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대 지방 선거 실시                 작성일자; 2019.12.27.금요일,맑음

 

1995년6월27일의 선거로

기초의회 의원 및 단체장과 광역의회 의원 및 단체장의 4대 선거를 동시에 실시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지방자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지방 자치법에 따라

주민들이 지방의회 의원 및 지방 자치 단체의 장을 뽑는 선거 선거를 말한다.

각 나라마다 지방자치가 생성·발전되어 온 역사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선거 방식이나 절차도 약간씩 다르다.

한국에서도 자치의 범위에 따라 선거의 범주가 달라졌기 때문에

1950년대의 지방 선거와 1990년대 이후의 지방 선거는 서로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는 1950년 제헌 헌법에서 최초의 지방선거를 실시하려 하였으나,

6.25전쟁으로 미루어졌다가

 

1회 지방 선거는 1952년4월25일에 시·읍·면의원 선거를

시·읍·면 의회 의원 선거는 유권자 753만6304명 가운데 683만6734명이 참가해

90.7%라는 높은 투표율을 보였고,17개 시에서 378명의 시의원,72개 읍에서 1,115명의 읍의원,

1,308개 면에서 1만 6051명의 면의원이 선출되었다.

1952년5월10일에 도의회 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도의회 의원은 유권자 635만8383명 가운데 516만 5226명이 투표해 81%의 투표율을 보였으며,

7개 도에서 306명의 도의원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서울특별시와 경기도,강원도의 경우는 완전히 수복되지 않은 관계로 제외되었고,

전라북도 4개 군은 치안 관계로 제외되었다.



제2회 지방선거는 1956년8월8일에 시·읍·면의원 선거를,

1956년8월13일에 도의원 선거를 실시해 25개 시 75개 읍 1,358개 면에서 시의원 416명과

읍의원 990명,의원 1만 5548명이 선출되었고, 투표율은 79.5%였다.

도와 서울특별시의회 의원 선거에서는 총 437개 선거구에서 437명의 의원이 선출되었고,

투표율은 85.8%였다.



제3회 지방선거는 제2공화국 최초의 지방선거로,5차 개정법률에 따라

1960년12월12일에 서울특별시와 도의원 선거를,

1960년12월19일에 시의원·읍의원·면의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총 25개 시, 80개 읍, 1,343개 면에서 420명의 시의원, 1,055명의 읍의원,

1만 5376명의 면의원이 선출되었고, 투표율은 78.95%였다.

도와 서울특별시의원 선거는 67.4%의 비교적 낮은 투표율을 보였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실시된 서울특별시장과 도지사 선거는

투표율 38.8%로 아주 저조 하였는데,

이는 12월 한 달 동안 치러진 4회의 선거로 유권자들이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3회 지방선거로 탄생한 자치단체와 지방 의회는

이듬해  5.16군사정변으로 인해 해산됨으로써 한국의 지방자치는 일단 막을 내렸다.

그러다 1988년 시·도지사와 시·군·구를 자치 단체로 규정하고,

1991년3월26일,기초 자치단체인 구·시·군의회 의원 선거를 실시함으로써

30여 년 만에 지방 선거가 부활 되었으나

기초의회 의원 선거는 유권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해 60%에도 미치지 못하는 낮은 투표율을 보였고,

1995년6월27일, 기초의회 의원 및 단체장과 광역의회 의원 및 단체장의 4대 선거를 동시에 실시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 지방자치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 선거 역시 14대 국회위원 선거나 14대 대통령 선거에 비해 낮은 투표율을 보였다.

흔히 이 선거를 제1회 전국 동시 지방라고 하며, 임기는 3년이다.

선거권자는 20세다.

선거 방식은 주민의 보통선거·평등선거·직접선거·비밀선거로 이루어졌다.

 

1998년 6월 4일 치러진 지방 선거에서는

1961년 중앙선거 관리위원회가 출범한 이래 

선거 가운데서는 가장 낮은 투표율인 52.6%를 기록해

지방 주민들의 정치 참여율이 낮다는 문제점을 드러냈다.

이 선거를 제2회 전국 동시 지방선거라고 하는데,

보 등록은 모두 정당.선거인 추천제를 채택하였고,임기는 4년이다.

 선거권자는 20세였다.

 선거 방식은 주민의 보통선거·평등선거·직접선거·비밀선거로 이루어졌다

 

 2002년4월,

광역시와 도의 단체장 수는 15명,

기초자치 단체장의 수는 구 67명,시 72명,군 93명이다.

광역의회 의원 수는 690명,

구·시·군의회 의원 수는 3,49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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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제네바 핵협상 타결         작성일자; 2019.12.27.금요일,맑음

 

 

1994년9월23일10월17일, 제네바에서 개최된 북.미 간 핵협상에서 

1994년10월21일,양국이 서명한 기본 합의문을 말한다.

 

미국은 북한에 대해 핵개발 동결 대가로 경수로 2기를 제공하고,

대체 에너지로 연간 중유 연 50만t을 제공하기로 하였으며,

이에 대해 북한은 핵화산 금지조약(NPT) 완전 복귀와,모든 핵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허용하고,

핵활동의 전면 동결 및 기존 핵시설의 궁극적인 해체를 약속하였다.

또 북.미 양국은 쌍방의 수도에 연락 사무소 설치,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의 이행과 남북 대화의 재개에도 합의하였다.

제네바 합의 이후,미국이 원유 가격 상승과 한반도 에너지 개발 기구 기여금 등의 부족으로 의무 이행에 차질을 빚자

북한이 여러 차례 핵동결 파기를 선언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2001년,미국에서 일어난 9.11 테러 사건을 계기로 부시 행정부가 북한을 3대 테러 국가로 지목했고,

북한은 제네바 합의에서 금지하기로 약속한 흑연 감속로를 가동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미국은 제네바 합의 파기를 선언했다.

 

김일성 사망                 작성일자;  2019.12.27.금요일,맑음

 

1994년7월8일,북한의 김일성이 사망하였다.

김일성이 사망한 시점은 북한은 경제적으로 심각한 침체에 빠지고 외교적으로 고립이 심화되었다.

위기의 시대였다.

김일성 사망 이후 그의 아들인 김정일이 세습받았다.

김정일 시대는 김일성이 이끌어온 과거 북한의 연속선상 위에서 전개되었다.

1960년대 후반 이후 김정일이 북한 역사에 깊이 개입해 온 사실 자체가

김일성 사후 북한이 과거의 연장 혹은 과거의 확대로서 존재함을 보여준다.

 
북한 역사에서 김정일 시대가 지니는 의미는

첫째,김정일 시대는 정치 사회적으로 유일 체제의 완성 시기로 볼 수 있다.

권력자인 수령을 중심으로 전체 사회가 일원적으로 편제 되어 있는 유일 체제는

1967년을 계기로 형성되기 시작하여 1970년대에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면서 완성되었다.

유일체제의 성공적인 하나가 후계자의 안정적인 권력 승계였다.

김일성의 사망과 김정일의 무난한 권력 계승은 이를  입증했다.

둘째, 김정일 시대는 구세대의 혁명세대가 사라지고 신세대가 등장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신구 세대교체를 가장 잘 보여준 것이 바로 김일성의 사망과 김정일의 최고 지도자 지위 계승이다.

셋째,김정일 시대는 사회 주의권 붕괴와 함께 다방면에서 북한 체제의 위기가 심화되는 시기에 출범했다.

김정일은 가장 안정적으로 구시대를 이어받았지만,

또 다른 측면에서는 경제적 위기와 외교적 난관 등이 산적한 어려움을 앞에 두고 출범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북한 위기의 상당 부분이

수령의 권력 기반인 유일 체제의 비효율성으로 부터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유일체제가 안고 있는 비민주성과 낮은 생산성이 북한 위기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


모든것을 볼 때,김정일 시대는 기회 보다는 위기 요인을 많이 안은 채 출범했다.

특히 과거와의 연속적 측면이 오히려 큰 부담이 되었다.

다시 말해,

김정일 정권은 살아 남기 위해 자신이 쌓아온 과거를 부정하거나 과거를 수정하지 않으면

미래를 장담하기 어려운 역사적 국면에서 출범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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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 실명제 실시                   작성일자;2019.12.27.금요일,맑음

 

 

금융 거래를 할 때 가명이나 남의 이름이 아니라 자기 이름으로만 쓰도록 한 제도이다.

1993년8월13일부터 ‘금융 실명제 실시에 관한 대통령 긴급 재정 경제 명령’으로 시행되기 시작 했으며,

2014년12월1일부터는 다른 사람의 이름을 빌리는 차명 거래도 일절 금지함으로써 한층 강화되었다.

한국의 금융 실명제는 '금융 실명 거래 및 비밀 보장에 관한 긴급 명령'에 의거,

1993년8월12일 이후 모든 금융 거래에 도입되었다.

1982년 '장영자 이철희 사건'이라는 대형 금융 사고가 발생했을 때 금융 실명제가 처음으로 논의되었다.

1983년 '7·3조치'로 금융 실명제의 실시 방법이 거론된 이후 많은 논의와 시행 착오의 과정을 밟아 왔다.

일반적으로 '금융 실명제'는 금융 거래의 정상화를 기하여 국민 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도모하고,

금융 거래에 투명성을 부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한국에서 금융 실명제의 필요성이 계속 제기된 데에는 후자의 목적이 더욱 강한데,

이는 검은 돈이라는 정경 유착이 매우 강하였기 때문이다.

 

금융 실명제가 긴급 명령에 의해 실시된 이유는

금융 실명제를 실시하기 위해서는 종전의 실명법의 보완이 불가피하나

사안의 성격상 법개정 절차를 거치는 동안 금융시장의 동요 등으로 경제에 막대한 혼란이 예상되어

이러한 부작용을 단시일 내에 최소화하기 위해 부득이 하였다는 것이다.

'금융 실명제'의 목적이 금융 거래시 본인의 실지 명의를 사용하도록 강제하여 금융 거래의 투명성 제고,

조세 형평성의 제고 및 사회 부조리의 제거 등에 있음을 감안 한다면

금융 실명제의 성과라는 측면에서 서로 엇갈린 주장이 많다.

우선 금융실명제의 성과를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내 주는 지표는 실명 확인 및 실명 전환에 대한 통계인데,

금융 실명제 실시 1년여 후인 1994년까지 금융기관의 실명 확인율은 90%를 상회하였으나,

차명 예금의 실명 전환이 예상보다 저조하였으며,

가명 예금 실명 전환을 포함할 때 전체 금융자산의 2%만이 실명 전환되었다.

 

실명 전환 성과를 판단함에 있어 서로 상이한 입장이 제출하고 있다.

하나는 실명제 이전 금융자산 실명화율이 매우 높은 수준에 있었다는 긍정적인 해석이며,

다른 하나는 금융 실명제 실시 후 차명의 본명 전환이 부진하였으므로

법적인 금융 실명제 실시만으로는 진정한 실명화를 유도할 수 없다는 부정적인 해석이다.


제도적으로 금융 기관을 경유하는 모든 금융 거래에서

실지 명의 사용을 의무화한 조치는 자금 이동이나 출처에 대한 조사의 위험을 가중시켜

각종 음성적 거래를 위축시키는 데 기여한 것은 틀림없다. 

금융 거래자 본인의 실명을 사용하도록 강제한 조치의 효과는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더욱 커졌으며,

금융소득 종합 과세 등의 도입으로 이러한 효과는 더욱 커젔다.

금융실명제 도입 이전에는 금융 거래를 할 때 실제 이름을 쓰지 않아도 되었다.

 

가명이나 차명, 무기명(이름을 쓰지 않음)으로 거래해도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개인이나 기업이 정치가 또는 권력자에게 뇌물을 주거나,

회사 돈을 빼돌려 불법 자금을 모으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재산을 숨기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정부는 부정한 거래를 법으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1993년8울13일,김영삼 정부는 긴급 명령으로 금융 실명제가 실시되었다.

금융 실명제의 실시로 부정 부패 방지에 실효를를 거두자 ‘부동산 실명제’에 대한 요구도 불거졌다.

부동산 실명제란 집이나 땅,건물 등을 거래할 때 실제 이름을 쓰게 하여 부정한 거래를 막기 위한 제도이다.

1995년7월에 ‘부동산 실소유자 명의 등기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었는데,

실제 이름으로 부동산 거래를 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게 된다.

 

소말리아 유엔 평화 유지군(PKO) 파병        작성일자; 2019.12.27.금요일,맑음

 

유엔 안보리 이사회의 결의안과 국회 동의안 결정에 따 라 국제평화 유지 및 침략적 전쟁을 막고,

분쟁 지역의 의료 지원 및 재건을 돕기 위해 한국군을 유엔 평화 유지군(PKO)으로 파병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유엔의 요청에 따라 주요 분쟁 지역에

군 병력 또는 UN 임무단에 옵서버 요원, 참모 및 협조 장교를 파견한다.

옵서버 요원들은 분쟁 지역에 파견되어 현지 임무단의 지휘 아래 정전 협정 위반 여부 감시 활동을 하며,

참모 및 협조 요원들은 부대 단위 다국적군의 파병 활동을 지원 및 협조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우리나라가 유엔 평화 활동에 해외 군 병력을 파견,지원하기 시작한 것은

1991년1월17일0시50분,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함으로 일어난 걸프 전쟁 때 부터다.

1990년8월2일, 이라크의 쿠웨이트를 침공으로 시작된 걸프 전쟁에서 미국 주도의 다국적군이 승리를

   거둔 후,유엔은 평화 유지 활동을 위한 국제적 연대를 강화하였다.

 

1991년9월, 유엔 회원국이 된 한국은 유엔의 요청에 따라

1993년7월30일, 소말리아에 부대 단위로는 최초로 상록수 부대(공병부대)를 파견하였다.

상록수 부대는 한국군 최초의 PKO( 평화유지활동) 참가 부대로

도로 보수공사 임무와 주민지원 활동을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이후 한국은 동티모르 ,앙골라,서부 사하라,아프가니스탄,이라크 ,레바논, 소말리아 해역,아이티 등의

세계 분쟁 지역에 UN 평화 유지 요원을 파병하는 등 국제 평화 유지 활동에 적극 참여하여

지역 재건 및 의료 지원,치안 유지 및 평화 정착 지원 임무 등을 수행하고 있다.


한편, 한국의 유엔 주도하에서 활동한 평화 유지활동 부대는

상록수부대,레바논 평화 유지단 및 동명부대,코트디부아르 평화 유지군,아이티 단비 부대,수단 임무단,

서부 사하라 감시단 등이 있다.

그리고 다국적군 평화 유지활동 부대에는 아프가니스탄 동의 ,다산,오쉬노 부대,이라크 자이툰부대,

소말리아 청해 부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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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통화 기금(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    작성일자; 2019.12.27.금요일,맑음

 

 

1945년12월,IMF는 세계 무역의 안정을 목적으로 설립한 UN(국제연합) 전문기구로서 설립되었다.

자매기관인 IBRD(세계은행)가 장기 국제 금융 기관이라면 IMF는 단기 국제 금융기관이다.

IMF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외환을 안정 시킴으로써 세계 무역의 확대,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55년8월,대한민국은  IMF에 가입하였으며,

2016년 기준, 189개 회원국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제통화기금'의 설립목적은

국제적인 통화 협력을 보장하고 환율을 안정 시키며 ,

현금 전환 가능성,즉 국제유동성을 확대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운영 자금은 각국의 국제 무역 규모,국민 소득액,국제 준비금 보유량 등에 따라

회원국 정부의 출자로 형성된다.

회원국은 국가별로 배분되어 있는 특별 인출권의 지분만큼 투표권을 갖는다.

회원국은 일시적인 국제 수지 불균형에 직면할 경우

그들이 필요로 하는 외환을 IMF로부터 자국 통화로 구입할 수 있다.

이러한 인출로 인해 발생하는 국제 유동성 확대는 인출액을 상환할 때 다시 사라진다.

국제통화기금은

1980년대 중남미 국가들의 외환위기,

1995년 멕시코 페소화 위기 등을 거치면서 그 역할이 점차 강화되었고,

업무 영역을 확대하여

세계 경제의 안정성 확보와 연관된 거시 및 금융 정책의 건전성 부문까지 관할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의 회원국 수는 계속 늘고 있으며,

2016년 기준 회원국은 189개국이다.

본부는 미국의 워싱턴 D. C. 에 있다.  

    

1955년8월,한국은 국제 통화 기금에 가입하였다.

1997년의 외환 위기 당시,

한국은 국제 통화 기금의 '구제금융 양해각서'에 합의하고 210억 달러의 재정지원을 받았다.

1998년,경제구조 개편 끝에  18억 달러를 상환하면서 지원금을 상환하기 시작,

2001년8월, 구제 금융 잔금 195억달러를 전액 상환하여 국제통화기금의 관리 체제가 종료되었다.

 

 

한국의 IMF 구제 금융 요청             작성일자; 2019.12.27금요일,맑음

 

1997년12월3일부터 2001년8월23일까지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이

IMF으로부터 구제 금융을 요청 받는 1997년12월3일에 이루어진 양해 각서를 체결한 사건이다.

 

IMF는 세계무역의 안정을 목적으로 설립한 UN(국제연합) 전문기구로서 1945년 12월에 설립되었다.

자매기관인 IBRD(세계은행)가 장기 국제 금융기관이라면 IMF는 단기 국제 금융기관이다.

IMF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외환을 안정시킴으로써 세계 무역의 확대,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대한민국 1955년8월에 IMF에 가입하였다. 

 

태국,홍콩,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 등 동남 아시아의 연쇄적 '외환 위기' 속에 

정부의 외환 관리정책의 미숙과 실패가 'IMF 환란'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14대 대통령 김영삼은

1997년11월10일에 이루어진  강경식 경제 부총리와의 통화 이전까지 외환위기의 심각성 조차 모르고 있었다.

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면서 외환보유액이 급감했고 IMF에 20억 달러 긴급 융자를 요청하였다.

외환 위기 속에 대한민국은 외환 보유액이 39억 달러까지 급감했지만,

IMF에서 195억 달러의 구제 금융을 받아 간신히 국가 부도 사태는 면했다.

 

1997년12월18일,'IMF 환란'사건이 일어난 직후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여당은 야당에게 패배하여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1998년2월,김대중 정부가가 들어섰고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이후 계속해서 IMF의 개입을 받아들이고 경제 개혁에 착수했다.

IT 산업 장려 정책이나 대기업 간의 사업 교환 및 통폐합으로 경제 재건을 도모했다.

1999년3월,정부는 사이버 코리아21 계획을 발표하며 IT 산업 발전 및 인프라 투자에 힘을 쏟았다.

2000년6월,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1998년12월, IMF에 18억 달러를 상환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은 금융 위기로부터 서서히 빠져나갔다.

2000년12월4일, 김대중 대통령은 "국제 통화 기금의 모든 차관을 상환하였고,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라고 공식 발표하였다.

2001년8월23일,대한민국에 대한 IMF 관리 체제가 종료되었다.

   정부는 위기 발생 때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 장치로서 외환 보유액을 꾸준히 늘려왔다.

1998년 말,'외환 위기'로 39억 달러까지 떨어졌던 대한민국의 외환 보유액은 520억 달러로 증가했고,

2001년 말에는 1.028억 달러로 1000억 달러선을 돌파했다.

2001년8월23일에는 IMF 구제금융 195억 달러를 조기 상환해 IMF 관리 체제를 졸업했다.

김영삼 문민 정부 출범                     작성일자; 2019.12.27.금요일,맑음

 

 

김영삼 정부(1993년2월26일-1998년)는 제6공화국의 두번째 정부다.

공식 명칭은 문민정부로,군인 출신이 아닌 일반 국민이 수립한 정부라는 뜻으로 이전 정권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1990년3당 합당의 결과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김영삼 대통령은,

집권 초기 개혁과 공직자들의 재산 등록과 금융 실명제 등을 법제화하여 부패 일신 정책을 펼쳤고,

5.16 군사 정변 이후 중단되었던 지방 자치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했다.

1994년, 남북 정상 회담을 위한 예비 접촉이 이루어져 남북 관계가 진전될 기미를 보였지만,

김일성의 사망으로 남북 정상 회담이 무산되고, 김일성 조문 문제로 남북 관계는 다시 냉각되었다.

임기 말,아들 김현철 비리와 IMF 구제 금융 사건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제14대 대통령 김영삼                     작성일자;  2019.12.27.금요일,맑음

 

제14대 전대통령인 김영삼(생졸;1927년12월20일-2015년11월22일)은

경남 통영군 장목면 거제도에서 아버지 김홍조와 어머니 박부련 사이에서 1남 5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는 거제도에서 멸치어장을 소유하던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박부련은 1960년.무장공비 2명에 의해 살해되었고,아버지는 최남순과 재혼했으나 일찍 세상을 떠나

1985년, 74세에 13살 연하였던 이수남과 재혼하였다.

 

8세 되던해 장목 소학교를 졸업 후 1940년,통영 중학교를 입학 후 1945년11월,경남 중학교로 전학하였다. 

1947년,경남중학교를 졸업한 후 1948년9월에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1951년9월에 졸업하였다.

6.25 발발 후 1.4후퇴 무렵 서둘러 남하하여 1951년2월,학도의용군에 입대했다. 신분은 학도병이었다.

국방부 정훈국장으로 있던 이선근의 추천으로 정훈병으로 8개월간 국방부 정훈국 대북방송 담당원으로

배치되었고,국회 부의장 장택상으로부터 부름을 받고 1951년,장택상의 비서관이 되었다.  

1951년3월,경향고무를 경영하던 손상호의 딸 손명순과 마산 문창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2남 3녀를

두었다.차남 김현철 역시 후에 정치인이 된다.

1954년5월20일,제3대 국회위원 선거에 출마를 결심하고 자유당 본부에서 이기붕을 만났다.

자유당 후보로 경남의 거제도 지역구에서 출마하였고

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만 25세에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한다.

 

9선 국회의원을 지내며 유신 정권의 야당 지도자로서

민주당 원내총무,민정당 대변인, 신민당 원내총무로 활동하며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1979년10월의 YH무역 농성사건 이후 미국에 박정희에 대한 지지를 철회할 것을 주장하였다.

유신정권은 이 발언을 문제삼아 의원직 제명 파동을 일으켜 부마 항쟁을 촉발했다.

1983년에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일을 기해 23일 동안 단식투쟁에 돌입했다.

    6월민주 항쟁 이후 통일 민주당 총재로 민주화추진 협의회를 구성해 민주진영을 구축했다.

1986년에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 서명운동을 전개하였다.

1990년,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3당 합당을 하여

민주 자유당 대표최고위원으로 추대 되었다.

1993년,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하며 32년만에 군사 정권의 마침표를 찍고 문민 정부를 열었다. 

치적으로 금융실명제(1993년)를 도입하고 차명 부정 계좌를 단속 및 처벌하였으며,

지방자치제를 전면 실시했다.

'역사 바로 세우기' 정책의 일환으로 옛 조선총독부 건물들을 철거하였고,

군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를 척결했다.

또한,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비자금을 수사하여 처벌하였고,

5.16 군사반란 및 5.18 민주화 운동 진압의 책임을 물어 군사 정권 관계자들을 사법처리하였다.

1997년의 외환위기로 IMF 구제 금유을 요청하였다.

 

2015년11 22일 0시 22분,서울대 병원에서 급성 패혈증과 심부전증 치료를 받던 중 서거하였다.

장례는 대한민국 최초로 5일 기간의  국가장으로 거행되었으며,

장지는 동작구의 국립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제14대 대통령 선거 실시와 당선인 김영삼        작성일자;2019.12.27.금요일,맑음

 

 

1988년2월25일,제13대 대통령에 취임한 노태우의 5년 단임제 임기가 끝나감에 따라

1992년12월18일,제6공화국 때인 직접 선거로 치러진 대통령 선거로.

민주세력 후보들인 김영삼·김대중·정주영·박찬종·이병호·김옥선·백기완 등 7명이다.

선거 방식은 13대 때와 마찬가지로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한 최다수 득표자를 당선인으로 선출하는 직접선거 방식을 채택하였다.

후보는 민주 정의당,통일 민주당,신민주 공화당 등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 자유당의 김영삼

민주당의 김대중,통일 국민당의 정주영,신정당의 박찬종,정의당의 이병호,무소속의 백기완·김옥선 등 7명이었다.


총유권자 수는 2942만 2658명으로,

2409만 5170명이 투표에 참가하였고 투표율은 81.9%이었다.

무효 31만 9761표를 제외한 유효 득표수는 2377만 5409표였다. 

 

후보별 득표수는 김영삼 후보가 997만 7332표(득표율 42%)로 1위,

김대중 후보가 804만 1284표(득표율 33.8%)로 2위,

정주영 후보가 388만 67표(득표율 16%)로 3위,

박찬종 후보가 151만 6047표(6%)로 4위를 차지하였고, 

 백기완·김옥선·이병호 후보 순으로 그 뒤를 이었다.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영삼은 

1993년2월25일, 5년 단임제의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32년 간 지속된 군부 출신 대통령들의 통치를 종식 시키고 문민 정부를 출범 시켰다.

제13대 대통령선거 때와 마찬가지로 심각한 지역 대결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한국 사회의 병폐인 지역주의 풍토를 더욱 부채질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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