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영도 봉래산~절영 해안 산책로      산행일시; 2008.03.20.목요일.맑음

 

부산직할시 영도구  청학1동에 자리잡은 394m의 봉래산은

절영진의 3대 첨사인 임익준이 산세가 마치 봉황이 날아드는 것 같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봉래산은 본래 도교에서 신선이 살고 있는 산으로, 중국 전설에 나타나는 삼신산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동쪽 바다의 가운데 있으며, 신선이 살고 불로초와 불사약이 있다고 한다.

봉래산이라는 이름은 신성함을 뜻해 여러 지역의 산 이름으로 사용되는데,금강산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 지명 변화 과정을 보면, 산의 형태가 고깔을 닮아서 고갈산 또는 꼬깔산으로 붙렀다고 전하지만,

한자명 표기는 목이 마른 산을 뜻하는 고갈산(枯渴山)이다.

이는 땅의 기를 없애고자 인위적으로 붙여진 지명으로 추정된다. 해방 이후에도 산 모양을 따서 붙은 지명으로

알아 고갈산으로 불렸다가,부정적 의미가 알려지면서 봉래산으로 개칭되었다.

고갈산이 봉래산으로 바뀐 시기는 확인되지 않으나, 1980년대 초반의 지형도에서는 고갈산의 지명을 확인할 수 있다.

부산 영도구 영선동 4가에 해안을 끼고 걷는 산책로인 절영 해안 산책로는

영도의 관문인 영도대교,부산대교를 지나 영선동 아랫 로타리에서 제2송도 바닷가쪽으로 500m정도 가면

봉래산 산행 들머리인 반도 보라 아파트가 나오며, 산책로 입구에 위치한 관리동 및 휴게시설이 산책객을 맞이하고 있다.

이곳은 과거에는 지형이 가파르고 험난한 군사 보호 구역으로 접근이 어려웠으나,

시민들의 해양 관광 욕구를 충족 시키기 위하여 공공 근로 사업으로 조성한 산책로로서,

대마도와 송도 방향 바다 풍경을 배경 삼아 연장 3㎞의 해안 산책로를 조성하였다.

바다가에 내려서면 자갈밭과 파도 소리,장승,돌탑,출렁다리,장미 터널,파도 광장,무지개 분수대 등

아기자기한 볼거리,즐길 거리가 많다.

산행코스는 반도 보라 아파트 103동 뒷편에서 시작해 철문-손봉-자봉-조봉(봉래산)-능선길-영선사

-절영 해안 산책로-중리 해녀촌에 종료하는 봉래산과 절영 해안 산책로 연계 산행은

산행시간; 중식포함 3시간30분(봉래산 산행-2시간30분,절영해안 산책로- 1시간으로 중식포함 하여

총 3시간30분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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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작성일자; 2008.03.18.화요일,맑음

 

황희

생졸; 1363(공민왕 12)∼1452(문종 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 장수(長水).

초명은 수로(壽老).

자; 구부(懼夫),

호; 방촌(厖村).

가계도;

황석부(黃石富)의 증손

조부; 황균비(黃均庇)

부; 자헌대부 판강릉대도호부사(資憲大夫判江陵大都護府使) 황군서(黃君瑞)

모; 김우(金祐)의 딸

출생; 개성 가조리(可助里).

 

1376년(우왕 2) ,음보로 복안궁녹사(福安宮錄事)가 되었다.

1383년, 사마시,

1385년 진사시에 각각 합격하였다.

1389년에는 문과에 급제한 뒤,

1390년(공양왕 2), 성균관학록에 제수되었다.

1392년, 고려가 망하자 일정 기간 은둔생활(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였다는 설화)

1394년(태조 3), 태조의 적극적인 출사(出仕) 요청을 수용하여 성균관학관에 제수되면서 세자우정자를 겸임하였다.

   이 후 직예문춘추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1398년, 문하부우습유 재직 중 언관으로서 사사로이 국사를 논의했다고 문책되어 경원 교수로 편출되었다가,

1398년(정종 즉위년), 우습유로 소환되었다.

이듬 해 언사로 파직되었다가 그 해 2월경 문하부우보궐에 복직되었다.

   그러나 또다시 언사로 파직되었으며, 곧 경기도 도사를 거쳐 형조·예조·이조·병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1401년(태종 1)경 ,지신사 박석명이 태종에게 천거해 도평의사사경력에 발탁되었다.

   그 뒤 병조의랑에 체직되었다가

1402년, 아버지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러나 그 해 겨울 군기를 관장하는 승추부의 인물난으로 기복되어 대호군 겸 승추부경력에 제수되었다.

1404년,우사간대부를 거쳐 승정원좌부대인에 오르고, 이듬 해박석명의 후임으로 승정원지신사에 발탁되었다.

1409년,참지의정부사가 되고, 형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대사헌 등을 지냈다.

1411년, 병조판서,

1413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이듬 해, 질병으로 사직했다가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다.

1415년, 이조판서 재직중 송사 처리와 관련해 육조에 문책이 내려지면서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 해 행랑도감제조에 복위된 데 이어, 참찬·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416년에는 세자인 양녕대군의 실행을 옹호하다가 다시금 파직되었다.

   그 뒤 조정으로 복귀해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평안도도순문사 겸 평양윤, 판한성부사를 역임하였다.

1418년, 세자 폐출의 불가함을 극간하다가 태종의 진노를 사서 교하로 유배되고, 곧 남원부에 이치(移置)되었다.

   세종의 치세가 시작되고 아울러 태종의 노여움이 풀리면서,

1422년(세종 4) ,남원에서 소환, 직첩과 과전을 환급받고 참찬으로 복직되었다.

1423년, 예조판서에 이어 기근이 만연된 강원도에 관찰사로 파견되어 구휼하였다.

   그리고 판우군도총제에 제수되면서 강원도관찰사를 계속 겸대하였다.

1424년, 찬성,

이듬해에는 대사헌을 겸대하였다.

또한 1426년에는 이조판서와 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발탁되면서 판병조사를 겸대하였다.

1427년, 좌의정 겸 판이조사가 되었고, 그 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그 뒤 기복되어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이어 평안도도체찰사로 파견되어 약산성기(藥山城基)를 답사하였다.

   이 때 약산이 요충지라 해서 영변대도호부를 설치한 뒤 평안도도절제사의 본영으로 삼게 하였다.

1430년, 좌의정으로서, 감목을 잘못해 국마 1,000여 필을 죽인 일로 해서 사헌부에 구금된 태석균의 일에 개입해

   선처를 건의하였다.

   그러나 일국의 대신이 치죄에 개입함은 부당할 뿐더러, 사헌부에 개입하는 관례를 남기게 되므로 엄히 다스려야

   한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래서 한때 파주 반구정(伴鷗亭)에 은거하였다.

1431년, 다시 복직되어 영의정부사에 오른 뒤

1449년,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하기까지 18년 동안 국정을 통리(統理)하였다.

   그리고 치사한 뒤에도 중대사의 경우 세종의 자문에 응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처럼 그는 왕을 보좌해 세종성세를 이룩하는 데 기여하였다.

   이로써 조선왕조를 통해 가장 명망 있는 재상으로 칭송되었다.

1452년(문종 2), 세종묘에 배향되었다.

리고 1455년(세조1) ,아들 수신(守身)이 좌익공신에 책록되면서 순충보조공신 남원부원군으로 추증되었다.

상주의 옥동서원과 장수의 창계서원에 제향되고, 파주의 반구정에 영정이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방촌집'이 있으며,

시호는 익성(翼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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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령대군(孝寧大君)        작성일자; 2007.03.18.목요일,맑음

 

효령대군

생졸;, 1396.01.06(음력1395.12.11)~1486.06.12(음력05.11)

이름; 초명은 호(祜)였는데 19세에 보(補)로 개명

호; 연강(蓮江)

가계도;

아버지; 태종의 둘째 아들

모; 원경왕후 민씨의 소생

세종대왕의 둘째 형 세조의 형이자 세조의 백부로 실의 원로였으며,

조선의 숭유 억불 정책으로부터 불교를 옹호,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세종대왕 즉위 후에도 문종,단종,세조,예종,성종 등 6대에 걸쳐서 장수를 누렸다.

임사홍은 그의 손녀 사위였고, 이량은 그의 5대손이며, 명종의 부인인 인순왕후와 심의겸,심충겸은 그의 외6대손이다.

 

1405년, 그는 10세 시절이던효령군에 책봉되었으며 

1407년, 12세에 해주 정씨 부인(정역의 딸)과를 가례를 치렀고 

1412년,17세에 효령대군에 진책되었다.

1417년, 자신의 아호이기도 한 연강(蓮江)이라는 법명으로 수계를 받았다.

 

그는 어릴적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30세 전에 이미 학문과 덕성을 이룩하였고 붓글씨에도 능해 명필이었다고 전해진다.

활쏘기에 능숙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왕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

그는 일찍부터 좌찬성 정역(鄭易)의 딸과 혼인하여 6남 1녀를 낳았으며, 서자녀로 1남 1녀를 두었다.

불교를 좋아하여 승도를 모아 불경을 강의하였다.

불교를 심오하게 믿어 조정의 숭유억불 정책하에서 불교 보호의 방패 역할을 감당하였다.

원각사 창건 때에는 조성도감 도제조를 맡았다.

이 때 주조되어 1985년까지 보신각에 달려 있던 큰종과 탑골공원의 10층 석탑은

그 제조기법이나 예술성이 뛰어났다는 평가를 받았다.

10층 석탑은 국보 제2호로, 원각사지 대종은 보물 제2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다.

'법화경','금강경,'원각경','반야심경','능엄경','선종영가집' 등 불경의 번역과 교정에도 힘썼고,

많은 사찰을 순회하면서 신도들을 온후하게 계도하였다.

그리고 향촌의 자치규약인 향헌 56조를 지어 백성들의 윤리 도덕심을 함양하였으며 ,

유불심법동일원(儒佛心法同一原)의 이념을 추구하였다.

 

1395년,음력12월1일에 태어나 91세의 천수를 다하고

1486년(성종 17, 丙午年)음력5월11일에 세상을 떠났다.

현재의 서울시 방배동에 예장되었다.

 

묘소는 1972년에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되었다.

현 사당은 1786년(영조 12)에 왕명으로 효령대군 묘 앞에 처음 세우면서 '청권사'라고 하였다.

슬하에 7남을 두었으며

1459년(세조 4) 정월, 여섯째 아들 원천군을 병사한 아우 성녕대군에게 출계시켜 대를 이어 제사를 봉향할 수

있도록 하였다.

생전에 손자 33인, 증손자 109인으로 후손이 번성하였다.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파종회 중에 자손이 가장 번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서울 특별시는 1984년11월7일 청권사 앞길을 '효령로'로 명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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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대군             작성일자; 2008.03.18.화요일,맑음

 

생졸, 1394년~1462.9.7

휘; 제(禔) 세종,효령대군,성녕대군  친형 

가계도;

아버지; 태종의 장자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  

처; 김한로의 딸인 수성군부인 김씨

자; 수성군부인 김씨 소생 3남 5녀를 두었으며, 첩에게서 7남 12녀를 낳았다.

 

1394년 정안군과 군부인 민씨(뒤의 원경왕후)의 장남으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1402년(태종 2년) 3월 8일 제(禔)란 이름을 받았고 4월18일에 원자(元子)로 책봉되었다.

 

어려서 학자인 계성군 이래(李來)의 문하에서 효령대군,충녕대군 등과 함께 수학하였으나

수업은 뒷전이고 참새나 바깥 풍경을 보며 다른 생각을 하였다 한다.

 

1404년(태종 4년) 왕세자에 책봉되고

1406년 명나라 사신으로 다녀왔다

1407(태종 7년) 입조하라는 명나라 성조(成祖) 영락제의  명을 받고

1407년9월25일,하진표사(賀進表使)로 명나라에 가게 되었다.

   완산부원군 이천우,단산부원군 이무,계성군 이래,제학 맹사성,총재 이현,서장관 집의 허주 등 백여명의 수행원을 데리고

   중국에 다녀왔다.

   영락제는 그에게 특별히 시를 지어서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

1409년 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부왕 태종과 마찰을 빚다가 유정현 등의 상소로 폐위되었다.

   그 뒤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 왕세자가 되었다.

   세자 폐위 이후에도 자유분방한 활동이 문제시 되어 여러 번 탄핵을 당하였으나

   세종의 각별한 배려로 처벌을 받은 적은 없었다.

 

평소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으나 작품들은 대부분 인멸되거나 실전되었다.

일설에는 왕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의 본심이었다는 설과 본심이 아니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다.

 

1407년(태종 7년) 14세에 김한로 딸과 혼인하였다.

   김한로는 권세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사위인 그가 폐위된 것을 전후하여 한때 유배당하기도 했다.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사망하고 태종은 외척 제거 목적으로 민무구 형제의 옥사를 계획한다.

   양녕은 이들 두 외삼촌이 억울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도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을까 겁을 먹고 외숙인 민무구

   형제가 태종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도 외면하였다.

1409년 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1410년 민무구,민무질의 옥사가 발생했다.

   이 일로 원경왕후는 병석에 누웠고, 친정에서 동생 민무휼과 민무회가 문병 차 대궐을 출입했다.

   이때 민무휼과 민무회 형제가 양녕대군을 찾아가 두 형의 억울함을 하소연을 했다.

   양녕대군은 어릴 때 외가에서 자라난 터라 이들과 가까이지내기도 했다.

   그러나 양녕은 두 외삼촌의 부탁을 딱 잘라 거절했다.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품성이 잘못되었다며 도리어

   외가를 비난했다.

양녕이 세자로 책봉된 뒤 대군 시절 스승이던 계성군 이래가 빈객 겸 세자의 스승으로 결정되어 왕자들을 가르쳤다.

이래는 고려말 신돈에게 저항하던 선비인 이존오의 아들로서, 그 아버지를 닮아 그만큼 강직한 선비였다.

양녕대군이 한참 거짓 미치광이 노릇을 궁리할 때 별감으로부터 계성군의 출입을 보고 받자 일부러 방석에 비스듬히

기대 앉아서,개 짖는 시늉을 하였다.

이래는 들어서자 이 괴상한 세자의 행동에 놀라 제지하고 양녕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양녕은 개의 소리를 짖어대며, 마치 물어뜯을 것처럼 뛰어다니다가 이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기도 했다.

이래가 다시 양녕의 어깨를 잡아 흔들자, 비로소 양녕은 처음 맞이하는 것처럼 대하였다.

이래는 밤 동안에 무척 초췌해 보이는 세자의 안색을 보고 개처럼 짖는 소리를 병으로 취급하였다.

그러나 양녕은 부인하였고 이래는 이후 태종에게 그 날에 있었던 일을 보고하였다.

그 뒤로도 이래는 세자의 언행을 낱낱이 임금 태종에게 아뢰었다.

세자는 이래 등 사부들이 와도 글을 배우려 하지 않고 다른 짓을 하였다.

동궁의 뜰 앞에 새덫을 해 놓고는 글을 배우다가도 새가 치이기만 하면 쏜살같이 달려나가곤 하였다.

또한 조정의 하례 때에는 머리가 아프니 배탈이 났느니 하고는,

동궁에서 혼자 새덫을 놓고 참새사냥을 즐기거나 드러누워 뒹굴면서 콧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품행이 자유분방하고 색을 밝혀 잦은 문제를 일으켰다.

유교적 교육과 엄격한 궁중생활, 특히 왕세자로서 지켜야 할 예의법도에 잘 적응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부왕인 태종은 물론 엄격한 규범적 생활을 강조하는 유학자들의 우려 대상이 되었고,

부왕은 세자로서 모범을 보이도록 타이르고 심지어 벌을 내리기도 하였다.

그가 궁으로 데려온 한 기생 출신 첩의 존재를 알게 되자 태종은 그 기녀를 사형에 처했다.

양녕대군은 부왕 태종 역시 여러 여인을 첩으로 거느리는 것을 언급하며 항의하다가 끌려나가기도 했다.

이후에도 양녕의 품행은 자제되지 않았고 이에 유정현 등이 상소를 하여, 세자에서 폐위시킬 것을 상주하였다.

이때 유일하게 그의 세자 폐위를 반대한 것은 이조판서 황희 등 소수였다.

 

1418년 그는 세자에서 폐위되고 양녕대군에 봉해졌으며 그 대신에 아우인 충녕대군(세종)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태종은 수차례에 걸쳐 여색을 금하고 인군으로서의 자질과 덕망을 쌓으라 하였으나

   오히려 그는 부왕 태종이 여색을 밝히고 후궁을 들이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가 들인 후궁을 태종이 내침으로서 부왕 태종과의 갈등이 계속되었다.

1417년,태종이 아무도 모르게 보관하라고 준 왕친록(王親錄)을 열어 봤다가 발각,

   이것이 소문으로 퍼지면서 부왕 불신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

   또한 전중추 곽선(郭旋)의 첩을 취한 사실도 밝혀졌다.

 

당시 조선에서 붓을 잘 만든다고 소문이 난 김호생이란 이가 있었다.

그는 사족 출신으로 붓을 만들었는데 호기심에 양녕은 김호생을 찾아가 그가 붓을 만드는 것을 보았고,

몰래 대궐에 들어와 세자에게 붓을 만들게 하였다.

그러나 어느 날 비밀리에 출입하던 중 내시에게 발각되어 도주하다 붙잡혀 어전에서 태종에게 심문을 받았다.

태종은 양녕이 몰래 시중의 잡것들을 불러들여 장난을 치는 등 체통없는 짓을 한다 하여 잡는 대로

혹 귀양 보내기도 하고 혹 죽이기도 했다는데, 김호생에게 붓을 만들게 한 뒤 그의 재능을 본 뒤 오히려 기특히 여기고

그에게 특별이 공조(工曹)로 보내 필장(筆匠)직을 내렸다.

어느날 밤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던 중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의 재질이 뛰어나나 셋째 아들이라 아쉽다고 대화하는 내용을 엿듣게 되었다.

원경왕후 역시 태종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부왕과 모후의 뜻이 양녕대군에게서 떠나 있다는 것을 간파한 효령대군은 열심히 공부하였다.

하루는 양녕대군이 술을 잔뜩 마시고 효령대군을 찾아갔다.

그는 효령에게 '공부해야 소용이 없다' 고 말했다.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으니 다른 마음을 먹지 말라고

하였다는 야사가 전해 온다.

이에 크게 낙심한 효령대군은 매일 북을 치는데,

여느 스님과 달리 팔에 힘이 들어가 북 가죽이 늘어질 정도로 세게 쳤다.

그래서 속담에 늙은이의 늘어진 뱃가죽을 효령 북이라 부르기도 한다. 결국 충격을 견디지 못한 효령대군은

모든 공부를 중단하고 출가, 합천 해인사로 들어갔다.

1418년(태종 18년),유정현 등이 세자 양녕을 탄핵하였다.

   이때 이미 사람들에게 신망을 잃은 양녕을 비호한 이는 황희 등 소수였다.

   양녕대군이 세자에서 폐위될 것을 예상하자 그의 동생 효령대군은 독서와 학문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생을 찾아가 세자 자리는 충녕에게 넘길것 같으니 헛된 꿈을 꾸지 말라고 충고하였다는 야사가 있다.

   부왕 태종이나 모후 원경왕후의 뜻이 모두 충녕에게 있음을 안 효령대군은 이후 불교에 전념하게 된다.

   김시양(金時讓)은 저서 자해필담(紫海筆談)에서 양녕대군의 폐세자 원인에 세가지 추론을 하였다.

 첫 번째로는,

     양녕과 아버지 태종의 관계에 대해서 그는 양녕대군이 세자로 있을 때

     태종의 뜻이 세종(충녕대군)에게 있는 것을 알고 일부러 미친 척하고 자리를 사양하니 태종이 곧 폐하여

     세종을 세웠다는 것이고,

두 번째로는,

   양녕대군과 동생 충녕대군의 관계에 대해서,

   양녕대군이 세자 자리에서 폐위된 뒤 한성에서 외지로 쫓겨나 경기도 이천군에서 귀양살이를 할 때

   세종대왕이 몰래 양녕대군을 불러 위로했다고 한다.

 

그가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음을 알게 된 것이 세자 책봉 직후라는 설과

세자 책봉 후 어느 날 우연히 듣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부왕의 침전으로 문안차 들어가던 중 그는 문 밖에서 부왕 태종과 모후 민씨의 대화를 비밀리에 엿듣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부왕 태종은 '충녕과 양녕이 바뀌어 태어났더라면,

장차 백성들이 요순의 다스림을 받아 태평성대에서 살게 될 것'이라며 한탄하였고

모후 민씨 역시 '충녕이 맏이었어야 할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그러나 조선실록에서는 이와 다르게 기록하고 있는데,

세자(양녕대군)의 계속된 비행으로 아버지 태종이 몇번 질책하자,

불만을 품고 태종에게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아버지(태종)은 모든 일을 마음대로 하시면서 왜 저만 못하게 하시느냐”하는 상소를 올려 태종을 비난했다.

이에 분노한 태종은 세자를 폐하여 천군으로 귀양보내고 동생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를 넘겨주었다고 한다.

그해 5월 결국 세자에서 폐위되고 만다.

다른 전승에 의하면

지난 날 부왕 태종과 방석, 방번, 그리고 방간 등 숙부들과의 골육상쟁을 떠올리며

최종적으로 충녕에게 양보하기로 결심했다는 전승도 전한다.

이후 출궁을 청하는 상소가 거듭되어 태종은 하는 수 없이 출궁을 명하였고, 경기도 광주의 사저로 내려갔다.

떠나는 양녕대군에게 여자 종 13인과 남자 종 10여 인을 데리고 가게 하였다.

또한 특별히 배려하여 그가 평소에 아끼고 사랑하였던 여인도 데려가게 하였고,

그 외에 일상 쓰던 여러 가지 가재도구도 다 가지고 가게 하였다.

그런데 다만 매와 활은 두고 가게 하였다고 한다.

태종은 모든 것을 양녕 대군이 살기에 부족함이 없게 하여 주도록 명령하였다.

대궐을 떠나던 날 양녕대군은 광나루 포구에서 "앞으로는 이 땅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겠구나!" 하며 한탄하고

눈물을 지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기도 한다.

광주의 사저로 나온 양녕대군에게 책이라고는 다만 논어와 대학 이외의 책은 금지시켰다.

그 뒤 그는 팔도 각지를 유랑하며 사대부, 풍류객, 기녀들과 사귀면서 일생을 마쳤다.

1418년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랐다.

동생 세종대왕은 이천군에 유배된 형 양녕대군을 석방하였다.

그러나 동생의 즉위 이후에도 사이는 좋았다고 한다.

세종의 즉위 뒤에도 여러 번 비행을 저질렀는데, 부왕 태종과 모후 원경왕후의 사후 비행의 강도가 더해졌다.

과거의 왕세자였고 현재 왕이 동생이라는 점 때문에, 일거일동이 세밀한 관찰과 감시의 대상이 되어 번번이 그것도

수십 차례에 걸쳐 언관들로부터 탄핵되었다.

특히 자신의 며느리까지 범하는등 인간 이하의 행위까지 서슴치 않았고 이에 충격을 받아 아들이 목을 매 자결할 정도였다.

이러한 그의 비행에 대해 신하들은 여러 번 탄핵하였으나 세종은 그를 배려해 벌하지 않았다.

그러다가,1453년에 계유정란이 일어나자 수양대군의 편을 들어 그를 독려했고,

심지어는 안평대군을 사사시키라고 간청까지 했다고 한다.

그리고 계유정난이 끝나자 단종을 죽이라고 간청까지 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은 동생 세종에 대한 보복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으며,

이에 대한 이유는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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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문경 대미산         산행일시; 2008.02.28.목요일.맑음

 

경북 문경시 문경읍, 동로면, 제천시 덕산면의 경계선에 있는 1,115m의 대미산(大美山) 은  

백두대간이 설악·오대·소백산을 지나서 죽령을 만들고 도솔봉(1,314m)을 지나 벌재를 만들고 다시 황장산(1,077m)을

일으키며 달려 이곳 대미산을 지나서 하늘재, 문경새재, 이화령을 두고 희양산, 속리산을 지나 멀리 백두대간이 발길을

지리산으로 돌리고 있는 곳에 아주 점잖게 편안하게 앉아 있는 대미산.

이름이 대미산이어서인지 참으로 아름다운 산인데,

멀리 소백산이 보이고 주흘·조령·백화·희양·속리산까지 보이는 시원한 전망이 전개된다.

 

 

 

 

경북 문경 대미산         산행일시; 2008.02.18.목요일.맑음

 

 

 

 경북 문경 대미산        산행일시; 2008.02.28.목요일맑음

 

 

 

 

 

경북 문경 대미산(大美山) 

해발; 1,115m 

위치; 경북 문경시 문경읍, 동로면, 제천시 덕산면

소개; 
   백두대간  제19구간인 대미산은
   설악·오대·소백산을 지나 도솔봉을 거처 벌재를 만들고 다시 황장일으키며 대미산을 지나서 하늘재,문경새재,
   이화령을 두고 희양산,속리산을 지나 백두대간지리산으로 돌리고 있는곳에 있는 대미산.
   주위산으로 멀리 소백산이 보이고 주흘,조령,백화,희양,속리산까지 조망된다.
산행일시; 2008.02.28.목요일.맑음
산행코스; 중평리 밖마을-부리기재(백두 대간)-대미산- 눈물샘-새목재-826.4봉-981봉-928봉-철탑-안생달 마을
산행시간; 중식포함  6시간
가는 길;
   대구 성서 홈플러스-신천대로-서대구IC-금호JC-구미-중부 고속도로-문경세재 IC-문경 온천 관광지-문경읍
   갈평 출장소-용흥 초교-여우목 고개 방향-중평리 중평 정류장(밖마을)            
   (네비; 경북 문경시 문경읍 중평리 301-1번지-146km, 1시간45분 소요, 통행료 5.900원)

 

이미지 보기

중평리 밖마을 입구에서 여우목 고개 가는 길 - 여기를 지나면 황장산과 경천호로 가는길이다.

    산행 들머리는 중평리 밖마을 입구 증평 버스 정퓨장에서 시작한다.

 

▽ 중평 주차장에서 중평리 밖마을로 개울의 다리를 지나 시멘트길을 따라 진입한다.

 

▽ 다리 가기 전 마을 좌측으로 가는 등산로가 보인다.

   중앙 하단 허술한 기와집(빨간 원) 앞을 지나 중앙의 계곡 방향으로 오르는 대미산 산행이다.

 

▽  빨간 원의 허름한 기와집 앞을 지나

 

 

▽ 뒤돌아 본 밖마을 전경이다.

 

▽ 시멘트길을 따라 가면 내리막길 아래 건물이 보인다.

    건물 속을 지나 개울길을 따라가면

 

▽ 계곡을 건너 오르막 산길로 접어든다.

 

 

▽ 뒤돌아 본 풍경

 

 

▽ 밖마을을 뒤로 하고 밭을 지나 산행을 하기 위해 골짜기로 들어간다.

 

▽ 뒤돌아 본 마을

 

상수도 지역이란 표시판이 있은 곳으로 산행이 시작되고...

 

 

  산행후 1시간 여 만에 눈으로 덮힌 임도(안부)에 올라선다.

 

 

▽ 눈 엎힌 경사진 산길을 따라 오르면

 

밖마을에서 산행 시작한지 1시간 20여분 만에 해발 879.1m의 부리기재에 도착했다.

     백두대간 등산로로  우측으로 대미산 정상( 1.2km)으로 가는 산길이며,

     좌측으로 포함산~하늘재( 12km) 로 가는 길이다.

 

▽ 부리기재를 지나  대미산으로 오르는 우측과 좌측으로 이어진 산비탈길을 만나 올라간다.

 

 

 ▽ 부리기재에서 대미산 중간 지점에서 뒤 돌아다 본 모습

 

 

 

 

 

▽ 뒤돌아 본 봉우리

 

 

 

▽ 커다란 나무와 바위 옆을 지나는 대미산으로 가는 등산로다.

 

 

 

 

 

 

 

 ▽ 대미산 정상에 도착한다.

 

 

▽ 정상에는 산정표가 마련되어있다.

 

▽ 정상에서 본 황장산(1,077.3m)의 모습

 

저멀리 희미하게 눈 덮힌 웅장한 산이 소백산 비로봉(1,439.5m)이라 한다.

 

 

 

 

 

▽ 하산은 정상에서 좌측으로 하산한다.

 

 하산하다 바라다 본 앞편 돼지등, 뒷편 왼쪽 운달산(1,097.2m),성주봉(911.9m)이 아스라히 보인다.

 

▽ 눈 덮힌 능선 하산길이다.

 

▽ 하산 중 바라다 본 월악산 영봉(1,097m)의 모습

 

 

 ▽ 대미산 정상에서 하산 중 만난 백두대간 눈물샘.

     여기서 부터 우측으로 70m 거리다.

 

 

  ▽ 해발 1.051.m의 새목재 삼거리 갈림길.

 

 

▽ 해발 1.051.m의 새목재 삼거리 갈림길에 걸린 산행회 리본들-많은 사람이 산행을 한다는 표시 이기도 하다

 

 

▽ 새목재 갈림길 모습

 

 

 

 

 

 

경기 평택 여산회 백두대간 구간 종주대 표시판

   백두대간 중간지점(734.65km); 천왕봉 367.325km -진부령 367.325km
 

▽ 차갓재 가기전 송전탑.

    여기에서 우측으로 하산하여  30여분 가면 안생달 마을로 내려선다.

 

 

 

▽ 안생달 마을이 보인다.

 

 

▽ 바위 사이를 지나면

 

하산길 에서 안생달 마을 가기 전 기이한 암석산

 

 

▽ 마을로 접어든다.

    안생달 마을과  '청정지역 문경의 맑은 물로 빚은 전통 약주 '라는 문구와 함께 한백주 양조장 전경

    대미산 산행은 안생달 마을에서 마무리 한다.

    안생달은 황장산 산행(후에 산행:2017.10.11.수요일,흐림)의 들머리이기도하다.

 

 

 

 

 

 

 

 

 

 

 

 

경남 거창 삼봉산             산행일시; 2008.2.19.화요일.맑음

 

 

                                                                         

                                                         

경남 거창 삼봉산         산행일시; 2008.02.19.화요일.맑음

 

 

 경남 거창군 고제면, 무주군 설천면에 위치한 해발 1.254m의 삼봉산(三峰山)은

3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삼봉산이라 부르며,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금봉암 주위에는

투구봉, 노적봉, 칼바위, 장군 바위, 신중봉, 부부봉, 신성봉,칠성봉, 장군수,마당바위 등 봉과 바위벽 등이 어울려 있다.

금봉암은 150여 전 해인사 여신도가 백일기도 끝에 점지받은 자리에 세운 암자로

금빛 찬란한 봉황이 기도처를 세 번 왕복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산행코스는 신풍령 휴계소에서-빼재-수정봉 -된새미기재-용머리바위-삼봉산-소사마을로 하산하는 코스로 

산행시간은 중식포함 4시간30분이면 산행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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