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보 그룹 부도와 정태수 회장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1997년1월23일,

한국의 재계 서열 14위이던 한보그룹의 한보철강의 부도를 발단으로

이와 관련된 권력형 금융 부정과 특혜 대출 비리가 드러났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총칭한다.

건국 후 최대의 금융 부정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사건의 발단은 한보가 부도를 내면서 불거졌는데,

부실 대출의 규모가 5조7000억여 원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였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정태수 당시 한보그룹 총회장이라는 한 기업인과 관련하여

천문학적 금액을 대출하는 과정에서 정계와 금융계의 핵심부가 서로 유착하면서

엄청난 부정과 비리가 행해졌기 때문이다.


1990년부터 한보 그룹은 5조원 규모의 당진 제철소 프로젝트를 추진하였다.

자원의 견제를 받은 일이 전혀 없었고,

건설부가 부지 매립 허가를 9개월 만에 내주었음은 물론,

통상산업부(산업자원부)는 검증도 되지 않은 코렉스 공법의 채택을 적극 권유하기까지 하였다.

철강업계에서는 한보의 경영력으로는 이 프로젝트의 실행이 불가능하다는 입장이었음에도

1조 원 규모의 코렉스 설비를 도입하여 계속 철강 사업을 진행하였다.

처음에는 제철소의 투자비를 2조2800억 원으로 책정하였으나,

2년 만에 5조 7000억 원으로 불어났다.

한보철강이 1994년 말, 산업은행 주도로 11억 2900만 달러의 외화를 대출 받은 이듬해부터

 급격히 늘어 나기 시작한 것으로,1995년에 1조4300억 원,1996년에 2조원이 늘어났다.

대출금 규모가 늘어난 것은 정부와 채권 은행단이 한보측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 들이면서

투자비를 계속 지원했기 때문인데,

한보는 이 와중에도 18개의  회사를 인수하거나 설립하는 등 계속해서 사업을 확대하고 있었다.

결국 은행들은 한보철강에 거액을 물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 금융계는 사업의 타당성에 대한 상세한 검토도 없이 외압에 따라 대출을 결정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도 3개의 시중은행이 사업에 대한 타당성을 검토하지 않았다.

또 은행 감독원 등 금융감독 기관도 동일인 여신 한도를 넘어선 한보철강에 대한

제일은행의 편법 지원에 대해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고 가벼운 문책만 함으로써

감사원의 지적을 받기도 하였다.

더구나 한보철강이 금유기관 대출금 가운데 유용한 자금이 2136억 원에 불과하다고 밝혀짐으로써

한보 부도와 관련한 각종 의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1997년5월,

이 사건으로 인해 정태수 한보그룹 총회장이 공금횡령 및 뇌물수수 혐의로 징역 15년을 선고 받았고,

한보로부터 돈을 받은 정치인과 전직 은행장 등 10명이 징역 20~5년을 선고 받았다.

국회에서는 한보사태 국정조사특별위원회가 열려 58명의 증인과 4명의 참고인이 채택되었으며,

이른바 '정태수 리스트'에 오른 정치인 33명이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과 국가 안전 기획부(국가 정보원) 운영차장 김기섭 역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2019년6월,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의 넷째 아들 정한근이 21년간의 도피생활 끝에 국내로 송환되었고, 

2018년12월, 정태수 한보그룹 회장은 에콰도르에서 사망 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국 민주노동 조합 총연맹 초대 위원장 권영길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전국 민주노동 조합 총연맹 초대 위원장인 권영길(생졸;1941년11월5일~)은

일본 혼슈 야마구치 현에서 밀항자의 아들로 태어나 8·15해방 직후 부모를 따라 경상남도 산청에 정착했다.

6·25전쟁과 더불어 빨치산 활동을 하던 아버지가

1954년 군경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총살당한 사건은 그의 성장기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경남 고등학교를 거쳐

1961년,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진학해 잠사학을 공부하면서 반정부 비밀 서클 활동을 했으며,

1967,잠시 '대한일보' 기자로 활동한 뒤

1971년,정부 기관지인 '서울신문'의 기자로 일했다.

1988년초,서울 신문사 노동 조합 건설에 참가한 것을 시작으로

1988년 말,41개의 언론 노동조합(조합원1만3,000명)을 포괄하는

'언론노동조합연맹(언론노련)'의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1988년에서 1994년까지 제2~3대 위원장을 역임

1995년부터1997년까지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초대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한국노동운동의 중심 인물로 떠올랐다.

1997년부터 1998년까지 진보 정당 '국민승리21' 대표로 역임하여고,

2000년부터, 민주노동당 초대에서 제2대까지 대표를 역임하면서 진보적 정치 지도자로 부상했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국민승리21 후보로 출마해 낙선했으며,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경상남도 창원에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2002년12월, 제16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다시 낙선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창원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재출마하여 당선했다.

또한 당대표로서 이끌었던 민주노동당도 비례대표를 포함해 10석을 얻어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이라는 커다란 성과를 얻어냈다.

 

당선 이후 민주노동당의 당직,공직(의원직) 분리 방침에 따라 대표에서 사퇴했다.

민주 노동당은 2004년 총선거에서 원내 진출이라는 커다란 성과를 얻어내기는 했지만

이후 지지율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2007년,

그는 혁신과 변화를 앞세운 심상정,노회찬 후보를 누르고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로 다시

선출되었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3%의 지지율로 낙선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경상남도 창원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재선에 성공했다.

권영길은 언론인 출신의 노동운동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1997년,

진보정당 ‘국민승리21’ 대표를 맡으며 정치에 입문했다.

제15,16,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일본에서 밀항자의 아들로 태어나 8·15해방 직후 부모를 따라 경상남도 산청에 정착했다.


1988년,

서울 신문사 노동 조합 건설에 참가하고 언론 노동 조합연맹의 초대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어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초대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노동계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국민승리21' 대표, 민주노동당 대표를 역임하면서 진보 정치지도자로 부상했다.

제15대(1997)와 제16대(2002)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모두 낙선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07년,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로 제18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했으나 다시 낙선했다.

2008년, 재선 국회의원이 되었다.

2013년,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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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법 날치기 사건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노동법 날치기 사건은 1996년12월26일,

신한국당(현 자유 한국당)이 노동법 개정안과 안기부법을 날치기로 통과 시킨 사건이다.

 

1995년, 지방 선거에서 참패를 당한 여당 민주자유당은 5공의 흔적이 강했다.

이어 총선이 다가오자 김영삼은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개정한 뒤, 민정계를 당에서 쫓아냈다.

이후 다양한 세력들을 영입시켜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나,

총선에서 여소야대라는 불리한 결과가 나왔다.

같은 해 노동법 개정안과 안기부법이 통과되지 못한 상태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김영삼은 이미 야당의원을 영입시켜 여대야소로 만들었기 때문에 날치기가 가능한 상태가 되었다.

 

신한국당 의원들은 1996년 12월 25일 저녁부터 총무단으로부터 전화통보를 받았고,

다음 날 새벽 서울 마포의 가든 호텔 등 4개 호텔에 나뉘어 모였다.

1996년12월26일 새벽 5시 50분, 관광 버스를 타고 있던 신한국당 의원들이 국회에 잠입했다.

잠입한 의원들은 국회 본회의장에 들어갔다.

당시 의원들은 곧 처리될 11개 법안관련 서류봉투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새벽 6시, 신한국당 의원 157명 중 국회의장 김수한 등 3명을 제외한 154명이 입장을 끝냈다.

 

당시 국회의장이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국회부의장이 그 일을 대신해야 했다.

의원들이 입장을 끝내자, 당시 국회부의장이었던 오세응이 개회를 선언했다.

개회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11개 법안이 통과되었다.법안이 통과되는 데 걸린 시간은 7분이 채 되지 않았다.

이 사이 오세응은 의사봉을 48번 두드렸고, 신한국당 의원들은 여섯 차례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했다.

 

날치기를 통해 개정된 법안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안기부법의 경우, 찬양 고무죄와 불고지죄에 대한 안기부의 수사가 가능하게 되었다.

노동법의 경우, 정부안 가운데 복수노조 허용과 정리해고제 등이 일부 개정되었다.

또한 이는 정리해고를 법제화했는데, 정리해고가 자의적으로 남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정리해고의 사유를 계속되는 경영의 악화와 생산성 향상을 위한 구조 조정 등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을 때로 한정했다.

그리고 대량해고를 조정 하기 위해

일정 규모 이상의 인원을 해고하고자 할 때는 노동위원회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파업 때 외부근로자를 쓸 수 있는 대체근로제가 도입되었고,

파업기간 중 새로운 하도급 생산도 가능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쟁의기간 중 임금을 지급하지 않게 할 수 있었다.

 

신한국당은 이 사건에 대해 정당성을 주장했으나, 당은 무효임을 선언하고 투쟁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야 대표 야당이었던 새정치국민회의와 자유민주연합의 의원 전원이 항의농성에 들어갔고,

검은 넥타이를 맨 뒤 여당 의원들의 명패에 검은 천을 씌웠다.

이는 신한국당의 반민주적인 행위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자극 받은 대상은 노동계였다.

사건이 터진 다음 날, 노동계는 전면 총파업에 돌입했다.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던 권영길은 이 법안이 백지화될 때까지 무기한 총파업에 들어가겠다고 결의했다.

한국노총을 비롯한 다른 노조들도 총파업에 들어갔고,

방송4사 노조 역시 이러한 법안이 철회되지 않으면 파업하겠다고 밝혔다.

 

권영길은 건설국민승리21을 창당하여 정계에 입문했고, 이를 통해 진보정당의 정치 참여를 본격화했다.

한편 당시 김영삼은 자신의 후계자로 이홍구를 내세웠으나,

그가 이에 가담하면서 국민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결국 이회창이 후계자가 되었지만, 대선에서 낙선하고 말았다.

 

국제 협력 기구(OECD) 가입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선진국 진입의 관문격인 경제협력 개발기구(OECD)에 1996년 12월 12일 가입한 일이다.

국회 동의를 거쳐 한국이 이날 프랑스 외무부에 가입서를 기탁함으로써 회원국으로 등록 절차를 마쳤다.

OECD은 1961년9월에 파리에 본부를 두고 창설된 국제 경제 기구로서,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 경제를 추구하고 선진 공업국들이 모여

합의에 의해 세계 경제 현안에 관한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설립 당시 유럽과 미국 등 20개국이 참여했으며,

이후 일본, 호주, 뉴질랜드, 멕시코, 체코 등이 차례로 가입했으며,

1996년12월12일,한국이 29번째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그러나 가입의 이점 못지않게 시장개방의 부담이 커졌으며,

 특히 농산물 시장의 개방은 가뜩이나 빈곤에 시달리는 우리 농촌에 큰 부담으로 다가올 것으로 전망되며,

경제 규모에 맞춰 하위권에 처져 있는 보건.교육 등 삶의 질 향상이 앞으로의 과제로 떠올랐다.

 

 

2002년 월드컵 유치 결정        작성일자;  2019.12.27.금요일,맑음

 

1996년5월31일, 국제축구연맹(FIFA) 집행위원회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2000년대 아시아 최초로 열리는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를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공동 개최키로 결정하였다.

 

그동안 동 대회 유치를 위한 한국광 일본 양국의 치열한 경쟁은

두나라 국민과 전세계인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월드컵 축구대회를 주관하는 국제축구연맹은 프랑스의 줄리메에 의해 1904년 창시되었으며,

현재 191개 회원국이 가입되어 있다.

1930년 우루과이에서 제1회 대회가 개최된 이래

동 대회는 규모,참여도,인기 면에서 인류 최고의 스포츠 제전으로 확고히 자리잡았다.

대한민국은 동 대회 유치는 우리의 국제적 위상 제고는 물론

스포츠,문화 교류의 확대,지역 및 국가발전 등에 긍정적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며,

전 세계의 화합과 한ㆍ일 양국의 우호증진에 기여할 것이다.

 

 

국제 축구 연맹 (FIFA)                    작성일자;  2019.12.27.금요일,맑음   

  

 

국제 축구 연맹(FIFA;Fede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

축구와 풋살,비치사커 종목을 총괄하는 국제 기구로,스위스 취리히에 본부를 두고 있다.

4년마다 열리는 FIFA 월드컵을 비롯해서 여러 국제 대회를 운영하고 있다.

 

1904년5월21일, 

축구의 인기가 영국에서 해외로 확산 되면서

경기 종목을 관리할 조직체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FIFA가 프랑스 파리에서 결성 되었다.

1906년,FIFA가 주관한 최초의 국제 경기는 열렸는데 성공적이지 못하여,

초대 회장이었던 '로베르 게링'이 물러나는 계기가 되었고,

잉글랜드 출신의 '대니엘 벌리 울풀'이 새 회장이 된다.

1908년,두번째 열린 런던 올림픽이었는데,여덟 팀이 참가한 축구 대회는 성공적이었다.

1909년,남아프리카 공화국이 가입 하면서 처음으로 가맹국이 유럽을 벗어났고

1912년,아르헨티나와 칠레가,

1913년,캐나다와 미국이 가입하게되어 대서양으로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었다.

1914년7월28일 부터 1948년11월11일까지 일어난 제1차 세계 대전은 FIFA의 발전에 큰 타격을 주었다.

국제적인 교류는 미미한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많은 축구 선수들이 전장에 나가 희생되기도 했으며,국제 경기는 정상적으로 치를 수 없었다.

전쟁 이후,

회장인 '대니엘 벌리 울풀'이 죽고 부회장이었던 네덜란드인 카를 히르츠만이 일시적으로 FIFA를 맡게 되었다.

전쟁을 이유로 홈 네이션 4개국(잉글랜드,스코트랜드,웨일스,북아일랜드)이 FIFA를 탈퇴하면서

FIFA는 큰 위기에 봉착했고 회원국 수는 20개 국으로 줄어들었다.

위기에 빠진 FIFA를 재건한 사람은 48세의 프랑스인 '쥘 리메'였다.

회장으로 재임한 33년 동안 제2차 세계 대전에도 불구하고 FIFA는 많은 발전을 이루었다.

1930년,최초의 월드컵이 우루과이에서 열렸으며 회원국들은 다시 증가했다.

1946년,홈 네이션들도 FIFA에 재가입하였다.

1954년,제5회 스위스 대회에는 회원국 수가 85개국까지 늘어났고

더욱 국제적인 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었으며 이 대회 직후 80세의 '쥘 리메'는 사임하였다.

당시 월드 컵 우승 팀에게 주어지는 우승컵의 이름은 '쥘 리메 컵'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많은 신생 독립국들이 FIFA에 가입하면서 회원국의 수는 계속 늘어 났다.

당시 독립국들은 UN 보다 FIFA에 먼저 가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축구 경기를 TV에서 중계하게 되면서,

축구는 좀 더 세계적인 스포츠로 발전했고 FIFA의 인지도도 같이 높아졌다.

이전까지 FIFA는 4년에 한 번 열리는 월드컵을 통해 수익을 얻을 수밖에 없었는데,

TV 중계는 FIFA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다.

6대 회장인  '스탠리 루스 경'은 여러 사업을 통해 FIFA의 재정 안정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루스경은 1974년 FIFA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다음 회장은 브라질 출신의 '주앙 아벨란제' 박사였다.

아벨란제 회장은 다소 보수적이었던 FIFA를 보다 능동적인 조직으로 탈바꿈시켰다.

스위스 취리히의 작은 건물에서 12명의 직원이 일하던 FIFA는 그 열 배가 넘는 조직으로

확장되었고 보다 많은 수익을 얻는 기관으로 발전했다.

FIFA의 상업화에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었지만,조직 안정성은 결과적으로 산하 연맹들과

회원국들에게 이익이 되었고

1998년까지 아벨란제는 24년간 장기 집권을 할 수 있었다.

1998년6월8일,

스위스 출신의 '제프 블라터'가 새로운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2016년까지 18년간 장기 집권을 하였으나 부

패 혐의로 미국 연방검찰의 체포 위협 때문에 회장직을 사임하였다.

2016년2월,

스위스 출신의 유럽축구연맹 사무총장 지아니 인판티노가가 새로운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북한 잠수정 동해 침투 사건           작성일자; 2019.12.27.금요일,맑음

 

1996년9월18일,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지역으로 잠수함을 이용해 침투한 북한군 무장공비 토벌 사건이다.

 

1996년9월15일,19시에 북한이 무장 공비를 승선시킨 잠수함이 강릉 앞바다에 공작원을 상륙시켰다.

1996년9월16일,20시30분,전날 침투시킨 공작원을 복귀시키기 위하여

안인진리 해안에 정선을 시도 하였으나 실패하고

1996년9월17일, 2차 정선에 성공하였으나 기관 고장으로 좌초되어,

26명의 무장공비들이 내륙으로 침투하였다.

1996년11월7일까지 내륙으로 침투한 무장공비들을 토벌하기 위해

50여 일간 아군과 치열한 추격전을 벌인 사건이다.

침투 인원은 총 26명으로 지도원 2명, 승조원 21명, 정찰조 3명이며,

침투간첩 소속은 인민무력부 정찰국 22전대 제2편대 수중침투 부대원들이다.

이들의 잠수함은 유고급 잠수함으로서 잠수 및 부상속도가 빠르고 기동성이 요구 되는

비정규전 또는 특수공작용이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남북 간에는 접촉 대화가 이루어지면서 실질적인 교류.협력이 시작되었다.

1990년에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한 체육교류인 통일축구대회가 평양과 서울에서 번갈아 열렸다.

이어서 1991년1~2월, 남북체육회담이 열려 각종 국제대회에 참가할 단일팀 구성에 합의하고,

1991년4월, 지바에서 열린 제41회 세계 탁구 선수권대회와

6월 포르투갈에서 열린 제6회 세계 청소년축구 대회에 남북단일팀을 구성을 합의하였다.

1990년 9월부터 1992년 9월까지 총 8차례에 걸쳐 남북 고위급 회담이 개최되었으며,

여기에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기도 하는 등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가 조성되던 시기였다.

 

1996년9월18일,1시35분경

최초 발견자인 강릉의 택시기사가 강릉시 강동면 안인진리 대포동 앞 해상에 돌고래 같은 물체가 보이면서

불빛이 번쩍이는 것을 발견하였다.

1시45분경, 강동 파출소에 신고하여 순경과 신고자가 현지를 재확인 후,

1시50분경, 인근 군 초소에 연락하여, 함께 현장에 출동하여

유고급 잠수함으로 무장공비가 침투하였음을  확인하였다.

1시50분경 대포동 앞바다에 좌초된 북한 잠수함을 확인한 후,

4시15분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되어 도주한 무장공비들에 대한 수색이 시작되었다.

16시30분에 강동면 임곡리 청학산 중턱에서 타살된 무장 공비 사체 11구가 발견 되었으며,

16시46분에 강동면 모전2리에 사는 두명의 주민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강동파출소 두명의 경장이

무장공비 이광수를 생포하였다.

9월19일10시25분경에는 강동면 만덕산에서 703특공대가 무장공비 3명을 사살하였고,

14시9분경에 추가로 구정면 어단리 칠성산 부근에서 군작전으로 무장공비 3명을 사살하였다.

16시5분경에 강동면 산성우리 오이골 괴일재 268고지에서

무장공비가 던진 수류탄에 아군 1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괴일재에서 무장공비 1명을 사살하였다.

9월21일9시55분경, 강동면 언별리 칠성산에서 무장공비와 교전 중에 3공수여단 중사 1명이 사망하였다.

9월22일6시15분경, 강동면 언별리 칠성산에서 군작전으로 무장공비 2명을 사살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아군 2명이 사망하였다.

 9월23일6시30분경에는 칠성산 갈미봉에서 민간인 1명이 피살되었고,

 9월28일6시45분경,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 느르재에서

무장공비 2명을 발견하여 1명은 사살하고 1명은 도주하였다.

9월30일15시20분경에는 강릉시 왕산면 도마리 석우동에서 무장공비 1명을 사살하였다.

10월1일18시에 통합 방위 사태를 을종에서 병종으로 전환하였다.

10월9일14시30분경에는 평창군 진부면 탑동리 재미재산 중턱에서 송이채취 주민 3명이 피살되었다.

11월4일8시를 기해 강릉·속초·양양 지역이 병종사태로 전환되었으며,

11월5일10시30분경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향로봉 창바위 부근 야산에서

성명 미상의 정찰조 2명을 사살하였으며,

1996년11월7일,17시를 기해 작전이 종료되었다.

 

잠수함 침투사건 결과를 보면

침투한 무장공비 26명 중 생포 1명,사살 13명,사체발견 11구,도주 1명으로 최종 집계되었으며,

노획품은 잠수함 1척 등 이다.

피해 상황은 군인 전사 10명, 부상 23명이며, 민간인 4명 사망, 오발사고로 인한 예비군 1명 사망 등이다.

 

제15대 국회위원 선거 실시     작성일자; 2019.12.27.금요일,맑음

 

 

1996년4월11일에 실시한 국회의원 총선거다.

정당별 득표율 및 의석수는

신한국당이 34.5%의 득표율에 139석(지역구 107, 전국구 32),

새정치국민회의가 25.3%의 득표율에 79석(지역구 66, 전국구 13),

자유민주연합이 16.2%의 득표율에 50석(지역구 41, 전국구 9),

통합민주당이 11.2%의 득표율에 15석(지역구 9, 전국구 6),

무소속이 11.9% 득표율에 지역구 16석을 차지했다.

 

4·11 총선거는 통합 선거법에 따라 치러진 최초의 국회의원 선거였으나,

제13대 이래 지속되어온 지역 할거주의 현상이 심하게 나타냈으며,

지역색에 따른 3당구도가 뚜렷이 드러났다.

또 13·14대에 이어 여소 야대 구도가 재현되었고,

초선의원의 약진이 두드러져 의원 정수 299명 중 46.5%인 107명이 당선되었다.

투표율은 63.9%로, 국회의원 선거 실시이래 처음으로 60%대로 떨어졌다.

 

민주당 박계동 위원          작성일자; 2019.12.27.금요일,맑음

박계동(1952년6월26일~현존)은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서울 전농초등학교,보성중학교,보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진학했다.

대학 재학시절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1980년)'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고,

이 후 민청련,전민련 등 재야단체의 대변인으로 활동하였다.

노태우 정부 시절 그는 국군 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사람으로 감시 당하였는데,

1990년10월4일,오후6시40분쯤,

외국어대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이었던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에 의해 밝혀졌다

윤석양은 탈영후

서울시 연지동 기독교 회관 7층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사무실에서 '양심선언'을 통해

탈영 당시 보안사에서 갖고나온 동향파악 대상자 개인색인표 신상철,내용이 입력된 컴퓨터 디스킷을 공개 했다.

1992년,14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에 영입되어 서울 강서 갑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93년,고려대 정치 외교학과를 졸업했다.

 

14대,17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며 

2018년4월20일,

한국택시협동조합의 이사장에 재직중 총회에서 조합원들의 투표로 탄핵 가결로 해임됐다.

1995년10월,

민주당 의원 시절인 평소 알고 지내던 고교 1년 후배로부터 노태우 前 대통령의 비자금

300억원에 대한 제보를 받아 국회에서 폭로하여 전직 대통령 구속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다.그 뒤 재선 국회의원을 거쳐 국회 사무총장을 지냈다.

전(前) 대통령 전두환,노태우 구속              작성일자; 2019.12.27.금요일,맑음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이 군사 반란 주도와 수리 혐의 등으로 구속 수감된 사건으로.

1995년11월16일, 노태우 전대통령이 거액 수뢰 혐의로,

1995년12월3일에는 전두환 전대통령이 12·12와 5·17 조사반란 주도혐의로 각각 구속 수감되었다.

 

노태우 전대통령의 거액 비자금 사건은

10월19일 민주당 소속 박계동 의원이 국회에서

노태우 전대통령이 재임 중 각계로 부터 받은 거액의 비자금을

퇴임 후에도 감추어 두고 있다고 폭로함으로써 검찰 수사가 시작되어,

대기업 총수 등 40여 명에게서 4,100억 원의 비자금을 만든 사실을 밝혀 내고

노태우 전대통령을 서울구치소에 수감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12·12쿠데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강경 진압에 대한 국민의 진상 규명 요구가 거세졌으며,

김영삼 전대통령은 이를 '역사 바로 세우기,로 규정했다.

국회는 12월19일 신한국당·국민회의·민주당 3당합의로 '5·18 특별법,을 제정, 처벌근거를 마련했다.

이에 따라 검찰은 전두환을 비롯한

1980년 당시 신군부 측 핵심인사 11명을 군형법상 반란수괴죄를 적용, 구속 기소 했다.

재판 결과 이듬해 4월 17일 대법원 상고심에서 전두환 무기 징역, 노태우 징역 17년의 형량이 확정 되었으나

1997년12월 22일, 김영삼 전대통령이 국민대화합의 명분으로 관련자를 모두 특별 사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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