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3월 1일 영국 동양함대사령관 W.M. 도웰 제독은 영국 동양함대 소속 군함 3척을 거느리고 일본 나가사키 항을 출발, 다음날 거문도를 불법 점령했다. 거문도사건은 영국이 러시아의 해군기지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공격하기 위한 공격책이었다. 영국 외상 로즈베리는 1886년 3월 다른 나라들이 거문도를 점령하지 않는다면 거문도에서 철수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은 1887년 2월 5일이었다. 거문도 사건은 당시 세계 도처에서 대립하던 영국과 러시아라는 제국주의 상호간의 정치적 대립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이 사건의 해결과정에서 극도의 허약성을 드러냄으로써 이후 서구열강의 문호개방의 요구와 더불어 본격적인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었다.
텐진 조약은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로 1885년4월18일에 청과 일본 사이에는 맺은 조약이며,
청.일 양국 군대가 모두 철수 할 것이며,이후 청.일의 군대가 장차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때 서로 알릴 것
등을 약속하였다.
이 조약은 뒤에 청.일 전쟁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조선 정부가 청에 군대 파병을 요청하였다.
이때 청은 군대를 파병하면서 톈진 조약에 의거하여 일본에 청군 파병 사실을 알리고,
이에 일본도 다음날 조선에 군대를 파병하여 두 나라 사이에 청,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1885년2월7일 일본 내각은 중국과의 교섭에 있어서의 기본 입장을 결정하였다.
1.양국 군대의 충돌 책임을 중국에 전가시키고 그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할 것,
2.금후의 수습책으로 양국 군대가 조선으로부터 동시 철군할 것을 주장할 것 등이다.
그러나 중국 군대 지휘관의 처벌을 주장한다는 것은 중국을 굴욕적으로 만드는 것으로서 그만한 국력이
있어서 일전을 불사하는 강경 노선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중.일 간에 회담이 있기 이전에 베트남 문제가 해결되어 중국은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이토는 그런 관철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중국 주재 일본 공사에게 일을 맡겨 사후처리 문제만을 기술적인 차원에서 마무리지으려 하였다. 그런데 일본 공사 에노모토나 톈진 주재 영사 하라 다카시 등은 계속 강경노선을 주장하고 있어서 이들에게 일을 맡길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토 자신이 중국에 건너가 리훙장과 직접 담판하기로 결정하였다.
양자의 회담은 4월 3일부터 15일까지 6차례에 걸쳐 있었다.
회담은 책임 문제는 제쳐놓고 사후처리에 국한하여 3개조로 구성된 간략한 조약의 체결로 끝났다. 1. 다음과 같이 의정한다.
중국은 조선에 주찰한 병을 철수하고 일본국은 조선에 있는 공사관 호위 군사들을 철수한다.
서명 조인한 날로부터 4개월 기간 내에 각각 철회를 마쳐 양국 사이에 분쟁 단서의 우려를 없앤다.
중국 군대는 마산포를,일본국 군대는 인천을 거쳐 철수한다. 2. 양국은 다음과 같이 함께 승인한다.
조선 국왕에게 병사를 교련하여 치안을 스스로 충분히 보호토록 권한다.
또 조선 국왕이 외국의 무관 1인 또는 몇 사람을 선발해 고용하여 교연의 일을 위임하여
앞으로 중.일 양국이 조선에서 교련하는 사람을 파견하지 않도록 한다. 3. 장래 만일 조선국에 변란이나 중대 사건이 있어서 중.일 양국 혹은 1국이 파병을 요할 때에는 먼저
문서로서 알려야 하며 그 사건이 진정된 이후에는 곧 철회하여 다시 머물러 주둔하지 않는다.
서명과 더불어 이토는 조선에 있던 일본인을 살상한 중국군의 처벌을 요구하는 조회문을 리훙장에게 발송
하였다. 이토는 다음날 오전 톈진을 떠나 28일 일본에 도착하였다.
일본은 5월 21일 이 조약을 비준하고 7월에 이르러 공사관 호위 병력 1개 대대를 철수하였다.
중국 군대도 같은 시기에 모두 철수하여 갑신정병 대한 중국과 일본 사이의 현안은 일단 타결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의 조선 지배는 더욱 강화되었고 조선 정부는 이런 지배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이번에는 러시아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1880년대 이후부터 구미열강들이 전 세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세계정치는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으로
첨예화하게 되었다.
한반도가 이런 정치적인 대립에 깊게 편입되었다.
계속된 한아밀약 사건이나 영국의 거문도 점령이 이를 말해 준다.
갑신정변은 자주적인 근대국가 형성을 위한 최초의 정치운동이란 점에서 한국사에 있어서 큰 의의가 있다. 전통적인 유교 국제정치 질서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관계를 다시 근대국제법 질서에서 말하는 주종관계로 설정하려는 보수 · 반동세력을 척결하고 구미 국제정치 질서의 세계적인 팽창에 자주적으로 대처하려는 정치운동이었다고 본다. 근대적인 구미 국제정치 질서의 구성원이 되는 전제조건이 바로 자주적인 근대국가의 형성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한국사에 있어서 이런 획기적인 사건으로서의 갑신정변의 실폐 요인은
박영효는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을 일본의 갑작스런 정책 변화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중국-프랑스 전쟁이 끝나고 다시 화평의 기운이 무르익자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또다시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정책변화를 알리는 이노우에 외상의 밀서가 창덕궁에서 중국군과 접전을 하고
있던 다케조에에게 전달되었다.
이에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었고 따라서 일본인 모두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박영효는 다음으로 개화당 자신들의 실책을 들고 있다.
먼저 한성판윤 심상훈을 자파로 오인한 김옥균의 잘못을 탓하고 있다.
12월5일이 되자 심상훈은 계속 외출을 요청하였는데 이를 거절했던 박영효와는 달리 김옥균은 소홀하게
그를 경우궁 뒷문을 거쳐 외출케 함으로써 내부비밀이 소상히 상대방에게 누설되었다는 것이다.
박영효는 또한 서재필의 실책을 들고 있다.
고종과 비빈 제궁의 진찬은 하루 세 번씩 경우궁 밖에서 들여왔는데 그 검사는 서재필이 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12월 5일에 식기 밑에 밀서가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이 밀서를 본 고종이 계속 창덕궁으로 돌아갈 것을 고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적군이 쉽게 공격할 수 있는 창덕궁으로 환궁한 것이 결과적으로는 직접적인 패인이 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갑신일록'에 보면 김옥균과 박영효가 환궁에 반대했고 다케조에가 고종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되어 있는데 박영효는 자신만이 환궁에 반대하고 김옥균과 다케조에가 찬성하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하여간 환궁이 이루어지자 박영효는 “세(勢)는 이미 지났다.”라고 한탄하였고 훗날 춘원 이광수에게도 “김옥균이 어름어름하다 상감을 놓쳐 버렸죠.”라고 고균을 원망하였다.
박영효는 자신의 과오도 인정하고 있다.
12월6일 그가 총기검사를 하고 보니 모든 총들이 녹이 슬어 있어 모두 해체하여 소제케 하였는데 오후에
이르러 중국 군대의 공격이 시작되어 낭패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개화파 인사들이 정변을 일으키면서 충분한 자금이 없었다는 것이 실패원인의 하나일 것이다.
김옥균이 정변에 임하면서 정치자금이 없었음은 전술한 바 있다.
정변이 일어나자 병사들은 밀린 급료의 지불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것이 그들의 사기에 큰 지장을 주게 되었다.'갑신일록'12월 6일조에 보면 김옥균은 그 바쁜 와중에서도 다케조에 공사에게 우선 ‘목전의 급’을 완화하기 위하여 300만 달러의 차입을 요구한 것도 이런 사정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갑신정변의 실패는 당시 역사적인 단계의 한계성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정변의 정치적인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계층은 극히 일부의 선각자들에 국한되어 있었다.
근대적인 정치의 경험과 훈련이 없는 단계에서 근대적인 정치운동을 시도한다는 것은 실패하게 되어 있다. '고균' 2호에 실린 서재필의 회고에도 “일반민중의 성원 박약”을 실패의 일차적인 원인으로 꼽고 있는 것도 이러한 역사적인 한계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서재필(徐載弼, 1864. 1. 7~1951. 1. 5) 선생은 1864년 1월 7일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文德面) 가천리(可川里)에서 부친 서광언(徐光彦)과 모친 서주(星州) 이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본관은 대구, 호는 송재(松齊)이다. 당시 선생의 부친은 동복군(同福郡 : 보성군의 옛 지명)의 군수였고, 모친의 친정 또한 여기에 있었다. 때문에 선생은 외가가 있던 가천리에서 태어났지만, 곧 충청남도 논산군 구자곡면 금곡리 본가로 보내져 성장하였다. 그러다가 인근 대덕군에 살던 근친 서광하(徐光夏)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선생은 일곱 살 무렵 서울로 보내져 양모 안동 김씨의 동생인 김성근(金聲根)의 집에서 과거를 대비하여 한학을 수학하였다. 김성근은 1862년 문과에 급제한 뒤 당시 판서 직에 있었으며, 그의 집에는 개화파 지도자인 김옥균이 일가로서 자주 드나들고 있었다. 따라서 선생은 그 집에서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15세 연상인 김옥균과 자연스럽게 접촉하게 되었고, 또 그를 통하여 박영효(朴泳孝)와도 알게 되었다.
이들과 함께 초기 개화파의 중심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서광범(徐光範)은 그의 5촌 당숙이었다. 때문에 선생은 김성근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초기 개화파의 핵심인물들과 알게 되어 그들의 개화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1882년 3월 선생이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서적발간을 담당하는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로 활동하게 되면서 그들과 빈번한 접촉을 통하여 개화사상을 심화시켜 갔다. 그리하여 문과에 급제한 양반 관료임에도 불구하고 1883년 김옥균의 권유로 일본 동경의 호산(戶山)육군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여기에서 선생은 14명의 한국청년들과 함께 1년여 동안 근대식 군사교육과 지리학 등 신학문을 익혔다. 비록 짧은 기간의 일본 유학이었지만 이를 계기로 개화와 개혁을 통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겠다는 자신의 신념을 더욱 확고하게 하였다.
1884년 7월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뒤 고종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사관학교의 설립을 건의하였다. 고종도 이를 승낙하여 선생은 조련국(操鍊局) 사관장(士官長)에 임명되었으나, 일본세력의 침투를 우려한 청나라와 임오군란(壬午軍亂) 이후 수구정책으로 회귀한 친청 정권의 반대로 사관학교 설립이 지지부진하게 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급진적인 개화와 개혁을 꿈꾸게 되었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1884년 12월 4일 김옥균․박영효․서광범․홍영식(洪英植) 등 급진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켰다. 우정국(郵政局)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거사에 돌입한 정변에서 선생은 청년 사관생도들을 지휘하여 고종을 호위하고, 수구파 인사들을 제거하는 일을 맡았다.
개화당 정부는 서정쇄신과 근대적 사회개혁 이념을 담은 14개조 개혁강령을 반포하였지만, 청나라의 무력개입으로 3일만에 붕괴되고 말았다. 이때 선생은 병조참판 겸 정령관(正領官)에 임명되어 군사분야의 개혁과 근대화 책임을 맡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변의 실패로 말미암아 후일을 기약하면서 1884년 12월 11일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과 함께 상선 천세환(千歲丸)을 타고 일본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에서 ‘대역부도(大逆不道)’죄인으로서 정변 주모자의 인도를 집요하게 요구하였고, 일본 정부 또한 한일 관계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하여 당초 기대와는 달리 이들을 냉대하였다. 이 같은 태도변화는 교활한 일본인들의 속성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친청(親淸) 수구정권을 몰아내기 위해 개화파를 지원하더니, 이제 한국 정부와의 관계개선에 이들이 걸림돌이 되니 헌신짝처럼 취급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선생은 1885년 4월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낯선 이국 땅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선생은 ‘내 생활은 내 힘과 내 손으로 개척하리라’는 결심을 가지고 1년여 동안 낮에는 노동을 하고 밤에는 기독교청년회에서 영어를 배우는 고단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1886년 9월 미국인 독지가의 후원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펜실베니아 주 윌크스베어 시로 이주한 뒤, 이곳에 있는 해리힐맨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역사․철학․과학 등 서구 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서구 학문과의 만남은 선생으로 하여금 일본식 문명 개화론을 극복하면서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적 사고를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미국생활에 좀 더 적응하기 위해서 1888년 필립 제이슨(PhilipJaisohn)으로 개명하고 미국에 입적하게 된다. 이 같은 결정에는 ‘대역부도’의 죄인이었기 때문에 다시는 귀국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 결정적인 동기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와 아울러 정변 참여로 말미암아 부모와 형, 부인은 음독자살하고, 친동생 재창(載昌)은 참형 당했으며, 아들(2세)은 굶어 죽은 가족참변 또한 중요한 이유로 작용했던 것 같다.
1889년 6월 해리힐맨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이어 라파예트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학비 문제로 2년 만에 중도 퇴학할 수밖에 없었던 선생은 우선 학자금을 마련한 뒤 공부를 계속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리하여 1890년 펜실베니아주에서 워싱턴으로 이주하여 미 육군 군의(軍醫) 총감부 도서관의 번역원으로 취업하였다. 여기에 근무하면서 1891년 조지 워싱턴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세균학을 전공하였다. 그리고 주경야독으로 1894년 6월 동 대학을 졸업하고 가필드 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모교인 조지 워싱턴대학에 출강하게 되었다. 그 후 워싱턴에 개인병원을 개업하고 1895년 6월 미국 여인 뮤리얼 암스트롱(M.S.Armstrong) 양과 결혼하여 가정적인 면에서나 재정적인 면에서 안정을 찾게 된다.
이즈음 국내에서는 1894년 7월 23일 일본군이 궁중에 난입하여 친청 수구정권이 무너지고 새로 김홍집(金弘集) 내각이 세워졌다.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중심으로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리고 갑신정변 주동자에 대한 사면령이 내려져 박영효․서광범 등이 귀국하여 복권되었다. 특히 1895년 5월 박정양(朴定陽) 내각이 성립되자 이 내각의 실세였던 내무대신 박영효는 개화당 동지인 서재필을 외무협판으로 임명하고 귀국을 종용하였다. 하지만 당시 선생은 병원을 개업한 직후일 뿐만 아니라 결혼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귀국하지 못했다. 그 후 1895년 7월 실각한 박영효가 미국을 방문하여 재차 귀국을 권유하자, 선생은 같은 해 12월 26일 고국을 떠난 지 10여 년 만에 그리던 조국 땅을 다시 밟았다.
1896년 1월 귀국 직후 갑오개혁에 의해 입법기관으로 설치된 중추원(中樞院) 고문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선생의 주된 관심은 정치 참여보다는 국민계몽에 있었다. 그것은 당시 선생이 “우리 나라의 독립은 오직 교육, 특히 민중을 계발함에 달렸다는 것을 확신하였기 때문에 우선 신문 발간을 계획하였다.”고 한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이 같은 확신에서 국민계몽의 수단으로서, ‘벼슬을 하지 않고 민중교육의 의미로 신문을 발간하여 정부가 하는 일을 국민들이 알게 하고, 다른 나라들이 조선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를 일깨주는 일(‘체미50년’ <동아일보>1935. 1. 3)을 하기 위하여’ 우선 대중신문의 발간을 계획하고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정부에 건의하여 보조금을 받고 개화파 인사들의 후원 아래, 1896년 4월 7일 우리 나라 최초의 민간 대중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이 서재필을 구미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한다는 임명장(1921).
<독립신문>은 가로 22㎝, 세로 33㎝의 평판 중형의 크기로 4면 발행되었는데, 1면과 2면은 논설․관보․잡보․외국통신, 3면은 광고를 순 한글로 실었고, 4면은 영문으로 논설을 비롯한 국내 정치활동을 소개하였다. 당시 한문을 진서(眞書)로 생각하고 있던 때에 순 한글로 발행한 것은, ‘우리 신문이 한문을 아니 쓰고 다만 국문(한글)으로만 쓰는 것은 상하귀천이 다 보게 함이라’고 독립신문 창간사에서 밝힌 바대로 한문을 모르는 대다수 국민들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같은 글에서 ‘한문만 늘 써버릇하고 국문은 폐한 까닭에 국문만 쓴 글을 조선 사람이 도리어 잘 알아 보지 못하고 한문을 잘 알아보니 그게 어찌 한심하지 아니하리오’라고 한 탄식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우리 말과 글을 범용하게 하려는 어문(語文) 민족주의적 의도를 지닌 것이기도 하였다.
선생은 독립신문의 논설이나 각종 기사를 자신이 직접 썼다. 특히 논설을 중요시하였는데, 그것은 이를 통해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근대 사상과 제도를 소개하여 국민을 계몽하고, 자주 독립정신을 고취하려고 한 때문이었다. 따라서 독립신문 논설에서, ‘백성마다 얼마큼 하나님이 주신 권리가 있는데 그 권리는 아무라도 뺏지 못하는 권리요, 그 권리를 가지고 백성 노릇을 잘 하여야 그 나라 임금의 권리가 높아지고 전부 지체가 높아지는 법’이라고 하는 천부인권설(天賦人權說)에 바탕을 둔 서구 민권 사상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나라가 지탱하는 것은 법률 하나 가지고 지탱하는 것이거늘 아무나 나라 백성을 임의로 잡아 가두고 재판 없이 형벌을 한다던지 연고 없이 무한하게 구류하는 것은 나라 법률을 멸시하고 임의로 천단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무릇 나라의 모든 일은 법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근대적 법치주의의 실천을 강조하였다.
이 밖에도 열강의 이권 침탈에 반대하여 주권 수호를 주장하면서 자주 독립의식을 고취하는 등 ‘국민의 권리와 나라의 자주 독립을 주장’하는 논설을 자주 실었다. 뿐만 아니라 각종의 강연과 토론회에서 서양의 사정과 세계의 형편을 알려주는 한편 자유 민주주의를 전파하여 봉건 백성을 근대 국민으로 거듭나게 하려고 하였다. 나아가 나라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서는 전제 군주제를 입헌 군주제로 개혁하고, 의회를 설립하여 여기에서 외국과의 조약을 감독하고 비준하는 권한을 가져야 열강의 침략을 막고 국민의 자유 민권도 신장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운동의 연계선상에서 1896년 7월 2일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그 고문이 되었다. 독립협회는 국민계몽 및 정치․사회운동 단체로서 우리 나라의 자주 독립과 근대화를 추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우선 독립협회는 자주 독립의 국민적 상징물로서 독립문 건립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1897년 11월 국민성금을 모아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그리고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으로 개수하여 독립협회의 집회장소와 사무실로 사용케 하고, 그 일대를 독립공원으로 꾸몄다. 이러한 일련의 행사는 1897년 10월에 있었던 ‘대한제국 선포 및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어우러져 우리 나라의 자주 독립을 대내외에 천명하는 한편 민족 자존의 기개를 한껏 분출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우리 나라는 열강들의 각종 이권 침탈에 의해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는 형상이었다. 특히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친러․친미 연립정권이 들어서자 우리 나라의 각종 이권은 열강에게 무더기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러시아는 함경북도 경원(慶源)․종성(鍾城) 일대의 광산채굴권, 두만강․압록강 유역과 울릉도의 삼림채벌권, 동해의 포경권(捕鯨權) 등을 빼앗아 갔다. 미국은 경인철도 부설권, 평안북도 운산(雲山) 금광 채굴권 등을 차지하였다. 그리고 1895년 3국 간섭 당시 러시아와 보조를 같이했던 프랑스는 경의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 그밖에 일본․독일․영국 등도 우리의 각종 이권을 침탈하고 있었다.
특히 러시아는 1897년 9월부터 석탄기지로 사용하겠다고 부산의 절영도(絶影島) 조차를 요구하고, 이의 관철을 위해 1898년 1월 군함을 부산에 파견하고 군대를 상륙시켜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었다. 이 같은 압력에 굴복하여 정부가 이를 승인하려고 하자 선생은 이에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대중적인 반대운동을 전개하도록 지도하였다. 이에 따라 독립협회는 1898년 3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주권수호 및 이권침탈 반대 민중대회로서 만민공동회를 서울 종로에서 개최하였다. 여기에 모인 8,000여 명의 군중들은 열강의 한국 침략정책을 규탄하면서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결사 반대하고, 나아가 러시아인 재정고문과 군사교관, 그리고 한러은행의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여 이를 관철시켰다.
이와 같은 선생의 활동은 우리 민족의 독립사상과 민권사상을 크게 신장시켰으나 수구파 대신들과 한국에서의 이권획득에 혈안이 된 열강의 미움을 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따라서 일본과 러시아 공사의 술책과 위협으로 정부는 선생을 중추원 고문에서 해임함과 동시에 미국 공사에게 선생의 추방을 교섭하였다. 미국 공사 또한 한국 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출국을 종용함에 따라 선생은 당초 의도했던 국민계몽을 통한 조국의 근대화와 자주 독립 기틀 마련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1898년 5월 14일 독립협회 회원들과 작별하고 미국으로 떠나고 말았다.
다시 미국에 도착한 선생은 곧바로 미 육군성의 임명을 받아 외과의사로서 미․스페인전쟁에 종군하였다. 그리고 1898년 12월 전쟁이 끝나자 펜실베이니아에 개인병원을 개업하고, 대학에서 해부학을 강의하면서 지냈다. 그러던 중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다시 조국의 독립운동에 적극 투신하게 된다. 국내의 거족적인 3․1운동 소식을 접한 재미 한인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는 3월 15일 ‘재미한인전체대표회의’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 재미동포들은 끝까지 조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참여할 것을 다짐하는 12개 항의 결의안과 3개 항의 실천사항을 채택하였다. 그 결의안 가운데 하나는 ‘서재필을 외교고문으로 임명하여 필라델피아에 외교통신부를 설치할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선생은 가산을 정리하여 필라델피아에 외교통신부를 설치한 후 한국의 독립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고 일제의 침략과 만행을 규탄하는 외교와 선전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 같은 선전활동의 일환으로 미주에서의 한국 독립선언식을 계획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3일 간 선생의 주도로 필라델피아의 한 극장에서 150여 명의 재미 한인대표, 미 상원의원과 시장 등 다수의 미국인 후원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 : 일명 제1차 한인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선생과 이승만(李承晩)을 비롯한 재미 한인대표들은 한국의 독립을 촉구하면서 1919년 4월 13일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다음과 같은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한인자유대회 결의안 1. 재미 한인은 중국 상하이에 건설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며 후원하기로 결의한다. 2. 구미 각국에 대한민국 외교사무부를 설치하기로 한다. 3. 구미 각국 민중으로 하여금 우리 독립선언의 주장과 국내외 사정을 이해하게 하는데 노력하기로 한다. 4. 일본 정객에게 충고문을 보내어 일본의 실책을 각오하게 한다. 5. 미국 정부와 국제연맹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기로 한다.
그리고 대회의 마지막 행사로 참석한 모두는 태극기를 들고 필라델피아 시내를 시위 행진하면서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표출 선전한 뒤, 선생의 사회로 미국 독립관에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미국인이여, 한국의 독립을 도와라.” 미국 유력인사들을 ‘한국친우회’에 가입시켜
이와 같은 활동으로 선생은 임시정부의 대미외교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그에 따라 4월 25일 필라델피아의 대한인국민회 외교통신부는 임시정부 산하의 대한민국 통신부로 변경되었다. 선생의 책임 아래 운영된 대한민국 통신부는, 한국의 소식을 구미 각국에 선전하며 한국 독립에 공감하는 친한미국인(親韓美國人)을 모아서 한국친우회를 조직하고 그로 하여금 한국 독립운동에 관한 외교 사업을 협찬하게 하는데 그 일차적 목적이 있었다. 아울러 한국 문제를 강연하는 사람들의 연설문 작성과 재료를 공급하며 영문 출판과 선전문 제작에 협조하여 한국 선전에 노력하는 것이었다.
서재필의 부인인 뮤리얼 암스트롱의 중년기 사진.
이에 따라 우선 1919년 5월 톰킨스(Tomkins) 목사와 협력하여 한국친우회(TheLeagueofFriendofKorea)를 조직하고, 여기에 미 상원의원들과 저명인사들을 회원으로 가입시켜 한국의 독립을 위한 지원활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의 노력으로 미 상원과 하원에서 한국문제가 토의되고, <한국 독립 찬조 결의안>이 제안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1919년 8월부터 1921년 12월 재정난으로 중단될 때까지 <한국평론(KoreaReview)>이라는 월간 잡지를 발행하여 한국 독립을 위한 대중적 선전활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였다.
<한국평론(KoreaReview)>은 당시 미국민을 상대로 한 유일한 월간 잡지로서 다른 해외지역에서의 한인들이 발간하던 선전간행물 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으로 평가되며, 일본의 대미역선전(對美逆宣傳)을 막는데 힘쓴 잡지였다. 이 잡지의 주된 논점은 일본의 한국식민지화는 불법적으로 이루어졌고 한국에서의 일본의 개혁정책은 순전히 허구일뿐 아니라 기만적이라는 것, 한국은 오랜 기간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누려왔고, 현재 충분히 그러한 자치능력과 민족정신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라는 것 등 미국민에게 한국의 진실을 알리는데 주력하였다.
“한국이 일본에 대해 전쟁 개시하면 미국이 지원해달라.” 미국 대통령 당선자 하딩에게 요구
1919년 9월 이승만은 통합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발족시켜 구미에서의 정부행정을 대행하게 하면서 외교업무를 주관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통신부도 여기에 흡수 통합됨에 따라 선생은 처음에는 구미위원부의 부위원장, 그리고 1920년 6월 초대 위원장(金奎植) 사임 이후에는 위원장으로 대미외교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1921년 1월 선생은 오하이오주 메리온시에서 미국 대통령 당선자 하딩과 회견하고, ‘한중 양국이 대일(對日) 개전을 하면 미국은 이를 후원할 것’을 요청하면서 한국 독립에 미국이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그런 직후 미국․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등 태평양지역에 이해 관계를 가진 열강들이 군비축소 문제와 극동정책을 논의하기 위해 국제회의를 11월 11일 워싱턴에서 열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임시정부에서는 이 태평양회의(혹은 워싱턴군축회의)에 한국문제를 상정시켜 파리평화회의에서 이루지 못한 독립의 목적을 다시 한 번 관철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임시정부에서는 대통령 이승만을 전권대사, 선생을 전권부사로 하는 한국 대표단을 구성하여 적극적인 독립 외교활동을 벌이게 하였다. 이에 선생은 미 국무장관 휴즈를 방문하여 일본이 한국 독립운동자를 학대 학살하는 진상을 폭로하고, 태평양회의에서 미국이 한국의 독립문제를 공식적으로 거론하여 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고 12월 28일 한국 독립을 요구하는 국내 13도 260군 대표 및 각 사회단체 대표 370여 명이 서명한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와 아울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요구서를 정식으로 접수시켰다. 선생을 비롯한 한국 대표단의 이러한 독립 외교활동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한국 민족의 독립열망이 얼마나 간절한 것인가를 다시 한 번 각국 대표들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서재필, 김규식, 여운형 사진(1947) 서재필이 귀국하자 마중 나온 김규식, 여운형과 함께 차에서 촬영한 사진. 가운데가 서재필, 양 옆이 각각 김규식과 여운형.
일본 대표의 온갖 방해 물리치고 하와이 태평양문제조사회에 참가
이 같은 독립 외교활동은 1925년 열린 태평양회의에서도 이루어졌다. 이 회의는 태평양지역 여러 국가와 국민의 상호관계개선을 목적으로 하여, 이들 국민의 국내 및 국제적 사정을 조사 연구하는 사설 단체인 태평양문제조사회가 처음으로 개최한 국제회의였다. 이 회의가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개최되자 선생은 일본 대표의 갖은 방해공작을 물리치고 한국 대표로 참석하였다. 여기에서 일제의 한국 침략과 만행을 폭로 규탄하고, ‘한국문제는 일본과의 문제만이 아니라 동양의 문제요, 전세계 인류의 문제다. 우리는 세계 어느 구석에서도 정의가 무시되고 인도가 유린됨을 묵인할 수 없다.’고 하면서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이와 같이 1919년 3․1운동을 전후하여 192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 선생의 독립 외교활동은 3․1운동으로 표출된 국내 독립운동의 정신을 선전 외교활동을 통해 미주 한인 사회뿐 아니라 국제사회에까지 지속시킴으로써 국제적으로 친한여론(親韓輿論)을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더욱이 이러한 활동이 당파(黨派)를 조성하지 않고 미주 한인사회의 단합을 바탕으로 전개되었다는 사실은 선생의 인품과 지도력을 돋보이게 하는 부분이다.
3․1운동 이후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선생의 독립 외교 및 선전활동은 거의 사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선생은 드디어 무일푼의 처지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다시 의학수업과 의료활동에 복귀할 수밖에 없게 되었으며, 이후 적극적인 독립운동에 참가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1942년 3월 1일 선생은 워싱턴에서 미주 및 하와이 동포들이 개최한 태평양전쟁 전승기원 기념식에 참가하는 등 조국광복의 염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또한 선생은 1942년 8, 9월 뉴욕 시카고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천세헌(’95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선생에게 보낸 서한 내용에서 한국 독립을 위해선 젊은 한인들의 활동이 중요하며 무엇보다 한인단결이 우선되어야 함을 지적하였다. 또한 실질적인 한인대표를 통한 대미외교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선생은 노령에다 궁핍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미국 내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원로로서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광복 후 선생은 미군정 사령관의 초빙으로 1947년 7월 83세 나이로 미군정 최고고문으로 귀국하여 이듬해 9월까지 한국에서 머물렀다. 몇몇 인사들이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자신으로 인해 정치적 소용돌이를 일으킬 수 없다고 판단, 결국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1951년 1월 5일 87세의 생을 마쳤다.
1884년 청,프 전쟁에서 청군의 패배가 지속되자 때를 틈타 조선을 근대적 국가로 탈바꿈 하려는 목적으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곧 정권을 장악했으나 청군의 무력개입과 지지층의 결집을 이끌지 못해 3일 만에 끝나고 말았다.
정변 실패 이후 김옥균은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1894년 상하이로 건너 갔다가 자객에 의해 암살당했다.
저서로는 '기화근사','치도약론', '갑신일록' 등의 저서를 남겼다.
7세 때 천안에 사는 당숙인 김병기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했다.
11세 때 김병기가 강릉부사로 가게 되자,
16세까지 강릉 송담서원에서 율곡 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했다.
1872년(고종9년) 알성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전적을 거쳐 1874년 교리·정언을 지냈다.
이때 그는 개화통상론자이며 정계의 거물이었던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유대치,오경석 등의 지도
를 받고, 박영효,서공범,홍영식 등과 교유하는 가운데 개화사상을 배우고 발전시켜 나갔다.
한편 동지를 규합하여 일종의 정치적 결사체를 조직하기에 이르렀다.
이무렵 집권층이 문호개방을 추진하기 시작하자 개화파는 각광을 받으면서 개화운동을 추진했다.
개화파는 조선사회를 근대화시키기 위해 정치세력을 확보하고 군사력을 양성하는 동시에,
통리아문 설치 등 정부기구의 개편, 군제개혁,'한성순보'의 간행 등을 주장했다.
나아가 식산 흥업을 위하여 공장 제도에 따른 공업 건설,광업 개발,선진 과학기술의 도입,상회사제도의
장려,농업의 개발과 양잠의 장려,임업의 개발,어업과 포경업의 개발,기선 해운업의 도입 등을 추진했다.
또한 1879년 일본 근대화의 실태를 알아보도록 신사 유람단의 파견을 주선했다.
그 자신도 1882년 일본에 건너가 메이지(명치)유신의 진행 상황을 살펴보고 일본 정치가들과 민간 지도자들을 접촉하는 한편, 일본과 중국의 지식인이 결성한 '흥아회'라는 친목회에 참가하여 토론도 했다.
귀국 도중 시모노세키에서,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서울로 돌아왔다.
귀국한 뒤 승정원 우부승지,참의 교섭 통상사무에 이어 이조참의,호조참판,외아문협판 등의 요직을 거치며, 일본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조선의 근대화를 급격히 추진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자금력이 대단히 부족했을 뿐 아니라 정치 실세였던 민씨 정권과 그 배후 세력인 청의 방해로 개화파들이 구상한 개화 정책의 추진은 상당히 어려웠다.
당시 청은 3,000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대원군을 납치해가고 임오군란을 진압한 뒤에도 군대를 서울에 그대로 주둔시킨 채 민씨 정권을 재수립하고, 조선을 실질적인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적극적인 내정 간섭을 자행했다. 이러한 정치 정세 속에서 종주권을 주장하는 청으로부터 벗어나 일본식의 적극적인 개화 정책을 추진하려 한 개화파의 행동 반경은 대단히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김옥균은 1882년 9월 수신사 박영효 일행의 고문으로 다시 일본에 건너가 일본에서 17만 원의 차관을 얻는 한편,서광범과 함께 서재필 등 본국에서 선발해 보낸 청년 유학생을 일본의 여러 학교에 입학시킨 뒤 1883년 3월에 돌아왔다.
1883년 6월 고종의 신임장을 가지고 3차로 일본에 건너가 300만 원의 차관을 교섭했다.
이 일은 P. G. 묄렌도르프와 민씨 일파의 반대 공작,일본의 거부로 실패했지만 더 중요한 원인은 일본정부나 민간 재계에서 당시 일본 1년 조세 수입의 22분의 1이나 되는 300만 원이란 거액을 투자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3차례의 일본 방문을 통해 메이지 유신의 성과를 보고 근대화가 더욱 시급함을 깨닫고 개화 정책을
서둘렀지만, 그럴수록 소극적이면서도 온건하게 개화를 추진하던 청과 민영익을 비롯한 민씨 세도 정권과는 더욱 날카롭게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한성 판윤 박영효의 좌천,화폐 주조 문제를 둘러싼 의견 충돌,일본 고야마 육군학교에서 수학하고 돌아온
서재필의 축출 등 집권파의 압력은 계속 가중되었다.
개혁 방식을 둘러싸고 이들과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이에 정치적 위기에 빠진 김옥균 등은 정한론의 분위기가 팽배한 일본을 이용하여 이들을 타도하고자 했다. 즉 정변을 통하여 정권을 장악한 다음, '위로부터의' 급진적인 방법으로 개혁정책을 추진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기회를 엿보았다.
때마침 청은 베트남 문제를 둘러싼 프랑스와의 싸움에 대비하기 위해 1884년 5월 조선 주둔군 1,500명을 안남)전선으로 이동시켜 서울 주둔한 청군은 1,500명만 남게 되었다.
그 해 8월 일어난 청·프 전쟁에서 청군은 패배를 거듭했다.
김옥균은 이를 정변의 호기로 판단, 개화파 정치인을 규합하여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다.
또한 11월 서울에 귀임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가 조선에서의 일본의 약세를 만회하기 위해 그동안 개화파에 냉대하던 태도를 바꿔 군사지원을 약속하자 김옥균은 이들과 화해하고 정변에 착수했다.
1884년12월4일 우정국 준공 축하연에서 개화파는 자신들의 군사력과 일본군을 동원하여 윤태준,한규직,
민태호,민영목 등 민씨일파의 대신들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튿날 이재원을 영의정,홍영식을 좌의정으로 한 새 내각이 조직되었다.
김옥균은 판서가 임명되지 않은 호조참판을 맡아 국가재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준비된 혁신정강을 12월 6일 공포했다.
이 모든 정권 수립 과정은 국왕의 전교 형식으로 이루어졌고, 이는 조보로 서울 장안에 알려졌다.
이때 발표된 개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치면에서는 청과의 전통적 관계를 단절하고 근대적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국왕의 전제권을 축소하고 내각의 권한을 확대한 내각제도, 근대적 경찰제도·군제를 도입한 입헌군주제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경제면에서는 지주자본을 이용하여 농상공업을 육성하고, 국력을 진흥시켜 자본주의 국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중세적 부세제도를 근대적 조세제도로 개혁하기 위한 지조개정도 뒤따랐다.
사회면에서는 문벌·신분제의 폐지를 통한 만민평등을 지향했다. 이는 자본제를 수립하기 위해 신분적인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노동력을 창출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국왕은 이를 추인하고 개혁정치를 천명하는 대정유신의 조서를 내렸다.
그러나 청군은 6일 오후 정변을 무너 뜨리려고 무력 개입을 시작하여 궁궐로 공격해 들어왔다.
외위를 담당한 조선군이 청군에 저항하다 패퇴하자,중위를 맡은 일본군은 무기력하게 배신하고 도망 철수
했다. 이결과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은 그들을 뒷받침할 만큼 시민계층이 성숙하지 못했고, 개혁방향도 지주적 입장에서 추진하였기 때문에 당시 변혁세력이었던 농민의 지지를 끌어내지 못한 데도 있었다.
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은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다.
1885년1월부터 1894년 3월까지 10년간에 걸친 망명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다시 집권한 민씨 정권은 이들을 대역 죄인으로 규정하고 자객을 보내는 한편,
일본 정부에 이들을 체포하여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만국공법상 망명한 정치범을 송환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워 조선 정부의 요구를 거절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용 가치가 떨어진 김옥균을 1886년 8월 태평양상의 고도 오가사와라 섬으로 강제
추방하고, 1888년 7월에는 홋카이도 삿포로에 연금하였으며, 1890년에야 도쿄로 돌아오게 했다.
1894년 3월 일본에 실망한 김옥균은 청의 이홍장과 담판할 생각으로 상하이로 건너갔으나,
민씨 정권이 보낸 자객인 홍종우에게 동화 양행 객실에서 암살되었다.
이 일이 터지자 청은 김옥균의 시체와 홍종우를 조선 정부에 인도했다.
김옥균의 시체는 양화진에서 능지 처참되어 전국에 효시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일본의 민간인과 언론기 관은 김씨우인회를 조직하여 도쿄의 혼간 사에서 장례식을 거행하는 한편, 조선과 청을 응징하자는 시위를 벌여 청일 전쟁을 촉발시키는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그 해 청일 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이 승리하고 개화파의 갑오 정권이 수립되자 이듬해 법부대신 서광범과
1884년(고종 21)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 개화파가 개화 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의 자주 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다.
조선 후기 이래로 조선시대의 사회는 안으로는 봉건체제의 낡은 틀을 깨뜨리고 자본주의의 근대사회로 나아가려는 정치적·경제적·사회적 변화가 일고 있었고, 밖으로는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는 구미 자본주의 열강의 침략 위협이 높아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일부 중인 출신의 지식인과 양반 관료들 사이에서는 조선사회의 사회경제적 모순을 깨닫고 세계역사의 발전방향에 따라서 사회를 이끌려는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다. 이 사상에 따라 내외정치를 개혁하려고 결집된 정치세력이 개화파이다.
김옥균·박영효·서광범·홍영식·서재필 등의 양반 출신 청년 지식인은,
19세기 중엽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의 사상과 그들로부터 받은 서구 사회에 관한 문명서적을 통해서
실학사상의 긍정적 요소와 세계 정세의 흐름 및 자본주의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함으로써 조선 사회의 개혁에 눈을 뜨기 시작하였다.
개항 이후 이들은 민씨 정권의 개화 정책에 참여하면서 점차 김옥균을 중심으로 결집하여 개화 사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하려는 하나의 정치 세력인 개화파를 형성하였다.
개화파 안에서는 개혁의 궁극적 방향을 같이 하면서도 실현 방법에서 입장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온건 개화파인 김홍집·어윤중·김윤식 등은 부국 강병을 위해 여러 개혁 정책을 실현하되,민씨 정권과 타협 아래 청나라에 대한 사대 외교를 종전대로 계속 유지하면서 점진적인 방법으로 수행하자는 입장이었다.
반면에 급진 개화파는 청나라에 대한 사대 관계를 청산하는 것을 우선과제로 삼고 민씨 정권도 타협의
대상이 아닌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개화파는 개항 후 나라 안팎의 정세 변화에 관심을 가지면서 충의계를 통하여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개혁
운동의 수단으로서 당시 서구의 근대 문물에 관심을 표명하던 고종에게 적극 접근하였다.
특히 1880년 이래 조선 정부의 해외 시찰 정책, 즉 일본 수신사와 조사 시찰단의 파견,
청나라로 영선사 파견 등에 박영효·김옥균 등 개화파가 적극 참여함으로써 세계의 정세 흐름과 새로운
문명을 직접 확인하고 자각을 넓혀 나갔다.
또한 개화파는 양반의 자제뿐 아니라 광범한 층의 청년을 모집하여 일본의 군사 사관 학교와 게이오의숙
등에 유학하게 함으로써 근대적인 군사학과 학문·사상 등을 배우게 하였다.
박영효는 1883년 8월 외무아문 아래 박문국을 설치하여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를 발행하였다.
이 신문을 통해서 개화파는 나라 안팎의 정세에 관한 소식은 물론,
구미의 입헌 군주제와 삼권 분립의 우월성 등 그들이 지향하는 개혁의 내용을 선전하였다.
그런데 민씨정권이 부분적인 개화 정책을 실현하고 조선에 대한 일본과 청나라의 침탈이 강화되면서,
개화파의 평화적 개혁노력은 벽에 부딪혔다.
1882년 임오군란은 수구적인 민씨 정권과 급진 개화파의 관계를 정치적으로 급속히 냉각시켰다.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청나라는 조선에 출병하여 봉기를 진압한 뒤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 침략을 획책
하였고, 민씨정권은 청나라에 의지하여 정권 유지를 꾀하였다.
그들에게는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개화파가 큰 위협적 존재였다.
이 때문에 민씨 정권은 개화파에 대한 정치적 압박을 가하였다.
이런 정세 아래 민씨정권에 참여하면서 평화적으로 일대 개혁을 꾀하려던 개화파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1884년 봄 안남(베트남) 문제를 두고 형성된 청나라와 프랑스의 대립 관계는,
개화파에게 다시 한번 자신들의 뜻을 펼 수 있는 유리한 정세를 만들어주었다.
마침내 1884년 8월 베트남에서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청나라는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군사 3000여 명 가운데 절반을 철수시켰다.
1882년 임오군란을 계기로 조선은 민씨 정권의 친청 수구 정책으로 인해 청의 간섭을 받기 시작했다.
이에 개화파는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정변을 계획했다.
개화파는 일본의 후원을 업고
1884년12월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켜 군사권.재정권을 장악한 후 정강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청과의 종속 관계 청산.문벌폐지.탐관오리 처벌·경찰제도의 실시 등이었다.
그러나 청의 공격으로 일본군이 패하자 개화파는 일본으로 망명했다.
정변 실패 후 일본은 공사관이 불타고 거류민이 희생된 일에 대한 책임을 물어 한성 조약을 체결했다.
한반도를 둘러싼 청과의 경쟁에서 불리해진 일본은 청과 톈진조약을 체결했다.
갑신정변의 실패 원인은 개화파가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외세에 지나치게 의존했다는 점이다.
한국사에서 정치 세력으로서 근대적 개혁 문제를 최초로 제기한 것은 개화파였다.
실학의 북학 사상을 계승한 이들은 문호 개방을 전후한 시기에는 박규수.오경석.유대치 등을 중심으로
그 움직임이 보다 적극화되고 조직화 되기 시작했으며,
점차 김옥균·홍영식·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젊은 양반계급 지식인들을 핵심으로 하나의 정치세력을 형성해가며 정부의 개화 정책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임오군란(1882)을 계기로 민씨 정권의 친청 수구 정책은 날로 횡포를 더해갔고,
청국은 군대를 주둔시키며 조선의 식민지 지배를 획책함에 따라 개화파의 정치적 위기는 높아져갔다.
이에 따라 개화파는 정변을 통해 민씨 정권을 무너뜨리고 청과의 종속 관계를 청산할 것을 결정했다.
마침 월남 문제를 둘러싸고 청,프랑스 전쟁이 터져 청국이 패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간섭이 약화되고
또 임오군란 이후 냉담했던 일본 공사가 다시 접근해왔다.
개화파는 일본 공사관의 후원을 확인하고 계획대로 1884년12월4일 우정국 개국 축하연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켰다.
우선 축하연에 참석한 민영익에게 부상을 입힌 다음 국왕과 왕비를 경북궁으로 옮겨 50여 명의 개화파
군사력과 200여 명의 일본군으로 호위케 하고 수구파 우두 머리를 처단했다.
이어서 개화파들은 홍영식이 우의정,박영효가 좌포도대장,서광범이 우포도대장,김옥균이 호조참판이 되어 군사권과 재정권을 장악하고 정강을 제정.발표했다.
정변의 실패로 이 정강.정책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그중 14개 조가 뒷날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하여
저술한 '갑신일록'에 실려 있다.
그 주요 내용은
청국에 대한 종속 관계의 청산, 문벌 폐지와 인민 평등권의 제정 및 능력에 따르는 인재의 등용,
지조법 개혁, 탐관오리 처벌,백성들이 빚진 환상미(還上米)의 영원한 면제,모든 재정의 호조 관할,
경찰제도의 실시,혜상공국의 혁파 등이었다.
청국으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지향했고,
아직 국민 국가 수립을 위한 적극적인 자세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양반 지배 체제를 청산하려 했으며,
또 뒷날의 갑오 농민 전쟁에서 요구된 농민적 토지 소유가 제기 되지는 않았으나 지조법의 개혁이 제시
되었고,왕실 경비와 정부 재정을 구분하고 호조가 국가 재정을 전담케 하며,
특권 상인의 존재를 부인한 것 등은 개화파의 국정개혁 의지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국왕의 정치 혁신 조서가 내려짐과 동시에 청국군의 공격으로 일본군이 패퇴하자 개화파들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다
정변이 실패한 후 일본측은 오히려 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관 직원과 거류민이 희생된 사실에 대한 책임을
물어와 1885년1월 한성조약이 체결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은 일본에 사의를 표명하고 10만 원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일본 공사관 수축비를 부담하게
되었다.
한편 갑신정변의 실패로 한반도를 둘러싼 청국과의 경쟁 관계에서 다시 불리한 처지에 빠진 일본은 정세를 만회하기 위해 이토 히로부미를 전권 대사로 청국에 파견하여 이홍장과 담판하게 한 결과,
조선에서의 청.일 양국군의 철수,장래 조선에 변란이나 중대 사건이 일어나서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에는 그 사실을 상대방에게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 조약을 1885년4월18일 체결했다.
이로써 갑신정변의 뒷마무리는 일단 끝났지만,
이 조약으로 일본은 조선 문제에 있어서 청국과 같은 파병권을 얻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10년 후에 일어난 갑오 농민 전쟁 때 일본의 파병 구실이 되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은 우선 개화파 자체가 민중 세계에 뿌리 내리지 못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들이 지향 할 수 있었던 경제 체제가 자본주의 경제 체제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실현을 위한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없었던 것은 부르주아적인 정치 변혁을 담당할 주체가 아직
충분히 성숙되어 있지 못했다는 점과도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 외세의 압력이라는 데에 자극을 받은 개화파들이
자주적으로 근대화를 달성하려 했으면서도 대다수가 농민으로 구성되어 있는 민중에 대한 고려가 결여되었다는 것은 그들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이러한 한계에서 정변이라는 방식을 통한 위로 부터의 개혁 운동은 외세의 개입 아래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갑신정변이 민중 세계의 지지를 받지 못했던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은 정변이 외세,
특히 일본의 원조를 받고 있었다는 점이다.
갑신정변은 이렇듯 한계를 지니는 것이며,
비록 삼일천하로 끝나 버렸지만 한국사에서 근대 국민 국가의 수립을 지향한 부르주아 민족 운동의 출발점이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신문이다. 1883년 10월 1일(음력) 서울 저동(苧洞:지금의 을지로2가)의 통리아문박문국에서 발행한 월 3회 발간된 순보로, 매월 1일자로 간행되었다.
발간경위는 1882년 박영효(朴泳孝) 일행이 수신사(조선 말 고종 때 일본에 보내던 사신)의 자격으로 일본에 가 머무르면서 국민대중의 계몽을 위한 신문발간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신문제작을 도울 기자와 인쇄공 등 몇 명의 일본인을 데리고 돌아왔다.
귀국하여 곧 한성부판윤에 임명된 박영효는 자주 궁중에 출입하면서 고종에게 신문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신문발간을 진언하였다. 그래서 1883년 2월 28일 고종으로부터 한성부에서 맡아 신문을 간행하도록 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 해 4월 박영효가 갑자기 광주유수(廣州留守)로 좌천되면서 신문 발간작업은 일단 중지되었다. 박영효의 부탁으로 신문 발 의 실무작업을 맡고 있던 유길준(兪吉濬)도 이때 신병을 이유로 관직을 물러나고 말았다.
급진적인 개화론자들에 의한 신문발간은 중단되었으나, 그 의지는 수구파(守舊派)의 신임을 받고 있던 온건개화론자들에 의하여 다시 이어졌다.
즉, 통리아문의 장교(掌敎)였던 김만식(金晩植)이 <통리아문장정 統理衙門章程>에 있는 “동문학(同文學)에서 서적을 간행하고 신문보사(新聞報社)를 개설한다.”는 규정을 들어 신문 발간을 추진하였고, 1883년 8월 17일 고종은 통리아문에 박문국을 설치하여 신문을 발간하도록 허락하였다.
박문국의 초대 총재로는 외아문독판(外衙門督辦:통리아문) 민영목(閔泳穆), 부총재로는 동 협판(同協辦) 김만식이 임명되었고, 이와 아울러 부사과 김인식(金寅植)이 신문 발간 실무책임자로 임명되었으며, 장박(張博)·오용묵(吳容默)·김기준(金基駿)·강위(姜瑋)·주우남(朱雨南)·현영운(玄映雲)·정만조(鄭萬朝)·오세창(吳世昌) 등이 각각 주사(主事:6급 공무원. 사무관 아래, 주사보 위의 직급) 또는 사사(司事)로 임명되었다.
이들 주사 및 사사가 근대적인 신문기자의 전신이었다. 그 밖에도 박영효 등이 일본에서 데려온 이노우에(井上角五郎)도 주재(主宰)로 다시 고용되어 신문간행작업은 본격적인 단계로 접어들었다. 이들은 9월 20일 저동에 마련된 사무실에서 실무작업을 추진하여 창간호를 내놓았다.
이 신문은 ‘순보서(旬報序)’에서 “우리 조정에서 관청을 만들어 외국신문을 널리 번역하고 아울러 국내의 사건도 실어서 나라 안에 배포할 것”이라고 전제하고, “시세를 살펴 흐르지도 말고 빠지지도 말며 좋고 나쁜 것을 취사선택하여 도리에 맞게 구해서 바른 것(正)을 잃지 않는다면, 박문국을 개설하고 신문을 발간하는 취지를 거의 달성하게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기사내용은 크게 내국 기사와 각국 근사(近事)의 기사로 나누어진다. 내국기사로는 관보·사보(私報)·시치탐보(市直探報)를 싣고 있으며, 각국 근사 기사로는 당시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전쟁이나 분쟁, 근대적인 군사장비나 국방방책, 개화문물 등을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각국 근사 기사 가운데는 의회제도나 자유민권사상 등을 소개한 기사도 있으나 수적으로는 매우 적다. 관보의 경우는 주로 ≪조보≫에서 기사를 취재, 보도하였다.
각국 근사 기사는 ≪신보 申報≫·≪호보 滬報≫·≪중외신보 中外新報≫·≪순환보 循環報≫ 등 중국의 신문에서 주로 번역, 전재하였는데, 이들 신문 외 ≪시사신보 時事新報≫·≪동경일일신보 東京日日新報≫·≪보지신문 報知新聞≫ 등 일본의 신문과 기타 여러 나라의 신문기사를 번역하여 보도하였다.
관영신문의 성격을 지닌 이 신문은 발행 직후 각 관아에 배포되어 관리들이 읽게 하였으며, 관아에서는 1부당 동화(銅貨) 50문(文)을 신문값으로 박문국에 납부하였다. 이 신문은 관리 외 일반인도 구독할 수 있었는데, 서울에서는 박문국에 직접 구독을 신청하였고, 지방에서는 경저(京邸)에 연락하여 구독하였다.
이 신문은 1884년 12월 4일 김옥균(金玉均) 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간 뒤, 박문국 사옥과 활자·인쇄시설 등이 모두 불에 타버려 부득이 1년 만에 종간되었으며, 그 뒤 1886년 1월 25일≪한성주보 漢城周報≫로 그 제호를 바꾸어 주간신문으로 다시 발간되었다.
이 신문은 비록 짧은 기간 발간되었으나 한국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서, 외세에 대한 경계의식과 자국에 대한 국민의식을 높이는 한편, 개화문물과 지식 등을 국내에 소개하여 나라의 개화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1년 동안에 40여 호가 발행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로는 창간호에서부터 제36호(1884년 10월 9일자)까지만 서울대학교 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성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