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범도        2019.10.28.월요일,맑음

홍범도(생졸;1868년,고종5년-1943년)는 평안북도 양덕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 대한 독립군 총사령관,

대한 독립군단 부총재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907년 전국적인 의병 봉기에 자극을 받고 있던 중,

1907년9월, 일제가 민중의 무장 투쟁을 약화 시키기 위해 '총포급 화약류 단속법'을 공포하여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는 사건이 일어났다.이에 크게 분노하여,

1907년11월, 홍범도는 차도선·태양욱과 산포대를 조직하여 의병을 일으킨 뒤, 북청의 후치령을 중심으로

   갑산·삼수·혜산·풍산 등지에서 유격전으로 일본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1910년,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간도로 건너가 차도선·조맹선 등과 포수단을 조직하였다.

   이후 교포들에게 광복 사상을 고취하며 국내와 연락, 애국지사 소집과 독립군 양성에 진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3-6월 사이 대한 독립군을 창설했다.

1919년8월,200명의 부하를 거느리고 두만강을 건너 혜산진·갑산 등지의 일본군을 습격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이에 자신감을 갖고 정예 부대를 인솔,다시 압록강을 건너 강계 만포진을 습격한 뒤 자성에서

   3일 동안 일본군과 교전하여 70여 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거두었다.

1919년 3·1운동 후 동만주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간도대한국민회를 결성하자,1920년 5월 합작하였다.

   간도 대한 국민회와 대한독립군의 합작 군사 조직으로 제1군 사령부가 결성되었고 홍범도는 정일

   제1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20년5월27일 북로 사령부로 개명되었고,이후 최진동이 지휘하는 도독부와 통합하였다.

   최진동이 독군부 부장,안무가 부관,홍범도가 북로제1군사령에 임명되었다.

   확대 개편된 500여 명의 대부대로 국내 진입 작전을 감행하였다.

1920년6월, 최진동과 협력하여 종성 삼둔자 부근에서 국경 수비대와 격전을 벌여 120명을 사살하는

   대전과를 올렸으며,두만강 대안의 봉오동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전멸시키는 큰 성과를 올리니,

   이것이 유명한 봉오동전투이다.

또한 같은 해 10월,청산리전투에서도 제1연대장으로 참가,제2연대장 김좌진, 제3연대장 최진동 등과 함께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치욕적인 패배를 거듭한 일본군이 계속해서 추격해 오자 독립군 조직을 총망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부총재에 선임되었다.

그 뒤 간도 지방의 김좌진·최진동 부대와 함께 노령으로 이동, 흑룡강 자유시를 새로운 근거지로 삼고

러시아군과 교섭하여 협조를 얻었다.

그러나 러시아 공산당의 배반으로 무장 해제 된 뒤 많은 단원이 사살되거나 포로가 되는 등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겪게 된다.

이 사변 이후 1922년 고려 공산당과 한족 공산당이 통합하여 조직한 고려 중앙정청의 고등군인징모위원에 임명되었다.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하여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되어 이곳에서 극장 수위 등으로 일하다가 1943년 76세로 사망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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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오동 전투              2019.10.28.월요일,맑음

1920년6월7일, 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홍범도,최진동,안무 등이 이끈 대한북로독군부의

한국 독립군 연합 부대가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 추격 대대를 무찌르고 크게 승리한 전투.


1920년6월7일,중국 지린성 왕칭현 봉오동에서 독립군의 연합 부대와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홍범도(1868~1943)가 이끈 대한독립군,안무(1883~1924)가 이끈 국민회군,최진동(?~1945)이 이끈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결성된 대한북로독군부와 한경세가 이끈 대한신민단의 독립군 연합 부대가

야스카와 지로 소좌가 이끈 일본군 제19사단의 월강 추격대대를 쳐부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의 무장 항쟁이 활발해지자 일본은 1920년 5월부터 독자적인  

   독립군 토벌 작전을 추진하였다.

1919년8월 이후 활발히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던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북간도 지역 독립군의 통일과

  연합에 나서

1920년5월28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안무의 국민회군,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하였다. 그리고 봉오동에 집결하여 좀더 강력한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1920년6월4일, 대한 신민단의 독립군 부대가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진입해 일본군 순찰 소대를 습격해

   타격을 입혔다.

1920년6월5일,일본군 1개 소대 병력이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해오자,대한북로독군부의 독립군은

   삼둔자에서 일본군 추격대를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일본군은 이를 핑계로 함경북도 나남에 주둔하던 제19사단에 월강 추격대대를 편성하여 중국 영토를

   침입하여 직접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 공격에 나섰다.

   홍범도가 이끈 독립군 연합 부대는 봉오동의 산지에 매복하였다가 야스카와 지로 소좌가 이끈 일본군

   추격대대를 삼면에서 포위하여 궤멸시켰다.

   일본군은 수많은 병력이 사상을 당하는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봉오동 전투는 중국 영토인 만주지역에서 한국 독립군과 일본군 사이에 본격적으로 벌어진 최초의 대규모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여 독립군의 사기가 크게 높아졌으며,

   이는 1920년대에 독립 전쟁이 더욱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되었다.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  


봉오동전투
발생시기주요사건

1919년3월

 3.1운동 이후 만주 각지에서 독립군이 결성되어 무장 항쟁이 활발히 전개.

1919년 4월

박장호,조맹선 등의 의병장을 중심으로 대한독립단이 결성되어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

1919년 5월

 남만주 서간도에서 서로군정서가 결성.

1919년8월

 홍범도가 자신이 이끌던 의병을 중심으로 결성한 대한독립군으로 함경남도 갑산과

 혜산으로 진공 작전을 펼쳐 독립군 무장 항쟁이 활발해지는 계기로 작용.

1919년11월

 지린성 옌지, 허룽, 왕칭의 독립운동 대표들이 모여 대한국민회간도국민회) 결성,

 산하에 국민회군을 두고 안무를 대장으로 활동.

1919년12월

 서일을 중심으로 대종교도들이 만들었던 중광단을 모태로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가

 결성.

1920년2월

 대한청년단연합회,독립단,한족회 등의 단체가 통합되어 임시정부 직속 광보군사령부

 결성.

1920년5월

 한국 독립군 부대의 국내 진공 활동에 위기를 느낀 일본은 만주 군벌인 장꿔린을 압박해

 독립군을 탄압하는 한편 독자적인 독립군 토발 작전을 계획.

1920년5월3일

 독립군 최진동의 근거지인 봉오동에서 북로군정서,대한국민회, 군무도독부 등

 5개 독립운동 단체의 간부들이 참석한 연석회의가 열림.

1920년5월28일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안무의 국민회군,최진동의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대한북로독군부를 결성.

1920년 6월4일

 박승길이 지휘하는 대한신민당 소속 독립군 부대가 함격북도 종성군에 진입해

 일본 순찰소대를 습격.

1920년 6월7일

새벽2시


 봉오동 인근 후안산에서 독립군과 소규모 전투를 치른 일본군은 봉오동까지 독립군을

 추격.봉오동 주변 산에 매복중이던 독립군의 총공격에 3시간 가량 응사하다가 후퇴.
 일본군 150여 명, 독립군 수 십명의 사상자를 내며 상황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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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              2019.10.28.월요일,맑음

1919년 3·1 운동 이후 국내외에서는 상하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국민 의회 정부, 천도교 중심의 대한 민간 정부, 조선 민국 임시 정부, 신한 민국 임시 정부, 한성 임시 정부 등 6개 지역 이상에서 임시 정부가 준비되었다.

이 가운데 상하이·러시아령·서울의 3개 지역에서 성립된 임시 정부가 상하이에 집결,

1919년 9월 15일 통합 임시 정부를 구성하였다.

지역적인 이점을 고려하여 상하이에 자리를 잡은 임시 정부는 이동녕의 주도로 임시 의정원을 구성하고

임시 헌장 10개조를 제정·공포한 뒤 국무총리와 6부의 행정부, 국무원을 구성했다.

이어 1919년 4월 11일 의정원과 사법부의 3권 분립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민주 정부를 출범시켰다.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수립·선포된 이후 1945년 11월 김구 등이 환국할 때까지 일제의 강제 점령을 거부하고 국내외를 통할·통치했던 3권 분립의 민주 공화 정부의 수립 배경. 3.1운동 이후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포함하여 국내외의 여러 지역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이중 상하이를 기점으로 러시아, 서울 등에 마련된 임시 정부가 한데 모여 1919년 9월 15일 통합 임시 정부를 만들었다. 독립운동가 이동녕을 주축으로 임시 의정원을 구성했고, 임시 헌장 10개조를 제정하고 국무총리와 그 밖의 체계를 확립했다. 이후 1919년 4월 11일에는 3권 분립이 보장되는 민주 정부를 출범시켰다.


1919년 9월, 중국 상해에서 한민족 역사상 최초로 민주공화제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이후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는 민족의 대표 기구이자 독립운동의 최고 중추 기구로 자리매김했다. 임시정부는 3·1운동이 직접적으로 낳은 결실이다. 국내외에서 분출된 한민족의 자주독립에 대한 의지를 한곳으로 모으고, 이를 조직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시켜 나갈 필요성이 나라 안팎에서 제기된 데 따른 것이다.

1919년 3~4월, 국내외에서는 5개의 임시정부가 생겨났다. 이 가운데 조직의 실체나 기반을 제대로 갖춘 것은 노령(露領, 러시아령)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중국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서울의 한성정부 세 곳이었다.

가장 먼저 정부 수립이 추진된 곳은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였다.

1917년 말 성립된 전로한족회중앙총회는 3·1운동 발발 직후인 3월 17일 중앙총회를 행정, 사법, 의회 기능을 갖춘 대한민국의회로 확대, 개편했다. 주도 인사들은 의장 문창범, 부의장 김철훈, 선전부장 이동휘 등이었다.

이어 상해에서는 4월 10일, 이동녕을 의장으로 임시의정원이 구성되고, 11일에 열린 의정원 1차 회의에서 헌법에 해당하는 전문 10조의 임시헌장을 채택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행정수반인 국무총리에는 이승만이 선출됐다.

서울의 한성정부는 3·1운동의 계승을 목표로 한 13도 대표 24명이 인천 만국공원에서 비밀 회동을 통해 임시정부 수립을 결의하고 4월 23일 임시정부 선포문을 내면서 성립됐다.

이들은 집정관총재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이동휘를 추대했다.

자주독립의 역량 결집이 당시로서는 가장 큰 과제였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통합 문제도 자연스럽게 제기됐다. 통합 논의는 노령의 원세훈과 상해의 안창호가 주도했으며, 상해 쪽이 제시한 단일 정부 수립원칙이 받아들여져 1919년 9월 단일화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였다. 합의된 원칙은 국내에서 창설한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해 이를 계승하되 정부의 위치는 연락이 편리한 상해에 두고, 상해에서 정부 설립 이래 실시한 행정을 그대로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며, 단일 정부의 명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성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9월 11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라는 것을 골자로 한 임시헌장(헌법)을 만들었고, 입법권을 가진 임시 의정원과 행정권을 가진 국무원, 사법권을 가진 법원으로 삼권 분립을 이뤘다. 임시 대통령은 이승만, 국무총리는 이동휘가 맡았다.

임시정부는 이로부터 상해 시기(1919~1932), 이동 시기(1932~1940), 중경 시기(1940~1945)를 거치며 부침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는 다섯 차례의 개헌을 통해 대통령제(1919. 9)-국무령(國務領) 중심의 내각책임제(1925. 4)-국무위원 중심의 집단지도 체제(1927. 3)-주석제(1940. 10)-주석, 부주석제(1944. 4)로 정치 체제를 바꿔나갔다. 임시정부는 또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 의거에 따른 일제의 탄압으로 상해를 떠나 항주(1932), 남경(1937), 장사(1937), 광주(1938), 유주(1938), 기강(1939) 등을 거쳐 중경(1940)으로 정부 청사를 옮겼다.

임시정부의 초기 활동은 연통제를 통한 국내 행정 장악과 국제 외교에 초점이 맞춰졌다. 임시정부는 내무부 산하에 연통부를 조직해 국내에서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임정 및 해외 독립운동 정보의 국내 전달, 국내 항일 운동 지휘 등의 임무를 맡게 했다. 이를 위해 서울에는 총판, 각 도에는 독판, 군에는 군감(郡監), 면에는 면감(面監)이 운영됐다. 일종의 비밀 행정 조직으로서, 임시정부와 국내의 연락망 역할을 한 것이다. 연통제는 평안, 황해, 함경도 지역과 경기, 충청도 일부, 서간도, 북간도 등지에서 실시됐으나, 1921년에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붕괴되고 말았다.

임시정부는 또한 1919년에 파리 강화회의에서 독립 청원을 위한 외교 노력이 무산된 뒤 워싱턴과 파리, 북경 등 주요 강대국 수도에 외교관을 파견해 정부 수립에 대한 승인을 받고 국제연맹에 가입하기 위해 외교활동을 벌였다. 하지만 열악한 국제 환경으로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은 뚜렷한 성과 없이 지지부진하게 진행됐다.

게다가 모스크바에서 레닌이 지원한 자금을 이동휘 계열이 독점하고, 주로 미국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에게 국제연맹에 의한 한국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사실이 불거지면서 임시정부 내에서는 노선 갈등이 벌어졌다. 외교보다는 독립전쟁을 통한 국권 회복을 중시한 사회주의 계열 인사들은 임시정부의 활동을 비판하며 이승만의 사임을 요구했고, 이로 인해 임시정부는 수립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이에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독립운동의 현 상황을 점검하고 향후 진로를 모색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상해에서 열렸다. 회의에는 노령과 상해, 만주 등지에서 지역 및 단체 대표 130명이 참석했다. 하지만 임시정부를 완전히 해체한 뒤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와 임시정부의 조직만 개혁하자는 개조파가 팽팽히 맞서면서 회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결렬됐다. 창조파에는 북경군사통일회의 신채호(申采浩),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김만겸(金萬謙), 대한국민의회파 윤해(尹海), 원세훈, 천도교의 통일당 신숙(申肅) 등이 포함됐으며, 이들은 무력 항쟁과 조선공화국 수립을 주장했다.

개조파에는 임시정부 내 개조파인 안창호, 상해파 내 고려공산당 김철수(金綴洙), 윤자영(尹滋瑛), 서간도의 개조파 김동삼(金東三) 등이 있었다. 이들은 실력 양성에 주안을 두면서 자치운동과 외교활동을 강조했다. 국민대표회의가 성과 없이 끝나자 개조파와 창조파에 속한 대다수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에서 탈퇴해 상해를 떠났다.

침체기에 빠진 임시정부는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1925년 3월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朴殷植)을 2대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이어 4월에는 2차 개헌을 단행해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를 채택했다. 이상룡(李相龍)과 홍진(洪震)에 이어 김구(金九)가 잇달아 국무령을 맡은 데 이어, 1927년에는 3차 개헌을 통해 국무위원 합의로 정부를 운영하는 집단 지도 체제를 도입하게 된다. 이 시기에 임시정부는 우파 정당인 한국독립당을 결성해 남경의 중국 국민당 정부 등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임시정부가 다시 국내외의 지지를 되찾기 시작한 것은 한인애국단의 의열 투쟁을 통해서였다. 한인애국단은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 침공을 계기로 김구가 요인 암살을 위해 결성한 것으로, 1932년 의거를 일으킨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 모두 애국단 소속이었다. 일제는 의거 후 임시정부 요인에 대한 체포 작전에 돌입했으며, 이를 피해 임시정부는 1932년부터 1940년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중국 대륙 각지를 이동하면서 활동하였다.

이동 시기의 임시정부 주변에서는 좌우파에서 정당들이 속속 생겨났고, 그 과정에서 다시 임시정부를 해체하자는 논의가 일었다. 이에 김구는 1935년 11월 한국국민당을 조직해 이를 기반으로 임시정부를 재정비하고, 나아가 조소앙(趙素昻)의 재건한국독립당, 이청천(李靑天)의 조선혁명당을 끌어들여 우파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중경에 도착한 직후 이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광복군을 창설한 데 이어 강력한 단일지도 체제인 주석제를 도입했다. 행정과 군사를 총괄하는 주석으로 피선된 김구는 1942년 8월 김원봉(金元鳳)의 좌파 세력을 임시정부에 끌어들여 좌우 대통합을 이루고 민족통일전선을 통일시키는 성과를 거뒀다. 김원봉이 이끄는 400여 명의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시킴으로써 군사면에서도 좌우 통합이 이뤄졌다.

특히 임시정부는 1941년 11월 해방 국면에 대비해, 국토를 탈환하고 민주공화국을 수립하는 단계에서의 정치 이념과 독립전쟁 준비 태세를 담은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제시했다. 건국 강령은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이론적 기반으로 삼아 좌우 노선을 절충한 것이었다.

하지만 열강들의 이해 관계가 맞물린 해방 정국에서 임시정부의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1945년 11월 말과 12월 초 두 차례에 나눠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열강들의 승인 거부에 따른 것이었다. 현 대한민국 헌법 전문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독살당하고

왕정시대로 대한의 주권을 빼앗긴 한계를 극복하여

국민주권시대인 민국(국민주권의 나라-민주공화국)시대로의 열망과

대한독립의 요구가

1919년 3.1독립선언대회로

삼천리 방방곡곡은 물론

확실한 자주독립의 요구로

세계만방에 선포되었고

40여일후인

1919년 4월 13일에

이 3.1정신을 계승한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됩니다.

대한민국이라함은

왕정통치로 멸망한 대한제국을 교훈삼으며

대한민국(민주 공화국)으로 흥하자는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임시정부는 망명자들에 의해 구성되었으나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자주독립국가임을 헌법에 명시하고

군주제를 폐기하고 민주공화제정부(근대의 국민 민주주의 정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법입법행정부로 3권분립을 확정하고

기존의 무장단체와 독립군, 독립단체, 독립투사는 물론

협력하는 지식인, 재외동포, 노동자 농민 지주계급들로

연합연대하는 민족민주연합전선을 구성하니

독립국으로서 외교는 물론 일제의 전진기지 괴멸과 그 주구들을 처단하는

항일무장투쟁의 시대를 선포합니다.

즉, 항일전쟁을 선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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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은 1919년 3.1 독립 만세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1902년 충청남도 천안군에서 태어나 애국심이 뛰어난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유년기 부터 자유와 평등 의식을 배웠다.

1916년 이화학당에 편입한 후 학업을 이어가던 중 비밀 결사 이문회로부터 독립 만세 운동에 관한 계획을

    듣고 시위에 합류하기로 결심했다.

1919년3월1일, 만세 운동이 시작된 후 천안을 비롯한 연기,청주,진천 등을 돌아다니며 만세 운동에 관한

   약속을 받았고,

1919년4월1일, 아우내 장터에서 또 한번의 대대적인 만세 운동을 계획했다.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에서 선두에 섰으나 일본 헌병들에 의해 부모와 친구를 잃고,주모자로 체포되어

   공주검 사국으로 송치된 후 저항을 계속하다가 1920년9월28일 순국했다.

 

유관순은 일제 강점기였던 1919년에 일어난'3.1독립 만세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16세의 가녀린 여학생으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일제의 압박에 저항했던 그녀를 생각하면 누구라도 추모의 염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박은식의 '대한 독립 지혈사'에 따르면 3.1독립 만세운동 당시 무려 7천여 명의 생령이 일제의 총칼에 희생되었다고 한다.수많은 애국 지사들 가운데 유관순 한 사람만을 떠올리게 되었을까?


유관순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946년경 이화 여고 교장 신봉조와 이화 학당 출신의 박인덕이 유관순

기념 사업회를 설립하면서 부터였다.


신봉조는 일제 말기 '국민 정신 총동원 조선연맹' 참사로서 '임전대책 협의회'와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

했고, 황도 사상을 보급하던 '황도학회' 회장으로 활동한 경력 때문에 1949년 반민 특위에 체포된 친일 인사였다.

박인덕은 3.1독립 만세 운동 당시 주동자로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고, 옥중에서 유관순에 대한 일제의 악질적인 고문을 목격했던 인물이다. 그녀는 출소한 후 독립 운동에 헌신했지만 일제 말기 변절하여 '조선임전보국단'에 참가했고, '임전대책협력회' 상무위원으로서 친일 논설과 강연에 나섰다.

아울러 전비 조달을 위한 채권가두 유격대로 활동하면서 징병을 독려하기도 했다.


이런 인사들이 해방 이후 독립 지사 유관순을 정치적 종교적 방패막이로 적극 활용함으로써 자신들의 부끄러운 친일 흔적을 감추려 했던 것이다.

또한 2.8독립 선언에 참여했으며, 일제 말기 총독부에서 천황에 대한 충성의 글을 강요하자 단호하게 거부하고 붓을 꺾었던 늘봄 전여택 작가가 쓴 '유관순 전기'가 유관순 선양에 매우 큰 역할을 했다.

유관순


유관순은 1902년12월16일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의 다섯 자녀 가운데 둘째 딸이었다.

감리교도였던 유중권은 구한말 유빈기,조인원 등과 함께 흥호 학교를 세워 국권 회복과 민족 계몽운동에

나섰던 선각자였고, 어머니 역시 선교사들을 통해 독실한 신앙심과 근대적인 여성 의식을 갖추었던 신여성이었다. 이런 부모님의 영향을 받은 유관순은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 나가 자유와 평등의 정신을 익혔고,

생활 속에서 식민지 체제의 부당함을 체험하면서 뚜렷한 민족 의식을 갖게 되었다.

 

1916년, 그녀는 감리교 충청남도 공주교구의 미국인 여자 선교사 '엘리스 샤프'의 추천으로 감리교단이

서울에 설립한 이화 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학했다.

교비생이란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면제받는 대신 졸업 후에 본교의 교사가 되기로 약정한 학생이었다. 시골에서 자란 유관순으로서는 생소한 환경이었지만 이화 학당 선배인 사촌 언니 유예도의 도움으로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낯선 도시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1919년, 우수한 성적으로 보통과를 수료한 그녀는 이화 학당 고등부로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나갔다.

그 무렵 식민지 조선의 내외 정세가 요동치고 있었다.

병탄 이후 일제는 그 동안 한국인에게 내걸었던 온갖 달콤한 공약을 외면하고 일본어와 일본 문화를 강요

하는 등 동화 정책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반항하는 자에게는 1912년 개정된 '신태형령'에 따라 순사들의 재판 없는 구금과 구타가 일상화되었다.

이런 폭압적인 지배 체제는 수백 년 동안 잠들어 있던 한국인들의 분노를 일깨워 놓기에 충분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자유와 평등사상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데 일제가 민족 지도자들과 기독교 지도자들을 박해하자 일제에 대한 반발심이 거세게 끓어올랐다.

 

한편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면서 전승국의 대표 주자였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전후 처리 지침으로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했다. 그것은 세계 피압박민족들이 자발적인 노력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런 국제적인 분위기 속에서 그해 2월8일,일본의 도쿄에서 공부하던 최팔용 등 10여 명의 유학생들이

'재일 조선 유학생 학우회'의 망년회와 웅변 대회에서 독립 운동을 결의하고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여 가두 시위에 나섰다. 이른바 '2.8 독립선언'이었다.

적지 한가운데서 벌어진 빅 뉴스가 현지에서 밀사로 파견된 '송계백'의 전언으로 국내에 알려지면서 한동안 잦아 들었던 애국지사들의 독립 의지에 불이 붙었다.

그때부터 서울에서 뜻있는 학생과 종교인을 중심으로 은밀히 독립 만세 운동이 추진되었다.

이에 발맞춰 상하이의 신한 청년당,도쿄의 조선유학생학우회 등 해외 인사들도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고

있었다.종교단체 가운데 천도교가 가장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라는 3대 원칙을 수립하고 손병희,권동진,오세창 등이 앞장서서 독립운동 준비를 서둘렀다. 기독교에서도 신한 청년당의 선우혁, 신민회 출신의 이승훈, 양전백 등이 독립 운동을

모색했다. 불교와 유림 일각에서도 결사 움직임을 내비쳤다.

혈기 왕성한 학생들의 움직임은 더욱 적극적이었다.

보성 전문학교의 강기덕, 연희 전문학교의 김원벽, 경성 의학전문학교의 한위건 등이 모임을 갖고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른 독립 만세 운동 계획을 모의했다.

이처럼 각계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독립 만세 운동 계획은 민족 독립이라는 대의 아래 하나로 결집하자는 천도교 측의 제안을 모두가 수용함으로써 거족적인 독립 만세 운동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윽고 천도교·기독교·불교·학생 등 교파와 계층을 초월한 민족대연합전선이 구축되면서 독립만세운동

계획은 구체성을 띠게 된다.

거사 일자는 고종황제의 국장일과 3월2일의 일요일을 피하면서 3월 1일로 정해졌다.

민족대표 33인은 손병희의 자택에서 모임을 갖고 어떤 난관이 있더라도 계획된 대로 행동하고,

일경에 체포되더라도 정정당당하게 그 간의 경과를 밝히자고 결의했다.

육당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가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인쇄소 보성사에서 2만여 매가 인쇄되는 과정

에서 종로경찰서 고등계 형사 신철에 의해 발각되었지만 최린이 민족적인 대의로 그를 설득함으로써 위기를 넘겼다.

이윽고 1919년 3월1일 오후 2시, 종로 태화관에 모인 민족 대표들은 식순에 따라 이종일이 가져온 독립

선언서를 읽고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만세 삼창으로 독립 선언식을 마무리했다.

이때 탑골 공원에서는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독자적으로 독립 선언식을 거행한 다음 가두시위에 나섰다. 우리 민족의 간절한 독립 의지를 담은 3.1운동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유관순은 당시 이화학당에서 조직한 비밀결 사 '이문회'를 통해 독립 만세운동 계획을 전해 듣고 서명학,

김분옥 등 6명의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함께 시위에 나서기로 맹약했다.

3월1일, 드디어 탑골 공원에서 독립 선언식을 마친 사람들이 학교 앞을 지나가자 유관순은 여섯 명의 동료학생들과 함께 담장을 뛰어넘어 시위에 동참했다.

당시 이화 학당의 프라이 교장이 학생들의 안전을 염려하여 교문 앞을 막아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3월5일에 벌어진 남대문역 시위에는 사상 최대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강기덕,김성국,김원벽,한위건 등 학생대표들이 앞장선 가운데 이화 학당의 유관순과 정신 여학교의 이애주등 서울 지역의 남녀 학생 대부분이 참가했고, 고종 황제의 인산을 마친 다음 기차 편으로 귀향하려던 지방민들도 대거 합세했다.

                                      

시위는 평화적이고도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

전문학교 학생으로 이루어진 선봉대가 대한 독립기를 들고 앞장선 가운데 시위대는 두 갈래로 나누어 행진을 시작했다.

한 갈래는 남대문시장에서 보신각 쪽으로,

또 한 갈래는 남대문에서 대한문, 을지로 입구를 거쳐 보신각으로 향했다.

이윽고 보신각에서 합쳐진 시위대는 한 마음 한 뜻으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점차 시위에 참여하는 인파가 늘어나고 구호가 드높아지자 당황한 일경은 남대문 근처에 저지선을 만든

다음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총탄에 맞아 피 흘리는 친구들을 업고 흩어지면서 저들의 비인도적인 만행에 이를 갈았다. 그들의 가슴속에 치열한 분노가 들끓으면서 만세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었고,

유관순이 바로 그 중심에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가운데 일어난 한국인들의 독립 만세운동 열기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자

조선총독부는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3월10일에 이르러 임시 휴교령을 반포했다.

주동인 학생들의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서였다.

눈에 불을 켠 경찰과 헌병들은 도심에서 시민 몇몇이 모이기만 해도 곤봉을 휘둘러 해산시켰다.

그 때문에 서울에서의 활동이 한계에 부딪치자 유관순은 동료들과 협의한 뒤 각자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

운동의 열기를 확산시키기로 다짐했다.

3월13일, 유관순은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독립 선언서를 숨겨 들고 천안행 기차에 올랐다.

일제의 삼엄한 검문검색을 피해 고향으로 안착한 그녀는 아버지 유중권의 주선으로 청신학교와 교회를 찾아교사와 학생, 신도들에게 서울에서 벌이지고 있는 만세 운동에 대해 설명하고 동참을 호소했다.

그녀는 또 천안,연기,청주,진천 등지의 교회와 학교를 돌아다니며 만세 운동을 협의했다.

이에 대하여 선교사 조인원과 김구응,이백하 등 20여 명의 인사들이 적극적으로 호응함으로써 시위 계획은 급물살을 탔다.

그들은 수차례의 논의 끝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4월1일에 아우내 장터에서 만세 운동을 벌이기로 했다. 우선 용두리 지렁이골에 총본부를 두고 장명리와 백전리에 연락기관을 설치한 다음 유림 대표와 집성촌

대표들을 설득했다.

    

본래 아우내 장터의 독립 만세운동은 두 계열에서 계획하고 있었다.

하나는 홍일선,김교선,한동규,이순구 등의 수신면 주민과 이백하,김상철로 대표하는 성남면,갈전면 주민

   들이 계획했고,

또 하나는 동면의 유관순,조인원,조병호,유중권,유중무,조만형,김상훈,김용이와 갈전면의 박제석,박봉래

   등이 계획했다.

이들 두 계열의 주동자들이 서로 연락을 취하여 4월1일 아우내 장터에서 합동으로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

하기로 결의했던 것이다.


3월31일 밤,지령리 매봉 정상에서 시뻘건 불길이 타올랐다. 내일의 거사를 일깨우는 봉화였다.

그러자 동서남북 각지에서 봉화가 피어오르며 그 뜻에 호응했다.

드디어 4월1일, 갈전면 아우내 장날이 밝았다.

그날 새벽부터 아우내 장터에는 천원군 일대 외에 청주,진천 방면에서도 장꾼과 장꾼을 가장한 시위군중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유관순은 동지들과 함께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면서 열띤 어조로 대한 독립의 당위성을 설파했다.

오전 9시경, 3천여명의 시위 군중이 모이자,

조인원이 긴 장대에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높이 달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어서 유관순은 단상 올라 지금 전 세계의 피압박민족들이 독립을 쟁취하고 있다면서 우리도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에서 원수 일본을 몰아내고 독립을 쟁취하자고 부르짖었다.

그녀의 열정적이면서 조리 있는 연설은 군중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궜다.

이어서 조인원의 선창에 따라 군중들은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만세!”를 연호했다.

독립 선언식이 끝나자 유관순은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 독립’이라는 깃발을 앞세우고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그렇게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친 아우내장 터의 분위기는 해방 독립의 공간

그 자체였다. 독립 만세운동이 절정으로 치닫던 오후 1시경 상황을 전해들고 긴급 출동한 일본 헌병들이

시위대 앞을 막아섰다. 그 와중에 대열의 선두에 있던 한 사람이 헌병의 총검에 찔려 쓰러졌다.

분개한 유관순과 동지들은 군중들과 함께 최초의 희생자를 둘러 메고 헌병 파견소로 몰려갔다.

그들은 무참하게 살해된 동지의 시신을 파견소 앞 마당에 내려놓고 일제의 만행을 격렬하게 성토했다.

그때 일부 흥분한 청년들이 파견소로 연결된 전화선을 끊었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헌병들은 파견소 안으로 들어가 숨었고, 군중들은 조인원의 설득으로 안정을 되찾았다.

그런데 오후 2시경, 지원 요청을 받은 헌병 분견대원과 수비대원 30여명이 트럭을 타고 현장에 도착하더니 군중들을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깜짝 놀란 군중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그들은 뒤를 쫓으며 마구 총검을 휘둘렀다.

일체의 경고도 없이 벌어진 일제의 만행으로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등 19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30여명이 중상을 당했다.

그날 오후4시경 ,유관순은 좌복부와 머리를 칼에 찔린 채 숨진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유중무,조인원,김병호, 김용이 등 40여명과 함께 다시 파견소로 몰려가 파견소장 소산과 헌병 상등병 주곡 등에게 강력하게 항의

했다. 하지만 그녀는 즉시 만세 운동의 주모자로 체포되어 천안 헌병대에 구금된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공주 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공주 검사국에서 유관순을 심문하던 일경은 그녀가 미성년자인 점을 감안하여 범죄를 시인하고 수사에 협조하면 선처하겠다고 제안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내 한 몸 편하자고 부모를 학살한 흉적들과 손을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공주 검사국에서 갖은 고초를 감내하던 유관순은 공주 영명학교에 재학 중 만세 운동을 벌이다

잡혀온 오빠 유관옥을 만난다.

시위현장에서 부모를 잃고 졸지에 고아 신세가 된 남매는 부둥켜 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지만 대한  독립의 열망까지 흘리지는 않았다.

얼마 후 법정에 선 유관순은 일본인 재판관 앞에서 당당하게 일제의 조선 병탄에 대한 부당함을 역설하고

잔인하게 시위를 진압한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잔혹성을 고발했다.

“나는 한국인이다. 너희들 일본인은 우리 땅에 몰려와 숱한 동포를 죽이더니 마침내 나의 부모님까지

죽였다. 대체 누가 누굴 죄인으로 몰아 심판한단 말인가?”


1919년 5월9일, 공주 지방법원에서 열린 1심 재판에서 유관순에게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죄를 적용하여

징역 5년을 선고했다. 그녀가 판결에 항의하여 경성 복심 법원에 공소하자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었다.

당시 서울에서 3.1운동을 목도한 영국 '데일리메일' 지의 기자 프레더릭 맥켄지는 저서인'자유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에서 만세운동의 시작과 탄압, 평양에서 목격한 만세운동, 여학생들의 순국, 세계의 분노 등을

자세히 묘사했다. 이 책에서 그는 한국인들의 비폭력적인 항쟁이야말로 고도의 영웅적인 모습이라고 찬탄했다. 하지만 평화적인 한국인의 저항에 비해 일본인의 대응은 실로 야만적이었다.

일본인 헌병과 간수들은 시위 현장에서 잡혀온 여학생과 젊은 여인들의 옷을 찢고 때리고 강간하거나

매질해 죽였고, 담뱃불로 여인들의 은밀한 부분을 태우거나 인두로 지졌다.

유관순이 수감된 서대문 형무소의 여감방  8호실에는 만세 시위를 외치다 잡혀온 여죄수들이 가득했다.

그 중에는 독립 운동가 노백린 장군의 딸로 세브란스 병원의 간호사였던 노순경, 개성의 전도부인 어윤희, 구세군 사관 부인 엄영애, 정신여학교 학생 이애주 등이 있었다.

유관순의 죄수번호는 1933번이었다.

그해 5월11일,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던 프란시스 스코필드 박사는 서울 프레스 지의 주선으로 서대문

형무소 면회실에서 노순경을 만난 다음 옥리를 추궁하여 그녀들의 수감 현장을 둘러보았다.

어둡고 컴컴한 감방 안에서 그는 잔인한 고문으로 얼굴은 물론 온몸이 퉁퉁 부은 애국지사들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여리디 여린 소녀 유관순의 고왔던 얼굴 역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얼마 후 고문 후유증으로 생긴 상처가 악화되어 치료차 풀려난 이애주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감방 내에서의 고문과 학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분개한 그는 총독부로 달려가 정무총감 미즈노에게 강력 항의했다.

그 결과 서대문 형무소의 8호실 수감자들은 한 동안 고문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6월30일, 경성 복심법원은 유관순에게 징역 3년을 언도했다.

그녀는 재차 형벌의 부당함을 항의했지만 9월11일 상고가 기각 되면서 형이 확정되었다.

 일제의 재판과 판결을 전혀 수용할 수 없었던 그녀는 옥중에서 끊임없이 저항했고,

1920년3월1일에는 동지들과 함께 옥중 만세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에 간수들은 골칫거리 유관순을 어둡고 축축한 지하 독방에 감금하고 무자비한 고문을 가했다.

1920년4월28일,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 기념으로 유관순의 형기가 1년6개월로 감형되었지만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1920년9월28일, 유관순은 형기를 3개월 남겨둔 채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2013년11월19일, 국가 기록원이 주일 대사관으로부터 이관 받아 공개한 ‘3.1운동 시 피살자 명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3.1독립 만세운동으로 인하여 왜병에 피검되어 옥중에서 타살됨.’

그녀가 사망하고 나서 이틀 뒤 이화 학당의 프라이 교장과 월터 선생이 서대문 형무소에 시신의 인도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이에 이화 학당의 모든 외국인 교직원들이 나서서 유관순의 억울한 죽음을 세계만방에 알리겠다고 항의하자 형무소 측은 마지못해 시신을 내주었다.

1920년10월14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른 다음 이태원 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런데 1937년 이태원 공동 묘지가 택지로 조성되면서 유골이 사라졌고,

그녀의 존재 역시 세인의 뇌리에서 지워졌다가 해방 후인 1946년 갑자기 구국의 영웅으로 부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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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               작성일자; 2019.10.28.월요일,맑음

만해 한용운(생졸;1879.8.29-1944.6.29)은 충청남도 홍성에서 출신이며

독립 운동가 겸 승려,시인이며 일제 강점기 때 시집인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 문학에 앞장섰고,

불교를 통한 청년 운동에 앞장섰다.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였다.

주요 저서로 '조선 불교 유신론' 등이 있다.

 

한용운은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동학 농민 운동에 가담했으나 실패하자

1896년(건양1),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갔다.

그 뒤 1905년(광무9), 인제의 백담사에 가서 연곡을 스승으로 승려가 되고 만화에게서 법을 받았다.

1908년(융희2), 전국 사찰 대표 52인의 한 사람으로 원흥사에서 원종 종무원을 설립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1910년,국권이 피탈되자 중국에 가서 독립군 군관 학교를 방문,

이를 격려하고 만주.시베리아 등지를 방랑하다가 1913년 귀국, 불교 학원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3년,범어사에 들어가 '불교대전'을 저술, 대승 불교의 반야사상에 입각하여

종래의 무능한 불교를 개혁하고 불교의 현실 참여를 주장하였다.

1918년 서울 계동에서 월간지 '유심'을 발간,

1919년 3.1운동 때 민족 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 선언서에 서명,체포되어 3년을 복역했다.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 문학에 앞장섰고,

1927년,신간회에 가입하여, 이듬해 중앙 집행위원이 되어 경성 지회장의 일을 맡았다.

1931년 조선 불교 청년회를 조선 불교 청년 동맹으로 개칭,

불교를 통한 청년 운동을 강화하고

이해 월간지 '불교'를 인수,많은 논문을 발표하여 불교의 대중화와 독립 사상 고취에 힘썼다.

1935년 첫 장편 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고,

1937년 불교 관계 항일 단체인 '만당 사건'의 배후자로 검거되었다.

그 후에도 불교의 혁신과 작품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  성북동에서 중풍으로 죽었다.



시에 있어 퇴폐적인 서정성을 배격하고 불교적인 ‘님’을 자연으로 형상화했으며,

고도의 은유법을 구사하여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 정신과 불교에 의한 중생 제도를 노래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작품으로는 상기 장편 외에 장편 소설인 '박명'이 있고,

저서로는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하여

'조선불교유신론''십현담주해''불교대전''불교와 고려제왕' 등이 있다. 1973년, '한용운 전집(6권)'이 간행되었다. 

 

 

 

⊙ 3.1 운동 (기미 독립운동)                  2019.10.28.월요일,맑음

동경의 기독교 청년회관(일본한국YMCA)에 모여든 조선 재일 유학생 400-600여 명 앞에서

최팔용이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하고 이광수가 기초한 2·8독립선언서를 백관수가 낭독했다.

참여한 사람은 장영규,최팔용,윤창석,김철수,백관수,서춘,김도연,송계백,정공균,변희용,강종섭,이정훈,

이봉수,김승민 등이다.

이들은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하였고,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며 민족의 궐기를 촉구했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가도로 나선 학생들은 최팔용의 사회아래 대회선언과 결의를 열광 속에 가격하고 독립운동의 구체적인 방향을 논의할 때 일본 경찰들이 들어닥쳐 해산을 명하였다. 그러나 참석자들은 이를 거부하여 큰 소란이 일어났다.

이들은 일경과 몸싸움을 벌이다 강제 해산되고 사회자 최팔용 외에 약 60명이 검거되었고, 8명의 학생들이 기소되었다.그러나 학생들은 굴복하지 않고 2월 12일 오전에 50여 명의 조선인 학생들이 청년회관에서

독립운동을 협의하다가 검거되었다.

이렇게 2월 한 달 내내 조선인 학생들의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이광수에 의하여 조선과 해외에 보도되었으며,

이 사건은 다음 달 3월 1일 서울에서 이루어진 3.1운동 독립선언의 도화선이 되었다.


1919년3월1일에 발생한 3·1 운동(기미 독립운동)은 조선인들이 일제에 항거하여,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 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사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을 계기로 고종의 장례일인 1919.3.1에

맞추어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 운동이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을 민족 대표 33인으로 부르며, 그밖에 만세 성명서에 직접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직,간접적으로 만세 운동의 개최를 위해 준비한 이들까지 합쳐서 보통 민족 대표 48인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모두 만세 운동이 실패한 후 구속되거나 재판정에 서게 된다.

약 3개월 가량의 시위가 발생하였으며 조선 총독부는 강경하게 진압했다.

조선 총독부 집계는 집회 인수가 106 만여 명이고,사망자가 7,509명,구속된 자가 4만7천여 명이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1919년4월11일,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대한민국 제헌 헌법에서는 3·1 운동을 대한민국 건국의 기원으로 삼아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것을 천명하였다.

한편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에 의한 강경책을 펴던 조선 총독부는 민족 분열책인 일명 문화 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되었다.


1910년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후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고 무단 통치를 실시했다.

한민족은 무단 통치하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근대적 기본권을 박탈당하였다.

또한 회사령의 실시로 민족 자본가의 발전을 가로막고,

1910년부터 1918년사이에 진행된 토지 조사 사업으로 불법적인 일본인들의 토지 소유가 인정되었고

지주의 권리가 강화되면서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불만과 저항이 거세졌다.

이러한 거족적인 민족 해방 의지를 바탕으로 1910년대에는 국외에서의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 국내에서의 비밀결사 운동, 교육 문화 운동 및 생존권 수호 투쟁 등을 통해 운동 역량이 강화되어 갔다.

이와 함께 1910년대 말 국제 정세가 크게 변화되었다.

1918년1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를 주장하였는데, 이는 식민지 약소민족을 크게 고무하여 민족 해방 운동을 고양시켰다.

손병희·최린 등 천도교계,이승훈 등 기독교계,한용운 등 불교계가 독립 선언을 계획하여 독립선언서,

파리 강화 회의 등에 보내는 독립 청원서, 일본 정부에 보내는 독립 의견서 등이 작성되었고,

2월 27일 독립 선언서가 인쇄되어 종교 교단을 중심으로 미리 배포되었다.

그 후 고종의 장례일인 3월1일 정오 서울을 비롯하여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지에서 동시에

독립 선언식이 이루어짐으로써,전국적인 민족 해방 운동이 전개되었다.


1919년3월23일부터 28일까지 구로 인근 지역에서 전개된 만세 운동은 부천군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19년3월23일,이보경·이무경·최선택·이창범·이재경·이상태·최개성 등의 주동으로 문학면 관교리에서

횃불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났다.

이후 조명원이 조종서·최봉학·문무현 등과 협의하여 혈성단을 조직하였다.

태극기와 격문 80매를 제작하여 남북리·거잠리·을왕리·덕교리 주민에게 격문을 배포하고 150명의 주민들과 함께 만세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한민족은 국내외에서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거족적인 만세 운동을 펼쳤다.

이에 계양 주민들도 1919년3월24일 오후 2시경, 오류리의 심혁성의 주도하에 장기리 황어 장터 장날을

이용하여 600여 명이 참여한 가운데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 독립 만세’를 힘껏 외쳤다.

황어 장터의 만세 운동은 인천 지역에서 전개된 가장 큰 규모의 만세 운동이었으므로 일제는 심혁성을 체포하는 한편 이의 진압에 적극 나섰다.

장기리의 임성춘 등 주민 600여 명은 만세 운동과 더불어 체포되어 가는 심혁성의 탈환 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부내 경찰관 주재소 일본 경찰은 칼을 휘둘러 선봉에 섰던 선주리의 이은선을 즉사케 하고 윤해영에게 부상을 입히는 만행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이은선의 피살 소식이 전해지자 이담·최성옥·전원순·이공우 등 천도교인,기독교인,일반 농민 등이 주축이

되어 분연히 떨쳐 일어나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한편 진실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촉구하였다.

격분한 계양 주민 100여 명은 우선 선주리에 있는 면사무소 서기 이경응이 친일적인 혐의가 있다고 보아

그의 집으로 달려가 집을 부수어 민족 정기가 살아 있음을 보여 주고자 하였으며 주민들을 억압 탄압하던

면사무소를 파괴하여 친일 기관을 응징하였다.

3월28일에는 150여 명의 주민들이 오류리에서 만세 시위 운동을 벌였고,

3월31일에는 남동면 서창리에서 송성용·송윤중·오창조·김춘근·윤영택·박중일이 주축이 되어

4월 1일 질천 시장에서 만세 시위 운동을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폐하였다.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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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일본 총독부가 민족 해방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암살 미수 사건을 조작

하여 105인의 독립 운동가를 감옥에 가둔 사건으로 독립 운동의 비밀 결사 조직이었던 신민회가 해체되는 원인이 되었다.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으로  ‘105인 사건’이라는 명칭은 제1심 재판에서 105명이 유죄 판결을

받은 데서 비롯된다.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직후에 민족 의식이 높은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의 민족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을 날조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1910년8월, 강점한 뒤에도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 지역에서는 독립 운동이 확산되고 있었다.

특히 1907년 안창호,양기탁,신채호 등이 국권 회복을 목적으로 조직한 항일 비밀 결사인 신민회는 평양과 정주에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세워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였으며, 국외에 무관학교와 독립군 기지를 만들어 독립 전쟁을 준비하려 했다.

1910년10월1일, 조선 총독부의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헌병 경찰제도에 기초한

 ‘무단통치’를 행하는 한편, 민족의식이 높았던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계획하였다. 그는 1910년12월,압록강 철교 개통식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선천,신의주 등을 시찰했는데,

이때 조선인들이 그를 암살하려는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는 소문이 돌았다.

조선 총독부는 안중근의 사촌인 안명근이 1910년12월에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독립 운동 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사건을 계기로 황해도 북서부의 안악 지방을 중심으로 160여명의 민족 운동가들을 검거하여 그 가운데 김구·김홍량·한순직·배경진 등 18명을 내란 미수와 모살 미수 등의 혐의로 기소한 이른바 ‘안악사건’을 일으켰다.

또한 1911년1월에는 독립군 기지 창건을 추진했다는 이유로 양기탁·임치정·주진수 등 신민회의 간부로

활동하던 16명을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했다.

그리고 이 사건들을 총독 암살 미수 사건으로 몰아서 관서 지방 전체로 탄압을 확대해

1911년9월에는 유동열,윤티호,이승훈,이동휘 등 6백여 명의 민족 운동가들을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조선총독부는 이들 민족 운동가들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며 데라우치 총독에 대한 암살 미수 사건을 날조하려 했다.당시 조선 총독부는 신민회 중앙 본부의 지휘 아래 서북 지방의 기독교도를 중심으로 총독에 대한 암살 계획이 진행되어 평양·선천·정주 등 9개 도시에서 자금 모금과 무기 구입 등의 구체적인 준비 작업이 진행되었고, 데라우치 총독이 서북 지방을 시찰하였을 때 각 지방의 역에서 그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이 추진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혹독한 고문으로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당시 조선 총독부를 대변하던 '매일신보'나 '경성일보' 등에서는 이 사건으로 체포된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기독교인이라는 점에서 장로교를 중심으로 한 미국인 선교사들의 선동에 의한 것으로 몰아갔다.

그러자 미국 정부나 미국의 장로교 교회는 이 사건과의 관련을 부인하면서 조선 총독부가 고문으로 사건을 날조했다고 비판하였다.

이렇듯 사건이 미국와 일본의 외교적 갈등으로까지 비화되면서

1912년에는 정치적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그래서 데라우치 총독과 미국인 선교사들의 면담이나 3인의 미국 상원의원과 주미 일본대사와의 면담 등을 통해서 윤치호 등에 대한 선처를 요구하는 탄원이 전달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체포된 600여명 가운데 상당수가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으며,

기소된 123명에 대한 재판이 1912년6월28일부터 1913년10월9일까지 진행되었다.

경성 지방법원에서 열린 제1심 재판은 1912년9월28일,이창식 등 18명에게 무죄를 선고했으며,

나머지 105명에 대해서는 징역 5-10년의 유죄 판결을 하였다.

‘105인 사건’이라는 명칭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2심 재판에서는 99명에게 무죄가 선고되었으며,윤치호·양기탁·안태국·이승훈·임치정·옥관빈 등

6명에 대해서만 징역 5-6년이 선고되었으며,이러한 판결은 1913년10월에 가서야 최종 확정되었다.

그러나 징역 선고를 받은 6명도 1915년2월12일, 일왕 다이쇼의 즉위식에 특별 사면되어 석방되었다.

 

105인 사건으로 1907년 설립되어 활동하던 신민회 조직은 이 사건으로 해체되었으며,국내의 독립운동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특히 신민회의 회장이었던 윤치호 등은 이후 일본의 조선 통치를 용인하는 친일의 경향으로 돌아서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 총독부는 헌병 경찰 제도에 기초한 무단 통치를 통하여 조선인에 대한 억압과 통제를 계속해서 강화하였다. 하지만 이 사건에 연루 되었던 많은 민족 운동가들이 해외로 망명하면서 국외에서 항일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105인 사건

발생시기주요사건

1910년10월1일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조선 총독부 초대 총독으로 부임.

1910년12월

  안악 사건 발생.

1911년1월

  총독부,신민회 간부 16명을 보안법 위반으로 체포.

1911년9월

 총독부,안악사건과 신민회 간부 체포를 총독 암살 미수사건으로 몰아 관서지방

 전체로 탄압을 확대. 600여 명의 독립운동가 체포.

1912년

 체포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

1912년6월

 기소된 독립운동가 123명에 대한 재판 진행.

1912년9월28일

 경성 지방법원에서 열린 제심 재판에서 18명 무죄로 석방.

 나머지 105명은 최소 징역 5년-10년의 유죄 판결.

1913년10월

 제2심에서 무죄 선고된 99명을 제외한 6명에 징역 5-6년이 선고.

1915년2월12일

 징역 선고를 받았던 6명이 일왕 다이소의 즉위식을 기념해 특별 사면되어 석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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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11월,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 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다가 황해도 신천지방에서 관련 인사 160명과 함께 검거된 사건.


안명근은 한일합방이 강제로 체결되자 서간도로 이주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인재 양성을 목표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자 1910년11월 입국하였다.

황해도 부호인 이원식·신효석으로부터 기부금을 받아냈다.

신천 발산의 민병찬·민영설 등에게 보조금을 요구했으나 거절 당하자 소지하고 있던 권총으로 위협하며

‘조국 광복의 큰 뜻을 모르는 자’라고 질책한 뒤 평양으로 떠났다.

민병찬·민영설 등은 즉시 재령 헌병대에 밀고해 안명근은 1910년12월,평양역에서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암녕근은 서울 경무 총감부로 압송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계획에 동의한 배경진·박만준·한순직 등도

검거되었다.


무관학교 설립 계획의 발각은 조선 총독부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일제는 무관학교 설립자금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으로 날조하여 일제히 검거하였다.

이들 중에 김홍량·김구·최명식·이승길·도인권·김용제 등은 주로 안악의 양산학교와 면학회를 중심으로

애국적 문화 운동에 종사하였던 자들이었다.

일본 경찰의 갖은 고문에도 불구하고 안명근은 끝까지 단독 범행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한순직이 회유에 말려 무관 학교 설립 자금을 군자금이라고 진술하였다.

김구가 허위 날조라고 반박하기도 했으나, 최명식이 민족 자본 육성을 위해 안동현에 무역회사를 설립할

계획을 추진 중에 있었기 때문에 일본 경찰은 이를 무관 학교 설립 계획과 결부시켜 사건을 더욱 확대,

날조하여 허위 자백을 강요하고 강도 및 강도 미수죄·내란 미수죄·모살 미수죄로 혐의를 씌워 안명근 이하

16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1911년8월, 공판에서의 검사 공소장은 허위 날조 문서 였는데, 피고 등이 부호들을 살해하고 우편국을

습격할 음모를 꾸몄다고 하였다.

결국, 안명근은 종신징역,김구·김홍량·배경진·이승길·박만준·원행섭 등은 징역 15년, 도인권 징역 10년,

김용제·최명식·양성진·김익연 등은 징역 7년,최익형·고봉수·박형병·장윤근·한정교 등은 징역5년을 받았다.

그 뒤 김구·김홍량·최명식 등은 감형과 특사로 1915년을 전후해 출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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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명근; 일제강점기 안악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로써 안중근의 사촌동생이다.

본관; 순흥

출생; 황해도 신천 출신.

 

어려서부터 안중근의 감화를 받고 항일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였고,

이승훈·김구 등 신민회 계통의 인사들과 교유하였다.

1909년10월,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포살 사건이 있은 뒤에,이완용 등을 총살하고 북간도로 가서

   양병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할 계획을 세웠다.

   배경진·박만준·한순직과 자금 모집을 추진하였다.

1910년11월, 황해도 송화의 신석효로부터 3,000원, 신천의 이완식으로부터 6,000원을 얻고,신천의 민병찬

   ·민영설 등에게 10만원을 요구하여 준비해 놓겠다는 약속을 받고 돌아왔다.

   그러나 민병찬·민영설 등이 재령 헌병대에 밀고하여 이해 12월 평양에서 붙잡혔다.

   뒤이어 군자금을 보관해두었던 배경진과 박만준·한순직·원행섭 등이 붙잡혀 모두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것이 안명근 사건, 즉 안악 사건의 발단이었다.

   안명근의 자금 공작은 당시 활발히 진행되던 황해도에서의 애국계몽운동 '비밀결사 신민회'의 사업의

   일환, 특히 교육 운동과는 무관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운동을 정치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그 관련성을 자백받고자

   70여 일간 고문,회유했으나 끝내 부정하였다.

   그렇지만 일제는 안악을 중심으로 160여 명의 요시찰자를 붙잡아 ‘내란 미수·모살 미수·강도 및 강도

   미수죄’를 날조하여 18명을 재판에 회부하고 그 밖의 40여 명은 거주를 제한하였다.

   대부분 궐석 재판으로 이루어진 판결 결과는 안명근 종신형,김구를 비롯한 7명은 15년형 등이었다.

   안악 일대에 대한 정치적 탄압은 평안남북도로 연장되었다.

   그 과정에서 신민회 조직이 탄로나고 일제가 이들을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사건과 연루시켜 105인

   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안명근은 10년간 복역 후 출옥,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 운동을 계속하다가 길림성의 의란현 팔호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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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12월27일,안명근이 초대 조선 총독 데라우치를 사살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다.


1910년10월1일부터 위압을 떨치기 시작한 조선 총독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105인 사건'을 일으켜 민족

지도자 윤치호·양기탁,이승훈 등을 전국에 수배, 일제히 검거하였다.

주동적 임무를 띤 안명근은 종형 안중근의 쾌거를 본받아 치밀하게 거사를 준비하였다.

일본 경찰의 안씨 일족에 대한 감시가 혹심해서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으나, 

총독 등 일제의 침략 수뇌부를 폭살 제거할 계획을 수립하고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한 뒤 서간도에 잠시 이주하였다.그 일대에 무관학교를 건립하여 무장 독립군을 양성할 원대한 계획도 병행시켰다.

이를 실현키 위해 국내에 온 안명근 배경진·박만준·한순직 등과 군관학교 설립의 구체적인 의견을 교환했다.

군관학교의 자금 조달을 황해도 신천 출신 이원식과 송화 출신 신석효에게 받고,신천 출신의 민병찬,민영설에게 군자금을 요구했으나 이들은 불응하였을 뿐 아니라 재령의 일본 헌병대에 밀고하여 안명근은 전국에 지명 수배되었다.

국내에 은신 중이던 안명근은

1910년12월27일, 일제의 대륙 침략의 관문인 압록강 철교의 준공식에 데라우치가 참석할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고 이 기회를 이용해 안명근은 평양역 근처에 대기하면서 데라우치를 암살할 계획을 준비하던 중

   일본 경찰에 잡히고 말았다.일본 경찰은 당시 안명근이 소지하고 있던 거금을 데라우치 사살 자금으로,

   소지하고 있던 권총 등 무기는 거사용이라 하여, 이른바 암살 기도범으로 입건하였다.

   고문에 못이겨 자백하고 말았고 일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안명근이 신민회 회원임을 알아차렸다.

1911년1월, 전국 경찰에 명해 윤치호·양기탁·이승훈·유동열·김구·김홍량·최명식·도인권·안태국 등 신민회

   민족 지도자 600인을 검거하였다.

   그 중 105인을 기소, 105인 사건을 야기하였다.

   안명근의 데라우치 사살 미수 의거로 인해 신민회 사건과 105인 사건이 연속적으로 일어난 셈이다.

   안명근은 법정에서 정정당당하게 투쟁하다가 무기 징역을 언도 받고 10년간 복역한 뒤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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