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은 일본의 만주 침략에 대해 격렬히 반대하였고 전국 주요대 학에서는 ‘항일 구국회’가 결성되었다. 일본은 만주를 일본 영토로 편입하기 위해 치밀한 계획을 세워 만주 지역에 일본의 조종을 받는 괴뢰 국가 만주국을 성립했다.
'1931년 9월 18일 오후 10시 30분 중화민국 동북변방군의 한 부대가 봉천 서북쪽 부근에서 우리일본 남만주 철도를 폭파하고 여세를 몰아 우리의 수비대를 습격했다. 적대행동을 개시한 것은 그들(중국)이며 스스로 화를 자초한 장본인이다. 원래 우리 남만주 철도는 지난해 조약에 근거하여 정당하게 획득했고 우리가 소유한 것으로 다른 나라가 손댈 수 없다. 중화민국 동북군은 감히 이것을 침범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일본제국 군대에 발포까지 했다. 본관은 철도 보호의 중책을 지고 있는바, 그 권익을 지키고 제국 군대의 위신을 보호하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는 데 주저하지 않겠다.'
1931년 9월 19일, 일본은 이와 같은 공식입장을 밝히고, 도발자인 중화민국을 '응징'하겠다며 군대를 동원했다. 이른바 '만주사변'의 시작이다.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봉천은 외부와의 연락이 완전 두절되었다. 중국정부는 일본과의 직접 대결을 피하고 국제연맹에 이 문제의 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중국의 한 지역에서 발생한 무력충돌은 유럽의 더 큰 문제들 때문에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특히 영국은 일본을 감싸기까지 했다. 결국 국제연맹 이사회는 일본정부의 주장에 가깝게 아래와 같은 결의를 하고 그 문제를 마무리해버렸다.
1. 만주에 대해 영토적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일본의 성명을 중시한다. 2. 일본정부는 그 국민의 안전 및 재산보호가 확보되는 대로 군대의 철수를 가급적 빠르게 시행한다.
1929년11월에 광주에서 시작되어 이듬해 3월까지 전국에서 벌어진 학생들의 시위 운동으로 3ㆍ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항일 운동이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1929년10월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 안에서 일어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 중학 학생들의 충돌이 계기가 되었다.
광주중 학 3학년인 후쿠다 슈조 등의 일본인 학생이 광주 여고보 3학년인 박기옥 등을 희롱하였고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 박준채 등과 싸움이 벌어졌다.
싸움은 광주 고보와 광주 중학 학생들의 패싸움으로 확산되었고, 일본 경찰은 일방적으로 일본인 학생을
편들고 조선인 학생들을 구타하였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광주 고보 학생들은 11월3일 광주에서 가두 시위를 벌였다.
11월 3일은 일왕 메이지(명치;재위 1867-1912)의 생일인 명치절 이어서 학생들은 이를 기념하는 행사에 참여해야 했다. 그리고 그 날 광주에서는 전남 누에고치 6백만 석 돌파 축하회가 열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명치절 행사를 마친 광주고보 학생들은 광주 시내에 모여 항의 시위를 벌였고, 일부 학생은 나주 사건에 대해 편파 보도를 했던 광주일보사로 몰려가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기도 했다. 그리고 신사 참배를 마치고 돌아오던 광주중학의 일본인 학생들과 집단으로 충돌하여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날의 시위는 비교적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난 것이었으며, 여기에는 광주 고보만이 아니라 광주 여고보와 광주 농업학교 학생들도 일부 참여했다. 일제는 학생들의 시위가 격렬해지자 광주시내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렸으며, 시위에 참여한 조선인 학생 수십 명을 구금하였다.
학생들의 시위 소식이 전해지자 신간회에서는 김병로·허헌 등으로 구성된 조사단을 파견했고,
청년 조직인 조선 청년동맹과 학생 전위동맹도 조사단을 파견했다.
그리고 광주 지역의 학생 비밀 결사인 성진회를 모태로 하여 결성된 독서회 중앙 본부의 장재성 등은 광주의 사회 단체들과 함께 학생 투쟁 지도본부를 설치하여 학생들의 시위를 전면적인 항일운동으로 발전시킬 것을 계획하였다. 당시 장재성은 광주 지역 학생들의 행동 지도를 맡았고,장석천은 시위의 전국적 확산, 국채진은 전남 지역 학생의 지도, 박오봉은 노동자와 노동단체의 지도, 임종근은 전남 지역의 공립보통학교 교사들과의 연락, 강석원은 외부와의 연락, 나승규는 운동자금 조달 등으로 역할을 나누었다.
그리고 11월 7일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권유근(權遺根)·박일(朴日), 조선청년동맹의 부건(夫健) 등과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문제에 대해 협의하였다.
이들은 11월11일,저녁에 격문을 살포하여 11월 12일에 광주 시내에서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여고보, 광주사범학교 학생들도 참여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당시 학생들은 격문에서 언론·출판·집회·결사·시위의 자유 보장,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 확립,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 민족 문화와 사회과학 연구의 자유 보장 등 9개 항목을 내세웠다. 이 날의 시위로 수백 명의
학생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되었으며, 광주 지역의 소식이 알려지면서 학생들의 시위운동은 목포와
나주 등 인접 지역으로 퍼져갔고, 12월과 이듬해 1월에는 서울을 비롯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조선 학생 과학연구회와 학생 비밀 결사인 학생 전위동맹 등은 서울 지역 학교들에 조직된 독서회와 청년
단체 등을 통해 광주 학생 항일운동의 소식을 전하며 서울에서의 시위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12월2일 밤에 전국의 학생과 민중의 총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살포했다.
이에 호응하여 12월5일, 경성제이고보(경복고)의 동맹 휴교를 시작으로 경성 제일고보(경기고)·중동·경신·보성·중앙·휘문·배재·이화·동덕·협성실업 등의 학교에서 동맹 휴교가 잇따랐다.
그리고 12월9일, 경신학교·보성고보·중앙고보·휘문고보·협성실업학교 등의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인 것을 시작으로 13일까지 시위 운동이 계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12,000여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가하여, 그 가운데 1,400여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신간회는 학생들의 항일시위운동을 각계각층으로 더욱 확산시키기 위해 근우회·조선청년총동맹·조선노동총동맹 등과 함께 12월 13일 서울에서 대규모 민중대회를 개최하려고 했다. 그러나 사전에 이관용(李灌鎔)·허헌 등 신간회와 근우회, 조선노동총동맹 등의 주요 간부 90여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민중대회는 열리지 못했다. 일제는 학생시위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겨울방학을 조기에 실시해 학교를 폐쇄하고 통제와 감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위운동은 그치지 않고 1930년 3월 초까지 전국으로 확산되어 계속되었다. 1930년 1월 학교들이 다시 문을 열자 서울에서는 1월 15일 수천 명의 학생들이 일제의 타도와 약소민족해방 만세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고, 일제는 다시 임시휴교조치로 학교를 폐쇄했으나 학생들의 시위는 1월 18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도 학생들은 가두시위를 조직하거나 동맹휴학으로 이에 호응했다. 개성·부산·진주·청주·공주·대전·홍성·예산·조치원·부여·전주·정읍·고창·이리·평양·신의주·정주(定州)·선천(宣川)·영변(寧邊)·함흥·원산·경성(鏡城)·회령·청진·대구·춘천·해주·사리원 등에서 동맹휴교나 시위운동이 벌어졌다. 국외에서도 연대의 움직임이 나타나 만주나 일본의 조선인 학교와 유학생들도 시위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리고 중국 본토나 미국, 연해주 등지에서도 학생 시위와 연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일제의 자료에 따르면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참여한 학교는 모두 194개, 참여한 학생은 5만4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당시 중등학교급 이상의 학교에 재학하던 학생이 모두 8만9천여 명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전체 학생의 60% 정도가 시위운동에 참여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1,600여 명이 구속되었으며, 학교에서는 580여 명이 퇴학, 2,330여 명이 무기정학을 받았다.
학생들은 독립운동의 과정에서 언제나 중요한 구실을 했으며, 3·1운동과 6·10만세운동에서도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광주학생항일운동은 학생들이 학교를 단위로 조직된 대중운동의 차원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특징을 지닌다.
학생들이 이렇듯 대중운동의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항일운동에 참여한 것은 일제의 식민지 교육과 사회 현실에 대한 누적된 불만이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다. 3·1운동 이후 일제가 기만적이나마 조선인의 기본적 권리를 확대하면서 근대 교육기관의 설립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일제의 교육은 우민화(愚民化) 정책에 기초하고 있어서 조선인은 고등교육이 제한되어 있었고, 학생들의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자치활동 등은 금지되어 있었다. 그리고 일본인 교사들의 민족적 차별과 무시도 일상적으로 나타났다. 게다가 근대적 교육을 받은 조선인 학생은 자부심도 컸지만 이들의 사회 진출은 여전히 제한되어 있었으며 일자리도 많지 않았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이러한 학생들의 일제의 지배에 대한 반감이 분출된 것이며, 1920년대 후반 전 세계에 닥친 공황으로 노동자, 농민 등의 저항이 폭발적으로 분출했던 사회적 분위기도 학생시위의 전국적 확산에 영향을 끼쳤다.
학생들의 집단의식이 높아진 것도 하나의 배경으로 작용했다. 1919년만 해도 전국의 학교는 1,320개에 학생도 13만1,975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학교 설립이 늘어나면서 1920년대 후반에는 학교는 2,539개, 학생수는 58만7,951명으로 늘었다. 또한 1910년대만 하더라도 보통학교 최고학년인 제4학년의 평균연령은 15.5세였지만, 최고령은 27.11세, 최연소자는 10세로 나타나는 등 내부의 연령차가 크게 나타나 학생들의 동질감은 높지 않았다. 그러나 1920년대 이후에는 근대적 교육제도가 확산되면서 학생들의 세대적 동질성도 높아졌고, 이는 학생들의 집단의식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1920년대 들어서면서 학생들의 저항은 꾸준히 증가해왔다. 학생들의 가장 일반적인 투쟁 형태는 어떤 요구를 내세워 집단으로 등교나 수업을 거부하고 농성을 하는 동맹휴교였는데, 일제의 자료에 따르면 1921년 23건이었던 학생들의 동맹휴교가 1927년에는 72건, 1928년에는 83건으로 늘어났다. 1920년대 초반에는 학교 설비나 교규 개정 등 학내 문제가 주된 원인이었으나, 이러한 문제도 일제의 식민지배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므로 학생들의 항일의식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래서 1920년대 후반 학생들의 동맹휴교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 자체에 대한 저항으로 발전되었고, 그 투쟁 형태도 훨씬 조직적으로 나타났다. 예컨대 1927년과 1928년에 전국적으로 나타났던 동맹휴교에서는 ① 조선어를 교수 용어로 ② 조선 역사·지리의 교수 ③ 학우회의 자치권 획득 ④ 일본식민지교육 반대 ⑤ 조선인 본위의 교육 등의 요구가 제기되었다. 그리고 통신·선전·감시·연락 등의 부서를 갖춘 투쟁조직을 만들어 동맹휴교를 장기적이고 조직적으로 벌이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된 데에는 3·1운동 이후 사회주의 사상의 보급과 더불어 학생 조직이 크게 성장한 것이 영향을 끼쳤다. 1910년대만 해도 학생 조직은 지역별로 친목조직이나 비밀결사의 형태로 나타나는 데 그쳤으나, 1920년대에는 학교별로 독서회가 폭넓게 조직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교내 조직을 기반으로 1920년 5월 조선학생대회가 열리고, 그 뒤 조선학생회(朝鮮學生會), 조선공학회(朝鮮共學會),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의 조직이 만들어졌다. 1927년 신간회가 창립된 뒤에는 내부에 학생부를 설치하였고, 민족주의 계열의 조선학생회, 사회주의 계열의 조선학생과학연구회 등이 이를 중심으로 협력하였다.
이처럼 1920년대에 생겨나기 시작한 사회주의 독서회, 비밀결사의 활동으로 학생들의 항일운동은 투쟁 양상이나 내용에서 모두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도 광주 지역의 학생 비밀결사였던 성진회(醒進會)가 운동의 확산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성진회는 1926년 11월 3일 당시 조선공산당 전남지부 위원장이었던 강석봉(姜錫奉)과 청년학생부 책임지도원이었던 지용수(池龍洙)의 지도를 받아 왕재일(王在一)·장재성(張載性)·박인생(朴仁生) 등 광주고보와 광주농업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사상의 연구와 보급을 목적으로 하는 사상단체의 성격을 띠고 조직되었다. 성진회는 1927년 3월 비밀 유지를 위해 자진 해산하였으며, 학교별로 조직 사업을 펼쳐 광주고보·광주사범·광주농업·광주여고보에 조직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각 학교별 조직을 독서회로 개칭하고, 학교·학년·학급별로 조를 편성해 조직을 확대했다. 또한 각 학교 독서회를 지도하는 중앙기관으로서 독서회중앙본부를 설치하고 그 밑에 조사선전·조직교양·출판·재정 등의 부서를 두었으며, 장재성(張載性)이 중앙비서로 활동했다.
성진회는 1928년 광주고보생 이경채(李景采)가 조선독립을 주장하는 문건을 교내에서 배포하다가 경찰에 구속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동맹휴교 중앙본부를 결성해 광주고보의 동맹휴교를 조직적으로 이끌었다. 당시 광주농업도 광주고보의 동맹휴교에 연대하여 참여했으며, 광주고보 학생들의 동맹휴교는 5개월이나 지속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한 조직적 기반 위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은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로 벌어진 항일운동이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전국적인 시위운동의 확산은 1930년대 초반 노동자와 농민 등이 일제의 폭압적인 지배에 맞서 대중운동을 활발히 벌이는 데 선도적인 구실을 하였다. 학생들은 3·1운동이나 6·10만세운동 때에도 커다란 몫을 담당했다. 그러나 당시는 일부 학생들이 참여한 것이지 조직된 학생 대중이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 학생은 학교를 단위로 조직된 대중운동의 힘으로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이는 사회 각계각층의 대중운동 발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광주학생항일운동은 학생들의 투쟁형태가 동맹휴교에서 벗어나 가두시위로 발전했으며, ‘일본제국주의 타도’, ‘피억압민족해방 만세, ‘무산계급혁명 만세’ 등의 구호를 내세워 투쟁의 내용이나 의식에서도 크게 발전된 모습을 보였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학생들은 동맹휴교 등 집행행동을 활발히 벌여갔으나 192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학생들의 요구는 교육환경 개선이나 일보 교사 배척 등 학내 문제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후반부터는 ‘일제 식민지교육 반대’, ‘조선인 본위의 교육’ 등으로 사회구조적인 문제로 투쟁의 내용을 발전시켜가다가, 광주학생항일운동에서는 일제 타도와 민족 해방이라는 문제를 직접 제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광주학생항일운동은 그 투쟁을 전국적으로 이끌어갈 구심이 없어서 지역이나 학교들을 단위로 고립분산적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학생들이 ‘일제 타도’를 내세우고 앞장서서 투쟁을 벌였지만 원산총파업(元山總罷業) 등 당시 활발히 전개되던 노동자, 농민들의 대중운동과 효과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이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5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전국적으로 진행되었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신간회가 민중대회를 열어 학생들의 시위운동을 노동자·농민들의 대중운동과 결합시키려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광주학생항일운동 이후 학생운동은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한 대중운동보다는 비밀결사를 중심으로 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그래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여파로 1930년과 1931년에는 100여건 이상의 동맹휴교가 벌어지지만, 1932년 이후에는 학생들의 집단적인 움직임은 크게 감소하였다. 여기에는 노동계급 중심의 민족해방운동을 강조하며 신간회의 해체를 가져온 코민테른 집행부의 노선 변화도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난 11월 3일을 1953년 10월 20일 ‘학생의 날’로 제정하여 기념하였다. 학생의 날은 1973년 3월 30일 기념일 간소화 방침으로 폐지되었으나 1984년 9월 19일 부활되었다. 그리고 2006년 2월 9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로 명칭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광주학생항일운동
발생시기
주요사건
1920년 5월
조선학생대회가 열리고 조선학생회, 조선공학회, 조선학생과학연구원 등 학생 조직이
만 들어짐.
1926년 11월
광주 지역 학생 비밀결사인 성진회가 조직됨.
1927년
신간회 내부 학생부가 만들어짐.
1927년3월
성진회, 비밀 유지를 위해 자진 해산하고 학교별 조직 사업으로 항일활동 방향 전환.
1928년
광주고보생 이경채가 조선독립을 주장하는 문서를 교내에서 배포하다가 경찰에 구속
당하자 성진희 주도 하의 동맹휴교가 일어나 약 5개월 간 지속됨.
1929년10월30일
광주에서 나주로 가는 통학열차 안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 학생들 간 충돌 발생. 일본 경찰이 조선인 학생들 구타.
1929년 11월 3일
일왕 매이지의 생일인 명치절 행사에 참여한 학생들이 행사 이후 광주 시내에서 항의 시위를 벌임. 일제가 광주 시내 모든 중등학교에 휴교령을 내리고 시위 참여 학생 수 십 명을 구금하며 대응.
1929년 11월 7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의 권유군∙박일, 조선청년동맹의 부건 등이 광주로 내려와 학생 운동 확산에 대해 협의.
1929년 11월 11일
각 학생단체 들이 격문을 살포.
1929년 11월 12일
광주고보, 광주농업학교, 광주여고보, 광주사범학교 학생들 등 수많은 학생들이 광주 시내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임. 수 백 명의 학생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구금 되었으며 인접 지역으로 소식이 알려짐.
1929년 12월 2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 학생저전위동맹 등의 단체가 광주에서 일어난 학생 시위 소식을 전하며 서울에서 시위를 조직하며 격문을 살포.
1929년 12월 5일
격문에 호응하여 경성제이고보의 동맹휴교를 시작으로 경성제일고보, 중동, 경신, 보성, 중앙, 배재, 이화, 협성실업 등에서 동맹휴교가 이어짐.
1929년 12월 9일
경신학교, 보성고보, 중앙고보, 휘문고보, 협성실업학교 등의 학생들이 가두시위를 벌이고 나흘 간 이어짐. 약 1만 2000여 명의 학생이 시위에 참가, 그 가운데 1400여 명이 경찰에 체포 됨.
1929년 12월 13일
신간회가 근우회, 조선청년총동맹, 조선노동총동맹 등과 함께 학생 시위를 확산시키기 위한 대규모 민중대회를 개최하려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 됨. 학생 시위가 이어지자 일제는 겨울방학을 조기에 실시해 학교를 폐쇄.
1930년 1월 15일
수 천 명의 학생들이 참가한 가두시위가 사흘 간 이어짐. 전국 각지 학생들이 동맹휴학과 가두시위로 이에 호응하였으며 국외에 있는 유학생들도 시위 운동을 조직하기 시작.
1930년 3월
1600여 명의 학생이 구속, 580여 명의 학생이 학교에서 퇴학, 2330여 명이 무기정학을 조치를 받으며 시위가 잦아듦.
1927년2월 '민족 유일당 민족 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하여 창립한 민족 운동 단체이다.
안재홍·이상재·백관수·신채호·신석우·유억겸·권동진 등 34명이 발기했다.
정강정책은
1. 조선 민족의 정치적·경제적 해방의 실현,
2. 전민족의 현실적 공동 이익을 위하여 투쟁함,
3. 모든 기회 주의 부인 등이었다.
초대 정·부회장에 이상재와 권동진이 각각 추대되었으며,
35명의 간사와 하부 조직으로 총무·재무·출판·정치문화·조사연구·조직·선전 등 7개 부서를 두었다.
그러나 주요 직책을 민족 주의 진영에서 주도하여 사회 주의 진영의 불만을 샀다.
내부적으로 좌.우익의 갈등은 있었지만, 신간회는 민족적·정치적·경제적 예속의 탈피, 언론·집회·결사·출판의 자유의 쟁취, 청소년·여성의 형평 운동 지원,파벌주의·족보주의의 배격, 동양척식회사 반대, 근검절약운동 전개 등을 활동 목표로 삼아 전국에 지회와 분회를 조직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1930년에는 전국에 140여 개의 지회와 3만 9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으며,
일본에까지 조직된 각 지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일본의 '고등경찰요사'는 '배일선인' 가운데 저명한 인물은 거의 여기에 가입하였고…이들이 집회 등에서
하는 언동으로 보아 이 운동의 도달점은 조선의 독립에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당시 신간회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신간회의 세력이 이렇게 성장하자, 일제의 탄압이 거세져서 대규모 집회를 열 수 없었다.
1929년 11월 광주 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고 일제에 대해 학생 운동의 탄압을 엄중 항의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독립 운동을 지향한 민중 대회를 열 것을 계획했다가,
조병옥·이관용·이원혁 등 주요 인사 44명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인사 가운데 조병옥 등 6명은 실형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신간회의 뿌리가 흔들리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만든 단체였지만,
민족주의 진영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데 대해 사회주의 진영의 불만이 높았다.
이들은 신간회의 주요 간부들이 투옥된 사이를 이용하여 해산 운동을 벌였으며,
1931년5월, 조선 중앙 기독교 청년회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소를 결의함으로써
1926년6월10일, 조선의 마지막 국왕인 순종 황제의 인산일(출상일)을 기하여 일어난 독립 운동으로
'병인 만세 운동'이라고도 한다.
주동자는 연희 전문의 이병립,박하균,경성 대학의 이천진,천도교의 박내원,권동진,양재식,손재기,박내홍,
백명천,YMCA의 박두종,중앙 고보의 이선호,이광호,이황희,사회주의 측의 권오설,김단야, 이지탁,박민영,
인쇄직공으로 민창식,이용재,김항준 등이었다. 권오설은 자금을 조달하였고 박내원은 전단지 살포와 연락을 담당하였다.
양재식,이용재,백명천 등은 안국동 감고당 민창식의 집에서 10만매의 전단지를 인쇄하였고,태극기도 준비하였다.
전단의 내용은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맡겨라,
일본 제국주의를 타파하라,
토지는 농민에게 돌리라,
8시간 노동제를 채택하라는 내용을 담았다.
그리고 3·1운동과 같은 독립 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시민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황제 국장일을 거사일로
택하였다. 조선 황제의 국장일을 맞아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부는 과거 3·1운동의 일을 거울 삼아 매우 민감하게
경비에 대비하였다.
조선 총독부 산하 전경찰과 일본군 5000여명이 경비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이날 오전 8시30분경 황제의 상여가 종로 단성사 앞을 통과할 때 중앙 고보생이 전단을 뿌리며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였다.
이에 모든 민중이 호응하여 관수교,황금정 3정목(3가),훈련원,동대문 동묘(東廟),청량리에 이르는 상여통과 예상 연도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만세 운동은 그 후 전국으로 전파 확산되어,순창,군산(전라북도),정주(평안북도),홍성,공주(충청남도) 등지
에서도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사회주의 계열의 권오설, 박내원, 민창식 등은 상하이에 있는 여운형과 연락하여, 전국적인 민족운동으로 확산시키고자 전단 10만 매를 인쇄하며 준비하다가, 일본 경찰에 사전에 발각되어 체포되고 말았다. ‘6·10 만세운동’으로 서울에서 이병립, 박하균 등 200여명이 체포되었고,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이 동모자 또는 관련자로 체포, 투옥되었다. 이 만세운동은 3·1 독립운동만큼 전국적이지는 못했으나, 여전히 우리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욕망이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민족운동이었다.
1921년6월28일,노령 자유시(알렉셰프스크)에서 3마일 떨어진 수라셰프카에 주둔 중인 한인 부대인 사할린 의용대를 러시아 적군 제29연대와 한인 보병 자유대대(이하 자유대대)가 무장 해제 시키는 과정에서 서로 충돌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과 상해파 고려 공산당의 파쟁이 불러일으킨 한국 무장 독립전 사상 최대의
비극적 사건이다.
사할린부대·이항 군대 라고도 불린 사할린 의용대는 이항(니콜라예프스크)에서 트라피친의 적색 빨치산과 함께 일본군을 대파한 한인 부대로서,이들이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자유시로 들어왔을 때, 당시 자유시에는 자유대대 외에도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최진동의 도독부군 등 간도 지방에서 이동해온 한인무장 부대가
집결해 있었다. 사할린 의용대의 실력자 박이리아는 자유대대의 오하묵·최고려 등과 군통수권을 둘러싸고 대립하게 되었다. 자유대대는 원래 대한 국민의회 휘하의 무장 부대였다가 러시아 극동 공화국 인민 혁명군 제2군단에 편입된 한인 부대이며, 대한 국민의회는 상해 임시 정부와 이동휘의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대해 비판적인 이르쿠츠크파계였다.
그러나 당시 극동 공화국 한인부에는 상해파의 이동휘계 인물인 박애·장도정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박이리아는 군통수권 장악을 위해 이르쿠츠크파와 반목하는 이들 상해파와 손을 잡고, 휘하부대와 간도에서 온 독립군 부대를 자유시 근처 마사노프로 이동시켰다.
코민테른 동양 비서부는 양 파의 대립을 조정하기 위해 고려 혁명군정의회를 결성,
적군 빨치산 영웅 갈란다라시윌린을 의장 겸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군통수권을 책임지도록 했다.
박이리아는 이에 불복했으나,홍범도·안무의 부대가 마사노프에서 자유시로 빠져나오자 점차 고립되었다.
설득에 실패한 갈란다라시윌린은 29연대를 동원,
1921년6월28일, 수라셰프카로 이동해 있던 사할린 의용대에 대해 무장 해제를 단행했고 이때 자유대대도
29연대와 함께 행동했다.
당시 희생자수는 '재로고려 혁명군대 연혁'에는 사망 36,포로 864,행방불명 59명으로로, '간도지방 한국독립단의 성토문'에는 사망 272, 익사 31, 행방불명 250, 포로 917명으로 되어 있다.
당시 박이리아는 무사히 탈출했다.
고려군정 의회는 포로 심사를 거쳐 일부는 수감하고 나머지는 이르쿠츠크로 이동시켰으며,
다른 무장부대도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여 적군 제5군단 산하 1개 여단으로 편성되었다.
자유시 참변은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또 각각의 입장에 따라 사건해석과 평가가 다르나,
상해·이르쿠츠크 양 파의 파쟁이 빚어낸 비극으로서 이후의 한국 공산 주의 운동에 악영향을 미쳤다.
국권상실 후 일제의 경제침략은 더욱 거세어 일본자본에 의해 우리 민족의 생활권은 잠식되어갔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에서 민족의 자각을 촉구해 민족의 단합된 힘으로 근대기업을 일으켜 자주·자립경제를 수립,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경제권을 수호하고자 하였다.
경제자립을 위한 민족적 자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3·1운동 직후부터이며, 1920년대 초부터 전국적인 규모로 전개되었다. 1920년 봄 평양기독교계의 민족지도자들은 민족기업의 건설과 육성을 촉구하는 조직체 결성을 논의하였다. 그 결과 이 해 8월평양야소교서원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발족하였다.
창립총회에는 평양의 유지 70여 명과 교육자·종교인·실업인 및 혁신 청년들이 참석하였다. 평양 조선물산장려회는 장문의 취지서를 발표하고 당면 실천과제로서 경제계의 진흥, 사회의 발전, 실업자의 구제책, 국산품 애용, 근검 풍토, 실천성의 양성을 내세웠다. 평양에서 결성된 물산장려회는 몇 차례의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와 같이 평양에서 조선물산장려를 위한 조직체가 결성되자, 서울의 조선청년회연합회에서도 이 운동에 호응해 1922년말 부터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즉, 일간지를 통해 전국의 민중으로부터 조선물산장려 표어를 모집했으며, 국산품 애용을 장려하는 지방순회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청년회의 활동으로 물산장려운동의 기풍은 점차 민중 속에 확산되었다.
1923년 1월서울 낙원동협성학교(協成學校) 강당에서 조선물산장려회의 전국적 조직체가 탄생되었다. 창립총회에서 이사 20명을 선출했는데, 독립운동가·교육자·종교인·기업인 등 각계각층의 민족지도자가 망라되었다. 이 회의에서 회의 조직과 활동 방향이 정해졌다.
활동 지침으로, 첫째 조선인의 산업적 지능을 계발, 단련해 실업에 입각하게 하는 산업 장려, 둘째 조선인의 산품을 애용, 무육(撫育)해 조선인의 산업을 융성하게 하는 애용 장려, 셋째 조선인의 생활 및 기타에 관해 경제적으로 건설 또는 개선하기 위해 일반 사항을 조사, 강구(講究)해 그 실현을 지도, 관철하는 경제적 지도 등의 목표를 정하였다.
또 제1기 실행 조건을 공포하여 대중계몽운동에 나섰다. 제1기 실행조건으로 우선 의복은 남자는 두루마기[周衣], 여자는 치마를, 음력 계해 정월 1일부터 조선인 산품 또는 가공품을 염색해 착용할 것, 음식물에 대해서는 식염·설탕·과일·청량음료 등을 제외하고는 전부 조선물산을 사용할 것, 일용품은 조선인 제품으로 대용 가능한 것은 이를 사용할 것으로 정하였다.
창립 후 첫 계몽활동으로서 그 해 2월 3일 서울 천도교당에서 대(對)민중강연회를 개최되었다. 설태희(薛泰熙)의 개회사에 이어 이종린(李鍾麟)의 사회로 개최되었는데, 연사에는 최순탁(崔淳鐸)·이갑성(李甲成)·이돈화(李敦化)·오화영(吳華英)이었고, 청중 2,000여 명이 입추의 여지없이 모이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이 강연회에 이어 조선물산장려회는 전국적 계몽활동을 계획하고, 또 구정을 기해 전국적으로 가두행렬을 실시하기로 하였다. 가두행렬에서는 조선 8도의 특산 포(布)로 기를 만들어 앞세우기로 하였다.
즉, 경기도는 강화 반포(班布 : 반베), 충청도는 한산 세저(細苧 : 모시), 강원도는 철원 명주(明紬), 전라도는 전주 우초(牛綃), 경상도는 안동 갈포(葛布 : 삼베), 황해도는 해주 백목(白木), 평안도는 안주 고라(古羅), 함경도는 육진 환포(環布)로 제작하였다.
그러나 구정을 기해 거행하기로 한 가두행렬은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또 전국을 순회하는 계몽강연도 일제의 방해로 지방에 따라서 강연 도중 연사의 발언이 중지되거나 붙잡히기도 했으나 초기에는 대체로 계획대로 진행되었다.
이와 같이 서울에 전국적 조직체가 결성된 뒤 강연회·전단살포 등에 의한 선전·계몽 활동이 전개되면서 각 지방에서도 지방분회를 결성하였다. 평양·대구·부산·광주·함흥 등 대도시뿐만 아니라 지방 소읍에까지도 지방분회를 설립했는데, 그 호응도는 오히려 더 열렬하였다.
중앙본부에 해당하는 서울의 조선물산장려회는 이 운동을 더욱 효과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소비조합 및 생산기관의 설치, 조선물산진열관의 설치와 조선물산품평회 개최, 계몽을 위한 기관지 발행에 착수하였다.
이 중 그 해 3월 이사회에서 소비조합 설립을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설립위원으로는 이순탁(李順鐸)·김철수(金喆壽)·나경석(羅景錫)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6월 전경성공산업자대회를 개최해 조선물산진열관건립 실행위원을 선출, 총 건평 450평 규모의 진열관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이 시기부터 탄압을 가중, 자금원을 봉쇄해 이 사업은 실현을 보지 못하였다.
회지 발행도 자금난으로 미루어 오다가 회지만은 조속한 시일 내에 발행해야 한다는 여론에 힘입어 같은 해 11월에 《산업계 産業界》를 창간하였다. 《산업계》는 제5호까지 발행되고 그 뒤부터는 《자치 自治》로 개칭되어 12호까지 발행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다시 《조선물산장려회보》·《장산 奬産》·《실생활 實生活》 등으로 개칭되면서 1932년까지 간행되었다. 회지 간행을 1930년 초에 중단한 것은 일제가 만주침략을 감행한 뒤 한국의 민족운동탄압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일제는 이 운동을 일종의 일화(日貨)배척운동이며, 항일민족독립운동으로 보고 탄압하였다. 그 뒤 조선물산장려회는 특별한 활동 없이 명맥만 이어졌다.
이 운동은 3·1운동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민족역량 개발을 목적으로 하였다. 동시에 민족기업의 활동을 대변해주고 민족기업의 설립을 촉진한 경제자립운동이었다는 데에서 의의를 찾츨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