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도영 작성일자; 2019.12.22.토요일,맑음
장도영 (생졸;1923.1.23~2012.8.3) 은 군인이자 정치가다 .
장면 내각의 두 번째 육군 참모총장이었고,
5.16 군상 정변 직후 초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장 을 지냈다.
장도영은 평안북도 용천군 에서 출생하였으며,
한때 평안북도 선천 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신의주 고등보통학교 를 졸업한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 대학교 에 입학 하여 1944년 졸업했다.
일제의 패망을 맞아 선천으로 돌아와 모교인 신의주 중학교 에서 교편을 잡고 후배 양성에 주력하던
1945년11월23일,신의주 반공 학생 의거 가 발생한 이후 소련 군정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반공인사 탄압이 강행됨에 따라 피신하여 월남을 결행하고 서울 로 내려왔다.
일제 강점기 무렵 일본군 장교였으며 광복 후 국군 에 입대하였다.
당시 그는 당시 미 군정청 군사고문으로 있던 이응준 으로 부터 군사 영여 학교 에 입교하라는 권고를 받고
1946년2월,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1946년3월 졸업한 후 육군 참의 로 임관했다.
약 1개월의 교육 훈련을 마치고 1946년3월23일,
국방경비대 육군 참위로 임관하여 대구에 주둔 중이던 국방경비대 제6연대 1중대 소대장에 보직되었고,
그해 가을에는 중위로 진급하여 이리의 제3연대 2중대장으로 진급한 후,
제3연대 제3대의 신설에 참여한 뒤 신설 3연대 3대의 초대 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947년9월, 태능의 국방 경비 사고나학교 로 전보되어 제5기 생도대의 중대장이 되었으며,
1948년7월, 부산의 육군 제5연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948년,여순 육군제14연대 반란 사건 당시 반란 가담자 였던 박정희 가
무기징역을 언도 받자 도움을 주었다는 설이 있다.
백선엽 등에 의해 박정희 구명 운동이 있자 그는 적극 호응하였다.
1949년6월, 육군 수도사단 제9연대장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그 해11월 육군본부 정보국 국장으로 부임하였다.
1950년,한국 전쟁에 참전하였고 김종오 대령의 후임으로 6사단장으로 부임한다.
6사단장으로 부임한후 사창리 전투 에서 패배하였으나 병력을 수습한뒤 후퇴하였다.
이후 용문산 전투 에서 중공군 3개 사단, 3만명을 막아내며 대승을 거두었다.
휴전 이후 1953년6월, 육군 제8사단장,
1954년2월, 육군 제2군단장 등을 거쳐 그해 10월 육군 중장 으로 승진했다.
이후 1955년5월,육군 본부로 돌아와
기획참모부장, 행정참모부장, 참모차장 등을 역임한 후 1956년, 육군 참모차장에 취임했고,
1957년7월, 다시 육군 참모차장에 연임 되었으며
육군 제2군사령부 사령관을 거쳐 5.16 군사 정변 이전에 제2공화국 출범 이후
장면 국무총리 에 의해 발탁되어 육군 참모총장으로 재직했다.
1960년,국무총리 장면이 그를 육구 참모총장 으로 발탁하자 내부의 반발에 봉착했다.
국회의원 이철승 은 그가 겉과 속이 표리부동하다며 참모총장 인준을 반대했고,
민주당 신파에서는 그가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이 있는 인물이라며 부정적으로 봤다.
외무부 장관 정일형 은 이한림 중장과 최경록 중장 중에서 고르는 것이 어떻냐며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각계의 반대를 극복하고 참모총장에 등용되었다.
장면 역시 그의 선대가 평북 이므로 서북계로 분류되어,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1961년5월9일,5.16군사정변 일주일 전 장면은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당시의 육군 참모 총장인 장도영을 불렀다.
장면이 입수한 정보는 박정희 소장을 주동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 모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장면 은 자신이 입수한 정보를 장도영에게 전하고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내 말을 들은 장도영은 “천만의 말씀이십니다.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 했다 한다.
장면에 의하면 “참모 총장이 먼저 알아서 나에게 보고 해야 될 성질의 사건을
반대로 내가 참모 총장에게 지시하고 있으니 책임 지고 내사해 보시오.
” 이러한 내 말에도 “알아는 보겠습니다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라는 대답이 반복될 뿐이었다는 것이다.
5월16일,민주당 정권하에서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박정희 소장이 5.16군사정변 을 일으키자
이에 대해 적극적인 반대나 찬성을 하지 않는 모호한 태도를 보여
사실상 군사 정변을 방조하기도 했다는 의혹이 있었지만 본인은 당시 쿠데타 음모를 하루전에야 알았고,
쿠데타 세력에 대해 방첩대를 동원해 조사를 실시했으나 거짓 보고로 실패했고
쿠데다 동조 세력이 아니였다고 주장했다.
5월19일 밤,박정희 와 장도영은 청와대 를 찾아와 윤보선 의 사퇴를 만류했다.
그러나 그 만류는 시늉이었다.
장도영에겐 윤보선 이 좀더 필요 했던 것 같으나, 박정희 는 윤보선 의 사퇴를 속 시원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5월20일 상오, 외무부 차관 김용식 이 윤보선 에게
“유일한 헌법 기관인 대통령 의 이 시점에서의 하야는
국제법상 새 정부의 승인 문제를 복잡하게 할 우려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용식은 이 점을 박정희 에게도 설명했다.
5월20일 오후 2시, 윤보선,박정희 ,장도영,김용식 4자 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김용식 은
다시 “만일 각하가 사임한 뒤 이북이 남침하면 외국과 유엔에 호소하려 해도 대한민국 을 대표하여
호소할 기관이 없다. ”며 사임 재고를 요청했다.
재고 요청에 박정희 와 장도영도 가세했고,미국 의 만류도 있었다.
6월6일, 대통령 윤보선을 수행하여 현충일 행사에 참석하였다.
현충일 행사에서 그는 제2공화국 을 비판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성공하자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계엄사령관,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내각수반,
국방부장관으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 6월 정변 주체세력에 의해 해임되고 8월 22일 중장으로 예편되었다.
이후 박정희의 중 앙정보부 에 의해 '반혁명' 혐의로 기소되었다.
이 때 장도영을 체포 연행한 대위가 노태우 였다.
1963년 3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5월 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1963년, 미국으로 건너가 1969년,위스콘신 대학교 교수를 지냈고 1993년 까지 교수로 재직하였다.
2011년5월 무렵,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드 에서 알츠하이머병 과 파킨스병 의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지병으로 2012년8월3일, 89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