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진오 2019.12.24.화요일,맑음
유진오(생졸;1906년5월13일-1987년8월30일 )는
보성전문학교 교수,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헌법 기초위원,법제처장,고려대학교 총장,한일회담 수석대표,신민당 총재를 지낸 정치인 이다.
1906년5월13일,
아버지는 궁내부 제도국 참사관을 지낸 유치형이며 서울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보성전문학교 교수,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 등을 지냈으며,
해방 이후에는 헌법 기초위원,법제처장,한일회담 수석대표, 고려대학교 총장, 신민당 총재 등으로 활동하였다.
1983년12월부터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87년8월30일 사망했다.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유진오는
1924년, 경성제국대학 예과에 수석으로 입학한 후 경성제국대학 조선학생 모임인 문우회를
조직했다.
1926년4월, 동대학 법문학부에 입학한 후
1927년5월, 단편소설 '스리'를 '조선지광'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1929년3월, 경성제국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한 후
1929년4월부터 1933년 3월까지 동대학 법문학부 조수로 있으면서 예과에 강사로 나갔다.
1929년, 조선 졸업생 모임인 낙산 구락부를 조직하여 '신흥'을 발간했다.
1930년 만주를 여행한 후 '마적', '귀향','송군 남매와 나' 등을 발표했다.
1931년9월, 경제연구회 구성원을 중심으로 좌익 모임인 조선사회 사정연구소를 설립했다.
1932년부터 보성전문학교에 법과 강사로 출강하였고
1933년4월부터 보성전문학교 전임강사가 되었고 1937년 교수가 되었다.
1933년10월부터 '동아일보' 객원기자로 활동하엿다.
1939년7월, 중일전쟁을 선전하는 '삼천리'를 발표하면서 친일활동에 가담했으며,
1939년10월에는 조선 실업구락부에 입회했다.
1943년4월, 조선문인 보국회 상무이사로 위촉되었다.
1945년8월, 조선문인 보국회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다수의 글을 통해 징병제와 지원병을
독려하는 글을 발표하고 다양한 형태로 일제의 식민정책을 옹호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활동을 했다.
1945년8월16일,해방 직후 임화의 부탁으로 문인들의 회합에 나갔다가 이태준 등의 항의로
쫓겨난 후 작가의 길을 접고, 교육자·법학자·정치가의 길로 나섰다.
경성대학 법문학부 교수와 보성전문학교 교수를 겸직하다가 고려대학교에 남아 법정대학장(1946-1949),대학원장(1949∼1952),총장(1952∼1965)을 역임하였다.
1948년6월, 대한민국 헌법 기초위원으로 대한민국 헌법의 초안을 작성했다.
1948년8월, 초대 정부에서 법제처장이 되어 1949년 3월까지 재임했다.
1951년, 한일회담 대표로 위촉되어 7월부터 준비작업차 도일해서 10월부터 회담에 참여
하였지만 1952년 5월 한일회담이 결렬되면서 귀국하였다.
1951년9월, 고려대학교 총장에 취임했고,미국 하버드대학교에 연구원으로 도미하였으며,
1958년, 서울특별시 교육회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1960년9월, 대한교육 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0년10월, 한일회담 수석대표로 임명되었다.
1961년, 5·16 쿠데타로 한일회담을 중단하고 귀국해서 6월 국가재건 국민운동 본부장에
임명되었다.
1965년10월, 고려대학교 총장을 임기만료로 사임하고 정치가의 길로 들어서
1966년9월,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
1967년1월,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한 신민당에서 윤보선을 대통령 후보로 하고 자신은
총재로 취임했으며,
1967년7월, 신민당 소속으로 7대 국회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70년1월, 와병으로 신민당 총재직을 사임했다.
1983년12월부터 투병 생활을 하다가 1987년8월30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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