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회 경기 서울 대회 개최 2019.12.27.금요일,맑음
제10회 아시아 경기가 1986년9월20일부터 10월5일까지 16일간 서울에서 열렸다.
1951년, 인도의 뉴델리에서 제1회 대회가 개최된 뒤 35년 만인 1986년 제10회 대회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영원한 전진’이라는 표어 아래 27개 국 4,800여 명의 아시아인이
모여 25개 종목에 걸쳐 기량을 겨루었다.
1만9000명의 요원들이 잠실 올림픽 경기장을 중심으로 33개 경기장에서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각국 선수단을 수용한 선수촌은 9∼18층의 아파트에 각종 편의 시설을 갖추고 모범적으로 운영되었으며, 특히 최신 전산 장비 및 시설의 활용은 대회 운영을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경기 종료 후 7분이면 경기결과를 세계 어디서나 알 수 있도록 한 통신망을 구축하였고,
개·폐회식과 식전 공개 행사는 우리의 전통 문화에 현대적 감각을 조화시켜 독특한 분위기로 참가 선수단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5만4,000명에 달하는 자원 봉사자들은 성공적인 대회 개최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고,특정 소수 체육인만의 행사가 아닌 전 국민의 스포츠 잔치 였음을 입증했다.
우리의 저력을 아시아에는 물론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경기 결과 우리 나라는 금메달 93개를 획득하여 중국에 이어 종합 2위였다.
그 동안 중국이 불참한 역대 대회에서 우리 나라는 두 차례 2위를 하였으나,
일본을 누른 것은 이 대회가 처음이었다.
우리나라가 30억 아시아인의 스포츠 잔치인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하게 된 것은
197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격상된 지위를 아시아권 내에 한층 공고히 하자는 데 기본 취지가 있었다.
따라서,대한 올림픽위원회(KOC)는 제10회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여 아시아 올림픽 평의회에서의 발언권을 강화하는 한편,
1970년 제6회 아시아 경기대회를 유치했다가 반납한 불명예를 씻고 아랍 여러 나라 및 중국·동남아시아 국가와의 국제 친선 및 우의를 증진하려는 데 역점을 두었다.
1981년9월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 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제24회 올림픽 대회를 유치한 지 두 달 만에 또다시 아시아 경기대회를 유치하게 된 것이다.
세계 규모의 국제 스포츠행사를 서울에서 개최함으로써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동북아시아는 물론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겠다는 우리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대회는 성공적으로 개최됨으로써 아시아인의 두터운 친목과 우의를 다지고 아시아 지역의 영원한 전진과 번영, 나아가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겠다는 아시아인 모두의 결의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또, 서울 올림픽대회를 2년 앞두고 열린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는 이 대회의 성패가 곧바로
1988년 서울 올림픽대회의 성패로 연결되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우리는 아시아 경기대회를 성공리에 치름으로써 운영기술 및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으며,
이는 서울 올림픽 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굳게 다지는 디딤돌이 되었다.
1979년9월21일,대한 올림픽위원회는 정부 승인과 10월8일 대회유치 희망을 공식발표 후
1980년4월24일,개최 신청서를 아시아경기연맹(AGF)에 제출하였다.
1980년9월8일,대회개최 신청 기한이 경과한 뒤 이라크가 개최 신청을 한 데 이어,
11월20일 북한 역시 개최 신청을 하여 1970년 대회를 반납한 바 있는 우리로서는 커다란
장벽에 부딪혔다.
1980년12월3일,아시아 경기연맹 집행위원회는 한국·이라크·북한의 개최 신청을 모두 유효
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총회에 상정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우리 나라는 아시아 경기연맹 창설국이면서도 집행위원국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여
이라크나 북한의 개최 신청이 시한과 절차면에서 적법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항변할
발언권마저 가지지 못하는 등 상당한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다.
아시아경기연맹은 표결에 앞서 부회장 파하드(쿠웨이트)를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구성,
3개 신청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대한 올림픽위원회는 아시아 경기연맹 조사단의 우리 나라 방문에 대비하여,각종 국제회의를 통해 홍보 활동을 벌였으나 북한의 방해 공작으로 1981년3월로 예정되었던 아시아경기연맹 조사단의 한국 순방 계획이 무기한 연기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그 뒤 조사단은 북한을 먼저 방문하여 시설이 완비되어 있지 않음을 확인하였으며,
1981년 10월 19일 내한한 조사단은 잠실 지구의 스포츠 시설과 태릉 사격장 등을 시찰하고 북한에 비하여 월등히 나은 시설을 갖추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라크 국가 올림픽위원회는 이란과의 교전과 시설 부족을 이유로 대회 개최가 불가능함을 통보하고 표결에서 아랍 여러 나라들과 함께 한국을 지지할 것을 약속하였다.
1981년11월17일,북한은 제3국 개최를 고집하면서 평양 유치를 사실상 철회하였다.
결국,1981년11월26일.유치는 한국이 단독으로 신청함으로써 68명의 대표가 표결 없이 만장일치로 서울 개최를 확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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