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북 이산 가족 찾기 예비 회담 개최 2019.12.24.화요일,맑음
1971년8월12일,한적은 북적에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위한 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의하여
1971년8월20일,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에서 첫 회담을 개최하였다.
1971년9월부터 1972년8월까지
본회담 개최를 위한 예비 회담을 25차례에 걸쳐 진행하여 이산 가족 주소 및 생사 확인,
서신 거래 문제 등 5개항의 본회담 의제를 합의하였다.
1972년8월부터 1973년7월까지
1972년8월의 평양에서 제1차 회담을 시작으로 7차례의 본회담을 평양과 서울에서 번갈아
개최하였으나 의견 대립으로 난항을 거듭하였다.
남측 주장; 이산 가족의 주소와 생사를 먼저 확인한 후서신 교환과 자유 방문,상봉,재결합
북한 주장; 국보법 철폐,반공 단체 해체
1973년8월28일,
북측의 김영주는 '김대중 도쿄 납치사건’(73.8.8)과‘6ㆍ23 선언’을 들어 일방적 중단 선언
으로 제8차 서울 개최 적십자 본회담은 중단되었다
1980년10월4일,
한국 적십자사의 유창순 총재는 남북적의 수재 물자 인도 인수 작업 종료 시점을 기해
북한 적십자사의 손성필 위원장에게 적십자 본회담 재개 제의를 하여
1980년10월29일,
북측이 수용 의사를 표명함으로써 1985년5월,12일간 제8-10차 본회담이 개최되었다.
1985년5월27일에서 5월30일까지
제8차 서울 본회담에서 '남북 이산 가족 고향 방문 및 예술 공연단’ 교환에 합의함으로써.
1985년9월20일에서 9월23일까지
고향 방문단 51명,기자,수행원 50명,예술공연단 50명 등 각 151명씩 상호 방문하였다.
남한측에서는 35가구가 재북 가족 45명과 상봉하고
북측에서는 30가구가 재남 가족 51명과 상봉하였다.
2000년6월15일,
남북 정상 회담에서 '공동 선언’을 채택,
8월15일에 이산가족,친척 방문단 교환 및 비전향 장기수 문제 등 풀어나가기로’ 합의,
2000년6월27일에서 6월30일까지
금강산호텔에서 제1차 남북 적십자 회담을 개최하여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등에 합의
2000년8월15일부터 8월18일까지
제1차 이산 가족 방문단을 서울과 평양 상호 교환 형식으로
규모는 단장1명,이산가족 100명,지원요원 30명,기자 20명 등 총 151명이다.
남측 이산가족 100명이 재북가족 217명을 상봉하였고,
북측 이산가족 100명이 재남가족 750명을 상봉하였다.
상봉 횟수는 집단상봉1회,개별상봉 2회,공동식사 3회 등 총 6회 상봉하였다.
2000년9월20일에서 9월23일까지
금강산호텔에서 제2차 남북 적십자희담을 개최하여 제2차 방문단 교환 및 생사,주소확인,
서신교환,면회소 설치및 운영에 합의하여.
2000년11월30일에서 12월2일까지
제2차 이산가족 방문단을 서울과 평양 상호 교환 형식으로
규모는 남측은 단장1명,이산가족 100명,지원요원 30명,기자 20명 등 총 151명이다.
북측은 단장1명,이산가족 100명,지원요원 20명,기자 15명 등 총 136명이다
남측 이산가족 100명이 재북가족 254명 상봉하였고,
북측 이산가족 100명이 재남가족 770여명을 상봉하였다.
상봉횟수는 집단상봉1회,개별상봉 2회, 공동중식 1회,석별상봉1회 등 5회 상봉하였다.
2001년1월29일,에서 1월31일까지
금강산 호텔에서 제3차 남북적 십자 회담을 개최하여
제3차 방문단 교환 및 제1차 서신교환 등에 합의하였다.
2001년2월26일에서 28일까지
제3차 이산가족 방문단을 서울과 평양 상호 교환 형식으로
규모는 남측은 단장1명,이산가족 100명,지원요원 30명,기자 20명 등 총 151명이다.
북측은 136명(단장 1명, 이산가족 100명,
지원 요원 26명, 기자 13명 등 총 136명이었다.
남측 이산가족 100명이 재북가족 243명 상봉하엿고
북측 이산가족 100명이 재남가족 800여명을 상봉하였다.
상봉횟수는 남측은 단체상봉 1회,개별상봉 2회, 공동식사 2회 등 총 6회 상봉 하였다.
북측은 북측은 5회 상봉 하였다.
2001년3월15일,판문점을 통해 이산 가족 서신 교환(각 300통) 실시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