하기 시작한 1861년 동학에 입교하여,

1863년 최제우로부터 동학의 도통을 이어받았다.

1880년에 '동경대전', 1881년에는 '용담유사'를 간행했다.

1884년 육임제를 정하여 교단을 정비했으며 교세를 확장했다.

1892년 교조신원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신도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해 했으며,

1894년 일어난 갑오농민전쟁에 동학교도들과 함께 참여했다.

1898년 원주 송골에서 체포되어 교수형을 당했다.


□ 손병희; 1861-1922

근대화론과 개화 사상에 입각해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스스로 대도주가 되었다.

동학교도의 자제들을 일본에 유학시켜 근대적 교육을 받게 했으며 사립학교를 원조했다.

한일합병 이후,재정난에 빠진 동덕 여자의숙을 원조하고 보성 학원과 동덕 여학교를 인수하는 등

교육사업에 매진했다.
1차대전 종전 후 윌슨의 민족 자결 주의의 영향으로 3·1운동을 준비하게 됐을 때 3가지 원칙을 천명했다.

독립운동을 대중화시킬 것과 일원화할 것, 비폭력으로 할 것 등이었다.

폭력적 민중 시위의 경우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서구 문명국의 동정을 얻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는 평화적인 만세 시위 방침을 받아들이고 3·1운동에 참여한 뒤 일본 경찰에 자진 출두하여 검거되었다. 형집행 정지를 언도받고 병보석으로 풀려나 치료받던 중 1922년 병세가 악화되어 죽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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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           2019.09.12.목요일,비

동학은 민족적이고 사회적인 종교이다.

‘동학’이란 교조 최제우가 천주교에 대항하여 동쪽 나라인 우리 나라의 도를 일으킨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며, 1905년에는 손병희에 의하여 천도교로 개칭되었다.

1860년 종교 체험 후,1861년 포교를 시작하자 많은 신도가 추종하기 시작했다.

창도 당시 동학은 내 몸에 천주(한울님)를 모시는 보국안민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경천사상에 바탕한 나라 구제의 신앙이었다. 1863년에는 신도가 3,000여 명,접소는 13개소에 달했다.

정부가 동학의 교세 확장을 경계하여 관헌의 지목을 받게 되자 곧 탄압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해 7월, 최시형을 북접 주인으로 정하고 해월이라는 도호를 내린 뒤,

 8월14일 도통을 전수하여 최시형을 제2대 교주로 삼았다.

그러나 제2대 교주인 최시형에 이르러서는 ‘사람 섬기기를 한울같이 한다’는 가르침으로 발전하게 되고,

손병희는 더 나아가서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내천’을 동학의 종지로 선포하였다.


동학의 사회사적 의의는 양반 사회의 해체기에 농민 대중의 종교가 된 점에 있다.

동학사상과 동학운동은 서민층의 반왕조적인 사회 개혁 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최제우의 창도단계에서는 서민층에 널리 유포된 신앙 형태이었으나,

교조의 신원 운동을 통해 민중의 집단적 시위 운동으로 전환되면서 탐관오리의 혁파,외세 배척 등 정치적

요인이 끼어들어 사회 운동의 요인이 강해지기 시작하였다.


1894년(고종31),갑오 동학 농민운동에 와서는 동학의 종교 운동이 쌓아 올린 만민 평등의 이념과 그 교문

조직이 기반이 되어 농민 운동의 집대성인 사회 개혁 운동으로 발전되었다.

동학군이 표어로 내세운 ‘제폭구민,축멸왜이,진멸권귀’는 이미 동학 운동이 혁명적인 사회 개혁 운동으로

전환되었음을 말해 준다.


개항.개화기에 동학 운동은 단발령에 대한 지지 세력이 되어 개화 운동 편에 서서 개혁 운동을 일으켰고,

1905년 천도교 선포 이후에도 개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보성학교와 동덕학교 등 많은 학교 경영을

통하여 신교육 운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천도교 운동은 신민회 운동과 더불어 널리 서민층에 뿌리를 내려,

3·1운동에 나타난 자주 독립의 민족주의 역량을 키운 민족 운동 세력으로 근대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1860년4월5일, 최제우는오랜 정신적 방황과 수행을 거쳐 마침내 동학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득도하였다고 그의 경전 저술에서 고백하고 있다.

이때 그의 종교적 체험이 동학 창도의 기점이 되며,

1905년 손병희의 천도교 선포에 이르는 동학 운동의 교리와 조직의 원리를 제공한 것이다.

동학이 널리 영호남 서민층의 반왕조적 민심을 기반으로 하여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의 사회적 종교로 대두된 데는 조선왕조의 시운이 다하였다는 말세관과 사회 변동기의 불안이 크게 작용하였다.

양반 사회의 신분 차별에 대한 서민들의 불만이 커지고,적서의 차별을 괴로워 하였던 서민 계층에서 신분

평등을 주장하는 동학에 대하여 공명하는 자가 많이 나왔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최제우 자신이 몰락 양반의 서출로 깊은 소외감을 가졌던 사실 또한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의 아버지 최옥은 한학자로 성리학에 정통하였으며,그의 문집 '근암집 '은 최제우에게 끼친 유교적 교양의 일단을 말해 주고 있다.

청소년기 최제우의 내면적 갈등은 문장 도덕이 높으면서도 벼슬을 못한 아버지에 대한 동정,가문을 위하여 입신양명을 할 수 없는 서출로서의 자기 처지, 비천한 신분의 생모에 대한 열등감이 원인이 되었다.

그는 40세까지 일정한 직업 없이 명산대찰을 찾아 구도의 방황을 계속했다.

그가 파악한 당시의 사회상은 왕조의 시운이 쇠하여 개벽을 대망하는 말세였다.

이 시기의 가장 심각한 사회.경제적 위기는 국정의 문란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홍수,지진,역병 등이

가중되어 전국적인 농민 폭동의 민란의 시기에 접어든 데 있었다.

서양의 이양선의 출현과 서학의 전래도 왕조 질서의 동요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위기의식에서 최제우는 서학과 서교에 대한 대응으로 동학이라는 새로운 도를 제창하게 되었다. 그러나 최제우의 서교에 대한 이해가 동학 창도와 관계가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동학의 사상 내용에는 유,불,선 3교가 종합되어 있다고 하나, 그것을 통일하는 사상은 우리 민족의 경천

사상과 구제를 위한 민족적 염원이며, 민간 신앙적 요소가 널리 서민들에게 동학의 신봉자를 얻게 해주었다.



동학은 기성 종교인 유교와 불교의 쇠운설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사대부 양반 계층의 종교였던 유교의 사상 내용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여, 무학의 서민들이 10여 년의 수학 기간을 거치지 않고도 입도할 수 있고 입도한 그 날부터 군자가 될 수 있다고 하여,서민에게도 군자의 인격을 갖출 수 있는 인격적 자존의 길을 열었다.


최제우는 천주나 천도가 서학의 독점일 수 없고 특히 동학이 서교와 다르다는 것을 뚜렷이 밝힐 필요를

느껴,서교와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즉,서교에서는 빌어도 효험이 없고 조상 숭배 배격과 제사 부정을 공격하였다.

서교의 내세관을 비판하여 오직 일찍 죽기를 바라는 것이 기이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동학의 서교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비판은,

서양의 세력이 우리 나라를 침략하는 위험한 존재로 파악하고 있다는 척사이다.

서양 문명과 서양 군함의 내습은 곧 천하 분란의 문명적 위기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동학은 중화문 화권인 천하의 붕괴 속에서 내 나라를 단위로 한 ‘보국’의 종교이고,

안으로 ‘안민’의 새 사상이었다는 점에서, 민족 주의적 종교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동학 교문의 교세가 날로 커지자 조정에서는 동학도 서학과 같이 민심을 현혹시켰다고 하여 나라가 금하는 종교로 규정하여 금지시키고,

교조 최제우는 추종자들과 함께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1864년 봄, 대구 감영에서 혹세무민죄로 사형에 처하여졌다.

    
동학의 기본 사상은 최제우의 저술로 전해지는 두 가지 경전 '동경대전'과 '용담유사 '에 잘 나타나 있다.

'동경대전'은 한문으로 된 글로서 포덕문.논학문.수덕문 등이 포함되어 있다.

'용담유사'는 한글 가사체로 되어 있으며

   '용담가''안심가''교훈가''권학가''흥비가''도수가''몽중노소문답가''도덕가' 등이 있다.

   '용담유사'는 풍월을 노래한 가사가 아니고,자신의 사상을 도인들에게 전하려고 지은 일종의 사상 가사다.

    가사체의 문체도 훌륭하여 문학적인 가치도 인정받고 있다.


'용담가'는 자신의 가문과 신라 고도 경주의 수려한 자연을 노래하였고,

'안심가'는 부인을 안심시키는 형식으로 일반 도중에게 수도를 계몽하고 있고,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치욕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보국의 신념을 역설했다.

'몽중노소문답가'는 꿈속에서 노소가 문답을 하는 우화체로,참위설과 풍수 지리설에 기초한 예언요의

  성격을 띠고 있다.조선왕조 400년이 시운을 다하여 쇠망하고 새 시대가 도래함을 노래하고 있다.

'권학가'는 민심이 날로 험악해지는 시운의 변천을 예감하면서, 도덕의 공부를 쌓아 천리를 따르고 천명을

  배울 것을 권하는 경천 신앙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원전은 모두 불타 없어지고, 최시형이 암송

  하였던 것을 구송 대필하게 하여 오늘에 전한다는 설이 있다.

최시형이 피신하여 다니면서 포교하던 시절,

1880년5월, 강원도 인제군에 경전간행소를 만들어 '동경대전'을 간행하고,

다음해에 충청북도 단양에서 '용담유사'를 간행하였으나,

현재 전하는 목판본은 1883년 충청북도 옥천에서 간행된 것과 경주판이 남아있다.


삼례집회(1892.11),보은 집회에서 교조 신원운동(1893.3),금구집회(1893.3)

최제우,최시형,손병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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