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인숙 여인 피살 사건      2019.12.25.수요일,맑음

정인숙 피살사건

제3공화국 당시의 의문사로 고급 요정 종업원인 정인숙1970년3월17일 밤 11시경,

서울 마포구 절두산 근처 도로에서 교통사고를 가장한 사고에 의해 암살된 사건이다.


피해자 정인숙(본명: 정금지)은 총상으로 사망하였고,

그의 차를 운전하던 넷째 오빠 정종욱은 넓적다리를 관통 당하였으나 생존해 있었다.

정종욱은 택시 기사에게 도움을 청하여 구조되었다.

정인숙은 당시 출산한 아이의 아버지인 국무총리 정일권과 갈등 관계에 있었고,

신민당은 이 사건의 배후로 정부 고위층의 개입 의혹을 제기했으나 유야무야 묻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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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권               2019.12.25.수요일,맑음

정일권(생졸; 1917년11월21일~1994년1월17일)은 한국 군인이며 정치가다.

육군 대장으로 예편함과 동시에 주 터키대사로 임명되었고,주프랑스대사,주미대사,유엔총회 한국대표, 5·16 군사정변 직 후에는 외무부장관,국회위원,국무 총리를 역임했다. 


1917년 함경북도 경원에서 출생한 정일권은

1924년, 경원 보통학교 입학,

1930년, 영신중학교 입학후 1934년 광명 중학교를 졸업했다.

1935년, 일본이 만주국에 세운 초급 장교 양성 기관인 중앙 육군훈련처(봉천)에 합격,

1937년, 졸업한 뒤 일본 육군 사관학교 유학생으로 과정을 마치고,

1940년,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군에서는 일본의 식민지 군대인 만주국군의 대위까지 진급하였다.

1942년, 모교인 광명 중학교를 방문해 후배들에게 만주국 군관으로 입대할 것을 권유했다.

1945년,해방 후, 귀국하여 미군정 당국이 설립한 군사 영어 학교에 입학했으며,

1946년, 졸업과 동시에 한국 육군의 전신인 조선 국방 경비대의 정위(대위)로 임관하였다.

1946년12월, 경비대 제4연대의 연대장이 되었다.

1948년8월,정부 수립 이후 경비대가 대한 민국 육군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급속히 진급,

1949년2월, 육군 준장이 되었고 그 해 12월 육군 참모차장 겸 행정 참모부장이 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한 뒤 채병덕 육해 공군 총사령관이 전사하자,

19507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과 동시에 육해 공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51년, 육군 중장으로 진급한 후 미국에 파견되어 미국 군참모 대학에 입교해

1952년7월에 졸업했다.

1954년2월, 귀국 뒤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고,그 해 6월 육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1956년, 연합 참모본부 총장이 되었으며,

1957년, 예편되었다.

   군에서 예편과 동시에 터키 주재 대사로 임명되었으며,

   그 뒤 1962년까지 프랑스주재 대사, 미국주재 대사, 브라질·콜롬비아·칠레·아르헨티나·

   파라과이·에쿠아도르 등의 겸임대사 등 외교관으로 활동했다.

1963년4월, 무임소 대사 자격으로 귀국한 뒤,

1963년12월, 박정희정권의 외무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며,

1964년5월에 국무 총리로 임명되었다.

1970년12월, 정인숙 여인 피살 사건으로 정국이 소란한 가운데 사임할 때까지 재임했으며,

1966년12월부터 1967년 4월까지의 기간 중에는 외무부 장관을 겸임했다.

   총리 사임과 동시에 민주 공화당 총재 상임고문에 임명되었으며,

1971년5월25일에 실시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 공화당 전국구 후보로 당선되었다.

1972년5월, 박정희에 의해 민주 공화당 당의장 서리에 임명되었다.

1972년, 10월에 단행된 10월 유신 이후 첫 번째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인

1973년2월9일, 제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강원도 속초 선거구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당선

    되었다.제9대 국회의 개원과 함께 국회의장에 선출되었으며,

    유신 체제하에서 1979년까지 국회 의장직을 계속 맡았다.

1978년12월21일에 실시된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 공화당 후보로 입후보해 당선

    되었고. 민주공화당 총재 상임고문과 한일의원 연맹 회장에 임명되었으며,

1980년,5·17사태로 국회와 정당이 해산되는 것을 계기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는 국정 자문위원, 자유수호 구국총연합회 회장, 한일 협회 회장

으로 활동했고,

1989년2월에는 한국 자유총연맹의 발기인 및 총재 등 관변단체의 장을 맡기도 했다.

1992년에는 민주 자유당 상임 고문에 임명되었다.

1994년1월17일 하와이에서 사망했다.



 

⊙ 제8대 대통령 선거                      2019.12.24.화요일,맑음

1972년12월23일,제8대 대통령 선거근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들이 간접선거에 의해

선출한 대통령 선거이다.

 

1972년10월17일, 대통령 박정희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고 정치 체제를 개혁한다는 미명 아래

초헌법적인 국가 긴급권을 발동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전국에 비상 계엄령령을 선포하였다.

이어 10일 이내에 헌법 개정안을 작성하여 국민 투표로써 확정하도록 하였는데,

이 헌법이 유신헌법이다.

유신 헌법에 의해 자신의 집권을 연장하기 위한 수단인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설치하였다.

1972년12월23일, 유신헌법에 의거해 제8대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였는데,

선거 방식은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된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들이 선출하도록 하는 간접선거 제도를 채택하였다. 대통령 후보는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 200인 이상의 추천장이 있어야 하며,

대의원은 후보자를 1명만 추천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당선인 결정은 통일주체 국민회의에서 재적의원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자를 당선인으로 하되,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후보자가 없을 때에는 2차 투표를 하고,

2차 투표에서도 당선자가 없을 때에는 최고득표자가 1인이면 차점자에 대하여,

최고득점자가 2인 이상이면 최고득점자에 대하여 결선 투표를 실시해 다수득표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박정희는 서울 장충 체육관에서 진행된 체육관 선거에서 대의원 등 515명의 추천으로

단독 입후보해 전체 대의원 2,359명이 참석한 가운데 2,357표(무효 2표)라는 절대적인 찬성으로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12월27일, 4선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이 때부터 이전까지의 역대 대통령 임기가 4년에서 6년으로 늘어났다. 



 

⊙ 7차 개헌(유신헌법)                    2019.12.24.화요일,맑음

1972년10월17일에 선포된 유신 체제하에서

1972년11월21일, 국민 투표로 확정된 헌법이다.


대한민국 제4공화국의 헌법으로 헌정 사상 7차로 개정되었다.

1972년10월17일,대통령 박정희는 ‘우리 민족의 지상 과제인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우리의 정치

체제를 개혁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초헌법적인 국가 긴급권을 발동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비상 계엄령을 선포한 뒤,

10일 이내에 헌법 개정안을 작성하여 국민 투표로써 확정하도록 지시하였다.

1972년10월27일,평화적 통일지향,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를 특징으로 한 개헌안이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공고되었고,

1972년11월21일,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찬성(투표율 91.9 %, 찬성 91.5 %)으로 확정되었으며,

   대통령 취임일인 12월27일에 공포,시행되었다.


이 헌법은 형식적으로는 제7차 헌법 개정이나, 실질적으로는 구헌법을 폐지하고 새 헌법을 제정한 점에

특색이 있다.


그러나 사실상 유신 헌법은 박대통령의 장기 집권을 위한 개헌이었고,국민의 기본권 침해,권력구조상에

있어 대통령 권한의 비대로 독재를 가능하게 한 헌법이었다.

유 신헌법은 전문과 12장 126조 및 11조의 부칙으로 되어 있다.


 

⊙ 이후락                  2019.12.24.화요일,맑음

박정희 정권시 대통령 비서실장과 중앙 정보부장을 역임한  권력의 핵심 인물로

5.16 군사 정변 이후 국가재건 최고회의 공보실장,중앙 정보부장을 지내면서

'3선개헌','1971년 대통령 선거' '박동선 공작 사건', '김대중 납치사건' 등에 관여했다.

1979년 10.26 사태 후 전두환의 신군부 세력의 등장으로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락은(생졸; 1924.2.23~2009.10.31)은 경상남도 울산에서 태어나 울산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육군 항공기 정비학교에 입학했으나 졸업하지 못하고,

1946년 군사 영어학교에 입학 소위로 임관했다.

1951년, 대령으로 육군 정보국 차장으로 임명되었다.

1952년, 미국 병참학교 고등반을 수료하고

1955년 국학 대학 법과를 졸업했다.

1961년,5·16군사정변 이후 국가 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

1963~69년, 대통령 비서실장,

1970~73년, 중앙 정보부장을 지내면서 '3선개헌','1971년 대통령 선거','박동선 공작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등에 관련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72~73년, 남북 조절위원회 남한측 공동 위원장을 지내면서 '7·4 남북 공동 성명'이 채택

   될 그 시기에 남북 대화에 참여하기도 했다.

1979년, 제10대 국회 의원을 지냈으나,

1979년,10·26 사태 후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집권과 더불어 부정 축재로 재산을 환수

   당하고 경기도 이천에서 도자기 제작을 하며 정계를 은퇴했다.


⊙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                        2019.12.24.화요일,맑음

1972년7월4일,

남측의 이후락 중앙 정보부장과 북측의 김영주 노동당 조직 지도부장이

서울과 평양에서 통일의 원칙을 동시에 발표한 성명으로,

남,북한 당국이 국토 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하여 합의 발표한 공동 성명이다.


공동 성명의 내용은

첫째,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고 밝힘으로써 자주.평화.민족 대단결의 3대 원칙을 공식 천명하였다.


공동성명은 이 밖에도

상호 중상 비방과 무력 도발의 금지,다방면에 걸친 교류 실시 등에 합의하고 ,

합의 사항의 추진과 남북 사이의 문제 해결,

통일 문제의 해결을 목적으로 이후락 중앙 정보부장과 김영주 조직 지도부장을 공동 위원장으로 하는 '남북조절위원회 를 구성하고 운영하기로 하였다.

당시 남북 간에 이같은 획기적인 합의가 도출될 수 있었던 것은

1972년2월의 미.중간 긴장 완화로 대표되는 국제적 데탕트 무드에 힘입은 바 크다.

7.4 남북 공동 성명은 통일에 대한 국민적 합의 없이 정부 당국자들간의 비밀 회담만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외세 의존적이고 대결 지향적인 통일 노선을

거부하고 올바른 통일의 원칙을 도출해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역사적 의미는

남한의 시월 유신(1972.10.17)과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 채택(1972.12) 등에서 보이듯

통일 논의를 자신의 권력 기반 강화에 이용하려는 남,북한 권력자들의 정치적 의도로 인해 그 빛을 잃게 되었고, 급기야 김대중 납치 사건(1973년8월)을 계기로 조절 위원회 마저 중단되었다.


 

⊙ 서울 전역 위수령 발동          2019.12.24.화요일,맑음

위수령은 육군 부대를 군 시설 보호와 치안 유지를 위해 동원할 수 있도록 한 법령으로

계엄령과 달리 국회의 동의 없이 육군 부대를 사회 치안 유지에 동원할 수 있다는 점과,

절차를 거치지 않은 국민의 인신 구속이 가능하여 국민의 기본권을 해칠 우려가 있다는 점이 논란이 되었다.

위수령은 제정 취지와는 달리,

국회 동의 없이 사회 질서 유지의 목적으로 집회나 시위를 진압하거나 통제하기 위해 발동

되는 경우가 많았다.


1950년, 군 부대 보호를 위한 목적으로 제정된 이래

1970년, 치안 유지를 위한 기능이 추가된  두 번의 개정을 거쳤다.

2018년3월, 국방부가 폐지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으며,

2018년7월, 폐지령안이 입법 예고 되었고,

2018년9월11일,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폐지되었다.  

                   

1965년4월17일,

한일 협정(체결1965.6.22) 및 한일 기본조약(발효1965.12.18)이 가조인 되어

학생들의 반대 데모 사태가 폭동으로 규정되기에 이르러게 되자,

휴교 조치와 조기 방학 조치가 취해짐으로써 데모 사태는 잠시 잠잠해졌다.

1965년8월22일,

개학이 되면서 다시 학생 데모가 시작되어 더욱 격렬해지기까지 하였다.

1965년8월26일,

경찰 병력으로 치안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서울 특별시장 윤치영의 요청으로 서울

일원에 위수령이 발동되어 고려 대학교와 연세 대학교에 휴업령이 내려지고,

정치 교수라는 이름으로 일부 교수가 학원에서 추방되었다.

그로 부터 1개월뒤 위수령은 윤시장의 요청으로 해제되었다.

 

1970년, 대통령령의 위수령이 제정되었다.

이는 1965년8월26일의 사태를 계기로 위수령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함이었다.


1971년10월15일,

각 대학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되자 서울특별시 일원에서 발동되었으며, 이에 따라 10개 대학에 무장 군인을 진주시키고 휴업령을 내렸다.

1979년에는,

김영삼 당시 국회의원이 제명되자 마산 일대의 시위를 통제하기 위해 병력이 출동했으며,

1996년에는,

강릉 북한 잠수함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발령한 바 있다.


위수령의 내용은

1. 위수 사령관은 치안유지 조치를 위해 관할하는 시장·군수·경찰서장과 협의하여야 하며,

2. 병력 출동은 육군 참모총장의 사전 승인을 얻어야 하나 사태가 위급한 경우 사후 승인도

    가능하도록 하였다.

3. 병기는 자위상의 필요,진압·방위 등의 필요가 있을 때에 사용하며, 사용하였을 때는 즉시

    육군 참모총장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1970년, 대통령령의 위수령이 제정된 후

1971년10월15일, 최초의 위수령으로

각 대학에서 반정부 시위가 격화 되었을 때,서울 일원에 발동된 것이었으며,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연세대학교와 10개 대학에 휴업령이 내려지고 무장 군인이 진주하였다.

1979년10월20일, 두 번째 위수령으로

마산 일원에 내려진 것으로,김영삼이 신민당 총재에 당선되자 그 권한 정지 가처분을 신청

하고 제명함에 따라 부산과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반대 데모가 격렬하게 일어난 데 따른

조치였다. 이 사태는 10.26 사건으로 이어졌다.

2018년9윌11일, 국무회의를 통해 위수령 폐지령안을 심의.의결하여 68년 만에 폐지되었다.


 

⊙ 남북 이산 가족 찾기 예비 회담 개최             2019.12.24.화요일,맑음

1971년8월12일,한적은 북적에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위한 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의하여

1971년8월20일,판문점 중립국 감독위에서 첫 회담을 개최하였다.

1971년9월부터 1972년8월까지

   본회담 개최를 위한 예비 회담을 25차례에 걸쳐 진행하여 이산 가족 주소 및 생사 확인,

   서신 거래 문제 등 5개항의 본회담 의제를 합의하였다.
1972년8월부터 1973년7월까지

   1972년8월의 평양에서 제1차 회담을 시작으로 7차례의 본회담을 평양과 서울에서 번갈아

   개최하였으나 의견 대립으로 난항을 거듭하였다.

   남측 주장; 이산 가족의 주소와 생사를 먼저 확인한 후서신 교환과 자유 방문,상봉,재결합 

   북한 주장; 국보법 철폐,반공 단체 해체 
1973년8월28일,

   북측의 김영주는 '김대중 도쿄 납치사건’(73.8.8)과‘6ㆍ23 선언’을 들어 일방적 중단 선언

   으로 제8차 서울 개최 적십자 본회담은 중단되었다

1980년10월4일,

   한국 적십자사의 유창순 총재는 남북적의 수재 물자 인도 인수 작업 종료 시점을 기해

   북한 적십자사의 손성필 위원장에게 적십자 본회담 재개 제의를 하여

1980년10월29일,

   북측이 수용 의사를 표명함으로써 1985년5월,12일간 제8-10차 본회담이 개최되었다.
1985년5월27일에서 5월30일까지

   제8차 서울 본회담에서 '남북 이산 가족 고향 방문 및 예술 공연단’ 교환에 합의함으로써.
1985년9월20일에서 9월23일까지

   고향 방문단 51명,기자,수행원 50명,예술공연단 50명 등 각 151명씩 상호 방문하였다.

   남한측에서는 35가구가 재북 가족 45명과 상봉하고

   북측에서는 30가구가 재남 가족 51명과 상봉하였다.

2000년6월15일,

   남북 정상 회담에서 '공동 선언’을 채택,

   8월15일에 이산가족,친척 방문단 교환 및 비전향 장기수 문제 등 풀어나가기로’ 합의,
2000년6월27일에서 6월30일까지

   금강산호텔에서 제1차 남북 적십자 회담을 개최하여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등에 합의

2000년8월15일부터 8월18일까지

   제1차 이산 가족 방문단을 서울과 평양 상호 교환 형식으로

   규모는 단장1명,이산가족 100명,지원요원 30명,기자 20명 등 총 151명이다.

   남측 이산가족 100명이 재북가족 217명을 상봉하였고,

   북측 이산가족 100명이 재남가족 750명을 상봉하였다.


   상봉 횟수는 집단상봉1회,개별상봉 2회,공동식사 3회 등 총 6회 상봉하였다.
2000년9월20일에서 9월23일까지

   금강산호텔에서 제2차 남북 적십자희담을 개최하여 제2차 방문단 교환 및 생사,주소확인,

  서신교환,면회소 설치및 운영에 합의하여.
2000년11월30일에서 12월2일까지

   제2차 이산가족 방문단을 서울과 평양 상호 교환 형식으로

   규모는 남측은 단장1명,이산가족 100명,지원요원 30명,기자 20명 등 총 151명이다.

             북측은 단장1명,이산가족 100명,지원요원 20명,기자 15명 등 총 136명이다

   남측 이산가족 100명이 재북가족 254명 상봉하였고,

   북측 이산가족 100명이 재남가족 770여명을 상봉하였다.

   상봉횟수는 집단상봉1회,개별상봉 2회, 공동중식 1회,석별상봉1회 등 5회 상봉하였다.
2001년1월29일,에서 1월31일까지

  금강산 호텔에서 제3차 남북적 십자 회담을 개최하여

   제3차 방문단 교환 및 제1차 서신교환 등에 합의하였다.
2001년2월26일에서 28일까지

   제3차 이산가족 방문단을 서울과 평양 상호 교환 형식으로

   규모는 남측은 단장1명,이산가족 100명,지원요원 30명,기자 20명 등 총 151명이다.

             북측은 136명(단장 1명, 이산가족 100명,

            지원 요원 26명, 기자 13명 등 총 136명이었다.

   남측 이산가족 100명이 재북가족 243명 상봉하엿고

   북측 이산가족 100명이 재남가족 800여명을 상봉하였다.

   상봉횟수는 남측은 단체상봉 1회,개별상봉 2회, 공동식사 2회 등 총 6회 상봉 하였다.

                   북측은 북측은 5회 상봉 하였다.
2001년3월15일,판문점을 통해 이산 가족 서신 교환(각 300통) 실시 되었다.




 

⊙ 제8대 국회위원  선거 실시             2019.12.24.화요일,맑음

1971년4월27일에 실시된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후보가 당선되자,

민주 공화당은 원내 안정 세력을 확보하기 위해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대비한 총선 체제로 돌입하였으나,신민당은 4. 27 대통령 선거 부정 등을 내세워 5 .25 총선거 거부론이 대두

되어 선거를 앞두고 당론 조정에 혼선을 빚게 되었다.


1971년5월25일,

이러한 상황에서 맞게 된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지역구 의원정수가 153명으로 증가되고

모두 6개 정당이 참여하였다.


민주 공화당과 신민당은 전지역구에 후보자를 공천하였으며,

국민당은 121개 지역구에만 후보자를 공천하여 79.1%의 공천율을 보였다.

통일 사회당은 60개 지역구에서 39.2% 공천율,

대중당은 53개 지역구에서 34.6% 공천율,

민중당은 37개 지역구에서 24.2%의 공천율을 보이는 데 불과하였다


입후보자는 총 577명, 평균 경쟁률 3.8:1을 보임으로써 제3공화국에 들어와서 실시된 역대 국회의원 선거 중 가장 낮은 경쟁률을 보였다.

투표율 역시 지난 제7대 국회의원선거보다 낮은 73.2%를 기록했다.

시도별로 보면 서울의 투표율이 59.2%로 가장 낮았고,

그 다음이 부산으로 72.1%의 투표율을 보였다.

반면에 가장 높은 투표율을 보인 지역은 충청북도로 80.2%였으며,

그 다음이 79.3%인 경상남도,

78.7%인 경상북도 등의 순이었다.


선거결과

민주공화당이 의원정수의 55.4%에 해당하는 113명(지역구 86명, 전국구 27명)으로

    과반수를 넘는 의식을 차지하게 되었고,

신민당은 89명(지역구 65명,전국구 24명)을 당선시켰고,

국민 국민당 1명,민중당1명 지역구에 각가 1명씩 당선시키고,

나머지 2개 정당은 단 1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하였다.




⊙ 제7대 대통령 선거  실시               2019.12.24.화요일,맑음

1971년4월27일,제3공화국 중에 실시된 제7대 대통령을 뽑는 선거로써

출마자는 박정희·김대중·박기출·이종윤·진복기 등 5명이 출마하여

박정희가 제7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1969년6월, 대통령 박정희의 3선 출마를 위한 개헌 움직임이 진행되자 이를 반대하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시작되고,

1969년7월17일에는 '3선 개헌 반대투쟁 위원회'가 결성되었으나

1969년9월14일,새벽, 개헌안은  민주 공화당 소속 의원만이 모인 가운데 국회 제3별관에서

   변칙 통과되었고,

1969년10월17일, 국민 투표로 가결됨으로써 박정희는 다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고,
1971년4월27일,제7대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 방식은 국민이 직접 선거에 참여해 최다수 득표자를 당선인으로 선출하는 직접 선거

   방식을 채택하였다.


후보자는 민주공화당의 박정희,

신민당의 김대중,

국민당의 박기출,

자민당의 이종윤

정의당의 진복기 등 5명이 출마하였다.


선거인 명부에 등재된 유권자 수는

총 1555만 2236명으로,1241만 7824명(투표율 79.8%)이 투표에 참가하였다.

이 날의 대통령선거는  3선 개헌을 통해 출마한 박정희 후보와 당내 경선을 통해 뽑힌

김대중 후보의 대결로 국민의 관심이 모아졌다.

선거 결과

박정희 후보가 634만 2828표(득표율 53.2%)를 얻어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김대중 후보가 539만 5900표(득표율 45.2%)를 얻어 2위가 되었다.

진복기 후보가 12만 2914표를 얻어 3위,

박기출 후보가 4만 3753표를 얻어 4위,

이종윤 후보가 1만 7823표를 얻어  5위를 차지하였고

무효가 49만 4598표,

기권이 309만 2500표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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