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0회 경기 서울 대회 개최           2019.12.27.금요일,맑음

제10회 아시아 경기가 1986년9월20일부터 10월5일까지 16일간 서울에서 열렸다.


1951년, 인도의 뉴델리에서 제1회 대회가 개최된 뒤 35년 만인 1986년 제10회 대회가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영원한 전진’이라는 표어 아래 27개 국 4,800여 명의 아시아인이

모여 25개 종목에 걸쳐 기량을 겨루었다.


1만9000명의 요원들이 잠실 올림픽 경기장을 중심으로 33개 경기장에서 대회를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각국 선수단을 수용한 선수촌은 9∼18층의 아파트에 각종 편의 시설을 갖추고 모범적으로 운영되었으며, 특히 최신 전산 장비 및 시설의 활용은 대회 운영을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경기 종료 후 7분이면 경기결과를 세계 어디서나 알 수 있도록 한 통신망을 구축하였고,

개·폐회식과 식전 공개 행사는 우리의 전통 문화에 현대적 감각을 조화시켜 독특한 분위기로 참가 선수단의 찬사를 받았다.

특히,5만4,000명에 달하는 자원 봉사자들은 성공적인 대회 개최를 가능하게 한 원동력이

되었고,특정 소수 체육인만의 행사가 아닌 전 국민의 스포츠 잔치 였음을 입증했다.

우리의 저력을 아시아에는 물론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경기 결과 우리 나라는 금메달 93개를 획득하여 중국에 이어 종합 2위였다.

그 동안 중국이 불참한 역대 대회에서 우리 나라는 두 차례 2위를 하였으나,

일본을 누른 것은 이 대회가 처음이었다.


우리나라가 30억 아시아인의 스포츠 잔치인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하게 된 것은

1970년대 이후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격상된 지위를 아시아권 내에 한층 공고히 하자는 데 기본 취지가 있었다.

따라서,대한 올림픽위원회(KOC)는 제10회 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여 아시아 올림픽 평의회에서의 발언권을 강화하는 한편,

1970년 제6회 아시아 경기대회를 유치했다가 반납한 불명예를 씻고 아랍 여러 나라 및 중국·동남아시아 국가와의 국제 친선 및 우의를 증진하려는 데 역점을 두었다.


1981년9월30일,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열린 제84차 국제 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제24회 올림픽 대회를 유치한 지 두 달 만에 또다시 아시아 경기대회를 유치하게 된 것이다.

세계 규모의 국제 스포츠행사를 서울에서 개최함으로써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고,

동북아시아는 물론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겠다는 우리의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대회는 성공적으로 개최됨으로써 아시아인의 두터운 친목과 우의를 다지고 아시아 지역의 영원한 전진과 번영, 나아가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겠다는 아시아인 모두의 결의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또, 서울 올림픽대회를 2년 앞두고 열린 서울 아시아 경기대회는 이 대회의 성패가 곧바로

1988년 서울 올림픽대회의 성패로 연결되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우리는 아시아 경기대회를 성공리에 치름으로써 운영기술 및 경험을 축적할 수 있었으며,

이는 서울 올림픽 대회의 성공적 개최를 굳게 다지는 디딤돌이 되었다.


1979년9월21일,대한 올림픽위원회는 정부 승인과 10월8일 대회유치 희망을 공식발표 후

1980년4월24일,개최 신청서를 아시아경기연맹(AGF)에 제출하였다.

1980년9월8일,대회개최 신청 기한이 경과한 뒤 이라크가 개최 신청을 한 데 이어,

   11월20일 북한 역시 개최 신청을 하여 1970년 대회를 반납한 바 있는 우리로서는 커다란 

   장벽에 부딪혔다.

1980년12월3일,아시아 경기연맹 집행위원회는 한국·이라크·북한의 개최 신청을 모두 유효

   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총회에 상정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우리 나라는 아시아 경기연맹 창설국이면서도 집행위원국의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여

   이라크나 북한의 개최 신청이 시한과 절차면에서 적법한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항변할

   발언권마저 가지지 못하는 등 상당한 어려움에 봉착해 있었다.

   아시아경기연맹은 표결에 앞서 부회장 파하드(쿠웨이트)를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구성,

   3개 신청국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한편, 대한 올림픽위원회는 아시아 경기연맹 조사단의 우리 나라 방문에 대비하여,각종 국제회의를 통해 홍보 활동을 벌였으나 북한의 방해 공작으로 1981년3월로 예정되었던 아시아경기연맹 조사단의 한국 순방 계획이 무기한 연기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그 뒤 조사단은 북한을 먼저 방문하여 시설이 완비되어 있지 않음을 확인하였으며,

1981년 10월 19일 내한한 조사단은 잠실 지구의 스포츠 시설과 태릉 사격장 등을 시찰하고 북한에 비하여 월등히 나은 시설을 갖추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라크 국가 올림픽위원회는 이란과의 교전과 시설 부족을 이유로 대회 개최가 불가능함을  통보하고 표결에서 아랍 여러 나라들과 함께 한국을 지지할 것을 약속하였다.

1981년11월17일,북한은 제3국 개최를 고집하면서 평양 유치를 사실상 철회하였다.

결국,1981년11월26일.유치는 한국이 단독으로 신청함으로써 68명의 대표가 표결 없이 만장일치로 서울 개최를 확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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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3 인천 사태            2019.12.27.금요일,맑음

1986년5월3일.인천에서 신한 민주당의 개헌 추진위원회 경인지부 결성 대회가 운동권의

시위로 무산된 사건이다.


이원집정 개헌 반대,국민헌법 제정과 헌법제정 민중회의 소집 요구 

1986년2월12일,신한 민주당은 직선제 개헌을 위한 서명 운동을 전개하며 재야의 호응 속에 1986년3월11일, 서울시지부를 결성하고 연이어 부산,대구,대전 대회를 열었다.

1986년4월29일,당고문인 김대중 민추협 공동의장이 소수 학생의 과격한 주장을 지지할 수

   없다는 뜻을 밝히고 다음날 이민우 총재가 좌익 학생들을 단호하게 다스려야 한다고 하여

   급진적인 세력과 단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러한 입장 표명에 분개한 재야와 운동권 세력은,

1986년5월3일, 신한민주당 인천 및 경기지부 결성대회가 열릴 예정이던 인천 시민회관에서, 대회 시작 전부터 격렬한 시위를 벌였고 이에 따른 공권력 투입으로 당지도부가 대회장으로 입장하지도 못한 채 무산되었다.

1만여 명의 시위대는 도로를 장악하고 산발적인 시위를 하다가 오후가 되면서 화염병과

돌을 던지며 경찰과 충돌하였다.

시위대는 신한 민주당의 각성을 요구하고 이원집정 개헌 반대를 외치며 국민 헌법 제정과

헌법제정 민중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 사태로 319명이 연행되었고 129명이 구속되었으며,

전두환 정권의 운동권 탄압을 본격화 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 남북한 고향 방문단             2019.12.27.금요일,맑음

1985년9월20일부터 23일까지 4일간 남북한 쌍방 151명씩의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 및 예술공연단이 상호 교환 방문한 일이다.

1984년9월,북한 측의 대남 수재 물자 제공 제의와 남한 측의 수락을 계기로 남북 대화는

1985년 들어 남북 적십자 회담,경제 회담.국회회담 예비접촉,체육회담 등 4갈래로 활발히

전개되었다.

12년 만에 재개된 1985년5월27일부터 30일까지 서울에서 열린 제8차 적십자 본회담에서

'광복절 40주년을 맞이하여 이산가족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의 교환 방문을 추진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3차례에 걸친 실무 대표 접촉 끝에

1.방문단 151명(단장 1, 고향방문단 50, 예술공연단 50, 기자 30, 지원인원 20명)

2.방문지역은 서울과 평양

3.방문기간은 1985년9월20~23일(3박 4일)

4.교환방법은 동시교환

5.공연회수는 2회로

6.공연내용은 정치 성향 배제,

   전통 민족 가무 중심 등의 구체적 문제에 합의함으로써 남북한 고향 방문이 실현되었다.

1985년9월20일,

   김상협 대한 적십자사 총재가 인솔하는 우리 측 방문단 151명과 손성필 북한 적십자회

   위원장이 이끄는 북한 측 방문단 151명이 판문점을 거쳐 평양과 서울을 각각 방문,

   우리 측 고향 방문단 50명 중 35명이 41명의 북쪽 가족들과 상봉하고

   북한 측 고향 방문단 30명이 51명의 남쪽 가족 및 친척들과 만났으며,

1985년9월21일과 22일에는 평양대극장과 서울의 중앙국립극장에서 예술공연을 가진 뒤

1985년9월23일, 판문점을 통과, 각자 자기 측 지역으로 돌아갔다.

남.북한 고향 방문단은 민족 통일에 대한 국민의 열망으로 전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으나, 국민들의 기대와는 달리 일회적 사건에 그친데다 체제간의 장벽,인간의 이질화 등 분단 40년의 세월이 파놓은 깊은 골을 확인 시켜주는 계기가 되어 분단으로 인한 민족적 

통한을 심화 시켜 주기도 했다.


 

⊙ 제12대 국회위원 선거           2019.12.27.금요일,맑음

1985년2월12일에 실시된 제12대 국회위원 선거다.


1984년12월18일, 제11대 국회의 마지막 정기 국회가 폐회됨에 따라 각 정당들은 제12대

총선을 위한 활동에 들어갔고,신한민주당(가칭)의 창당 작업도 본격화되었다.

1985년1월21일,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일이 2월12일로 공고된 후 1월28일 마감된 후보자 등록 결과  지역구 의원정수 184명에 정당 추천 411명,무소속 29명 등 모두 440명이 등록

하여 전국 평균 2.4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모두 9개의 정당이 참여한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과 민주한국당은 92개 전지역구에서 후보자를 공천하였고,

새로 출범한 신한민주당은 2개 지역구에서 복수 공천을 하여 93명의 후보자를 공천하였다. 한국국민당은 71개 지역구에서만 후보자를 공천하였고,

나머지 정당들은 20명 미만의 후보자를 공천하였는데,

특히 자유민족당은 불과 4명의 후보자를 공천하여 공천율이 가장 낮았다.

무소속의 경우도 지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시와는 달리 총 29명만이 입후보하였는데,

   이는 무소속 당선율이 낮아지는 경향으로 인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다.

지난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와 비교하여 평균 경쟁률은 낮아졌으나 투표율은 높아졌다.

총 유권자 23,987,830명 중 20,286,672명이 투표에 참여하여 84.6%의 투표율을 보였는데, 이같은 투표율은 제3공화국 이래 최고의 투표율이었다.


시도별로는 충청북도가 90.4%로 가장 높은 투표율을 보였고,

그 다음으로는 강원도가 89.5%의 투표율을 기록하였으며,

이어서 제주도가 88.9%의 투표율을 보였다.

가장 낮은 투표율을 보인 지역은 인천으로 80.7%였고,

서울이 81.1%의 투표율로 두 번째로 낮았으며,

대구가 82.0%로 세 번째로 낮은 투표율을 보였다.

선거 결과 민주정의당이 35.25%의 득표율을

신당인 신한민주당은 기존의 야당들을 제치고 29.26%의 득표율을 얻어 민주정의당과 불과

   6%내의 근소한 차이를 보였는데,이는 새로운 야당에 대한 유권자들의 기대와 지지가

   높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제11대 국회의 제1야당이었던 민주한국당은 19.68%의 득표율을 보였고,

한국국민당은 9.16%의 매우 저조한 득표율을 보였으며,

나머지 5개 정당은 2% 미만의 득표율을 보이는 데 그쳤고,

무소속 입후보자들의 지지도가 떨어져 3.24%의 득표율을 보이는 정도였다.

선거 결과는 신당인 신한민주당에 대한 기대가 비교적 컸기 때문이다.


선거전에 있어서

민주정의당은 민주정치,복지경제 등의 실현을 위한 50개항의 실천사항을 선거공약으로,

민주한국당은 자유,민주헌법으로의 개정,악법의 개폐로 민주회복,국민복지경제의 실현,국권

    수호,자유 민권사회 건설 등을 선거공약으로 제시하였다.

한국국민당은 대통령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권교체,지방의회구성과 자치단체장의 직선,

    농어촌 부채경감,노동권 확립,자유언론 창달 등의 5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50대 실천

    사항을 제시했다.

신당인 신한민주당은 대통령직선제 헌법 개정,국회의 국정감사권 부활,지방자치제의 전면

   실시,언론의 자유보장을 위한 관계법의 개정 등 선거공약 10장을 발표하여 유권자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 인석 이민우                      2019.12.27.금요일,맑음

인석 이민우(생졸; 1915년9월5일~2004년12월9일) 는

제4·5·7·9·10·12대 국회의원으로 신민당 총재 권한대행,신민당 부총재,대한민국 헌정회

원로 자문회의 위원,자유민주 민족회의 고문을 지낸 정치인다.    


1915년9월5일,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난 그는 아내 김동분과의 사이에서 아들 김상용,

   김상래,김상호,김상렬 등 4남 4녀를 두었다.

1940년,일본 메이지대학(명치) 법학과를 입학하여,이듬해인 1941년에 중퇴하였다.

1946년,'충북신보' 총무국장 겸 영업국장을 거쳐,

1948년, 청주 시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신익희·조병옥·김성수 등으로 연결되는 민주당 구파에서 활동하면서,민주당 중앙위원 겸

   충북도당 부위원장과 청주시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제4대 민의원으로 선출된 후,

1960년, 5대 국회의원,1967년 7대 국회의원,1973년 9대 국회의원,1979년 10대 국회위원,

   1985년,12대 국회의원에 선출된 6선의 정계 거목이었다.

1960년,신·구파 갈등 과정에서 구파가 신민당을 창당하자 이에 가담했다.

   신민당에서는 유진산계의 중심 역할을 수행하며,원내 부총무를 지냈다.

1965년,제3공화국 최초의 통합 야당인 민중당에서는 조직 국장과 당무회의 부의장을 역임.11967년,통합 야당 신민당에서는 정무 위원,당기 위원장,충북도 제1지구당 위원장,원내 총무,

   중앙상임 위원회 의장 등의 요직을 거쳤다.

1973년, 9대 국회에서 신민당이 김영삼의 강경파와 이철승의 온건파로 대립할 때,

   김영삼 편에 서서 정치적 동지 관계를 형성했다.

   이 인연으로 신민당 총재 권한대행,민주산악회 회장 등을 맡았으며,

1979년, 신민당 전당 대회에서 부총재로 선정되기도 했다.

1986년12월24일, 민주화 7개항이 실현되면 국민은 물론 야당까지도 내각제가 장기집권

   음모라 생각하지 않고 수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자 회견을 하였다.

   전두환 정권이 주장하는 내각제 개헌을 수용할 수 있다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발표

   한 것이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김영삼과 김대중계 의원들이 집단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이

   와해되자 정계 은퇴를 선언하였다.


이후 민족통일 국민운동 중앙위원,대한민국 헌정회 원로 자문회의 위원,자유민주 민족회의 고문, 대한민국 건국50주년 기념사업 준비위원회 명예 회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대한민국의 보수야당인 민주당의 분열과 통합의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중 한명이다.

‘어진 돌’이라는 뜻을 지닌 인석()이라는 호에 걸맞게 중후한 인품과 서민적 풍모로 존경받았다


⊙ 신한 민주당 창당            2019.12.27.금요일,맑음

1985년1월18일에 창당한 신한민주당은 제5공화국 시기에 활동했던 정당이며,

약칭은 신민당이다.

당 총재는 이민우였으나,실질적으로는 김대중과 김영삼이가 영향력을 행사했다.


1984년12월,신민당의 창당논의는 제5공화국 출범 당시 정치 활동이 금지됐던 야당 정치인들이 해금되면서 시작됐다.


정통 야당이 되살아나 전두환 정권을 견제해야 한다는 의견이 모아지면서 해금 인사들과


일부 민한당을 탈당한 인사들이 신당 창당을 결의하여 총선을 불과 한 달도 채 남겨두지

않았던 시기에 창당한 것이다.


전두환은 12대 총선 투표 날짜를 예년과 달리 겨울인 1985년2월12일로 정했다.

신민당의 창당 날짜와 가까운 시기에 총선을 치러 야당 돌풍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민당은 지역구 50석과 전국구 17석을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켰고,

이후 민한당에서 이탈한 의원들이 합류하면서 당세를 더욱 키웠다.

이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전두환 정권과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그러나 1986년12월, 총재 이민우가 양 김씨의 의사와 배치되는 내각제 개헌 수용 의사를

밝히면서 양김씨 세력이 반발해 집단 탈당해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면서 당은 큰 타격을 입게 되어 1988년4월26일에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단 한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여,

정당법에 따라 등록이 취소되었다.



남북 경제 회담 개최                  작성일자; 2019.12.27.금요일,맑음

 

제1차 남북 경제 회담은

1984년11월15일에 개최된데 이어 제2차 남북 경제 회담은 1985년5월17일에 열렸다.

 

제2차 회담은 1984년12월5일에 열기로 합의되었으나

북한측이 팀스피리트 훈련  구실로 연기되어 이듬해 1985년5월17일에 열렸다. 

한국측은 제1차 회담에서 합의된 품목에 대해 당장 교역을 시작하여

북한산 무연탄 30만t 구입을 제의하였으나 

북한은 기존의 경제 회담 대신 '남북 경제협조 공동위원회'를 구성 하자고 제의하였다. 

 

제3차 남북 경제 회담이 열렸던 1985년6월20일에는

판문점에서 양측은

남북간의 물자교역 및 경제협력 추진과 부총리급을 공동 위원장으로 하는

남북경제협력 공동위원회 설치에 대해 합의하고 합의서 초안을 교환하였다. 

 

제4차 회담은 1985년9월18일,

제5차 회담은 1985년11월20일에 모두 판문점에서 열렸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한국측은 시범 사업으로

북한의 무연탄과 남한의 철강재를 연내 물물교환 하자고 제의 하였으나

북한측은 이를 거부하였다.

 

제6차 회담을 양측이 1986년1월22일에 열자고 하였으나 열리지 못하였다. 

이후 남북교류 분위기는 냉각되었다.

 

제1차 남북 고위급 회담이 1990년에 열리고,

제5차 고위급 회담이 열린 1991년12월13일

'남북간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가 서명되면서 급속히 진전되었다.

이 기본문서에 의거하여 경제.교류협력의 3개 분과 위원회가 만들어졌고,

1992년7월19에서 25일까지 6일간  북한의 부총리 김달현 일행이 서울을 방문하였다.

이후 1995년6월부터 10월1일까지 대북 쌀제공과 관련해 3회에 걸쳐 베이징 회담을 가졌고,

2000년11월8일부터 11월11일까지 경제협력 제2차 실무자 간 접촉이 있었다. 

 

200년12월28일부터 12월30일까지 평양에서 남북경협 추진위원회를,

2001년2월7일부터 2월10일까지 평양에서 남북 전력협력 실무협의회 1차 회의를 개최.

2002년3월21일,제94차 남북교류협력추진협의회를 개최하고,

2002년7월, 한반도 에너지개발기구(KEDO) 관련 남북 직항로(양양-선덕)를 시범 운행,

2002년8월27일 부터 8월30일까지 서울에서 제2차 경제협력 추진위원회를 열었다.

2002년9월13일부터 9월15일까지 금강산에서 남북 철도 및 도로 연결 1차 실무회의를 열고

2002년9월18일, 경의선,동해선 철도및 도로를 연결 동시 착공식을 가졌다.

2002년11월6일부터 11월9일까지 평양에서 제3차 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연 뒤,

2003년1월, 제9차 남북 장관급회담(서울)과

남북 철도·도로연결실무협의회 제2차회의(평양)를 거쳐 

2003년4월27일부터 29일까지 3일간 제10차 남북장 관급회담(평양)을 개최하였다.

 

 

⊙ 민주화 추진 협의회 발족                 2019.12.27.금요일,맑음

1984년5월18일,

김영삼과 김대중을 중심으로 발족되어 부산 등지에 조직을 둔 재야 정치 단체다.


민주화 추진협의회는 전두환 정권의 독재에 저항하고 1985년의 12대 총선에서 승리하기

위해 재야 민주 정치 세력을 연합하고자,

1984년5월18일, 김영삼과 김대중을 지지하는 야당 인사들이 연합하여 설립하였다.


1979년,박 정권에 의해 국회의원에서 제명되고 가택 연금을 당한 신민당 전 총재 김영삼은

1983년,5·18 민주화 운동 3주년을 기해 민주화 5개 항을 내걸고 무기한 단식을 시작하였다.

   당시 미국에 있던 김대중은 김영삼을 지지하는 성명과 언론 기고문을 발표하고, “김영삼을

   구출하라”는 내용의 시위를 하는 등 김영삼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하였다.

   이에 정권에 의해 가택 연금이 풀린 김영삼은 김대중과 함께 공동 성명을 발표하고 정치

   활동의 금지를 해제할 것 등을 요구하였다.

나아가 김영삼의 상도동계 인사들은 친목 모임인 민주 산악회를 구성하는 한편 김대중의

동교동계와 제휴를 모색하였다.

동교동계의 김녹영·박성철·박종률·김상현·김윤식과

상도동계의 이민우·최형우·윤혁표·김명윤·김동영 등 10명의 소위원회가 구성되고,

양 계열의 합작으로 1984년5월18일,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가 설립되었다.


민주화 추진협의회는 김영삼과 김대중(미국에 머물던 김대중을 대신하여 김상현이 권한

대행으로 활동)을 공동 의장으로 하고,부의장 19명,운영 위원 452명,16개국, 32개 부서를 갖춘 조직으로 탄생하였다.

1984년 말에는 해금된 인사들로 인력을 보강하여 조직을 강화하고,

1984년12월20일, 신한 민주당을 창당하였다.

1985년, 신한 민주당이 제1야당으로 부상한 뒤에도 민주화 추진협의회는 김영삼, 김대중의

    원외 활동 기반으로 신민당과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987년, ‘이민우 구상’과 내각제 개헌 주장 등으로 신한 민주당이 분열하고 김영삼과 김대중이 통일 민주당을 창당하게 되면서 민주화 추진협의회의 역할은 축소되었다.


1987년12월, 대통령 선거 후보자 선정 문제로 김대중이 탈당하여 평화 민주당을 창당함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는 해체되었다.


1984년5월18일, 공동 의장의 이름으로 ‘민주화 투쟁 선언’을 발표하였으며 각종 성명서 및 기자 회견을 통해 반()정부 활동을 전개하였다.

처음부터 정치 활동 재개를 위한 사전 조직의 성격을 갖고 있었던 정치 단체로,

인적 구성에서도 재야 세력 중 비정치인은 배제했으며,

조직의 규약이나 강령도 채택하지 않았다.


2002년,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을 고문으로 한 법인체를

   만들어 재창립하였다.당시 이사장은 김상현·김명윤, 회장은 김덕룡·김병오가 맡았다.

2007년에는 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희부 부이사장 등 33명이 박근혜 후보 지지 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민주화추진협의회는

박정희·전두환 독재 정권 아래에서 재야에 흩어져 있던 민주 정치 세력을 김영삼·김대중을 필두로 결집시켰으며, 범민주 세력의 단합을 이끌어 내고

1985년,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사상적·조직적 통합을 이루지 못한 정치 단체라는 한계는 양김(김영삼·김대중)의

분열을 가져왔으며, 나아가 각각을 지지하는 재야 민주 세력의 분열로 인해

1987년 대선에서 다시 군부 정권이 집권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  Kal기 폭파 사건                 2019.12.27.금요일.맑음

1987년11월29일, 바그다드발 서울착 KAL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랑군 상공에서 공중폭발하여 탑승객 115명 전원 사망하였다.


1987년11월29일,미얀마의 벵골만 상공에서의 무선 보고를 끝으로 소식이 끊긴 KAL기는

사건발생 15일 만인 12월13일 양곤 동남쪽 해상에서 공기 주입 펌프 등이 파손된 KAL기

구명 보트 등 부유물 7점이 발견됨으로써 비행 중 폭발에 의하여 추락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수사 시작 2일째인 1987년12월1일,

사고 비행기에 한국 입국이 금지된 '요주의 인물'인 일본인 2명이 탑승했었다는 동아 일보의 특종 보도가 나가면서 수사는 급진전 되었다.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라는 일본인으로 위장한 북한 대남 공작원 김승일, 김현희 두 사람은

1987년12월1일, 바레인 공항에서 붙잡혀 조사를 받던 중 독약을 삼켜 김승일은 죽고

김현희는 살아났다.

1987년12월7일,정부는 바레인에서 사실상 수사를 종결하고,북한의 88올림픽 방해 책동의 일환으로 사건을 분석했다.

그러나 현지조사단은 KAL858기의 잔해는 찾지 못한 채 철수하였다.

다음해인 1988년 1월15일 '하치야 마유미'는 김현희 라는 이름으로 TV 기자 회견을 가지고, 본인이 KAL858기 폭파범이며 북한 김정일의 사주로 88올림픽 방해,선거 분위기 혼란 야기, 남한 내 계급 투쟁 촉발을 목적으로 KAL858기를 폭파했다고 발표했다.
즉, 이 사건은 김승일과 김현희가 김정일의 친필 지령을 받고 기내에 두고 내린 시한 폭탄과 술로 위장한 액체 폭발물에 의하여 폭파 되었다는 것이다.


1988년1월21일, 미국 정부는 북한을 테러 국가로 규정,비자발급 규제를 강화하고

1987년3월에 북한 외교관 접촉을 허용하였던 지침을 철회하였으며 ,

1988년1월26일,일본 정부도 제3국에서의 북한 외교관 접촉을 제한하고,

    일본∼북한간 특별기의 일본 기항을 중지하는 등 대북한 제재 조치를 단행하였다.


1987년12월16일, 범인 김현희가 13대 대통령 선거 전날 서울에 옴으로써 13대 대통령

   선거에 최대 변수로 작용하기도 했다.

그 뒤 김현희는 한국 정부의 보호 하에 압류되어 있다가 1990년 재판을 받고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한국에 전향, 대통령 특사로 자유인이 되었다.

 

⊙ 아웅산 묘소 폭파 암살 사건             2019.12.27.금요일,맑음

1983년10월9일, 미얀마의 수도 양곤에 있는 아웅산 묘소에서 한국의 외교 사절 다수가 북한 테러 분자의 폭파 암살로 사상한 사건이다.


1983년10월9일,전두환 대통령은 서남아,대양주 순방의 첫 방문지인 미얀마 양곤에서

대통령의 아웅산 묘소 참배 행사를 위하여 미리 대기중이던 부총리 서석준 이하 여러 정부

요인,  취재차 수행했던 기자 등 17명이 북한 테러분자가 장치한 폭발물의 폭파로 사망하고, 합참 의장 이기백 등 13명이 중경상을 입는,세계 외교 사상 유례없는 일대 참변이 일어났다.

 

화를 면한 대통령 전두환 내외는 모든 방문 예정을 취소하고 급거 귀국하였다.

국내외의 비분과 비탄 가운데 미얀마 정부는 한국에 조문 사절을 보내는 한편,

주범 2명을 체포하여 사형을 선고하고 북한과 국교를 단절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1984년10월, 미얀마 정부는 아웅산 사건은 북한의 소행이라고 국제연합에 보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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