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사태           2019.12.22.일요일,맑음

1964년6월3일,

대통령 박정희가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여 한일회담 반대시위를 진압한 사건으로

그해 3월24일 서울대학교·연세대학교·고려대학교 등에서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발생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시위는 3월30일, 11개 대학의 학생 대표들이 박정희를 면담하고 요구사항을 전달함으로 일단 진정되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가 한일 회담을 계속 추진하자

4월19일을 전후하여 학생 시위는 다시 일어났고,

6월3일에는 1만여 명의 학생과 시민이 시위에 참가하였다.

 

이에 박정희는 6월3일 오후8시, 서울시 전역에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4개 사단 병력을 서울 시내에 투입하여 3개월 가량 계속되던 시위를 진정시켰다.

1964년7월29일, 계엄이 해제될 때까지 일체의 옥내외 집회·시위의 금지, 대학의 휴교, 언론·출판·보도의 사전검열, 영장 없는 압수·수색·체포·구금, 통행금지시간 연장 등의 조치가 취해졌다.

한편, 이 사건으로 한일 회담을 추진해오던 공화당 의장 김종필이 사임하였다.


 

제3공화국 출범              2019.12.22.일요일,맑음      

1961년, 5·16군사정변에 의한 1년7개월간의 군정의 뒤를 이어

1962년12월17일, 국민 투표로 확정된 개정 헌법(5차개정)에 의하여

1963년10월15일의 대통령선거와

1963년11월26일,제6대 국회의원 선거를 거쳐

1963년12월17일, 대통령 박정희가 취임함으로써 한국의 제3공화국이 출범하여

1972년10월17일, '10월 유신' 전일까지 존속되었다.


제3공화국은 5·16군사정변의 집권 세력이 주체 세력이었다는 점에서 군사정변의 이념을 

계승.발전시켜 '국민 혁명'으로 승화시키려는 것이 당초의 의지였다. 

   1.제2공화국의 의원 내각제 폐지와 부통령제를 없애는  '신대통령제'인 대통령 중심제다.

     대통령은 긴급명령권,긴급재정.경제처분권 등 강력한 권한을 가졌고,

     정당 지도자로서 정당을 통하여 국회를 지배하는 대통령 중심제 였다. 

   2.간접선거로 선출하였던 대통령을 국민의 직접 선거제로 바꾸었고,

      종전의 의결기관이었던 국무회의를 단순한 심의기관으로 하여 대통령은 그 구속을 받지

      않게 되었다.대통령은 국무총리를 국회의 동의없이 임명할 수 있어 행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3.양원제 국회를 단원제로 환원하였고,정부의 국회 해산권을 인정하지 않는 대신 국회의

      국무총리와 국무위원에 대한 개별 불신임권도 인정하지 않았으며,해임 건의권만을 인정

      하였다.정당제도를 보장하고 양당제를 중심으로 한 정당 정치를 지양하였다.

      이와 같은 정당 국가화 경향은 국회의 활동을 매우 약화시켰고,국회는 상임위원회 중심

      으로 운영되었다. 

   4.헌법 재판소를 없애고 대법원에 위헌법률심사권.정당해산권을 부여하였다.

      대법원장과 대법원판사 임명에는 법관 추천회의 제도를 채택하였고,

      일반 법관은 대법원 판사회의의 의결을 거쳐 대법원장이 임명하게 하여 

      사법권의 독립을 보장하였다. 

   5.국민의 기본권 규정을 보다 상세하고 명백히 하였고,경제질서를 보다 자유화하였다.

   6.헌법 개정에 국민 투표를 필수화하였고,경제 과학 심의회와 국가안전 보장회의 등의 

      대통령 자문기관을 신설하였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조직해 2년간의 군부 직접 통치를 거친 뒤 형식적 민주주의로 복귀했다.

박정희와 쿠데타 주도세력들은 군부의 직접 통치의 계속을 희망했으나, 미국과 시민들의 압력에 못이겨 마지 못해 형식적인 자유민주주의체제로 복귀했다.

쿠데타 주도세력들은

1962년 12월26일, 강력한 대통령과 약한 단원제 국회를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안을 국민투표에 의해 통과시켰다.(5차개정)

 박정희는 정권의 이양과 관련해 몇 차례의 의사 번복을 거친 끝에

1963년 봄 군부에 대한 지지 정당으로 조직된 '민주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고,

1963년10월15일에 실시된 선거에서 '민정당'의 윤보선 대통령후보와 경합해 근소한 표 차이로 당선되었다.



제3공화국 하에서 박정희 정권은 중앙 정보부와 보안사와 같은 정권 안보기구를 수립하는데 성공함으로써 이승만 정권에 비해 월등한 물리적 강제력과 정보 통제력을 갖고 있었으나,

주기적 선거,반대당의 허용,상당한 언론의 자유,노조의 허용과 같은 자유 민주주의의 외피는 제한적으로 유지했다.

1960년대의 경제개발의 성공으로 박정희 정권은 민주주의의 틀 내에서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1967년의 선거에서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으나,임기 제한에 의해 3선 출마가 불가능해지자

1969년, 야당과 학생,공화당내의 김종필 지지세력의 반대에도 3선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1971년,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3번째로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71년의 2회의 선거는 박정희가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내에서 정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1971년5월1일에 실시한 제8대 선거에서 야당의 후보인 김대중은 박정희의 경제개발 모델에

   대한 대안을 제시했고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또한 뒤이어 치러진 총선에서 야당인 신민당은 당내 분열과 관권 선거라는 불리한 여건

   하에서도 대도시 지역을 석권해 89석을 획득함으로써 여당인 민주공화당의 113석에 근접

   하게 되었으며 또 다른 개헌 시도를 저지할 수 있는 의석수를 확보하게 되었다.

1971년, 선거이후 노동자,빈민,지식인의 저항이 분출했고 박정희 정권은 선거를 통한 권력

   유지 방식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형식적 민주주의의 틀을 폐기하는 유신체제의 

   수립작업에 들어갔다.

   박정희 대통령은 3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1971년12월, 불안한 안보 정세를 이유로 국가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이 무렵 미국과 중국 간의 화해,중국.일본 간의 국교 정상화 등 정세 변화에 따라 남북

   대화가 열리게 되었으며

1972년7월4일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간의 관계 개선을 상징하는 '남북공동성명서'가 발표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안보 위기에 대처하고 통일에 대비해 국력을 집중한다는 명분으로

1972년10월17일,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와 정당을 해산하여 헌정을 중단시킨 후

1972년10월31일,11월 계엄령하에서 실시된 국민 투표에 의한 유신 헌법을 통과 후

1972년11월21일,시행하게되었다.

 

⊙ 제6대 국회위원 선거 실시        2019.12.22.일요일,맑음

1963년11월26일,

1961년,5.16 군사 쿠데타를 계기로 제2공화국이 붕괴되고 제3공화국이 출범한 이후 처음 실시된 제6대 국회의원 선거는 이전과는 달리 지역구 다수 대표제로 131명의 의원을 선출

하고 전국구 비례대표제로 44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복합 선거제도가 적용되었다.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131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지역구 선거에 12개 정당이 참여하고 모두 847명의 후보자가 출마하여 평균 경쟁률은 6.5:1이었다.

여당으로 창당된 민주공화당과 야당인 민정당은 전지역구에 입후보자를 공천하였고,

민주당은 120명,자유민주당은 117명,국민의 당은 110명, 수당은 79명을 각각 공천하였다. 이밖에 41명을 공천한 자유당을 비롯하여 정민회,추풍회,신민회,신흥당,한국독립당 등의

5개 정당은 공천율이 30% 이하였다.


특징은 이전의 국회의원 선거와는 달리 제6대 국회의원선거 부터 이후 제8대 국회의원 선거까지는 정당 공천제를 의무화함으로써 무소속 입후보자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다.


투표율에 있어서는 72.1%로 나타났으며,이전에 실시된 역대 국회의원 선거에 비해 가장

낮은 것이었는데,

이처럼 투표율이 저조하게 나타난 이유는 4.19혁명으로 수립된 민주 정부를 비합법적 방법으로 붕괴시키고 등장한 군사 정권에 대한 정치적 불신감과 정치적 회의로 인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여당인 민주공화당은 안정 세력을 구축해 주어야만 정국안정을

기할 수 있고 강력한 경제 정책을 수행하여 경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야당 특히 민정당,국민의 당,민주당 및 자유민주당 등은 독재를 방지하고 민주

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는 민주공화당에 과반수이상의 의석을 허용해서는 안되며 야당

국회를 만들어 견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야당 진영은 입후보자의 난립과 선거 운동자금의 부족, 조직력의 열세 등으로 인해 기본적으로 여당에 비해 불리한 입장에서 선거를 치러야 했다.


선거 결과는

민주공화당이 32.4%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가장 많은 지지를 얻은 것으로 나타났고,

민정당과 민주당이 각각 19.4%와 13.1%의 지지를 얻었으나,

자유민주당과 국민의 당은 각각 7.8%와 8.5%의 득표율을 보이는 데 그쳤다.

나머지 7개 정당이 얻은 득표율은 18.7%였다.


 민주공화당이 의원정수의 62.8%에 해당하는 110명(지역구 88인, 전국구 22인)이 당선

민정당은 41명(27명, 전국구 14명),

민주당은 13명(지역구 8명, 전국구 5명),

자유민주당 9명(지역구 6명, 전국구 3명),

국민의당 2명(지역구) 등이었다. 

선거에 참여한 기타 7개 정당은 단 1명의 당선자도 나오지 않았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6.3 사태 /191222   (0) 2019.12.22
⊙ 제3공화국 출범/191222  (0) 2019.12.22
⊙ 제5대 대통령 선거 /191222   (0) 2019.12.22
민주 공화당 창당  (0) 2019.12.22
⊙ 제5차 개정/191222   (0) 2019.12.22

⊙ 제5대 대통령 선거 실시                2019.12.22.일요일,맑음

1963년10월15일,제5대 대통령 선거일 이다.

개정된 제3공화국 헌법에 따라 직선제로 시행되었다.

1961년12월6일,5·16 군사정변을 주도한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국민투표에 부쳤다.


개헌안은 국민투표에서 찬성률 78.8%로 채택되고, 제3공화국이 출범하였다.

출마한 대통령 후보는 민주공화당 박정희,신흥당 장이석,추풍회 오재영,민정당 윤보선,

정민회의 변영태 등이다.


선거 결과

박정희가 46.6%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윤보선이 45.1%를 득표 .

두 후보의 표차는 약 15만 6천여 표로 이는 역대 대통령 선거 사상 가장 근소하다.

투표율은 85.0%였다.


2017년5월을 기준으로하면

1948년7월17일, 제헌 헌법을 공포하고 초대 대통령 선거를 진행했다.

기준 총19번의 대통령 선거를 시행했으며 12명의 대통령을 선출하였다.

그동안 총 9차례 헌법 개정이 있었고 그에 따라 대통령 선거는 직선제와 간선제를 오가는

변화를 겪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대통령 선거는 간선제로 진행되었다.

간선제가 시행된 대통령 선거는 1대,4대,8~12대다.

제4대 대통령 선거는 당선자인 이승만 전 대통령이 3.15부정 선거로 하야하면서

4.19 혁명 전후로 직선제와 간선제로 두 번 시행되었다.

대통령 선거에서 간선제 방식은 세 번 바뀌었다.

 대통령 선출 주체는 1대와 4대가 국회, 8~11대는 통일주체 국민회의,

12대는 대통령선거인단이었다. 2~7대와 13대 대통령 선거부터는 직선제로 시행하고 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제3공화국 출범/191222  (0) 2019.12.22
⊙ 제6대 국회위원 선거 실시/191222   (0) 2019.12.22
민주 공화당 창당  (0) 2019.12.22
⊙ 제5차 개정/191222   (0) 2019.12.22
장도영  (0) 2019.12.22

민주 공화당 창당          작성일자; 2019.12.22일,토요일,맑음

1963년2월26일.5 ·16군사정변 주체 세력이 중심이 되어 발족되었다가 1980년 해체된 정당으로,

5 ·16 혁명이념의 계승과 민족적 민주주의 구현을 표방하였다. 

 

1963년8월31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가 입당하여 총재직을 맡았으며,

10월 이후의  대통령 선거와 국회위원 선거에서 승리함으로써 제3,4공화국의 여당이 되었다.

 

창당 초부터 김종필 계열과 반대 계열 간의 갈등이 심하였으나,

총재 박정희의 권위 주의적 지도체제 하에서 정당의 조직과 선전 등을 전문화,

당료화시켜 강력한 대중정당 체제를 지향하였다.

반공안보 및 경제개발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조국 근대화의 기수를 자처한 반면, 

체제의 민주성 보다는 효율성을 강조하여

통치자의 카리스마적 조작과 경쟁적 정당체제의 억압을 반복하였다.

 

제4공화국에서는 체제 논쟁과 개헌 요구를 철저히 봉쇄하고,

유신헌법의 당위성을 강화시키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1979년,10.26사건으로 당의 상징이던 대통령 박정희가 급서하자 여당의 위치에서 밀려났다.

당의 기능이 마비된 가운데 창당의 산파역을 한 김종필이 당총재에 취임하여 재건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1980년10월27일,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의하여 자연 해산되었다.

당의 재산은 12월10일,제5공화국의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에 양도되었다.

 

⊙ 제5차 개정                 2019.12.22.일요일,맑음

이승만 하야 후 구성된 장면 내각은 정치적 분열을 극복하지 못한 채 지도력을 상실하였다. 정국이 혼란한 가운데 1961년5월16일,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 세력은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를 조직하고

6월6일,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1962년7월에 설치한 '헌법심의위원회'에서 헌법 개정안을 작성하였고,

1962년11월,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의결된 후 12월17일 국민 투표로 확정되었다.

1962년12월 26일에 공포되어 1963년 12월17일에 효력이 발생되었다.

내용은

1. 최초로 헌법전문을 수정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의 이념이 새 헌법의 정신적 기반이라는 점을 첨가
2. 헌법전문의 연도표기를 단기에서 서기로 변경
3. 헌법개정에서 국민투표제를 신설
4. 국민의 기본권 보장을 강화  ;인간의 존엄성 조항을 신설
5. 단원제 국회와 대통령제 정부형태(1차 중임가능)를 채택
6. 헌법재판소 폐지 및 위헌법률심사권은 대법원에,

    탄핵 심판권은 탄핵 심판위원회에 권한 부여
7. 대법원장은 중립 기관인 법관 추천회의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국회의 동의를 얻어 임명

   하도록 함
8. 국가 안전 보장회의 및 감사원을 설치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제5대 대통령 선거 /191222   (0) 2019.12.22
민주 공화당 창당  (0) 2019.12.22
장도영  (0) 2019.12.22
⊙ 국가재건최고 회의/191220   (0) 2019.12.20
⊙ 김종필/191220  (0) 2019.12.20

장도영                    작성일자; 2019.12.22.토요일,맑음

 

장도영(생졸;1923.1.23~2012.8.3)은 군인이자 정치가다.

장면 내각의 두 번째 육군 참모총장이었고,

5.16 군상 정변 직후 초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의장을 지냈다.

 

 

장도영은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출생하였으며,

한때 평안북도 선천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신의주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 대학교에 입학하여 1944년 졸업했다.

일제의 패망을 맞아 선천으로 돌아와 모교인 신의주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배 양성에 주력하던

1945년11월23일,신의주 반공 학생 의거가 발생한 이후 소련 군정과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반공인사 탄압이 강행됨에 따라 피신하여 월남을 결행하고 서울로 내려왔다.

일제 강점기 무렵 일본군 장교였으며 광복 후 국군에 입대하였다.

당시 그는 당시 미 군정청 군사고문으로 있던 이응준으로 부터 군사 영여 학교에 입교하라는 권고를 받고

1946년2월,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1946년3월 졸업한 후 육군 참의로 임관했다.

약 1개월의 교육 훈련을 마치고 1946년3월23일,

국방경비대 육군 참위로 임관하여 대구에 주둔 중이던 국방경비대 제6연대 1중대 소대장에 보직되었고, 

그해 가을에는 중위로 진급하여 이리의 제3연대 2중대장으로 진급한 후,

제3연대 제3대의 신설에 참여한 뒤 신설 3연대 3대의 초대 대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947년9월,태능의 국방 경비 사고나학교로 전보되어 제5기 생도대의 중대장이 되었으며,

1948년7월,부산의 육군 제5연대장으로 부임하였다.

1948년,여순 육군제14연대 반란 사건 당시 반란 가담자 였던 박정희

무기징역을 언도 받자 도움을 주었다는 설이 있다.

백선엽 등에 의해 박정희 구명 운동이 있자 그는 적극 호응하였다.

1949년6월,육군 수도사단 제9연대장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그 해11월 육군본부 정보국 국장으로 부임하였다.

1950년,한국 전쟁에 참전하였고 김종오 대령의 후임으로 6사단장으로 부임한다.

6사단장으로 부임한후 사창리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나 병력을 수습한뒤 후퇴하였다.

이후 용문산 전투에서 중공군 3개 사단, 3만명을 막아내며 대승을 거두었다.

휴전 이후 1953년6월,육군 제8사단장,

1954년2월,육군 제2군단장 등을 거쳐 그해 10월 육군 중장으로 승진했다.

이후 1955년5월,육군 본부로 돌아와

기획참모부장, 행정참모부장, 참모차장 등을 역임한 후 1956년, 육군 참모차장에 취임했고,

1957년7월, 다시 육군 참모차장에 연임 되었으며

육군 제2군사령부 사령관을 거쳐 5.16 군사 정변 이전에 제2공화국 출범 이후

장면 국무총리에 의해 발탁되어 육군 참모총장으로 재직했다.

1960년,국무총리 장면이 그를 육구 참모총장으로 발탁하자 내부의 반발에 봉착했다.

국회의원 이철승은 그가 겉과 속이 표리부동하다며 참모총장 인준을 반대했고,

민주당 신파에서는 그가 쿠데타를 일으킬 위험이 있는 인물이라며 부정적으로 봤다.

외무부 장관 정일형은 이한림 중장과 최경록 중장 중에서 고르는 것이 어떻냐며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각계의 반대를 극복하고 참모총장에 등용되었다.

장면 역시 그의 선대가 평북이므로 서북계로 분류되어, 부정적으로 보고 있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민주 공화당 창당  (0) 2019.12.22
⊙ 제5차 개정/191222   (0) 2019.12.22
⊙ 국가재건최고 회의/191220   (0) 2019.12.20
⊙ 김종필/191220  (0) 2019.12.20
⊙ 대통령 박정희/191220  (0) 2019.12.20

⊙ 국가재건최고 회의            2019.12.20.금요일,맑음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1년5월16일부터 1963년12월16일까지

5·16군사정변 주체세력이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행사하였던 과도기의 국가 최고 통치

의결 기구다.


1961년5월16일,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소장 중심의 주체세력은 '군사혁명위원회'를 구성하고, 입법·사법·행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회와 지방의회를 해산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5월18일 장면 국무총리로부터 계엄령 추인과 함께 정권을 인수받자,

1961년5월19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라 개명하고

1961년5월20일,

혁명 내각을 발표함으로써 군사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재건최고회의'는 군사 정부의 실질적인 최고 통치 의결기구가 되었다.


제3공화국이 출범하기 하루 전인 1963년12월16일까지 존속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20명 이상 30명 이내의 현역 또는 예비역 장교로 구성되었으며,

의장을 정점으로 상임 위원회,분과 위원회,특별 위원회,실무지원을 위한 총무처,대외선전을 위한 공보실을 두었다.

상임위원회는

의장·부의장과 각 분과위원장으로 구성되어 위임사항에 대하여는 최고회의의 권한을 대행

했다.

7개 분과위원회는

법제·사법내무·외무국방·재정경제·교통체신·문교사회·운영기획의 해당 분야의 기본 정책을 수립하고 국회를 대신하여 국정 감사,예산심의를 실시했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본회의는 최고위원 8명 이상의 요구에 의하여 재적최고위원 과반수

이상이 출석하면 개의되었다.

의안의 발의는

최고위원 3명 이상의 찬성으로 이루어졌다.


국가재건최고회의가 활동했던 2년 7개월 동안 헌법을 포함하여 총 1,593건의 의안을 처리

했으며, 이 중 1,436건의 가결, 2건의 부결, 111건의 폐기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외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혁명검찰부·혁명재판소를 직속으로 두고 군사정권에 대한 비판과 반대를 억압하는 한편,부정축재 처리·정치활동 정화·헌법 심의위원회 등의 특별위원회와

중앙정보부 등을 통해 제3공화국의 출범과 군사 정변 주체세력의 민간 정부 집권을 위한

모든 정치적 조치와 법적·제도적 절차를 마련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제5차 개정/191222   (0) 2019.12.22
장도영  (0) 2019.12.22
⊙ 김종필/191220  (0) 2019.12.20
⊙ 대통령 박정희/191220  (0) 2019.12.20
⊙ 5.16 군사 정변191220  (0) 2019.12.20

⊙ 김종필            2019.12.20.금요일,흐림

김종필(생졸; 1926.1.7-2018.6.23)은 충남 부여에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김상배와 어머니 이정훈 아래 7남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에는 한학을 수학했고,대전 사범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교사로 잠깐 교편을 잡았다. 1945년 해방 후,

경성사범학교(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통합) 교육학과에 입학,

1947년,2년 수료한 후

1948년, 육군 사관학교 8기로 임관,주로 참모직을 역임하였다.

육사 8기 졸업생인 그는 군에서 주로 정보관계 업무에 종사하다가

1958년 중령으로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에 임명되었다.

1961년,

육사 8기 졸업생 출신인 그는 중령으로 5·16군사정변의 주역으로 참여하고, 중앙정보부

창설을 주도하여 1963년까지 초대 중앙 정보부장(국가정보원장)을 지냈으며,

1962년11월12일,

중앙 정보부장으로서 일본의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와 회담,대일 청구권 문제와 평화선, 법적 지위 문제 등에 대해 타협점을 찾고 메모를 교환함으로써

1963년,준장으로 예편하여 공화당 창당위원장을 맡았다.

또한 6대 국회의원과 공화당의장직을 지냈으며,

중앙정보부장 재임시 한일회담의 특사로 파견되어 회담을 매듭지었으며,공화당 소속으로

의장과 부총재를 지내고 국무총리를 역임하며 유신체제 유지에 역할을 했다.

1967년에는 7대 의원에 당선되었으나

1968년, 반대 세력에 밀려 국회의원직 등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해외로 나갔다.

1970년, 공화당 총재 수석 상임 고문,



1971년6월에서 1975년12월까지 


국무총리를 지냈다.

1971-73년, 공화당 부총재,

1971년, 8대 국회의원,

1971년6월-1975년 12월 국무총리를 지냈다. 그 사이 9대(1973년) 의원을 겸하고

1965년, 한일 기본 조약의 초석을 마련하였다.

1976년, 한.일의원 연맹회장,

1979년, 10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79년,10.26 사태 후 공화당 총재가 되었으나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정치 활동이 금지되고 부정 축재자로 지목되어 재산환수의 수난을 겪었다. 

1987년, 공화당을 재건하여 총재가 되면서 대통령 선거에 출마 하였으며, 낙선하였고

1990년,

노태우,김영삼과 민주 자유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이 되었고,



이후 연이은 대통령 선거에서






1992년 여야 합당,14대 국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1992년8월,민자당 대표위원을 지내던 중 

1995년,2월, 민자당을 탈당하여  자유민주연합을 창당, 총재가 되었다. 

1997년 야당 연합으로 참여했다.

2004년, 제17대 총선이 끝난 후 정계에서 은퇴했다.

2018년, 6월 23일 타계했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장도영  (0) 2019.12.22
⊙ 국가재건최고 회의/191220   (0) 2019.12.20
⊙ 대통령 박정희/191220  (0) 2019.12.20
⊙ 5.16 군사 정변191220  (0) 2019.12.20
⊙ 소급 입법 개헌(4차개헌)/191220   (0) 2019.12.20

⊙ 박정희              2019.12.20.금요일,흐림

대통령 박정희(생졸; 1917년11월14일-1979년10월26일)는

경북 구미 출신자로 빈농인 부 박성빈과 모 백남의 사이에서 5남2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가족으로 배우자인 육영수,딸 박근혜,박근형과 막내인 아들 박지만이 있다.

그는 5.16군사 정변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제5·6·7·8·9대 대통령을 역임하였다.

관련사건으로 4·19혁명,2·27선언,6·3사태 등이 있다.


1937년,

대구 사범학교를 졸업한 그는  문경 소학교에서 3년간 교직 생활을 한 다음,

1940년,

만주의 신경 군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학함으로써 군문에 들어갔다.

군관학교에 지원하기 위하여 혈서를 썼으며,일본인으로서 개와 말의 충성을 다하겠다고

지원서에 썼다.이 일은 크게 회자되어 '만주신문(1939.3.31자)에 실렸다.

이 군관학교를 최우등생으로 수료한 뒤

1944년,

일본 육군 사관학교로 전학, 졸업과 함께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관동군에 배치되었다.

1945년8월15일,

광복 때까지 만주와 화북지방에서 일본군 장교로 전쟁에 가담했다가,

1946년,

귀국하여 육군 사관학교에 들어가 제2기로 졸업하고 육군 대위로 임관되었다.

1949년,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던 시절 사상 관련 사건에 연루되어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다.

당시의 신문보도에 의하면 여순 반란사건 관련 공산주의 혐의자로 되어 있는데,

군법회의에서 무기 징역을 언도 받았으나 육군 본부의 동료,상사들의 구명 운동으로 복역은 면제되었다.이 때문에 한때 군인의 신분을 박탈 당하였다가 6·25전쟁이 일어난 뒤 현역으로 복직되었다.

1950년,

6·25 전쟁 동안 주로 육군 본부 정보국에서 근무하다 1953년 장군이 되었다.

1950년,

육영수와 결혼하였다.

1954년,

제2군단 포병 사령관,

1955년,

제1군 참모장,

1960년,

육군 군수기지사령관,제1관구 사령관,육군본부작전 참모부장을 거쳐,

1961년5월16일,

제2군 부사령관으로 재직 중 군부 쿠데타를 주도하여 정권을 장악하였다.


군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18년5개월간을 집권하였는데,

그의 통치 시대는 3단계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1.4·19혁명으로 성립된 민주당 정부를 무능,부패 정부로 규정하고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와 그를 따르는 장교들은 쿠데타 성공 후 곧바로 계엄령을 선포,삼권을 장악

  하였고,혁명 주체세력은 '국가재건 최고회의'를 설치하여 입법,행정권과 사법권의 일부를

  행사했다.의장은 박정희였다.

  이로부터 2년7개월간 군정이 실시되는데,박정희는 구질서의 전면적인 개혁이라는 목표

  아래 모든 정당,사회단체의 해체를 포고하고,용공분자와 폭력배의 검거에 착수하였다.

2.군사정부는 '농어촌고리채정리령'을 발표하였으며 부정 축재자에 대한 조사를실 시하였다.

   사회 기풍을 바로잡기 위해 댄스홀,고급 요정 등 모든 환락가의 문을 폐쇄하게 하였으며,

   비밀 댄스홀에서 춤을 즐기던 남녀를 군사 재판에 회부하여 최고 1년6월의 징역을 선고

   하기도 하였다.

   군정 초기에 얼마나 철저한 구악 일소작업과 강력 정치가 진행되었던가를 짐작케 된다.

  

3.군사 정부는 '국민 운동본부'를 설치하여 생활 간소화,가족 계획,문맹 퇴치 사업을 벌이는

   동시에 친선 방문 외교,초청 외교 등 적극 외교의 자세를 보였다.

   획기적인 경제 조치의 하나로 단행된 통화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4.군정 초기 집권세력 내부에 주류파와 비주류파 사이에 주도권 쟁탈전이 벌어져  반혁명

   사건이 꼬리를 이었다.

   이 과정에서 비주류파는 제거되고 박정희 중심의 주류 세력이 실권파로 정권 장악의

   기반을 확고히 하였다. 군정 후반은 민정 이양을 둘러싼 공방으로 전국이 소란하였다.

   박정희는 처음에는 2년 후에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는 민정 이양 일정을 발표하였으나

   1963년1월부터 시작된 정치 활동 재개 이후 야당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서는 이른바

   ‘2·27선언’을 통하여 자신의 원대 복귀를 약속하였다.

    그러나 ‘4·8조치’로 군정 연장을 계획하였다가 여론의 반대에 부딪혀 철회하는 등 번의를

    거듭하였다.

    그 사이 군정은 이른바 ‘4대 의혹 사건’으로 ‘구악을 뺨치는 신악’이라는 비판을 듣기도 

    하였다.

5.박정희는 1963년의 대통령선 거에서 야당의 단일 후보인 윤보선을 근소한 표차로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제3공화국의 통치권자가 되었다.

   박정희 정부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한 작업은 경제발전과 한,일국교 정상화였다.

   이미 군정 기간인 1962년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수립,추진하였다.

   제1차 5개년 계획은 후진국 가운데 가장 높은 성장률인 연평균 7.1%를 책정하였으나.

   계획 자체의 졸속과 자본 부족으로 제1차 5개년계획은 전반적으로 실적 미달이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는 자본 확보와 미국의 압력이라는 복합적인 이유로 추진되었다.

   박정희는 집권하자마자 대일 협상에 강한 의욕을 보였으며,군정 기간인 1961년10월에

   일본 동경에서 제1차 한.일 회의가 열렸다.

   박정희는 국가 원수로 최초로 일본 수상과 회담하는 등 한.일 문제 타결에 열의를 보였다.

   이같은 대일 자세는 ‘친일 외교’·‘흑막 외교’라는 비난을 받았다.

   한국 어민의 생명선이라 할 수 있는 어업 및 평화선 문제와 이른바 ‘김.오히라메모’로

   결정된 6억 달러의 대일 청구권 자금은 여론의 강력한 반대를 받았다.

   한.일 문제를 둘러싼 여야와 정부·국민간의 공방은 ‘6·3사태’ 등 한때 정국의 위기까지

   불러 일으켰으나 결국 1965년6월22일, 한일 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에 따른 일본으로부터의 자금 도입과 기타 차관 등을 통하여 제3공화국

   후반부터는 급속도로 경제성장이 이루어졌다.

   박정희는 고성장.수출 드라이브·산업 기지 건설 등을 통하여 국정에 자신감을 가졌으며,

   점차 독재 성향을 띠어가기 시작하였다.

   한일 회담 타결,월남 파병 등으로 미국으로부터도 신임을 얻은 박정희는 강한 권력욕을

   드러냈는데, 그 결과는 1968년 3선 개헌으로 나타났다.

6.1972년10월,

   박정희는 헌법 효력의 일부 정지,국회해산,정당 활동 금지의 담화를 발표하고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였다.정부는 통일 주체 국민회의를 통하여 대통령을 선출하는 ‘유신

   헌법’을 제정,국민 투표를 거쳐 확정한 후 이 헌법에 따라 제8대 대통령에 박정희를 선출

   하였다.이로써 제4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유신체제는 사실상 박정희의 영구 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체제였다.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권한을 막강한 것으로 보장 해 줌으로써 박정희에게 독재 체제의

   길을 열어주었다.

   유신 헌법의 개정을 요구하는 주장이 야당과 재야 세력에서 광범위하게 대두하였으나,

   박정희는 이를 ‘대통령 긴급조치’로써 탄압하였다.

   유신 체제 7년간 수많은 정치인,종교인,지식인,학생들이 긴급 조치에 걸려 투옥당하였다.

   독재적인 통치에 의해 박정희 정부는 이 기간 기록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연간 10%를 넘나드는 고도 성장이었고 국민 소득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7.박정희는 한반도 긴장 완화를 위한 남북 대화에 힘써 한동안 남북 적십자회담,남북조절

   위원회회담 등을 열었고,남북간 밀사 교환을 이루었으나 대화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박정희는 1979년 유신 체제에 항거하는 ‘부마사태’가 절정을 이루던 때인

1979년10월26일,

궁정동 만찬 석상에서 측근인 중앙 정보부장 김재규가 쏜 총탄을 맞고 서거하였다.

그와 함께 유신체제도 끝났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