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련 전투기 KAL기 피격 사건 2019.12.27.금요일,맑음
1983년9월1일,
한국인 81명,미국인 55명,일본인 28명,중국인 36명,필리핀인 16명,캐나다인 10명,
타이인 6명,오스트레일리아인 4명,스페인인·말레이시아인·인도인이 각 1명,무국적자1명 등과 승무원 29명이 탑승하여 뉴욕을 출발하여 앵커리지를 경유,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보잉 747 점보 여객기가 사할린 부근 상공에서 소련 전투기의 미사일 공격을 받고 추락한 사건
이다.
1983년8월31일 밤 10시(한국시간),
KAL 007편 747 점보 여객기가 예정대로 앵커리지를 출발,
앵커리지~서울 간 6개의 항로 중 소련 영공과의 최단거리가 50km인 최북단 ‘로미오 20’
항로를 택하여 비행하였다
1983년9월1일,2시7분, 도쿄 국제 통신국 나리타 관제소는 KAL기로부터 “정상 루트
통과 지점인 캄차카 앞바다의 니피(북위 49°41', 동경 129°19')를 통과하였다”는 타전을
받았다.
1983년9월1일,3시12분, KAL기를 추적 중이던 소련 전투기 조종사가 “KAL기를 육안으로
발견하였다”고 지상 기지에 무전 연락,같은 시각 일본 항공 자위대의 레이더가 사할린
동쪽 해상에서 비행 중인 KAL기의 항적을 포착하였다.
1983년9월1일,3시20분,추적하던 소련 전투기가 지상 기지와 “조준을 맞추어라” 등 3회에
걸쳐 교신하였고,
1983년9월1일. 3시25분 전후, 일본 항공 자위대의 레이더는 KAL기 주변에서 수대의 소련
전투기들이 격렬히 움직이는 것을 포착하였다.
1983년9월1일,3시26분. 소련 전투기가 KAL기에 미사일 발사, 소련 조종사는 “명중하였다.
목표물을 파괴하였다”고 지상 기지에 타전,
1983년9월1일3시27분 전후, KAL기와 나리타 관제소와의 교신 두절,
1983년9월1일3시29분, KAL기는 사할린 서남 해안 북위 46°30' 동경 141°30' 상공에서
일본 항공 자위대 레이더로부터 사라졌다.
1983년9월1일,3시30분. KAL기 주변의 소련 조종사가 “KAL기가 고도 5,000 m까지 급강
하하였다”고 지상 기지에 보고,
1983년9월1일,3시38분, KAL기는 사할린 서남쪽 모네론섬 해상에 추락,
1983년9월1일,3시53분. 소련 전투기들이 레이더에서 사라졌다.
소련 조종사는 “목표물로부터 이탈한다”고 지상 기지에 보고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 정부는 사건 확인 후 성명을 발표,
소련의 비인도적 잔학행위에 강력히 항의하고,
소련당국의 사과와 피해에 대한 보상,사건 책임자의 처벌,이와 같은 사건의 재발 방지에
대한 보장 등 4개항을 요구하면서 국제연합 안전보장 이사회의 긴급 소집을 요구하였다.
이 사건에 대하여 미국·일본·캐나다·영구,프랑스 등 우방국들은 강경한 자세로 소련의
만행을 규탄, 강력한 응징을 실행에 옮기는 데 보조를 같이하였다.
먼저 서방측은 소련 여객기의 운항을 전면 규제하고,
미국은 소련과의 문화 교류를 단절할 것을 발표하였다.
일본도 소련과의 외무장관 회담.무역회담의 중지를 고려하는 등 일.소 관계도 극도로 악화
되었다.
한편, 유럽의 여러 서방 국가들도 미국의 강경한 대응책에 동조하였으며,
중국까지도 소련의 KAL기 격추를 ‘용서할 수 없는 만행’이라고 공식 비난하였다.
그리고 각국의 정부 차원에서의 강한 대응책 이외에도 민간 차원에서는 국제 조종사 협회
연맹이 KAL기 격추에 대한 보복 조치로 60일간 모스크바 취항을 중단하는 결의를 하였고, 각국의 조종사 협회는 이 결의를 즉각 지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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