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 그룹 부도와 정태수 회장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1997년1월23일,
한국의 재계 서열 14위이던 한보그룹의 한보철강의 부도를 발단으로
이와 관련된 권력형 금융 부정과 특혜 대출 비리가 드러났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총칭한다.
건국 후 최대의 금융 부정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한보가 부도를 내면서 불거졌는데,
부실 대출의 규모가 5조7000억여 원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정태수 당시 한보그룹 총회장이라는 한 기업인과 관련하여
천문학적 금액을 대출하는 과정에서 정계와 금융계의 핵심부가 서로 유착하면서
엄청난 부정과 비리가 행해졌기 때문이다.
1990년부터 한보 그룹은 5조원 규모의 당진 제철소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자원의 견제를 받은 일이 전혀 없었고,
건설부가 부지 매립 허가를 9개월 만에 내주었음은 물론,
통상산업부(산업자원부)는 검증도 되지 않은 코렉스 공법의 채택을 적극 권유하기까지 하였다.
철강업계에서는 한보의 경영력으로는 이 프로젝트의 실행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음에도
1조 원 규모의 코렉스 설비를 도입하여 계속 철강 사업을 진행하였다.
처음에는 제철소의 투자비를 2조2800억 원으로 책정하였으나,
2년 만에 5조 7000억 원으로 불어났다.
한보철강이 1994년 말, 산업은행 주도로 11억 2900만 달러의 외화를 대출 받은 이듬해부터
급격히 늘어 나기 시작한 것으로,1995년에 1조4300억 원,1996년에 2조원이 늘어났다.
대출금 규모가 늘어난 것은 정부와 채권 은행단이 한보측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 들이면서
투자비를 계속 지원했기 때문인데,
한보는 이 와중에도 18개의 회사를 인수하거나 설립하는 등 계속해서 사업을 확대하고 있었다.
결국 은행들은 한보철강에 거액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금융계는 사업의 타당성에 대한 상세한 검토도 없이 외압에 따라 대출을 결정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도 3개의 시중은행이 사업에 대한 타당성을 검토하지 않았다.
또 은행 감독원 등 금융감독 기관도 동일인 여신 한도를 넘어선 한보철강에 대한
제일은행의 편법 지원에 대해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고 가벼운 문책만 함으로써
감사원의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
더구나 한보철강이 금유기관 대출금 가운데 유용한 자금이 2136억 원에 불과하다고 밝혀짐으로써
한보 부도와 관련한 각종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997년5월,
이 사건으로 인해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이 공금횡령 및 뇌물수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고,
한보로부터 돈을 받은 정치인과 전직 은행장 등 10명이 징역 20~5년을 선고 받았다.
국회에서는 한보사태 국정조사특별위원회가 열려 58명의 증인과 4명의 참고인이 채택되었으며,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 33명이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과 국가 안전 기획부(국가 정보원) 운영차장 김기섭 역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2019년6월,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의 넷째 아들 정한근이 21년간의 도피생활 끝에 국내로 송환되었고,
2018년12월,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은 에콰도르에서 사망 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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