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대 대통령 김대중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생졸;1924.1.6-2009.8.18) 정치가로써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2000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주요 수상으로 노벨평화상(2000), 노르웨이 라프토 인권상(2000), 무궁화 대훈장(1998),

국제인권연맹 인권상(1998), 미국 필라델피아시 자유의 메달(1999) 등이 있다.

 

대통령 김대중은 전라남도 신안에서 태어났다.

1950년,목포일보 사장이 되었고 1960년 민의원에 당선된 후 1971년까지 6·7·8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3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63에서 1967년까지 민주당,민중당,신민당 대변인을 역임하였고,

1971년, 신민당 대통령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의 박정희에게 패배하였다.

그후 미국,일본 등지에서 박정희 정권에 맞서 민주 화운동을 주도하다가

1973년8월8일,

도쿄의 한 호텔에서 중앙정보부(국가정보원) 요원에 의하여 국내로 납치(김대중납치사건) 되었다.

1976년에서 1978년까지 '민주구국 선언사건'으로 투옥되었고

1980년 초, 정치활동을 재개하였으나,

1980년7월, 내란 음모죄로 사형을 선고 받고 복역하던 중

1982년12월, 형집행 정지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건너갔다.

1985년에 귀국하여 김영삼과 더불어 민주화 추진협의회 공동 의장직을 역임하였고

1987년8월, 통일 민주당 상임고문에 취임하였다.

1987년11월, '평화 민주당'을 창당하여 12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8년4월26일,제13대 국회의원(전국구)에 당선되었고

1991년9월, 통합 야당인 '민주당'을 창당하여 공동 대표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2년12월,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다시 낙선하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는 동시에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1993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1년 동안 연구활동을 하였고

1994년 귀국,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을 조직하여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민주당의 최대 계파인 동교동계의 막후인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고,

1995년6월에 실시된 지방자치 단체 선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민주당을 승리로 이끌었다.

1995년7월, 다시 정계 복귀를 선언함과 동시에 동교동계 국회의원 54명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총재가 됨으로써 제1야당의 총수로 정치 활동을 재개하였다

 

1997년10월,자유민주연힙(자민련; 김종필 총재)과의 야권 후보 단일화를 이끌어낸 뒤 같은해

1997년12월, 15대 대통령선거에서 당선되어 한국 정치사상 최초의 평화적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룩하였으며,

1998년2월, 제15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1998년12월,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과 중국 및 일본과의 정상회담을 갖는 등 

2000년1월, 자유 민주연합과의 내각제 개헌논의를 유보하고,

새천년민주당을 출범시켜 초대 총재에 취임하였다.

2000년6월13일 부터월15일까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대로 평양을 방문하여 6·15남북공동선언을 이끌어냈다.   

1997년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을 통해 위기를 극복하였다.

아시아와 한국에서 민주주의와 인권향상

그리고 50여 년간 지속되어 온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하여 노력한 공로로 '2000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국민의 정부 '출범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1998년2월5일,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50년 헌정 사상 처음으로 투표에 의해 여야 정권 교체를 이룬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여 '국민의 정부'라는 기치를 내걸고 출범하였다.

 

새 정부는 '국민의 정부,라는 명칭으로

1997년 말 국가부도 위기를 맞아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나라의 경제를 헤쳐나가야 하는 험난한 과제를 안고 출범했다.

한국전쟁 이후 최대의 국난으로 일컬어진 'IMF 사태'를 극복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 발전으로 '생산적 복지 구현'이라는 국정 철학을 내걸고,

구조 조정과 경제 개혁정책을 펴나갔으며,

한편으로는 야당의원 영입을 통해 정국 구도를 여소야대에서 여대야소로 개편했다.

 

노사정 위원회 출범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1998년1월15일에 제1기 '노사정 위원회'가 정식으로 발족,출범되었다.

위원장,간사 위원 각 1인과 근로자,사용자, 정부를 대표하는 15인 이내의 위원으로 구성된 협의체로서,

대통령 자문 기구로서의 위상을 가진다.

IMF 사태 이후 경제 위기 극복을 위한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하여

노동 단체,사용자 단체,정치권과 정부가 위원회 구성에 전격 합의되었다.

 

노사정 위원회는 매월 정기 회의를 갖고 수시로 임시 회의를 개최하여

고용 안정,노사 협력,경제 위기 극복 등 현안 문제 해결 방안을 심의, 의결한다.

또한 위원회는

노.사.정의 동등한 참여와 협력,국난 극복을 위한 개혁 과제 논의,경제 회생과 고용 안정의 병행 추진하여

노,사,정 고통 분담의 기본틀 마련하고

독립적이고 중립적인 운영을 통한 국민 화합의 장으로의 발전 등 을 목표로 삼았다.

 

전(前) 대통령 전두환,노태우 특별 사면 복권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1995년10월19일,당시 민주당 소속의 국회위원 박계동이 국회에서

전(前) 대통령 노태우가 각계로 부터 받은 거액의 비자금을 퇴임후에도 은익하고 있다고 폭로 하였다.

검찰이 진상 조사에 나서

1995년11월11일,노태우를 불러 40여명의 대기업 총수로 부터 4.100억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사실을 밝혀 내고

1995년11월16일,서울 구치에 구속,수감하였다.

 

비자금 사건이 터지자

부패 정권을 창출하는 계기가 되었던 12.12 구데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강경 탄압의 진상 규명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거세졌으며,김영삼 대통령도 1995년11월, 5.18특별법 제정을 지시하고 '여사 바로 새우기'를 선언했다.

 

5.18 사건 진상 규명은 1998년 국회 청문회에서 시도되다 무산되고

그 후에도 5.18 피해자와 단체들이  수차례 고소,고발을 했으나 검찰은 기소유예와 공소권 없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너라 대통령의 특별법 제정 지시로

검찰은 재수사애 착수하고 헌법재판소사 합헌 결정을 내림으로써 재수사가 가능하게되었다.  

이에 따라 검찰은

12월3일 군형법상의 반란 수괴죄를 적용하여 전두환을 위시한 신군부측 핵심인사11명을 구속,기소하였다.

동시에 5공화국의 비리도 함께 진행되었다.

 

1996년3월 부터 시작된 공판은 1심28회,항소심 12회 등 총 40회에 걸처 진행되어

두 전직 대통령에게 반란죄,내란죄,수뢰죄를 적용하여

전두환에게 구형대로 사형을,노태우에게는 구형은 무기 직영이었으나 징역 22년6개월을 각각 선고하였다.

4월17일의 대법원 상고심에서 전두환 무기징역,노태우에게 징역17년이 최종 확정되었다.

그러나 제15대 대통령 선거 직후인  1997년12월22일,

대통령 김영삼이 국민 대화합을 명분으로 관려자들을 모두 측별 사면하여 석방함으로써

두 전직 대통령은 구속 2여년만에 출소 되었다.

 

이회창     작성일자; 2019.12128.토요일,맑음

 

 

이회창은(생;1935년6월2일-현재)은 대법관,감사원장,국무총리를 지낸 법조인인 동시에 정치가다.

1935년,검사 출신인 이홍규과 김사순 여사 사이에 4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황해도 서흥군에서 태어났다.

1960년,서울지방법원의 법관으로 임용되어

1961년,5.16군사 정변이 일어나자 마자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를 간첩 협의로 몰아 사형한 오판 사건의 판사 가운데 한명으로 참여하였다.

 

1971년에서 1973년까지 사법 연수원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1973년에서 1975년까지 서울 민사 지방법원 부장 판사로,

1976년에서 1981년까지 서울 고등법원 부장판사 등을 역임했다.

1981년4월, 최연소 대법원 판사에 임명되었으나

전두환 정권의 기피 인물로 지목되어 연임이 안 된 채 1986년4월, 대법관직에서 퇴임 당하였다

1988년7월,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 복귀하여 다시 대법원 대법관에 임명되었으며 동시에

1988년7월부터 1989년11월까지 '중앙 선거 관리위원회' 위원장을 겸임하면서

갖가지 부정선거 사실을 고발, 당시 노태우 대통령에게까지 경고 서한을 내고 스스로 물러났다.

군사정권의 청탁과 압력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판결을 내려 '대쪽', '대쪽판사'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1993년2월25일부터 1993년12월6일까지 제15대 감사원장을 지냈으며,

1993년12월17일부터 1994년4월21일까지 제26대 국무총리를 지냈다.

이후 1997년의 제15대와 2002년의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와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에게 아들 군필 문제로 패배해 낙선했다.

2007년11월7일,한나라당을 탈당한 후 무소속 후보로 제17대 대선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2008년,보수정당인 자유 선진당을 창당하여 당 총재와 대표를 역임하였다.

 

제15대 대통령 선거 실시와 김대중 대통령 당선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1997년 12월 18일 국민 직접선거로 실시된 제15대 대통령 선거로.

후보자는 김대중,이회창,이인제,권영길,허경영,김한식,신정일이 출마 하였으나

새정치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가 당선 되었다. 

 

1993년2월25,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김영삼의 5년 임기가 끝나감에 따라

1997년12월18일,전국에서 동시에 실시한 대통령선거를 말한다.

선거 방식은 14대 때와 마찬가지로 직접선거 방식을 채택하였다.

후보는 한나라당의 이회창과 새천년 국민회의의 김대중,국민신당의 이인제,국민승리21의 권영길,

공화당의 허경영,바른정치연합의 김한식,한국당의 신정일 등 7명이었다.

그러나 쟁점은 제14대 대통령선거에서 패배하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가

1995년9월,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제1야당 총재로 복귀한 김대중 후보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간의 경쟁으로 모아졌다.

또 이 둘의 경쟁 속에서 한나라당의 공천과정에서 탈락한 이인제 후보가 변수로 작용하였고,

특히 전국 민주 노동조합총연맹 후보가 가세함으로써

한국 선거 사상 처음으로 노동당이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는 점도 특징으로 꼽힌다.

그밖에 지난 선거에서 청중 동원 등 많은 문제를 야기했던 옥외 연설회가 옥내 연설회로 바뀌고,

횟수 역시 대폭 축소되었으며,처음으로 방송 연설회가 실시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다.

총선거인 수는 3229만 416명으로,

이 가운데 2604만 2633명(투표율 80.7%)이 투표에 참가하였고,

무효 40만 195표를 제외한 유효투표수는 2564만 2438표였다.

 

후보별 득표 수는 김대중 후보가 1032만 6275표(득표율 40.3%)로 1위,

이회창 후보가 993만 5718표(득표율 38.7%)로 2위,

이인제 후보가 492만 5591표(득표율 19.2%)로 3위,

권영길 후보가 30만 6026표(득표율 1.2%)로 4위를 차지하였고,

신정일·김한식·허경영 순으로 그 뒤를 이었다.

이 선거 결과에 따라 김대중 후보가 임기 5년의 제15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998년2월25일, 취임함으로써 한국 선거 사상 처음으로 야당에 의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현하였고,

이로써 국민의 정부를 출범시켰다.

 

국제 통화기금(IMF)에 구제 금융 신청       2019.12.28.토요일,맑음

1997년1월의 한보 그룹의 부도로 시작된 경제 대란의 유례 없는 기업 부도와 금융위기가 확산되어,

1997년12월22일,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구제 금융을 신청함으로써

한국경제가 IMF 관리체제로 들어가게 된 사건이다.

 

종합주가지수는 300선까지 떨어지고,

환율은 달러당 2,000원대를 돌파했으며,

재계 2위 재벌 기업인 대우그룹의 붕괴를 비롯,

중소 기업들의 연쇄 도산으로 인한 실물경제의 위축과 높은 금리 상승 등을 불러왔다.

또한 기업들의 도산으로 수많은 실업자들을 거리로 내몰아 노숙자들이 양산되었으며,

기업과 금융권의 구조조정이 뒤따라 은행의 합병.퇴출 등이 이루어졌다.

한편, 투자의 활성화와 IMF 관리체제 조기 졸업을 위해

전국민적인 '금 모으기 운동'이 일어나는 등

국민생활 전반에 큰 변화를 불러왔다.

 

대북 경수로 건설공사 착공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1997년8월19일, 함경남도 금호 지구에서

한반도 에너지 개발 기구(KEDO)가 지원하는 대북 경수로 발전소 착공식을 가진 일이다.

1994년10월, 북.미 기본 합의문 체결 이후 2년 10개월 만에 이루어진 이 착공식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 봉쇄 및 동결, 전력난 해소라는 목적 외에,

김일성 사후 경색된 남북 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안정을 도모하고 새로운 기대감으로 크게 주목 받았다.

1997년7월17일,또한 발전소 착공식에 앞서 대한 통운 소속 코렉스 챔프호가

발전 설비 해상 운송을 위한 바지선.시험 운항에 나서

함남 신포 지역 양화항에 도착해 군사 분계선을 넘어 남북 직항로 시대를 열었다.

1997년, 7월28일에는 금호 지구에 KEDO 사무소가 개설되고

1997년8월4일에는 전용전화 8개선이 개통되어 남북 직통 전화의 개막을 올렸다.

 

 

재벌 그룹 연쇄 부도 사건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외환 위기가 닥친 1997년 한 해에 10개에 이르는 대기업이 연쇄적으로 부도를 내거나 도산한 사건이다. 

 1997년 초, 한보 철강의 부도로 시작된 대기업의 연쇄 부도는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면서 12월까지 계속되어,

이해에 부도를 내었거나 부도유예가 적용된 대기업은 10여 곳에 이르렀고,

경제 전반에 큰 타격을 가하여 IMF체제를 불러들인 큰 원인이 되었다.

 

1997년1월23일, 재계서열 14위인 한보그룹이 한보 철강의 부도로 도산하여 경제 정치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1997년4월에는 삼미 그룹이 부도를 냈고 진로 그룹에는 부도 유예 협약이 적용되었으며,

1997년5월에 대동에도 부도 유예 협약이 적용되었고 한신 공영은 부도 처리되었다.

1997년7월15일, 기아 그룹에 부도 유예협약이 적용되어 경제적 혼미를 더하였고

1997년10월과11월에는 쌍방울 그룹과 해태 그룹의 화의 신청에 이어

1997년12월에는 고려 증권과 한라 그룹이 잇따라 쓰러졌다.

이들 대기업이 1997년 한 해에 부도를 내었거나 부도 유예 협약이 적용된 금융권 여신이 30조억원을 넘어,

금웅 시장을 혼란에 빠뜨렸고 금융시장 혼란은 다시 대기업의 연쇄 부도를 조장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져 

경제적 파탄을 재촉하였다.

 

황장엽 망명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황장엽(생졸;1923년2월17일-2010년10월10일)은 북한의 정치인.주체 사상 이론가이자

노동당 비서,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지낸 북한 최고위층 인사로

1997년2월12일에 한국으로 망명하였다.

북한 평안남도 평양의 강동군에서 태어난 평양공립상업학교,일본 주오대,김일성 종합대를 거쳐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1954년, 김일성 종합 대학 교수가 되었다.

1958년, 노동당(조선노동당) 서기실 이론 서기,

1959년,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맡았으며 김일성의 눈에 들어 철학담당 비서로 활약.

1962년, 북한 최고 인민회의(국회에 해당)의 대의원으로 정계에 발을 디뎠고,

1964년, 김일성을 보좌하는 내각 참사관으로 일하였다.

1965년, 43세의 나이에 김일성 종합대학 총장에 임명되었고,

1970년, 노동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1972년부터 1983년까지 11년간 최고 인민회의 의장직을 수행하며 최고위층에 올랐다.

1979년, 노동당 과학 교육담당 비서 및 주체사상 연구소장,

1980년, 노동당 비서,

1984년,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1986년, 조국평화 통일위원회 부위원장,

1987년, 조선 사회과학자 협회 위원장,

1993년, 최고 인민회의 외교 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았다.

황장엽은 북한의 통치 이데올로기 중 하나인 주체 사상의 최고 이론가로서 주체 사상을

해외에 전파하는 외교업무를 병행하였으며,

김일성의 비공식 방중을 단독 수행하는 등 굳건한 입지를 구축하였다.

또 김정일이 백두산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백두산 출생설을 퍼뜨리며

김정일 후계자 구도 구축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등의 호칭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 북한 권력 서열 13위에 오를 정도로 핵심적 권력층에 있었던 그는

김정일과의 갈등으로 망명을 결심하였고,

1997년,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을 통해 한국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탈북자동지회, 북한민주화위원회 등 탈북자 단체에서 활동하며 강연과 방송 등을

통하여 북한의 체제와 권력을 비판하였다

2010년10월10일, 오전 9시30분,

서울 강남구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황장엽씨가 욕탕에서 발견된 것으로 미뤄 심장마비로 인한 자연사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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