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골은 현재 충혼탑 옆을 가리키는데 ‘가는골’에 대응되는 이름으로서 큰골 혹은 ‘큰골짜기’란 뜻이다.
널찍한 공간인 케이블카 하단부에 도착 한 후 지나면
대덕사와 은적사로 가는 가는 길이 나온다.
우측 대덕사 방향인 이정표를 지나
앞산 주차장과 강당골 방향으로 가면
강당골 방향으로 은적사로 가는 길이 나온다.
강당골은 지금 효명초등학교 운동장 부근에 저수지를 만들어
앞산의 푸른 숲과 골짜기의 맑은 물의 풍치를 살려 제방 주위에 ㄴ자 모양의 누각과
별동의 건물을 지었으며 약 40년 전부터 이 별동의 건물을 강당이라 부른 데서 유래 되었다.
은적사 방향으로 시멘트길을 따라 오르면
강당골로 가는 이정표를 만나 지나면
전망대 역할은 하나도 없는 은적사 전망대 갈림길에서 우측으로
은적사 방향으로 가파른 시멘트길을 오르면
은적사 아래 주차장 삼거리에 도착한다.
공산전투에서 견휜에게 대패하고 도망치던 왕건은
은적사 대웅전 아래 우측의 대나무 숲속 동굴에 3일간 피신해 있었다.
그 뒤 왕위에 오른 왕건은 당시 고승이던 영조대사로 하여금 절을 짓게 하였다.
은적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의 말사로
926년(경애왕3년)에 영조 대사가 창건하였으며,고려의 태조가 몸을 숨겼던 곳이라 하여 은적사로 부른다.
그 뒤 1644년(인조22년)에 취감대사가 중창하였고,1947년에 종원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은적사(隱跡寺)는 서기 926년 신라 경애왕 3년에 창건된 절로서 은적사란 이름이 생기게 된 연유는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이 있다. 신라 말 후삼국 때 후백제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자 신라 경애왕이 고려 왕건에 구원을 요청했다 구원병과 대구에 온 왕건은 팔공산 동화사 방면으로 가다 왕산 산기슭에서 견훤의 군대에 포위를 당해 전멸의 위기에 처했다. 이 때 신숭겸의 계책으로 탈출한 왕건은 왕산 숲을 거쳐 팔공산 염불암에서 다시 하산하여 격전지인 파군재를 거쳐 해안면, 반야월, 안심을 지나서 현재 은적사 대웅전 우측의 대나무 숲속에 있는 자연동굴에 숨었다. 이 굴에서 3일간 머물고 현재 안일사가 있는 곳에서 3개월간 쉰 왕건은 김천 황악산을 경유해 철원으로 회군했다.
당시 왕건이 굴에 숨었을 때, 왕거미들이 견훤의 추격병들이 찾지 못하도록 거미줄을 쳐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왕건이 머문 자연동굴은 왕이 머물렀다고 해서 왕굴이라 부르고, 그와 함께 조금 아래에 있는 동굴은 장군들이 머물렀다 하여 장군굴이라고 한다. 그 밑에는 당시 숨어있던 장군들이 물을 마셨다 하여 장군수라고 불린다. 그 뒤 왕위에 오른 왕건은 자신이 3일간 숨어있으면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 그 굴이 있는 곳에다 당시의 영조대사에게 명하여 숨은 은(隱), 자취 적(跡)자로 은적사라는 절을 짓게 했다. 이것이 은적사가 생긴 연유이다.
우측으로 동상이 위치한 방향으로
앞산 정상이 2.9km (관리 사무소 0.6km) 남은 산길로 들어가
잠시 산사면길을 따라 가면
삼거리 갈림길 이정표(관리사무소 0.7km,대덕사 0.2km,앞산정상 2.8km) 가 나온다.
직진하여 계곡 방향으로 가면 대덕사(0.2km)로 가는 등산로며,
좌측 목계단길을 오르면 앞산 정상(2.8km)으로 가는 등산로다.
앞산 정상 방향으로 목계단을 올라
산사면길을 따라가면
산비탈길 목책을 지나는 평탄한 산사면길이다.
이윽고 만수정 갈림길 이정표(큰골 안내소1.5km,은적사1.2km,앞산 정상 1.6km)에 도착한다.
앞 우측 산사면길에 보이는 아고라가 만수정이다.
만수정 갈림길 이정표에서
좌측 앞산 정상 방향으로 계곡을 따라 오르는 등산로를 오르면
긴급 구조 안내판 '가-ㅣ번'을 지나 가파른 계곡길로 오르면
만수정 갈림길에서 0.2km오른 청수정에 도착한다.
청수정에는 약간의 운동 기구와 벤치가 마련되어 있어 잠시 쉬어 갈수 있으며,
청수정 끝지점으로 가면 '청수천'이란 약수터가 나온다.
바가지로 물한모금을 받아 보니 다시 모이는 약수터다.
청수정 약수터를 지나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긴급구조 안내판 '가-2'번 지점에서
뒤돌아 내려다 본 약수터/운동기구/벤치와 아고라가 있는 청수정 모습이다.
구조 안내판 "중부 앞산5 청수정 약수터 위)을 지나면
계곡으로 오르는 가파른 등산로다.
벤치를 지나
목계단을 오르고
목다리를 건너 목계단을 오르면
긴급 구조 안내판 '가-4번' 지점을 지나 급경사 오르막 목계단을 오르면
앞산 공원 안내도와 이정표가 위치한 산성산과 앞산 갈림길 주능선에 올라선다.
큰골 안내소에서 2.3km 오른 지점으로
좌측은 산성산 정상(1.2km)으로 가는 능선길이며,
우측은 앞산 정상(0.8km)로 가는 능선길이다.
안내도에서 앞산 방향으로 능선길을 오르면
상인동 삼국시대 고분 유적지를 지나
목책을 지나면
봉우리에 위치한 성불정에 도착한다.
성불정 앞 조망 바위에 올라 바라보면
멀리 최정산의 송신탑이 보이고
청룡산으로 가는 능선과 고개를 살짝 내민 청룡산,
도원지와 도원지 뒷편으로 삼필봉으로 오르는 능선,
뒷편으로 용문산으로 오르는 능선,
뒷편으로 함박산으로 오르는 능선,
뒷편으로 옥포의 대방산과 금계산이 조망되고,
우측으로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이 조망되며,
대덕산 봉우리가 조망된다.
조망 후 성불정을 떠나
한창 공사중인 데크 계단 옆으로 내려가면 목책길이 이어진다.
데크 계단을 오르면
긴급구조 안내판 '주-10"번이 위치한 능선에 올라
암릉의 데크 게단을 올라
너덜겅 지대를 오르면
헬기장에 도착한다.
앞산 정상과 대덕산이 보이는 헬기장이다.
이 곳에서 0.3km가면 앞산 정상이다.
헬기장 이정표에서 앞산 정상 방향으로 능선길을 따라가면
큰골 안내소에 2.9km 오른 달서구 상인동의 원기사(달비골;2.8km)로 하산 하는 이정표 갈림길에 도착한다.
갈림길에서
앞산 정상(0.2km),케이블카 방향으로 오름길을 올라가면
앞산 정상과 케이블카로 가는 갈림길에서
앞산/대덕산(1.4km) 방향으로
가파른 돌계단을 오르면
가파른 목계단을 오르면
앞산 전망대에 오른다.
앞산 전망대 한 켵에 위치한 '앞산의 유래' 설명판
해발 658.7m의 앞산 정상에 도착한다.
정상에서 보는 조망은
남쪽으로 산성산,최정산,수성구 용지봉과 대덕산이 조망되며,
서쪽으로
청룡산과 산필봉,용문산,대방산,금계산이 ,
북쪽으로 대덕산 정상,
동쪽으로 비파산 전망대와 팔공산 능선이 조망된다.
동영상
앞산 정상에서 조망 후 왕굴로 하산하기 위해 북쪽 방향인 대덕산 방향으로 하산한다.
대덕산 보이는 목책을 따라 완만한 내리막길을 내려서면
우측 비파산 전망대에서 오는 산사면 데크 로드와 만나
너럭 바위 지점을 조금 지나면
우측으로 목책 로프 구간 아래로 내려가는 개구멍이 나온다.
허리 숙여 개구멍 아래를 지나
금경사 능선길을 내려가면
능선 삼거리 갈림길이 나온다.
이 곳에서 우측으로 가면 과거 다녔던 하산로는 위험하여 폐쇄되고,
좌측으로 급경사 내리막길을 내려가면
목책 로프 구간을 만나
180도 돌아 반대편 로프 구간을 따라 내려간다.
이 곳에 와서 알았지만 조금전 개구멍 하산로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이 곳으로 오는 하산로가 있었다-이정표까지
암벽 아래를 지나
출입 통제선을 지나면
막다른 하산로 끝지점-커다란 왕굴의 상층인 바위에서 좌측으로 내려가면
왕굴 전망대다.
조망은
좌측으로 지난번 하산한 안일사 방향 안지랭골로 하산하는 능선이 보이고
비파산 정상 아래 언지랭골이 보이며,
대구 시가지를 지나 멀리는 팔공산 능선이,
우측 비파산 전망대에서 앞산으로 오르는 능선이 조망된다.
왕굴 전망대에서 커다란 바위인 왕굴의 상층부.
계단길을 내려가면 왕굴 입구에 도착한다.
왕굴의 입구와 안에서본 왕굴.
왕굴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공산전투(927년)에서 죽을 위기에 빠졌을 때
신숭경 장군의 지략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져 피신한 적이 있었다.
반야월을 거쳐 이 곳 비슬산(앞산)으로 피신하여 인근의 은적사에서 3일 동안 머물다가
이 동굴 속에 숨어 있을 때였다.
왕건을 쫒는 견훤의 군사들이 근처에 이르자 갑자기 운해가 가득하고 동굴 입구에는 거미줄이 쳐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갚지 않은 동굴 인데도 불구하고 사람이 숨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견훤의 군사들에게 발각 되지 않고 위기를 무사히 넘긴 완건은 훗날 후삼국을 톻일 할 수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