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이산 가족 상봉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2000년6월15일,

남북 정상간 체결한 '6.15 남북 공동 선언'에서 합의된 이산 가족 문제 등 조속히 해결하기로 합의하고,

남북 적십자 회담이 개최 되어

이산 가족 방문단 교환,생사.주소 확인,서신 교환 등 시범적 사업이 논의되어

2000년8월15일에서 8월18일까지 제1차 이산 가족 방문단 교환이 성사되었다.

 

제1차 이산 가족 방문단 교환은 2000년8월15일에서 8월18일까지 였으며,

규모는 단장을 포함한 총 151명(단장 1,이산가족 100,지원요원 30 기자 20)이었다.

이후 

2000년9월20일부터 9월23일까지 금강산 호텔에서 제2차 남북 적십자 회담을 개최하여

제2차 방문단 교환 및 생사,주소확인,서신교환,면희소 설치,운영에 합의하여

2000년11월30일부터 12월2일까지 제2차 이산 가족 방문단 교환이 있었으며,

2001년1월29일에서 1월31일까지 금강산호텔에서 제3차 남북적 십자회담을 개최하여

제3차 방문단 교환 및 제1차 서신교환 등을 합의하여,

2001년2월26일부터 2월28일까지 제3차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이 이루어졌다.

2001년3월15일에는 판문점을 통해 이산가족 서신교환(각 300통) 실시하였다. 

 

6.15 남북 공동 성명 발표        작성일자; 2019.12.28.금요일,맑음

 

 

6.15 남북 공동 선언

2000년6월13일에서 6월15일까지 평양에서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 회담을 통해서 발표한 공동 선언이다.

 

분단 이래 최초로 열린 정상 간 상봉과 회담이 남북 화해 및 평화 통일을 앞당기는 데 큰 의의를 갖는다고하면서

선언문을 채택하여 '6.15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선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 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3. 8 · 15에 즈음하여 흩어진 가족,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 나가기로 하였다.

4.경제 협력을 통하여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문화.체육.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하여 서로의 신뢰를 다져 나가기로 하였다.

5.이상과 같은 합의 사항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이른 시일 안에 당국 사이의 대화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제16대 국회위원  선거 실시           작성일자; 2019.12.28.금요일,맑음

1996년5월30일 개원하여 200년5월29일자로 임기가 끝나는 제15대 국회 임기가 끝남에 따라

2000년4월13일 치러진 제16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거를 말한다.

투표는 지역구(소선거구)와전국구(비례대표제)로 나누어 실시 되었고,

참여당은 새천년 민주당.한나라당.자유민주연합.민국당.민주노동당.청년진보당.한국신당 등 7개 당이다.

 

선거 방식은 제15대 때와 마찬가지로

국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선거구별로 최다수 득표자 1인을 당선인으로 선출하는

소선거구제(지역구)와 비례대표제에 의한 전국구로 구분해 실시하였다.

전국구는 정당별 득표 비율에 따라 의석 배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5석 이상 또는 득표율 5% 이상을 획득한 정당에 한해 자격을 부여하고,

총유효투표 수의 3% 이상 5% 미만을 얻은 정당에도 1석을 배분하도록 하였다.


의원 정수는 273명(지역구227명,전국구 46명)으로 15대에 비해 26명이 줄었다.

정당은 여당인 새천년 민주당을 비롯해

한나라당,자유민주연합·민주국민당·민주노동당·청년진보당·한국신당 등 7개 정당이 참여하였다.

선거인 명부에 등록된 총선거인 수는 3348만2387명으로,

이 가운데 57.2%에 해당하는 1957만 7124명이 투표에 참가해

국회 의원 선거 사상 가장 낮은 투표율을 기록하였다.


선거 결과

한나라당이 133석(지역구112석,전국구 21석)을 확보해 전신인 신한국당의 뒤를 이어 원내 제1당 자리를

새천년민주당이 115석(지역구96석,전국구 19석)으로 2위를 차지하였다.

자유민주연합은 17석(지역구12석,전국구 5석)밖에 확보하지 못해 원내 교섭단체 구성에도 실패하였다.

민주국민당이 2석(지역구1석,전국구1석),

한국신당이 1석,

무소속이 5석을 차지하였다.

 

정당별 득표율은 한나라당이 39.0%,새천년민주당이 35.9%,자유민주연합이 9.8%,민주국민당이 3.7%,

민주노동당이 1.2%,청년진보당이 0.7%,한국신당이 0.41% 순으로 나타났다.

전국 최다수 득표 당선은 새천년민주당의 정동영이 15대에 이어 2연패하였다.

전구 최고 득표율은 92.4%를 얻은 새천년민주당의 김효석,

최저 득표율은 25.2%를 얻은 자유민주연합의 정진석이 차지하였다.

한나라당의 박혁규는 3표차 당선이라는 역대 최소표차 당선 기록과 함께 최소득표 당선 기록도 세웠다.

300표 미만의 표차로 승부가 엇갈린 선거구만도 9곳이나 되었다.

 

2000년 총선 시민 연대 발족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2000년4월13일 실시된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전국의 412개의 시민 단체가

부패,무능한 정치인 심판과 왜곡된 정치 구조개혁,국민 주권 찾기 시민 행동을 목적으로 설립한 단체이다.

 

2000년1월12일, 정치 개혁 없이는 어떠한 사회 개혁도 있을 수 없다는 유권자들의 강력한 열망을

무능,부패 정치인에 대한 유권자의 '낙선운동'을 실현하기 위해

전국의 시민 사회단체가 모여 '총선시민연대'를 결성했다.

 

총선 시민연대는 제16대 국회의원 총선거와 관련해 후보자 공천 부적격자를 발표하면서

공천 부적격자가 공천되면 대대적인 '낙천낙선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낙천낙선운동을 통해 부패하고 무능한 정치인에 대해 유권자의 심판을 행사하는 것이

총선 시민연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총선시민연대'는 '낙천낙선운동'을 선언하고 

각 시민사회단체가 축적해왔던 의정활동 평가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해 대상자를 선정했다.

법적 쟁점과 관련해 '총선시민연대'는 500인 자문 변호사단을 조직했고

정치학, 법학 등을 비롯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로 정책 자문단을 구성했다.

정책자문단에는 ‘정치개혁시민사회특위’를 두어 낙천낙선운동의 역사적, 이론적 근거와

바람직한 정치개혁 방안을 제시하고자 했다.

 

1999년12월22일, 총선시민연대는 준비위원회 산하에 발족준비 과정에서

공천 반대 정치인 조사와 낙천낙선운동 대상 정치인의 근거 자료를 확보하고,

그 대상자를 선정하기 위한 기초 작업을 수행할 조사팀을 구성했다.

조사팀은 정치인 관련 각종 사실 관계를 조사, 입력, 분류, 정리해

총선시민연대의 낙천낙선운동 대상자 선정 심의과정에 판단근거를 제시했다.

대상자에 대한 1차 조사기간은 1999년 12월 22일부터 2000년 1월 23일까지 30일 간이었고,

조사 대상자는 제15대 국회에 진출한 바 있는 전,현직 국회의원 329명이었다.

총선시민연대는 공천 반대자 67명의 명단을 최종 확정했다.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은 시민사회의 새로운 정치 문화 운동이라 할 수 있다.

'낙천낙선운동'이 일부 부정,부패 정치인들의 물갈이라고 하는 인물론에 그친 것과,

근본적인 정치 개혁에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점은 아쉬운 부분으로 남아 있다.

 

동티모르에 상록수 부대 파견               작성일자; 2019.12.28.금요일,맑음

'티모르 내전'은 1998년에서 1999년까지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간의 독립 전쟁'이다.

동티모르 안에서 내전이 일어난게 아니라 인도네시아 섬에서 분쟁이 일어난것이다.

네덜란드 식민지인 인도네시아와 달리 티모르섬 절반은 포르투갈 영토였는데 

2차 세계대전후 포르투갈이 가장 지지가 높았던게 '좌파'에게 독립 시켜 주겠다고 하였다.

미국,호주,인도네시아 3국이 비밀리 공산국가 탄생을 우려하여

인도네시아를 부추겨 1975년 동티모를 침공하여 무력 합병하였다.

약소국이던 동티모르는 인도네시아의 폭정으로 인구 70만명중에서 20만명이 학살 당했다.

 

1990년대 냉전이 끝나면서 동티모르는 점점 국제 사회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는데

1998년, 수하르토 독재 정권이 물러 나고

UN의 감시 아래 각국의 독립 승인을 받고 주민투표가 이루워져

2002년, 동티모르는 21세기 최초로 독립했다.

이후에 일어난 '동티모르 사태'로

동티모르 주민 투표에 불복한 인도네시아와 친 인도네시아 민병대가  학살,방화를 자행해서 

주민 1500명 가량을 죽였다.

 이때 UN 평화 유지군이 파견되어 친 인도네시아파와 민병대를 제압하였으나

친 인도네시아파와 각종 반란군이 만연해있어 계속적으로 UN 평화군이 주둔되어 치안을 유지하고 있었다.

 

 

1999년9월15일,한국은 국제연합 안전보장 이사회의 파병 승인을 받아

1999년10월4일, 상록수 부대를 파병해 2003년10월에 임무를 마치고 철수시켰다.

1999년9월15일,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UNSC)는 대한민국에 동티모르에 파병할 다국적군 창설을 승인하였다.

이에 따라 국제연합 사무총장 및 오스트레일리아의 외무장관이 한국에 공식 파병을 요청하였고,

1999년9월21일, 국무회의를 거쳐

1999년9월28일, 동티모르 파병 동의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1999년9월29일,상록수 부대가 창설되고

1999년10월4일, 상록수부대가 출국하였다.

1999년10월22일,제1진 본대가 로스팔로스에서 첫 작전을 개시하였다. 이후 상록수 부대는

1999년10월애서 2001년12월까지, 로스팔로스 지역에서 작전을 전개하고

2002년1월부터 2003년10월까지는 오에쿠시 지역에서 작전을 전개하였다.

2003년3월6일에는 오에쿠시에 있는 에카트 강을 건너던 중 강물에 휩쓸려 4명이 순직하고

1명이 실종 되었으며,그 추모비가 오에쿠시 공원에 건립되었다.

2003년4월, 상록수 부대는제8진부터 대대급에서 중대급으로 규모를 축소하였으며

2003년10월, 동티모르에서 철수하였다.

1진부터 7진까지는 진당 약 430명,8진은 240여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매 6개월 간격으로 교대하였다.

상록수 부대는 국경선 통제,치안 확보 임무를 완벽히 수행하고,

순회 진료,구호품 전달 등 인도적 지원활동과현지 주민들의 복구 활동을 적극 지원함으로써

동티모르 평화 유지활동(PKO) 참여 부대 중 가장 모범적인 부대로 평가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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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급 옷로비 위혹 사건    장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부인 이형자가

남편의 구명을 위해 고위층 인사의 부인에게 고가의 옷으로 로비를 벌인 사건이다.

1999년5월26일, 당시 김태정 검찰 총장 부인 연정희가

외화 밀반출 혐의를 받고 있던 신동아 그룹 최순영 회장의 부인 이형자로부터

1998년 말, 고급 옷을 받았다는 소문이 보도되면서 사건이 터졌다.

언론에 사실을 제보한 것은 신동아 그룹의 최순영 부인인 이형자 자신으로 밝혀 졌다.

 

사흘뒤인

1999년5월28일, 김태정 검찰총장 부인 연정희가 이형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다. 

1999년6월2일,고소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이 사건은 이형자의 '실패한 로비'라고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그러나 수사 과정에서 검찰이 연정희를 지나치게 비호함으로써

옷로비에 대한 의혹을 증폭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옷로비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은

이형자,연정희,라스포사 사장 정일순,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의 부인 배정숙 등 상류층 부인 들이어서 더욱더 관심을 끌었다.

국회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하여 청문회를 개최하였으나,

관련자들의 거짓으로 이어져 '특별 검사제'가 도입되어

1999년10월8일에 최병모 변호사가 옷로비 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 검사로 임명되었다.

특별 검사팀은 연정희가 가질 마음으로 호피무늬 반코트를 받았으며, 

신동아그룹 로비스트 박시언에게 수사 기밀을 알린 위법 행위를 한 사실을 밝혀졌다. 

 또, 검찰 및 사직동팀이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사건을 축소,은폐하려고 했다는 사실도 덜어 났다.

1999년12월20일,
특별 검사팀은

'옷로비사건'이 이형자가 남편의 구명을 위해 고위층 부인들에게 시도한 실패한 로비'라고 공식 발표하고 그 임무를 끝마쳤다.

그러나 1999년12월30일,대검찰청은

'옷로비 사건' 진상을 이형자의 자작극으로 촉발된 '실체없는 로비'로 최종 결론 짓고 수사를 종결하였다.

이것은 특별 검사팀이 내린 결론을 정면으로 뒤집은 것이어서 또다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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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1차 서해 교전                           작성일자; 2018.12.28.토요일,맑음

 

1999년6월15일,남북한 1차 서해 교전이 일어났다.

남북한은 경비정이 NLL을 두고 9일째 대치 상황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북측의 기관포 공격으로 교전이 발발하여 5분간 전투가 진행됐다.

교전 때 북측에서는 어뢰정 1척 격침, 410t급 구잠함이 파손되고 경비정 4척이 대파됐으며

최소 20여명이 사망하고 수십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

우리 군은 초계함 1척의 기관실 파손 및 고속정 3척 일부 파손, 7명이 경미한 부상을 당하는 데 그쳤다.

북한 방송들은 1999년 당시 교전 당일로 서해교전 사실을 첫 보도하면서

'남조선괴뢰' '남조선당국자들''이라고 표현했다.

또 북측은 '미제의 사주를 받은 남조선군'이라고 미국의 책임을 주장했다.

 

■ 2차 서해교전(2002년)

2002년6월29일에는 2차 서해교전이 일어났다.

실제 교전 상황은 25분간이었지만

북측의 기습 선제 사격에 우리 해군 고속정 1척이 조타실을 맞아 예인 중 침몰되면서

이 고속정을 지휘하던 윤영하 대위 등 한국 해군 6명이 전사하고 18명이 부상했다.

북한군은 경비정 1척이 화염에 휩싸인 채 북측으로 예인돼 되돌아갔다.

북측은 2002년 2차 서해교전 당시 '남조선 군부'와 '남조선 군당국자'로 비난의 범위를

한국 정부 전체로 확산시키지 않고 한정시키면서

결국 쌍방간에 교전이 벌어지고 손실들이 있었다고만 표현했다.

북측은 교전 발생 이틀 후인 7월1일,

오전 판문점 남북 연락관 접촉을 통해 리광근조선축구협회 회장 명의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 앞으로 월드컵 성과축하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한편 우리정부는 2002년 서해교전이 일어나자

북한의 치밀한 의도와 계획 아래 감행된 도발이라고밝혔으나,

사실은 북한측의 우발적 군사행동과 우리측의 대응이 빚은 우발적 사고라는 의견이 제기되는 등 논란이 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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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연금 시대 돌입             작성일자; 01912.28.토요일,맑음

 

 

국민연금 제도의 도입 논의는 1970년부터 시작되어

1973년12월에 법제화가 이루어짐으로완성되어

보건 사회부에서 연금 제도를 체계적으로 분석·연구하였으며,

1986년12월에 가서 국민복지연금을 국민연금으로 개편하여  

1988년1월부터 본격적인 시행에 돌입하게 된다. 

 

처음 시행된 국민연금은 10명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실시하였으나,

이후 5인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실시하다가,

농어촌 지역 자영자로 확대하였고,

1999년4월1일,

'국민연금법' 일부개정법률에 의해 도시지역 거주자로까지 포함하여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

 

1971년,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설치되면서서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하였다.

당시에는 두 차례의 경제개발계획이 목표를 초과달성하는 등 상당한 성과를 거두는 한편,

공업화의 진전으로 말미암아

인구의 도시집중과 핵가족화,노령인구의 증가와 같은 사회적 문제가 새롭게 발생하는 시점이었다.

1972년,KDI는 시행될 제3차 경제개발계획에서 농어촌 지역의 생활 개선, 중화학 공업의 육성과 더불어

사회보장의 확충,근로자의 복지 및 근로 환경의 개선을 함께 도모하여 사회·복지 문제도 함께

다루길 원했으나 사회 보장에 대한 청와대의 인식이 문제였다.

 

1961년,군사정권이 출범할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 박정희가 내각에 하달한 지시 각서에는

'복지 국가를 조속히 이룩함은 우리의 궁극의 목표'라고 언급하고 있고 이를 바탕으로

1961년의 '생활보호법',1963년의'사회보장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실시하는 등

복지 확충을 위한 노력이 이루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청와대는 사회보장 제도를 '막대한 정부 재정이 소요되는 제도'라 인식하고

국민연금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팽배 해지게 되었다.

국민소득이 겨우 200~300달러 수준이었고,

기업도 근로자도 보험료를 내기에는 형편이 좋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청와대의 부정적인 인식을 KDI는 국민 연금 제도가

경제 성장에 기여할 수 있다는 주장을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1973년,박정희 대통령은 신년 기자 회견에서 

사회 보장 연금 제도를 도입할 준비에 들어갔다.'고 공식 발표하기도 하였다.

보건사회부와 KDI는 보험료의 수준과 징수 방법이나 연금의 수급 요건과 급여 수준 같은 부분 등에서

의견 차이를 보였다.

보건사회부 안은 복지에 중점을 두어 '적게 내고 많이 받은' 구조로 되어 있었으나,

KDI 안은 저축에 방점을 찍어 상대적으로 '많이 내고 적게 받는' 구조였다.

이후 '선성장 후분배'로 합의가 되어 최종안이 완성되었다.

 

최종안에서는 국민복지연금의 도입 목적으로 노령·장애·사망으로 인한 생활의 불안과 위험에 대처하여

근로자가 보다 안정된 자세로 경제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보장된 사회를 조성하며,

연금 제도를 통해 축적된 기금을 생산 투자에 활용하여

국민들의 소득 격차를 줄이고 생활 수준의 불균형을 예방하는 것에 있다고 명시하였다.

1973년12월,국민복지 연금법을 제정한 뒤 1974년,첫날 부터 시행하도록 하였다.

1973년,중동 전쟁으로 인한 유류 파동으로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받아 중단되고 말았다.

1975년12월,긴급조치를 통해 시행 시기를 늦추다가

시행령으로 시행일을 정할 때까지 무기한 연기함으로써 사실상 실시 보류된 것이다.

 

전두환 정부가 출범하면서 논의가 다시 되었다.

1955년부터 태어난 세대들이 1980년대 들어 결혼을 하고 새로운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주택난이 심화 되었는데,

이에 착안하여 주택 건설자금에 국민 연금 제도를 활용할 수 있다는 방안이 나왔다.

또한,고령화가 시작되던 시점이기에 이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성도 있었다.

이후 퇴직금의 조정문제,기금의 주체와 운용 방법,

소득 비례 부분의 산정기초·반환 일시금의 지급 기준 등의 문제를 해결하여

1986년12월,국민복지 연금을 국민 연금으로 개편하여

1988년1월부터 본격적인 시행에 돌입하게 된다. 

1988년1월1일부터 시행된 국민연금은 10명 이상 사업장을 대상으로 시작되었다.

이후 1992년1월1일,'국민연금법시행령'  일부개정령에 의해 5인 이상 사업장으로,

1997년7월1일,'국민연금법' 일부개정법률에 의해 농어촌지역 자영자로 확대하였고,

1999년4월1일,'국민연금법' 일부개정법률에 의해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게 되었다.

2003년7월1,적용 사업장의 범위를 1명 이상 사업장으로 확대하고,

일용직근로자도 연금의 대상에 포함될 수 있도록 하였다. 

2007년7월23일,연금의 급여 수준을 조정하였으며,

2012년4월1일,급여의 지급일을 기존의 매월 말일에서 매월 25일로 변경하고,

유족연금의 지급 기간도 만 18세 미만에서 만 19세 미만으로 연장하였다.

2012년7월1일부터,영세사업장 저임금 근로자의 보험료 지원 근거를 마련하여

사각지대를 해소하고자 하는 한편, 수급자에 대한 확인조사를 실시하여 부정수급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2015년4월29일,보험료를 신용카드로 납부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2015년7월29일부터는,노령 연금액 감액 기준을 연령에서 소득으로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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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 관광 시작                     작성일자; 2018.12.28,토요일,맑음

 

1998년11월18일에 시작된 금강산 관광은

현대그룹의 주도로 한국의 민간인들이 북한의 금강산을 둘러보는 관광으로 

남북 분단 50년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회기적인 사건이다.  

금강산 관광은

한국의 기업인 현대그룹의 오랜 노력과 정부의 햇빛정책이 맞물려 그 결실을 맺었는데,

1989년1월,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이 방북하여 금강산 남북공동개발 의정서를 체결하면서 시작되었다

1998년2월14일,정몽헌 회장이 중국 베이징에서 북한측과 첫 협의를 거친 다음,

1998년6월23일,금강산 관광 계약이 체결되었음을 발표하였다.

1998년8월6일,통일부는 현대상선,현대건설,금강개발의 협력 사업자를 승인하였고, 

1998년10월13일,장전항 공사를 위한 자재와 장비를 실은 배가 출항하였다. 

1998년11월14일,금강산 관광선인 금강호의 시험 운항을 마치고,

1998년11월18일에,금강호가 처음으로 출항하여 금강산 관광은 시작되었다.

1999년2월28일,금강산 온정리 휴게소 및 금강산 문화회관 준공식을 갖는 등

순조롭게 진행되던 금강산관광은 관광 시작 7개월 만인

1999년6월20일,관광객 민영미가 북한 환경 감시원에게 귀순 공작을 했다고 억류되면서

잠정적으로 중단되었다가,

현대측과 북한이 베이징에서 관광 세칙과 신변안전보장 합의서를 체결한 후 다시 진행되었다.

금강산 관광지역 내 숙박 시설이 없었던 처음에는

유람선을 타고 금강산 앞바다에 위치한 장전항까지 가서 낮에는 소형 선박으로 육지로 이동하여 관광하고,

밤에는 유람선으로 돌아와 숙박하면서 4박 5일간 진행되었다.

2003년9월부터,해로 관광이 중단되고 육로 관광이 시작되었다.

2004년7월,금강산 당일관광,1박2일 관광을 시작하였고,

2005년6월,금강산 관광객 100만 명이 돌파하였다.

2007년5월,내금강 관광을 시작되었으며

2008년3월,승용차 관광을 실시하였다.

2008년7월11일,관광객 박왕자가 북한군의 피격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금강산 관광이 잠정 중단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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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대포동 미사일 발사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1998년8월31일, 북한은 사전 예고 없이 함경북도 무수단리에서

사정거리 1.800㎞ 내지 2,500㎞, 무게 25t 정도로 추정되는 소련의 스커드 미사일을

기본 설계로 하여 개발한 노동 1호보다 사정 거리가 훨씬 더 길고 대형인 3단식 탄도 미사일인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하였다.

대포동이라는 명칭은,

노동과 마찬가지로 미국방성이 공중 정찰로 이 미사일을 발견한 대포동(무수단리의 지명을 따서 붙인 코드명이다.

1단계 로켓은 블라디보스토크 남쪽 동해의 공해상에 떨어졌고,

2단계 로켓은 65㎞의 고도로 일본열도 상공을 지나 태평양에 낙하했다.

북한이 노동 미사일의 후속 미사일로 개발을 추진하고 있던 대포동 미사일 1호의 실험 발사로 추정되었다.

3단계 로켓은 궤도 진입에 실패하여 대기 중에서 타버린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발사 며칠 후인

1998년9월4일,이를 인공위성 '광명성 1호'의 발사용 로켓이라고 발표했다.

광명성은 김정일을 지칭하는 말이다.

 

현재 대포동 미사일에는 1호·2호·2호 개량형 3종류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1호는 액체 2단 로켓으로 사정거리 1,500~2,000㎞, 동체 지름은 1.3m, 발사중량은 2만 7,000㎏이다.

2호는 사정거리 3,500~6,000㎞, 동체 지름 2.4m(1단계), 발사 중량은 6만㎏이며,

추진체는 1호와 마찬가지 액체 2단 로켓이다.

2호 개량형은 3단 로켓으로서 1·2단은 액체연료이고 3단은 고체연료를 쓴다.

사정거리는 5,400~6,700km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탄두 무게를 달리하면 15,000km까지 가능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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