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산 지청천            2019.11.02.토요일,맑음

1920년 대 초반, 항일 무장 투쟁을 선언한 독립군들은 홍범도와 김좌진 등의 활약으로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독립군에게 패한 뒤 더욱 집요해진 일본군의 보복과 1921년에 일어난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들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그래도 살아남은 독립 투사들은 다시 심기일전해 새로운 독립 운동단체를 조직해서 항일 무장 투쟁의 맥을 이어갔다.


지청천은 자유시 참변 이후 여러 독립 운동 단체들을 결성하고 이끌었던 대표적인 항일 무장 투쟁 지도자

중에 한 명이었다.

지청천은 일본 육사 출신의 장교였으나 3·1운동 이후 귀국해 독립 운동에 뛰어든 열혈 청년이었다.


그는 1888년에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지석규 혹은 지대형으로 알려져 있는데, 독립 운동을 시작하면서 지청천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명 이청천이라고도 한다.


그의 집안은 조선에서 대대로 무관을 지낸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지만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지청천은 19세가 되던 1907년에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런데 이미 일제가 조선 군부를 유명무실하게 만든 뒤여서 군인 양성소인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결국 1909년에 폐교 조치가 내려지면서 지청천을 비롯한 40여 명의 육군 무관학교 학생들은 일본의 동경

육군 중앙 유년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그러다 1910년에 한일병합이 되면서 일본 육군 사관학교에 편입되었다.


1914년에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지청천은 한동안 일본 장교로 복무하며 실전 감각을 익혔다.

그러다가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탈영해 만주로 망명했다.

지청천은 독립군 중에서 유일하게 정규 군사교육을 받은 엘리트 출신으로, 실제로 독립군 양성과 지휘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만주로 망명한 지청천은 신흥 무관학교에서 독립군 양성의 첫 발을 내딛었다.

신흥 무관학교는 1911년에 이시영,이회영 형제가 남만주에 설립한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사학교다.

그런데 청산리 전투 이후 일본군의 독립군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면서 1920년에 폐교하게 되었다.

지청천은 신흥 무관학교에서 양성한 군사들을 이끌고 서로군정서에 편입한 후

1921년1월에 연해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지청천은 대한 독립군단의 군사 고문으로 있다가 그해 5월 자유시로 이동했다.

1921년6월, 자유시 참변이 일어나 대한 독립군단에 소속되었던 많은 독립군 부대가 피해를 입었다.

이때 지청천은 홍범도와 마찬가지로 중립적인 위치에서 레닌 적군과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덕분에 지청천의 부대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러나 이르쿠츠크로 넘어간 이후에 소련 공산당과 갈등이 생겨 체포되었다.

사형 선고까지 받았던 그는 가까스로 빠져나와 1922년에 만주로 돌아왔다.

탈출했다는 말도 있고, 독립운동 지도자들의 구명 운동 덕분에 풀려났다는 말도 있다.


만주로 온 지청천은 다시 여러 항일 독립 운동단체를 결성해 이끌어갔다.

그는 1924년에 양기탁,오동진 등과 함께 정의부를 결성하고 군사 위원장 및 사령관을 맡았다.

정의부는 임시 정부의 형태를 띤 독립 운동단체로 항일 무장 투쟁과 함께 만주 지역 한인 거주민에 대한

교육 및 경제 자활 사업을 실시했다.

정의부는 신민부,참의부와 더불어 당시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단체들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


이들 세 단체는 1928년에 통합을 시도했다.

지청천은 혁신의회의 군사위원으로서 세 단체의 통합에 앞장섰다.

그러나 단체들 간의 주도권 경쟁으로 통합은 실패로 돌아갔고 정의부도 해체되었다.


그러자 지청천은 1930년에 이동녕,김구 등과 함께 민족주의 계열 독립운동 정당인 한국 독립당 창당에 참여했다. 한국 독립당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구성하는 주요 세력이었다.

이때부터 여러 독립 단체들은 정당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주로 북만주에서 활동을 했던 지청천도 이러한 정당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무장 독립 투사에서 정치인으로 변신을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장 투쟁을 멈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이전보다 더욱 활발하게 무장 투쟁을 펼쳤다.


특히 1931년에 일어난 만주 사변을 계기로 항일 무장 투쟁에 박차를 가했다.

만주 사변은 일본이 만주의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무력 도발한 사건이었다.

지청천은 한국 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중국 의용군과 연합해 자주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특히 1933년에는 대전자 전투에 참가해 큰 승리를 거두었다.

중국 측과 연합하기는 했지만 이것은 1930년대에 들어 우리 독립군이 거둔 가장 큰 전과였다.


이후 지청천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중국 본토로 이동했다.

그리고 1935년에 한국 독립당에 내분이 생기자 탈당해 김원봉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민족 혁명당에 참여했다. 민족 혁명당은 임시 정부를 견제하는 야당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김원봉이 좌익 경력자들을 포용하는 유화책을 펼치자 지청천은 이에 반발해 갈등하다가 탈당했다. 지청천은 1937년에 다시 김구 세력에 합류해 임시 정부의 군사 부문을 책임지게 되었다.

    

1919년에 중국 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제의 강제점령에 대항해 3권 분립의 민주공화정부를 표방하며 각종 광복 정책을 수립, 시행했다. 그런데 1920년대 초 임시정부가 자리를 잡지 못하자 계파 간에 분열이 일어나 위기에 봉착하였다. 임시정부 참여자들은 갈등을 조정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보고자 국민대표회의를 결성했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의 논의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임시정부는 유명무실한 존재가 되었다.


그러다가 1927년에 김구가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면서 다시 한 번 도약의 계기를 맞았다.

김구는 비밀 결사조직인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고, 일본 요인 암살 등 임시정부의 특수공 작 임무를 맡겼다. 그 결과 1932년에 이봉창 의거, 윤봉길 의거 등의 의열투쟁을 성사시켰다. 이 일로 중국과 연합을 구축하는 등 임시정부의 무장 투쟁이 가시적 성과를 이룩하기 시작했다.


지청천은 김구와 함께 한국 독립당 창당에 참여했다가 탈당하기도 했으나 결국 다시 김구에게 협력해 임시정부의 군사 부문을 이끌어 갔다.


한편 1937년에 발생한 중일 전쟁으로 자극을 받은 임시정부는 대외적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할 독자적인

군대의 창설을 준비했다.

그 결과 1940년 9월에 충칭에서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한국광복군은 10개 처,2개 대의 총사령부와 3개의 지대로 조직되었다.

지청천은 광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광복군은 모병과 선전 활동을 하면서 항일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광복군이 창설되고 1년이 넘도록 광복군을 독자적인 군으로 승인하지 않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다. 애초에 광복군은 중국 정부의 승인과 원조를 받아야 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중국 정부는 광복군을 중국군의 지원군 형태로 남겨두려고 했다.

결국 임시 정부는 한국 광복군을 중국 정부로부터 광복군의 승인을 받았다.


1941년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일 선전포고를 하는 등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내세운 행동 준승 준수 조건 때문에 행동의 제약을 받았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의 완전한 자주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1944년 8월, 행동 준승의 폐기를 약속받았다.


이때부터 지청천은 광복군을 직접 사열하며 항일전을 준비했다.

1945년8월에는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국내정진군을 편성해 국내 진입을 서둘렀다.

그러나 8월 15일 히로시마 원폭으로 전쟁 의지를 잃은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면서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하고 광복을 맞이하였다.

일본과의 결전으로 조국의 독립을 직접 쟁취하려던 광복군은 끝내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조국이 독립하자 광복군은 해체되었다.

지청천은 1947년에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광복군을 재건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연합군이 광복군을 교전 단체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편 지청천은 귀국 후 이승만 정권과 손잡고 대동청년단이라는 우익 청년단체를 결성해 활동했다.

이때부터 대한민국 건국에 앞장선 정치인으로서 그의 행보가 시작되었다.

그는 독립촉성국민회 최고위원, 한중협회 회장 등을 거쳐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초대 무임소 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됨으로써 재선의원이 되었으며,

1951년에는 제2대 부통령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국회 전원위원회 위원장, 국회 외무위원회 위원장, 국회 국방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대한 군인 유가족 회장, 반공 통일연맹 최고위원 등을 거치면서 반공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57년에 자택에서 69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 한국 광복군 결성                2019.11.02.토요일,맑음

1940917일,한국 광복군은  중국 충칭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다.

임시 정부의 한국 독립당을 기반으로 지청천과 이범석 등이 이끄는 만주 지역의 무장 세력이 연합하여 한국광복군은 결성되었다.


9월의 독립 운동가 나월환이 제5지대장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곳이자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가 된

한국 광복군.

19194월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무장 투쟁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군대를 편성하고자 하였는데,

1919년 대한민국 육군 임시 군제를 제정하여, 군대의 편제와 조직에 관한 법규를 마련하였다.

그리고 육군 무관학교를 설립해 자체적으로 군사 간부를 양성하여 만주 지역 독립군을 관할 하에 두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역적 차이와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한국의 항일 무장 투쟁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국 정부의 지원과 협조를 받게 되었다.

임시 정부의 주석 김구 선생은 1934년에 뤄양 군관학교(낙양)서 한인 특별반을 운영하였으며,

중국의 중앙 육군 군관학교에서도 한국 청년들을 입교시키는 등 군사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 정부는 군사 위원회를 설치하여 한국 광복군 창설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일본군의 점령 지역이 중국 대륙으로 확대함에 따라 임시 정부는 여러 곳으로 피난처를 옮겨 다니는 등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결국 1940917일, 중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 정착하게 되면서 한국 광복군이 창설되었다.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 전례식은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거행되었으며,

총사령관 지청천,참모장 이범석,총무처장 최용덕,참모처장 채원개,부관처장 황학수,경리처장 겸 정훈처장 안훈,훈련처장 송호,군무처장 유진동 등이 각각 임명되었다.

백범 김구는 광복군 선언문을 통해 광복군은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제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광복군 창설의 취지를 천명하였다.


한국광복군은 창립 초기,총사령부 예하에 4개 지대를 편성하게 되었다.

1지대장에 이준식,2지대장에 김학규,3지대장에 공진원,5지대장에는 9월의 독립 운동가인 나월환 선생이 임명되었다.


광복군은 병력 모집을 위한 기구로 5개의 징모분처를 설치하여 산서성·수원성·절강성·안휘성 등지로 대원들을 파견하였다. 이들은 일본군 점령 지역으로 들어가 그곳에 있는 한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초모 공작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광복군 창설 1년여 만에 3백여 명에 이르는 병력을 모집할 수 있었다.


1941128일,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미.일간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1941년1210일,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하였다.


19425월, 김원봉 선생이 주도하던 조선 의용대가 광복군 제1지대로 편제되었으며,

기존의 4개 지대였던 광복군은 2개 지대로 개편되었다.

이후 19456월 안휘성 부양에서 초모 활동을 전개하던 징모 제6분처가 제3지대로 편제되면서 모두 3개 지대 갖추게 되었다.

 또한 광복군은 중국에 파견되어 있던 미국 전략사무국과 협약을 맺고 특무 공작훈련을 실시하였다.

김구 선생은 미국의 미국 전략사무국(OSS) 책임자와 한·미간 공동 작전을 협의하고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였으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 선언으로 직전을 취소하였다.


일본이 항복한 이후, 광복군 중국 지역에서 일본군으로 끌려 나왔던 한국 청년들을 편입시키면서 군세

확장을 추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미군정 당국이 임시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고, 광복군에 대해서도 무장 해제를 요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할 수 밖에 없었고,광복군도 무장을 해제한 상태로 귀국할 수밖에 없었다.결국 한국 광복군은 19466월 해체되었다.


한국 광복군은 31운동 이후 한국의 통일 정부를 자처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정규군이었다.

당시 의병과 비정규군만으로 항일무장 투쟁을 펼치던 독립 운동의 흐름에서 탈피,정규 중앙군으로서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또한 외교선전의열 투쟁 등에만 국한되어, 그 활동에 한계가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명실상부한

정규 군사력을 상징하는 존재로 자리매김 하였다.

 그러나 한국 광복군은 중국 충칭에서 결성되어 중국 정부의 창설 승인을 받아야만 했다.

이에 대한 조건으로 한국 광복군 행동준승 9개 조항을 강요 받아 중국의 지시를 따라야만 했다.

그리고 재정적인 지원도 중국 정부의 원조에 크게 의존해야 하는 형편이었다.

재정적인 압박으로 광복군은 전차나 야포 같은 중화기나 비행기전함과 같은 장비도 없었으며,

심지어 개인화기도 부족했을 정도였다.

19448월, 임시정부에서 통수권을 인수하는 등 명실상부한 정규군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 동아일보,조선일보 폐간         2019.11.02.토요일,맑음

1936년8월9일,손기정과 남승룡이 출전한 독일 베를린에서 제11회 올림픽이 열렸다.

손기정이 1위로 골인했다는 소식과 함께 825일자 동아일보에 월계관을 쓰고 수상대에 오른 손기정 선수의 감격적인 사진이 실렸다.

일본의 주간지 ‘아사히 스포츠’를 뒤늦게 입수해 거기에 실린 사진을 복사하여 전재한 것이다

그런데 초판 때는 일장기가 선명하게 보였으나, 놀랍게도 재판에서는 원본과 달리 유니폼 가슴 부위의 일장기가 교묘히 삭제되어 있었다.


일장기 말소는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32년 김은배가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6위 입상할 때도 눈에 거슬리는 가슴의 일장기를 말소한 일이 있었다. 그 당시는 총독부의 트집 없이 넘어갔다.

 

그러나 그 때와는 사뭇 분위기는 달랐다.

결국 이튿날 서울에 부임한 미나미 총독은 향후 6년간 저지를 조선 압살 정책의 첫 제물로 동아일보에 829일자로 무기 정간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관련된 인물들이 줄줄이 연행되었고,송진우 사장 등 많은 인물들이 강제로 사직하게 되었다.


193777일, 일제는 북경 노구교 사건을 일으켜 중국 침략과 동시에, 조선인을 대륙 침략에 동원했다.

황민화 운동,조선어 교육 폐지에 이어 1940년에는 창씨 개명까지 강행하면서 유례없는 민족 말살정책을 폈다.

1937년, ‘일반검열기준’을 만들어 총독부는 19396월, 다시 ‘편집에 관한 희망 및 주의사항’을 추가했다.

언론탄압의 검열 기준은 자의적으로 정할 수 있게 되었고 폐간도 어느 때나 가능하게 되었다.

 

동아일보의 제4차 정간은 11개월 만에 풀렸지만 이후의 검열 강화 등 다양한 형태의 간섭으로 정상적인 신문제작이 불가능한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19382월에는 총독부의 강요에 따라 모든 신문은 ‘조선 춘추회’라는 어용 단체에 가입해야 했다.

 

19399월,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였고,일제는 조선인의 황민화를 모토로 민족말살정책을 강화해 나갔고 결국 11월부터 총독부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본의 자진 폐간을 종용하기 시작하였다.

자진 폐간의 기미가 보이지 않자 1940115일, 총독부는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를 불러 자진 폐간에 응한다면 총독부가 전 사원에게 1년치 봉급을 지급하고 윤전기 등 인쇄 시설을 사들이겠다고 제안했다.

 

두 신문이 말을 듣지 않자 총독부는 7월 들어 용지 통제권을 발동하여 신문 용지 배급량을 줄였고 신문사 간부들을 연행하여 폐간을 종용했다.

결국,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1940년810일, 일제의 폐간령에 따라 폐간계를 낼 수밖에 없었다.

두 민족지의 폐간으로 조선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일문판 경성일보와 한글판 매일신보만이 남게 됐다.

20년 만에 다시 우리 신문 없는 언론 암흑시대가 찾아온 것이다.

 

동아일보는 1940 811일, 최종호를 발행하고 12일 해산식을 가졌다.

사옥관리를 위한 법인인 ‘동본사(東本社)’를 1943 1월에 발족했다.

그리고 폐간 5 4개월 만인 1945 121일 복간되었다.


조선일보는 회사의 목적을 변경하여 의료사업을 경영하고 동방문화학원(육영재단법인)에 사옥을 기부하되

'조광', '여성','소년'은 계속 발행한다고 밝혔다.


 

⊙ 창씨 개명     20169.10.31.목요일,맑음

1931년9월18일,만주 침략 이후부터 일제는 군 병력을 증가시켜 한국에 대한 탄압 무력을 강화한 다음,

한국 민족 말살 정책의 하나로 한국어를 말살시키는 것이 한국 민족 말살의 모체라고 판단하고,

한국어 말살에 강화하였다.


일제는 관청에서는 한국 농민의 민원도 일본어를 사용할 경우에만 접수하도록 하였고,

사립 학교에서의 한국어 교육과 한국어 사용을 엄금하였다.

또한 1935년 부터는 한국 문자를 농민들에게 가르치는 계몽 운동을 총독부령으로 엄금하고,

1937년,중국 침략 때 부터는 한국인들의 일상 생활에서 조차 한국어 사용을 금지하여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명령하였다.심지어 국민학교 학생들이 한국어를 사용하는 경우 매질과 벌칙을 과하였다.

그리고 한국어로 간행되는 신문과 잡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정간 등 탄압을 가하다가,

1936년에는 '신동아'를 폐간시켰으며,

또한,한국인의 성명을 말살하고 일본식 이름을 짓도록 하는 이른바 ‘창씨 개명’을 1937년부터 본격적으로 강행하였다.

1940년에는 '동아일보''조선일보' 등 모든 한국어 신문들을 폐간 시켰으며,

1938년,한해에만도 전국에 3,660여개의 일본어 강습소를 만들어 한국 농민들에게 강제로 일본어를 배우게

   하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였다.

   일제의 한국어 말살과 일본어 전용정책이 한국인들의 저항으로 진전되지 않자 그 씨를 없애야 한다며

1939년에는 '조선민사령'을 개정하여 전한국인에게 강요하는 파쇼적 방법으로,

일제는 1940년까지 한국인의 성명 말살과 ‘창씨개명’을 강행하였다.

일제는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은 한국인에 대해서는 자녀의 학교 취학을 못하게 하고, 학생들에게 매질을 가하였으며, 직장에서 채용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심지어 우편물 수송까지 금지시켰으며,경찰관 주재소로 호출하여 응할 때까지 무기한 구류해 두고 박해를 가하였으므로  불응하고는 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없었다. 

1941년에는 '문장''인문평론' 등 모든 한국어 잡지들을 폐간 시켜 버렸으며,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회원과 학자들까지 체포,투옥하였다.




⊙ 김법린과 만당 사건                                     2019.10.31.목요일,맑음

만당(卍黨)은 1930년 5월에 범어사 출신 승려 등이 조직한 불교계 비밀 결사 조직으로,

항일 투쟁과 불교 개혁 운동을 목적으로 조직되었다.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공개적인 활동을 할 수 없는 현실에서 비밀 결사의 형태를 취하였다.


1930년5월,이용조·조학유·김상호·김법린 등으로 1차 결사가 조직되었다.

이후 조은택·박창두·강재호·최봉수 등이 합류하여 2차 결사를,

박영희·박유진·박근섭·한성훈·김해윤 등의 불교 전문학교 학생들이 합류하여 3차 결사를 조직하였다.


일본 도쿄에서도 김법린을 책임자로 하는 지부를 두었다.

전체 당원이 80여명이었지만 신원을 알 수 있는 사람은 24명에 불과하였다.

이 가운데 범어사 출신은 김상호·김법린·조은택·허영호·차상명·김경홍이었고,

범어사 불교 유학생 출신은 박창두였다.


1932년 가을부터 조직 내부의 의견 충돌을 보이다가 1933년 해체되었다.

1938년 김법린·최범술 등이 체포되면서 만당의 조직이 드러났다.

하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사건은 종료되었다.


만당의 주요 활동은 1930년대 불교계의 핵심적인 현안인 정교 분립과 교정 확립 및 불교 대중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불교 개혁 운동을 확대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조선 불교 청년회'의 조직을 '조선 불교 청년총동맹'으로 전환하는 사업에 만당도 참여하였는데, 김상호는 7인으로 구성된 추진 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일제 강점기 불교계의 항일 운동과 개혁 운동에 범어사 출신의 승려들이 적극적으로 활약하였다.


⊙ 손기정과 일장기 밀소 사건          2019.10.31.목요일,맑음

손기정(); 1936 베를린올림픽의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생졸; 1912 ~ 2002.11.15.


1936년8월9일, 독일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 운집한 12만 명의 관중들은 곧이어 스타디움으로 들어올

마라톤 우승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림픽의 마지막 공식 경기이며, 그야말로 올림픽의 꽃이라고 할 마라톤 우승자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지대했다.

특히 이 베를린 올림픽에서는 더 그랬다. 독일 국민들을 선동하여 광적인 나치즘으로 몰고 가던 히틀러

아리아 인종이 마라톤에서 우승하는 장면을 독일 국민들이 목격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인종 주의적 주장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그러나 결승점인 올림픽 스타디움에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아리아인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독일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인도 아니었다.

그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온 작고 깡마르고 머리를 바싹 자른, 감정의 거의 드러나지 않는 표정의 마라토너, 손기정이었다.


손기정이 1등으로 스타디움으로 들어왔을 때 이를 중계했던 장내 아나운서의 멘트이다.

당시 독일의 중계 아나운서는 그가 일본국적에 '손기테이'란 묘한 이름으로 올림픽에 참가하긴 했으나,

그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스타디움 안으로 달려온 손기정은 장내 트랙을 한 바퀴 마저 돌며 마라톤 42.195km의 마지막을 채웠다.

운집한 관객들을 그의 마지막 질주를 숨죽여 지켜보았다.

결승선에 도착하기 전 그의 마지막 100m 기록은 11초였다.

전력을 다해 뛰어가는 동양에서 온 작고 다부진 마라토너. 그의 얼굴엔 표정이 거의 없었다.

그는 마지막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고 담담하고 묵묵하게 결승선을 통과했다.

2시간29분19초2. 신기록이었다.마의 2시간 30분대를 넘어선 것이다.

세계 무대에 알려진 바 없는 동양에서 온 청년 마라토너는 세계인들 뿐만 아니라 아라아 인종의 우월성을

과시하려 했던 나치들마저도 감동하게 했다.

히틀러는 기꺼이 그와 악수하려 하였고 히틀러를 도와 인종 주의적인 다큐멘터리 '올림피아'를 제작하던

독일의 영화 감독 레니  리펜슈탈은 3시간 짜리 다큐멘터리 중에 10분 이상을 손기정의 뛰는 모습으로

채웠다. 그녀는 손기정을 자신의 집에 초대했으며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어했다.


손기정은 1912년 신의주에서 태어났다.

소학교 다닐 무렵 해일로 인해 집안이 몰락한 손기정은 어린 시절부터 장사에 나서야 했으며 소학교를 졸업한 뒤 16세 무렵에는 중국 단둥의 회사에 취직했다.

이 무렵 손기정은 차비가 없어서 신의주-압록강 철교-단둥에 이르는 20여 리 길을 달려서 출.퇴근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난이 그의 체력 단련에 도움이 된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달리기 뿐만 아니라 운동에 소질을 보였다.

품팔이와 배달일로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손기정은 겨울에 얼어붙은 압록강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학생들을 무척 부러워했다고 한다. 자신에게 스케이트를 살 돈만 있었다면 스케이트 선수를 했지 마라톤은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운동 소질을 발휘할 길은 경비가 들지 않는 달리기뿐이었다.


손기정은 소학교 6학년 때 안의전(중국 안동과 신의주 간 대항경기)에 출전하여 어른들을 제치고 5,000m

에서 우승하였고 1931년10월에는 전국 체육대회(조선 신궁 대회)에 평안북도 대표로 출전하여 5,000m

에서 2위를 하였다. 이듬해 1932년 동아일보 주최 하프 마라톤에서 2위를 하면서 이 인연으로 양정 고보에 입학하게 된 손기정은 중단했던 학업을 계속할 기회를 얻고 본격적으로 마라톤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그저 혼자서 달리는 것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선수로서 훈련을 받은 손기정의 실력은 나날이 성장하였다.

손기정은 1933년부터 1936년까지 13번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고 그 중 10번 우승했다.

그리고 이러한 발군의 실력으로 인해 일본의 올림픽 국가 대표로 발탁되기에 이르렀다.


1936년8월9일.오후3시, 베를린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시작된 마라톤.이 경기는 왕복 코스를 도는 경기였다. 세계 각국에서 온 56명의 선수들이 함께 출발했다.

손기정은 양정 고보 선배이던 남승룡과 함께였다. 출발신호와 함께 선수들이 빠져나갔다.

손기정과 남승룡은 출발이 다소 늦었다. 손기정은 22번째, 남승룡은 49번째였다.

당시 세계의 주목을 받던 선수는 1932년 LA 올림픽의 금메달리스트였던 아르헨티나의 후안 카를로스 자바라였다. 자바라의 성급한 독주를 뒤에서 바라보면서 손기정은 자신의 기록과 페이스를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사전에 코스를 철저히 답사해 둔 것도 도움이 되었다.

결국, 30km지점 비스마르크 언덕 오르막에서 자바라는 뒤로 쳐지고 손기정과 영국의 하퍼가 1,2위를 다투며 앞섰다, 그 뒤를 남승룡이 따랐다.

그리고 31km 지점에서 손기정은 마침내 하퍼를 따돌리고 1위로 나섰다.

작은 러닝슈즈로 인해 발에 통증을 느끼면서 손기정은 남은 레이스를 1등으로 묵묵히 달려 영광의 마라톤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남승룡은 하퍼에 뒤이어 3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결승선 통과 후 손기정은 만세도 하지 않았고 환호도 부르지 않았다.

그저 레이스 내내 자신을 괴롭혔던 운동화를 벗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탈의실로 퇴장했다.

올림픽의 꽃인 마라톤의 금메달리스트가 보일 수 있는 태도는 전혀 아니었다.


시상대의 손기정과 남승룡도 마찬가지였다.

은메달을 딴 하퍼의 해맑음과 대조적으로 손기정과 남승룡은 우울해 보였다.

스타디움에 일장기가 오르고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흘러나올 때 월계관을 쓴 손기정과 남승룡은 더욱

고개를 숙였다.

손기정은 월계수 나무로 입고 있던 옷에 새겨진 일장기를 가렸다.

손기정은 의기 소침했고 슬퍼 보였다.

자신이 고통스럽게 발로 뛰어 얻은 이 영광이 조국의 것이 아니라 조국의 국권을 피탈한 일본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일본국적으로 나가서 딴 올림픽 금메달이었지만 손기정의 마라톤 우승 소식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는 한없는 기쁨과 희망이 되었다. 선수를 국제 대회에 내보내 놓고 언론 기자도 현지에 파견하지 못하는 식민지 언론사는 일본 신문에서 받은 사진으로 금메달 획득의 낭보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밖에 없었다.

손기정이8월9일, 금메달을 딴 뒤 나흘 후 8월13일에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 중앙일보'에 손기정의 시상식 장면을 찍은 사진이 한 장 게재되었다.


옆에서 비스듬히 찍은 원래 이 사진은 손기정이 월계수 나무로 일장기를 가렸음에도 불구하고 일장기가

확연히 보이는 사진이었다.

'조선중앙일보'는 인쇄 품질이 나쁜 점을 이용해 일장기가 흐려져 잘 보이지 않게 만든 다음 이 사진을 신문에 올렸다. 총독부는 인쇄의 문제로 생각하고 검열을 통과시켰다.

손기정이 입은 옷에 새겨진 일장기를 지워서 올린 신문 사진.

이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는 폐간하였고 '동아일보'는 무기한 정간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 일장기 말소 문제가 불거진 것은 8월25일 '동아일보'에 다시 한번 이 사진이 게재되면서였다.

당시 동아일보 체육부 기자이던 이길용은 사회 부장이던 현진건 등과 의논하여 손기정이 입은 옷에서

일장기를 완전히 지웠다.

이는 비록 일본의 국기를 달고 경기에 나가 금메달을 땄지만, 손기정은 어디까지나 조선인임을 자부하고

싶은 언론인들의 소심한 항거였다.

'동아일보' 기사는 총독부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고 소급하여 '조선중앙일보'의 기사도 문제가 되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조선중앙일보'의 사장 여운형은 책임을 지고 사장 자리에서 사퇴하였으며 신문은 폐간

되었다. '동아일보'는 간부 사직과 함께 이길용,신낙균,현진건 등 관련자들이 구속되었으며 무기 정간조치를 받았다. 이후 '동아일보'는 당시 기자들의 행동이 사측의 입장과는 다르다는 주장을 펴서 결국 정간을 풀고

9개월 만에 신문을 재발간 했다.

이 사건에 더하여 손기정은 월계수 나무로 일장기를 가리려 했다는 혐의를 받아.

이후 경기 출전이 금지되었으며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영광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지만 식민지의 금메달리스트는 일제로부터 합당한 대우조차 받지 못했다.

양정 고보를 졸업한 손기정은 일본의 메이지 대학 법학과에 들어가 학업을 마쳤다.

1944년 손기정은 조선 저축은행 은행원으로 일했으며 '일장기 말소 사건' 때 관계를 맺은 여운형을 도와

독립 운동의 연락 담당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손기정은 1947년과 1950년에 마라톤 코치로 활동하여 서윤복과 함기용이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이후 손기정은 대한 체육회 부회장,대한 육상 경기연맹 부회장, 서울특별시 육상 경기연맹 이사장,서울 올림픽대회 조직 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하였고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는 성화 봉송자로 뛰었다.


한편, 당시 베를린 올림픽의 마라톤 경기에는 그리스 아테네 브라드니 신문사가 우승자에게 수여하는 고대

그리스 청동 투구가 부상으로 있었다.

이 투구는 손기정에게 바로 전달되지 못하고 50년간 베를린의 샤로텐부르크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가

1986년에 가서야 손기정의 손에 전달되었다.

손기정은 이를 1994년 국가에 기증하였다.

손기정의 금메달은 현재까지도 일본이 딴 금메달로 되어 있고 올림픽 공식 기록에는 손기정의 국적 또한

일본 이름도 '손기테이'로 되어 있다.

살아 생전 손기정은 이것을 바로 잡기 위해 무척이나 애썼지만 일본 올림픽 위원회가 손기정에 대한 국적

변경 신청을 해주지 않아 실현되지 않았다. 다만, 손기정의 일대기를 쓴 자료에는 국적을 한국으로 밝히고 있으며 그의 이름 손기정을 표기하였고, 당시 그가 일본 국적을 달고 경기에 나올 수밖에 없었던 안타까운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1992년8월,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가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손기정은 누구보다도 황영조의 우승을 기뻐하며 마치 자신의 우승처럼 여기며 이런 말을 남겼다.


',·´″″°³ 역사.인물.사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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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재 신채호          2019.10.31.목요일,맑음

단재 신채호(생졸; 1880.11.7-1936.2.21)는 충남 대덕군 도림 마을의 신채호가 8세되던 1887년 38세로

작고한 유생인 고령 신씨 광식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라고,13세 무렵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독파할 정도로 명석하였다고 한다.

1897년 할아버지의 소개로 수구파 대신 신기선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신기선의 충남 목천 본가의 서책을 빌려 읽으면서 유학을 깊이 공부하였다.

1898년에는 신기선의 추천으로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뒤, '독립신문''황성신문''제국신문' 등 근대 신문들과 신서들을 탐독하며 개화자강 사상에

젖기 시작하였다.

친러 수구파 정부가 1898년11월5일, 독립 협회 지도자 17명을 체포하고 독립 협회를 강제 해산시켰을 때, 서울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개최한 만민 공동회에 참가하여 내무부,문서부의 간부급으로 활약하였고

만민 공동회 참여를 전환점으로 개화 자강파로 전환하였다.

한 달여 뒤인 1898년12월25일, 고종과 정부가 독립 협회와 만민 공동회를 강제 해산하고,

주동자 430여명을 체포할때 일시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귀향하여 1901년 향리 부근인 청주군 낭성면 인차리의 문동 학원에 강사로 나가면서,

시대 변천과 한문 무용론을 주장하다가 유생들에게 배척당한 일도 있었다.

1904년, 정부가 일본인의 전국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승인해 주려 하자 조소앙 등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일제와 주모자 이하영을 규탄하는 성토문을 작성하여 발표하였다.

1905년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며, 그해 상반기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 논설 기자로 입사하였다.

   그러나 '황성신문'이 일제의 을사늑약을 폭로 비판한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사설로 무기 정간

   당하자,

1905년 말 1906년 초 양기탁의 초청으로 '대한매일신보'의 논설 기자가 되었다.

   이때 그가 쓴 일제 침략 비판 논설은 애국심에 넘치는 내용과 웅장하고 박력있는 필치로 바로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감동시켰다.

   이후 국민들에게 가장 영향력이 큰 애국 계몽 운동가중 한 사람으로 부상하였다.

1907년4월, 양기탁,안창호,전덕기,이동녕 등을 중심으로 비밀 결사 신민회가 결성되자 가입하여 신민회

   이념을 논설에 잘 반영하여 국민을 계몽하였으며, 신민회의 비공식적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1907년10월, 량치차오(梁啓超)의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번역 간행하였다.

   이어서 한국 역사상의 삼걸로 을지문덕,이순신,최영을 뽑아 전기를 저술하였다.

1908년5월 '을지문덕'을 간행하였으며,'대한 매일신보'에 1908년 5월2일부터 8월18일까지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전'을 연재하였다.

1909년12월5일부터 1910년5월27일까지 '동국거걸 최도통전'을 연재하였다.

일반 민중과 부녀층을 위하여 순국문판 '을지문덕젼'을 1908년 7월 펴냈고,

순국문판 '리슌신젼'을 1908년 6월11일부터10월 24일까지 국문판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하였다.

1908년 기호 흥학회에 가입하여 '기호흥학회월보'와 '대한협회월보'에 여러 편의 애국 계몽 논설을 발표

   하였다. 같은 해 부녀층 계몽을 위하여 주시경과 함께 순국문 잡지인 '가뎡잡지'를 편집 발간하였다.

1908년8월27일부터 12월13일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사신론'을 연재하였다가 후에 책으로 간행하였다.

'독사신론'은 확고한 근대 민족주의 사관을 제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학설들을 다수 정립하여 한국

근대 민족주의 사학을 정립하였다.

그밖에 '동사천년사'를 저술하였으나 망명으로 완성하지는 못하였다.

1909년 신민회가 청년 학우회를 창립하자,'청년학우회 취지서'를 써서 적극 지원하였다.

1910년 3월 신민회가 일부 간부들을 국외에 망명시켜 독립군기 지 건설 사업을 담당하도록 결정하였다.

   이에 참여하여 망명길에 올라 1910년 9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병탄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1911년1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상설, 최재형, 정재관, 이동휘, 이종호 등과 권업회를 조직하고 기관지 

   '권업신문'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191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윤세복, 이동휘, 이갑 등 동지들과 함께 광복회를 조직하고 부회장이되었다.

   회장은 윤세복,총무는 이동휘가 맡았다. 광복회에서 통고문과 고시문 등을 작성하였다.

1913년 '권업신문'이 재정난으로 폐간되자 신규식의 초청으로 중국 상하이로 가서 약 1년간 체류하였다.


의사 윤봉길             작성일자; 2019.10.31.목요일,맑음

 

윤봉길

생졸; 1908.6.21-1932.12.19

호; 매헌 

 

19세의 나이에 농촌 계몽 운동에 뛰어든 윤봉길 의사는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계몽 운동만으로는 독립을 이룰 수 없다는 한계를 인식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그곳에서 백범 김구를 만난 윤 의사는 '한인 애국단'에 가입,김구와 함께 홍구 공원 거사를 계획한다.

윤 의사의 의거는 널리 알려져 중국의 한인 독립 운동 지원과 임시정 부의 활성화 등

이후 독립 운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5세의 나이로 순국한 윤봉길 의사.

 

매헌 윤봉길 의사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부친 윤황과 모친 김원상 사이의 5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우의며,봉길은 별명이다.

11세 때인 1918년 덕산 공립 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ㆍ1 독립 운동의 함성과 함께 학교를 자퇴하고, 

1921년 매곡 성주록의 문하에 들어 오치서숙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전통 교육을 받으면서도 당시 민족 잡지인 '개벽' 등을 구독하며 민족 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갔다.

1926년, 서당에서 수학 하던 중 윤 의사는 산책길에 건너편 공동 묘지에서 여러 묘표를 뽑아들고

   선친의 무덤을 찾아달라고 간청하는 한 무지한 청년을 만나게 된다.

   이때 의사는 묘표를 뽑아 무덤의 위치 조차  알 수 없게 만든 그 청년의 무식이

   나라까지 잃게 한 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농촌 계몽 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당시 그의 나이는 19세였다.

  윤 의사는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 문맹 퇴치와 민족의식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나 농민 계몽은 야학만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윤 의사는 1927년 '농촌 독본' 3권을 저술하여 본격적으로 농촌 계몽 운동을 벌였다.

  '농민독본'의 구성이 ‘낙심 말라’,‘백두산’,‘조선 지도’,‘자유’,‘농민과 공동정신’ 등

   이었던 것만 보아도 당시의 농촌 계몽 운동이 단순히 계몽 차원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민족 얼의 부흥을 목적으로 한것임을 알수 있다.

  1928년에는 부흥원을 세워 구체적인 농촌 개혁을 실시하여 갔다.

   주된 사업은 농가 부업 장려 등의 증산 운동과 공동 판매, 공공 구입의 구매 조합 설치, 토산품(국산품)

   애용과 일화 배척, 생활 개선 등이었다.

1929년,'월진회'를 조직하여 농촌 개혁 운동을 추진할 중심 인물들을 규합하였고,'위친계','수암 체육회'

   결성을 통한 친목 도모 및 체력 향상 등 윤 의사의 활동은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1929년에 접어들자 농민 계몽, 농촌 개혁 운동의 성과가 드러나기 시작하였지만,

   이 과정에서 한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운동이 결국 민족 운동,즉 독립 운동으로 귀결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일제 식민 통치하에서 한국인의 진정한 행복은 개량과 개혁의 수준에서 머물 수

   없었고, 완전한 독립을 달성할 때 비로소 가능하였기 때문이다.

1929년12월16일자 일기에 윤 의사는 “함흥 수리조합 일본인들이 조선인 3명을 타살. 아! 가엾어라,

   이 압박 어느 날 갚을는지”라고 적어 넣기도 했다.

   이는 윤 의사가 막연하나마 일제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한 구체적 행동의 싹을 틔우고 있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1930년3월6일,윤봉길 의사는 ‘장부출가생불환(대장부가 집을 떠나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비장한 글을 남긴 채 정든 가족을 뒤로하고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망명에 이르기까지 그의 고뇌와 결단은 중국 청도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사랑하는 어머니에게’라는

   서신에 잘 드러나 있다.

   윤 의사에게 있어 그 사랑은 곧 민족애였다.

   근대적 사고와 혁명가적 열정을 함께 갖춘 사람이 바로 윤봉길 의사였다.

   월진회원들이 마련해준 여비를 갚기 위해 중국 청도의 세탁소에서 1년여간 일한 것만 보아도 그 인격의  

   한 면모를 살필 수 있다.

1931년, 윤 의사는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일시에 던져 조국

   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마침내 임시 정부의 지도자인 백범 김구를 만나

   소원하던 조국 독립의 제단에 몸을 던지게 된 것이다.

   김구와 윤 의사는 의열 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 “1932년4월29일,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일본군의 상해 사변 전승 축하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 공원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라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를 접하게 된다. 이 얼마나 간절히 기다리던 기회였던가.

   오로지 자신의 몸을 던져 독립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천리 먼 길을 달려온 윤 의사였다.

   윤봉길 의사와 백범 김구는 드디어 그 기회를 맞은 것이다.

 

거사를 위해 치밀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의거 3일 전인 4월26일,

윤 의사는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의 행동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의사의 대변이라는 점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백범 김구가 주도하던 '한인 애국단'에 가입한다.

의사는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다.

4월27일과 28일에는 홍구 공원(현 노신공원)을 답사하여 거사의 만전을 기하였다.

상해 병공창의 주임이었던 김홍일 장군의 주선으로 폭탄이 마련되었고,

거사 장소는 눈이 시리도록 익혀두었다.

 

거사일인 4월29일 아침,

백범 김구와 마지막 조반을 들고서도 시계를 바꾸어 갖는 여유를 잃지 않은 윤 의사였다. 

거사 후 자결하기 위해 자결용 폭탄까지 마련한 그 아침의 모습이다.

홍구공원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하였고 삼엄한 경계가 겹겹이 처졌다.

단상 위에는 시라카와 대장과 해군 총사령관인 노무라 중장, 우에다 중장, 주중공사 시게미쓰,

일본 거류민 단장 카와바다, 상해 총영사 무라이 등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었다.

오전11시40분경, 축하식 중 일본 국가 연주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의사는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빼었고,단상 위로 폭탄을 투척하였다.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와 시라카와의 면전에서 폭발,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시라카와 대장과 카와바다 거류민 단장은 사망하고 노무라 중장은 실명,

우에다 중장은 다리를 절단하는 중상을,시게미츠 공사는 절름발이가 되었고,

무라이 총영사와 토모노 거류민단 서기장도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 의사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중국의 백만 대군도 못한 일을 일개 조선 청년이 해냈다”고 감격해 하며,

종래 무관심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다.

그리하여 중국 육군 중앙 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한국의 독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성원하였다.

또한 한동안 침체일로에 빠져 있던 임시 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이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5월25일, 상해 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때에도 “이 철권으로 일본을 즉각 타도하려고 상해에 왔다”며 대한 남아의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후 윤 의사는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932년12월19일, 가나자와 육군 형무소 공병 작업장에서 십자가 형틀에 매어 총살,

   25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윤 의사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쓰레기 하치장에 버려졌고,

광복 후인 1946년에야 조국에 봉환, 효창 공원에 안장되었다.

윤봉길 의사는 “부모는 자식의 소유주가 아니요,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고 말할 만큼 선각적인

사고를 가진 분이었다.

하지만 거사를 며칠 앞두고 사랑하는 두 아들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유언은 윤 의사가 참으로 지금의 우리

에게 띄우는 당부일지도 모른다.

 

             너희도 만일 피가 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해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극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자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대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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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구 공원 사건    2019.10.31.목요일,맑음

한인애국단의 단원 윤봉길은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히로히토 천황 탄신일에 단상에 폭탄을 던져 민족의 원흉들을 죽인 공원.


지금은 이름을 고쳐 루쉰 공원이라고 한다.

1932년,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상하이 국제 공동조계 주변에서 군사적인 충돌이 발생했는데, 이것이 상하이 사변이다. 이 사변은 일본 관동군이 일으켰던 만주사변과 그 후 수립된 만주국에 대한 구미 열강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이였으며, 동시에 중국 내 반일감정을 격화시키고, 상황을 악화시켰다.

훙커우 공원 지역은 이미 일본군에 의해 장악된 상태였기 때문에, 당시 상하이의 일본군과 거주민 위주로 홍커우 공원에서 대관식과 천황 탄생일 축하회를 거행하기로 했는데, 사실 이 행사의 주된 목적은 상하이에서의 승전기념 파티였다. 대부분의 군부 요인이 모였고, 당시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이었던 요시노리 대장은 테러를 우려해 꼼꼼하게 체크를 하였으나, 윤봉길은 일본의 치밀한 감시를 뚫고 폭탄을 던졌다.

청조 1896년에 상하이 공동조계 관청이 있었고, 조계의 밖에 있던 농지를 취득하여 조성되었다. 당초에 공원은 홍커우 오락장이라고 불렸고, 영국 원예가에 의해 설계되었기 때문에, 서양식 정원 양식을 가지고 있다. 원래는 도박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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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창        2019.10.31.목요일맑음

이봉창; 1932년1월, '한인 애국단'원인 이봉창이 일왕에게 폭탄을 던진 일.

생졸; (1900~1932)


이봉창은 서울 출신으로 19살에 남만주 철도 주식회사 운전 견습생으로 들어갔다가,

1924년, 사직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오사카 등지를 방랑했다.

1931년, 상해로 가서 '한인 애국단'에 가입하고 일왕 히로히토를 암살하기로 결심,

   그해 겨울 다시 일본으로 갔다.

1932년1월8일, 일왕이 만주국 황제 부의와 도쿄 교외 요요기 연병장에서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갈 때

   사쿠라다몬에서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했다.

이봉창은 1932년7월19일, 대심원 공판정에서 재판을 받을 때 '나는 너희 임금을 상대로 하는 사람이거늘

   어찌 너희들이 감히 내게 무례히 하느냐'. 한마디 호령했을 뿐 재판을 거부했다.

이에 일본법원은 그해 10월, 방청인도 없는 재판에서 저희끼리 판결문을 작성 사형 선고를 하고

1932년10월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형을 집행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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