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정 과도 정부수립                    2019.12.19.목요일,맑음

허정 과도 정부는

제1공화국이 붕괴 이후 1960년4월 27일 구성되어 1960년6월16일까지 제2공화국이 출범

하기 이전 과도 정부를 말하며 이승만 정권의 구체제를 4·19 세력이 상황을 극복하고자 탄생시킨 임시적인 정치 체제이다.


허정의 과도 정부는 

과도 내각으로 규정할 수 있으며 여,야 합의로 짠 민주화 일정을 관리하는 것이 임무였고.

정치 권력의 장악에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로 이루어져 국민들로부터의 정치적 인기나 또는 조직화된 정치세력 기반 구축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던 인사들이었다.

즉, 직업 정치인이 아니며 정치 영역에 기반이 없으며 4·19 혁명 정신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진보적인 이념이나 정책도 갖지 않았다.


과도 정부의 임무는 이승만 정부의 반공,반미 정책을 승인하고,

부정 선거 관련자 처리,내각제 개헌과 선거 관리였지만 이는 보수적인 과도 정부로서는

상당히 처리하기 어려운 과제들이였다.

결국은 과도 정부에 의해 이승만만 물러가고 정치 체제는 그대로 잔존하게 되었다.


허정 과도 정부는 민주당이 원하는 3차 개정인 내각 책임제 개헌안을 국회에서 결의시켜

내각재 개헌안은 허정 과도 정부에 의해  1960년6월15일 공고 되고 제2공화국 출범의 기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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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2019.12.19.목요일,맑음

전라북도 남원 출생인 김주열은 

남원 금지 중학을 졸업후 1960년 마산상고에 입학하였다.

1960년,3.15 부장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실종 한 지 27일 만인 4월11일,

최루탄이 눈에 박힌 채 유기되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것이 발견되고,

이것이 경찰의 소행으로 밝혀지자 학생과 시민의 분노가 폭발하여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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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19 혁명              2019.12.19.목요일,맑음

1960년의 4·19 혁명은 4월 혁명이라고도 부른다.

1960년4월16일,

제1공화국인 자유당 정권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3.15 부정 선거를

저지르자,이를 반발한 학생들이 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시위를 비롯하여 전국의

대규모 시민에게 확대된 반독재 투쟁이며 혁명이다.


1960년4월11일,

마산 상업 고등학교에 입학한지 얼마 안된 김주열은 3.15 부정 선거를 주장하며 의거에 참여하였다가 실종되었으나 27일후인 4월11일 아침, 마산 중앙 부두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경찰이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발견되어 부산 일보를 통해 보도되면서 시위는 전국적

으로 확산되었다.

 1960년4월19일,

경찰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몰려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고,시위대는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섰다.

전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 동원 거부에 봉착한 대통령 이승만이 4월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였고,

4.19 혁명의 결과로 과도 정부를 거쳐

1960년6월15일(6.15개헌)에 의거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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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5 부정 선거                 2019.12.19.목요일,맑음

1960년3월15일에 일어난 3.15 부정 선거는

이승만 정권 당시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정과 폭력으로써 재집권을 시도하다가

4·19혁명과 이승만 정권의 붕괴를 야기한 사건이다.


1960년3월15일,

3.15 선거에서 대통령 이승만은 12년간 지속된 장기 집권 체제를 연장하고,

부통령에 출마한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하여 대규모 부정 행위를 저질렀다.
전국적으로 유령 유권자 조작,4할 사전 투표,입후보 등록의 폭력적 방해,관권 총동원에 의한 유권자 협박, 야당 인사의 살상,투표권 강탈,3~5인조 공개 투표,야당 참관인 축출,부정 개표 등이 자행되었다.

그 결과 자유당 후보의 득표율이 95-99%에 이르렀으나 하향 조정하여

이승만 963만 표(85%),이기붕 833만 표(73%)로 발표하였으나
1960년3월15일,

마산에서 부정 선거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하여 시위 진압 도중 경찰의 실탄 발포로 최소한  8명이 사망하고,72명이 총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1960년4월19일,

이로 인하여 대규모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4.19 혁명을 맞이하게된다.

1960년4월26일,

대통령 이승만이 하야 성명을 발표함으로써 자유당 정권은 붕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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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붕                          2019.12.18.수요일,맑음

이기붕(생졸; 1896년-1960년)은 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태종 이방원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 의 17대손이며,아버지는 예조판서 이회정의 손자

이낙의다.

부인 박()마리아와의 사이에 이강석,이강욱 두 아들을 두었다.


해방 후 이승만의 비서를 지냈고,서울특별시 시장,국방부 장관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이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하였고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위하여 사사오입을 강행하다

4·19 혁명이 일어나자 전가족이 자살하였다.


1915년,

서울의 보성 학교를 졸업하고 연희 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정 형편으로 중퇴 하여

선교사 무스의 통역으로 있다가 그의 도움으로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다.

1923년,

아이오와주 패사디나시에서 고학으로 데이버 대학 주립대학의 문과를 졸업한 후 뉴욕에서 허정 등과 함께 '삼일신보' 발간에 참여하다가 1934년 귀국하였다.

귀국 후 허정과 충북 영동의 광산에 투자하여 광산 사업을 했다.

광복 후,

미군정청에 들어가 군정 재판장의 통역을 역임하고, 민주의원 의장 이승만의 신임을 받아

비서가 되었다.

1946년,

대한 기독청년회,대한 적십자사 등의 이사를 역임하면서 사회적 발판을 다졌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로서 정치적 기반이 굳혔다.

1949년,

서울특별시장,

1951년4월,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어 신성모 국방부 장관 시절에 발생한 ‘국민 방위군 사건’을 수습했다.

12월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하여 발췌 개헌안 통과를 담당하였다.

1952년,

대한 체육회장이 되었고,

1953년,

대한 올림픽위원회 위원장에 선임되어 국제 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 진출하였으며,

한미재단 한국 사무소장직도 역임하였다.

1953년,

이승만의 자유당 내 족청계 제거 지시에 따라 자유당 총무부장을 맡아 박용만 조직부장 등과 함께 이를 추진하였고 12월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에 올라 자유당의 제2인자가 되었다.

1954년3월,

제5차 자유당 전당대회에서 자기 중심의 당편제를 완료,

5·20총선에서 대승을 거두고 무소속을 포섭하여 재적 3분의 2를 넘는 137석을 확보하여

제2대 민의원 의장에 선출되었다.

자유당의 헌법 개정을 바탕으로 이승만의 종신 집권을 위하여 초대 대통령의 중임제한의

철폐를 골자로 하는 개헌안을 발의하였다가 1명이 미달되어 일단 부결되었으나,

바로 다음날에 사사오입을 통해 이를 번복,가결시키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같은 해 인하공과 대학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56년,

자유당의 공천을 받아 부통령에 입후보 하였다가 낙선하였으나

제3대 민의원의장에 선출되었다.

1958년,

경기도 이천 선거구에서 제4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고 제4대 민의원 의장이 되었다.

1960년3월15일,

제5대 정·부통령선거에서 자유당의 공천으로 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혁명으로 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1960년4월28일,

자유당 정권은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와 함께 붕괴되고,

이기붕 일가는 경무대 관사 36호실에 피신하여 있다가 맏아들 강석의 총격으로 집단 자살

하였다.

그가 살던 서대문의 집은 '4·19 혁명 학생 도서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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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병옥                  2019.12.18.수요일,맑음

조병옥(생졸; 1894년-1960년 )은 독립 운동가며 미군정하에서 경무부장,내무장관,국회의원,민주당 대통령 후보이며 정치가다.

관련 사건은 광주 학생운동,신간회 사건,수양 동우회 사건,한국전쟁중엔 부산 정치파동,사사오입 사건 등이 잇다.



아버지는 조인원이며.공주 소학교,연희 전문학교를 거쳐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했다.

신간회,수양동 우회 사건 등과 관련해 옥고를 치르고 해방후 미군정청 경무부장을 역임했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발병하여 도미 치료 중 사망하였다.


1894년,

충남 천안에서 출생하여 공주 소학교를 졸업 후 케블 목사의 추천으로 공주 영명중학교에

편입하여 1909년,다시 평양 숭실중학교에 편입하여 재학시 미국 유학 후 귀국한 이승만과

김규식·신흥우·백상규 등의 영향으로 유학을 결심하고 졸업 후 연희 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14년에 졸업하자마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18년,

펜실바니아주 와이오밍 고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했다.

1919년,

유학 중인  3·1운동의 여파로 북미 지역의 독립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조병옥도 이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4월13일부터 4월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 연합회의에 참석하였고,

1919년4월16일에는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 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1925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연희 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기독교여자

청년회(YWCA) 이사와 비밀 독립 단체인 그리스도교 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신간회의 창립에 참가하여 재정부장·총무부장 등을 지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탄압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어 광주학생 운동의 배후조종 혐의로 한용운 등과 함께 3년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1932년,

조만식 등 서북 출신들이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사 경영을 담당하게 되자 전무로 참여하였고, 보인 광업회사라는 광산 회사를 운영했다.


조병옥은 미국 체류 중 안창호와 교류하게 되어 영향을 받아 충청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서북파가 주도하던 흥사단·수양 동우회의 활동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귀국 후 안창호의 영항 아래 있던 이광수를 찾아가 함께 흥사단과 수양 동우회의 국내 지부 결성을 추진했다.

1937년,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되어 2년을 복역하였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가하였고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취임하여 1948년까지 재직하면서

수도 경찰청장이던 장택상과 함께 경찰력을 장악했다.

미군정기 가장 중요했던 물리력인 경찰력을 장악함으로써 좌익 탄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조병옥은 안창호를 지지하였으나 그가 사망하고 해방이 된 후에는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경무부장으로서 이승만의 정치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48년8월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2월에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연합 총회에 한국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1949년, 제4차 국제연합 총회에서 단장으로 참가하였다.

이승만과 한민당이 결별하게 되면서 조병옥도 이승만과 멀어지게 되었다.

1949년2월10일에는 한국 민주당과 대한 국민당의 신익희,지청천 계열이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 할 때 참여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이승만 정권하의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대구 방어에 공을 세웠다..

1951년5월,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1954년5월,

대구에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범야 신당 창당 준비조직인 호헌동지회

창설에 참여하여 곽상훈·김도연·김준연·장면·박순천 등과 함께 조봉암의 신당 참여에 반대

하였다.결국 조봉암이 배제된 채

1955년,

조병옥이 참여하여 민주당이 결성되었다.

1956년,

신익희의 급서로 대표 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민주당 내 신파와 구파 간 분쟁이 가시화되면서 조병옥은 구파의 리더로 활약하였다.

1959년11월26일,

민주당 정·부통령 선거 지명 대회 표결 결과 조병옥은 세 표 차이로 승리하여 대통령 후보가 되어 대통령 후보 등록까지 마쳤지만 갑자기 발병하자 도미하여 육군 병원에 입원한 지 23일 만에 선거를 불과 한 달여 남겨두고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는 1960년 2월 25일 국민장으로 치러졌고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제4대 정,부통령 선거

제4대 정·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1960년 3월 15일 실시 된 선거.

사상 유례없는 부정선거로 4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제3대 정·부통령 선거 결과를 분석한 자유당 정권은 정당한 선거를 통해서는 전혀 승산이 없음을 알고, 관권을 동원한 엄청난 부정선거 계획을 세웠다.

자유당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인 조병옥이 신병치료차 미국에 건너간 틈을 타 5월 중에 실시하기로 되어 있는 정·부통령 선거를 2개월이나 앞당겨 3월 15일 실시를 공고했다.

내무부장관 최인규를 중심으로 공무원을 총동원한 부정선거 계획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4할 사전투표
△3인조에 의한 반공개 투표
△완장부대 동원으로 유권자 위협
△야당참관인 축출
△유령유권자의 조작과 기권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투표
△내통식 기표소의 설치
△투표함 바꿔치기
△개표 때의 혼표와 환표
△득표수 조작발표 등.

이러한 음모는 정의감에 불타는 한 말단 경찰관이 <부정선거 지령서> 사본을 민주당에 제공함으로써 백일하에 폭로 되었다. 이 와중에 조병옥이 미국에서 급서,

이승만이 4선은 확실시되고 부통령 입후보자 이기붕의 당선만이 문제였다.

이승만의 후계자로 자처한 이기붕은 그의 처 박마리아를 배후조종자로, 내무부장관 최인규를 하수인으로 내세워 부정을 집중적으로 감행한 결과 3·15선거는 유례없는 부정선거로 전락했고, 이날 마산에서는 의분을 참지 못한 시민과 학생들이 일어나 시위를 벌였다.

3월 17일 자유당 정권이 이승만·이기붕 후보가 80%가 넘는 높은 득표율로 당선되었음을 발표했으나,

대다수 국민들은 선거결과를 수긍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민주당의 선거무효주장에 호응하여 부정선거 규탄데모가 전국적으로 번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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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8 대구 학생 의거          2019.11.15.금요일,맑음

1960.2.28, 2.28 대구 학생 의거는 이승만 정권 시절 3.15 대선을 앞두고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의 독재에 항거하여 대구시에서 일어난 학생 의거로,

2·28 의거는 이후 3.15 마산 의거와 4.19 혁명의 도하선이 되었다.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인 장면 박사의 유세일 당일은 일요일이었으나,

학생들이 민주당 유세장에 못나가도록 당국이 등교 지시를 내린 것이 2·28 대구 학생의거의 발단이 되었다.


경북 고등학교는 3월에 있을 중간고사를 앞당겨 친다는 이유로 일요일인 이날 등교 지시를 내린다.

대구시의 다른 7개교 역시 영화 관람과 같은 황당한 이유로 일요 등교를 지시한다.

1960년2월27일 오후, 대구 동인동 경북 고등학교 학생부 위원장인 이대우 집에

   경북 고등학교,대구 고등학교,경북대학 사범대학 부설 고등학교 학생 8명은 부당한 일요 등교 지시에

   항의를 하기 위해 시위를 조직하여 결의문도 작성했다.

1960년2월28일 오후 1시,800여명의 학생이 반월당을 거쳐 경북 도청으로 가는 길에 다른 학교 학생들이

   합류하며 시위대는 도중에 유세장으로 가던 장면 박사를 만났을 땐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당시 경상북도지사는 학생들에게 "이놈들은 전부 공산당"이라고 말한 반면,시민들은 구타당하는 학생을

   경찰에게 달려들어 말리고 박수를 쳤고,치맛자락에 모자를 감춰 학생을 숨겨주는 부인이 대부분이었다.

   1,200여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여를 했고 그 중 120여명이 경찰에 체포된다.

   하지만 경찰은 시위가 번질 것을 우려해 주동자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학생을 석방하게 된다.


⊙ 제4대 국회위원 선거 실시      2019.12.18.수요일,맑음

1958년5월2일,

민의원 의원 선거로 투표율은 87.8%를 기록했다.

소선거구제로 의원 정수는 233명이었다.

1952년의 발췌개헌으로 국회 양원제가 도입됨에 따라 민의원 선거와 함께 참의원 선거도

치러져야 했으나 여당인 자유당의 반대로 인해 민의원 의원 선거만 실시되었다.  


1957년 부터 각각 선거법 개정을 추진하여 온 자유당과 민주당은

1957년12월30일,

원내 간부들 사이에 예산안과 선거법을 일괄처리하는 비밀거래가 이루어져

1958년1월1일, 협상 선거법을 전격적으로 통과시키고 1958년1월25일 공포하였다.


1958년5월2일,
협상 선거법에 따라 자유당 정부는 3월31일 제4대 민의원 의원 선거일을 공고하고,

1958년5월2일로 선거일을 확장시켜 4월1일부터 10일까지 입후보 등록을 실시하였다.

의원정수 233명에 입후보자수는 844명으로 평균 경쟁률 3.2:1을 보였다.

이같은 경쟁률은 이전에 실시된 3차례의 국회의원 선거 때의 경쟁률보다 낮은 것이어서

다소 입후보자의 난립 현상이 줄어든 것으로 할 수 있다.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여당인 자유당과 야당인 민주당을 비롯하여 모두 14개의 정당,

사회 단체들이 참가하였다.

 

자유당이 전체 입후보자 중 28.1%인 236명,

민주당이 23.7%인 199명.

나머지 정당,사회 단체들은 불과 1%대의 후보자를 내세우는 데 그쳤다.

통일당 13명,국민회가 11명의 후보자를 냈으나,

나머지 10개 정당,사회 단체들은 모두 10명 미만의 입후보자를 냈으며,

그 중 5개 정당,사회 단체들은 단 1명의 입후보자로 선거에 참여하였다.

이에 비해 여전히 무소속 후보자들의 비율이 높았는데,전체 42.4%인 357명이 무소속으로 출마하며 아직까지도 정당 정치가 제도화되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선거결과는

자우당 이 과반을 얻었으나 126석으로 지난 번보다 의석 비율이 줄게 되었다.

무소속 의원 수는 26명으로 현저히 줄었다.

민주당은 조병옥 대표가 이끌어 총 80석을 차지하여 어느 정도 여당을 견제할 수 있는 야당으로 자리매김했다.

원내 정당은 자유당, 민주당, 통일당 3개뿐이었다.

요약하자면 양당제의 경향이 나타난 첫 선거.



제4대 국회의원 선거는 선진국과 같이 양당 정치의 실현 여부를 타진하는 동시에 여,야당이 서로 정강 정책을 정면으로 내걸고 대결하는 선거전의 양상을 보였으며, 국민들은 자유당이 민심 수습을 확보할 수 있을 만큼 진출할 수 있을 것인가에 관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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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랑호 납치 사건      2019.12.18.수요일,맑음

1958년2월16일,

대한국민항공사(대한한공)의 여객기가 경기도 평택 상공에서 북한의 공작원에 의해 납치된 사건이며,대한민국 역사상 최초의 항공기 납치사건 사건이다.


1958년2월16일,

부산발 서울행 대한국민항공사 소속 창랑호 여객기는

기장 윌리스 P. 홉스와 부기장 멕클레렌 미 공군 중령이 조종을 하였으며,

승객 29명과 승무원 3명 및 미군 군사 고문단원 중령 1명(비공식승무원) 등 34명을 태우고 오전 11시30분 이륙한 후,경기도 평택 상공에서 납치되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에

있는 순안 국제공항에 강제 착륙 당하였다.

특히 승객 중에는 창랑호 기장인 홉스 등 미국인 2명과 독일인인 요한 리트히스 부부 등

외국인 4명이 포함돼 있어서 주한 미국 대사관과 독일 대사관이 승객송 환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북한은 언론기관을 통해 자신의 의지로 군사 분계선을 넘엇다고 거짓 발표했다.

1958년2월20일, 

경찰은 북한 공작원인 김택선을 포함한 3명이 범인으로 발표했다.

1958년2월22,

정부는 국회에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를 행하고,UN군에 참가한 16개국에게 협력을 요구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2월24일,메서지를 받은 UN군은 군사정전 위원회에 수석 대표가 승객과 승무원,

기체의 조속한 송환을 북한에 요구하여

2월25일에는 기덕영 등 3명을 사건의 공작과 배후 공작의 혐의로 체포하였다.

1958년3월8일,

남치범으로 추정되는 7명을 제외한 모든 승객과 승무원 등 총 26명을 돌려보냈다.

북한측은 창랑호에 탑승한 모든 인원에 대해 세뇌를 실시했으며 일부 탑승자들에게 고문을 하기도 하였다.

 

창랑호 납북의 총책임자인 기덕영의 조종 하에 공작원 김택선,김길선 형제와 김순기,최관호, 김형,월북동행자 김애희와 김미숙 포함 총 7명이 납치범이라 발표하였으며,

3월25일에는 기덕영 등 3명을 사건의 공작과 배후 혐의로 체포하였다.


김순기,최관호,김형,김애희,김미숙은 모두 월북했기 때문에 정확한 진상을 알 수 없다.

창랑호 납북 사건이 종결된 후 기덕영 등 3명은 재판에 회부되었으며,

기덕영은 간첩죄 이외의 죄상으로 징역 7년형이 선고되었고 다른 2명은 무죄로서 석방된다.


창랑호의 기체는 북한으로 납북된 이후 반환되지 않아 대한국민 항공사는 운행상의 커다란 타격을 받아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골치를 썩이게 된다.

당시 대한국민 항공사는 만송호,창랑호,우남호 등 3대의 항공기로 운영을 하고 있었는데,

창랑호가 납북 당하기 전 1957년7월7일에 만송호가 부산 수영 비행장에 착륙하던 도중

기체가 크게 파손되어 전손 처리된 상황에서 창랑호 마저 납북으로 잃게 되어 우남호 하나만으로 항공사를 운영해야만 했기 때문에 적자는 어쩔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대한국민 항공사는 결국 1959년4월22일에 큰 돈을 들여 DC-3기 1대를 추가 도입하여 그날로 국내선에 투입하였고 1959년7월28일에는 미국 록히드사에서 콘스틀레이션 749A 4발 여객기 1대를 임차하여 국내선과 국제선에 병용 취항하여 도입 20여일만에 50명의 유학생을 태우고 태평양을 횡단,서울에서 시애틀간을 부정기 운항하기도 하였다.

그 후 대한국민 항공사는 만송호의 전손 처리와 창랑호의 납북으로 인해 발생한 적자를 끝내 해소하지 못하는 바람에

1961년7월16일에 대한국민 항공사의 창업주이자 사장인 신용욱 대표가 한강에 투신자살을 하였고,대한국민 항공사는 1961년11월13일 폐업처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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