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린 우리당 창당               2020.02.04.화요일,맑음

2003년11월11일,

2003년5월,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신당 추진 모임이 결성되었고,

9월, 국민참여 통합 신당 준비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9월20일, '국민 통합 신당'이 원내 교섭 단체를 구성 등록했고,

10월27일, '열린우리당 창당 준비위원회'가 결성된 후,

11월11일, 의원 47명이 열린 우리당을 창당했다.

2004년1월,

정동영 의원이 당의장으로 선출되었고,

2004년4월15일,

제17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의원정수 152석을 확보함으로써 원내 제1당이 되었다.

2004년5월11일, 천정배 의원이 원내 대표로 선출되었고,

2004년8월20일,

이부영이 당의장으로 취임했다.

의회의 과반을 차지하게 되어 4대 개혁 입법을 추진했으나 보수 야당과의 충돌이 일었고,

2005년,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했으나 거부해서 실패했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정부와 열린 우리당의 지지도가 바닥으로 떨어지자 호남 기반의 민주당과

합당하자는 대통합파 의원들의 집단 탈당으로 과반수가 붕괴되고 중도개혁통합신당에 이어 2007년8월, '대통합민주신당'이 창당되면서 그에 흡수.합당되었다.




불랙 머니 론스타 사건                      작성일자; 2020.02.04.화요일,맑음

 

 

2003년9월 승인,

1989년 미국 댈러스에서 처음 설립된 론스타는

부동산에만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소수의 투자자들을 비공개로 모집하여

절대 수익을 남기는 일종의 투자 신탁회사다. 

아시아에서는 태국,일본,한국에만 투자하고 있으며,

한국에서는 극동건설,외환은행,강남 파이낸스 센터 등 기업을 구입한 후 매각한 바 있다.

론스타는  'KC홀딩스'와 'FE investment L.L.C' 이 둘을 포괄한 통칭이다.

 

극동건설의 경우

1976년에 한국증권 거래소에 상장한 '극동건설'은

1990년대 중반까지 국내 경기 성장과 함께 성장한 건설 기업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가 도래하여 경영이 악화되어

급기야 1998년1월에 당좌 거래가 중지되었고,3월에는 회사 정리법에 의해 12월부터 법정 관리를 시작했다.

이에 2003년 론스타는 'KC holdings S.A.'를 통해 주식을 인수하고

사채는 'FE investment L.L.C'를 통해 인수하였다.

이는 조세 부담이 적은 벨기에에 거처를 둔 'KC홀딩스'를 통해 비용을 절감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론스타는 극동건설의 주식 98%를 인수하고 추가로 극동건설이 발행한 회사채를 인수하였다.

론스타 펀드의 투자자금 회수 과정에서

조세 피난처에 투자 기구를 두고 투자 자금을 회수함으로써 소위 말하는 '먹튀'라는 이슈가 나오게 되었다.

2003년7월,론스타는 극동건설을 인수하면서 구입한 회사채를 극동건설에게 되팔았다.

주식 구매대금을 이용하여 일부 부채를 상환하고,

남은 현금 자산으로 론스타가 인수한 회사채를 다시 상환하는데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론스타는 극동건설 자본 인수에 1,476억 원,부채인수에 1,230억 원 총 2,706억 원을 투자하였으나

론스타가 인수한 회사채를 상환하는데 1,230억 원을 사용하였으므로

1,476억 원만을 들여 극동건설을 인수한 꼴이 된다.

 

론스타는 서울 충무로의 극동건설의 사옥 빌딩을  1,583억 원에 매각하였다.

이 과정에서 356억원의 이익이 발생하였다.

론스타는 극동건설의 자본금이 건설업계 평균 자본금 비율보다 월등히 높기 때문에

자본감소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두 차례의 유상 감자를 실시하였다.

2003년12월3일을 기준으로 극동건설은 론스타로부터

보통주 1,300만 주를 액면금액과 동일한 5,000원에 유상매입하여 소각하였다.

 

이에 따라 론스타는 650억원을 회수하고

2004년6월에도 875억 원의 대규모 유상감자를 실시하여 총 1,525억 원을 회수하였다.

주주인 론스타가 액면가 대비 25% 수준의 현금 배당을 결정함에 따라

당기순 이익의 약 25%인 240억 원을 배당금으로 지급하였다.

2004년에는 당기순이익의 52%를,

2006년에는 당기순이익의 97%를 배당금으로 지급하였다.

그 결과 론스타는 2004년~2006년 각각 배당을 통해 240억,195억,260억을 회수하였다.

론스타는 극동건설을 웅진그룹에 6,600억 원에 매각하였다.

유상감자, 배당, 매각대금까지 론스타의 총 회수금액은 8,820억 원이다.

투자금 1,700억원에 4배가되는 7,120억원의 이익을 냈으며,

수익률은 세금을 고려하지 않으면 총 419%가 된다.

 

외환 은행 경우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 과정에 있어 가장 핵심이되는 문제는 'BIS 자기 자본 비율'이다.

'BIS비율'은 국제 결제 은행이 정한 은행의 부실채권 대비 자기자본의 비율을 의미하는데,

이 기준에 따라 은행은 위험 자산에 대해 최소 8% 이상의 자기 자본을 유지해야 건전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금융기관이 아닌 주체가 금융기관을 인수하려면 BIS비율이 8% 이하인 부실 금융기관만 인수할 수 있다.

 

외환은행이 회계 조작으로 BIS비율을 낮춰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매입하도록 도왔다는 의혹이 제기 되었다.

첫째는,은행장과 재경부 금융정책국장 및 친구인 변호사 계좌로 로비로 추정되는 금액들이 발견되엇다.

둘째는,당시 정황상 숫자를 조작했다고 의심할만한 증거들이 존재한다는 것이었다.

2003년의 보고서에 의하면 외환은행 BIS비율은 8.24~ 9.14%였다.

불과 1주일 후인 2003년7월25일 보고서에서 갑자기 6.16%로 떨어진 것이다.

이 보고서는 재경부 금융정책국장이 행장으로부터 팩스로 받아 만들어진 자료이고,

이를 만든 사람은 유감스럽게도 만든 그날 사망했다는 것이다.

 

매도자인 외환은행은 삼일 회계 법인에 용역을 주면서

용역의 목적이 매각가격 산정을 위한것이라는 공지는 하지 않았으나,

부실을 고려해 최대한 가격을 낮추어 평가하라고 지시하였고,

이 요청에 의해 삼일회계 법인은 현금 할인 모형을 이용하여 3가지 안을 제시했다.

외환은행은 이중 제일 가격이 높은 수치를 지워 버리고

나머지 2가지 안만 가지고 협상을 진행해 매각대금을 결정했다.

그 당시 초과 이익 모형을 사용해 계산한 외환은행의 매각가치는 1조7000억~2조 2000억원 정도 였다.

실제 매각 가격 보다 최소 4000억원 이상 최대 8000억원 많은 수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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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림 사건                       작성일자; 2020.02.04.화요일,맑음

 

1981년9월의 부림사건은

전두환 신군부 정권 초기에 공안 당국이 부산 지역 독서 모임인

'부산양서판매이용협동조합' 회원인 학생과 교사,회사원 등을 국가 전복과 사회주의 건설을 모의한

국가 변란 조직으로 날조하여 19명을 영장 없이 체포해

최장 60여일까지 불법 감금·고문하고 구속 기소해

유죄 판결을 받은 부산 지역 사상 최대의 '조작 공안 사건'이다.

 

이후 부림 사건 피고인들은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을 받았고,

최근 재심을 통해 일부 무죄 판결과 국가 배상 판결이 나왔다.

당시 이 사건 변론을 맡았던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2013년 개봉한 영화 '변호인'의 소재가 되기도하였다.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 정부 출범                작성일자; 2020.02.04.화요일,맑음

 

 

2003년2월25일,

2002년12월19일에 치러진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2월25일 부터 2008년2월24일 까지의 임기로,

취임과 함께 제6공화국 4기 정부인 '참여정부'가 출범하게 되었다.

1987년10월29일,직선제 개헌을 통해 제6공화국이 탄생한 이 후

1993년의 김영삼 정부는 '문민정부',

1998년에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국민의 정부'란 명칭을 내세웠다.

2003년 ,출범한 노무현 정부의 명칭은 '참여정부'다.


참여 정부의 과제는   

국민과 함께 하는 민주주의,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 사회,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부패 없는

사회,국민 참여형 정당정치,소선거구 단순 다수 대표제 개편,동북아 경제 중심 국가 건설,

과학 기술 중심 사회 구축,삶의 질 향상,임대 주택 50만 호 건설,호주제 폐지,학력 차별 금지 제도,

일자리 창출 등을 과제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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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대 대통령 노무현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생졸; 1945년9월1일`2009년5월23일)은

본관은 광주이며 경남 김해시 진영읍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창 초등학교,진영 중학교,1966년에 부산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를 졸업 한 후 어망 제조업체 잠시 근무 후 그만 두고 건설 현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면서

사법 시험을 준비하였다.

1968년, 육군에 입대하여 만기 제대한 뒤 그만 두었던 사법시험을 다시 준비하였으며,

1973년1월,동향인 권양숙 여사와 결혼하였다.

1975년,4번째 도전 끝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으며,

1977년,대전 지방벙원 판사로 임용되었으나  사직하고

1978년5월,부산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여 한동안 변호사 생활을 하였다.

1981년,제5공화국 정권의 민주화 세력에 대한 용공 조작 사건인 '부림 사건'의 변론을 맡은 것을 계기로

학생.노동자 등의 인권 사건을 변호하는 인권 변호사로 변신하였다.

1987년, 6월 항쟁에 앞장섰다.

대우 조선의 이석규가 거리 시위 중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자 사인 규명에 나섰다가

'제3자 개입 금지'를 위반한 혐의로 구속되어 변호사 업무 정지 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1988년4월26일,통일 민주당의 김영삼 총재의 제안으로 정치에 입문하였고

제13대 국회위원으로 당선되어 정치에 입문 한 뒤 '5공 비리 특별위원회' 위원으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1월22일,여당인 '민주 정의당',야당인 '통일 민주당','신민주 공화당'이

'민주 자유당'으로 합당하자 부도덕한 야합이라 비난하며 정치적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고 '민주당 '창당에 동참하였다.

1992년3월24일,제14대 국회위원 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한 뒤

1993년,통합 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고,지방자치 실무 연구소를 열었다.

1997년, '새정치 국민회의' 부총재 및 수도권 특별 유세단 단장을 역임하고,

1998년,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2000년4월13일, 제16대 국회위원 총선거에서 낙선했다.

2000년8월부터 2001년4월까지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 수산부 장관을 역임했다.

2002년11월18일,'국민통합21'의 대통령 후보인 정몽준과 후보 단일화에 성공 한 뒤에

2002년12월19일, '새천년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한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물리치고

제16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3년2월25일,제16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2003년 말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개혁 세력들이 주축이 되어 창당한 열린우리당에 하였다.

2004년3월12일, 선거 중립 의무 위반과 측근 비리 등에 대한 야당의 사과 요구를 거절하자

야당인 한나라당,새천년 민주당,자유민주연합이 탄핵 소추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한나라당의 박관용 국회 의장은 경호권을 발동하여

소수 여당인 열린 우리당 의원들의 반대를 저지한 채 국회 본회의에 탄핵 소추안을 기습 상정하였고,

한나라당.새천년민주당,자유민주연합이 투표하여 탄핵 소추안을 가결되자,

이를 반대하는 비난이 빗발치고 전국에서 탄핵 반대 촛불 시위가 잇따랐다.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직 재임 중 탄핵소추를 당해 대통령 직무가 정지되었고

국무 총리 고건이 직무를 대행하였다.

2004년4월15일에 치러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탄핵을 주도했던 새천년 민주당,한나라당,자유민주연합은 역풍에 휩싸여 참패하였고

열리우리당은 과반이 넘는 152석을 차지했다.

2004년5월14일, 헌법 재판소가 탄핵 소추안에 대하여 기각 결정을 내림으로써

두 달 만에 대통령직에 복귀하였다.

2007년10월4일,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분단 후 처음으로 걸어서 판문점을 통과하여

평양을 방문,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남북 정상회담을 열어

'남북관계 발전 및 평화번영을 위한 10.4언)'을 발표하였다.

2008년2월24일, 대통령 임기 후 봉하마을로 귀향하여 전원 생활과,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사람들과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였고,

건전한 토론 문화를 조성한다는 취지로

인터넷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을 개설하여 세상과 소통하였다.

2009년4월30일,퇴임 후 '국가 기록물 무단 유출'에 대한 수사를 시작으로

측근과 친형,부인,아들,딸 등에 비리에 연류되었다는 의혹으로 검찰의 소환조사를 받았다.

2004년5월23일,

'국가 기록물 무단유출'에 대한 수사를 시작으로

검찰에 의하여 측근과 친형,부인,아들,딸 등이 비리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자

사저 뒷산의 부엉이바위에서 투신하여 서거하였다.

임기중 대통령 선거에서 공약으로 내세웠던 '신행정 수도 이전'에 대하여

헌법 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내림으로써 정치적 타격을 입었고,

이라크 파병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하여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는 결과를 낳았다.

언론과 대립하여 임기 내내 언론으로부터 호의적 반응을 얻지 못하였으며

보수 진영으로 부터는 '친북 좌파'라는 비난을,진보 진영으로부터는 '신자유 주의자'라는 비판에 시달렸다.

 노무현 그는 정치 인생을 일관하여 '지역 주의'를 청산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권위 주의'를 타파하는 데도 공헌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대미 외교에서는 '대등한 관계'를 추구하였으며,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하여 북한과 긴장 관계를 해소하는 데 힘썼다.

저서로 '여보, 나 좀 도와줘(1994)','노무현이 만난 링컨(2001)', '노무현의 리더십 이야기(2002)' 등이 있다.

2004년 영국 왕실로부터 최고 훈장인 '바스 대십자 훈장'을,

2007년 카타르 정부로부터 '독립대 훈장'을 받았다.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2003년2월18일에 일어난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는

1호선 중앙로역에서 김대한의 방화로 일어난 화재 참사이며 한국에서 가장 인명 피해가 큰 철도 사고였다.

 

2개 열차의 전동차가 불타고 뼈대만 남았으며,

192명의 사망자와 21명의 실종자 그리고 148명의 부상자를 속출란 대형 화재 참사다.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사고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최대 규모의 사상자르 낸 사고다.

사고 당시 중앙로역도 소실되어 2003년12월30일까지 복구를 위해 운행을 중지했다.

세계3대 지하철사고는 

1995년10월28일의 아제르바이잔의 지하철 화재 참사 사고,

1995년4월28일의 대구 상인동 가스 폭발 사고와 더불어 최악의 3대 사고로 꼽힌다.

 

제16대 대통령 선거 실시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2002년12월19일에 치러진 제16대 대통령 선거는 김대중 정부 중간 평가로 일컬어진

2002년6월13일,제3회 전국 동시 지방 선거에 이어

2002년8월8일,‘미니 총선’으로 불린  국회의원 재.보궐선거가 연이어 실시된 뒤 실시된 대통령 선거였다. 

 

두 선거,

즉 제3회 전국 지방선거와 재국회위원 재.보궐 선거 결과 야당인 한나라당이 압승을 거둔 상황에서

여당인 '새천년 민주당'은 견제심리를,

야당인 한나라당은 분위기 쏠림 현상에 편승하여 승리를 기대하였다.

 

한편, 각 정당의 후보자 선출도 이전 선거와는 많이 달랐다.

새천년 민주당과 한나라당은 ‘국민 참여 경선’ 을 통해 후보자를 조기에 확정하였다.

또한 선거를 한 달여 앞두고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가 단일화함으로써

이회창,노무현 양강 선거 구도 하에서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결과,

노무현 후보가 48.91%를 얻어 46.59%를 얻은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물리치고 

임기 4년,2003년2월25일에서 2008년2월24일까지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제17회 '2002년 한.일 월드컵' 축구 대회 개최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전 세계인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고가는 스포츠인 월드컵 축구는 4년 마다 열린다.

축구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에서 축구와 유사한 `에피스쿠로스` 또는 `하르파스톤`이라는 경기가 있었는데, 

그 경기는 BC 2세기경 `하르파스툼`이라는 이름으로 로마에 전해졌고

로마 제국 시대에 로마 군인들이 유럽 각지에 축구를 소개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삼국 시대부터 조선시대 말까지 '축국'이라는 축구와 비슷한 놀이가 행해 졌는데,

이는 원래 중국의 전설상의 제왕인 황제가 병사를 훈련 시키기 위해 행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20년부터 1956년까지 '국제 축구연맹'회장을 역임한 줄리메는 월드컵의 창시자로 

세계적인 규모의 축구대회를 만드는데 많은 공헌을 했고,

FIFA에서는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월드컵 축구대회의 우승컵을 줄리메컵으로 명명하였다.

줄리메컵은

1970년의 제9회 멕시코 대회 우승으로 월드컵 세차례 우승국이 된 브라질이 영구히 소유하게 되었으며,

1974년의 제10회 서독 대회부터는

FIFA가 제작한 'FIFA World Cup(FIFA월드컵)'이 우승국에게 수여되고 있다.

 

제17회 '2002년 한.일 월드컵은 2002년5월31일에서 6월30일까지 한달간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열렸다.

아시아에서 열린 첫 대회이자, 월드컵 역사상 유일하게 두 나라 이상이 공동으로 개최한 대회이다.

브라질은 이 대회에서 다섯 번째 FIFA 월드컵 우승을 달성했고,한국은 사상 최초로 4위를 기록했다.

 

1996년 5월 FIFA 총회에서 한국과 일본이 공동 개최국으로 선정 되었다.

월드컵 유치 준비는 일본이 먼저 시작했지만 일본은 월드컵에서 본선에 진출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1994년 월드컵에서 본선에서 독일,스페인 등

축구 강국들과 겨루어 본 적이 있는 한국에서 개최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FIFA 집행위원장들은 만장일치로 양국의 공동 개최를 선언했고,

공식 명칭 우선권은 한국이,결승전은 일본이 취하는 방식으로 협의되었다.

 

전 세계 199개국이 예선에 참여했고 본선엔 자동 출전권이 부여된 프랑스와 본선에 오른 32개국이다.

전 대회 우승국인 프랑스는 대회 규정에 따라 자동 출전권으로 예선에 참여하지 않고 바로 본선에 진출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덴마크,독일,러시아,벨기에,스웨덴,스페인,슬로베니아,아일랜드,이탈리아,잉글랜드,

크로아티아,터키,포르투갈,폴란드 등 15개국이,

남미에서는 브라질,아르헨티나,에콰도르,우루과이,파라과이 등 5개국이,

북중미·카리브해 지역에서는 멕시코, 미국, 코스타리카 3개국이,

아시아에서는 개최국 대한민국과 일본,중국,사우디아라비아 4개국이,

아프리카에서는 나이지리아,남아프리카공화국,세네갈,카메룬,튀니지 등 5개국이 본선에 진출했다.

 

A조부터 H조까지 배정되었고

A조는 덴마크와 세네갈,

B조는 스페인과 파라과이,

C조는 브라질과 터키,

D조는 한국과 미국,

E조는 독일과 아일랜드,

F조는 스웨덴과 잉글랜드,

G조는 멕시코와 이탈리아,

H조는 일본과 벨기에가 16강전에 진출하게 되었다.

 

독일과 미국,스페인과 한국,잉글랜드와 브라질,세네갈과 터키가 8강전에 진출하게되었고,

독일,한국,브라질,터키가 4강전에 진출하게 되었다.

한국은 사상 최초로 4강 진출에 성공해 월드컵 4위에 올랐다.

최종 우승은 브라질,준우승은 독일,3위는 터키,4위는 대한민국이었다.

 

브라질의 호나우두는 8골을 득점해 최다 득점 선수로 골든 슈를 수상했고,

독일의 올리버 칸은 골든 볼과 골든 글러브를 받았다.

 

'새천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국민 경선제 실시       작성일자; 2019.12.28.토요일,맑음

 

정당의 공직 후보 선출 과정에서 

정당의 당원이 아닌 일반 유권자들이 각급 선거의 공직 후보 선출 과정에 직접 참여해

자신의 의사를 반영하는 제도로써 2002년 '새천년 민주당'에서 대통령 후보 경선으로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국민의 정치적 무관심과 대의원 매수,정당의 총재 1인 독주의 당 운영 방식 등 잘못된 선거 관행을 개선하고

대중 정당화와 참여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취지로 도입 되었다.

한국에서는 새천년 민주당이
2001년10월 재선,보궐선거에서 참패한 후 

2002년2월, 당내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선거인단 중 절반은 기존 당원,절반은 기존의 당원이 아닌 일반 국민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비당원이 공천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고질적 병폐인 당내 비민주성을 해소하고,국민 주권 실현과 민주정치의 발판을 구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대로 현행 선거법상 당원 등록을 해야 하기 때문에 국민의 자유로운 참여에 제약이 따르고,

예비 선거에 참여하는 일반 유권자들이 동원 또는 매수될 가능성이 있으며,

상대 정당의 후보 선출을 교란할 목적으로 악의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점 등이 단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국제 통화 기금  탈피             작성일자;2019.12.28.토요일,맑음

 

IMF는 세계무역의 안정을 목적으로 설립한 UN(국제연합) 전문기구로서 1945년 12월에 설립되었다.

자매기관인 IBRD(세계은행)가 장기 국제 금융기관이라면 IMF는 단기 국제 금융기관이다.

IMF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외환을 안정시킴으로써 세계 무역의 확대,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국가 부도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이

IMF으로부터 자금을 수혜 받는 1997년12월3일로 부터 2001년8월23일,

대한민국은 IMF 구제금융 195억 달러를 조기 상환해 IMF 관리 체제 관리 체제가 종료다고 발표했다

 

1997년12월18일,'IMF 환란'사건이 일어난 직후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져

여당은 야당에게 패배하여 정권 교체가 이루어졌다.

1998년2월,김대중 정부가가 들어섰고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이후

계속해서 IMF의 개입을 받아들이고 경제 개혁에 착수했다.

IT 산업 장려 정책이나 대기업 간의 사업 교환 및 통폐합으로 경제 재건을 도모했다.

1999년3월,정부는 사이버 코리아21 계획을 발표하며 IT 산업 발전 및 인프라 투자에 힘을 쏟았다.

2000년6월,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정부는 위기 발생 때 충격을 흡수하는 완충 장치로서 외환 보유액을 꾸준히 늘려왔다.

1998년 말,'외환 위기'로 39억 달러까지 떨어졌던 대한민국의 외환 보유액은 520억 달러로 증가했고,

2001년 말에는 1.028억 달러로 1000억 달러선을 돌파했다.

1998년12월, IMF에 18억 달러를 상환한 것을 계기로 대한민국은 금융 위기로부터 서서히 빠져나갔다.

2000년12월4일, 김대중 대통령은 "국제 통화 기금의 모든 차관을 상환하였고,

우리나라가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라고 공식 발표하였다.

2001년8월23일,대한민국은 IMF 구제금융 195억 달러를 조기 상환해

IMF 관리 체제 관리 체제가 종료다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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