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6 군사 정변         2019.12.20.금요일,흐림

1961년5월16일,

박정희의 주도로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 군인들이 제2공화국을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군사 정변이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은 당시의 정치·사회적 문제와 군 내부의 문제라는 두 가지 배경을 갖는다.

1.정치권은 집권당인 민주당이 신,구파 간의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다양한 사회 세력들은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여 정국은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2.혁신계 정치 세력의 부상과 학생 세력의 진출은 민족 자주화운동,통일 촉진운동으로 전개

   되어 반공 분단 국가의 근본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1950년,6 ·25전쟁 이후 한국사회에서의 사회적 지위 신장과 더불어 권력에 대한 욕구가

충만되어 있던 군부 내에서는 육사 8기생을 중심으로 고급 장성의 부정 부패와 승진의 적체 현상을 공격하는 ‘하극상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소장 박정희와 중령 김종필을 중심으로 한 육사 8기생들은

1960년9월에 쿠데타를 모의하였다.

1961년5월16일 새벽,

제2군 부사령관인 소장 박정희와 육사8기생 주도 세력은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군사 혁명 위원회.를 조직하여 전권을 장악하면서 군사 혁명의 성공과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하였다.

그 6개항이란

1. 반공을 국시의 제일로 삼고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할 것,

2.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공고히 할 것,

3.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청렴한 기풍을 진작시킬 것,

4.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자주경제의 재건에 총력을 경주할 것,

5. 국토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을 배양할 것,

6.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복귀한다는 것이었다.

 

1961년의 5.16 군사 정변은 초기에 미8군 사령관(C.B.매그루더),야전 군사령관 이한림 등의 반대로 잠시 난관에 부딪히지만,미국 정부의 지지 표명,장면 내각의 총사퇴,대통령 윤보선의 묵인 등에 의하여 성공하였다.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 최고회의’로 재편하여 1963년까지 3년간의 군정 통치에 착수하였다.

군정 기간 중 군사 혁명세력은

 ‘특수범죄(반혁명, 반국가행위)처벌법’, ‘정치활동정화법’ 등 법적 조치를 통하여 정치적

반대세력과 군부 내의 반대파까지 제거하였으며,

핵심 권력 기구로서 ‘중앙 정보부’를 설치하고 ‘민주 공화당’을 조직 한 후 대통령제 복귀와 기본권 제한,국회에 대한 견제를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을 시행하였다.

 

1963년 말,

대통령선거,국회의원 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제3공화국은 정식 출범하였다.

반공 분단국가의 위기상황에서 권력을 지향한 군부 세력이 불법적으로 합법적인 정부를

전복하여 권력을 장악한 사건이다.

이후 국가 주도의 급속한 경제 발전으로 긍정적 평가를 받기도 하나,군사 문화의 사회 확산, 군의 탈법적 정치 개입의 선례를 남겼으며,민주적 정권 교체의 지연,산업화의 지역.계층간

불균형 등의 부정적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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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급 입법 개헌(4차개헌)    2019.12.20.금요일,맑음

1960년11월 29일,

1960년 3·15 부정선거 관련자 및 부정 축재자들을 소급하여 처벌할 수 있도록 한 제4차

개헌인 헌법 개정이다.

개정 헌법에 따라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혁명 재판소 및 혁명 검찰부가 설치되어 혁명 재판이 진행되었다.


개정의 내용은,

첫째, 4·19혁명의 계기가 된 3·15부정선거 관련자 및 반민주 행위자의 공민권 제한과 부정

   축재자의 처벌에 관한 소급 입법권의 부여,

둘째, 그와 같은 자를 다룰 수 있는 특별 재판부 및 특별 검찰부의 설치를 규정한 것이다.


민주당 정권이 소급 입법 개헌을 만든 배경은,

허정 과도 정부가 3·15부정 선거 관련자 및 부정 축재자들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반혁명 분자들을 다룰 수 있는 '정부통령 선거법'이 대통령 직선제에서 내각 책임제로 개헌된 6월 15일자로 폐지되어 면소 판결론이 대두됨으로써 재판상의 혼선을 가져왔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다.


1960년4월24일,

4·19 혁명과 4·25 교수 데모로 인한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 성명을 계기로,

정국 수습차 외무 장관에 임명된 허정이 내각 수반이 되어 과도 정부가 수립하여 3·15 부정선거 관련자 처벌 발표와 동시에 관련자들을 붙잡아 구속하고

1960년7월5일 상오 10시부터 혁명재판이 진행되었다.

재판 분야는

1. 부정 선거 관리 사건,

2. 부정선거

3. 부정 선거 지령 사건

4. 부정 선거 자금 사건

5. 정치 깡패 사건,

6. 발포 명령 사건

7. 장면 부통령 저격 사건

8. 전성천 선거법 위반 사건 등이었다.

전 내무장관 최인규,전 내무차관 이성우,전 치안국장 이강학,전 자유당 선거대책 위원장 인

한희석 등에 대한 혁명 재판(부장판사 정영조,배석 유현석·석은만,검사 김병리·오탁근)에서 사건별로 사형 선고 혹은 구형이 이루어졌다.


이 재판 진행 중 법원은 ‘반혁명 분자들이 위반한 '정부통령 선거법'은

대통령 직선제가 내각 책임제 개헌이 통과된 6월15일자로 폐지되었으므로 그들 반혁명분자들은 면소 판결되어야 한다.’라고 해석함에 따라 재판이 혼란을 겪던 중 9월22일 부정선거 관련자들의 심리가 일단락되고 혁명 재판은 민주당 정부로 넘어갔다.

혁명재판을 이관받은 민주당 정부에서는 일괄 처리하여 최고 사형에서 최하 3년까지 구형을 내렸다. 이에 대하여 일반 국민은 ‘특별법’ 제정을 희망하였으나,

정부와 국회에서 이 법 제정을 1심 판결 후로 미루던 중

10월8일 판결에서 오직 발포 책임자인 전 시경국장만 사형이 선고되고 나머지는 증거불충분 이유로 무죄 또는 무죄에 가까운 경량을 선고받고 풀려나 도망쳐 버렸다.

이에 격분한 4·19 혁명 부상 학생 50여 명이 국회 의사당을 점거하고 ‘민주당 정부 물러

가라’고 외치는 가운데 소급 입법 개헌이 되고,

1960년12월30일,

특별재판소 및 특별 검찰부 조직법이 통과되어

1961년1월15일,

특별 재판소와 특별 검찰부가 설치되었다.

이에 따라 10·8판결로 석방된 자들을 재검거하려 하였으나 장경근이 일본으로 도피하는 등 모두 도피해 버렸다.

이 와중에서 민주당내 주도권 장악을 위한 신구 양파간의 치열한 파쟁과 부정 축재자의 정치자금염출 및 각종 사회 단체들의 연일 지속되는 데모로 사회 혼란이 가중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이들 특별법 관련자들은 군사 정부에서 다루게 되었다.


소급 입법개헌은 비록 5·16 군사정변으로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으나 정치사적 면에서 볼 때 다시는 이 땅에서 부정 선거·부정 축재 및 사회악들이 일어나지 않도록 철퇴를 가하려 한 데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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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통령 윤보선          2019.12.20.금요일,맑음

윤보선(생졸;1897.8.26-1990.7.180은

1960년의 4·19 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후 대통령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입후보하여 1960년8월12일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1961년의 5·16 군사정변으로 인하여 1962년 사임하고,

1963년,

민정당을 창당하여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출마하여 박정희와 겨루었으나 실패하였다.


호는 해위며  충남 아산 출생이다.

영국 에든버러 대학을 졸업하고,

1945년,

8.15 광복과 더불어 정계에 투신하여 미군정청 농상국 고문에 취임하였다.

 이어 한영()협회장·민중일보사 사장 등을 지내고,

1948년,

정부가 수립되고 2대 서울시장에 발탁되었으며,

1949년,

상공부 장관이 되었다.

그 후 대한적십자사 총재·상이군인신생회 회장 등에 추대되었고,

1954년,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57년, 민주당 중앙 위원회 의장에 선임되었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에 당선,

1959년,

민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붕괴된 후 대통령 선거(1960.8.12)에 민주당 후보로 입후보

하여 제4대 대통령에 선출되고 장면과 함께 제2공화국을 출범시켰다.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인하여 1962년 사임하고,

1963년,

민정당을 창당하여 제5대 대통령 선거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박정희에게 폐했다.

1963년,11월26일,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5년,

민중당을 창당하고,

1966년,

신한당을 창당하여 총재에 취임하였는데, 4자 회담을 거쳐 신한당과 민중당을 통합,신민당 대표 최고위원에 추대되었다.
1967년,

제6대 대통령에 출마, 박정희에게 또 패배하였다.

1970년,

국민당 총재에 취임하고,

1979년,

신민당 총재 상임고문에 추대되었다.

 


⊙ 장면             2019.12.20.금요일,맑음

장면(생졸; 1899년8월28일-1966년6월4일)은 서울에서 태어나 국회의원,주미대사,국무총리,부통령에 역임한 정치인이며,

재임 중 민주당 전당대회 저격 사건, 3·15부정선거, 4·19, 5·16,이주당 사건 등을 접하게

되었다.

1899년8월28일,

장면은 서울 종로구 적선동 외가에서 해방 이후에 부산 세관장으로 재직한 장기빈의 7남매맏이로 태어났다.8세에 인천 성당이 운영하는 박문 학교에 입학하여 한학을 수학하였다.

1913년,동성 상업학교에 부임,

1917년,수원 고등 농림학교(서울대학교 농업생명과학대학 전신)를 졸업하고,

1919년,서울 기독교 청년회관 영어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1925년, 한국 천주교청년회 대표 자격으로 미국 맨해튼 가톨릭 대학을 졸업 후 귀국하여,

   천주교 평양교구에서 교회일과 서울 동성상업학교 교장으로 활동하다가 해방 후 정계에

   입문했다.

1936년,

동성 상업하교 교장과 계성학교의 교장직도 겸임하여 광복 때까지 근무하였다.

1933년,

천주교 서울교구에서 발행한 월간 잡지 '가톨릭 청년'의 편찬위원을 맡기도 했다.

천주교 청년회 연합회 회장이 되어 '구도자의 길','조선천주공교회약사','교부들의 신앙' 등의

   저서를 출판하였다.

1946년,

정계에 투신,민주의원과 과도 입법의원의 의원을 역임하면서 좌익과의 투쟁, 군정 당국과의 절충,미소 공동위원회에 대비한 정책 수립 등의 활약을 하였다.

1948년,

서울 종로 을구에서 제헌 의원으로 당선되고,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 총회에 조병옥,장기영 등과 한국 수석 대표로 참석,

총회에서 대한민국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 부라는 국제적 승인을 얻어냈다.

이어 대통령 특사로 교황청을 방문, 돌아오는 길에 맨해튼 대학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49년,

초대 주미 대사로 임명되고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 한국 파병에 큰 역할을 하였다.

1950년에서 1952년4월23일까지 

제2대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자유당에 맞서 야당 정치인으로 부통령에 당선되어 역임했다.

1951년, 대통령 이승만의 권유로 국무총리가 되었으나 이듬해 사임하였다.

   이후 야당의 지도자로서 자유당 독재 정권과의 투쟁에 앞장섰다.

   또한,로마 교황청 비오12세로부터 성신 베스터 훈장을 수여받기도 하였다.

1955년,신익희,조병옥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이 되었고,

1956년8월15일부터 1960년4월25일까지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가 사망한 민주당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9월의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저격 당하였으나 경상에 그쳤다.

1959년,

민주당의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1960년8월19일부터 1961년5월17일까지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자,의원 내각제 하에서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되어

2공화국의 국무 총리로서 대통령 윤보선과 함께 내각 수반으로써 제7대 국무 총리로 역임

하였다.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선거 1개월을 앞두고 사망함으로써 다시 한번

부통령 후보로 선거에 임했다.

3·15 부정 선거로 인하여 이기붕 자유당 후보에게 낙선하였다.


집권 후 민주당의 구파가 신민당을 창당, 이탈해나가는 어려움을 겪었다.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려던 정책이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여

1961년, 5·16 군사 정변으로 집권 9개월 만에 실각하였다.


그 뒤 군사 정권의 정치 정화법에 묶여 연금 생활을 강요당하고,

세칭 '이주당 사건'인 반혁명 음모 사건에 연루,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형집행 면제로 풀려났다. 석방된 뒤 5년간 신앙 생활을 하다가

1966년6월4일,

지병인 간염으로 사망하여 장례는 국민장으로 거행되어 포천 가톨릭 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면에 대한 평가는

정치사적으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최초로 의원 내각제를 실시하였다는 점과

4·19 이후 혼란스러운 상황속에서 민주적 선거 절차를 통해 정권 교체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리더십 측면에서 ,

체제 정당화와 정권유지와 관련된 정치적 안목과 기술 그리고 엘리트 장악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그의 이러한 단점이 5·16의 한 원인이 된 것으로도 평가된다.



 

⊙ 장면 내각 수립              2019.12.20.금요일,맑음

허정의 과도 정부(1960년4월27일-6월15일)가

내각 책임제로의 3차 개정(직선제개헌;1960년6월15일) 이후 실시된 제5대 총선거(1960년

7월29일)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어

1960년8월12일,

민의원,참의원 회의에서 윤보선이 대통령으로 선출되고,장면이 국무총리로 선출되어

장면을 내각 수반으로 하는 민주당 내각이 성립되고 제2공화국을 맞이하게 된다.

 

제2공화국인 장면 내각 정부는

민주적 개혁을 시도하고 경제 개발 5개년 계획 수립을 통해 안정을 추구하였지만 9개월 만에 일어난 5·16 군사 정변으로 붕괴되고 말았다.

장면 내각은 민주당내의 구파와 신파의 세력 다툼으로 단합된 힘을 발휘하는 정책을 수행치

못하였고, 부정 선거 관련자와 부정 축재자에 대한 처벌에 소극적이었다.

계속된 경기 침체와 독재 정권 붕괴로 국민들의 요구를 수용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으며,

통일 운동에도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민중들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 제5대 국회위원 선거 실시     2019.12.19.목요일,맑음

4.19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되고 허정 과도 정부는

1960년7월29일에 민의원,참의원 선거를 실시한다고 공고하였다.

6월 28일부터 7월 2일까지의 기간동안 입후보 등록을 받은 결과,

의원정수 233명에 1,562명이 입후보하여 평균 6.7:1의 높은 경쟁률을 보였다.


입후보를 보면

무소속 입후보자가 전체의 64.5%인 1,009명,

제2공화국 수립에 주도적인 정치세력이었던 민주당이 19.5%인 305명의 입후보자,

혁신우파노선의 성격을 띤 전 진보당의 박기출, 김달호, 윤길중과 전 근로인민당의 김성숙, 유병묵 그리고 전 민주혁신당의 서상일, 이동화 등 3파 합작으로 조직된 사회대중당은 혁신정당으로서는 가장 강력한 정당이었으며  8.2%인 129명의 입후보자,

15개의 정당,사회단체들 중 55명의 입후보자를 낸 자유당과


혁신좌파노선의 성격을 띤 한국사회당은 전 민족주의민주사회당의 전진한, 김무진, 전 민주혁신당의 김성수, 안정용, 김 철 그리고 사회당의 성낙훈, 박재하, 박부산, 양우조 등으로 조직되어 두 당은 혁신정당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19명의 입후보자

13명의 입후보자를 낸 혁신동지연맹,

12명의 입후보자를 낸 한국독립당을 제외한 나머지 정당,사회단체들은 모두 10명 미만의

   입후보자를 내는 데 불과했다.

이러한 혁신정당들과 민주당을 비롯한 보수정당들간의 대결이 제5대 국회의원선거의 양상이었다.


제5대 국회의원선거는 1천 159만 3천 432명의 유권자 중 84.3%인 977만 8천 921명이

참여하여 이전의 국회의원선거에 비해 매우 낮은 투표율을 보였다.
서울이 가장 낮은 75.4%의 투표율을 보였고,

경남이 83.7%로 두 번째로 낮은 투표율을 보였다.

가장 높은 투표율을 보인 지역은 강원도로 88.9%였고,

그 다음으로 제주도가 88.6%의 투표율을 보였다. 전

반적으로 제5대 국회의원선거의 투표율은 제1공화국 시기와는 달리 서울의 75.4%를 제외하고는 80%대의 낮은 투표율을 보였는데, 이같은 상황은 동원된 투표참여가 아닌 자발적 투표참여로 인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전반적인 선거양상은 민주당과 자유당을 주축으로 하는 보수세력과 사회대중당과 한국사회당 등을 중심으로 하는 혁신세력 및 무소속의 대결로 이루어지는 3파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으나, 실제 선거전은 민주당 내의 신 · 구파간의 권력투쟁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정당간의 정책적인 근본적 차이가 별로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보수당인 민주당과 자유당이 혁신계 못지 않은 개혁정책을 내세웠기 때문에 제5대 국회의원선거는 정당간의 정책대결보다는 정파간의 세력투쟁 및 조직싸움이었다.



선거의 결과

무소속이 46.8%의 득표율을 얻었고,

민주당이 41.7%의 득표율을

다른 정당,· 사회단체들을 11.5%

   사회대중당이 6.0%의 지지를 얻었고,

   한국사회당이 0.6%,

   통일당이 0.2%,

   자유당이 2.7%

제5대 국회의원선거는 단순한 의례적인 정치행사의 성격만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은 독재와 부패를 청산하려는 국민의 결의와 요망에 따라 선택된 기회였기 때문에

민주당에 대한 지지도가 높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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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공화국 출범                 2019.12.20.금교일,맑음

제2공화국 체제는 1960년6월15일 부터 1961년5월16일 까지

1960년 4·19혁명으로 제1공화국이 붕괴된 후

허정 과도 정부인 4월27일에서 6월14일까지 권한 대행 체제를 거쳐 3차 개정인 내각제 개헌(1960년6월15일) 에 의해 탄생한 내각제 중심의 체제며 11개월간 존속했던 단명한 공화

헌정 체제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유일한 의원 내각제 기반의 헌정 체제이기도하다.

 

4·19 이후 정권을 인계 받은 보수 야당인 민주당은,

사사오입 개헌 파동 이후 자유당 정권을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이념과 지지 기반의 차이를 넘어서 결성된 우산 정당이었다.

1960년,4.19 혁명으로 이승만이 하야 후,

국회는 의원 내각제와 양원제를 권력 구조의 핵으로 헌법을 개정하여 총선거가 실시되어

민주당의 장면 내각이 들어섰다. 국무총리는 장면,대통령은 윤보선이었다.


민주당 정권은 자유주의 정치 이념을 기반으로 경제 개발 계획을 통한 산업입국을 꾀했으나,

장면의 민주당 신파와 윤보선의 민주당 구파 사이의 정치적 갈등으로 이러한 계획을 구체화할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하고 4.19 혁명을 계기로 분출된 각계 각층의 요구에도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였다.

장면 정권은 군사 반란의 조짐을 보고 받고도 미국에 기댄 안이한 판단으로 이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아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 반란 세력에 속수무책으로 정권을 탈취당하였고,

결국 제2공화국은  1961년,5.16 군사 쿠테타에 의해 붕괴되었다.










자유당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지고 민주당을 구성했던 분파들은 적대적인 경쟁자의 관계로 돌아섰으며 그 결과 권력을 인계 받은 장면 정권은 약체 정권을 면할 수 없었다.

내각 책임제하에서 총리로 선출된 장면이 이끄는 민주당 정부는

경제 발전과 사회 개혁을 시도했으나 변동기에 분출한 국민적 요구를 충족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지지 기반의 취약성으로 인해 장면 정권은 진보와 보수중 어느 세력도 만족 시켜

줄 수 없었다.

과거와의 단절을 주장하는 급진 개혁 세력들은 부정 선거,권력 남용,부정 축재자 처벌에서 정부가 너무 미온적이라 비난했고,

혁신세력의 상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위험시하던 반공 우익 세력은 혁신 세력에 대한

제재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장면 정권을 공격했다.

1961년5월16일,

장면 정부는 좌우의 협공을 받다가  박정희 소장과 그의 지지자들이 일으킨 5.16 군사정변에 의해 붕괴되었고,제2공화국은 수립 9개월 만에 붕괴되었다.

 

⊙ 내각제 개헌안(3차 개헌)                2019.12.19.목요일,맑음

1960년6월15일에 실시된 제3차 개헌으로 내각책임제(의원내각제)를 골자로 하고 있으며,

형식상 개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제헌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광범한 개정이 이루어졌다.

이 개헌안이 채택된 후 처음으로 민의원,참의원의 선거가 실시 되었으며 ,

내각책임제가 행해졌다.


제2공화국의 헌법이 된 이 개헌안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1.법률 유보 조항을 삭제한 기본권 보장의 강화

2.복수 정당 제도의 보장

3.내각 책임제의 채택

4.헌법 재판소의 설치

5.대법원장,대법관의 선거 제도 채택

6.중앙 선거 위원회의 헌법 기관화

7.경찰의 중립 규정

8.지방 자치 단체장의 선거제 채택 

 



⊙ 장택상       2019.12.19.수요일,맑음

장택상(생졸; 1893년10월22일-1969년8월1일)은 경북 구미 출신으로 경상도 관찰사를

지낸 장승원의 아들이다

광복 이후 초대 외무부장관, 국무총리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13년에 영국 에든버러 대학에 입학하였다가 중퇴하고 1921년에 귀국하였다.

1930년에 경일은행 상무에 취임했으며 청구회 회장을 지냈다.

광복을 맞아 수도 경찰청장·제1관구 경찰청장을 지내면서 좌익을 제압했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초대 외무부 장관에 취임하였고,

1950년, 고향 칠곡군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그해 국회 부의장이 되었다.

1950-1951년 유엔 총회 한국 대표로 참석하고,

1952년, 국무총리가 되었다.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나자 발췌 개헌을 제안해 이승만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을 도왔다.

1954년,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었고,

1956년, 원내 국민주권 옹호 투쟁위원장을 지냈으며,

1958년, 제4대 민의원에 당선되었다.

1960년, 제5대 민의원에 당선되었으나 5·16 군사 쿠데타로 국회가 해산되었다.

   그 뒤 '한일협정 반대 투쟁위원회'에 참여하고 신민당 고문을 지냈다.

1969년 8월에 사망했고장례는 국민장으로 치러졌으며 국립 묘지에 안장되었다.


⊙ 허정               2019.12.19.목요일,맑음

허정(생졸; 1896년-1988년)은 부산에서 출생하여 서울특별시장,외무부 장관,대통령 권한

대행,국민의 당 대표 최고위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896년,

부산에서 출생하여 보성 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시위에 참여하였고, 이어 중국에 망명하여 상해 임시 정부에 가담하였다.

1920년,

프랑스에서 재프랑스 한국인 거류민 회장이 되었고,

다시 미국으로 이주하여 뉴욕 한국학생 회장으로 일하였다.

뉴욕에서 공부하면서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직접 도왔다.

1922년,

북미한인교민총단장이 되었으며,

1923년,

 미국 교민의 독립 정신을 고취하기 위해서 창간된 '삼일신보'의 사장이 되었다.

1945년,

미군정에 의해 서울시 고문관으로 활동했으며,

12월 임정 한민당 등의 ‘국민대회준비회’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2월,

대한민국 민주의원 비서국에서 임영신,장준하 등과 비서국원으로 있었으며,

1947년9월,

미국의 한국 문제 UN 상정을 지지하기 위한 한국 민주당의 신임 상임위원 인선에서 장덕수,

김준연,백관수,함상훈,서상일등과 신임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8년,

제헌의원선거 때 부산을구에서 한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교통부장관이 되었으며,

1950년-1952년에는 사회부 장관으로 재임했고,

1951년-1952년에는 국무총리서리,

1957년-1959년에는 서울 특별시장을 지냈으며,

1959년, 한일 회담 수석대표로 발탁되었다.

1960년,

4·19혁명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뒤 외무부 장관을 겸직하면서,과도 정부의 수반

(대통령권한대행)이 되었다.

하야한 이승만을 하와이로 망명하게 하였으며, 선거를 치루어 새로 발족한 내각에 권한을

인계하였다.

1963년,

‘국민의 당’을 창당하여 대표 최고위원이 되어 대통령 후보로 내정되었으나 윤보선과 야당 후보 단일화를 이루어 양보하였다.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이 패배한 뒤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으나

1965년6월,

민중당이 창당되어 대표 최고 위원에 박순천, 고문에 윤보선이 선출되었고,김도연을 대신해

   허정이 서민호와 함께 최고 위원이 되었다.

1969년부터 1984년까지 통일원고문,

1980년까지 국정 자문위원으로 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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